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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육군2작전사령부 이철휘 대장
<강철같은 군 현역 4성장군 역시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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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40번, 가족들에게 미안"…>
별 4개가 떴다. 어! 그런데 무서운 인상이 아니고 푸근하네.
대한민국 군인 중 별 4개는 열 손가락에 꼽을 만한데 이렇게 한 시간 이상 흉금을 터놓고 인터뷰를 하다니. 실제 그렇단다. 제2군 창군 이래 이런 사령관 인터뷰는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헷갈렸다. 막상 인터뷰를 시작하니 주객이 전도된 느낌까지 들었다. 인터뷰가 한 시간을 훌쩍 넘어가는데 이철휘 2작전사령관(대장)이 인터뷰를 하는 기자에게 오히려 묻는다. “다음 일정 바쁘지 않죠?”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점점 초조해지는 기자가 쫓기지 않고 충분히 취재할 수 있도록 해 준 배려였다. 그는 “대장으로 승진한 후 대구에서는 처음 근무하는데 무뚝뚝함과 같은 대구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 많이 깨지고 있다”며 “가능하면 지역민과 함께하는 행사에 얼굴을 많이 비칠 것”이라고 말했다.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3일 제2작전사령부 사령관 회의실에서 이철휘 사령관을 만났다.
◆ 손자, 손녀 둔 할아버지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고일리에서 태어나 최고위급 군인 자리에 오른 이철휘 사령관. 벌써 할아버지다. 슬하의 1남1녀가 벌써 결혼해 손자, 손녀를 안겨준 것. 이 사령관 본인은 1남4녀(一男四女)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 군인에 대한 동경은 있었지만 인생이 이렇게 풀릴 줄은 몰랐다. ROTC(학군) 13기로 임관하면서부터 군인이 적성에 딱 맞다 여겼고, 열정을 다했다. 쟁쟁한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을 제치고 대장까지 올랐다. 전공도 특이하다. 명지대 전자계산학과를 졸업했고, 동국대 행정대학원에서 석사, 명지대에서 리더십으로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는 연대장, 육군본부 인력획득과장, 군 참모장, 인사처장, 사단장, 군단장 등을 거치면서 처음과 끝을 항상 생각했다. 언제나 논리적이고 계획적이면서도 조직에 따뜻함이 묻어날 수 있도록 부단히 고민하며 애를 썼다. 아마도 이런 마음의 자세가 그를 ‘포 스타’(★★★★)로 이끌었으리라.
농담처럼 가슴 찡한 얘기를 던졌다.
“가족들에게 참 미안합니다. 특히 이사를 40번이나 했는데도 잘 참고 따라준 아내에게. 딸은 초등학교를 6번, 아들은 4번이나 옮겨다녔는데, 언젠가 아들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이번에는 숙제 안 내 주는 학교로 전학을 가요.’ 웃음이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눈물이 맺힐 정도로 미안했습니다.”
부인에게 띄우는 공개편지를 부탁했더니 늘 마음에 담아둔 얘기인 듯 의외로 어렵잖게 나왔다. “여보, 미안하고 고마워. 가정은 항상 뒷전인 군인 남편을 잘 따라줘서. 장인·장모님 문병차 미국에 한번 간 것이 해외로 함께 간 전부인데 프랑스든 스위스든 당신 가고 싶은 곳으로 내가 꼭 멋진 해외여행을 시켜줄께. 전역(예편)후에라도 약속 지킬테니 믿어줘.”
◆ 지역민과 함께하는 다양한 행사
별 4개인 사령관을 보고 싶으면 육군2작전사령부가 올해 계획하고 있는 공개행사에 참석하면 될 듯싶다. 육군2작전사령부에서 아이디어가 빛나는 기획을 많이 했다. 지난번에는 ‘낙동강지구 전투 전승기념 육군2작전사령관기 태권도 대회’를 열어 성황리에 마쳤다. 올 10월 1일부터 3일까지는 포항에서 낙동강 호국 벨트를 따라 경남 마산까지 이어지는 2박3일 코스의 마라톤 대회를 계획하고 있다. 전국 각지의 마라톤 클럽에서 참가해 조금씩 구간을 나눠 이어달리기를 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벌써 마라톤 마니아들의 반응이 뜨겁다고 한다. 이 밖에도 ‘다부동 지구 전투 재연’ ‘낙동강 방어선 전투 학술세미나’ ‘낙동강 방어 전투 전적지 답사’ ‘6·25 전사자 유해발굴 사업’ ‘장사상륙작전 추모공원 조성’ 등 다양한 행사와 사업들로 지역민과 함께할 예정이다. 주요 행사에는 이 사령관도 참석할 계획.
