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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8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제1독서 : 로마 13,8-10
복 음 : 루카 14,25-33
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우선적인 것이 예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이자 방향이요,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인생 허무에 대한 유일한 답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뿐입니다.
‘주 예수와 바꿀 수는 없네’ 라는 성가 61장이 생각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는 없네
이 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도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의 크옵신 사랑이여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명예 다 버렸네
주 예수와 바꿀 수는 없네
세상 어떤 것과도.”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오늘 복음에 대한 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 모두 당신의 참 제자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철저한 자기포기와 위탁을, 추종을 요구합니다. 참으로 단호하고 엄중합니다.
말 그대로 실행할 수 없다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약화시켜선 안 됩니다.
오히려 제자로서의 내 삶을 부단히 점검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각 단락마다 앞에 나오는 말마디가 ‘누구든지’입니다.
예외 없이 예수님의 참제자가 되려면 꼭 명심하여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도전하며 응답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1.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구약성경의 히브리말에는 “더 사랑하다, 덜 사랑하다’와 같은 비교급이 없어 부득이 ‘미워하다’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보다 가족 누구도,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도 더 사랑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해야 가족은 물론 자신에 대한 집착 없는 순수한 사랑도 가능합니다.
세상과 사람 집착에 대한 유일한 해법은 예수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뿐입니다.
2.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외 없이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둘째 조건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이자 방향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할수록 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도 선물로 주어집니다.
3.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의 참 제자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셋째 조건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항구하고도 한결같은 사랑이 있어 이런 자발적 자기 소유 포기와 예수님 추종입니다.
값싼 은총도 없듯이 값싼 예수 추종의 길도 없음을 봅니다. 이처럼 버림과 따름은 한 셋트를 이룹니다.
끊임없이 사랑으로 버리고 비워 자유로이 주님을 따라야 주님의 참 제자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가족에 대한 집착 없는 순수한 사랑을 가능하게 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항구히 주님을 따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말 그대로 무소유의 삶은 어려워도 무욕과 이탈의 정신으로 살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따를 때 비로소 세상 모든 것으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세상 무엇도 그를 매지 못하며 유혹하지도 못합니다. 사랑과 자유는 하나로 연결됩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때 진정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자유가 궁극 목표일까요?
아닙니다, 이웃사랑에의 투신이 궁극목표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로마서가 복음에 대한 답을 줍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아무리 갚아도 사랑의 빚은 여전합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사랑엔 영원한 초보자, 사랑의 빚쟁이입니다.
도저히 사랑의 빚에서 벗어날 길 없습니다. 이런 자각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부단히 사랑에 투신하게 합니다.
바로 이런 이웃 사랑에 쓰라고 예수님 사랑의 추종으로 선물로 주어진 자유입니다.
예수님 사랑은 자연스럽게 이웃사랑과 하나로 연결됩니다. 구별할 수 있을 지언정 분리할 수 없는 두 사랑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우선순위는 예수님 사랑에 이어 이웃사랑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 말씀하시며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웃사랑에 관한 모든 계명들은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하면 저절로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끝없는 사랑, 멈출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은 모두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영원히 해도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요, 하여 우리는 영원히 사랑의 빚쟁이 일 수 뿐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앞서 예수님의 한량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예수님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오늘 강론을 요약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사랑의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한 주님과 사랑의 일치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참 제자가 되어 당신과 이웃사랑 실천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 여러분이 생각하지 않았던 돈 5만원이 생긴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어떤 것을 해야 할지 잘 떠올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5만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길을 걷다가 주머니에서 흘렸는지 없어진 것입니다.
잃어버린 5만원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 5만원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떠올려지게 됩니다.
맛있는 것 사 먹는 건데... 저녁 시간에 맛있는 치맥을 즐길 수도 있는데....
잃어버릴 줄 알았으면 어려운 사람을 도와나 줄걸...
가지고 있을 때에는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신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렸을 때에 비로소 할 수 있는 것들이 생각나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후회를 갖게 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인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의 삶 전체에서 이러한 일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다른 이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정말로 가진 것이 없을까요? 지금 있는 자리의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꽤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재산이나 명예가 있습니다.
자신의 건강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주변에 있는 가족과 친구 등도 떠올려 보십시오. 이 역시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 역시 내가 가지고 있는 한 가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가지고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렇다면 가지고 있는 것들을 통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솔직히 그냥 가지고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삶의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많다고 하지요.
할 수 있었던 것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 쓰지 못했는데 가지고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지고 있는 것들을 통해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면서 이 세상에 남길 후회들을 줄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는 이 세상 안에서의 죽음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주님께 대한 사랑에 방해가 된다면
이 세상 안에서의 인연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까지도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나만을 위한 이기심을 통해서는
결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으며 이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안에 살면서 욕심과 이기심을 없앨 수 있는 불굴의 의지와 흔들리지 않는 열성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역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주님의 뜻을 먼저 세우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일들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후회할 일이 아닌, 후회하지 않을 일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난 주일에는 삼각지 성당을 방문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피정을 가셨고, 성소후원회가 새로이 조직되어서 방문을 하였습니다. 새벽미사와 교중미사를 함께하였습니다.
교구에서는 사제들만 미사를 하는데, 모처럼 본당에서 신자 분들과 함께 미사를 하니 새로운 느낌이었습니다.
역시 사제들은 신자 분들과 함께 미사를 해야 좋은 것 같습니다.
삼각지 성당은 교회와 출입로를 함께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성당과 교회가 이웃하면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보기에 좋았습니다.
오랜 시간 같은 출입구를 사용하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은 것 같았습니다.
