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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사울을 살려 주다
삼상 24:1-7
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삼상 24:1-7 / [굴속의 사울을 살려 준 다윗] 사울은 그 사이에 블레셋 족속을 몰아 내고 왕궁으로 돌아왔는데, 다윗이 이제는 엔게디 산속에 숨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2) 사울은 즉시 온 이스라엘에서 특공대원 3천 명을 뽑아 거느리고 다윗을 찾아나섰다. 다윗은 이때 마침 자기의 부하들과 함께 들염소 바위 쪽으로 가서 3) 양 우리가 많은 곳에 있는 굴 속으로 숨었다. 그런데 사울이 그곳으로 지나가다가 공교롭게도 볼일을 보게 되어 혼자 그 굴속으로 들어가 뒤를 보았다. 다윗은 몇 안되는 부하들과 함께 그 굴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 4) 다윗의 부하들이 이렇게 속삭였다. `이제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의 원수를 네 손에 넘겨줄 터이니, 그때에는 네가 마음대로 원수 갚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당장 가서 사울을 쳐죽이십시오.' 그러나 다윗은 살금살금 사울의 뒤로 가서 겉옷 자락만을 살짝 베어 왔다. 5) 그 후 다윗은 비록 겉옷 자락일지라도 사울의 옷을 자른 것에 대해서 후회를 하였다. 6) 그래서 그가 자기의 부하들에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임금님에게 내가 감히 손을 들어 칠 수 있겠느냐? 그런 일만은 여호와께서 직접 막아 주시기 바란다. 그분은 어쨌든 여호와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임금이시기 때문이다.' 7) 다윗은 이렇게 자기의 부하들을 꾸짖음으로써 그들이 사울에게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하였다.
사울은 왕으로서 블레셋의 위협에 대비하고 나라를 든든하게 하는 것보다 자신의 정적인 다윗을 추격하는 데에 열정을 쏟고 있습니다.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1-2) 사울은 별다른 이유가 없지만 다윗을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나치게 폭력적으로 변해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권력이므로 하나님께 신실하면 되지만, 사울은 자신의 힘으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 중에도 별 어려움이 없이 다시 다윗을 잡으러 나섭니다. 이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이 승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엔게디에 있다는 다윗 사냥에 나섭니다. 엔게디는 예루살렘 남동쪽 60km 떨어진 사해서쪽 해변입니다. 황무지로 동굴이 많은 곳입니다.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3-4) “뒤를 보러 들어갔다”는 말은 대변을 보는 것의 완곡한 표현입니다. 동굴은 나그네에게 종종 화장실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볼 일을 보러 들어간 동굴에 다윗이 숨어 있었습니다. 아마 사울의 신속한 추격에 급박해진 다윗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동굴에 숨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일이 다윗에게 지금까지의 위기를 단번에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도 사울을 없앨 기회라고 다윗을 충동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단순하고 순박한 논리로 주변의 의견을 물리칩니다. 그것은 사울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6). 그래서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몰래 벱니다, 다윗은 사울과는 정반대로 자기 스스로 무엇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철저하게 맡긴 사람입니다.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5-7) 사울의 옷자락 만을 베었지만 이것조차 다윗의 마음이 찔렸습니다. 다윗도 기름부은 자입니다. 사실 기름부은 자가 둘이 된 것은 다윗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해결하실 문제였습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통찰하고 모든 해결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울을 해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금하여”라는 말은 꾸짖다는 의미로 다윗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제 겉으로는 사울이 다윗의 생명을 찾고 있지만, 사실 사울의 목숨은 다윗의 손에 있습니다.
적 용 : 하나님을 신뢰하여 하나님의 주권에 모두 맡긴다면, 개인적으로 지금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요?
독약인 줄 모르고 먹었다고 해서 그 독약의 효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고 먹어도 독약을 먹었다면 죽음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다른 신과 똑같이 섬기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선지자가 외쳐도 듣지 않았고 오직 자기들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당연히 멸망이었습니다. 신앙적 나태, 도덕적 타락 등 이 모든 것이 옳지 않은 것인 줄 몰랐다는 이유만으로 묵인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경과 성령의 음성을 통하여 우리를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나중에 몰랐다고 변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호크마 주석
=====24:1
사울이...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돌아오자마자 사울에게는 다윗에 관한 정보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본서 저자는 이때의 밀고자를 구체적으로 언급치 않지만, (1) 사울이 다윗을 체포하는 데 필요한 병력 규모를 결정함에 있어 주저치 않았으며 (2) 사울이 다윗의 은신처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2절)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밀고자는 아마도 그곳 지리에 밝은 '십'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3:19; 26:1). 엔게디(Engedi) - '염소의 샘'(Spring of the goat)이란 뜻으로, 사해(死海)의 서부 중앙에 위치해 있는 요새지요, 석회석 고원 지대이며, 또 온천수가 있는 오아시스 지역이다. 후일 솔로몬은 사랑하는 자를 '엔게디 포도원의 고벧화 송이'에 비유하기도 했다(아 1:14). 한편 오늘날의 이곳 지명은 '아인 이디'(Ain-jidy)인데, 현재도 숨을 수 있는 많은 동굴들이 도처에 있다고 한다. 23:29 주석 참조.
=====24:2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 여기의 '택한 사람'(* , 이쉬 바후르)은 문자적으로는 '남자 청년'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들은 특별히 이스라엘 전국에서 선발된 자들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최고 정예병들이라고 할 수 있다(9:2; 13:2; 신 32:25; 사 9:17; 겔 30:17). 삼천을 거느리고 - '삼천'은 사울이 일찍이 수많은 블레셋 족속들을 무찌를때 동원했던 수효와 동일한 병력 규모이다(13:2). 사울은 이 규모의 병력으로 다윗과 그의 추종자 육백 명(23:13)을 일거에 제거시키려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처럼 사울이 다윗의 군대에 비해 5배나 많은 정예 병력을 동원하여 엔게디 황무지까지 다윗을 추적한 것은 다윗의 무리를 섬멸하려고 단단히 각오했던 사울의 의지(意志)를 잘 나타내 준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비밀스런 보호 아래 있었던 다윗에게는 그와 같이 많고 강한 사울의 군대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시 3:6). 들염소 바위 - 이곳은 사해(死海)로 내려가는 벼랑의 한 지점으로, 그 가파름 때문에 들염소나 산양만이 생존하기에 적당한 곳이었으므로, 이러한 명칭이 부여된 것 같다(Robinson). 뿐만 아니라 당시 이 지역에는 충분한 풀과, 샘에서 넘쳐 흐르는 신선한 물로 인하여 들염소가 많이 야생할 수 있었던 것 같다(Danin). 오늘날에도 여행자들은 이 지역에서 서식하고 있는 많은 산양과 산염소를 발견한다고 한다(Thompson). 또한 이곳에는 은신하기 좋은 동굴이 많다고 한다(Fay).
=====24:3
길가 양의 우리 - 이것은 그 지역의 좋은 자연 조건을 이용한 양(羊)의 사육처를 가리킨다. 오늘날에도 많이 존재하는 이 '양의 우리'는 대부분 동굴 앞에 돌로 나즈막히 둥글게 쌓아서 만들어졌으며, 그 지붕은 야생 짐승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가시나무로 되어 있다고 한다(Thompson). 굴이 있는지라 - 그 당시 '굴'은 일반적으로 양을 돌보는 동안 목자들의 주거 장소로 이용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굴'은 날씨가 추울 때는 동물들의 거처로도 이용되었다.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 여기서 '가리우다'(* , 사카크)는 '덮다', '둘러싸다'란 뜻이다. 그런데 '발을 가리운다'는 말은 '용변을 보다'란 말의 완곡한 표현이다(Keil, Thenius). 히브리인들이 대변 보는 것을 이같이 표현한 가닭은 대변을 보려고 쪼그리고 앉을 때 옷자락에 의해 자신의 발이 덮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혹자들(Michaelis, Ewald, the Peshitta)의 주장처럼, '잠을 자다'란 뜻으로 볼 수 없다. 한편 사울이 바로 이같은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들어간 그 굴 안쪽에는 다윗의 일행들이 숨어 있었다. 다윗과...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 엔게디 요새(23:29) 지역에는 많은 동굴들이 있었다. 다윗과 그의 일행은 그 중 은신하기에 좋고 큰 어느 동굴 속에 숨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울이 용변을 보기 위해 그 굴 속으로 찾아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였다. 아무튼 사울은 자기가 들어간 바로 그 굴에 숨어있던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발견치 못했다. 그 까닭은 (1) 동굴의 내부는 지척을 분간 못할 만큼 매우 캄캄했으며, (2) 다윗과 그 일행은 캄캄한 그 굴의 깊숙한 곳에 은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동굴 입구는 볕이 드는 관계로 식별 가능하지만, 동굴 내부는 볕이 차단되기 때문에 캄캄했다. 따라서 동굴 내부의 다윗 일행은 사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었지만, 사울은 전혀 동굴 내부의 사정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24:4
여호와께서...이르시기를 - 사울에 대한 다윗의 궁극적 승리를 예언하는 본절에 언급된 하나님의 말씀은 갓과 같은 선지자를 통해서 이미 다윗에게 주어졌던 말씀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때 다윗의 추종자들은 다윗에게 주어졌던 그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사울이 호위병도 없이 하필이면 다윗과 그의 일행이 숨어있던 그 동굴로 들어온 것은, 사울의 인생을 거기서 비극적으로 끝나버리도록 조성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으로 인식하고 다윗의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사실 그때 다윗이 사울만 제거해 버리면, 당시의 정황상(18:7) 민심(民心)은 다윗에게로 급속도로 기울어질 것이었고, 따라서 다윗은 크게 힘들이지 않고 왕권(王權)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남다른 신앙과 인품 및 우정이 있었다. 다윗이...사울의 겉옷자락을...베니라 - 다윗은 동굴에 들어온 지 오래여서 동굴의 어두움에 이미 적응이 되었으나, 사울은 그렇지 못하여 자신에게 가까이 근접해 온 다윗의 위와 같은 행동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이 행동을 도왔을 것이 틀림없다(26:12). 한편 다윗이 이때 사울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을 벤 까닭은 다음과 같다. 즉 (1) 원수에 대한 복수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서만 하실 일임을 확신했으며(12절), (2)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증거를 남김으로써, 자신이 사울을 해하려고 한다는 사울의 의심과 오해를 풀기 위해서였다(11절). 그러나 혹자는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 벤 이 행동을 (1) 사울로부터 왕권을 빼앗으려는 강력한 욕심의 표현(Klein, Payne; 15:27, 28; 왕상 11:29-31), (2) 또는 찢어진 옷자락으로 인하여 사울이 조롱의 대상이 되도록 하려는 의도(Payne)등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같은 견해들은 본 문맥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 바 다윗의 신앙과 성품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편, 여기서 '겉옷'(* , 메일)은 땅에 끌릴 정도로 긴 도포식 통옷으로서(2:19), 사울은 아마 용변을 보기 위하여 이 겉옷을 벗어 옆에 두었을 것이다. 혹 입고 있었더라도 그 옷은 땅에 길게 축 늘어져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다윗이 사울의 그 겉옷자락을 베는 데 있어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Fay). 더군다나 사울은 그때 긴장을 푼, 전혀 무방비의 상태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다윗의 행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24:5
후에...다윗의 마음이 찔려 - 다윗은 사울을 죽이자는 부하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고 단지 사울의 겉옷자락만 살짝 베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 자체가 혹시라도 여호와께 기름 부음 받는 자의 인격을 조롱한 행위로 비쳐지지는 않았는지 괴로워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아무튼 그 일은 여호와께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결례(缺禮)인 것만은 틀림없기 때문에, 다윗은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따라서 이는 도피 시절 당신의 다윗의 민감한 신앙 양심을 느끼게 해준다.
