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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동경대전 원문
팔절八節
대강大綱
많은 사람들이 이 “팔절”이 쓰여지게 된 정황이나 그 사태의 소이연을 모르고, 이것이 동학의 교리의 핵심을 요약한 무슨 금과옥조인 양, 동학수행의 핵심적 길잡이니 뭐니 운운하는데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요. 무책임한 해설이다.
그리고 “전팔절,” “후팔절” 이니 하는 후대 천도교경전의 제명도 잘못된 것이다. 『동경대전』 역대판본에 쓰여진 대로 “팔절,” “우팔절又八節”이라 이름하는 것이 옳다. 이 팔절은 조건절과 주절로 이루어져 있다. 조건절은
모두 "..... 을 알지 못하기든” 으로 되어, "if …… ” 조건절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조건절 안에 명明, 덕德, 명命, 도道, 성誠, 경敬, 외畏, 심心이라는 8개의 개념이 들어가 있다.
이것은 수운이 자기사상을 요약한, 그런 거창한 테마가 아니고, 단지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재미있는 과제로서 내어준 것이다.
수운이 내어준 팔절八節이라 하는 것은 “부지不知"로 시작되는 8개의 조건절을 의미한다. 그 다음에 연이어 나오는 8개의 주절은 단지 수운이 본보기로서 제시한 것일 뿐이며, 그 본보기처럼 제자들 스스로 지어보라는 것이지, 무슨 정답이 있거나 특별한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수운으로부터 제자들에게 나간 팔절은 8개의 동일한 조건절일 뿐이다.
도원기서』에는 이와같이 쓰여져 있다.
至十一月, 作不然其然, 又作八節句。輪示於各處, 各作八節句,
理合爲此文之旨, 封送丈席云。
1863년 11월에 이르러, 「불연기연을 지으시고, 또 「팔절구를 지으시었다.
그 팔절구(조건절)를 도중 각 처에 보내시면서 제각기 도인들로 하여금 팔절구(주절)를 짓게 하시었다. 그리고 이치가 이 조건절이 제시한 취지에 합당하면, 그것을 봉하여 선생님께로 "장석席”이란 선생님이 앉아계신 용담을 의미한다) 보내오라고 말씀하시었다.
(이 대목에 관한 기존의 번역은 전혀 그 자세한 내막을 전하지 않는다).
이렇게 설명한 후에 “기시왈其詩日” 하고서, 8개의 조건절만 수록하여 놓았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 「팔절」은 수운 선생이 자신의 유언과도 같은 철학사상인 대논문 「불연기연」을 완성할 즈음, 때마침 생신잔치에 많은 동지들이 왔다가 갈즈음에 수운은 기발한 생각을 했다. 여덟 개의 조건절을 모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고 거기에 맞추어 자기 생각을 펼쳐보라고, 그러니까 그는 점점 긴박해져가는 상황 하에서 동지들의 생각을 확인해보는 일제고사一齊考査를 치르게 한 것이었다. 자기가 쓴 주절이 들어있는 샘플을 주었는지, 그것이 없이 조건절만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원기서에 의하면 조건절만 문제로 내어준 것 같다), 그 조건절에 맞추어 주절의 문장을 쓰는 것을 “척대隻對”라고 한다(척대는 최소한 자수는 맞추어야
한다. 그러니까 주절의 글자는 6자이다).
하여튼 이 팔절은 척대 일제고사였던 것이다. 그것도 수운이 체포되어 형장
으로 끌려가기 직전의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대선생주문집』에는 전성문
이가 척대를 한 답안지를 선생님께 들이민 것을 보고 심히 실망하여, “이걸 뭘
댓글이라고 나한테 들이민단 말이냐" 하고 꾸짖는 장면이 가감 없이 실려있다.
그리고 이 척대 일제고사의 결과를 보고, 수운이 “우리 도중에 참으로 인물이
빈곤하구나!” 하고 개탄하는 장면도 실려있다.
나는 이렇게 복잡한 사연이 얽혀있는 “팔절”에 관하여, 그 유래를 알 수 있는 정확한 기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명료한 맥락을 설명해주는 글을 만나지 못하였다. 동학의 이해는 지금부터가 아닐까?
『동경대전』은 이제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기존의 연구사들은 자신의 편견, 그것이 단지 정보의 미숙함에서 기인된 것이라는 정직한 상황을 절실히 인지하고, 가슴을 열고 반성하고 수운의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는데 같이 헌신해야 할 것이다. 나의 연구는 세로운 하나의 기점일 뿐이다.