‘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것’이라는 말을 실천하는 것 같았습니다.
대림시기가 다가오면서 ‘특강’을 가게 될 경우가 있습니다.
‘부평4동 성당, 복자 성당, 신당동 성당, 명동 성당’에서 특강을 하기로 했습니다.
부족한 저를 불러주심에 감사하기도 하면서, 부탁을 받으면 거절하지 못하는 저의 성격 때문에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회개하는 삶, 회개한 것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삶,
나의 뜻대로 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의 삶에 함께 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려고 합니다.
저를 믿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저 역시도 이웃들을 기다려주고, 함께 하려고 합니다.
요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참된 삶의 자세를 이야기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무엇보다 겸손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중요한 것 보다는 소중한 것을 먼저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의 것들 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로 희생과 아픔이 있어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날 수 없어도, 비판과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참된 진실과 정의를 위해서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신앙인들도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제자들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권한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었고, 기적을 행하였으며,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신앙은 은총을 받는 것이지만, 신앙은 받은 은총을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신앙은 나와 나의 가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는 한 형제요 자매라는 연대의식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의 십자가는 타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위령성월’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우리들 또한 언젠가 주님의 품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라야 하겠습니다.
참 제자됨의 길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길을 알려주십니다. 먼저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26)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자기 목숨보다 더 좋아하고, 자기 목숨을 예수님보다 하찮게 여겨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분을 따르는 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을 첫 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며 그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둘 뿐 아니라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을 만큼 사랑해야겠습니다.
다음으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27) 하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죄와 악의 경향에 저항하는 싸움, 곧 영의 정신과 육의 정신의 헷갈림을 체험합니다.
이런 실존적 현실과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 상처 등이 바로 우리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고통을 의미 있는 것으로,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겠지요.
삶의 십자가를 받아들여 그 의미를 찾는 순간 우리는 한층 더 성숙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을 받아들인다고 고통의 상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거기에 평화의 자리가 마련되어 쉴 수 있으며 희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고통과 연약함을 끌어안고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내가 처해 있는 현실과 나의 모습, 바로 그 상태에서 사랑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 고통, 절망, 병고, 암담한 생활고 등을 품고 당신께로 오라고 손짓하십니다.
당신께로 다가가기만 하면 함께 아파하고 그 짐을 함께 져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끝으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33)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하느님의 뜻과 무관하고 사랑 실천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을 버려야겠지요.
버려야 할 것이 어디 재물뿐일까요?
‘자신의 뜻’이나 사람, 명예나 자존심, 고집과 독선, 선입견과 편견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재물 뿐 아니라
자신의 자연적 성향들, 인간적 욕망들, 가치에 대한 강인한 충동, 명예욕, 탐욕, 이기심, 자애심 등도 버려야 합니다.
소유와 애착의 탯줄을 끊어버리고, 추측, 감정과 편견의 탯줄을 끊어버릴 때,
영의 눈으로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들을 순수하게 보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인준받지 않은 수도규칙 23,9)
우리도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첫 자리에 두고 삶의 중심으로 삼고,
삶의 십자가를 사랑이신 주님과 더불어 기꺼이 감당하며,
온갖 애착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따라가는 행복한 제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거운 삶의 십자가 앞에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한 기도 모임을 주재하러 갔다가, 모임에 참석하신 형제자매님들의 얼굴을 천천히 둘러본 적이 있습니다.
표정들을 살펴보니 참으로 안쓰러운 마음을 감출 길 없었습니다.
다들 지고 계신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무척이나 힘겨운 모습들이었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십자가들이 있습니다.
백번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사건, 난 데 없이 다가온 정말 원치 않은 불행,
도무지 수용하기 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런 십자가 앞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긍정적 수용과 하느님을 향한 깊은 뿌리 내리기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왕 다가온 십자가 너그럽고 기쁜 마음으로 지고 가는 것이 정답입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복음 14장 27절)
교회 역사 안에 영성의 대가들 가운데 특별한 분들이 계셨습니다.
어떤 성인들은 일부러 고통을 찾고 십자가를 짊어지기도 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 같은 경우 자신의 부족함과 죄에 대해 얼마나 죄책감이 들었으면,
하루해가 저물 때 마다 참회의 표시로, 주먹만한 돌맹이로 자신의 가슴을 내리쳤답니다.
돈보스코의 제자 도미니코 사비오 성인 같은 경우도 어린 시절부터
예수님의 수난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고행을 많이 했습니다.
잠자리에서조차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기 위해, 침대요 밑에다가 돌맹이들을 깔고 잤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돈보스코는 사비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비오야, 성인이 되기 위한 다른 좋은 길도 많은데, 왜 하필 그리 고통스런 방법을 선택하느냐?”
그러면서 아주 쉬운 성인이 되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고통 속에서도 항상 기쁘게 지낼 것. 매일의 작은 의무에 최선을 다할 것.
교회 안의 성사들, 특히 성체성사와 고백성사에 충실할 것.
돈보스코의 조언을 들은 사비오는 성화의 방식을 바꾼 다음, 아주 쉽게 성덕의 정상에 올랐습니다.
현대 영성 안에서는 더 이상 사서 고생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수시로 다가오는 고통과 십자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열심히 매일 운동하고, 올바른 식습관으로 식사하고, 근심걱정 물리치고,
그래서 건강하게 이 세상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 대신 이 세상 살아가다보면, 나이를 조금씩 먹어 가다보면, 하나, 둘, 원치 않은 십자가들이 찾아옵니다.
그 순간은 드디어 평소 쌓아온 실력을 발휘할 때입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십자가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때입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십자가를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영적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하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영성의 핵심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