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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일라 거민을 구원하는 다윗
삼상 23:1-5
1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
2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3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4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5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삼상 23:1-5 / [그일라 주민을 구출하는 다윗]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와서 `블레셋 족속이 아둘람 남쪽에 있는 요새 그일라를 치고 타작한 곡식을 약탈해 가고 있습니다.' 하고 전해 주었다. 2)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께 출전 여부를 여쭈었다. `제가 나가서 블레셋 족속을 치면 그들을 쫓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출전을 허락해 주셨다. `어서 나가 싸워라! 가서 블레셋 족속을 쳐서 몰아내고, 그일라 주민들을 구해 주어라.' 3) 그런데 이번에는 다윗의 부하들이 항의하고 나섰다. `우리는 이미 여기 유다 땅에 사는 것만으로도 위험 천만한 일입니다. 이런 처지에서 우리가 어떻게 저 국경선에 있는 그일라에까지 나가 블레셋 족속과 싸울 수가 있겠습니까?' 4) 그래서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여쭈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대답은 여전히 같았다.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어서 그일라로 나가 싸워라! 내가 블레셋 족속을 네 손에 넘겨 주겠다' 5) 그래서 다윗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일라로 나가 블레셋 족속을 공격하였다. 그는 우선 모든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싣고 가는 블레셋 족속의 가축들부터 전리품으로 끌고 온 다음에 그들을 쳐서 크게 무찔렀다. 다윗은 이렇게 외적을 무찔러 백성을 보호하는 왕처럼 그일라 주민들을 구해 주었다. 그러나 이때도 사울은 왕의 의무를 외면한 채, 오히려 백성의 구원자인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중이었다.
다윗은 사울의 핍박을 피하여 도망자로 살아가지만 그일라 백성을 블레셋으로부터 구하는 이스라엘의 왕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그일라 공격(1) 그일라는 다윗이 피신한 헤렛 수풀 인근에 위치한 유다의 한 성읍으로 아둘람에서 남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블레셋과 접경 지역에 있었습니다. 당시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공존해 있었던 때로 사사시대부터 계속된 추수기의 탈취 상황이 또 다시 재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은 여전히 공존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기도(2-4) 도망자의 신분이었던 다윗이지만 그일라의 위험을 듣고 하나님께 이 상황을 아뢰며 전쟁을 치룰 것을 묻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다윗을 따르는 무리들의 반응은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려운대 블레셋과의 전쟁은 한다는 상황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 이 상황을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고 말씀하셨고 블레셋을 네 손에 넘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사무엘상 22장 이후 다윗이 매 순간마다 하나님께 묻고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삶의 방식이 전환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일라를 구원함(5)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고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였습니다. 다윗의 현실은 도망자였지만 실상은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왕의 역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대하여 왕같은 제사장으로 세움을 입은 자로서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을 찾아 구원해야 합니다.
적 용 :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의 영적 군사로 살고 있습니까?
은혜란 하나님이 필요함을 어린아이처럼 순전히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이요 기쁨으로 완전히 의존하는 것입니다. 즐거운 거지가 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요 즐거운 거지인 우리는 의존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상처와 흠집은 은혜가 흘러드는 틈입니다. 불완전하고 모자라고 연약하고 유한한 것이 이 땅을 사는 인간의 운명이요 그 운명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중력의 힘을 벗어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호크마 주석
=====23:1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 '그일라'(Keilah)는 헤브론 북서쪽 약 13km, 아둘람 남쪽 약 5km 지점으로서, 가나안 정복 후 여호수아에 의하여 유다 지파에게 할당된 지역이었다(수 15:44). 이곳은 당시 다윗이 머물고 있었던 '헤렛 수풀'(forest of Hereth)에서는 북쪽으로 약 9km의 거리로 추정된다. 그리고 '아둘람' 지역이 그당시 블레셋의 영토였다는 점에서 볼 때(22:1), 그곳과 인근했던 '그일라'는 블레셋과의 국경에서 매우 가까운 위치였을 것이다(Keil, Smith, Tobler).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침공한 목적 및 이유를 보여 준다. 즉 블레셋 사람들은 (1) 추수된 양곡을 탈취할 목적으로, (2) 전투 상대가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농민들이라는 이유에 따라 그곳에 침공했을 것이다.
=====23:2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 당시 이러한 문의는 대제사장의 에봇에 있는 '우림과 둠밈'(출 28:30)을 통한 질문 방식이었을 것이다(Keil, Smith). 바로 이같은 사실에서 볼 때, '아비아달'이 에봇을 갖고 다윗에게 온 것은(6절; 22:20) 다윗에게 대단한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다윗에게는 '갓'(God)이라는 선지자가 있었으나(22:5), 당시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계시받을 만한 단계에 있지는 못한 듯하다.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 여기의 '이'는 14:6에서 '할례 없는 자들'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된 인칭 대명사이다. 따라서 여기서 다윗이 특별히 이 인칭 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그가 블레셋 족속의 약탈 행위에 의분(義憤)을 느꼈던 까닭이었을 것이다(Klein). 아무튼 다윗은 그때 블레셋을 두려운 존재로 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일라를 구원하라 - 여기서 '구원하라'(* , 야솨)는 말은 이스라엘을 침략자들의 손에서 구출했던 사사들에게 많이 적용되었던 단어였다(삿 2:16; 3:9; 6:15; 7:7). 결국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사사가 수행했던 직능을 행하게 하는 등 그를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로 강력히 부각시키려고 한 것이다(Klein, Keil, Fay). 한편 하나님의 이같은 뜻은, 당신께서 요단 건너 모압땅에 있던 다윗을 유다 땅으로 불러내신 의도와 완전히 부합된다(22:5).
=====23:3
다윗의 사람들 - 사울을 떠나 다윗에게 모여들은 인물들<22:2> 을 가리킨다.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 다윗 추종자들의 이 말은 그 당시 그들은 사울을 자신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따라서 사울의 추격이나 위협으로부터도 안전치 못한 상황에서 사울보다 더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던 블레셋 사람들과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요 굉장한 부담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블레셋 사람의 군대 - 여기서 '군대'(* , 마아르코트)는 잘 정렬된 군사의 '대열'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의 이 말은 블레셋 사람들이 훈련이 매우 잘된 강력한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문구이다. 한편 여기의 이같은 '군대'라는 단어는 블레셋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었던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17장에서는 무려 10회나 사용되고 있다.
=====23:4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 이처럼 다윗의 재차 문의는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믿지 못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2절)에 따라 행하기를 두려워하며 주저하는 부하들을 격려하며 확신시키려는 의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네 손에 붙이리라 - 이같은 표현은 여호와의 전쟁 곧 성전(聖戰)과 관련된 문맥에서, 이스라엘의 완벽한 승리가 신적(神的)으로 보장될 때 종종 사용되었다(14:10; 17:47; 수 6:2; 8:7; 10:8; 11:8 등). 따라서 다윗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이같은 응답은 다윗의 부하들을 안심시키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23:5
크게 도륙하고 - 이 문구는 다윗이 사울의 휘하에 있으면서 블레셋에 대하여 대승을 거두었을 때에도 사용되었다<19:8>. 본 저자는 바로 이같은 문구를 여기서도 사용함으로써,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받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서을 보호하려는 열심이 결코 식지 않았으며, 또한 왕이 될 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군사적 능력도 하나님께서 다윗과 계속 함께 하심에 따라 결코 쇠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 이것은 그일라(Keilah)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것들을 다시 찾아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타작 마당에서 건조시키던 중 빼앗겼던 곡식들(1절)도 틀림없이 되찾아 왔을 것이다(Smith). 다윗이 이와 같이...구원하니라 - 여기서 '구원하니라'(* , 야솨)란 말은 다윗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2절)을 성실히 이행했음을 보여 준다.
< 설 교 >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사무엘상 23:1-5, 야고보서 4:17 / 안효관목사
여러분, 땅에서 얻을 수 없는 유일한 보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바로 진주(珍珠)입니다. 다른 보석은 모두 광석이나 돌에서 캐내지만, 진주만은 바다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시집가는 딸에게 '얼어붙은 눈물'이라고 불리우는 이 진주를 선물하곤 한답니다. 영롱한 빛을 발하는 진주의 아름다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진주가 만들어진 과정에서 얻어지는 교훈 때문입니다.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조개 안에 모래알이 들어가면, 조개는 그 모래알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조개는 그 아픔을 참아내기 위해서 특수분비물을 발산합니다. 모래알이 고통을 가하면 가할수록 자꾸만 분비물을 발산하게 되고, 그 분비물들이 모래알을 싸고 싸서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주는 조개가 모래알 때문에 겪는 고통의 결과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조개가 자신의 몸 속에 들어온 모래알을 무시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쩌면 커다란 고통은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래알 때문에 결국 자신의 살이 썩어 마침내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이 세상에 고통이나 역경을 통과하지 않고 얻어지는 승리의 기쁨은 없습니다. '에델바이스'라는 작지만 아름다운 꽃이 있습니다. 주로 유럽의 알프스 산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이 꽃은 아주 추운 겨울에 눈 속에서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맺다가, 훈훈한 봄바람에 눈이 녹아내리면 그 청초하고도 앙증스러운 자태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기에 흔히 에델바이스를 '인고(忍苦)의 꽃'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에델바이스는 추운 겨울의 폭설과 강풍을 견뎌내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고 귀한 꽃입니다. 일교차가 심하고, 추위가 강할수록 에델바이스는 더욱 신비로운 빛깔을 드러냅니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고난과 역경의 순간을 겪어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삶에 커다란 역경을 만날 때 흔히 사람들은 두 가지 중에 한 방법을 선택합니다. 역경에 당당히 맞서서 - 조개가 역경의 모래알을 통해서 진주를 만들어 가듯이 아름답고 값진 인생을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 역경을 회피하려다가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흔히 역경을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부릅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나면 따뜻한 봄이 오듯, 그리고 그 따뜻한 봄에 청초한 에델바이스의 자태가 더욱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듯, 역경 후에는 우리의 인생에 더욱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혀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에 보면, 다윗이라는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있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었고, 그 일로 인해서 수많은 백성들에게 인기와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민족적인 영웅인 다윗을 아주 싫어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사울이라는 이스라엘 왕이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미워했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골리앗을 죽이고 온 백성들에게 인기와 사랑을 받고 있는 다윗이 언젠가 반역을 일으켜 자신을 죽이고 그가 왕이 될 것같은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기회만 생기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은 어쩔 수없이 권력자인 사울 왕을 피해서 도망 다녀야 할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왕의 추적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궁중 악사였던 다윗이 사울 왕 앞에서 수금을 타고 있을 때에 단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던 적이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자객을 보내 잠자고 있을 때 몰래 죽이려고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아예 군사를 풀어 다윗을 잡으려고 했고, 심지어는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다니면서 다윗이 숨어있다는 정보가 들어오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다니며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명의 위기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딸이자 다윗의 아내인 미갈을 통해서 피신하게 만들게도 하셨고,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을 통해서 다윗의 생명을 지켜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억울하게 도망자 신세가 된 다윗이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 다윗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사무엘상 22:2절에 보면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다윗에게로 모였는데, 그 수가 40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사울 왕의 폭정에 희생된 사람들입니다. "환난 당한 자"란 말은 사울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상당한 고통을 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옛날 자유당 시절 정치범으로 몰렸던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빚진 자"라는 말은 사울 정권의 부당한 세금 정책이나 강압적인 착취로 인해서 가진 재산 다 날리고 빚을 많이 져서 쫓겨다닌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잘못해서 빚을 진 것이 아니라, 잘못된 세금 정책과 착취로 인해서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울 왕이 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예전에 그런 일이 많았지 않습니까? 정부에 정치자금을 대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멀쩡했던 기업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기도 하고, 기업주가 세금을 포탈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마음이 원통한 자"라는 말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울이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안달하는 그 모습에 환멸을 느꼈던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사울의 정권 아래서는 발붙이고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다윗 곁으로 몰려든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또 하나 무시무시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과 그 일행에게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었던 '거룩한 떡'을 주어 먹게 합니다. 400여명을 이끌고 도망자 생활을 해야 할 다윗에게 있어서 먹을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다윗 곁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점점 많아져서 이제는 600여명으로 늘어났습니다.(삼상 23:13) 그러니 갈수록 '이 많은 무리들을 어떻게 먹일 것이냐' 하는 것이 여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에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준 것입니다.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먹을 것을 주고 도움을 주었다는 소식이 사울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사울은 즉시 제사장 아히멜렉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따져 묻고는 제사장 아히멜렉뿐만 아니라, 아히멜렉이 살고 있던 '놉' 땅의 제사장 85인을 죽였고, 그 땅의 모든 사람들을 칼로 쳐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끔찍한 살생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자신 때문에 하나님의 제사장이 85명이나 죽임을 당했고, 제사장의 가족들과 그 동네에 살고 있던 모든 사람이 살해를 당했으니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낙담이 되었겠습니까?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난 직후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이야기가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히멜렉 제사장과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슬픈 소식을 접하고 마음아파 하고 있을 때에, 또 다른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과 인접하고 있던 '그일라'라고 하는 농촌 지역에 블레셋 군인들이 쳐들어와서는 농사지어 놓은 것들을 모조리 약탈해 갔다는 소식입니다. 군사도 없는 시골 마을 사람들은 블레셋 군사들의 약탈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농사지은 곡식들과 기르고 있던 가축들을 모조리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누군가가 그 소식을 다윗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즉시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내가 이 소년들을 이끌고 가서 블레셋을 쳐서 그일라 거민들이 빼앗겼던 곡식들과 가축들을 빼앗아 와야 합니까?" 물론 하나님의 응답은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다윗의 손에 붙이실 것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그일라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라'는 것입니다.
