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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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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설교 | |
성경낭독 : 신 30:15-20; 마 5:21-37 본문 : 행 16:24-40 제목 : “간수에게 전해진 복음” |
간수에게 전해진 복음
여종으로 인한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주인들의 고소로 인하여 바울과 실라는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힙니다. 당시 행정 장관들 밑에 있던 경찰들을 ‘릭토르’라고 불렀는데, 릭토르들은 관직의 상징으로써 ‘파스세스 에트 세쿠레스’라고 불리는 막대기 다발을 들고 다녔습니다. 이 막대기 다발은 ‘체벌을 가할 수 있는 권리’, 심지어는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경찰들이야 사실상 시민들을 보호하는 쪽에 임무가 더 가 있지만, 고대에는 사법, 치안, 형벌까지 모조리 한꺼번에 다 수행하던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이 두 선교사는 이 릭토르들의 막대기로 두들겨 맞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통상 이런 매질은 공개적으로 벌어지는 것이고 많은 경우 옷을 벗긴 채로 얻어맞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밧줄이나 가죽 조각으로 하는 채찍질이나 사슬로 때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두들겨 맞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고대의 감옥을 현대처럼 좋은 시설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시대는 ‘죄수의 인권’같은 것은 전혀 고려되지조차 않았던 시절입니다. 두 다리는 목재로 만든, 구멍이 뚫린 차꼬에 채워졌습니다. 전혀 움직일 수 없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다리를 압박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수들은 보통 앉거나 딱딱한 바닥 위에서 자야 했고, 가혹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맞아서 상처가 많은 상태로, 몸을 움직일 수 없게 차꼬로 채워진 상태로, 제대로 누워서 쉴 수도 없는 차가운 바닥 위에서 잠을 자야 하는 감옥 속에서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찬송을” 불렀습니다(25절).
고난 가운데의 찬송
이들의 찬송은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우리는 로마서 5장 3절,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라는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시험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가르침을 성경으로부터 얻습니다.
하지만 시험 중 즐거워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도 자주 고난 가운데 처하게 되지만, 그런 고난 중에도 힘겨워 쓰러지는 대신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겨우 버티는” 정도도 힘이 들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울과 실라는 그런 상황에서도 찬송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그분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볼 수는 없으니, 그들이 그날 밤에 실제로 무엇을 느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이 두 선교사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 놓여 있는 이 정황, 이 사실과, 또 성경이 가르치는 가르침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어떻게 찬송할 수 있었는지 어느 정도 알 수는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찬송이 결과적으로 무엇을 빚어냈는지도 말씀을 관찰함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1. 고난의 성격
우선은 이들이 겪고 있는 고난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받은 고통’이었다는 점을 생각합시다.
그들의 마음에 중추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생각, 그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일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 이런 것은 절대적으로,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 받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마음 속에 주님의 가르침이 당연히 떠오르지 않았을까요?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던 말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 5:10-12a)
이 말씀이 정확하게 지금 자신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생각지 않았을까요?
우선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들의 찬송, 이들의 이 ‘고난 가운데의 찬송’이란 그 중추에, 그 핵심에, “복음을 위하여 받는 고난”이라는 생각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2. 찬송은 언제 일어나는가?
그렇다면 ‘복음’이 그 중심에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찬송이 일어나게 되는가?
이것을 골로새서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봅시다. 골로새서 3장 16-17절 말씀입니다.
골 3:16-17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 말씀은 몇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한다”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하고 쉼표를 하나 찍읍시다.
둘째 부분은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한다”입니다. 역시 이 다음에 쉼표를 하나 찍읍시다.
그리고 셋째 부분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입니다.
이것이 16절까지 내용이고, 17절은 “말에나 일에나 다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네 부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약어로 요약하자면
말씀-권면-찬양-감사
입니다. 그런데 말씀과 권면이 비슷한 것이니까 하나로 묶으면
근본적 원인이 되는 ‘말씀’
그리고 그 말씀으로 인해 일어나는 ‘찬송’
그리고 그것의 삶에서의 증거로서의 ‘감사’
이렇게 세 주제입니다.
