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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제6대왕이자 최초로 태왕이라는 표기를 사용했던 태조왕에 대해서 말입니다.
태조왕은 어머니가 대리청정햇지만 우선적으로 요서지역(현재의 난하일수도 있고 현재의 요하일수도 있고..)에 10여개의 성을 쌓고 한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그리고 태조왕이 성장하자 왕은 주변국을 정복하면서 고구려의 영토를 최대한 넓혀가기 시작했습니다. 박영규씨의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에서는 태조왕이 중국 동해안 일대까지 석권했음을 말하는 지도와 글이 있습니다.
그 증거가 동해곡이라든지 남해에 대한 분석과 조나와 주나에 대한 분석도 있습니다.
보신분들께서는 아시겠지만.. 과장이 있다고 말해야 하나요? 아니면 그정도로 넓혔다는것이 확실에 가까운것인가요?
몇몇가지 또다른 자료를 올립니다. 주몽 역사토론방에서 퍼갔고 있던 자료임다. 밑에 자료는요
그에 비해 태조왕은 전형적인 모사 타입이지요. 자신이 직접 나서기 보다는 부하들을 시켜 군대를 통솔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뒤에서 부하장수들의 승리를 뒷받침하는 계략을 꾸며 두지요. 태조왕은 한나라의 환관세력을 이용해 한나라 왕실과 조정을 어지럽히고 유능한 장수들을 제거해 나갑니다. 게다가 한나라의 과도한 세금에 허덕이고 있는 지방의 농민들에게 유언비어나 선동공작을 하여 곳곳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게 해 한나라가 힘을 한데 모으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서식 표현으로 하자면 머리와 꼬리를 돌볼 틈이 없도록) 유능한 장수도 없고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고 왕실과 조정이 환관의 발호로 인해 엉망이 된 한나라를 고구려는 곳곳에서 손쉽게 격파해 나가지요. 솔직히 나관중은 태조왕에게 감사해야 됩니다. 그의 소설 삼국지연의의 영웅들이 나타나게 했던 ‘난세’라는 시대적 배경을 태조왕이 만들어 주었으니까요.
게다가 화신(火神)이라고 불리 울 정도로 화공에 능했다고 합니다. 화공에 능하다는 것은 풍향이나 천문에도 능하다는 뜻이 됩니다. (불 지르자마자 풍향이 아군 쪽으로 바뀐다든가 불 지르자마자 갑자기 소나기가 온다든가 하는 개떡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가 짜둔 계책은 열이면 열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딱딱 맞아 들어갔다고 하니 ‘장막 속에 앉아서 만리를 내다본다.’ 라는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후한서]에는 태조왕에 대해 ‘궁(태조왕의 이름)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열어 세상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중국의 사서에서 자기나라 임금도 아니고 남의나라 임금에 대한 평가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태조왕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 수 있습니다.
태조왕 시절에 고구려의 영토는 급격하게 팽창하기 시작합니다. 영토가 한반도나 북만주 일대보다는 현재의 중국영토를 많이 차지하게되고. 서쪽으로는 요서지역을 차지해서 한나라의 현도에까지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산동반도와 화북평야, 북평, 업, 수춘, 건업은 물론 양자강 이남까지 차지했지요. 한나라의 지역명칭인 주로 따진다면 유주, 기주의 절반, 청주, 서주, 양주의 절반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 입니다. 이로 인해 부여와 한나라의 교통로를 차단되어 버렸습니다. 동쪽으로는 우수리강까지 이르고요.
이처럼 고구려의 세력권이 어마어마하게 팽창하자 부여는 고구려에 화친을 제의합니다. 태조왕은 얼씨구나 하고 화친을 받아들이지요. 어차피 한나라를 아주 보내버릴 참이었는데 부여와 화친을 맺게 되면 뒤통수 맞을 염려 없이 한나라를 마음 놓고 전력을 다해 공격할 수 있거든요.
이후 태조왕은 현도를 칠 준비를 하는데요. 선비와 동맹을 맺고 형식적으론 독립국이지만 고구려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예맥에게도 군사공출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마한의 잔존세력(마한은 서기 8년 온조왕에 의해 멸망당하는데 그때 잔존세력들이 고구려에 의탁하게 됩니다. 유리왕은 그들을 모두 받아주고 영토를 떼어주어 살도록 해주지요.)도 전쟁에 끌어들입니다. 그리하여 한나라와 동북방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들이 모두 고구려편이 됩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한나라는 서기121년에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에게 15만 병력을 주어 고구려를 침략하는데 이를 태조왕의 아우인 수성(고구려 7대 차대왕)이 이끄는 2천 병력(기(騎)라는 표현을 안 한 것을 보니 기병은 아닌 것 같고 보병과 궁병이 적당히 섞인 혼성군인 것 같습니다.)에게 몰살당하고 맙니다.