인터뷰 도중 이 사령관은 강조하고 싶은 듯 “장사 상륙작전에 대해 아느냐”고 기자에게 물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면서 북한군을 유인하기 위해 포항 장사 해안으로 학도병을 태운 배들을 보내 이들이 희생된 작전”이라며 “이 작전으로 희생된 병사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경북도와 함께 240억원을 들여 장사 해수욕장 인근에 추모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중”이라고 말했다.
이 사령관은 “6·25전쟁을 기념해 당시 참전했던 미군 참전용사 및 가족 100명을 대구로 초청, 당시 전투를 치렀던 곳을 둘러보면서 우리 지역을 알리는 행사도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위기는 믿음으로 극복해야
이 사령관에게 인생의 가장 큰 위기가 언제였냐고 묻자 군사령부 근무과장(대령) 시절을 떠올렸다. 그는 “군의 각종 행사와 전반적인 총무 일을 도맡아 했는데, 아무리 해도 표시는 안 나고 육체적·정신적으로 지칠 대로 지쳐 군복을 벗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며 “그 위기를 잘 극복하고 나니 장군 승진과 함께 일이 더 잘 풀렸다”고 말했다.
그는 천안함 사태와 관련해 국민들의 하나된 마음과 군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북한군의 기습에 의한 도발이라는 군의 발표를 100% 믿어야 합니다. 기습은 어떤 형태로든 성공할 확률이 높습니다.
우리 군이 당한 만큼 국민들은 군에 힘을 실어줘야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고, 북한의 또 다른 도발이나 기습 공격을 막을 수 있는 강군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젠 선거도 끝난 만큼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안보에 관한 한 국민이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하는데 본인이 군 생활을 하면서 대장까지 진급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기자가 묻자 그는 “사실 진급할 때마다 전 기수가 승진이 누락될 때를 제외하곤 꼭 진급의 기회를 잡았으니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다. 굳이 따진다면 운오기오(運五技五)”라며 환하게 웃었다.
야전과 정책을 두루 거친 덕장(德將)인 이 사령관은 인터뷰를 끝내고 탁상용 기념시계를 하나 주면서 이런 농담을 했다. “탁상용 시계 옆에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하나씩 빼서 쓰시라.” 모조 다이아몬드 수십개를 보면서 큰 웃음이 터졌다.
※P.S.: 육군2작전사령부는 경상(남,북도)·전라(남,북도)·충청(남,북도)6개도(6個都)와 5개 광역시의 방위를 군사적 관할,책임지고 있다. 예전에는 강원·경기 일부까지 포함한 한강 이남 전체가 육군2작전사령부 관할이었다. 지금은 1군은 강원도, 3군은 경기도를 관할한다.
총 5천㎞가 넘는 광활한 해안선과 국가 산업시설의 70%, 국민의 52%가 거주하는 넓은 작전 지역을 갖고 있다.
Q.『나는 이런 리더가 좋다』의 ‘4방향 리더십’ 개념 정립 시기·계기?
○ 우선 ‘4방향 리더십’에 대하여 잠시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 ‘4방향 리더십’이란, 아래 그림-1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나를 중심으로 상·하·좌·우 4방향의 구성원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조직목표 달성을 위하여 나아가도록 만드는 윤활유와도 같은 리더십입니다.