15-1
不知明之所在, 遠不求而修我,
부지명지소재 원불구이수아
不知德之所在, 料吾身之化生。
부지덕지소재 료오신지화생
不知命之所在, 再心之明明。
부지명지소재 고오심지명명
不知道之所在, 度音信之如。
부지 도지소재 탁오신지일여
不知誠之所在, 數吾心之不失。
부지생지소제 수오심지불실
不知敬之所爲, 暫不池於慕仰。
부지경지소위 잠불이어모앙
不知畏之所爲, 念至公之無私。
부지외지소위 염지공지무사
不知心之得失, 察用處之公私。
부지심지득실 찰용치지공사
밝음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거든,
먼 데서 구할 생각을 하지 말고 내 몸을 닦아라.
덕德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거든,
내 몸이 어떻게 우주의 조화 속에서
생겨난 것인지를 헤아려보라.
천명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거든,
내 마음의 밝고 밝음을 되돌아보라.
도道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거든,
나의 거짓없음이 한결같은가를 헤아리라.
(※ 여기 신도 "믿음"으로 번역될 수 없다).
우주적 성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지 못하거든,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나 헤아려보라.
경敬(집중력)이 이루어지는 바를 알지 못하거든,
잠시라도 우러러 공경하는 마음을 늦추지 말라.
두려움(畏외)이 행하는 바를 알지 못하거든,
지극히 공변되고 사사로움이 없는 것을 생각하라.
마음의 얻고 잃음을 알지 못하거든.
마음 쓰는 곳의 공과 사를 살피라.
옥안
숙제 치고 최고의 숙제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수운의 모범답안 또한 걸작 중의 걸작이라 할 것이다. 그가 제기한 문제는 명明·덕德·명命·도道가 하나의 그룹을 이루고, 성誠·경敬·외·심心)이 하나의 그룹을 이룬다. 명,덕德은 역시 『대학』에서 왔고, 명命·도道는 『중용』에서 왔다. 명덕명도를 도道적인 테마라고 한다면, 성경외심은 덕德적인 테마라 할 수 있다. 덕적인 테마는 보다 구체적인 실천의 문제이며 축적해가는 일상의 자세와 관련되어 있다.
다음의 “팔절”을 “후팔절” 이라 부르지 않고 “우팔절”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은, 전·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것이 또하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판본이 “우"로만 되어 있다.
【우팔절 又八節】
15-2
不知明之所在, 送余心於其地。
부지명지소재 송여심어기지
不知德之所在, 欲言浩而難言。
부지덕지소재 욕언호이난언
不知命之所在, 理查然於授受。
부지명지소재 리조연어수수
不知道之所在, 我爲我而非他。
부지도지소재 아위아이비타
不知識之所致, 是自知而自怠。
부지식지소치 시자지이자태
不知敬之所爲, 恐吾心之寤寐。
부지경지소위 공오심지오매
不知畏之所爲, 無罪地而如罪。
부지외지소위 무죄지이여죄
不知心之得失, 在今思而昨非。
부지심지득실 재금사이작비
밝음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기든,
네 마음을 그 땅(문제가 되는 현장)에 보내라.
덕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거든,
말하고자 하나 그 덕이 너무 넓어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헤아리라.
천명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거든,
명의 이치가 주고 받는 가운데
묘연하게 서려있다는 것을 생각하라.
도道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거든.
내가 나됨 이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라.
우주적 성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지 못하거든,
이것은 스스로 알 순 있는 것이로되
스스로 태만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라.
경敬(집중력)이 이루어지는 바를 알지 못하거든,
내 마음이 잠들어 있는가
깨어 있는가를 걱정하라.
두려움(외)이 행하는 바를 알지 못하거든,
죄 없는 곳에서도 죄 있는 것 같이 생각하라.
마음의 얻고 잃음을 알지 못하거든,
오늘의 현존에 뿌리박고 어제의 잘못을 사유하라.
앞의 팔절과 우팔절을 비교해보면, 수운 본인이 우팔절에서 너무 추상화되어 가고 난해한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나 그의 무궁한 재치에 찬탄을 금치 않을 수 없고, 그의 상식적 인간됨에 매력을 느끼지않을 수 없다.
그는 조직에 대한 애기나, 권세에 관한 애기나, 믿음에 관한 얘기가 일체 없다. 상식적 인간의 상식적 생각, 그 속에 깃든 비범한 혁명적 사유를 가르치려고만 노력한다.