신자의 삶에 ‘말씀’으로 인해 ‘찬송’과 ‘감사’가 일어나는 이유는 이 말씀이 속해 있는 골로새서 3장의 제일 첫 머리, 1절 말씀을 통해 그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그렇습니다. 신자의 삶은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그가 “하늘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늘에 속했을 때, 그의 삶의 특성이 무엇인가 하면,
“말씀” 속에 풍성히 거하고,
이 말씀 속에서의 삶이 “찬송”을 낳습니다.
나아가 삶에서의 증거는 “감사”입니다.
골로새서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앞에 말씀드린 세 주제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의 삶 속에 말씀이 가득하여, 그 가득한 말씀으로 인해 찬송이 넘치게 되고, 삶에서는 감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 이것이 ‘하늘에 속한 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즉 우리는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힌 이 열악한 상황 가운데서도 “어떻게 찬송할 수 있었을까?”를 물었을 때, 골로새서가 가르쳐주는 ‘찬송의 출처’, ‘그리스도인이 하늘에 속한 삶을 살 때’의 ‘찬송의 출처’를 알 수가 있습니다. 찬송은 그저 어쩌다가 나온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복음 전하는 일”로 인하여 박해 가운데 있었고, 이로 인하여 찬송했습니다! 그들의 삶이 말씀으로 충만했고, 그러므로 상황이 그들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찬송은 마치 신자의 ‘호흡’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이 충만한 사람은 찬송하게 됩니다. 비록 그들이 온통 매질을 당한 상처 투성이로,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다리에 상처를 주는 차꼬에 차여 있었음에도, 그들이 가진 이 “감사의 삶”과 “찬송의 출처”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찬송은 작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애를 써서 찬송해야지!”가 아닙니다. 아마도 바울과 실라에게 그 밤의 찬송은 그야말로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일 것입니다. 신자는 고통을 당한하고 해서 “감사의 삶”이나 “찬송의 태도”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한 핍박을 받을 때 ‘더욱 찬송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이한 역설이죠. 오직 ‘하늘에 속한 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기이한 역설입니다.
교부께서 제가 지금 주석한 것처럼 골로새서를 참고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여기 바울과 실라의 상황을 말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음이 하늘에 있을 때, 다리는 차꼬를 차고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골로새서의 가르침 그대로입니다. 찬송이 언제 나오는가? 하늘에 속한 사람이 마음 속에 복음이 가득차 있을 때, 삶이 감사로 넘칠 때, 그의 입에서는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단지 노래를 흥얼거리는 문제가 아닙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로서의 참된 찬송으로서, 이런 찬송은 “하늘에 속한 사람의 징표”같은 것입니다. 복음으로 가득찬 사람의 입에 끊이지 않는 찬송과, 그의 삶에 가득한 감사를, 성도들께서도 겪고 가지게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구원의 메시지
그리고 이제 이 찬송이 어떻게 ‘구원’을 이루어내는지를 보십시다.
이 찬송의 신비
이렇게 노랫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을 때의 상황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25절을 보면 바울과 실라가 찬송을 할 때 “죄수들이 들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묘한 신비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는 것은 바울과 실라는 ‘상당한 홀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하고 매질을 당하는, 그러니까 오늘날 고위 관직자들이 감옥에 갈 때처럼 그런 호사스런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매우 천하게 대우를 받는 중에 감옥에 갇혔습니다. 여종의 주인들이 분명히
이 사람들은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한다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라고 했으니, 여기에는 모종의 ‘민족우월주의’나 ‘국가우월주의’같은 것도 묻어납니다. 말하자면 “하찮은 유대인들은 자꾸 여기와서 소동을 일으켜! 우리는 위대한 로마시민들이야!” 이런 느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잡혀온 사람들이 한밤중에 감옥 중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이 상황을 통상적으로 이해하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보통의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주위에 있는 죄수들도, 거기 지키는 간수들도 “야! 이 자식들아! 조용히 안해! 잠 좀 자자!” 뭐 이렇게 했을 법 합니다.