○ 따라서 ‘4방향 리더십’은 조직의 최고 리더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위고하를 막론한 어떤 위치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리더십이며, 직장뿐만 아니라 가정과 학교 등 어느 조직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 이러한 ‘4방향 리더십’은 제가 2005년 사단장으로 재직 시에 부대 내 교육자료로 책자화됨으로써 전파되었으며, 현재는 육군의 리더십 교범에도 인용되어 있습니다. 저는 ‘4방향 리더십’이 누군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제 스스로 고민하고 연구한 끝에 얻어낸 독창적 산물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 이 정도면 ‘4방향 리더십’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고자 합니다.
○ 36년간의 군 생활에 걸쳐, ‘나는 어떤 리더가 되어, 어떻게 지휘해야 할 것인가?’라는 스스로에 대한 물음은 늘머릿속을 맴도는 화두였습니다.
○ 용기백배했던 젊은 시절에는, 그저 부하들을 이끌어 나아가야 한다는 책임감에 몰두하여, 앞뒤와 주변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용감무쌍하게 전진만을 외치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소득도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런데 어느 순간 주변을 돌아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 행군할 때를 생각해 봅시다. 나는 선두에서 보통의 걸음으로 걷는다 해도 긴 행군장경의 맨 끝에서는 서둘러 따라와야 하고, 행여나 선두에서 조금만 속도를 낸다면 후미는 그야말로 도보가 아닌 구보 수준의 뜀걸음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후미만을 생각하여 마냥 속도를 늦춘다면 상급지휘관이 요구하는 시간을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많고, 내 인접부대들이 어디쯤에서 어떤 상태로 있는지도 수시로 알아봐야 하겠지요.
○ 수 없이 많은 행군을 하면서도 리더의 위치는 어디이며, 그 역할은 어떠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는 데는 임관하고서도 20년 남짓 걸렸습니다.
○ 물론 그 이전 대대장 시절에도 집무실에 ‘나와 주변의사람들’을 연결하는 그림을 붙여 놓고 골똘히 고민하기는 했지만, 1996년 연대장을 역임할 무렵, 당시 사단장님과 대대장들과의 연결, 인접 연대장들과의 협조, 지역의 기관장(시장·군수 등)들과의 관계 등에 대하여 눈을 뜨게되었습니다.
○ 연대장을 마치고 사단에서 참모장 직책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4방향 리더십’이라는 개념이 구체화된것은 이때가 아닌가 합니다. 위로는 사단장님과 군단사령부, 아래로는 참모들과 예하연대, 주변의 인접사단을 고려해야 하는 등 참모장의 역할은 그야말로 ‘4방향 리더십’에서 내 위치를 잘 깨우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 이후 장군이 되어 준장 때 군단의 참모장을 거쳐 소장으로 진급한 후 사단장 재직 시 이러한 제 개념을 조그맣게 책자로 정리함으로써 비로소 ‘4방향 리더십’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 또한 사단장을 마친 후 또 다시 군사령부에서 참모장 직책을 수행하면서 그 동안 참모장 직책 경험 간 느꼈던 사항들을 집대성했으며, 중장으로 진급하여 군단장으로 재직하면서 그때까지 정리된 내용들을 ‘4방향 리더십’이라는 책자로 발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Q. 직업군인이 되겠다고, 최고 군인까지 오르겠다고 결심한 시기는?
○ 1960년대와 1970년대 우리나라가 전체적으로 다 그랬겠지만, 저도 매우 어려운 성장 환경과 함께 고학의 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명지대학교에 입학은 하였으나, 여의치 못한 경제사정은 저로 하여금 대학생활 유지 자체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하더군요.
○ 이 시기에 제게 보인 ‘ROTC 모집 공고’는 그야말로(제게)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그저 장학금을 받아 아무런 걱정없 대학생활을 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지원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선발되더군요. 솔직히 당시만 해도 "직업군인"이라는 개념과 "장군"이라는 군 계급은 생각조차도 할 수 없었습니다.
○ 사실 이렇게 (별 생각없이) 군문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막상 소위로 임관하여 전방의 소대장 생활부터 시작해 보니, ‘아!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여기서 충분히 성공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어렵게 성장해 오면서 겪었던 많은 고초들과 마음고생들이 큰 도움이 된 것 아닌가 싶은데요, 어쨌든 열심히 노력해서 중대장 때는 당시 육사출신 장교 아니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재구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희망이라고 할지 또는 목표라고 할지 처음으로 장군을 생각해 봤습니다.