=====24:6
본절에는 다윗이 사울을 해하지 아니한 결정적 이유가 시사되고 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 - 다윗의 이 말은 사울이 하나님에 의하여 신정(神政) 왕국의 왕으로서 임명된 자, 즉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다윗은 사울을 단순한 권력자가 아니라 엄연히 여호와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아(10:1), 선민 통치의 대권을 위임받은자로 인정했기 때문에 사울을 해치지 않았다. 따라서 다윗은 사울을 결코 원수로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충성을 다해 섬겨야 할 주인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바로 이같은 사실처럼 다윗이 사울을 해하지 않은 것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신앙적 열심 곧 여호와 경외 사상에 금거한다는 점에서(C.J. Goslinga),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일과 관련하여 다윗을 정치 술수에 능한 인물 혹은 관대한 무사도(武士道) 정신을 가진 인물(Hertzberg)이라는 등 인간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극히 부당하다고 볼 수 있다.
=====24:7
다윗이...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 여기서 '금하다'(* , 솨사)란 말은 '째다', '찢다', '끊다', '자르다'란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단어는 강조형으로 사용되어, 엄히 책망하면서(Davidson) 상대방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차단시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처럼 다윗은 자신과 부하들의 사사로운 감정을 극복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근거하여 행동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같은 자의 앞날을 보장하신다.
< 설 교 >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의 자세
삼상 24:1-7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다윗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노력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애매하게 누명을 쓰고 10년 넘도록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닌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어려운 일을 당하며 사는 그러한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자신을 절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부터 3천년 전에 살았던 신앙인이었지만 이 시대에 어려움을 당하며 사는 신앙인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통과하는 가운데서도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모습인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어려움이 끊이지 않는 이 세상 속에서 어떤 자세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인지 말씀을 선포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며 우리도 영적인 승리자가 되고자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믿는 자가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떤 자세로 사는 것이 영적인 사람의 참 모습일까요?
먼저,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그저 마구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미운 짓을 하는 얄미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만이 혼자 서 있기도 힘든 사람을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짓밟는 못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연극에서 악한 역할을 맡은 악인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당장 칼을 빼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복수하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 한 젊은이가 군대에 입대해서 전방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애인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우리 이제 헤어지자, 그러니 내 사진을 돌려보내 줬으면 좋겠다"라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그 편지를 받고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군대에 매여 있는 몸이라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변신한 애인에게 복수를 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부대에 있는 동료들을 다 모아 놓고 그들의 여자 친구들의 사진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편지와 함께 사진들을 애인에게 보냈습니다. "어떤 것이 네 사진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내가 가지고 있는 사진을 다 보내니 네 것만 빼고 다른 사진들은 빨리 돌려주기 바란다!" 사람은 이렇게 해서라도 보복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그는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순간일지라도 평정을 되찾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원수에게 복수를 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어느 날 사울은 다윗이 황무지란 곳에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잡으러 오는데 블레셋 군대와 싸우러 데리고 갔던 군사 3천명을 데리고 다윗을 죽이러 온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욕심에 눈이 뒤집히면 보이는 것이 없다는 것을 사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다윗이 왕이 될까봐 두려웠습니다. 자기 아들 요나단에게 자기의 왕권을 넘겨주려고 하는 욕심이 마음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되자 사울은 미치광이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만 죽이면 간단하게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울은 눈을 부라리고 다윗을 죽이고자 다윗을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찾던 사울이 갑자기 용변이 보고 싶어진 것입니다. 사울이 발을 가리우러 굴로 들어갔다고 했는데 발을 가리운다는 말은 용변을 보려고 옷을 내리면 그 옷이 발을 가리기에 그것을 두고 히브리 사람들이 발을 가린다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사울이 용변을 보러 굴로 들어갔는데 마침 그 굴 속에 다윗과 그와 함께한 6백명이 숨어 있던 곳입니다. 그 지역에는 산도 많고 굴도 많았는데 하필이면 사울이 다윗이 숨어 있던 굴속으로 들어 간 것입니다.
이쯤 되면 사울을 죽이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닌가요?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요? 다윗의 일행은 신이 났습니다. 비로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기 때문입니다. 늘 목숨을 위해 이리저리 사울을 피해 도망만 다녀야 했던 그들의 신세가 이제 끝이 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니 누가 기쁘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들은 다윗을 설득합니다.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울을 한칼로 내려쳐서 끝장을 내자는 것입니다. 사울만 죽이면 군사들이야 당연히 다윗에게 돌아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절호의 찬스가 왔는데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사울을 죽이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달려 있는 순간인데 왜 사울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분명 자기 발로 걸어 들어온 원수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기회를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과 함께 한 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는 것입니다. 자기 발로 걸어 들어와 코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원수 같은 인간을 한 칼로 죽이면 간단한데 왜 죽이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절대 하나님이 세운 종을 자기의 손으로 원수를 갚아서는 안된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사울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고 미친 짓을 하고 다닌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를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아무리 자기의 처지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원수를 하나님께 의탁하고 자기의 손으로 갚지 않겠다는 원칙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앉아서 용변을 보고 있던 사울의 겉 옷자락만 조금 베고 살려 주었습니다. 다윗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아마 가슴을 쳤을 것입니다. 단 칼이면 모든 것이 간단하게 쉽게 끝날 텐데…그러면 이제 더 이상 망명생활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리고 다윗이 왕이 될 텐데.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목을 벤 것이 아니라 겨우 옷 그것도 겉 옷자락만 조금 벤 것으로 끝내니 얼마나 원통했을까! 얼마나 다윗에게 서운했을까요!
그런데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을 조금 벤 것조차도 마음에 찔렸습니다. 이게 바로 다윗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하나님의 종은 바로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사울을 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옷자락을 조금 벤 것도 혹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망가지지 않았나!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에 대한 결례가 되지 않았나! 그는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다윗의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기에 아무리 힘들은 상황에 놓여 있을 때에라도 그는 하나님께 원수 갚는 일을 맡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에 보면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게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복수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사울을 죽이지 않은 것입니다.
우 리가 이것은 분명히 짚고 넘어 가야 합니다. 내가 복수할 힘이 없어서 복수를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복수 할 힘이 생기면 반드시 복수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복수를 충분히 할 수 있는 힘과 권세와 능력이 있는데도 하지 않는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께 복수할 권한을 맡기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사람이 나오는데 요셉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17살 나이에 이복 형제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 하다가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가까스로 보디발 장군의 집으로 종 같이 팔려갔지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참담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 하나님의 섭리로 애굽의 총리가 되어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그 때 애굽의 총리로서 형들에게 충분히 복수할 수 있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다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로 삼아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요셉은 말합니다. 요셉은 복수하지 않고 사랑으로 모든 형제와 아버지의 친척을 먹여 살렸습니다. 자신의 넓은 아량으로 용서하고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이 도구가 된 것이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바로 하나님께 원수 갚는 일을 맡기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여러분에게는 누가 사울인가요? 여러분을 괴롭히며 힘들게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아이구 웬수야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여러분 주면에 있나요? 조용히 살고 있는 사람을 흉보며 욕하고 다니는 사람은 없나요? 아무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소문을 퍼뜨리는 못된 사람은 없나요? 여러분에게는 누가 사울 같은 사람인가요? 나를 못살게 굴며 나를 헤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런 사람을 어떻게 하고 싶나요? 다윗과 같이 있었던 사람들 같이 단 칼로 쳐서 쓰러뜨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나요? 그러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길 바랍니다. 오히려 그들을 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며 하나님이 갚아 주십니다. 다윗을 보세요. 그가 사울을 죽이지 않고 선하게 대하자 하나님은 사울로 하여금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 졸지에 죽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다윗이 사울을 죽였다면 그는 살인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 살인자란 타이틀이 따라 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원수 갚는 일을 맡길 때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통쾌하게 승리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을 괴롭히는 원수 같은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올바른 믿음의 자세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의탁하게 되길 축원합니다.