우리 역사가 이미 19세기 중엽에 수운과 같은 보편주의적 사상가를 배출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사건이다.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는 요시다쇼오인吉田松陰, 1830~1859과 같은 사상가가 주변의 나라들을 침략하고 식민지화하여 대일본제국을 형성하지 않으면 도저히 서구열강의 침략에 대비할 길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는 제국주의적 손노오죠오이尊皇樓夷, 그리고 정한론
(한국뿐 아니라, 만주, 홋카이도오, 필리핀, 대만, 오키나와를 전부 식민지화 해야 한다. 그리고 대동아공영권 사상의 원형을 논하고 있었다.
그러나 피압박 속에서도 보편선普遍善 (Universal Good)을 말하고 있는 수운은
우리 조선의 문화적 역량의 최종적 집결태로서 자연스럽게 조선대륙의 지평 위에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혼란한 시기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수운의
인간존엄의 사상이 민중의 혈관 속으로 스며들어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문명의 높은 수준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진실로 위대한 단군조선 홍익인간의 정맥이었다.
“공오심지오매恐吾心之寤寐”의 “오매 가 목천판에서 “오매珠”로 잘못
쓰여지는 바람에 그 이후의 판본이 다 잘못되었다. 경주판은 “癌味,목천판은
“悟味.” 모두 오자이다. 경진판의 탁월함과 오리지날리티를 다시 확인하게 ㆍ된다
첫댓글 많은 사람들이 이 “팔절”이 쓰여지게 된 정황이나 그 사태의 소이연을 모르고, 이것이 동학의 교리의 핵심을 요약한 무슨 금과옥조인 양, 동학수행의 핵심적 길잡이니 뭐니 운운하는데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요. 무책임한 해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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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교리의 핵심을 요약한 금과옥조의 글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 문제 아닌가?
동학수행의 길잡이를 이보다 더 간략하게 표현할 수 있는가!
도올의 몽매함은 스스로의 《자만》《교만》, 동양고전을 자기보다 섭렵한 사람이 없다고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명,덕,명,도, 성,경,외,심》을 《문자》로 받아 들일 뿐, 그 참된 진의가 철학적 《보편개념》으로 제시된 것임을 헤아리지 못한다
이것은 수운이 자기사상을 요약한, 그런 거창한 테마가 아니고, 단지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재미있는 과제로서 내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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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자신조차 이 글이 < 불연기연> 다음에 이윽고 쓴, 제자들과의 《특별한 교습법》으로 쓴 것임을 밝히면서도, '재미''재치' 운운하고 있다.
진심 동학 천도교도들이 읽었다면, 분노의 절규를 외쳤을 것이다.
《그 용렬한 세치 혀 닫아라!》
철학은 《개념적 인식》이요, 종교는 《신앙의에 의한 인식》이요, 예술은 《상징과 전형화에 의한 인식》이다.
도올이 동경대전을 종교적 인식체계로 접근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철학적 인식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수운은 유가적-도가적-반천주학적 조선철학사상을 종합하여 제시하고자 하는 절박한 자기과제를 제자들과 공유하고자 이 짧은 글 형식으로 압축하고자 한 것이다.
수운이 제시한 사유형식은 《보편-개별》《추상-구체》의 통일적 사유방법,형식을 제시한 것이다.
조건절의 8개념은 보편개념(철학적 범주)이자 추상적 개념이며, 주절의 제시방법은 개별적,구체적 실현방법.형식이다.
아래 헤겔논리학편에 댓글로 단 글,
논리학(철학.사상)의 《제 범주》는 외적인 현존재(천지만물)와 활동의 무한히 많은 개별성들의 단축형들이다.이들 범주는 그들 자신의 편에서 '실천에 있어서' 인간에게 봉사한다.
그것들은 우리의 모든 표상을 꿰뚫고 있으며, 보편적인 것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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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자기철학속의 <개념>을 굳이 《개념의 개념》이라 표현하며, 언어와 구별하는 이유는 《개별》로서의 개념, 즉 《가명》과 달리,
《보편》으로서의 개념, 즉 《상명》의 연관체계임을 밝힌 것이다.
노자의 《상》은 헤겔의 《보편》으로 읽어야 한다.
수운의 《팔절의 형식》은 보편개념과 구체.개별개념의 《척대형식》으로 제시하여 동학의 사상체계.사유체계를 제시한 것이다.