다윗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다 만류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블레셋을 침공해서 그일라 거민이 빼앗겼던 것들을 되찾아 올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지금 사울 왕에게 쫓겨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 경내에 머물고 있는 것만도 불안하기 짝이 없는데, 어찌 블레셋 군대와 전쟁을 한단 말입니까? 더구나 우리는 군사훈련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블레셋 영토로 쳐들어갑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무찌르고, 그일라 거민들이 빼앗겼던 것들을 다 되찾아옵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다윗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다윗은 당시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권력자인 사울 왕에게 쫓기는 몸이었습니다. 언제 사울이 군사를 이끌고 자신이 있는 곳으로 찾아올지 모릅니다. 지금 사울이 다윗이 있는 곳을 모르기 때문에 잠잠하고 있는 것이지, 다윗이 어디에 있다 것이 알려지기만 하면 금방 군사들을 보내 다윗을 잡으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을 쳐서 그일라 거민을 도와주었다는 소식이 사울 왕에게 들려지자 사울이 곧바로 다윗을 잡기 위해서 군대를 파송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다음인 7-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로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 .그가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블레셋을 치고 동족 그일라 거민을 도와주는 것이 다윗에게는 더 큰 위험을 자초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울의 손에 잡혀 죽을지로 모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지금 자기를 따르고 있는 600여명의 식량조차 해결해줄 수 없는 입장입니다. 쫓겨다니는 처지에서 그 많은 사람들의 먹을 것을 해결한다는 것은 너무 너무 어려운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블레셋은 예로부터 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 말 그대로 '오합지졸'(烏合之卒)입니다. 그저 사울 왕과 당시의 정권이 싫어서 다윗을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그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블레셋과 전쟁을 한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 속에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상황이 어느 것 하나 다윗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또 그일라 거민을 구해주는 것은 굳이 자신이 해야 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나라가 해 줄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왕좌에 앉아 있는 사울에게 그일라의 그 억울한 일을 풀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지, 도망자 신세인 다윗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그일라 거민들의 억울함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갑니다.
다윗의 이런 행동이 좀 어리석어 보이지 않습니까? 제 앞가림 하나 제대로 하지도 못할 처지에 있는데도, 그는 억울한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일을 했습니다.
저는 이런 다윗의 모습에서 우리 신앙인들의 삶의 자세를 보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오늘의 삶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결단코 오늘의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 금요일 사도회 성경공부를 통해서 말씀을 나눈 것처럼, 우리는 여러 가지 시련을 만날 때에 온전히 기뻐해야 합니다.(약 1:2-4) 왜냐하면 그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고, 그 시련 중에 인내함으로 우리는 온전한 신앙인으로 자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우리의 신앙입니다.
시련 중에 인내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어려울 때일수록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울 때라고, 시련의 때라고 가만히 있는 것은 내 삶을 자포자기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면 인내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건 아무리 큰 시련이 닥친다 하더라도, 또 아무리 큰 어려움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하더라도, 내가 해야 할 일을 놓치지 않고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신약에서 읽은 말씀에서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내 삶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선을 행하기에 열심해야 합니다. 아니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게 인내하는 것입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세요. 다윗은 사울 왕 때문에 도망자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도망자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먹을 것을 제대로 얻을 수도 없었습니다. 블레셋 군대와 싸울 군사력도 자신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일라 거민들이 고통 당하고 억울한 일 당한 것을 모른 체 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 600명을 이끌고 가서 그일러 거민의 억울함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 길은 험한 길이었습니다. 블레셋과 싸워야 한다는 위험뿐만 아니라, 늘 호시탐탐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사울에게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 알려주는 기회가 되어 사울에 잡혀 죽을 수도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험한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갔습니다. 그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마다 언제나 우리에게 칭찬과 박수가 되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선을 행했다는 것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일라는 도와준 결과 다윗은 사울에게 자신의 위치가 노출되어서 그 곳을 도망쳐야 했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생명을 걸고 도와준 그일라 거민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 다음 이야기가 그렇게 전개됩니다. 그일라에 다윗이 있다는 것을 안 사울이 군사를 이끌고 그일라로 내려옵니다. 다윗은 사울이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일라에 숨어 있어야 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피신을 가야 할지 몰라 다시금 하나님께 여쭈어 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해 주십니다. "그일라 거민들이 너를 사울의 손에 붙이리라."(12절) 그일라 거민들이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기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는 수 없이 다윗은 그일라 거민들의 배신을 가슴아파 하며 그일라를 떠나 또 다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물론 그일라 거민들이 자신들을 도와준 다윗을 사울에게 넘겨준 것이 다윗이 밉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제사장 아히멜렉의 이야기를 들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다윗의 도움을 받았고, 다윗이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도 아히멜렉이 당한 것처럼, 온 성읍이 죽임을 당할지 몰라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도와준 고마운 다윗을 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선을 행한 결과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유익도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한 후에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손에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욱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을 행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일에는 지금의 내 상황이 어떠냐 하는 것은 별반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려는 우리의 발걸음에 발목을 잡는 일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데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은 힘들고 어렵다는 현실이 아니라, 그 현실 앞에 좌절하는 우리 자신의 약함과 믿음 없음입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경험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를 감싸고 있는 상황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십 명씩 죽어가고 있다는 전쟁의 소식들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어린 아이들과 여인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전쟁 때문에 세계 경제가 먹구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한국 경제도 더욱 어려워질 것이란 전망이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다가 전쟁 때문에 더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전쟁의 여파가 실물경제 깊숙이에까지 파고들고 있습니다. 당장 자동차에 기름 넣은 것조차 두렵고, 고기잡이를 떠나야 하는 배들은 조업을 해도 기름값을 건지기가 힘들어 조업을 포기한다는 이야기들도 들려옵니다.
그건 만이 아니지요. 대구 지하철 참사에 이어, 우리 후포에서 신명호 침몰 사고가 잇달아 발생하더니, 지난 26일에는 천안에서 초등학교 축구부 선수들이 잠자는 숙소에 불이나 축구 꿈쟁이들 8명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습니다. 최근에 전쟁 보도 사이에 종종 들려오는 여러 가지 일들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돼지 콜레라가 우리 지역 가까운 영덕에까지 올라왔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시작된 괴질이 전 세계로 번지고 있어, 지금까지 50명 이상이 괴질로 죽어갔고, 약 1,500여명이 감염되어 있다는 소식도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중고등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식중독 사건도 서울 경기 지방에 이어서 경남 창원에서도 발생해서 수천명의 학생들이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에 군대를 보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정치권은 연일 정신이 없습니다.
도대체 우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어느 곳 하나 안전하고 평온한 곳이 없어 보입니다. 경기 침체 속에서 우리 후포에 고기잡이도 잘 되지 않고,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후포 전체가 경기불안과 침체에 빠져 있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 또다시 IMF와 같은 경제위기도 몰아닥칠지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렇게 갈수록 어렵고 힘들어지는 시대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정으로 어려운 것은 시대나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어려운 시대를 믿음으로 이겨나가야 합니다.
이겨나가는 방법이 바로 하나님의 선한 사역을 더욱 힘써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더욱 적극적으로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아랍 속담 중에 "해만 밝게 비치고 비가 오지 않으면 사막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매일같이 햇빛만 비친다면 우리의 삶은 메마른 사막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시대가 평안과 즐거운 일만 가득하다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신앙인의 아름다운 삶은 어려움 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려운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그리고 어렵고 힘든 우리들의 삶 속에서 우리는 더욱 믿음으로 시대를 이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과 삶이 움츠려 들 때, 우리는 신앙의 기지개를 켜고 기쁨으로 선을 행하며, 믿음을 발판 삼아서 아름다운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바라고 계신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지켜주시는 하나님
삼상 23:1-14 / 서양훈목사(성광교회)
14절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포기(Never Give-up)
부르신 하나님은 결코 성도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사단의 세력에게 빼앗기지 아니하시고, 잃어 버리시도 않으시며, 내어 쫒지 아니하시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신다. 그 아들의 피로 성도를 구속하시고, 큰 댓가를 치르시고, 가장 값진 것을 내어 주시고 사셨기 때문이다.
하나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오,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의 하나님이시며, 온 천지의 충만하신 분이시며, 만물의 주인이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하 만물을 주관하신다. 그렇기에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만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떨어지지 않는다.
사울은 왕이다.
이스라엘의 왕이다. 절대 권력을 쥐고 있다. 3,000명의 군사를 대동하여 다윗을 수색하여 잡고자 하였다. 아니 단 한 발의 화살이나 단창으로 죽이려 하였다.
이에 비하여 디윗은 사울의 신하요, 쫒기는 자이다. 도망 다니고 있다. 그를 보호해 주는 사람은 아주 약한 자들의 동정에 지나지 않았다. 이리저리 정처없이 다니고 있었다.
누가 이기겠는가?