그 과정을 [후한서]의 기록에 나온 대로 설명하자면 수성이 이끄는 병력이 적은 것을 얕잡아 본 한나라군대가 도망치는 수성을 쫓아가다가(유인작전인 줄도 모르고) 좁은 협곡에 대군이 꼼짝없이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수성은 갇혀 있는 한나라 군에게(아마 태조왕이 미리 준비한 것이겠지만) 통나무와 돌과 불화살을 퍼부어서 협곡을 가마솥으로 삼아 15만 대군을 통째로 태워버립니다. 한나라군 중에 살아 돌아간 병사가 백 명이고 나머지는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고구려 쪽 전사자는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혹시 부상자로 분류된 병사들 중에 통나무나 돌을 나르다가 손목을 삐끗한 병사가 몇 명 있을지도 모르죠.)
대패한 한나라는 광양과 어양, 우북평, 탁군 등에서 다시 8만 대군을 결집해서 고구려에 대항했으나 수성이 이끄는 철기 5천의 기습을 받아 또 패배하고 맙니다.
한나라 군을 상대로 두 차례나 대승을 거둔 태조왕은 그해 4월 선비와 연합하여 한나라의 요대현을 공격합니다. 이에 요동태수 채풍이 다시 대군을 (중국인들은 그렇게 죽여도 왜 자꾸 대군이 편성되는 것인지 에휴, 끝이 없어요.) 이끌고 고구려군에 대항합니다만 채풍은 신창에서 장렬히 전사합니다. 이때 경모, 용단, 공손포 등등 한나라에서 한가락씩 하는 장수들이 죄다 전사하고요. 그들과 함께 전사한 자들 중에 장수들만 10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한나라 군부의 기둥뿌리를 뽑아 버린 셈이지요.
이 여세를 몰아 고구려는 이번엔 마한과 예맥의 병사들과 함께 현도로 쳐들어갑니다. 현도가 떨어지면 병주가 고구려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건 시간문제고 병주가 떨어지면 낙양은…… 노홍철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는 거야!’ 죠.
고구려의 맹공으로 인해 국운이 흔들리는 위기를 맞은 한나라는 사절단을 보내(거의 목숨을 걸고 고구려영토를 가로질러 갔지요.) 부여에 통사정을 해서 원군을 요청합니다. 한나라의 애원을 뿌리치지 못한 부여천제는 자기가 먼저 제안해서 맺은 고구려와의 화친을 깨고 아들 위구태에게 철기 2만을 주어 고구려의 후방 보급로를 급습하여 물자를 빼앗고 현도를 공격하는 고구려군의 후방을 공격합니다. 이 때문에 고구려는 눈앞에 둔 현도 탈환과 한나라 정복에 실패하고 맙니다. 부여의 배신에 얼마나 열 받았으면 태조왕은 그 일로 화병이 터져서 자리에 누워 버립니다.
태조왕이 병이 들어 눕자 한나라의 황제 유고는 눈치를 살살 보다가 태조왕의 병문안사절 겸 화친사절을 보냅니다. 사절은 고구려에 화친을 제의하면서 이후로는 한나라가 절대로 고구려를 침략하지 않을 테니까 고구려도 한나라를 침략하지 말아달라고 하고 현재 고구려에 잡혀있는 한나라사람들은 성인 한 명당 비단 48필 어린아이는 한 명당 24필을 줄 테니 포로들을 놓아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여와 통교할 수 있기만 하면 황무지라도 상관없고 돌산에 늪지라도 상관없으니까 길을 내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한나라는 굴욕을 감수하고서라도 고구려와 화친해야 했습니다. 곳곳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궁궐에서는 외척과 환관이 권력다툼을 하느라 나라가 엉망이었으니까요. 태조왕에게도 화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나라 정복을 실패하게 만든 부여에게 복수하려면 일단 한나라의 화친을 받아들여 두는 게 좋기 때문이지요. 태조왕은 부여에 대해 단단히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한나라와 고구려는 화친을 맺게 됩니다.
태조왕에게는 별로 위로가 안 되는 일이지만 아무튼 한나라와의 화친으로 고구려는 떼돈을 벌었습니다. 한나라와의 전쟁으로 고구려는 병사와 백성, 관리를 포함하여 한나라포로를 십수 만 명을 잡아 두고 있었는데요. 성인 1명당 비단 48필이라고 했으니 1만 명이라고 해도 비단이 48만 필이거든요. 비단 48만 필을 쌓으면 어떤 산이 될지 저로서는 짐작도 못할 지경인데 포로가 십 수만 명이라고 하니까 고구려의 시장에서 비단 값이 껌 값이 되었겠군요. 어쩌면 비단으로 똥을 닦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나라 쪽에는 잡아둔 고구려 포로가 없었습니다. 있었다고 해도 공짜로 풀어 주어야 했겠죠. 누가 보아도 승전국은 고구려니까요.
이후 태조왕은 부여에 대한 복수전을 하려 하지만 아우 수성이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반대이유는 그 당시까지는 부여가 한나라보다는 강한 나라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만 실제 이유는 수성이 형인 태조왕을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할 역모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의 대권을 가진 두 권력자의 마찰은 수성의 반란으로 마무리되고요. 수성은 형인 태조왕을 밀어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지요. 이 사람이 바로 고구려 7대 왕(‘태’자도 붙여주기 싫습니다.)인 차대왕 입니다.