또한 믿는 자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주의 종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하나님이 세우신 주의 종에 대한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그 만큼 목사와 가까운 사람입니다. 목사와 가깝지 않은데 신앙생활을 잘하거나 믿음이 좋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 만큼 존경하고 가까이 지내야 신앙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하다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주의 종이고 뭐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제가 다른 곳에서 신앙생활 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성전 밖에서 싸움이 벌어져 나가 보았더니 서로 붙잡고 이놈 저놈하며 싸우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조금만 불리한 것 같이 느껴지면 자기의 밑바닥 본전까지 다 나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 놓일 때일수록 마음과 행동을 잘 가져야 합니다.
다윗은 쫓겨 다니는 신세였습니다. 그는 사울을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음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다윗은 사울에게 손을 대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당장 죽이자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을 존중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울이 예뻐서 그랬을까요? 단 한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하나님이 세운 사람을 다윗은 존중했던 것입니다.
물론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세운 사울 왕과 오늘 날의 교역자 사이에는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왕은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왕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펼치려 했습니다. 특히 사울 왕 같은 사람은 신정통치를 반대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대신 수행 할 수 있도록 세워진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권력을 가지고 나가 이웃 나라를 치라고 하면 전쟁을 해야 합니다. 영적인 지도자라기보다 나라를 지키며 백성들을 보호하는 그런 역할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이런 역할을 감당해야 할 사람이기에 하나님은 그를 부르시고 또한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날의 목회자들도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목회자들도 일반 성도들과 구별시켜 안수를 받게 됩니다. 즉 기름부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워 주신 종이라는 것을 확증합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구약의 왕 같이 권력을 받아 일 하는 직책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교역자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영적으로 지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막중한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맡겨진 일의 성격상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구약의 왕 보다 더 높은 도덕적 그리고 윤리적인 수준이 요구됩니다. 그러기에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구약의 기름부음 받은 사울 왕과 비교 한다면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높은 수준이 필요한 목회자들이기에 그러한 수준이 되지 못할 때 부패가 발생하고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자리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며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성도들은 목회자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목회자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불러서 기름 부어 주시고 교회를 지도하도록 직분을 맡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도가 교회를 다니며 직분자를 존경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어떤 교인은 목사 욕을 막하며 다닙니다. 맘에 안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교회에 나갑니다. 그런 자세로 교회에 나가면 신앙생활이 제대로 될까요? 존경을 한다 해도 쉽지 않은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5장17절에서 이렇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란 보통 치리 장로를 말합니다. 이런 장로들을 두 배나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그것 보다 더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바로 목사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두 배 보다 더 많이 존경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세를 가질 때 올바로 성장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비록 산으로 들로 굴로 도망 다니는 신세였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대단히 민감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울 왕을 헤치는 행동이 혹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신앙의 민감함은 잘못된 신앙으로 나가지 않도록 해 주는 비상 벨과 같은 것입니다. 너무 무디어지면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됩니다.
요즘 가짜 목사도 많이 있어서 문제지만 성도들이 목사에 대한 신뢰가 너무 떨어져 말씀의 권위가 서지 않는 것을 종종 봅니다. 어떤 교회에 전도사가 있었는데 나이가 아직 30이 안된 어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교회 목사님도 그를 부를 때 이놈아 저놈아 하고 불렀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도 따라서 전도사를 부를 때 이놈 저놈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전도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단위에 세우는 것입니다. 이놈 저놈하고 불리던 사람이 단 위에 올라가서 말씀을 전하면 그 설교가 귀에 들어올까요? 그 설교를 듣고 얼마나 도전을 받고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부르시고 세우는 그래서 종으로 사용하시고자 하는 사람은 나이가 많든 적든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어야 합니다. 하다 못해 성도들 사이에도 자기들끼리는 그렇게 무식하게 부르지 않습니다. 만약 성도의 나이가 아들 뻘 된다고 해서 목사가 이놈 저놈하고 부른다면 과연 성도가 가만히 있을까요? 당장 목사한테 따지고 달려 들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불러 세운 종을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그렇게 대우하는 것은 그를 불러 세우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동입니다.
교인들이 교회에서 싸울 때 보면 목사에게 이놈 저놈하며 달려 드는 성도가 있습니다. 특히 미국에 와서 심심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회가 열리는 곳까지 따라와서 목사에게 욕하며 싸움을 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비록 심심해서, 김치 먹고 싶어서, 사람들이 그리워서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해도 계속 그런 상태로 남아 있으면 안 됩니다. 빨리 예수 만나고 진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오래 다녀도 여전히 처음 교회 나오던 목적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겉은 교인이지만 속은 세상 사람으로 그냥 남아 있게 됩니다. 그래서 조금만 맘에 안들면 교회에서 싸움을 합니다. 그런 사람이 싸우면 무섭습니다. 앞뒤가 없습니다. 위 아래가 없습니다. 완전히 눈꺼풀이 뒤집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교회를 세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에 목사를 세워 성도들을 가르치고 예수님을 닮아 가는 성숙한 사람으로 키우기를 원하십니다. 진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는 사람은 먼저 지도자를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이 자기의 목숨을 찾으려고 하던 사울을 끝까지 존경한 것 같이 그런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잘못된 것은 제거하십니다. 만약 목사가 잘못하면 사울과 같이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존경하는 성도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요즘 영적인 세계가 너무 어지럽혀 지고 있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간이 되지 않는 혼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원리를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언제 우리가 쉽게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나요? 내가 어려운 곤경에 빠지면 우선 문제만 바라보고 해결하려는 마음에서 육신적인 생각을 먼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이 될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지 알고자 하는 자세가 될 때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될 것입니다. 목사는 성도를 존중하고 성도는 목사를 존경하므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성도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금하시기에
삼상 24장 1~22절 / 이응효목사(인애교회)
평소 아내 앞에 꼼짝도 못하던 공처가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힘없는 목소리로 “여보, 나 이제 얼마 못 살 것 같으니 유언을 할게요, 마지막 부탁이니 만큼 꼭 들어주면 고맙겠소.”라고 하자 아내는 “도대체 내게 뭘 바라는 것이요?”라고 물었습니다.
남편은 “내가 죽거든 부디 박사장과 재혼 해 주구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깜짝 놀라며 “아니 박사장이라는 작자는 사기를 쳐서 당신을 망하게 한 원수가 아니요?” 라고 하자 “맞소, 그 놈이요! 그 놈에게 원수를 갚는 방법은 이길 뿐이오.”말하고는 꼴깍하고 죽더라는 유머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원수를 미워하고 원한은 꼭 갚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원수를 선대하고 악을 선으로 갚은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본문에 기록된 다윗입니다.
본문 1절과 2절의 기록을 보면 사울이 온 이스라엘 전국에서 선발된 최고 정예병들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 일행을 제거하려고 엔게디 광야의 험한 산지에 이르렀습니다. 다윗을 따르는 사병들은 600명 정도이니 이보다 다섯 배가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일시에 다윗 일행을 섬멸하려고 작정하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밀한 보호 아래 있었던 다윗을 찾아내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때 사울이 생리적 현상을 해결하려고 동굴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3절에 보면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뒤를 본다는 말은 '용변을 보다'란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한편 사울이 바로 이 같은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들어간 그 굴 안쪽에는 다윗과 그 일행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엔게디 요새(23:29) 지역에는 많은 동굴들이 있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일행은 그 중 은신하기에 좋은 큰 동굴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용변을 보기 위해 그 굴속으로 찾아든 것입니다.
아무튼 사울은 자기가 들어간 바로 그 굴에 숨어있던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발견치 못했습니다. 그 까닭은 동굴 입구는 볕이 드는 관계로 식별 가능하지만, 동굴 내부는 볕이 차단되기 때문에 캄캄했습니다. 따라서 동굴 내부의 다윗 일행은 사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었지만, 사울은 전혀 동굴 내부의 사정을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때 다윗의 부하들이 하나님께서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 주셨다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들먹이며 사울을 제거하겠다고 하였습니다.
4절에 보면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1.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사울을 해치지 않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찬스' 라고 말하며 사울을 죽이자고 하였습니다. 사울이 죽으려고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하들의 말은 설득력이 있는 말입니다.
다윗은 죄도 없이 사울의 미움을 받아 억울하게 도망 다니고 있고 다윗을 따르는 부하들도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울을 죽인들 백성들 중 그 누가 잘못했다고 말하겠습니까.
백성들은 정당방위라고 믿을 것이요, 사울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였다고 말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울은 이미 경거망동한 짓을 많이 하여 인심을 잃었고, 그는 악령이 들어 종종 제 정신이 아닌 짓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이미 사무엘을 통해 차기 대권주자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백성들의 민심이 이미 다윗에게로 기울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만 살짝 벤 것 그것만 가지고도 마음 아파합니다. 그 일 자체가 여호와께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결례라고 생각하여 죄책감을 가진 것입니다. 이는 다윗의 순수하고 민감한 신앙 양심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그는 사울을 죽이자고 하는 부하들을 제지합니다.
6절과 7절에 보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사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지만 다윗은 하나님 말씀을 그렇게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바르게 적용하여 순종합니다.
역대상16:22절에는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에게 손을 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해하지 말라 하셨도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시편105:15절에도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하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에 의하여 신정왕국의 왕으로서 임명된 자, 즉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였기에 아직도 사울은 자신의 주군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8절)
그리고 임명권자인 하나님을 존중히 여겨 기름 부음을 받은 사울을 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요 불법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불법을 행해도 결과만 좋다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기주의/ 편리주의/ 성공주의에 빠진 세상의 처세술입니다.
다윗은 주어진 상황이 사울을 죽여도 누구하나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할 상황이 아니었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사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말하였지만 사울을 해치지 아니한 근본 이유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일이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행동원리입니다.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일이라면 자기의 감정과 욕심을 억제하고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다윗의 행동원리였습니다.
우리들도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아무리 내게 유익이 되고, 즐거움이 되고, 영광을 얻는 일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 길이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길이라면 일절 거절하는 다윗의 행동원리를 나의 행동원리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다윗은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울을 선대합니다.
