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사는 김제에서 서북방 약 27km 지점에 있으며
새만금 동서도로를 따라 2~30여 분 달리다 보면 심포 어항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서 1km 전방에서 오른쪽 언덕바지 진봉산 능선 따라 올라가
고개 너머 왼쪽으로 큰길에서 약 500m 지점 정도를 내려가면
서해의 파도가 출렁이고 고군산열도가 내다보이는 곳에 있다.
전하는 바로는 이곳은 본시 섬이었다고 한다.
망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로 창건 내력은 이설이 있다.
사찰 안내서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11년 671년 부설거사가 창건하고
그 후 중국 당(唐)나라 승 중도가 중창(重創)했으나 절터가 무너져 바다에 잠겨졌다고 한다.
다른 기록으로는 백제 의자왕 2년 642에 부설거사가 창건하고
경덕왕 13년 754년에 당(唐)나라 스님인 중도법사(일명 통장화상)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이는 부설거사의 생몰(生沒)연대가 미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뒤 1073년(문종 27) 심월(心月)스님이,1371년(공민왕 20) 지각(智覺)스님이
중창한 이후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조선 선조 22년 1589년에
진묵조사가 낙서전을 짓고 불당을 모셨다고 하며1624년(인조 2)
다시 낙서전을 증축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을 보아 1589년 이전에 망해사는 폐사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1624년(인조 2) 조사 진묵(震默)이 중창한 후 이곳에 머물면서
많은 이적을 남겼는데그 일화들이 오늘날까지 널리 전승되고 있다.
그 뒤 승려 관준(寬俊, 1850∼1919)이 다시 중창하고 수도하였으며,
1915년 계산(桂山)이 중창하였다.
1933년 주지 김정희(金整禧)가 본전을 중수하고 보광명전(普光明殿)과 칠성각 등을 신축하였다.
1977년 남파(南坡)가 요사와 망해대(望海臺)를 새로 짓고
보광명전·낙서전·칠성각 등을 복원 중수하였다.
1984년에 보광명전과 칠성각을 헐고 그 자리에 대웅전(현 극락전)을 새로 지었다.
1986년에는 낙서전을 해체 복원하였으며 1989년에는 종각을 새로 지었고,
1991년에는 대웅전(현 극락전)을 중수하였으며
1989년에는 요사인 청조헌(聽潮軒)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이 서해의 섬들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서해의 일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경승지이므로 망해사라 하였다고 한다.
최근에 배롱나무까지 심어 경관을 더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을 비롯하여 삼성각,요사채로 사용되는 청조헌(聽潮軒),
낙서전(樂西殿) 등이 있으며, 유물로는 4기의 석비가 있다.(자료출처: 다음 백과)
<부설거사>거사불교(居士佛敎)의 효시(嚆矢)를 말한다면
인도의 유마거사가 단연 으뜸이고, 중국의 방거사도 널리 회자하는 거사다.
우리나라에서는 윤필거사와 부설거사를 꼽지만,
윤필거사는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와 함께 관악산 삼막사에서 함께 수행한 분으로
야사에만 전할 뿐 역사서에는 기록이 없다.
@부설거사는 삼국시대 김제에서 활동한 승려로성은 진(陳)씨,
속명(俗名)은 광세(光世). 자는 의상(宜祥)이다.부설(浮雪)은 그의 법명이다.
부설은 그 후 도반인 영희(靈熙)·영조(靈照)와 함께 지리산과 천관산(天冠山)·능가산(楞伽山)
두류산 등에서 10여 년을 수행한 후에 문수도량(文殊道場)을 순례하기 위하여
오대산으로 가던 중,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에 이르러
구무원(仇無寃)이라는 불교신자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당시 구무원에게는나이 20세의 묘화(妙花)라는 무남독녀가 있었는데 말을 못 하는 벙어리였다.
이러한 묘화가 부설을 보더니 갑자기 말문이 터져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하여 묘화부인과 부부의 인연을 짓게 되었다고 전한다.(본방 변산 월명암 참조)
부설거사와 묘화 부인은 15년을 단란하게 살면서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장성하자 부인에게 맡기고
초심으로 돌아가 백강 변에 초가를 짓고 참선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곳이 지금의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있는 망해사(望海寺)이다.
이 망해사를 비롯하여 부설거사가 지었다는 4개의 사찰이 있다.
딸 월명(月明)의 이름을 딴 변산 월명암,아들 등운(登雲)의 이름을 딴 계룡산 등운암,
그리고 문경 사불산 대승사 암자인 묘적암(妙寂庵)이 있다.
위 4개의 사찰 모두 근세에 중건된 것으로 세계불교 3대 거사로 칭송되는
부설거사의 본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으니 그의 시 사허부구게(四虛浮漚偈) 처럼
세월의 무상함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부설거사에 관련한 본방 계룡산 등운암, 한국거사불교의 효시 부설거사 이야기 참조)
입구 좌측에 4기의 부도가 있다. 좌측으로부터 만화당(萬花堂: 1850~1910),
심월당(心月堂),청심당(淸心堂), 덕유당(德有堂)의 부도라 하는데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고 다만조성 시기는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 때로 추측된다.
요사채
망해사의 요사채인 이 건물은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하나는 파도 소리를 듣는 정자라는 뜻으로 <청조헌(聽潮軒)>이고,
다른 하나는 바다를 바라보는 가람이라는 뜻으로 <망해사(望海寺)>이다.
수각 위에 삼성각이 조성되어 있는데
삼성각은 문이 닫혀 있어 법당을 참배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