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남을 고발한 임병찬은 누구인가?
청주성 싸움에서 패한 김개남 부대는 이후 진잠, 연산을 거쳐 남하하였다.『오하기문』에는 “11월 17일에는 공주전투에서 패하고 후퇴하던 전봉준 부대와 연합, 강경에서 정부군과 싸웠으나 또 패배하여 김개남은 전봉준과 더불어 전주 방면으로 물러났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전봉준과는 만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개남의 부대는 11월 16일에는 진안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고 18일에는 고산에서 접전을 벌였다.
원평전투에서 크게 진뒤 뒤이어 마지막 싸움터 태인에서 패배한 전봉준은 동학군을 공식적으로 해산한 뒤 입암산을 거쳐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로 갔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서 그를 따르던 세력들을 해산했는지 조차 알려지지 않은 김개남은 회문산 종송리의 매부 서영기의 집으로 몸을 숨긴다. 그때 아랫마을에 살고있던 임병찬林炳贊에게(후일 면암 최익현과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김개남은 구원을 요청했고 임병찬은 “자네가 숨어있는 곳보다 이곳이 안전할테니 우리 집으로 오라”고 안심을 시킨 후 전주 감영에 그 사실을 알렸다. 전라감사 이도재李道宰는 강화도수비병의 중군인 황헌주와 포교를 보냈다. 황헌주가 거느린 관군들이 김개남이 숨어있는 집을 포위하고 “어서 나와 포승줄을 받아라” 소리치자 그는 측간에서 대변을 보고 있다가 껄껄껄 웃으며 “내 올 줄 알았다. 똥이나 다 누고 가겠다”라고 말한 후 붙잡혔다. 12월 1일 새벽 김개남이 붙잡힌 바로 그 다음 날인 12월 2일 전봉준 또한 부하접주였던 김경천의 고발로 붙잡히고 만다. 전봉준과 김개남이 붙잡힌 지점이 8km쯤밖에 되지 않으므로 그들이 재기를 위해 만남을 준비하던 중 붙잡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어두운 시대에 태어나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김개남은 그렇게 잡혔다. 그가 잡혀 전주 감영에 끌려갈 때 백성들은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 군사 어디다 두고 짚둥아리가 웬 말이냐”라는 참요를 불러 그가 붙잡혀 가는 것을 애달파 했다고 한다.
전라감사 이도재는 김개남을 전주로 압송한 뒤, 아직 농민군이 곳곳에 둔취해 있어 중도에 빼앗길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12월 3일 전주 서교장全州 西敎場에서 김개남을 즉결처형 시켰다. 김개남이 붙잡혀 처형받기까지의 과정을 황현은『오하기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심영沁營의 중군 황헌주黃憲周가 개남을 포박하여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 이도재가 개남을 신문하였다. 개남은 큰소리로 ‘우리들이 한 일은 모두 대원군의 은밀한 지시에 의한 것이다. 지금 일이 실패한 것은 또한 하늘의 뜻을 뿐인데 어찌 국문한다고 야단이냐’고 하였다. 도재는 마침내 난을 불러오게 될까 두려워 감히 묶어서 서울로 보내지 못하고 즉시 목을 베어 죽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냈는데 큰 동이에 가득하여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투어 내장을 씹었고, 그의 고기를 나누어 제사를 지냈으며 그의 머리를 상자에 넣어서 대궐로 보냈다.
개남은 미친 듯한 행동과 포악하고 잔인함은 여러 적들 가운데 가장 심하여 사람들은 마치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였다.”
김개남을 전격적으로 즉결처분한 것은 김개남에게 당한 보수 기득권 세력의 거센 압력 때문이기도 했다.
서울로 보내진 김개남의 머리는 서소문밖에 여러 날 동안 효시된 뒤, 다시 전주로 보내져 재차 효시되었다.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 동학의 주모자들을 가급적으로 생포하여 심문하고자 했던 일본측 관계자는 해당 지방관이 왜 김개남을 죽였는지 그리고 누구의 명령으로 죽였는지 밝혀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도재는 “중도에 탈취당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고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무렵 조선을 방문했던 영국 왕실 국립지리학자였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한국과 이웃나라들』이라는 저서에서 김개남과 성제식의 최후를 이렇게 적고 있다.
“외세에 좌지우지되고 있는 임금과의 충성 관계를 공손하게 끊고, 그와 다른 주권을 약속했던 동학東學은 1월 초 전멸하여 교주의 머리가 충성스러운 관리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었다. 나는 그것을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서 가장 부산한 거리인 서소문 밖의 어느 시장 거리에서 보았다. 마치 야영장에서 쓰는 주전자대처럼 나뭇기둥 세 개로 얼기설기- 받쳐놓은 구조물에, 다른 사람의 머리 하나가 그 아래로 늘어뜨려져 매달려 있었다. 그 두 얼굴 모두 고요하고 엄숙해 보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도 같은 구조물들이 많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들이 무게를 지탱할 수가 없어 무너지게 되면 먼지 수북한 길바닥에 그냥 나뒹굴도록 내버려져 개들이 몰려와 물어뜯기에 안성맞춤이 되었다. 그곳에 고장난 회중시계가 떨어져 있었는데 어린아이들이 그것을 조각조각 분해하여 개에게 물어뜯긴 시체의 입 속에 장난으로 처넣었다. 이런 끔찍한 광경이 1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비숍여사는 그 뒤 그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학군은 너무나 확고하고 이성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그들의 지도자들을 ‘반란자들’이라기보다 차라리 ‘무장한 개혁자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백년 후에 만들어진 김개남길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김개남이 서울과 전주에서 두 번씩이나 효시되었을 때 그것을 지켜본 수많은 민중들의 가슴속에는 뜨거운 눈물과 함께 회한이 스쳐갔으리라.“
신정일의 <한국사 변혁을 꿈꾼 사람들>에서
그때 김개남을 고발했던 임병찬은 그 뒤 면암 최익현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로 유배형을 받았었다.
나라 사랑하는 방법이 달라서 친구를 고발했던 임병찬은 애국자로 칭송을 받았고, 역적으로 고발당한 김개남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지금은 어떤가, 임병찬은 군산의 인물로 동상으로 남아 있고, 전봉준은 나라 곳곳에 여려 개의 동상으로 남아 있지만, 김개남은 덕진공원에 추모비 하나, 그리고 고향 정읍에 가묘가 만들어졌을 뿐이다.
세월 속에 역사의 강은 흐르고 흐르는데, 변하는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또 무엇인가?
비내리는 군산에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던 하루가 이제 또 역사가 되었는데,
2021년 9월 30일 목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