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에 들어있는 [에스더]기는 고대중동의 한 시기.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크세르크세스왕은 영화 300으로 유명한 '나는 관대하다'라고 자신을 설명하던 바로 그 페르시아 왕입니다.
(이 영화의 이 복장은 고증 무시한 건 다들 아실 테고..^^)
실제 자신의 정복민들의 관습이나 습속.종교등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취한 정책등을 보면 그의 관대함에 대한 영화 속 자기소개는 어느정도 사실일 겁니다.
이 크세르크세스왕의 관대함이 어느정도였는지를 당시 살았던 사람처럼 확인할 수야 없겠으나 유대문학의 중심. 구약성경은 이 시절에 대해 믿기힘들 정도의 관대함을 주장합니다. 이 크세르크세스 왕이 유대인 왕비를 구해 결혼하고 그 유대인 왕비의 유대족속을 지키기 위해 자국민 페르시아 민 7만명을 죽게 한다는 설명까지 하고 있으니까요. 이게 구약성경 내의 에스더기의 내용입니다.
유대소녀여왕 에스더는 페르시아 왕궁 내에서 벌어진 유대학살 흉계를 폭로하고 그런 흉계를 꾸민 페르시아 대신 하만을 격노한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가 사형에 처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유도하여 내린 유대학살 명령에 대해 그에 대한 대항명령을 내리도록 하여 유대족을 죽이라는 왕명을 실행하려는 페르시아내 사람들에 대항한 유대인들에 의해 7만의 페르시아민이 죽게 한다는 민족 대승리의 유대인여왕으로 구약성경에 설명 됩니다.
'왕후 에스더'는 이처럼 정치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움직여 민족을 수호한 지혜로운 자의 이름으로 남아 현재 한국의 기독교내의 몇몇 '민간 단체'나 '여성단체'의 이름으로 종종 눈에 띕니다.
유대민족주의의 드라마틱한 고대의 사건으로 들어있는 이 내용은 그 서술내용이나 시기.그리고 터무니없는 결과때문에 실제 사건인지 의심받은 역사가 꽤 됩니다. 과연 스파르타와 아테네등 그리스국가들과 싸우던 그 크세르크세스왕은 그 시기 왕비를 갈아치우며 자국민 학살상황을 자아냈는가?
이는 후대에 페르시아여행을 온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서 꽤 많은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헤로도토스의 [히스토리아]와 현재까지의 [유대백과사전] 에서 공식적으로 밝히는 상황들은 성경기록과 다릅니다 .
www.jewishencyclopedia.com/articles/5872-esther#anchor7
(해당문제에 대한 유대백과사전의 링크 입니다.)
크세르크세스의 왕비는 유대인은 커녕 페르시아 군벌출신의 아메스트리스-후타오사였고 그녀는 악독한 행위들로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남았습니다. 에스더서에 페르시아 전역에 유대들이 살고 있다는 부분은 크세르크세스왕 시대에는 맞지않는 설명입니다. 이는 좀 더 후기로 가야 실제 디아스포라상황에 이르게 된 유대들에 맞는 설명입니다. 크세르크세스의 기원전 5세기가 아닌, 기원전 3세기쯤에 맞는 이야기죠.
후타오사라는 실존인물의 이름을 유대처녀 하닷사(에스더)로 바꾸어 '역사문학'으로 창작하여 넣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후타오사 . 아메스트리스는 페르시아 군벌의 딸로 크세르크세스왕의 왕비로 간택되어 크세르크세스의 사후까지도 그 아들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에스더는 이슈타르(아스다롯)여신의 이름을 반영할지도 모른다는 점은 당시 바빌론/페르시아의 종교와 정치적 상황을 설명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현재 유적처럼 전해지는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무덤은 진짜 그들의 무덤이 아닌,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에스더서의 사건은 크세르크세스 제위 3년- 12년에 이르는 기간 내의 사건입니다.
단순히 제위3년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 때라면 기원전 483-2년 즈음일 텐데 이집트와 비빌론의 반란을 진압한 직후이며 또는 바빌론후기반란 진압중이거나 또한 한참 그리스와의 전쟁준비 때겠죠. 이 때 180일의 연회를 열 것인가 하는 문제 자체도 의문입니다.
게다가 에스더의 간택은 그의 제위 7년이라는 때에 있게 되는데 이 때는 그리스와의 전쟁 특히 살라미스 해전중이나 , 그 후 플라테아, 미칼레 전투 직후의 상황입니다.
즉 그리스와의 대전 전,중,후의 사건이라 보기엔 더더욱 어색합니다. 허구라 봐야겠죠.
크세르크세스의 즉위를 공동정치논리로 10년쯤 앞당겨 설명하는 주장도 있는데(여호와의 증인) 이렇게 시기를 앞당겨서 이 그리스 국가들과의 전쟁기간등등을 피하게 됩니다만,
이는 크세르크세스가 바빌론왕으로 임명된 건을 과장하는 논리로 보입니다. 크세르크세스를 위해 다리우스 1세는 바빌론궁전을 지어주었으나.. 에스더기의 무대가 이 바빌론 궁이 아닌 수산궁전인 점 하나로 이 논리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다리우스 1세가 죽은 후 수산궁에서 즉위한 후의 크세르크세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틀림없이 에스더기는 크세르크세스가 정식으로 즉위한 후를 상정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위에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주구장창 나오는 크세르크세스의 왕비였던 아메스트리스 (후타오사)에 대해 잠간 말씀드렸는데..
헤로도토스가 역사기행을 하던 때는 기원전 450년경. 그러니까 '에스더간택' 의 기원전 480년으로부터 30년 후입니다.
에스더가 실존했다면 생존했을 수도 있을 시기죠.
실존했거나 사망한지 얼마 안 됐을 크세르크세스의 초미녀 유대여인 왕비 '에스더'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던 헤로도토스의 기록이 무엇을 시사할 수 있는가는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그의 기록에서 평생 왕비였고 또 아들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즉위시에도 살아있던 후타오사(아메스트리스)의 기록은 매우 상세합니다.
크세르크세스가 사랑하여 그녀의 동족이 자신의 페르시아민들을 7만이상 죽게 했다는 그 '왕녀 에스더' 는 그후 몇십년 뒤 페르시아를 찾은 헤로도토스에겐 그냥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실제 역사적 사실이 무엇이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댓글 에스더~ 많은 자매들이 칭송하고 이상화하는 여인이죠 저도 예전엔.. 이제는 소설이라고 생각해요ㅜ
"죽으면 죽으리이다" 이 비장한 에스더의 대사 한마디가 에스더가 쓰여진 당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종교적)신념가들의 가슴을 울리는 동시에.. 뭐랄까.
보신대로 당시 유수기(바빌론에 속박당함)와 해방기 그리고 헬라핍박기를 지나는 유대민족의 여성의 투쟁의식이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상당히 효과적인, 정신교재로 쓰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로마시대라 해도 왕권에 우선 복종하며 그 룰대로 움직이는 에스더의 이야기는 제국의 통치에 나쁘지 않은 내용인 듯 하고요.
여증의 세속에 대한 투쟁의식 고취에도 물론 좋은 교재였죠....
@슈만 맞아요 "죽으면 죽으리이다" 가녀린 여인의 비장미 넘치는 그 대사가 저와 열혈자매들의 충절심을 한껏 고조시켜주었어요^^
진실인줄로만 알앗던,, 몽매시절이 잇엇답니다,,
잘 읽었습니다. 좋습니다.
허락하신다면, 도서관 자료로 활용해도 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