그런데 사울은 다윗을 잡지 못한다. 그 원인이 뭘까? 왜 사울 왕은 신하 다윗을 잡지 못했을까? 다음 몇 구절을 통하여 사울왕의 계략이 어떠함을 알 수 있다.
삼상 23:15 / 다윗이 사울이 자기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
삼상 23:25-26 /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26)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여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였더라.
삼상 24:2 /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삼상 26:2 /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
그럼에도 잡지 못함은 무슨 이유일까?
삼상 23:14 /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께서 간섭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손에 넘기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울의 손에 넘기시지 않으심과 넘기심의 주권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이다.
1-14절까지 내용을 자세히 본다면 성경기자가 [넘긴다]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였다.
4절 하반절 /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7절 하반절 /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11절 /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데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4) 12절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
5) 14절 “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넘긴다.]는 단어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바는 무엇인가요?
1. 블레셋 사람들을 다윗의 손에 넘겨주시다(삼상 23:4)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다윗이 사울의 죽이려는 의도를 이미 알고 있기에 도망다닙니다.
피난하는 중인데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 주민에게 타작마당을 도적질한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그일라 주민들이 도와달라는 요청을 합니다.(삼상23:1)
1절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 타작마당을 탈취하더이다하니”
이에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2절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불레세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분명한 응답을 받습니다. 4절 하반절 “...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네 손에 넘기리라.] 영: to give the ... into your hand 히: 하야스기루니
이 단어의 의미는 가두다.(사가르) 히필형으로 강제로 강금하는 행동을 말한다.
레위기13:4
시 31:8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라.”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다.
삼상 23:5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다윗이 블레셋을 물리치고 그일라 주민을 구원해 냄은 여호와께서 불레셋을 그 손으로 가두어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수중에 넘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전쟁에 용사되시는 주 여호와께서 블레셋을 다윗의 손에 넘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일라에 있음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렸는데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헤하려는 음모를 알고는 사울이 그일라로 내려올지 내려오지 않을지를 하나님께 묻게 되었습니다.
2. 그일라 주민들은 다윗을 사울에게 넘기리라(삼상 23:12)
삼상 23:12 /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
그일라 주민들은 다윗에게 빚진 자들이다. 다윗에게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 그렇기에 사울이 다윗을 찾아도 숨겨 주어야 할 처지인데 그일라 주민 중 몇몇은 그 은혜를 잊어버렸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이 벌어졌다. 사울이 그일라로 내려온다는 소문이 들린다.
다윗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사울이 자기를 잡고자 하여 내려온다는 것을 들었기에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사울이 내려옵니까?’를 하나님께 물었다.
삼상 23: 11 /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데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 오리라 하신지라.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나님이 답해주셨다.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에게 넘길 것이라고 알려 주셨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그일라를 떠나 피하게 되었다.
사람의 손이 (그일라 주민들이 사울의 손에 넘김) 넘긴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기에 이는 헛수고에 지나지 않았다.
3. 하나님은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기지 않으시다.
삼상 23:14 /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잠 3:6-8 /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8)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하나님이 생명 싸게 속에(삼상 25:29) 고이 보호하시니 어떻게 찾아내겠는가?
삼상 25:29 /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게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 영적인 세계를 알고 있었다(삼상 18:28)
삼상 18:28 /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
잠 20:12 /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께서 지으신 것이니라
시 94:9 /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약 2:19 /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이 정도의 지식은 귀신들도 알고 있는 지식수준이다. 성도들은 이보다는 더하는 지식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알기에 그 앞에 경배해야 한다. 예배드려야 한다.
사울도 미래의 될 일을 알고 있었다.
삼상 24:20 / 보라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사울은 이런 영적인 사실들을 보고, 알았음에도 다윗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다.
삼상 24:4 하반절 /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 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그 이유는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하나님의 사람을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삼상 24:6). 알았기에 옷자락만 조금 벤 것도 가슴 아파했던 것이다.
삼상 24:5 /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이 마음이 찔려 ….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일치되어야 한다. 이것이 참된 지식이요, 앎이다.
알고 있는 것과 행하는 것의 불일치는 그 알고 있는 앎은 참 지식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산상수훈 끝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마 7:15-20 /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어서 예수님은 경고까지 하셨다.
마 7:24-27 /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사울은 다윗의 미래를 예측(예언)까지 하였다. ‘보라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울은 다윗을 죽이고자 한다. 이런 앎은 참 앎이 아니다.
이번에도 하길라 산에 도망하여 숨어있다는 정보를 듣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자 3,000명을 대동하고 수색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사울은 다윗을 찾아낼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윗이 민첩하거나 사울이 이에 미치지 못함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겨주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생명 싸게 속에(삼상25:29) 고이 보호하시니 어떻게 찾아내겠는가?
다윗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기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윗이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물을 수 있다는 것과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사울과 사람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고 이런저런 음모를 꾀하며 사람들이 다윗을 어려움에 넘기려고 사울에게 고발하여도 하나님이 다윗을 지켜주시는 한 그런 모든 수고는 다 헛수고가 될 뿐이다.
성도들도 살다보면 삶의 두려운 일들이 얼마나 많이 생겨나지는지 모른다. 그럴 때 성도로서 기억하고 기억할 것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고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도를 사랑하시고 완벽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담대하자.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배신의 고통과 죽음의 위기 앞에서
이준원목사 / 삼상 23장 1~14절
우리가 살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것도 모르고 살아가면 그냥 숨 쉬는 것뿐이지, 진짜 살아가는 게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모른 채, 아니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냥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요즘 얼마나 바쁩니까? 할 일도 많고 볼 것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별 여유도 없고 생각도 없이 그냥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여기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십니까?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고 또 예배자입니다. 신앙인, 신자, 믿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는 사람을 가리켜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특징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삶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여러 개가 있습니다. 사랑이 있고 그 외에도 많이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단어는 바로 ‘역설’(paradox)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특징은 매우 ‘역설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역설’(逆說, paradox)이라는 것은 일반상식이나 세상 논리에서 보면 어리석고 이해가 안 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드러낼 때 쓰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 5:20)라는 것이 역설입니다. 또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역설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고백한 “오직 십자가에 달린 그분만이 나의 구주, 세상의 메시야이시다”라는 말도 역설입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십자가에서 정치범이자 신성모독자의 죄명으로 처형당한 33세 청년을 가리켜서 구주이고 그리스도(메시야)라며 따른다는 것 자체가 역설입니다.
그러니까 크리스천의 삶은 그 자체가 벌써 역설입니다. 이러한 역설이 없는 인생은 오히려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인생입니다. 역설이 없는 인생을 가리켜 ‘뻔한 인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정말 역설을 보여주셨는데, 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그 삶도 역시 역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끔찍하게 죽었는데 어떻게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는 사건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 자체가 역설을 보여주십니다.
세상이 가는 대로 따라가고, 남들이 하는 대로 하고, 그런 세상의 흐름에 따라 그저 묻어가는 인생, 뻔한 인생이 어떻게 정말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일 수 있겠습니까? 역설이 있는 인생, 그런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이런 역설이 있으십니까?
1. 그일라를 구원하고도 배신당한 다윗 (1-14절)
1)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은 당신을 따르는 우리에게 역설적인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이 가는 대로 그저 묻어가고 따라가는 뻔한 인생이 아니라 역설이 있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역설을 참 좋아하십니다. 그러한 삶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지금 도망자입니다. 도망자도 보통 도망자가 아니라, 자기 나라의 왕 그것도 자신의 장인이 자기를 죽이겠다고 군대를 동원해서 추격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냥 군대가 아니라 요즘 특수부대와 같이 최정예부대를 보내서 추격하는 상황입니다. 다윗이 워낙 강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도망에 도망을 거듭하다 아굴람 굴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거기 있는 자신에게로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더니 400여 명이 모여서 아둘람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 금방 소문이 났고 그래서 다윗은 또 다시 안심할 수 없어서 사람들과 함께 요새로 피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역설이 나타납니다. 다윗이 요새에 숨어서 좀 편안하게 지내볼까 했는데, 그때 선지자 갓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여기 편안하게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22:5). 안전한 곳에 있지 말고 또다시 쫓기는 자리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역설입니다. 안전하게 머물지 못하게 하고 위험한 곳으로 다시 밀어내는, 어떻게 보면 참 이상하신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말에 순종해서 유다 광야의 헤렛 수풀로 들어갑니다. 그러던 다윗에게 한 가지 소식이 들려옵니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 (1절)
유다 남쪽에 있는 그일라를 블레셋이 공격해서 취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이럴 때 보통 사람 같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어쩌라고?’ ‘뭐 그래서?’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어쩌라는 말이냐? 지금 내 코가 석 자인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 나는 지금 이스라엘의 장군도 아니고 쫓기는 도망자일 뿐이다. 수배령이 내린 도망자일 뿐이다.’ 보통 사람이면 그랬을 텐데, 놀랍게도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에 부담을 느낍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자세히 안 나오지만, 그는 늘 하나님께 묻는 자세를 갖고 살았습니다. 시편들을 보면 다윗이 항상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현실적으로 보면 그일라 사건은 자기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자꾸 부담이 되고 마음에 걸리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마음에 뭔가 부담을 주실 때, 내가 굳이 안 해도 되고 나와 큰 상관이 없는데 그래도 뭔가 해야 되지 않는가 하는 부담을 주실 때, 그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통해 분명히 내게 뭔가 말씀을 하고 싶어 하시는구나.’라고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은 매일 우리 삶 속에 벌어지는 일들을 그냥 넘기지 않고 되새겨보는 겁니다. 뉴스를 하나 보더라도, 심지어 코미디, 예능, 드라마를 보더라도 거기서 뭔가 느껴지는 게 있습니다. 특히 뉴스를 볼 때 이렇게 생각해보셨습니까? ‘왜 하필 지금 이 시간에 저 뉴스가 내 눈 앞에 보이는가?’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겁니다. 그냥 심심해서 하다 보니까 그러는 게 아닙니다.
인터넷에서 뉴스를 볼 때 여러 뉴스들 중에도 마음에 확 와 닿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왜 하나님이 지금 이 시간에 하필 저 뉴스가 내 눈에 띄게 하시는가?’ 물어야 합니다.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못 느끼고 그냥 넘깁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여기에 하나님이 내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다윗은 생각만 하지 않고 하나님께 여쭈어봅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2절)
사실 이때 다윗이 결코 편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얼마든지 하나님께 대해 서운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 지금 저의 처지를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지금 제 생명을 부지하기에도 힘들고 벅찬 도망자에 불과합니다. 여기 많은 사람들이 왔는데 이 사람들을 지키는 것도 힘들고 바쁩니다. 그런데 제가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과 싸우라는 말씀입니까? 이건 정말 말도 안 됩니다.’
당연히 이런 상황입니다. 그리고 여쭤볼 때도 마음에 부담을 주시니까 ‘설마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아니죠?’라고 물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 맞아.’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하기 힘든 일인데 하나님이 자꾸 마음에 부담을 주시면서 하는 쪽으로 상황을 몰아가십니다. 그럴 때 우리도 역시 그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으로 질문을 합니다.