굴에서 나온 사울을 향하여 다윗이 소리쳐 부른 다음 땅에 엎드려 절하고 외쳤습니다.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왜 들으십니까? 굴에서 부하들이 왕을 죽이라 하였지만 난 여호와의 기름 부은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손에 있는 옷자락만 베었을 뿐입니다.”라고 말한 후 이렇게 말합니다. 12절에는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하였고, 다시 15절에 보면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갈 때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 어려운 문제가 생겨 갈등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과연 하나님의 판단에 맡길 수 있나요?
유감스럽게도 이 시대는 교회내의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 한솥밥을 먹던 교인들끼리 서로 물고 먹고 다투므로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로마서12:17절에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고 하셨고, 19절에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전 후 사정을 안 사울은 사실을 인정하고 다윗이 자신을 선대하였다고 말합니다.
17절에 보면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고 하였습니다.
18절과 19절에도 사울이 동일하게 다윗이 자신을 선대하였다고 말합니다.
우리들도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얽히고설키는 많은 일들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내게 악한 짓을 할 때는 분하고 원통할 때가 있지만 다윗이 행한 일을 기억하면서 엎드려 기도하고 하나님께 맡기면 다윗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5:44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고, 46절에서는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고 하셨습니다.
링컨대통령이 일리노이 주 변호사시절에 사사건건 링컨을 물고 늘어진 사람이 있었는데 당시 유명한 변호사였던 스탠턴이란 사람입니다.
링컨은 이제 갓 변호사 개업을 하여 그와 함께 일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탠턴이 법정에서 소리치기를 “저따위 시골뜨기와 어떻게 같이 일을 하라는 것입니까?” 라고 화를 내며 법정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 후에도 링컨을 얕잡아보고 무례한 말과 행동을 한 적이 많았습니다.
“여러분 고릴라를 만나기 위해 동물원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 가면 링컨이라는 고릴라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모욕을 주는 말을 하는 것은 예사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스탠턴은 “링컨이 대통령이 된 것은 국가적 재난”이라고 공격하였습니다.
그런데 링컨이 공석이 된 국방부장관 자리에 스탠턴을 임명하려고 하자 참모들이 일제히 반대를 하였습니다. 각하를 그렇게 무시한 그런 무례한 사람을 국방장관에 임명하다니요 아니 될 일입니다. 그러자 링컨은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수백 번 무시당해도 좋소. 다만 그 사람이 국방 장관이 되어 우리 국방을 튼튼히 하고 임무 수행을 잘 하기만 한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소? 더욱이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국정을 잘 수행해 나가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요. 안 그렇소?”
국방장관이 된 스탠턴은 있는 힘을 다하여 링컨을 도와 나라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링컨이 암살자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을 때 스탠턴은 링컨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며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여기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있습니다.” 결국 링컨은 자기를 미워했던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한 진정한 승리자였던 것이다.
다윗은 사울을 해치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사울을 선대하였습니다.
우리들도 이렇게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3. 다윗의 선한 행위는 원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다윗의 진심을 안 사울은 일시적이지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소리쳐 울었습니다. 16절에는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런 악한 자라도 다윗의 사랑에 감동을 받아 울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다윗을 향하여 복을 빕니다. 19절에 보면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고 하였습니다.
잠언16:7절의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는 말씀이 다윗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하는 것은 교육이나 논리나 설득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감동을 받을 때만 심령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이 권위적 명령이나 지적하는 것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며 흘리는 눈물이나, 가슴으로 끌어안는 사랑을 통해 변화가 일어 날 것입니다.
악한 사울도 선한 다윗의 선한 행실 앞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2010년 12월 23일 밤에 4인조 복면강도가 귀금속협회 회장 집에 침입해 현금 1000여 만원과 귀금속을 강탈하고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부인과 딸을 성폭행하려고 했습니다. 회장은 미혼의 딸만은 손대지 말아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참으로 절박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강도 한 명이 낡은 감사패 하나를 집어 오더니 회장에게 “이 감사패를 준 안동재활원 이사장 정창근장로님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회장은 자신이 그 재활원 영구 재정후원자라고 말했습니다. 그 강도는 나머지 세 명의 강도를 성득한 후 “죄송합니다. 정 장로님 후원자인 줄 몰랐습니다.” 라고 말한 후 황급히 나가버렸습니다.
정창근장로는 안동교회 원로장로요, 이비인후과 원장이며, 안동재활원 이사장으로 안동의 성자 같은 분입니다. 아마도 강도들이 정장로님께 큰 은혜를 입었던 것 같습니다. 선을 행하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우리가 악에 대해 악으로 맞선다면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악을 선으로 갚는 것, 이것만이 악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하게 죽으시면서 조롱하며 비웃는 무리들을 향하여 사랑과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24)라고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실은 그 기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온갖 죄를 지은 나를 위해 올린 기도입니다.
구약에 준엄한 율법으로 하라! 하지 말라! 고 명령하였지만 율법과 가르침으로 죄인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버지께서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바로 그 일! 자신을 다 내어주시고 피 흘려 죽으신 그 놀라운 사랑 앞에 흉악한 죄인들이 감동을 받고 목이 곧고 완악한 사람들이 녹아진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 갚으신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큰 감동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사랑 강 같이 온 땅에 흘러 각 나라와 족속 백성 방언에서 구원받고 주 경배 드리네/ 여기 위대한 십자가 사랑의 승리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힘은 실로 놀랍습니다. 사랑만이 모든 악을 이길 수 있는 능력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원수인 사울을 선대한 것처럼 우리도 사랑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원수도 사랑하는 사랑의 행동이 있기를 바랍니다.
엔게디, 진정한 승자
이윤재목사 / 삼상 24:1-7, 16-22
엔게디, 진정한 승자
여러분은 세상에 왜 삽니까? 많은 이유가 있지만 다만 밥먹고 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미션을 이루고 이 땅에 승리하기 위해 삽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승리할까요? 이번 주에 어떤 분이 저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냈습니다. “가장 큰 핸디캡은 공포심, 가장 좋은 날은 오늘, 가장 소용없는 재산은 자존심, 가장 큰 실수는 포기, 가장 큰 방해거리는 이기심, 가장 불쾌한 사람은 불평하는 사람, 가장 큰 파산은 열정의 상실, 가장 나쁜 감정은 타인의 성공을 질투하는 것, 가장 좋은 선물은 용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죽음, 가장 큰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가장 좋은 것은 사랑”. 이 글을 제가 읽고 한 가지 더 한번 물었습니다. “가장 좋은 승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승리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성경은 재미있게도 성공이라는 말을 한번도 쓰지 않습니다. 구약에는 성공대신에 “형통”이란 말을 주로 쓰고 성경 전체로는 “승리”라는 말을 씁니다. 성공이 물질적이라면 승리는 영적입니다. 성공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주로 온 것이라면 승리는 주로 자기와의 관계에서 옵니다. 성공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승리는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승리하면 언제나 성공하지만 성공했다고 언제나 승리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일생 승리하면 살기 원합니까?
다윗의 일생을 보면 성공도 하고 가끔 실패도 하지만 항상 승리했습니다. 그가 승리한 이유가 무엇일까? 만일 다윗이 승리한 비결을 우리가 배울 수 있다면 우리도 다윗처럼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받아 엔게디 동굴에 숨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엔게디는 사해 바다 근처에 있는 광야입니다. 사해 바다 주변에는 일체의 생물이 살지 못하는 데 오직 엔게디에만 생물이 삽니다. 그 이유는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골짜기를 따라 위로 몇 백 미터 올라가면 물근원이 있습니다(1. 사진). 이곳이 엔게디 폭포, 이스라엘에서는 “슐라밋 폭포”라고 부릅니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물이 내려오는지 깜짝 놀랍니다. 폭포 주변에 서보면 여기 저기 많은 동굴들이 보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입구가 작아 보이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동굴이 있습니다. 이중에 하나가 엔게디 동굴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유다 광야를 전전하다가 이곳까지 왔습니다. 이 소식을 사울이 듣고 군대와 함께 좇아왔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삼상22: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려고 들염소 바위로 갈새”. 여기서 “들염소 바위”는 엔게디입니다. “엔”은 샘이고 “게디”는 “들염소”입니다. 들염소와 샘이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엔게디에는 많은 들염소가 있습니다(2. 사진). 그 곳으로 사울이 군대를 데리고 왔습니다. 무려 3천명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얼마나 미워했으면 3천명씩이나 데리고 왔을까? 지금 사울이 불레셋을 추격하고 있습니까? 아말렉과 싸우고 있습니까? 한 나라의 왕이 외적과 싸워야 할 그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다윗 한 사람을 쫓고 있으니 사울이 지금 제 정신입니까? 어쩌면 사울에게는 불레셋을 쫓고 아말렉과 싸우는 것보다 다윗을 잡는 것이 더 시급했는지 모릅니다. 다윗을 살려둬서는 자기 정치생명에 치명적일 수 있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찾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날씨는 무덥고 동굴은 많은 데 다윗이 어디 숨었는지 어떻게 압니까? 마침 사울이 화장실 갈 일로 급해졌습니다. 그래서 아무 동굴이나 들어갔는 데 그 동굴이 바로 다윗이 숨어 있던 동굴이었습니다. 사울은 거기에 다윗이 있는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급하게 동굴로 들어가 일을 보았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삼상22:3, “길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3절에 “발을 가리웠다”는 말은 화장실간다는 뜻입니다. 화장실이 대개 발을 가려 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재는 지금 다윗이 그 모습을 다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굴이란 먼저 들어온 사람은 나중에 들어온 사람이 보이지만 나중에 들어온 사람은 먼저 들어온 사람이 안 보이지 않습니까? 용무가 끝난 사울은 잠이 들었습니다. 다윗을 잡는 데 사력을 다했기 때문에 피곤했던 것입니다. 사건은 바로 그때 일어났습니다. 사울은 지금 다윗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에 따라 죽을 수도 살 수도 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윗이 그 위기에 찬 순간에 보여준 태도를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 배웁니다.
인내입니다.