○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막상 장군이 되자 생각이 좀 달라지더군요. 그때부터는 한 계급 더 높아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사명을 다 하면서 소신있게 군 생활을 하는 것이 값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 하다 보니 오늘에 이르게 된 것 같습니다.
Q. 군 생활 중 가장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와 그 극복과정은?
○ 돌이켜보면 지난 36년의 군 생활은 매 순간 순간이 위기였고 중대한 고비였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비단 과거의 제 경우만이 아니고, 군복(전투복)을 입고 있었던 그리고 지금 군문에 있는 누구라도 마찬가지 일 텐데요, 중요한 것은 그때 어떻게 위기에 대처하고 고비를 관리하느냐가 아닐까 합니다.
○ 저의 경우에, 가장 기억에 남는 위기의 순간은 대령으로 진급한 후 군사령부 인사처에서 근무과장 직책을 수행할 때였던 것 같습니다.
○ 군사령부 근무과장은 인사분야의 핵심 보직으로서 예하의 수 개 군단과 수많은 사단의 부대관리, 사고예방 활동을 총괄해야 하고 군사령부의 각종 행사를 담당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는데, 그야말로 중과부적이더군요. 할 일들은 넘쳐나고 일손은 부족한데, 모두가 여기저기서 고견(?)을 제시하며 높은 수준을 요구하니 참 힘들었습니다.
○ 엎친 데 덮친(성살가상)격으로 당시 건강도 그다지 좋지 않은 상태이다 보니, 그냥 여기서 모든 것을 단념하고 싶었습니다. 매일 밤을 새우며 일을 해도 빛이 나기는커녕, 별 것 아닌 사소한 것으로 인해 지적받는 것에 자존심도 많이 상해 있었구요.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족에게 포기하고 싶은 맘을 전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 그런데 이 시기에 저로 하여금 다시 일어서 나아가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인도였습니다. 명지대학교에서 ROTC 후보생 시절부터 섬기기 시작한 하나님은 힘겨워 하
며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제게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이 시험을 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셨고, 이에 저는 긍정적인 생각과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차근차근 하나씩 난관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위기가 호기로 바뀌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비를 넘긴 것이지요.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니 세상에 안 될 일이 없더군요.
○ 사실 이 과정에서 가족의 격려와, 같이 일 했던 전우들의 도움이 큰 역할을 했음을 두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가족의 소중함과 함께 부하들에 대한 고마움을 새삼 느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Q. 살아오면서 가장 잊지 못할 인물은? 어떤 인연과 영향을 받았는지?
○ 앞서서 이야기 한 바를 요약하다 보면, 오늘날의 제가 있기까지 가장 중요했던 선택은 명지대학교에서 ROTC를 지원하며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이러한 차원에서 저는 명지대학교 설립자이신 유상근 장로님과 김우종 목사님을 스승으로서, 이금섭 목사님과 김충용 장로님을 선배와 동료로서 가장 잊지 못할 분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특히 유상근 장로님께서는 사랑과 봉사를 몸소 실천하시는 하나님의 훌륭한 사역자로서, 삶의 고난에 힘겨워 하던 제게 긍정의 힘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시면서 하나님께 인도해 주셨습니다. 또한 끊임없이 저에게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시면서 꿈과 희망을 갖게 하셨지요. 대대장 때에는 부대를 직접 방문하셔서 “이철휘 중령은 명지대학교 출신 중에 최초로 장군이 될 사람이야!”라고 격려해 주시면서, 명지여고와 대대 간에 자매결연을 맺어 주시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여고생들의 위문편지를 받아 들고 기뻐하던 옛 부하들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되는군요.
○ 이런 분들 덕분에 저는 삶의 모토를 진정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갖게 되었고, 그렇게 하다 보니 앞서서 말한 바와 같이 제게 닥친 난관과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 그러니 제가 가장 잊지 못할 분으로 유상근 장로님을 비롯한 네 분을 꼽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Q. 현재 우리나라 안보환경에 대한 견해와 향후 전망에 대한 의견은?