<생명의 삶> 첫 시간에 자기소개를 하면서 ‘이번에 듣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많은 분들이 ‘떠밀려 왔다’, ‘남들이 하라고 해서 왔다’, ‘교인이 되려면 해야 된다니까 어쩔 수 없이 한다’라고 대답을 하십니다. 대부분 그렇게 왔어도 열심히 해보겠다고 이야기들을 하십니다.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13주 동안이나 하지, 숙제도 있다고 하지, 심지어 시험도 본다고 하지, 나는 시험이라면 치가 떨리는데 아무래도 나는 안 되겠다. 하지 말아야지.’라고 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삶 공부 모집을 할 때 저와 눈을 안 마주치며 피해 다니는 분들이 계십니다. 자꾸 안 하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하는 쪽으로 됩니다. 그래서 지금 들으시는 분들도 그렇게 와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놀라운 은혜가 있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 것은 사실 아주 가벼운(?) 케이스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 부담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이런 상황에서 저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까?’ ‘아니, 저보고 저 사람을 용서하고 먼저 전화를 걸라고요?’ ‘하나님, 피해자는 접니다. 제가 일방적으로 당했어요. 오히려 사과를 제가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저보고 먼저 사과를 하십니까?’ 그런 식으로 자꾸 부담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안 하고 싶은데 자꾸 생각이 나고 부담이 됩니다.
또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데 자꾸 헌금을 하라는 말을 합니다. 지난번처럼 재난지원헌금을 하라고 합니다. 요즘 우리 집에 돈이 별로 없는데 자꾸 그런 것을 말합니다. 또 너무 바쁜데 봉사를 하라고 권하고, 심지어 단기선교를 가자고 제안합니다.
‘제가 이런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할 때 기대하는 대답이 뭡니까? 하나님이 ‘그래그래, 너 바쁘지? 형편이 어렵지? 안 해도 돼. 나중에 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도 바로 그런 심정으로 ‘하나님, 블레셋을 칠까요?’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아니겠지. 지금 내가 치기는 뭘 쳐?’ 하며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대답은 ‘그래, 가서 해.’였습니다.
2) 하나님의 역설의 비밀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3절)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역설의 비밀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불가능한 일이라도 무조건 하라고 억지를 부리시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이 역설의 비밀을 깨닫는 사람만이 상황을 초월해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역설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4절)
우리 같이 이 미국에 와서 사는 이민자나 유학생이나 단기 방문자의 삶을 사는 사람은 더 쫓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온 목적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쫓기는 삶, 늘 급한 것만 따라가는 삶을 살게 되면 결국 무너지게 됩니다.
사업을 위해, 직장을 위해, 자녀교육을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이리저리 헐떡거리면서 10년, 20년을 열심히 뛰었는데 결과는 똑같습니다. 뭡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물론 나름대로 뭔가를 이루기는 했는데 속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마음속에 상처도 있고 분노도 있지만 그것을 꾹 누르고 살아갑니다. 그런 식으로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런 답답한 상황을 인간의 힘으로 뒤집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그냥 꾹 누르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의 비극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자기 성공에 목을 걸고, 아니면 자기 자녀의 성공에 목을 걸고, 세상에서 성공해보려고 아등바등 거립니다. 하지만 그래도 뭐 하나 시원하게 다가오는 것이 없습니다. 뻥 뚫리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완전히 상황이 바뀝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전혀 말이 안 된다고 느낄 수 있지만,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처음에는 조금 황당할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 상황에 어떻게 저런 일을 하라고 보여주시나?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이런 일을 하라고 하시나?’ 그러나 그 황당하고 말이 안 되는 말씀에 순종하고 결단하며 나아가기만 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역설의 비밀입니다.
바빠서 정신이 없는데 봉사하라는 기회가 자꾸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하긴 뭘 해?’라는 식으로 합니다. 내가 잘 안 되고 있을 때 재난지원헌금을 하라고 하거나, 하필 그럴 때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이나 부활절이 와서 특별헌금을 하라고 합니다. 또 구제헌금이나 어려운 선교사님을 위해 선교헌금을 하자고 합니다.
제가 오래 전 신학교 다니며 교육전도사를 할 때 섬기던 교회에 저녁예배가 있었습니다. 여름 방학 때 저녁예배 때도 와서 찬양 인도를 하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안식년을 맞아 근처에 계시던 선교사님 한 분이 오셔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원래 광고가 없었는데 갑자기 오시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끝내고 내려가시니까 담임목사님이 감동을 받으셨는지 올라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방금 선교사님 말씀을 다 들었는데 얼마나 감사하면서도 안타깝습니까? 함께 지금 특별헌금을 합시다.”라고 하셔서 즉석에서 선교헌금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저녁예배 때는 헌금 순서가 없는데 그날은 그렇게 선교사님 때문에 하자고 하셨습니다.
제가 가난한 신학생 전도사 시절이라 평소에는 돈이 없었는데, 그 다음날인 월요일에 뭔가에 쓸 일이 있어서 낮 예배와 저녁 예배 사이에 시간이 있을 때 나가서 $50을 찾아왔습니다. 평소에는 $5, $10도 없는데 그날따라 $50을 찾아왔는데 “헌금합시다.”라고 하신 겁니다.
그때 제가 $1짜리 한두 개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제가 $1을 할 것이냐, $50을 할 것이냐, 굉장히 갈등이 되었습니다. 원래는 $1을 하려고 하다가 마음이 자꾸 불편해서 ‘주님의 뜻이 있겠지’ 하고 $50을 냈습니다. 지금도 꽤 쓸 만한 액수이지만 30여 년 전이니까 꽤 큰돈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냥 탁 냈더니 자유와 평안이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꼭 가난한 신학생 전도사가 모처럼 찾은 $50을 빼앗아서 선교사에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까? 꼭 그렇게 사람을 곤란하게 하시고 괴롭히셔야만 되는 분이십니까? 그래야 헌신입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를 괴롭히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50이라는 것이 저에게는 얼마 있으면 또 생길 수 있는 액수였습니다. 그러나 그 선교사님에게는 상당히 요긴한 돈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다 보지 못해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못 보는 뒤에서도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조차 놀랍게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늘 삶의 분주함에 쫓겨서 살아가다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냥 그렇게 살다가 가는 겁니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냥 나 혼자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살고 그러다 가는, 아무 의미 없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때는 별 의미 없는 인생이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쫓기는 삶을 살면서 별 의미 없이 살다가 갈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인생인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시려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끝나는 인생을 저 영원한 하늘나라의 가치를 가진 일을 해서 상급을 쌓도록 하나님의 일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원래는 안 시키셔도 되고 시키시면 안 되는데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잘되라고 그러십니다. 이 세상의 삶이 끝나면 다 끝나버리는 일에만 몰두하며 사는 별 의미 없는 인생이 아니라, 이 세상이 끝나도 영원히 계속되는 가치를 지닌 일을 하도록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때로는 마음에 부담도 주시고 헌신의 결단을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게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유한한 일들에만 몰두하며 급급하다가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로 천국에 상급을 쌓아놓는 일은 하나도 못하고 그냥 갈까 봐 우리를 도와주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도 안 되는 말씀을 주시며 하라고 하실 때, 자꾸 마음에 부담을 주실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머리로 생각하며 ‘저건 아니지’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결단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맹목적 믿음으로 무조건 하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느끼고 깨달으라는 겁니다. 그렇게 순종할 때 엄청난 일들이 일어납니다.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나를 통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3) 결단과 순종을 방해하는 것들
그러나 믿음의 결단과 순종은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극복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자기 자신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게 부담을 주시면 스스로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뭘 하나?’ ‘나처럼 못 배운 사람이 어떻게 하나?’ ‘나처럼 금방 믿은 사람이 어떻게 해?’ ‘나처럼 문제가 많은 사람이 하긴 뭘 해?’
이렇게 스스로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먼저 극복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길을 열어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못하는데 ‘네가 가서 길을 개척해라’ 하시지 않습니다. 다 열어놓으시고 가라고 하십니다.
두 번째로 더 어려운 것은 주변 사람들의 반대입니다. 간신히 스스로 잘못된 생각을 이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결단했는데, 주변 사람들, 그것도 가족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반대를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겁니다.
조금 전 3절에 보면 다윗 역시 주변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칩니다. 이들은 다윗의 대적들이 아닙니다. 다윗과 공동체를 이루고 생명을 나누는 ‘다윗의 사람들’입니다. 누구보다도 다윗을 위하며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 가만히 보면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지금 이곳 유다에서도 가슴 졸이며 살고 있는데, 그일라에 가서 거기를 점령하고 있는 블레셋 군대와 맞서 싸운다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겁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입니다. 맞는 말 아닙니까?
이처럼 너무나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과 역사하심에 감동이 되어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아가려고 할 때 주변 사람들이 반대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설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러한 장애도 뛰어넘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가장 어려운 관문이 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무리 그렇게 순종해도 좋지 않은 결과가 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을 극복하고 순종한 결과가 아름다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극복하고, 주변 사람들의 반대까지도 물리치고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갔는데, 막상 그 결과는 아주 좋지가 않은 겁니다. 아주 나쁜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점에서 크게 실망하고 무너집니다. ‘아니, 내가 이렇게 헌신하며 나아갔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안 해주시나?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이것까지도 뛰어넘을 때 그제야 하나님의 역설의 비밀이 드러납니다. 다윗은 스스로의 잘못된 생각을 깨고 부하들의 반대도 물리친 후 블레셋으로부터 그일라를 구원합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5절)
다윗이 젊은 사람이었는데도 너무나 훌륭합니다. 먼저 그일라 소식을 듣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그러자 하나님은 “가라. 싸워라. 그들을 구원해라.”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 ‘안 되기는 뭘 안 돼?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 내가 응답을 받았어. 나를 따르라!’ 하고 무리하게 나간 게 아니라, 그들을 존중하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여쭤봅니다. “하나님, 정말 맞습니까?”
물론 자기도 조금 주저하는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가라. 내가 너를 통해 그들을 구원할 것이다. 적들을 네 손에 넘겨주겠다.”라고 하시니까 사람들까지 설득이 되어서 같이 갑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에는 예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상황이 벌어집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이르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7-8절)
다윗이 그일라를 구했다는 소식을 누군가가 전해주니까 사울은 기뻐서 외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다윗을 성에 가두셨다. 그 동안 광야에 숨어 다녀서 어디 있는지 몰라 잡을 수가 없었는데 드디어 잡았다. 이제는 독 안에 든 쥐다. 네 이 놈 두고 보자.” 이렇게 기뻐합니다.