여러분은 다윗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아십니까?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모두 15번이나 도피합니다. 다윗은 유다광야를 중심으로 도피하느라 젊은 날을 다 이곳에서 보냈습니다(3. 지도). 이 지도는 다윗이 숨었던 유다광야 지역을 개괄적으로 보여줍니다. 다윗이 오늘 숨었던 엔게디는 그가 9번째 숨은 곳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다윗이 첫 번째로 피했던 놉땅에 있던 성소로 함께 갔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윗은 제사장만 먹는 “거룩한 떡”을 먹고 힘을 냈고, 골리앗을 죽인 칼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도피생활의 끝이 아니라 길고 긴 도피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14번이나 더 도피했는 데 엔게디는 9번째였습니다. 한번 그 과정을 간단히 한번 따라가 볼까요?
먼저 도피는 놉땅의 성소에서 출발합니다. 삼상21장입니다. 지난 주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나와 불레셋 땅 가드로 피신합니다. 거기서 신분이 드러나자 다윗은 미친척하고 도망나옵니다. 세 번째가 아둘람굴입니다(4. 사진). 이곳에서 그는 그를 따라온 400명 피난민들과 함께 숨습니다. 이번 성지순례때 우리 팀도 그 좁은 동굴을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좁고 험한지 무릎을 꿇고 허리를 바짝 굽히고 들어가다 어떤 분은 그러다 죽겠다 싶어 다시 나왔습니다. 22장으로 오면 다윗이 부모를 모압땅으로 피신시킨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압은 그의 조상 룻의 고향입니다. 다섯 번째가 유명한 마사다입니다(5. 사진). 아마 다윗은 이곳을 직접 걸어 올라갔을 것입니다. 여섯 번째가 유다광야에 있는 헤렛수풀입니다. 일곱 번째가 그일라입니다. 여덟 번째가 호레쉬입니다. 그리고 아홉 번째가 오늘 엔게디입니다. 다윗이 엔게디까지 오는 데 무려 여덟군데나 더 피신했습니다. 정말 너무 하지 않습니까? 유다광야의 날씨는 사해바다 옆에 있어서 이스라엘에서 가장 덥습니다. 보통 40도, 45도, 가장 더울 때는 54도입니다.
그 엔게디에서 끝났으면 좋은 데 다윗은 또 다시 피신합니다. 아홉 번째 갈멜입니다. 여기서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을 만납니다. 다음 주에 나옵니다. 그리고 열한번째가 십광야, 12번째가 다시 불레셋 땅 가드, 그리고 13번째가 30장, 브솔시내, 정말 다윗은 길고 길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학자들은 그 햇수를 대략 20년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그의 일생의 가장 황금같은 시기를 사울을 피하여 20년이나 광야를 전전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야러분같으면 견딜만 했겠습니까? 혹시 한 두 번은 견딜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혹시 서너 번은 사력을 다해서 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15번을, 그나마 인생의 황금기를, 하루 이틀도 아니고, 20년을 피난민으로 살아야 했다면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은 해냈습니다. 그 15번의 도피생활중에 한번도 사울을 원망하거나 절망하거나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내 때문입니다.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우리는 묻는 질문은 딱 하나입니다. “아, 왜 내가 그때 못 참았는가?” 우리의 인생에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문제는 결국 인내의 문제입니다. 약1:2절 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 가지 시련”입니다. 시련은 누구에게나 오며 피할 수 없습니다. 그나마 한 종류의 시련도 아닙니다. “여러 가지 시련”입니다. 여기서 “만난다”는 말은 헬라어로 “페리페세테”입니다. 이 말은 “페리”. “한 가운데로”. “페세테”.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한 가운데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어느날 우리의 삶의 한 복판에 뚝 떨어집니다. 내가 원하는 것도 아니고 기대했던 것도 아닙니디.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데 예고없이 불쑥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가 할 것은 “인내”입니다. 참다 참다 도저히 못참겠다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포기의 순간”이라고 부릅니다. 인생의 문제는 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어떻게 뛰어넘느냐입니다. 누구나 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더 이상은 못한다. 여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고 그 다음은 못한다”. 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뛰어넘는 것이 진짜 인내입니다. 물이 100도에 이르지 않으면 끓지 않습니다. 증기기관차는 수증기 게이지가 212도를 가리켜야 움직인답니다. 99도로는 물이 끓지 않습니다. 211도로는 기관차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시험도 1점 차이로 떨어지고 붙습니다. 올림픽 우승은 0.01초 차이로 갈립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비결은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지방에서 목회할 때 꽃을 파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나이도 많고 주름도 많은 데 항상 밝은 얼굴로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한번은 물었습니다. "집사님은 항상 좋은 일이 있나요? 항상 표정이 밝아요" 그러자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말도 마세요. 제 걱정을 트럭에 담으면 아마 100대는 될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웃고 사세요?“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내게 한 비결이 있지요. 제가 고통이 오면 우리 주님이 무덤에 머물러 계셨던 사흘을 생각하면서 ‘사흘만 참자’, ‘사흘만 참자’ 합니다. 그러면 사흘 뒤에는 어김없이 좋은 일이 생깁니다”. 제가 그때 배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사흘동안은 지나가자. 사흘을 잘 참으면 또 사흘을 참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90%는 해결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죄없이 사흘동안 무덤에 계셨는 데 우리가 무덤에 있는 것도 아닌데 사흘을 못 참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세상적 인내와 조금 다릅니다. “인내”라는 말을 헬라어로 “휘포모네”라고 합니다. “휘포”, “아래에”, “모네”, “놓다”. 인내는 “아래 놓는 것”입니다. 억지로 이를 악물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혼자 들고 있던 무거운 짐을 주님앞에 갔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인내”는 “인고”가 아닙니다. “인고”는 무거운 짐을 내가 혼자 들고 견디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내”는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기고 나는 그 옆에 서 있는 것입니다.
시편에 다윗이 쓴 시중에 “유다광야에서”라고 되어 있는 시가 10편 가량됩니다. 시34편, 57편, 63편등입니다. 그중에서 57편을 보면 제목이 이렇습니다. “다윗의 시, 디윗이 사을을 피하여 동굴에 숨었을 때”. 그러니까 다윗이 엔게디같은 동굴에 숨었을 때 이 시를 쓴 것입니다. 1절을 볼까요? 시57: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파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가기 까지 피하리이다”. 같은 말씀을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다정히 맞아 주소서. 바로 지금. 죽을 힘 다해 주께 달려 갑니다. 이 폭풍이 다 지나기까지 주님의 날개 아래로 내가 피합니다”. 여기에 공통적인 것이 “주의 날개 아래로 내가 피합니다”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내”입니다. 인내는 주께 피하는 것입니다. 내가 혼자 낑낑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날개 그날 아래 나의 모든 근심과 걱정과 문제와 고통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밤 깊고 비바람 불어쳐도 아버지께서 나를 지켜주시니 거기서 편안히 쉬리로다”. 인내, “휘포모네”, “주 날개 아래 내려놓는 것입니다”. 결국 인내는 믿음에서 옵니다. 믿기 때문에 인내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불쑥 불쓱 우리 앞에 떨어지는 시험과 고통들, 주 날개 아래 내려 놓고 끝까지 참겠습니까? 인내가 승리입니다.
애통입니다.
다윗이 보여준 두 번째 승리의 요소가 있습니다. 사울이 동굴에 들어와 일을 보고 피곤한 나머지 잠이 들었습니다. 피곤할 때 자는 낮잠은 얼마나 달콤합니까? 누가 깨워도 모를 정도입니다. 그렇게 사울이 잠에 빠지자 다윗의 부하가 말합니다. “왕이여, 이 때입니다. 지금 사울을 없애야 합니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천추이 한이 될 것입니다. 제가 죽이러 가겠습니다”. 이때 다윗이 말립니다. 그리고 “죽이지는 말고 옷자락만 베어라”. 그래서 부하가 사울의 옷자락만 살짝 베어 왔습니다. 그때 다윗의 반응이 어떻했습니까? 삼상24:5,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여기서 “마음에 찔렸다”는 말을 공동번역, 새 번역은 “다윗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미음이 찔렸다”는 히브리어 원어는 “와야크”입니다. 이 말은 “때리다. 치다”라는 말입니다. 마치 칼이나 몽둥이로 몸을 내려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직역하면 “다윗의 마음이 다윗을 때렸다, 내리쳤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부하가 무엇을 했길 레 다윗이 자기 마음을 내려친 것입니까? 사울의 옷자락을 살짝 베었을 뿐입니다. 그것은 생명과도 상관없는 일이고 다윗이 직접 한 일도 아닐 뿐더러 사울이 평소에 다윗에게 한 행동을 생각하면 지극히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금 사울은 무방비상태입니다. 지금 사울은 다윗이 동굴에 미리 와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그전에 사울은 다윗을 6번이나 죽이려고 했습니다. 3번은 창을 던졌습니다. 두 번은 두 딸을 미끼로 다윗을 전쟁터에 보냈습니다. 한번은 사울이 군대를 동원해서 아예 다윗을 잡으러 왔습니다. 둘째 딸 미갈과 어쩔 수 없이 결혼은 시켰으나 미갈을 친정으로 철수시켜 가정을 깻습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다윗의 고난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놉땅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피신한 것으로 시작해서 이미 여덟 번이나 피신했습니다. 이번에 아홉번째 그 좁은 엔게디 골짜기에 3천명이나 되는 대군을 풀어 이잡듯 쥐잡듯 다윗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원수가 지금 아무런 무장도 없이 쿨쿨 자고 있습니다. 그런데 몸에는 손도 안댔습니다. 옷자락만 살짝 베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가슴이 아픕니까? 그렇게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은 정신없이 자고 있는 데 그렇게 고통당한 다윗은 옷자락만 베었는 데도 가슴을 칩니까?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물론 옷자락을 벤 사건은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이 사울을 버렸다고 말할 때 사울이 사무엘을 붙잡았습니다. 그때 사무엘의 옷이 찢어졌습니다. 훗날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릴 때 선지자 아히야가 자기 옷을 찢어 열두 조각으로 내서 여로보암에게 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옷을 찢은 것은 분명 이스라엘 문화에서 상서롭지 못한 일이고 그것이 정치와 관련될 때는 왕권이 오고 가는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과연 다윗이 그런 의미에서 사울의 옷을 베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합니다. 다윗에게는 사울에게 없는 눈물과 애정과 긍휼의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험한 세상을 살 때 누가 최후승자가 됩니까? 힘있는 사람입니까? 능력있는 사람입니까? 성경은 놀랍게도 온유한 자가, 애통한 자가 승리한다고 말합니다. 마5:3절에서 주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말합니다. 이 말씀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마5:3,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 “소중한 것을 잃으면 소중한 분을 얻는다“. 소중한 것보다 소중한 분이 더 중요합니다. 애통은 소중한 분을 얻기 위해 스스로 소중한 것을 잃는 것입니다. 왜 성경은 이렇게 세상과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르치는 것일까요? 왜 성경은 얻으라고 하지 않고 잃으라고 할까요? 왜 성경은 힘있는 자가 세상을 다스리고 강한 자가 승리한다고 가르치지 않고 애통한 자가 온유한 자가 승리한다고 가르치는 것일까요?