○ 안보환경을 이야기 하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우선 우리나라 주변을 둘러싼 미·일·중·러 4개국에 알아보고, 우리의 안보환경과 군사전략을 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먼저, 미국은 전반적인 영향력 약화 추세에도 불구하고 월등한 군사 능력에 기반하여 북한의 핵무기 개발 및 재래식 군비증강을 자국의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압박할 것입니다.
○ 일본은 미·일 동맹을 중시하면서도 미국의 세계전략에 전반적으로 호응하던 정책 기조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동북아 정책을 추진하되, 우리나라와 중국 등 아시아 국가와의 신뢰 구축에 주력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 중국은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북한을 포함한 주변국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며 주변정세를 안정화시키는데 주력할 것이며, 동시에 동북아에서의 정치·경제·군사적 영향력 확대를 추구할 것입니다.
○ 러시아는 국가발전에 유리한 대외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하며 협력적 국제질서 유지에 주력하면서도, 동북아에서의 미국 주도권을 견제하고 전통적인 영향력을 회복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 또한, 북한은 김정일의 건강이상 재발 가능성, 개선의 돌파구를 찾기 힘든 심각한 경제난, 갈등 국면의 핵문제와 남북관계 변수 등으로 체제의 유지에 위협을 느끼는 가운데서도 선군노선을 기치로 김정일 후계 체제의 조기 구축 등 체제 생존전략을 추구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 우리나라는 국내적인 수출 증가, 무역수지 흑자로 경기가 회복되고, 아프간 파병을 계
기로 새로운 한·미 전략동맹을 강화하는 가운데 G20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등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게 될 것입니다.
○ 이에 우리는 북한의 현존하는 군사적 위협에 대비하여 전시작전권 전환 후 독자적 작전수행 능력을 확보하고, 서해상 NLL 혹은 휴전선 일대에서 북한의 국지적 도발에 대한 대비태세를 지속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주변국들과의 동맹 또는 협력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북한이 최악의 상황에서 오판하지 않도록 고도의 군사적 대비태세를 유지한 가운데, 국제적 위상을 떨칠 수 있도록 든든한 군사적 뒷받침을 해야 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Q. 군에 있는 동안 꼭 이루고 싶은 일은?
○ 저는 지금 육군 대장으로서 군의 최고 계급에 있지만,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군문에서 떠나야 할 날도 멀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젠 정말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과거 지금보다 낮은 계급에 있을 때에는 ‘내가 저 위치에 가면, 이건 저렇게 저건 이렇게 바꿔야지!’라는 다짐을 몇 번씩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계급에 와 보니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변화되어 발전되고 있더군요. 아마도 이것이 우리 군에서 희망을 볼 수 있는 측면 아닌가 하는데요, 그런 차원에서 제가 군에 있는 동안 꼭 이루고 싶은 일을 구체적 대상과 목표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다소 추상적이지만 사회·문화적 분위기에서 요망되는 상태로 말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 우선 대외적으로는 우리 군이 국민들에게 무한대로 신뢰받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나라가 5천년의 역사 속에서 93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외침에 시달렸던 것은 모두 군사력을 도외시하고 문약했던 결과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제는 그런 역사적 우를 범하는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하면서, 우선 우리 군이 국민들에게 신뢰받을 수 있도록 부대를 지휘하려고 합니다. 그래선 안되겠지만 실수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반복되는 실수와 개선되지 않는 조직, 조직 구성원들의 의식입니다. 얼마나 힘이 될지 모르겠으나, 군 생활의 마지막 그 날까지 국민들이 납득하고 이해하는 그래서 사랑받는 부대를 육성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4방향 리더십이 확산된 가운데 군의 전 구성원들이 자신의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문화가 정착되었으면 합니다. 긍정적 사고와 적극적 행동을 통해 자기 스스로 선망받는 리더가 된 후, 상관에게 충성을, 동료에게는 신의를, 부하에게는 사랑을 다 하는 부대원들이 되도록 지속적으로 지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부대원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효율적으로 시간을 관리하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이론이나 제도는 당시 상황에 맞추어 변할 수 있겠지만, 이런 저의 철학은 우리 군이 국민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거듭 난다는 측면에서도 매우 필요하다는 것이 제 신념입니다.