고구려 내부에서 권력다툼이 일어나고 있는 틈을 타서 한나라는 화친을 어기고 현도에 둔전육부를 설치하지요. 이후 한나라는 차근차근 잃었던 영토를 수복하고 고구려에서는 폭군 차대왕이 태조왕 때의 유능한 신료들을 숙청하며 실정이 거듭 이어지면서 태조왕이 확보했던 한나라영토를 대부분 잃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의 패왕’ 하면 떠올리는 사람이 광개토태왕 밖에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파서 제가 그만 열을 올린 모양입니다만 분명한 것은 태조왕은 광개토태왕 이상으로 뛰어난 임금이라는 겁니다.
광개토태왕은 숙부인 소수림왕과 아버지인 고국양왕의 노력으로 내정을 단단히 하고 제도를 개선하고 백제 근구수왕에게 전사한 고국원왕의 복수를 하기위해 막강한 군대를 양성하고, 태학의 설립으로 행정업무에 뛰어난 인재들을 얻고 긴축재정 정책으로 국고를 튼튼히 해두어서 즉위 후에 ‘바로’ 전쟁만 하면 되는 상태의 고구려를 물려받아 그 업적을 이루어 냈습니다. 즉 선대왕들이 깔아둔 레일 위를 신나게 달린 것 뿐 이었지요.
그에 비해 태조왕은 폭군 모본왕이 다 말아먹은 알거지상태의 국고와 작은 영토. 개나 소나 다 고구려를 깔보고 있던 외교상태. 폭군의 숙청으로 인해 유능한 인재는 다 죽고 평범하거나 그 이하의 수준의 인재, 이런 것들을 물려받았는데도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 냈습니다.
고구려를 기업에 비유하자면 직원들 월급주기에 급급했던 소규모 기업에 불과한 고구려를 태조왕이 대기업으로 급성장 시켰고 폭군과 그 밖의 왕들에 의해 다시 중소기업이 되었다가 광개토태왕에 의해 글로벌대기업으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지요. 다시 말해 태조왕이 없었다면 광개토태왕도 그만한 업적을 이룰 수 없었을 겁니다.
묘호만 보아도 광개토태왕의 묘호는 ‘땅의 경계를 넓게 개척하여 나라에 평안을 가져다 준 좋은 태왕’(廣開土境平安好太王) 이라는 의미일 뿐인데 (정식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입니다. 국강상은 태왕이 묻힌 곳이고 광개토 경 평안 호는 태왕의 치적을 나타내며 태왕은 고구려에서 일반적으로 왕을 지칭할 때 쓰는 말 입니다. 광개토태왕은 비문을 세운 덕분에 정식묘호가 남아 있지만 다른 왕들은 간략하게 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구삼국사를 편찬한 신라인이나 삼국사기를 편찬한 부식이 아저씨가 고구려왕 묘호기술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탓이지요.)
태조(太祖)왕은 ‘큰 할아버지’ ‘위대한 조상’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태조라는 이 명칭은 훗날 많은 중국왕조와 우리 한국의 왕조의 건국자의 묘호가 될 정도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고구려인들은 동명성왕에 버금가는 제 2의 건국자라는 의미에서 그에게 이런 묘호를 주었던 것 같습니다. 묘호만 놓고 봐도 누가 더 훌륭한 임금인지 알 수 있지요.
(참고로 태조라는 명칭은 우리나라가 제일먼저 썼습니다. 중국은 고조, 제, 황, 이런 것을 썼고 태조를 쓰는 것은 5대 시기의 후량과 후주입니다. 고구려가 중국보다 대략 700년 정도 앞서서 태조의 칭호를 쓴 거지요.)
※제 개인적인 의혹……이라기 보단 의문이 드는 것은 태조왕이 한나라와의 전쟁을 시작할 때 그 공격명분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해’라는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것이거든요. 태조왕이 확보한 영토를 본다면 고조선의 영토가 양자강 이남까지 뻗쳤다는 말이 되는데 제가 아는 지식과는 좀 혼동됩니다.
조사해도 다 안 나오는 우리나라 고대사를 생각할 때면 우리나라의 분단과 중국 땅이 되어버린 옛 고구려 땅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차후 고구려왕조실록에 대한 글도 올리겠습니다. 글쓰는 현재 바쁜일이 있어서리..ㅠ.ㅠ 많은 답변 바랍니다.
첫댓글 폭군 모본왕,차대왕에 대해선 승자의 입장에서 본 시각이라 생각해서 개인적으로 인정하기 어렵고 그러나 태조왕은 오죽 뛰어났으면 나라를 사실상 건국한 국조왕이라고 했겠습니까 말 그대로 ㄷㄷㄷ 한에서 아주 징글징글했다는군요..ㅋ
하아...박영규...한국 고대사의 걸림돌...에거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