미국이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ABC 방송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군 사령관을 초청해서 대담을 가졌습니다. 진행자가 물었습니다. “미국인들은 당신을 폭풍의 장군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때 사령관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가슴이 따뜻한 남자입니다”. 진행자가 또 물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가장 큰 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때 사령관이 말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가장 큰 적은 이라크 같은 외부의 적이 아닙니다. 미국에 눈물 없는 남자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냉철한 이성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풍부한 감성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속에서 나오는 눈물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세 가지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로고스(이성), 파토스(감성), 그리고 펜토스(눈물). 우리에게는 논리정연한 이성도 있고 나름 풍부한 감성도 있는 데 속에서 나오는 펜토스, 눈물이 없습니다. 탁월한 말솜씨와 웅변으로 사람들을 설복은 시키는 데 그의 눈망울이 무섭습니다. 말은 잘하는 데 가슴은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안 나옵니다. 상대방을 사정없이 몰아 붙이는 능력은 있는 데 상대방을 감동시켜 울게는 못합니다.
다윗이 가슴을 치고 마음 아파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울이 곧 상황을 알고 울기 시작합니다. 삼상24:16-17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그치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하고 소리를 높혀 우니”. 그 전까지 사울은 다윗을 “이새의 아들”이라고만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때 사울은 다윗을 “내 아들 다윗아”하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완악하던 사람이 목을 놓고 울기 시작합니다. 한참 울다가 이렇게 축복합니다. 삼상24:17,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그리고 네가 이 나라의 왕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원수를 감동시키는 힘은 어디서 오는 힘입니까? 무엇이 그렇게 강팍하던 사울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했습니까? 원수는 이기고 최후 승리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시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그 마음 갖기를 바랍니다.
믿음입니다.
다윗이 승리한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보면 역시 믿음입니다. 믿음을 다른 말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자, 지금 사울이 무장해제하고 다윗앞에 누어 있습니다. 사울을 죽이려고 마음 먹으면 그렇게 좋은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6절입니다. 삼상24: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아의 기름부음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아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아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사울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셨다. 하나님이 기름부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반대론자에게 금방 반대에 부딛칠 수 있습니다. “자,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 기름부었다는 점에서 하나님이 사울을 세웠다고 하자. 그러나 이미 하나님이 사울을 폐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 사울을 폐하셨다. 그동안 사울이 한 일이 무앗이냐? 허구 헌날 다윗만 죽이려고 하지 않았느냐? 사울이 무엇을 잘했다고 사울을 두둔하느냐? 그는 이미 하나님과 백성들에게 버림받은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를 살려둘 수 없다”. 이렇게 주장했다면 그 주장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입장은 변하지 않습니다. 7절로 이어집니다. 삼상24: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그렇게 오랜 세월 사울에게 당했고 이미 사무엘을 통하여 폐한 사울에 대하여 그렇게 끝까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멀쩡한 사람도 몰아내려고 하는 데 이미 폐위된 왕, 공무는 제쳐놓고 다윗 죽이기에만 혈안이 된 악한 왕을 더구나 당사자가 하나님이 기름부었으니 손대면 안된다고 믿었다면 그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물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 보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의 눈으로 보면 죄인이요 문제아요 모두 죽어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이 뜻과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사랑스러운 자입니다.
이단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단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에 이가톤이라는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이 사람에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수도자이면서 매일 세상 욕심으로 살지 않습니까?” “그렇소. 나는 세상 욕심으로 가득차 있소”. “당신은 또한 매일 마음의 정욕으로 불타지 않소?” “그렇소. 나는 속으로 많은 간음을 행하고 있소”. 세 번째로 물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이단이 아니요?” 그때 아가톤이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니요. 나는 이단이 아니요. 절대 아니요”.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욕심많은 사람이고, 정욕에 붙잡혀 산다고 고백하면서 왜 이단은 아니라는거요?” 이가톤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다르기 때문이요. 나는 욕심도 많고 간음도 많이 행하지만 이단은 아니요. 왜냐하면 이단은 하나님과 분리되고 적대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이요. 나는 절대 하나님과 적대적으로 살 수 없소 ”.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유혹에 빠져 실수하고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혹에 빠져 이단이 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잘못 사는 것은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단에 빠지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니 무서운 일은 일입니다. 잘못산 죄보다 잘못 믿은 죄가 더 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어떨까요? 이단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대적하는 것은 잘못 믿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된 믿음입니다. 신천지의 가장 큰 폐단은 교회안에서 서로 의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 신천지 아니야? 신천지같은 데”. 나만 아니면 됩니다. 남 이야기할 것 없습니다. 설령 잘못 믿는 사람이 있어도 잘못 믿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잘못 믿은 믿음이 문제입니다. 죄는 멀리 하고 죄인은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이 그림 보십니까? (6. 그림). 두 마리의 동물이 여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그림을 오리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토끼라고 합니다. 다 맞습니다. 어느 쪽으로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왼쪽을 중심으로 보면 오리입니다. 오른쪽을 중심으로 보면 토끼입니다. 관점의 문제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한번은 교회차를 타고 동대문 시장을 지나갔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차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말합니다. “너무 사람들이 많아. 복잡해”. 그랬더니 또 한 사람이 말합니다. “시장은 복잡해야 돼. 사람이 많아 좋네”. 관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관점에서 보십니까? 사울의 나쁜 행위입니까? 하나님이 사울에게 기름부었다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어떤 관점에서 보십니까?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실입니까? 하나님앞에서 잘못 사는 나입니까? 사울때문에 가장 많이 고통을 당한 다윗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울을 보고 있으니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것을 다윗에게 배우지 않으면 다윗처럼 될 수 없습니다. 지금 모든 행동을 멈추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하십시오. 사람, 세상, 사물, 교회, 모두 하나님의 눈으로 보십시오. 무엇이 우리를 승리하게 합니까? 인내입니다. 지존자의 그늘아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애통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짝 아프게만 해도 눈물이 나는 여린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믿음입니다. 엔게디는 우리가 사는 모든 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되면 언제나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
삼상 24:1-7 / 김필곤목사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이라는 인물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네 번째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입니다.
다윗의 어떤 마음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마음이 되었겠습니까?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왕을 죽일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죽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신 것이니”입니다. 우리 성도님 같으면 이런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신을 따르는 사람은 6백명입니다. 정예부대가 아닙니다. 오합지졸입니다. 환난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자(삼상22:2)가 다윗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정예병 3천명을 거느리고 자신을 죽이려고 에게디 광야에 왔습니다. 한 번 죽이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얼마나 집요하게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는지 성경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습니다.(삼하18:11) 두 번이나 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는데 피했습니다. 자신이 죽이지 못하자 딸을 미끼로 블레셋들의 손에 죽게 만들기 위해 전쟁터에 보냈습니다(삼상18:21,25). 그러나 다윗은 죽지 않았습니다. 아들과 모든 신하에게 공개적으로 살인면허를 주고 다윗 제거령을 내립니다(삼상19:1) 들로 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블레셋이 쳐들어오니까 다시 전쟁터에 나가 적들을 물리칩니다(삼상19:8) 그러자 사울이 어떻게 합니까? 나라를 구한 영웅을 대접해 주는 것이 아니라 또 창을 던져 죽이려고 합니다(삼상19:10). 다윗은 죽지 않기 위해 그 밤에 창문을 타고 도망을 했습니다. 사울이 전령들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삼상19:15).
사울이 왜 이렇게 집요하게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사무엘상 20장 31절을 읽어 보십시오.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그가 살아 있으면 그가 왕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고 자기 아들이 왕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피하였습니다. 제사장이 그와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 떡을 주어 도와주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이 어떻게 합니까? 사무엘상 22장 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 85명을 몰살시켜 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한 가지 이유로 그렇게 자기를 죽이려고 집요하게 추적하는 사울을 죽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숨어 있는 굴속으로 혼자 용변을 보러 들어 왔습니다(3) 다윗과 그를 따르는 군인들이 같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절호의 기회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신하들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죽이지 않습니다.