○ 이렇게 되는 것이 언제쯤 완성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겠지만, 그 중간 다리의 역할만으로도 제가 할 일을 다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Q. 군문을 벗어나서 가장 하고 싶은 일과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 분야?
○ 20대 초반의 나이에 군문에 들어서서 36년간을 군 생활에만 충실히 복무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족들에게 소홀할 수밖에 없었고 그 점이 가장 맘에 걸려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전역 후에 무엇을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을 해 본 적은 아직까지 없지만 우선은 가족들에게 봉사하고 싶습니다. 결혼한 딸과 사위, 외손자, 그리고 이제 곧 출산을 앞둔 아들 부부 내외, 무엇보다 지금까지 저를 위해 기도해 주며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던 가족에게 아버지로서, 할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국가가 저에게 또 다른 임무를 준다면 언제라도 두 말없이 따를 것입니다. 일할 힘과 열정이 충분하다면 기여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것이 국가가 제게 준 명예와 혜택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하니까요.
○ 가족들에게도 어느 정도 인정(?)받고, 국가에게 진 빚도 능력껏 갚았다고 생각될 때 정
말로 자연인이자 사회인(개인)으로서의 제 일을 찾아야 하겠지요. 그때에는 전투복과 권총이 아닌 신앙으로 무장한 상태로 4방향 리더십을 전도하며 후진양성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욕심 같아서는 리더십에 관련된 연구도 더 하고 싶은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지금까지 군 생활을 하며 체득한 경험과 지식을 살리는 가장 좋은 분야인 듯한데, 차츰 더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Q. 학창 시절에 대한 회고(회상)
○ 서두 부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제 학창 시절은 어려웠던 가정형편과 불운으로 인해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별의별 아르바이트도 마다않고 다 했었죠. 그래도 꿈과 희망은 잃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노력한 만큼 인정받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이 시험을 꼭 이겨내도록 인도하실 거라고 기도하면서 말이죠.
○ 덕분에 짧은 학창 시절 동안 많은 사회경험을 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이해하고 포용할 줄 아는 안목도 넓힐 수 있었구요.
○ 또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교사 자격증도 2개나 땄었습니다. 결국 아직까지도 장롱에서 세상 빛을 못 보고 있기는 하지만요.
○ 그런 생활 속에서도 함께 했던 선·후배, 친구들과의 추억이 있었습니다. 어려웠던 시기를 함께 했던 그들과는 지금도 인연을 소중히 간직하며 가끔 과거를 회상하기도 한답니다.
○ 요컨대, 제 학창 시절은 젊은 나이에 다양한 도전과 응전을 통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굳건하게 나아갈 수 있는 역량을 체득하게 해 준 소중한 시기였습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말이 제게는 너무도 잘 어울리는 말이었습니다.
Q. 후배와 모교발전을 위한 제언
○ 우선 후배들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라!”라는 말을 꼭 전해 주고 싶습니다. 저는 부하들에게 늘 입버릇처럼 강조합니다. 여기에 모든 답이 들어 있다고….
○ 세상은 본인이 보고자 하는 대로 보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라도 단 0.1%의 가능성을 본다면, 그 긍정의 힘이 후배들에게 무한대의 능력과 함께 성공의 기회를 부여할 것입니다.
○ 또한 적극적으로 행동하십시오. 누군가 할 일이면 내가, 언젠가 할 일이라면 지금 당장, 기왕 할 바엔 최선을 다해서…. 불굴의 투지로 포기하지 않는다면 후배들은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설령 당장은 실패하더라도 먼 훗날의 성공을 예약한 것이므로 실망할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실천해 본 후배들이 직접 느끼게 될 것입니다.
○ 사랑하는 나의 모교 명지대학교는 나의 후배들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도록 잘 지도하고 이끌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나아가 글로벌 시대의 최고 대학으로 우리 명지대학교가 우뚝 설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본 인터뷰 자료가 후배와 모교(명지대학)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만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