지금 사울이 하나님께서 자기 손에 다윗을 넘겨주셨다고 좋아하는데,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습니까?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이 도와주신다고 하며 하나님을 갖다 붙이니까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사극 같은 데 보면, 뒤에서 음모를 꾸미며 악을 행하는 사람이 ‘일이 잘되고 있습니다.’라고 누가 알려주며 일이 자기 생각대로 잘 풀리면 뭐라고 합니까? “하늘이 우리를 도우셨구나.” 악을 행하면서 하늘이 도우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건 그것보다 더 나쁜 겁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이 도와주셨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나중에 십 광야에 다윗이 숨었다고 십 사람들이 자기에게 알려줄 때도 그들이 악한 일에 동조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그들이 하나님께 복 받기를 원한다고 축복해줍니다(21). 그것도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사울이 군대를 동원해서 자기를 잡으라고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사실 그 전에 다윗의 마음에는 약간의 기대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왕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했던 그일라 사람들입니다. 왕으로서 자기가 지켜야 하는 도시인데 다윗은 대신해서 목숨을 걸고 싸워 지켜주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사울이 ‘내가 해야 하는데 다윗이 해주었구나.’ 하면서 그의 마음이 좀 누그러지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을 분명히 갖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사울이 마음을 바꾸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이 도우셨다.’라고 하면서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온다는 겁니다. 그일라 백성들이 공격을 당할 때는 전혀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저 성은 그냥 버려라.’ 하는 식으로 오지 않더니, 이제는 그들을 구원해준 자기를 잡아 죽이겠다고 군대를 동원해서 옵니다. 이것은 정말 기가 막히고 화가 날 일입니다. 그때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다윗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10-11절)
다윗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결단을 하고 순종하여 나아갔는데, 사울이 분명히 치러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응답은 순종한 그가 기대했던 결과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순종했으면 좋은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 순종했으면 좀 평탄한 길로 인도해주셔야 되는 게 아닙니까? 그야말로 인간적인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게다가 사울이야 원래 그러니까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지만,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일라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 (12절)
사울이 와서 잡으려고 공격하는 게 아니라, 뒤에서 배신해서 자기를 넘겨주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다윗이 생각하게 된 겁니다. 계산에 약삭빠른 인간들의 모습을 여기서 봅니다. 이들은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도움을 받아 놓고는 어떻게 이런 식으로 배신을 할 수 있습니까? 다윗은 그일라 사람들이 자기에게 잘해줄 것을 당연히 기대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구출해주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고 자기들을 구원해주었으니 나를 도와주겠지.’라고 할 수 있는데, 런 기대가 다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뛰어넘어야 할 마지막 장애물이라는 겁니다. 우리도 이런 상황이 오면 ‘어떻게 이럴 수가! 하나님, 왜 이렇습니까?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사람들이 이렇습니까?’라고 하는 것을 뛰어넘는 게 진짜 믿음의 사람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믿음으로 결단하고 순종했을 때의 마지막 관문은, 이렇게 결과가 나빠도 극복할 수 있는가, 상황이 더 악화되어도 계속 하나님을 붙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상한 것, 기대한 것과 다른 것이 나와도 시험에 들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라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도전을 주는 책이 욥기입니다. <말씀의 삶> 때 처음으로 욥기를 읽는데,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내가 기대한 것과 전혀 반대이고 오히려 더 나쁜 상황이 벌어져도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 수 있겠는가를 묻습니다.
이럴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일단 그일라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나를 배신해?’ 하면서 손을 좀 봐준 다음에 떠나도 되는데, 놀랍게도 다윗은 이 상황에서 한마디 불평도 없이 그냥 떠납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말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13절)
처음에 말도 안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는 분명히 다윗에게 기대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순종하면 하나님이 분명히 상황을 바꾸어주시겠지.’ 그런데 여전히 쫓기는 신세입니다. 아니, 오히려 더 나빠졌습니다. 배신까지 당하고, 정처 없는 도망자의 삶이 계속됩니다.
우리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형편 중에 시간 중에 봉사하고, 온전하게 헌금을 하고 십일조까지 하는데, 그럼 경제적인 사정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럴 때도 실망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따라갈 수가 있겠는가? 그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또 ‘내가 이렇게 속상하고 억울한 가운데서 하나님이 먼저 용서하라는 마음을 주시니까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하고 잘해주면 그 사람도 받아주겠지.’라고 기대하며 그 사람에게 나아갑니다. 진짜로 잘 받아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와 반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받아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못되게 굴고 더 쌀쌀맞게 대할 수도 있습니다. 과연 그럴 때도 실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며 계속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입니다. 상황이 나의 기대와 반대로 흘러갈 때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한 가지만 기억할 수 있으면 계속해서 순종의 삶을 살며 하나님의 역설의 비밀을 누리는 축복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 한 가지가 뭡니까? 바로, 사람들은 몰라줘도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 앞에 있다. 사람들이 비밀스럽게 한 것도 하나님은 다 아시고, 내가 지금 당하는 것도 다 아신다.’ 하는 사실, 하나님은 다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내린 어려운 결단과 헌신을 사람들은 몰라줘도 하나님은 알아주십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나아가면 견딜 수 있게 되고 인내할 수 있게 되며, 정말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자유를 느끼고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혹시 ‘에이, 진짜 그럴까?’라고 한다면 안 해보셔서 그런 겁니다. 해보십시오. 진짜 그렇습니다.
사실 순종하며 나아가도 겉으로 보면 달라진 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전히 가난하고, 여전히 감정 때문에 힘들고, 여전히 죄의 유혹에 쫓기고, 여전히 답답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게 아닙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그 순간 모든 것은 이미 달라졌습니다.
순종하기 전에는 쫓기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쫓기는 상황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똑같아 보일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엄청난 존재로 변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삶 속에서 문제와 갈등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와 갈등에 쫓기는 사람이나 무너지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해결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가난에 쫓기는 사람이 아니라 가난을 해결하는 사람, 죄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엄청난 차이가 바로 하나님의 역설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2. 순종하는 사람이 누리는 은혜 (15~29절)
이렇게 믿음으로 결단하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15-16절)
사울은 다윗을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못 찾았는데, 그의 아들 요나단은 수풀로 가서 다윗과 금방 만났습니다. 그것을 보면,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어떤 비밀 연락망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을 만난 요나단은 아주 힘든 상태인 다윗이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도록 위로해줍니다. 믿음으로 결단하고 순종하며 나아간 다윗에게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요나단을 붙여주셔서 그를 통해 위로해주신 것입니다.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머물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17-18절)
이처럼 믿음의 결단과 순종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믿음의 동역자를 붙여주시고 힘을 주시며 위로해주십니다. 우리가 정말 힘들어도 끝까지 믿음으로 나아가면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사람을 통해 위로를 주십니다. 사람을 통해 씁쓸함도 맛보지만, 이런 믿음의 동역자를 통해 위로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마음을 뒤집는 일들이 계속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넘길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하니” (19-20절)
지금 십 사람들이 다윗의 위치를 사울에게 밀고합니다. 20절을 보면 그들은 사울로부터 상을 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아첨을 떨고 있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의 배신의 고통을 당한 데 이어서, 십 사람들의 이런 기회주의적인 행동으로 다윗은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또 쓴 시가 있습니다. 바로 시편 54편입니다. 거기 보면 여기도 표제가 달려 있습니다.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이 시점에 다윗이 시편 54편을 썼다는 겁니다.
이 위기 상황에서 다윗의 심정이 잘 느껴집니다. 그일라 사람들의 배신에 이어서 십 사람들의 이런 밀고가 이어지며, 그 가운데 느낀 다윗의 심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십 사람들의 밀고로 인하여 다윗은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거의 잡혀 죽게 된 것입니다.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25-26절)
이 사람들은 특공대입니다. 특수부대, 특전사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훈련이 잘되어 있는 군인들입니다. 지금 사울의 군대가 다윗을 잡으러 왔는데, 이제는 정말 잡혀서 죽게 된 상황입니다. 산 하나를 중심으로 이쪽으로는 사울의 군대가 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는데, 거의 잡혀서 죽임을 당하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이제는 정말 도망갈 틈이 없습니다. 꼼짝없이 잡혀 죽게 되었습니다.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 (27-29절)
너무나 놀랍게도 다윗이 꼼짝없이 잡혀서 죽게 된 바로 그 순간 사울에게 전령이 와서 “블레셋의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빨리 오십시오!” 하는 소식을 전해줍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사울 입장에서는 다윗을 다 잡게 된 상황인데 하필 이때 블레셋이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 하면 잡는데 조금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겁니다. 할 수 없이 다윗을 그냥 둔 채 블레셋과 싸우러 떠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특히 가장 잘 싸우는 이 특수부대를 그냥 놓고 갈 수가 없습니다. 블레셋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는 데리고 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셀라하마느곳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셀라하마느곳은 ‘분리하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블레셋이 쳐들어온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전령이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나는데, 어떻게 하필 그 시간에 딱 도착했습니까?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정확한 시간이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은 극한의 위기 속에 다윗을 던지신 후에 극적인 도움을 받게 하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굳센 믿음을 더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함께 하는 사람들도 어땠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구나.’ 그들도 정말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함께 한 600명이 결코 착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억울하고 원통하고 한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다윗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하면서 그들도 믿음에 대해서 배우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바로 그렇게 믿음의 결단과 순종을 하며 하나님을 따라갈 때,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역설의 비밀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상황을 뛰어넘는 은혜를 체험하며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삼상 23장 1~29절 / 양인국목사
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이 말씀을 믿는다면 믿음의 사람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삶의 여정에서 어떤 환경을 만날지라도 믿음을 지키는 일이 될 것이다. 오늘 말씀은 다윗이 환경을 초월하여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갔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가 직면한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는지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2. 다윗은 환경을 초월하여 언제나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갔다. 오늘 말씀은 그가 어려운 환경에 직면해 있었지만 믿음이 요청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간 것을 말해 준다. 실제로 본문은 다윗 스스로가 어려움에 처해 있었지만 이웃의 어려움을 보았을 때,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믿음으로 나아가 그들을 구원해 준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다윗의 이와 같은 행위야말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간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여정에서 어려움이 있다고 하여 믿음이 요구될 때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본문의 내용이다. 다윗이 모압에서 유대 땅으로 돌아왔을 때 그일라가 블레셋의 침략을 받아 위기 가운데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물론 이때도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고 있었다.이처럼 다윗은 자신과 그리고 함께 하는 자들 모두가 어려움 가운데 있었지만 이웃의 고통을 보고 침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신앙의 양심이 그것을 용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나가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가서 블레셋의 손으로부터 그일라를 구원해 주라고 말씀하셨다. 여기 다윗과 함께한 자들은 다윗과 같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일라를 구원하는 일을 반대했다. 3절은 그들이 다윗의 뜻을 반대한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 주고 있다.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니이까(23:3)” 그들의 이와 같은 반대 역시 다윗으로 하여금 믿음으로 나가는 일을 머뭇거리게 하였다. 그래서 다윗은 그들의 말을 들었을 때 또 다시 하나님께 나가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였다. 다윗의 이와 같은 행동은 함께 하는 자들에 대한 존중이었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재확인하려는 신중함이었다. 그는 자신이 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자만하여 함께 하는 자들의 권고를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뜻을 재확인하는 기회로 삼았다. 다윗이 보여준 이와 같은 태도야말로 지도자가 가져야 할 태도이고 이웃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태도야 말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갈 수 있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다윗이 그일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재확인하였을 때, 처음 말씀해 주신 뜻과 동일했다. 4절의 말씀이다.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불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다윗은 그일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재확인한 후 더 이상 함께하는 자들의 권고로 인하여 머뭇거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최고의 권위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일라를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인한 이상, 그 뜻에 대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누구도 거슬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서로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확인한 후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할 뿐이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환경을 초월하여 믿음에서 믿음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에 신중하고, 하나님의 뜻을 확신한 후, 그뜻에 따를 것을 말할 때 그 말 자체가 거부할 수 없는 권위가 되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 말에 반(反)할 수 없다. 그래서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일라를 침략한 불레셋과 싸울 수 있었다. 5절은 이 전쟁의 결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 주고 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불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이처럼 다윗이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는 믿음으로 행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셨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환경을 초월하여 언제나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은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들이 배반할 때에도 그들에 대해 분노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믿음으로 행하였다. 이런 다윗의 모습이야 말로 환경을 초월하여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가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6-14절의 내용이다. 사울은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잡기 위하여 군사를 이끌고 그일라성을 향하고 있었다. 다윗이 이 소식을 듣고 이때에도 하나님께 나가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 “다윗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23:10-12)”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말씀은 다윗이 믿을 수 없는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그일라 사람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릎쓰고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해 준 자신들을 사울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일라 사람들은 사울이 다윗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으로부터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다윗을 내어주기를 요청해 온다면 내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23:11,12). 그일라 사람들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은혜를 베풀자 조차 배반할 수 있는 연약한 자들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에 대해 분노하기 보다는 그일라를 떠났다. 이렇게 함으로 그일라 사람들에게 배신할 수 있는 기히를 주지 않았고 또한 ㅈ다신들도 사울의 손으로부터 피할 수 있었다. 언급한 것처럼 다윗은 은혜를 배반한 자들에 대한 분노로 시간을 낭지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약함을 알고 그들과 자신들 모두가 안전할 수 있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 길이 바로 그들을 속히 떠나는 것이었다. 이처럼 다윗이 지혜롭게 행할 수 있었던 것이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게 나가 인도의 말씀을 구하고 주시는 말씀에 따라 행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윗을 통하여 범사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교훈 받는다. 여기 하나님을 의뢰 하는 행위는 기도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기도하는 자는 실패하지 않는다가 될 것이다. 사울은 다윗이 그일라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일라로 오는 일을 준단하였다.