하지만 25절 말씀은 “죄수들이 들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억울하게 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일반적인 경우는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거칠고 나쁜 사람들이 많은 법입니다. 그런데도 밤중에 잠을 자야 하는 시간에, 찬송을 부르는데, 모두들 듣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한 장면입니다. 왜 죄수들은 찬송 소리를 듣고만 있었을까요? 왜 타박하거나 멈추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신비한 힘’, ‘사람들을 매료하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은 보통 ‘범접할 수 없는 어떤 힘’을 느낄 때, 그 대상을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그런 경험이 없으신가요? 미팅을 나갔는데, 상대로 나온 여자/남자가 너무 예쁘거나, 너무 잘생겼을 때, 얼어서 말을 잘 못하는 경우들이 있지 않습니까? 가끔씩 어떤 사람들은 외모만으로도 상대를 압도해서,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되는 그런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좀 경박한 예라면, 좀 더 무거운 예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래된 영화이지만, “벤허”에 보면 주인공 벤허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 주인공 벤허가 노예가 되어, 손에 밧줄이 묶인 채로 사막길을 끌려가는데, 목이 너무 말라서 쓰러지니까 한 사람이 다가와 그에게 물을 줍니다. 그런데 그 장면에 감독관 같은 사람이 와서 물을 주는 그를 향해서 욕을 하면서 내쫓으려고 하는데, 그의 모습에 압도되어 물러서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물을 준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감독관은 예수님의 신비한 어떤 힘에 완전히 압도당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간혹 그런 일들을 경험합니다.
밤중에 울려퍼지는 찬송을 들을 때, 죄수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이 오늘 낮에 광장에서 매질을 당하고 만신창이가 되어 끌려 들어온 사람인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보통의 경우, 일반의 사람들이라면, 끙끙대며 앓기나 하거나, 아니면 자기를 때린 릭토르들이나, 자기를 고발한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들을 욕을 해대거나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아마 거기 있는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이런 일들에 익숙한 사람일 것입니다. 첫날 감옥에 들어온 사람들의 양태를 대부분이 잘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참혹한 일을 당하고도, 밤중에 하나님께 찬송을 합니다! 굉장히 놀랍고도 이질적인 모습이 아닙니까! 아마도 여기에서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경건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한 주석가는 “두 선교사의 행동은 감옥의 다른 죄수들에게 일종의 경외감을 불러 일으켰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구원은 어떻게 작용했는가?
그리고 이 찬송은 무슨 작용을 했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찬송을 통하여 일어난 일에, 사실은 그 전부터 어떤 작용을 하셔서, 놀라운 구원을 이루시는가? 이것이 다음의 말씀들에 나와 있습니다. 먼저 30절을 봅시다. 여기서 간수는 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합니다.
30절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 말씀은 일련의 사건이 일어난 후 간수가 한 말입니다.
그런데 맥락을 찬찬히 보면 참 이상한 말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지?”라는 생각이 드는 말입니다.
정황을 봅시다.
바울과 실라가 찬송할 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26절). 희한한 일이죠. 지진이 난 것도 범상치 않은 일인데, 지진과 함께 감옥 문이 다 열린 것이 희한한 일이고, 또 사람들의 차꼬가 다 풀린 것도 기이한 일입니다. 일반적인 자연 현상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진이 난다고 해서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대단히 기이한 일임에 분명합니다.