한 번 추격한 것이 아닙니다. 1차는 기브아에서 십 황무지로 갔으나 죽이려고 추격합니다. 2차는 기브아에서 십 황무지를 거쳐 마온 황무지까지 추격합니다. 3차는 엔게디 황무지까지 추격합니다. 이렇게 쫓겨 다니는데 가만히 놓아둔다는 것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절호의 기회에도 죽이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마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달린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행전 13장 22절에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뜻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탄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맡으면 자기 뜻을 이루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자식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편의 뜻을 이루고, 아내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평생 이루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애를 썼는지 사도행전 13장 3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그의 죽음에 대하여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행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참된 관계를 맺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누가복음 22:42)” 내 뜻은 순간적이고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인생살이는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성도님이나 저는 이런 말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목사가 자기 뜻 이루려고 목회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이루어야 합니다. 장로가, 안수집사가, 권사가, 집사가 자기 뜻 이루려고 교회 봉사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이루기 위해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자기 뜻 이루려고 봉사하니까 교회에서 서로 죽이려고 싸움 벌이고, 법정 고소하고, 교회 앞에서 데모하고 멱살 잡고 싸우는 것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는지는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할 때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피난하였습니다. 그 때 사울의 친척인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을 길가에서 저주합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삼하16:7)"라고 저주합니다. 그 때 아비새라는 다윗의 신하가 당장 처 죽이려고 할 때 다윗이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라고 말합니다. 저주를 해도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품습니다. 나라가 안정된 후 그가 성전을 지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는 성전 건축을 위해 금 10만 달란트, 은 100만 달란트, 놋과 철과 돌과 목재를 그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준비했습니다. 은 1달란트(talent)는 6000드라크마(drachma)이고 금 1달란트는 은 1달란트의 15배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은100만 달란트는 60억 드라크마에 해당하고 금 10만 달란트는 90억 드라크마에 해당합니다. 1드라크마는 노동자 하루 품삯이므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6만 원씩만 잡아도 금 10만 달란트는 5400조에 해당하고 은 100만 달란트는 3600조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라고 계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확이 얼마인가를 계산하는 데는 무리가 있지만 어마어마한 것을 준비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는 피를 흘려 안 된다 하니까 다윗은 두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대상17:16-27).
다윗은 추한 마음도 가졌지만 이 정도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바로 이런 마음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평생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마음을 가지고 살겠습니까?
결혼하기 위해 배우자를 선택할 때, 직장을 선택할 때, 진학을 위해 대학을 선택할 때, 이사할 때, 교회를 정할 때 등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하며 살겠습니까?
첫째 명백하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과 보여주지 않으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은 명백하고 객관적입니다. 누구나 알 수 있고 누구에게나 수긍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왜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명백하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기름 부은 자를 죽이지 말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 “살인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등과 같이 십계명을 통하여 계시된 말씀은 하나님의 명백한 뜻입니다. 그래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에 있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은 명백합니다. 만고불변의 원칙입니다. 사울은 기름 부은 자도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서슴없이 자신의 권력을 가지고 85명을 죽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에게 당장 이익이 있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사울을 죽이지 않습니다.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은 도덕적이고 명령적이고 교훈적인 것입니다. 십계명을 통해 분명하게 보여주었고, 예수님께서는 그 십계명을 요약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에서 서로 제거하기 위해 싸우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는 것은 자기 합리화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살인하고 사기 치는 직업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직장에 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은행을 도적질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며 잘 해주고 사랑한다고 아내가 있는 유부남과 결혼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면 안 됩니다. 원칙적으로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성경이 말씀하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불신자와 결혼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끝까지 고집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단이 운영하는 학교에 들어가면 미래가 활짝 열린다고 이단을 멀리하라는 하나님의 보여주신 명백한 뜻을 어기고 그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하면 안 됩니다. 다윗은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에 고민하거나 망설임 없이 단순하고 단호하게 순종하였습니다.
빌립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그대로 순종합니다. 사도행전 8장 26절에 보면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합니다. 그 때 순종합니다. 사도행전 8장 29에서는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하니까 그대로 순종합니다. 바울이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하니까 그 말씀에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행16:9). 자기의 뜻과는 맞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가기 싫었지만 그에게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이성, 내 상식, 내 이익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 감정, 내 욕심, 내 뜻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하며 우기면 안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 기뻐하지 못하는 것, 감사하지 못하는 것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거룩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라"(살전 4:3)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7:17)”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빵집 앞에서 저 빵을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먹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기 싫다고 편협한 애국심을 발휘하여 도망가는 요나처럼 피하면 그만큼 고생합니다.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마음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보여주지 않으신 섭리적 하나님의 뜻에 순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도 있지만 보여주지 않으신 하나님의 뜻도 있습니다.
보통 하나님의 뜻하면 하나님의 의도, 생각, 섭리, 계획, 비전 등을 가리킵니다. 보여주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주권적 섭리로 첫째는 우주적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우주를 운행하십니다. 둘째는 개인적 섭리입니다. 우주 안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즉 하나님의 섭리적 뜻입니다. 이 계획은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던 계획이며 아무도 이것을 간섭하거나 막을 수 없는 주권적인 계획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나라가 망하고 어떤 나라가 흥하고 누가 왕이 되고 누가 전쟁에서 이기고 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관을 하시지만 그것을 우리가 알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내려고 점칠 필요 없습니다. 산에 가서 예언 기도 받을 필요 없습니다. 다 알면 이 땅에서 못삽니다. 몇 년 몇 월 며칠에 죽는다고 자신의 죽을 날을 알고 살아 보세요. 우리 꼭 알아야할 것은 알려 주셨습니다. 시작과 끝, 창조, 타락, 구속, 재림 등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도 우연히 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개괄적으로 알지만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 세미한 부분을 어떻게 실행해 가시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확실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요나나 욥이나 다니엘이나 모세나 요셉처럼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러므로 섭리적인 하나님의 뜻은 점치듯이 찾으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고난 가운데 불평하고 원망하며 의심품고 회의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신명기 29장 29절에서는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서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행18:21)”습니다. 자신이 사도로 부름 받아 수없는 고생을 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된 것이라고 여러 번 강조하며 받아들였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핍박을 받을 때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7-28)”라고 했습니다. 고난의 현장에서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적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 수많은 고난을 겪은 베드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7)”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역사의 현장에서 살아갈 때 왜 사울을 제거하고 왜 고생시키면서 나를 세워 왕으로 세우려 하느냐고 투덜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 기름을 부었으면 바로 왕이 되게 하여야 하지 수없이 도망 다니게 하고 자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죽고, 이 난리를 치면서 왕이 되게 만드냐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사울 같은 인간을 만나게 했냐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혼해 놓고 왜 이런 인간을 만들었느냐고 날마다 불평불만하며 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결혼해 놓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힘으로 결국 간수와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행16:24-34) 불신 남편과 결혼했다면 그 결혼을 통해 남편과 자식 가문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부모를 만나 생고생을 하느냐고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이런 교회에 등록하여, 왜 이런 나라에 태어나, 왜 이런 직장에 다니며 라고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하여 원망하고 불평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잠언 16장 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섭리적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윗은 섭리적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작전 계획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인도하십니다. 영화감독이 감독이 원하는 대로 배역을 하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요셉에게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생깁니다. 구덩이 들어갑니다. 노예로 팔립니다. 감옥에 갇힙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냥 고난을 참고 견디며 순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 가운데 한 부분으로 쓰임 받는데 연출하시는 하나님이 배우를 지정하여 사용하시는데 우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상황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수도 있고 불리하게 전개될 수도 있습니다. 유리하게 전개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불리하게 전개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사명 붙들고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에 순응하면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뜻에 불평이나 원망하지 않고 순응했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지나가서 뒤돌아보면 그 길이 하나님의 뜻이었구나라고 우리는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셋째, 개인을 향한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보여주지 않으신 섭리적 하나님의 뜻에는 우주적인 것도 있지만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도 있습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되어진 일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누구와 결혼하고, 어느 학교에 들어가고, 어느 직장에 들어가느냐는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사울을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분별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실행합니까?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겉옷자라를 베라고 성경에 기록하여 다윗이 베었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윗은 왕의 겉옷을 베는 것도 양심에 찔렸습니다(5) 그럼에도 겉옷을 베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자신이 왕을 죽일 마음이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증거로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지도자로써 백성에 대한 책임과 사명을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신하로서 마땅한 의무이고 도의입니다. 한 인간으로 마땅한 도리입니다. 어쩌다 보면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장로로 임직 받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을 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 이어령 비어령식으로 해석하지 말고 상식 수준으로 생각을 해야 합니다. 목사의 아들이, 장로의 아들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교회를 떠납니다. 그것 역시 성경이 무엇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아도 양심과 상식 수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아디아포라 윤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담배를 피울까 말까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 직접 언급되지 않는 윤리입니다. 성경 고린도전서에서는 그런 경우 덕이 되는가를 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고린도전서 10:23)” “모든 것들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26)”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에게 나침반은 주시지만 네비게이션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암살로 왕이 된 자가 되어 정권의 정당성을 잃어버리기 싫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상황을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다윗의 결심을 보십시오. 12절에 자기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12장 2절을 통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롬 2:18)”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상황에 대하여 백화사전처럼 구체적인 삶의 청사진을 말씀해 주시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잘 분별해야 합니다. 퍼즐 맞추기 식으로 옷자락만 베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주팔자 보듯, 궁합을 보듯, 점을 치듯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 안 됩니다. 사주팔자(음력 생년, 월, 일, 시)에 의해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정론적 인생이 아닙니다. 신앙인도 자칫 잘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말하며 하나님의 인격성을 무시한 비인격적 숙명론자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나의 현재, 과거, 미래를 다 아시고 지금 뭘 할지도 다 아시기 때문에 내가 할 앞으로 일은 다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 아신다고 하나님이 강제로 로버트처럼 그 일을 하도록 하시지 않습니다(단순선지식이론).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에 있는 나무 실과를 모두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일만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사과를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감을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복숭아를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옥수수를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사과만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면 안 됩니다. 사과를 먹든, 감을 먹든, 복숭아를 먹든, 옥수수를 먹든 그것은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A대학에 들어가든 B대학에 들어가든, C대학에 들어가든 선악과가 아니면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A와 결혼하든 B와 결혼하든 C와 결혼하든 선악과가 아니면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A직장에 들어가든 B직장에 들어가든, C직장에 들어가든 선악과가 아니면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윗이 옷자락을 잘랐던 옷고름을 잘랐던, 신발을 잘랐던 상관없이 사울의 목만 베지 않았다면 그것은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윗이 옷자락을 자른 것은 양심에 따라 지혜롭게 판단하여 자신의 진정성을 입증해 주고, 후에 왕을 죽인 사람이 왕이 되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분별하여 선택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대하여 성경에 백화사전식으로 나열하여 로버트로 살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유의지를 주어 100%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며 살도록 했습니다. 말씀을 주어 말씀의 원리에 따라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양심을 주어 양심의 원리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로 했습니다. 이성을 주어 이성적 판단으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는 말씀의 원리에 따라 상황을 잘 분별하여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한 마음으로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의 상담을 받고 하나님께서 주신 개인적인 비전을 이루는 방향으로 잘 분별해야 하고 상식을 잘 활용하여 분별해야 합니다. 때로는 기드온이 사용한 양털뭉치 방법처럼 초자연적 방법으로 분별하기 위해 기도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기 위해 베드로에게는 환상을 통해, 바울은 아나니아를 통해 알려 주었기 때문에 오늘날도 초자연적 하나님의 인도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모두에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직통계시를 받아다고 40년이나 같이 산 아내에게 이혼하자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개인적인 구체적 계획을 찾아내라고 말씀하지도 않고 그것을 찾아내었다고 해도 그것이 개인의 삶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무당에게 점치는 것처럼 숙명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일을 할지 알고 계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하여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선한 계획과 맞아 잘 분별하여 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몰라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으로 우리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퍼즐 맞추기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도덕적 문제가 없는 경우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 충분히 자료를 수집하고 평가하여 타당한 근거로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이 일을 지혜롭게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삶의 구체적인 문제 앞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 기뻐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이성, 양심, 상황을 통해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초점을 맞추고 잘 분별하여 살면 되는 것입니다.