물론 그의 추격은 여기서 그친 것은 아니다. 만일 여기서 그쳤더라면 그의 삶은 더 길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니의 뜻을 살피지 않았고, ㅇ직 자신의 탐욕에 이끌렸기 때문에 계속 다윗을 추격했고이로 인하여 그의 삶은 시간이 더해갈수록 점점 더 황폐해 갔다.
하나님은 다윗처럼 믿음에서 믿음으로 행하는 자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켜주신다.
본문은 다윗이 어려움 가운데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을 통하여 시련 중에 있는 다윗의 믿음을 굳게 해 주셨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요나단은 부친 사울을 따라 다윗을 붙잡기 위하여 십 왕무지에 왔지만 다윗에 대한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부친이 알이 못하도록 비밀리에 다윗을 만나서 이렇게 격려해 주었다.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23:17)”이처럼 하나님은 요나단을 통하여다윗의 믿음을 굳게 해 주셨다. 또한 하나님은 소문을 통해서도 다윗을 지켜 주셨다. 십사람들의 고발로 인하여 사울은 다윗을 잡기 위하여 마온까지 쫓아가서 다윗과 그의 군사들을 에워쌓지만 불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로 돌아갔다.
이 일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다. 다윗은 이 일로 인하여 또 한번의 위기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다윗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마다 그를 지켜 주셨다.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23:14)” 오히려 하나님은 다윗에게 허용해 주신 이와같은 곤경들을 통하여 그와 그의 군사들에게 스스로를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어쩌면 그들이 이와 같은 위기를 통하여 스스로 훈련함으로 후에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승리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경외하는 자들에게 이처럼 때로는 형통함을 때로는 고난을 허락해 주시지만 그들이 어떤 환경 가운데 있을지라도 변함없이 믿음으로 행하기 원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믿음으로 행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모든 위기로부터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직면한 환경을 통하여 그들 스스로를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이것은 마치 요다가 물고기 배속에 갇혀 있었지만 그곳에서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삼킨 물고기로 하여금 뭍으로 향하여 그를 해변에 토하도록 하신 것과도 같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어떤 환경을 만날지라도 오직 믿음에서 믿음을 향할 것이다.
묻는 기도가 주는 유익
이호준목사 / 삼상 23장 1-14절
저의 신앙생활 가운데 약한 부분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기도생활입니다.
예배는 매번 열심히 드리고 있고, 말씀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면서 생활하고 있는데 기도생활 만큼은 제가 원하고 기대하는 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고 사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기도가 막히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세워지지 않은 채로 힘들게 신앙생활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새벽기도를 드리다 보니까 저에게 그래도 기도하는 것이 습관으로 자리 잡히고 있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를 드릴 때 소리 내서 기도하지 않고 속으로 묵상기도를 드리다보니까 기도하다가 자꾸 딴 생각을 하게 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의 패턴을 바꾸었습니다. 핸드폰에 메모 기능이 있어서 저는 거기에 기도제목을 적어 놓고 매일 새벽마다 그것을 보면서 작게 소리를 내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니까 기도시간에 다른 잡념을 하지 않고 기도하게 돼서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기도할 때 제일 먼저 성경 시편 65편 2절 한 구절을 읽으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시65:2)
내가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엔 먼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쭉 열거하면서 감사한 것들을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먼저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기도할 때 나의 마음이 열리고 감정도 풀리면서 기도에 집중할 수가 있어서 이 방법으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기도입니까? 기도는 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때 자기 혼자서 자기가 할 말만 말하는 일방통행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서로 대화를 나누는 쌍방통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기도시간에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어떤 기도를 많이 합니까?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를 많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할 때 우리는 필요한 것이 많기에 달라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 내용을 보면 대부분 어떤 기도입니까? 거의 대부분이 하나님께 달라고 하고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내가 드리는 기도가 그저 하나님께 달라고만 하는 이기적인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캥길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 때 나의 필요를 채워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묻는 기도를 하면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는 인도를 받을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묻는 기도는 성경적인 기도입니다. 묻는 기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입니다. 묻는 기도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가게 해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나요? 하나님,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요? 알려 주세요. 오늘 하루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기를 원하시나요?”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하면서 살았던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게 됩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던 다윗도 묻는 기도를 하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묻는 기도하면서 살았는지 살펴보면서 우리들도 다윗처럼 묻는 기도를 하면서 살아가게 되기를 원합니다.
1. 결정내리기 전에 먼저 묻는 기도를 합시다(삼상23:1-12).
1절에 사람들이 와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치러 와서 타작마당에서 곡식과 짐승을 탈취해 갔다고 전해 줍니다.
그때 다윗은 그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했습니까? 2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삼상23:2).
지금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도망자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에게 아니 지금 우리 코가 석자인데 어떻게 블레셋과 싸우러 나갈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부하들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합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삼상23:4).
다윗은 재차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합니다. 그런 후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은 다윗은 주저함 없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순종하여 블레셋과 싸워서 그일라 사람들이 빼앗긴 가축을 도로 찾아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해 주는 영웅이 됩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서로 생각이 다를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 교회는 자기의 생각과 뜻을 관철시키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고 먼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시는지 묻는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즉각적으로 결정을 내리지 말고 한 두주 동안 먼저 간절히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묻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묻는 기도를 한 후에 결정을 내리면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재차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한 후 응답을 받은 다윗은 주저함 없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순종하여 블레셋과 싸우러 나갑니다. 그리고 그일라 사람들이 빼앗긴 가축을 모두 도로 찾아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삼상23:5).
그런데 다윗이 블레셋과 싸워서 그일라 주민을 구해주었다는 소식이 사울 왕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사울 왕에게 다윗이 그일라 성에 숨어 있다는 것을 밀고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즉시 다윗을 잡기 위해 그일라로 옵니다.
여러분, 다윗은 그일라 사람들을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구원해 준 구원자였고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설마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사울에게 넘겨줄까?” 하면서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때에도 다윗은 무엇을 합니까? 먼저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합니다. 다윗은 사울이 나를 잡으려고 그일라 성으로 온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다윗은 자기 생각과 판단을 의지하지 않고 또 다시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합니다. 11절입니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삼상23:11).
12절도 읽겠습니다.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삼상23:12).
만약에 다윗이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면서 “내가 그래도 그일라 사람들을 도와주었고 구원해 주었는데 설마 나를 사울왕의 손에 넘겨주겠는가? 라고 생각하면서 그대로 그일라에 머물렀다면 다윗은 사울왕의 손에 잡혀서 죽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묻는 기도는 힘들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묻는 기도는 너무나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게 되는 길입니다.
한번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기도 내용을 유심히 들어보기 바랍니다. 그 기도 패턴이 무작정 일방적으로 간구만 하는 기도라면 그 기도를 잠시 멈추고 하나님께 묻는 기도로 기도 패턴을 바꿔보기 바랍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이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 있어서 하나님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합니까?” 여러분의 생각을 하나님께 기도로 말씀드리면서 한번 하나님께 먼저 물어 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내 생각대로 판단하다가 실패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또 사람을 의지하다가 실망하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도 다윗처럼 먼저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올바로 받으면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다급할 때에도 먼저 묻는 기도를 합시다(삼상30:1-10).
사무엘상 30장 1-10절 말씀을 보면 다윗에 다시 한번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과 함께 했던 부하들이 전쟁에 나가려다가 사흘 만에 지기 집이 있는 시글락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시글락에 오니까 아말렉 사람들이 처자식을 모두 잡아 갔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삼상30:3).
그랬을 때 그들은 모두 울 기력이 없을 때까지 소리 내서 울었습니다. 그런 후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을 향하여 어떤 행동을 합니까?
6절을 읽어봅시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상30:6).
다윗의 부하들은 자기 처자식이 끌려간 것을 보고는 소리 내서 울다가 그 모든 책임을 다윗에게 돌립니다. 모든 화살을 지도자인 다윗에게 돌리면서 “이것이 다 다윗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 나와서 묻는 기도를 합니다. 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 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삼상30:8).
다윗은 다급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에도 여전히 먼저 그 모든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서 묻는 기도를 했습니다.
묻는 기도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대화하는 기도입니다. 묻는 기도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올바로 받게 되는 기도입니다.
우리들도 일방적으로 간구하는 기도를 하지 말고 다윗처럼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묻는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묻는 기도를 하려면 소위 말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방적으로 좔좔좔 하는 기도를 멈춰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 주시옵소서.”의 기도는 잘못하면 나 혼자만 말하는 일방적으로 말하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묻는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쌍방 기도입니다. 그래서 묻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게 되고 친밀해 지게 됩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묻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용히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기다리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 속에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보려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나는 이것을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물어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일 일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의 일들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하나님께 나와서 묻는 기도를 하기 바랍니다.
한번 내가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기도 내용을 유심히 들어보기 바랍니다. 그 기도 패턴이 무작정 일방적으로 간구만 하는 기도라면 잠시 멈추고 하나님께 묻는 기도로 기도 패턴을 바꿔보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이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합니까?”
여러분의 생각을 다 하나님께 기도로 말씀드리면서 한번 하나님께 먼저 물어 보기 바랍니다.
“주님! 저의 성품에서 어떤 면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께서는 저를 어떻게 느끼시고 계십니까? 제가 무엇을 하면서 살기 원하십니까?” 요구하는 기도만 하지 말고 이렇게 자꾸 하나님께 물어보십시오.
“주님, 저의 사업장과 저의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주님의 마음을 알려주시기 원합니다.” 이렇게 묻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코로나 때는 열심히 섬기지 못했는데 올해부터는 하나님께 헌신하여 교회를 세우고자 합니다. 제가 어떤 일에 헌신하면서 사역하기를 원하시나요?” 먼저 묻는 기도를 하고 헌신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알기 원한다면 먼저 묻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묻는 기도는 하나님께 질문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하면 어떤 유익이 주어집니까?
첫째, 묻는 기도를 하면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묻는 기도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하기 때문에 올바른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게 됩니다.