당연히, 거기 있던 죄수들은 바울과 실라의 찬송 때문에 경외감을 갖고 있는 중에 이 일이 일어났으니, 이들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지금 일어난 이 일이 범상치 않은 일임을, 또 분명히 이 사람들의 찬송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릴 때 잽싸게 도망칠 법한데 그렇게 하지 않고 바울과 실라의 말을 듣고 거기 머물러 있었습니다. 찬송의 신비와 일어난 일의 놀라움 때문에 완전히 압도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깜짝 놀라서 달려온 간수는 27절에 보면 “자다가 깨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정황을 잘 모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옥문들이 다 열려 있습니다. 27절을 보면 “죄수들이 도망간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했다”고 합니다. 좀 과하다 싶을 수도 있지만,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보면 자결하려 한 것은, 아마도 그대로 다음 날이 되어본들 그 사람은 책임을 지고 사형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상황에 바울이 소리를 질러서 간수를 막습니다. “우리가 다 여기 있다! 그러니까 몸을 상하지 말아라!”(28절)
아까 읽은 30절 말씀은 이런 정황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진이 났고,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다 풀렸는데, 죄수들이 도망하지 않고 있었다. 이 일은 그냥 간수의 입장에서 보면 “다행이다”할 만한 일일 수는 있는데, 왜 이 사람은 바울에게 뜬금없이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했을까요? 이 일이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간수는 왜 바울과 실라에게 구원을 묻습니까?
심지어 29절 말씀을 보면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다”고 합니다. 왜 간수는 “무서워 떱”니까? 지진은 끝났는데 무서울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냥 “야! 지진 지나갔다! 다들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 이렇게 하면 그만일 일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무서웠습니까? 간수는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습니다. 희한한 일이지요. 왜 그렇게 한 것입니까?
과연 간수가 선지식이 없이, 그전에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이런 종류의 사건을 만났을 때 이렇게 말할까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아마 실제로 이런 일이 요즘 일어난다면, 간수는 “와 천만다행이네, 이것들아 얼른 들어가!”하고 말았을 일입니다. 간수가 이렇게 반응했다는 것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그의 마음속에 바울과 실라에 대한 어떤 인상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 무엇인가? 그것은 30절에서 간수가 한 말에 힌트가 있습니다. 간수는 29절에서 “무서워 떨며”라고 했고, 또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다”라고 했고, 3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왜 간수는 이 말을 했습니까? 이 말은 어디서 나온 말입니까?
이 말은 17절에 나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바울과 실라가 잡혀올 때, 잡혀온 이유는 귀신들린 여종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종은 바울과 실라가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그렇습니다!
간수가 하는 말이 똑같지 않습니까!
간수는 여종이 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간수는 사건이 진행되는 중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오늘 잡혀 들어온 이 사람들이, 단순히 강도나 도둑질, 사기범이거나 폭력전과자 같은 것이 아니고, 아마도 그 간수도 잘 알았을(그 지역 사람이었으니까요. 그 여종은 유명했으니까요)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버린! 그래서 주인들의 돈벌이를 망쳐버린! 그런 이유로 여기 들어온 사람들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간수는 여종이 한 이야기를 허투루 듣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여종은 바울과 실라를 따라다니면서 “이 사람들은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다!”라고 소리치고 다녔는데, 이 간수는 이 말을 마음 한켠에 새기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속에 있었기 때문에, 기적적인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문이 다 열리고, 차꼬가 다 풀리는 이런 이해되지 않는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자, 즉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그렇습니다. 간수의 마음에, 어렴풋하던 마음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아! 이 사람들이 진짜 구원을 전하는 사람들이구나!” 그래서 간수는 이 기이한 사건 앞에서, 그들에게 달려가 “무서워”하고, 또 “엎드려서” 구원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지를 물은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간수의 마음 속에 ‘구원의 복음’을 심으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일은 차근차근 진행됩니다. 하나님은 귀신들린 여종을 사용하셨고,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 메시지를 도구로 이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간수의 마음에 박히게 하셨고,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을 때, 심지어 “지진”이 일어났는데, 주석에 의하면, 헬라인들에게 지진은 자주 “신의 현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일들을 접한 간수는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죠! 하나님께서는 찬찬히 각종 요소들을 준비하시고, 간수의 마음을 준비시키셔서, 구원의 복음을 그에게 전하신 것입니다!