노자도덕경 중
夫物芸芸(부물예예) : 사물들이 무성하게 피어나지만
各復歸其根(각복귀기근) : 결국은 모두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
歸根曰靜(귀근왈정) : 고요함을 얻으니
是謂復《命》(시위복명) : 이를 일러 명으로 복귀한다고 한다.
《復命》曰《常》(복명왈상) : 명으로 복귀해 영원해지고
《知常》曰《明》(지상왈명) : 영원한 것을 알게 되니 곧 밝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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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은 知常즉, 보편을 알아야 밝음을 깨닫는 것이다.
復命이 常(보편)이듯 《천명》을 받고 세상에 나오는 것도 常(보편)이다.
知人者智(지인자지) :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고
自知者明(자지자명) : 자신을 아는 사람은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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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이라는 고전의 보편개념(이념)을 이해하기 힘들거든 《자기수양에 힘쓰는 것으로 그 본지를 깨달아라》고 한 것도 이 대목을 참조하지 않았을까......
소크라테스, 니체와 궤를 같이하는 가르침은 노자사상에서부터 발흥되어 수운에게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노자도덕경
知和曰《常》(지화왈상) : 조화를 알면 영원하고
知常曰《明》(지상왈명) : 영원을 알면 밝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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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통되는 앎을 《보편:진리》라 하고,
보편진리를 앎을 《밝아진다明》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수양이란 먼저 《우주의 보편진리 :상도》를 파악하여 밝아져야 한다.
그것이 자기수양의 시작이다.
노자의 知和가
자기 수양의 시작이라고 하심에 공감하면서도
修養의 촛점을
형이상학적인 마음 정신세계로 끌고들어가지 말고
형이 하학적인
내 몸 신체의 구조 생리적 이치와 순환적인 우주의 상도로 매치시켜야
노자의 知和에
적중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주의 상도: 보편적 진리 = 明의 조화를 아는 것이라고 할진대
明의 이치가 주고받는데 묘하게 서려있다는 것을
밝게 파악하여 알아야 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이 이치는 몸의 작용에서 훨씬 알기 수월한 것입니다.
이 지점이
우주의 상도를 과학적으로 파악정립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되는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는 셈이지요..
@마고본성
도덕경 < 명>
마지막 문장
道가 아닌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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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
常道는 몸의 생명력
그 明道가 다하면
오래살지 못한다../물체가 허물짐/
지금까지 말해왔던
마음/정신세계와
제가 말하고 있는
몸의 세계에서의
이 道가 말하는 차이점과 동일성을 구분
통일하고 통합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道 라하면 마음 정신세계로만
비중이 쏠리는 경향이 있어왔는데...
도를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며 주관적으로
음미하는 것에서 탈피하여
말그대로 우주 자연에 보편타당하게 적용된 물체들에서 /가장 실질적인 내 몸/
그 常道를 과학적인 면으로
얘기해보자는 것입니다
# 천부정립
@마고본성 몸의 생명력 그 자체도 《상도》의 시공간적 한 계기일 뿐임으로, 유한자로서 무한우주에로의 《복명》을 합니다. 복명은 <우주자연으로의 회귀>로 새기고 있으나, 현대에 와서는 그뿐만 아니라 《정신》으로, 공동체의 마음속에 《살아남아 계승》됨으로써 《상도》의 전일체성을 보는 것입니다.
자연-사회-인간의 통체적 인식이 아닌 그 어느 부분만을 절대화하거나 고정시켜 보는 것은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마고본성 《상도》와《상명》의 관계성 속에서 재해석해야 《현대철학》에 이르지 않을까요?
아래 헤겔논리학에서,
《철학이 다루는 것은 언제든지 구체적인 것, 그리고 오직 현재적인 것만이다.》라고 한 것은
노자철학이든 천부경이든 그 자체를 절대화하는 즉시 고착화.형이상학화 되는 것이고, 그 구체적인 의미를 현재와 역사속에서 해석-재해석해야만 구체성과 현실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석중 너른들
우리의 몸에 상도와 상명이
불가분의 관계로 존재하고
복명하며 우주속에 귀속되지요.
그 존재, 상도가 안보이나
없어지지 않고...
위 본문 글에
이미 그 상도와 상명의 관계성 속에서 재정립한 것을 보고
드린 생각이었습니다..
온전한 나를 인식하고 주체적이 된다는점에서
정신 마음 뿐 만이 아니라
道를 거론함에 정신세계와 비교하여 다소 도외시 되다시피.했던
육신 몸에도 연관 적용하여
심신간에 전체적이고 총체적인
자기정립에 대한 관점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철학은 과학적 인식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