둘째, 묻는 기도는 일방적으로 내 필요만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묻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해 주실지 기다리면서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친해지게 됩니다.
셋째, 묻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를 드린 후에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살게 됩니다.
넷째, 묻는 기도를 하면 내가 이기적인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인도를 구하는 기도를 하고 있기에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구하면서 기도의 영성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다섯째, 묻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삶 속에 말씀해 주셨고 역사해 주셨는지를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기에 살아있는 간증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묻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게 만들어 줍니다. 묻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묻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인도를 바르게 받으면서 살게 됩니다.
묻는 기도를 하게 되면 나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묻는 기도를 하고 나서 성령님께서 마음과 생각에 떠오르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인지를 물은 후 순종하면서 살아가기 바랍니다.
그래서 변화되는 많은 삶의 모습과 응답받는 바른 많은 간증거리를 가지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묻는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삼상 23장 1~14절 / 한대근목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편 23장은 다윗의 최고의 역작이자 영감있는 찬양으로 모든 세대에 걸쳐서 마음이 상한 자에게 치유하는 향유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찬양이 쓰여지게 된 배경에 대해서 [진 에드워드] 목사님은 그의 저서 '세 왕 이야기'에서 아주 재미있게 그리고 있습니다. {다윗이 양치기 시절에 자신이 돌보는 양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곰을 물매로 물리치고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어린양을 끌어안으면서 "나는 너의 목자이고, 하나님은 나의 목자로구나"라고 중얼거립니다. 그리고는 밤이 깊도록 그날의 모험을 노래로 엮어 귀가 있는 모든 천사들이 그 고조와 가사를 다 기억할 때가지 하늘을 향해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그러자 그 천사들은 이 놀라운 노래를 맡아 모든 세대에 전하여 주었습니다.} "나는 너의 목자이고,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구나" 이 특별한 고백은 다윗의 일생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는 평생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인정받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평생을 부족함이 없이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늘 민감하게 순종하고 살았던 다윗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 그러면 말씀을 읽어가면서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았는지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다니며 힘겨운 삶을 살고 있을 때, 그에게 두 가지 아주 절망적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하나는 사울이 아히멜렉을 비롯한 85인의 제사장과 성읍 놉에 사는 사람들을 진멸했다는 소식입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종들을 칼로 죽인 사울의 분별력 없는 행동에 대해서 다윗은 진심으로 마음 아파했습니다. 또 한가지 나쁜 소식은 당시 이스라엘의 적국인 블레셋의 군대가 헤브론 북서쪽 약 13km떨어진 이스라엘의 성읍 '그일라'를 침범하였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힘 겨루기로 인한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힘없는 백성들이 이방나라들에 의해서 유린당하고 있다는 소식 또한 다윗에게 슬픈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그일라'가 블레셋에 침범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600명의 사람들과 함께 '그일라'를 기습하여 블레셋 사람과 싸워 물리치고 그 성의 사람들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2절).
'그일라'는 이스라엘 땅입니다. 자신의 동족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해 싸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다윗이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겠다는 계획은 순수한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다윗은 놉 성의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사울에게 몰살을 당하게 된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22:22).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달아날 때에 놉 땅에 들어가 제사장 아히멜렉을 속이고 제사장들이 먹는 진설병을 먹고, 골리앗의 칼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에돔 사람 도엑이 그곳에 있었고 그것을 다윗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놉 땅의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짐작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당장 피신하는 것이 급한 나머지 모른척하였습니다.
결국 도엑은 사울에게 그 사실을 고하였고, 분개한 사울에 의해서 85인의 제사장들과 놉 땅의 거민들이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놉 땅의 제사장들이 사울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다윗은, '그일라' 거민이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대한 보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그일라'를 향해 가겠다고 다짐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의롭고 합당한 결정입니까?
그러나 그는 '그일라' 거민을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구원해야 한다는 자신의 결정의 당위성을 주장하기보다 먼저 하나님께 묻고 있습니다. 블레셋을 물리치고 동족을 구원하는 일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판단을 앞세우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다윗이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가운데서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비밀입니다.
기도란 자신의 생각과 계획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검증 받는 일입니다. 우리는 가끔 합당한 일이면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오류를 범합니다.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지어놓고 실수하는 일들도 수없이 많이 저지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울입니다. 여러분 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로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 그가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사울은 다윗이 '그일라' 거민을 구하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이 다윗을 '그일라'에 가두어 놓고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입니다. 14절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다윗을 사울에 손에 붙이신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울은 한번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서도 제 생각과 판단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옳은 생각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라고 섣불리 판단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겨질 때, 오히려 하나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검증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생각과 계획이 합당한 것인지를 검증 받는 것입니다. 많은 생각과 계획을 세우지만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 일을 거절하십니다. 우리는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약4:3)"고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의 욕망을 앞세운 계획은 아무리 옳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계획과 생각이 자신의 욕망에서 시작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인지를 검증 받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도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모든 생각과 계획을 검증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계획이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가운데서 형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인지를 검증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은 반드시 형통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 다음 3절부터 5절까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하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니라"
다윗이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겠다는 계획에 대해서 하나님이 검증하시고 'OK' 사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서 반대의견이 나온 것입니다(3절). 다윗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일라'를 구원하려는 다윗의 계획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내 코가 석자'인데 지금 누가 누구를 돕겠느냐는 푸념을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은 훈련받은 군사들이 아닙니다. 환난을 당하고 빚진 채 쫓겨다니는 한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블레셋의 군대와 맞서서 싸운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또 다시 하나님께 묻습니다(4절). 이것이 다윗의 위대성입니다. 다윗은 이미 확신이 섰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소리를 경청하였습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일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들의 소리가 하나님의 결정을 뒤바꿀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다시 하나님께 엎드린 것입니다. 분명하고도 정확하신 하나님의 뜻을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자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기도란 결정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다윗의 사람들의 생각은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만 하나님의 결정은 아닙니다. 다윗은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었지만 모든 결정권은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결정은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결정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서 올바른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잘 들어야 합니다. 가계 각층의 의견을 수렴해서 더 좋은 정책 결정을 할 수 있다면 최상의 결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결정은 언제나 왜곡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군중 심리가 개인의 결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한 실험을 했습니다. 비슷한 크기의 두 판에 하나는 검은색으로 칠하고 또 다른 하나는 회색으로 칠했습니다. 그리고는 선생님과 50명의 학생 중 40명의 학생들끼리만 미리 약속을 했습니다. 그 약속은 이러했습니다. 선생님이 "어느 판이 검은색입니까?"라고 물으면 40명의 학생 모두가 회색 판을 가리키기로 한 것입니다. 이때 나머지 10명의 학생들이 어떠한 반응을 나타내는가를 보는 실험이었습니다. 심리학자는 이 실험을 열 번에 걸쳐 실시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열 명 모두가 진짜 검은색 판을 가리켰습니다. 그러나 계속 실험을 반복하자 마지막에 가서는 한 명의 학생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9명이 모두 회색을 검은색이라고 가리켰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진리를 좇기보다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 결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판단과 결정은 개인의 감정이나, 사상, 또는 사회적인 관습과 군중심리 등,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서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의 기준이, 그리고 옳고 그름의 기준이 시대에 따라서 언제든지 변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결정은 언제나 안전한 길입니다. 언제나 확실한 진리입니다. 언제나 사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결정은 결코 좌절되거나 패배하거나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결정을 따르기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정권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언제나 숭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중요한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어떤 일에 대해서 중대한 결정을 하실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 모든 결정권을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잠언 16장 3절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결정권을 드리고 하나님이 결정하신 대로 따르면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기도로 하나님께 모든 결정권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된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7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로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 그가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다윗이 사울의 자기를 해하려 하는 계교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 오라 하고 다윗이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의 연고로 이 성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주의 종의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주의 종에게 일러주옵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가 내려오리라 다윗이 가로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붙이리라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다윗이 황무지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황무지 산골에도 유하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시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무사히 '그일라'를 블레셋의 손에서 건져내기는 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윗과 그의 동료들이 걱정하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다윗이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기 위해 '그일라'에 왔다는 소식이 사울 왕에게 전해지자, 사울은 이 때에 말로 다윗을 잡을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기고 모든 군사들을 모집하여 '그일라'를 에워싸려 한 것입니다. 이때 다윗은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제사장의 에봇을 가져오게 한 후에,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묻게 되었습니다.