찬송, 그리고 참 화평의 복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한 아름다운 상(象)을 떠올리게 됩니다.
일단 우리가 앞서 들었던 골로새서 말씀을 마음에 두십시오. 거기 세 요소를 기억하십시오.
말씀이 가득한 사람이
입술에는 찬송이
삶에서는 감사가 넘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차근차근 준비하신 복음을 전해 들은 이 간수와 그의 가정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십시오.
31절에서 바울은 그 유명한 말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선포하였고, 32절을 보면 주의 말씀을 그 간수와 간수의 집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33절은 간수가 바울과 실라를 씻겨준 후, 온 가족이 다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여기서 인상적인 표현을 씁니다.
그는 그들을 씻어주었으며, 또한 씻음을 받았다.
그러니까 외적으로는 간수가 바울과 실라를 씻어주었지만, 내면적으로는 간수가 오히려 씻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4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이 장면들은 앞서 말씀드린 ‘아름다운 한 상’, ‘아름다운 한 장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말씀을 충만하게 가진 이들이, 찬송으로 하나님의 신비를 외쳤고, 복음 전파를 위하여 귀신들린 여종을 사용하신 하나님이, 간수의 마음에 그 메시지가 박히게 하셨으며, 실제 이 모든 일의 동력이 되는, “감옥 중에서의 찬송”이 지진을 일으켰으며, 이로 인하여 간수와 그의 가족들은 모두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룬 일, 곧 간수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은 “한 가족의 구원을 이룬 일”입니다. 그리고 이 간수와 그의 가족의 구원은 (다음 주일에 다루겠습니다만) 빌립보에서 이룬 대표적 회심 사건의 세 가지 예 중 하나를 이룹니다. 말하자면 이 전체 장면은 “하나님께서 빌립보에서 이렇게 구원을 이루시고 계시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을 형성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이루어진 일은,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어렴풋이 ‘세례’와 ‘성찬’을 연상시킵니다. 간수의 씻어줌과 그 자신의 씻김은 세례를 어렴풋이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죄 사함을 얻은 사람들에게는 만찬이 차려지는 법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은 후에 성찬상에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함께 음식을 먹는 행복한 식사 자리가 만들어집니다. 그러니까 이 마지막 결론의 이야기들은 ‘구원을 준비하신 하나님’과 ‘그에 사용된 복음 전파자들의 찬송’,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내는 복음과 구원으로 인한 아름다운 장면, 씻음과 식사 자리’입니다.
이 전체 모습이, 일을 준비하고 계획하고 이루시는 하나님과, 거기에 사용된 찬송, 그리고 전해진 복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이들이 행복해지는 그림입니다. 씻음을 받은 후에 다 함께 모여 식사하는 장면은, 하나님의 권속으로 참여하게 된 이들이 어떤 행복 가운데 있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포근한 그림 같습니다. 간수는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외쳤지만, 그는 실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포근한 장면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속으로 참여하게 된 이가 실제로 받게 될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 행복입니다.
“찬송”과 “전해진 복음”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집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참된 행복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과 거기에 사용된 복음 전도자들의 아름다운 삶과 행동을 바탕으로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건을 묵상할 때, 우리 마음속에 큰 기쁨이 차오름을 느끼시지 않습니까? 우리 삶에 때로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이 있을 때에도, 우리를 단단하고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확신에 가득 찬 음성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말씀으로 가득 찬, 입에 찬송이 있고, 삶에 감사가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용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씻음’과 ‘행복한 만찬’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누리고 있습니까? 2천년 전에 일어났던 이 일이 우리들 중에도 일어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 구원의 일을 진척시키시고 계심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주께서 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에 참여하는 ‘행복한’ 우리들이 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