에봇은 제사장들이 입는 겉옷의 일종으로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보석을 단 흉패를 붙였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데 사용하는 '우림'과 '둠밈'이라는 두 개의 돌이 있었습니다. 우림이라는 말은 빛이라는 뜻이고, 둠밈은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하고도 확실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우림'과 '둠밈'을 이용하였습니다. 다윗도 역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고 싶어서 하나님께에봇을 가져오게 하여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윗에게 두 가지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먼저, 사울이 다윗을 공격하기 위해서 '그일라'로 올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도움을 입은 '그일라' 사람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사울 왕을 도우려고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지체없이 그곳을 떠나 사울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피신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앞으로 닥칠 위험에 대처하고 예비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예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위험한 고비들을 미리 비리 대비하고 극복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도에 게으른 이유는 지금은 별 문제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안하고 배부를 때에는 대부분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위기가 닥치면 그때부터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것이 우리들의 기도 습관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위기의 때, 환난의 때, 고난의 때에 부르짖으라고 말씀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는 것"입니다. 미리 미리 우리들의 삶에 닥치는 재난과 위험을 예방하고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일들까지도 기도하는 자들에게 보여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민감하게 깨어 있는 사람은 위기를 잘 감지합니다. 그래서 그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산 속의 짐승들은 일기의 변화에 대단히 민감합니다. 지신이나 화산 폭발과 같은 자연의 움직임도 미리 감지하고 움직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민감하게 교류하고 살 때, 우리의 영의 안테나가 우리의 삶에 닥쳐오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포착하여 그 중에서 위기의 상황은 미리 대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예민하게 감지하여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과 다윗의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사울은 기도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항상 다윗의 뒤만 쫓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르기 위해 영적 안테나를 하나님을 향해 고정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민감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바르게 듣기 위해 항상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 결과 다윗은 항상 앞서가는 인생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4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다윗이 황무지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황무지 산골에고 유하였음으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시니라"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시는 한 어느 누구도 다윗을 잡을 수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던 다윗은 어린 시절부터 양을 치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노래를 부르던 고백대로 부족함이 없는 풍요롭고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하나님보다 앞서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보다 앞서가지 마십시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결정하시고, 하나님이 준비하십니다. 여러분들께서도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아름답고 복된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살아계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삼상 23장 1~14절 / 강용규목사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주변 나라들이 왕정체제를 취하고 있을 때, 그들은 위기 때마다 왕이 아닌 하나님이 택하신 사사를 통해 그 어려움을 극복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세워졌습니다. 그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이스라엘의 주변국 중 강대국인 블레셋을 물리치기 위해서입니다. 블레셋이 시도 때도 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히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의 요구를 들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초대 왕으로 사울을 세우셨습니다.사울이 왕이 된 것은 블레셋의 위협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져내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사울은 왕으로 세워진 자신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평생 다윗을 쫓아다니며 죽이려는데 그의 생을 허비했습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누구나 평생에 걸쳐 자신의 집을 지으려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개집이라는 것입니다. 어딘가에 매여 불편하다고 하나님께 불평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꼭 개와 같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왕이라는 높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다윗에 대한 미움과, 시기와, 질투에 매여 비참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하여 늘 도망하는 신세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블레셋이 그일라를 덮쳤습니다. 때는 추수 때였습니다. 블레셋은 그일라에 있는 사람들을 사로잡아갔을 뿐만 아니라 추수한 곡식들을 모두 빼앗아갔습니다. 이 소식이 다윗에게 들렸습니다. 블레셋의 손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지는 것이 사울 왕의 역할이건만, 사울 왕은 그일라 사람들이 블레셋에게 재물들을 빼앗기고 포로로 사람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도 거기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의 관심은 다윗을 찾아 죽이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도망자의 신세임에도 그일라 백성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네가 가서 그일라를 건져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에게 “함께 가서 그일라를 건져내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윗의 말에 반대합니다.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그일라를 건지고 싶지만, 따르는 무리들이 지쳐 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일라를 네가 도와주라. 내가 네 손에 블레셋을 붙였느니라.”고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기 위해 그일라로 향했고, 그일라를 해방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일라의 어려움을 보고 먼저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그는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뢰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기브온 땅을 점령하기 전 길갈에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남루한 차림의 나그네들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를 찾아와 “당신들과 함께 이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 섬기기를 원합니다.”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을 받아들여 그 땅에 살도록 해줍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며 위장하고 숨어들어온 기브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일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내게 기도하지 않았다.”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는 소식이 사울에게 전해졌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울은 이제 독안의 든 쥐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다윗을 주셨다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기회일까요?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건져내는 것이 사울왕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에게 주신 그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그 일을 행하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여기며 다윗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사울은 그일라로 출격하려 합니다. 그전에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사울이 저를 죽이려고 군대를 이끌고 오는 것이 맞습니까?” 그리고 “제가 블레셋의 손으로부터 그일라 백성을 구해 주었는데,그들도 저를 사울의 손으로부터 보호하겠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은 “사울이 쳐들어올 때 그일라 사람들이 너를 사울의 손에 넘겨줄 것이다. 그러니 너는 그일라를 떠나라.” 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일라를 떠나 십이라는 황무지로 도망갔습니다. 사울이 군대를 끌고 다윗을 잡으려고 그일라로 왔을 때는 이미 다윗은 그곳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일마다 때마다 기도하는 다윗을 지켜 주셨습니다. 반면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며 기도하지 않는 사울과는 같이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일마다 때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잘못된 길로 가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복음을 전하러 가는 사도 바울의 길이 막혔습니다. 사도 바울이 답답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봅니다. 마케도니아 사람이 나타나 도와달라고 간청합니다. 환상을 본 바울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아시아 대륙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의 틀을 깨고 마케도니아 사람이 지시한 대로 배를 타고 유럽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네압볼리를 거쳐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가 유럽에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가 되고, 그 일로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2009년 모두가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일마다 때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특별한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선하게 산 사람이 받는 복
삼상 23장 1~5절 / 이근수목사
선하게 살기 착하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하더라도 억울한 일을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데도 계속 참는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계속해서 공격을 당해도 참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은 착하고 선하게 사는 사람을 바보로 취급하고 무례하게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믿음으로 선하게 살았습니다. 사울 왕이 미워하여 죽이려고 군대를 풀어 추격하기를 9차례나 했지만 - 다윗은 믿음으로 선하게 대하며 참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다윗을 죽이려던 사울 왕과 그 아들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다윗이 들었습니다. 소인배 같으면 “좋은 사람을 죽이려던 악한 자가 먼저 죽었다. 에이 잘 죽었다”고 막말을 하겠지만 다윗은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가를 지었습니다.[삼하1장]
1. 하나님께 여쭙는 다윗[1,2]
도망 다니던 다윗은 사울 왕이 죽은 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다윗은 길갈로 달려가서 사울의 궁을 접수하고 왕권을 장악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나라가 극도로 혼란한 때에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여호와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이점이 다윗의 훌륭한 점입니다. 우리가 이점을 다윗에게 배워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려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성숙한 믿음과 혜안을 배워야 합니다. 이번뿐만 아니라 다윗은 자신의 거취를 결정할 때 마다 하나님의 뜻을 여쭈었습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다윗은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우리도 중요 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뜻을 물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도 직장을 옮기고, 진급하고, 이사하고, 결혼하고, 진학하고, 사업을 시작할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응답을 받으면 순종해야 하고 응답이 없으면 욕심을 내지 말고 순종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즉시 순종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순종합시다. 그래서 다윗처럼 하나님의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 고비마다 하나님께 여쭌 다윗
(1) 블레셋을 물리치러 갈까요?[삼상 23:1-5]
불레셋이 그일라를 침략하여 동족의 곡식을 탈취 해 갈 때 다윗은 불레셋을 치러 가야 하는 지를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일라로 내려가서 블레셋을 물리치라고 명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일라를 주시고 블레셋을 물리치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일라로 달려가서 원수 블레셋을 물리치고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다.
(2) 그일라를 떠날까요?[삼상 23:11-13]
다윗 공동체가 블레셋을 물리치고 그일라를 구하고 주둔해 있을 때 사울 왕이 그일라로 다윗을 잡으러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또 여쭈었습니다.
하나님, 사울 왕이 그일라에 오겠습니까?” 라고 물으니 하나님이 대답하시기를, ‘그렇다’고 하시며 ‘그일라 사람들이 너를 사울에게 넘겨줄 것이니 너는 어서 그일라를 떠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즉시 공동체 600명을 이끌고 그일라를 떠났습니다. 이와 같이 다윗은 중요한 때 마다 하나님께 여쭈어서 응답을 받고 인도를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여쭙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보호를 받고 인도를 받고 구원받고,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다윗에게 응답하신 하나님[2,3]
사울 왕이 죽고 난 뒤 다윗이 자신이 거취를 하나님께 여쭈니 하나님은 ‘유다 헤브론으로 가라’ 고 지시하셨습니다. [1,2] 이는 의외의 응답이었습니다. 사울이 죽었으니 궁을 접수하고 정권을 장악하라고 하시지 않고 반대 방향인 남쪽 헤브론으로 내려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가족들과 600명 공동체를 이끌고 헤브론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공동체 식구들을 헤브론 각성에 흩어져 살도록 조처 해 주었습니다.[3]
2. 선하게 산 사람이 받는 복
헤브론은 팔레스타인 남쪽 지역으로 유다 지파가 사는 땅입니다. 다윗은 유다 지파였습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헤브론에 돌아온 다윗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1) 유다의 왕이 된 다윗[4]
유다 지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향으로 돌아온 다윗을 그들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렇게 사울 왕에게 시달리고 고통 받던 다윗은 동족이 사는 지역에 와서 뜨거운 환영과 사랑을 받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선하게 믿음으로 산 다윗이 보상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순적하고 순탄하게 유다 지파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착하고 선하게 살고도 사울 왕에게 미움을 받은 다윗, 왕에게 충성했는데도 도리어 왕이 의심하고 죽이려 해도 대항하지 않고 도망을 다니며 인내한 다윗-아말렉을 물리치고 얻은 전리품을 지친 군인들과 상처받은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고 위로한 다윗- 그 보상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스스로 정권을 장악하고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헤브론으로 내려가니 유다지파 사람들이 추대하여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려고 무리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순탄하게 스므스 하게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믿음으로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억울한 일을 만나도 참고 인내하며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선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이 때가 되면 보상해 주십니다. 욕심 내지 않고 선하게 믿음으로 순리대로 살면 진학도 시켜주시고, 진급도 시켜주시고, 사장도 되게 하시고, 의원도 되게 하시고, 장관도 되게 하시고, 대통령도 되게 하십니다. 이런 복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다윗: 「사랑함」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났습니다.
8형제 중 막내(삼상 16:10,11)아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소년 시절에 혈색이 좋았고, 눈이 빛나고 빼어났고
얼굴은 미남이었습니다(삼상 16:12). 요즘 말로 꽃미남이었습니다. 이탈리아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양치는 목동-다윗” 조각 상- 을 보면 튼튼하고 균형 잡히고 잘 생긴 미남 다윗에게 매료됩니다.
다윗은 양을 칠 때 사자나 곰을 쳐 죽였던 용맹하고 힙이 센 소년이었습니다(삼상 17:34-36). 여기서 갈고 닥은 실력으로 골리앗도 이겼습니다.
다윗은 음악적 소질이 비상하였습니다.
다윗은 수금을 잘 탄다고 알려졌고, 노래를 잘한다고 소문이 났고, 시와 찬미를 많이 작사 작곡한 음악가였습니다.
다윗은 음악 문학 무예에 뛰어난 군인, 정치인이었고 전인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배반했을 때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기로 하시고, 선지자 사무엘을 베들레헴에 보내어 차기 왕으로 일찌기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그 중심을 보신다"(삼상 16:7)고 하시며 어린 다윗을 택하시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세우셨습니다(삼상 16:12,13)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은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되었습니다. 즉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라를 구한 애국자 다윗[삼상17장]
어린 다윗은 불레셋의 침략을 받아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을때 적장 골리앗을 죽이고 나라를 구한 애국자 였습니다.
사울 왕에게 미움 받은 다윗[삼상18장-19장]
그렇지만 사울 왕은 다윗이 자기의 왕권을 노린다고 의심받고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승승장구 하였습니다.
처음 아둘람 굴에 모인 다윗 공동체는 상처받은 오합지졸 이었지만 후에는 백전백승 하는 강한 군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매 사울 왕이 죽고 순탄하게 다윗은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것을 성경은 매우 간략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이는 다윗이 왕이 되었지만 아주 조용히 조촐하게 취임식을 했다는 뜻입니다. 못난 위인들은 이럴 때 취임식을 거창하게 과시하며 합니다. 그러나 믿음 좋은 다윗, 지혜로운 다윗, 겸손한 다윗, 훌륭한 다윗은 혼란 중에 있는 백성들을 생각하고, 아주 검소하고 취임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무능한 왕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1) 야베스인들의 선행을 칭찬한 다윗 왕[4-5]
왕으로 즉위한 다윗은, 요단 강 동편에 사는 므낫세 반 지파의 후손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위험을 무릎 쓰고 사울 왕과 그의 왕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장례를 모셨다는 말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그들의 선행을 칭찬하였습니다.
나라가 망해 왕과 왕자들이 죽었지만 장례를 지내지 못하는 딱한 형편을 알고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이스라엘 왕실이나 조정 그리고 베냐민 지파가 감당해야 할 왕의 장례식을 자원하여 감당하였습니다. 야베스 사람들이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이 그들을 칭찬하였습니다.
2) 야베스인들을 축복한 다윗[6]
다윗은 야베스인들의 선행을 칭찬할 뿐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도 야베스 사람들에게 보상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의 주 사울은 죽었고 내가 왕이 되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7]
다윗이 누구입니까?
왕 중의 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구세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선하신 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사랑의 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좋은 신 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결론
2006년 새해 벽두입니다. 다음주는 전통 설날입니다. 저는 바랍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새해에 믿음으로 착하고 선하게 열심히 살아서 다윗이 받은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에는 다윗처럼 잘 되기를 축복합니다. 다윗처럼 진학하고 진급하고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새해에 믿음으로 착하고 선하게 살아서 마침내 하나님이 시는 보상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