뜻 밖의 위로
양은익목사(들풀교회) / 삼상 24:1~15
‘바위들 들썩이는 걸 보니, 꽃 온다는 한 소식 들었나 봐’(김형영, 한 소식). 꽃 온다는 소식에 무뚝뚝한 바위들까지 들썩인다고 합니다. 꽃 오는 모습 보고 들썩이는 노(老) 시인의 마음이 부럽습니다. 이런 마음의 들썩임이 봄날 예배하는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뜻밖의 위로’라는 제목으로 사무엘상 24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뜻밖의 사건’을 통해 일어난 ‘뜻밖의 위로’가 나오고 있습니다. 뜻밖의 사건은 쫓고 쫓기는 사울과 다윗이 한 동굴에서 만나는, 그것도 이상한 모습으로 만나는, 삼자가 볼 때는 상당히 웃기는 일이 일어납니다. 소위 말하는 사울의 화장실 사건인데, 이 사건으로 인해서 쫓는 자가 쫓기는 자가 되고, 죽이려는 자가 죽게 될 수 있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3절은 볼수록 웃깁니다.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합니까? 다윗은 잡히면 죽는 거고, 사울은 3000명의 군사를 동원해서 어떻게든 이번에는 끝장내겠다는 심정으로 서슬 퍼렇게 달려들고 있는 중인데, 동굴 화장실 갔다가 일이 이상하게 돼 버린 겁니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누가 이런 장면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엔 게디 지역(사해 서쪽 바로 옆, 들 염소 바위)은 동굴이 많은 지역으로 유명한 동네인데, 그 많은 동굴 중에서 하필이면 다윗이 숨어 있는 동굴로 들어갑니까? 우연입니까? 필연입니까? 우연 속에 필연이 있다면 사울의 동굴 입성은 어쩌면 하나님이 주도하신 사건입니다. 동굴 속에 들어간 사울은 그야말로 독안의 든 쥐입니다. 사울이 웅크리고 앉아있는 캄캄한 동굴 뒤에는 600명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우리 편’ 그러면서 쾌재를 부르고 있습니다. 사울을 단번에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겁니다. 사울 잡으면 다윗은 왕이 되고, 다윗을 따르던 자들은 더 이상 쫓기면서 살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죽일 수 없다는 고집으로 겉옷 자락만 잘라서 살려 보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시원한 기분으로 밖으로 나간 사울을 불러 세우더니 하고 싶었던 얘기 다 합니다. ‘왕이시여 도대체 왜 나를 죽이려고 하십니까? 나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보십시오. 다 왕을 죽이라고 했지만 나는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항변하면서 자신의 무죄를 항변합니다.
사울은 이 얘기를 듣고 울면서 놀라운 말합니다.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보라 나는 네게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삼상 24:17~21)
사울이 지금 거짓말로 이 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니가 나보다 났다. 너는 왕이 될 것이고, 왕이 될 때 내가 너 괴롭혔다고 복수만은 하지 말아달라’ 하면서 사정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이같은 얘기를 사울로부터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텐데 정말 뜻 밖의 장소에서, 뜻 밖의 말을 들은 것이고, 여기서 뜻 밖의 위로를 받게 되는 겁니다.
저는 이 사건을 하나님이 다윗과 그와 함께한 자들에게 준 위로의 사건으로 읽고 싶습니다. 다윗은 이 뜻 밖의 위로를 통해 다시 힘을 내게 됩니다. 중요한 모습입니다. 물론 사울은 그 때 뿐이었고, 그의 성품과 삶은 이 사건 이후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이 이상한 사건을 통해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뭘 알게 됐을까요? God with me. ‘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구나. 이렇게 힘을 주시는구나. 사람은 쫓기다 보면 약해집니다. 마음도 약해지고, 믿음도 약해지는데 하나님은 약해지지 말라고 위로를 주시는 겁니다.
위로는 참 많은 것을 줍니다. 힘 빠지고, 아프고, 속상하고, 울적하고, 막막하고, 실망하고, 알아주는 이 하나도 없고, 외롭고, 그립고, 흔들리고, 헤어지고, 떨어지고, 불안할 때… 마음 다한 위로 받게 되면 얼마나 고맙고, 힘이 납니까?
팍팍한 삶에서 위로는 없으면 안 되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고, 상한 마음과 영혼을 살려내는 치료제입니다. 위로의 힘은 큽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가끔 야단도 치시지만, 위로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누가 뭐래도 우리의 위로자, Comforter이십니다. 힘(fort)으로 +함께(com) 하시는+분(er)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위로로, 근원적인 위로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위로하시고,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 잊지 마십시다.
제일 좋은 위로의 말은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게 최고의 위로고, 진정한 위로입니다. 하나님이 내 곁에 계셔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만큼 좋은 위로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람의 위로는 쉽게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위로는 영원한 위로입니다. 신31:8에서 모세가 가나안 땅 들어가야 하는 여호수아에게 한 말 합니다.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하는 복음 자체가 위로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넘어지지 않는 겁니다. 오늘 아침 이런 복음의 위로하는 능력이 여러분들에게 가득하기를 축복하고, 축원드립니다.
예배를 통해, 기도를 통해,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 많이 받으십시오. 그리고 받은 위로 가지고 위로가 절실한 이들에게 가셔서 따뜻하게 위로해 주십시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위로자가 돼야 합니다. 이사야 40:1에 보면 하나님은 위로를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우리에게도 주시는 명령입니다. 지금 위로자가 얼마나 절실합니까? 위로가 사라지고, 싸움이 난무한 세상인데, 그런 세상 한복판에 ‘위로’라고 하는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이 뛰어들어가야 합니다.
사울 같은 상처와 적개심을 가진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원한이 원한을 낳고, 보복이 또 다른 보복을 낳으면서, 언제 그칠지 모르는 악순환으로 이 땅은 지칠 대로 지쳐 있습니다. 누가 이 상한 마음들을 위로하고, 고쳐야 합니까? 그리스도인들만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안 해서도 안되는 소명이고 책임입니다. 누구든 만날 때마다 이런 위로의 마음, 선한 마음으로 사는 게 중요합니다.
사람은 만날 때마다 알게 모르게 서로가 서로의 삶에 개입하면서 사는 개입의 존재입니다.
짧은 순간이라도 사실은 서로에게 개입하는 겁니다. 어떻게 개입합니까? ① 긍정과 위로의 마음으로 개입할 수도 있고, ② 상처와 부정의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습니다. 위로의 개입은 존중하고, 용납하며 인정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겁니다. 상처의 개입은 말 그대로 상처와 타격을 주는 공격적인 개입입니다. 비웃음. 비난. 비꼼. 비아냥. 경멸로 개입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잠깐 만나도 훈훈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찬바람만 불고, 기분이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이상하게 기분이 상해요. 그러면 괜히 기분이 나빠서 다른 이에게 화풀이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또 다른 이에게 신경질 냅니다. 그러다가 교통사고가 날 수도 있습니다. 과장이 아니라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겁니다. 내가 너를 만나는 것의 무게는 굉장히 깊은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고 있어야 합니다.
1번 위로의 개입이 몸에 배야 됩니다. 비난과 공격이 난무하는 상처 많은 세상 한복판에서 위로가 나온다면 그 위로는 뜻밖의 위로가 될 것이고, 더 귀한 위로가 될 겁니다. 그때 바울 사도가 고후 1장에서 말한 위로가 우리에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 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4~6)
우리는 위로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귀 기울이고, 눈 열고, 마음 열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밖의 위로가 넘쳐 나고 있을 겁니다. 이 위로 많이 받으시고, 받은 위로, 많은 이들에게 나눠 주셔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기쁨으로 증거하는 여러분들의 인생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힘보다 강한 것
양인국목사 / 삼상 24:1-22
1. 세상은 힘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동안 힘을 더하기 위하여 수고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더 많은 재력(財力), 더 많은 권력(權力), 그리고 더 많은 지력을 얻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아끼기 않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런 힘들이 우리의 삶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거나 또는 일생동안 수고하여 얻은 힘으로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면 삶을 헛된 수고를 위하여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이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할 때 범하게 되는 어리석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을 때 얻을 수 있는 지혜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
2. 1-14절의 내용이다. 사울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블레셋을 쫓아내고 왕궁에 돌아왔을 때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와서 다윗의 소재(所在)를 알려 주었다. 사울은 이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 중에서 선택한 정예 군사 삼천 명을 이끌고 다윗을 잡기 위하여 엔게디로 갔다. 분문에 등장하고 있는 세 인물들, 이스라엘 왕 사울과 그에게 다윗의 소재를 알린 사람 그리고 다윗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회의 구성원들의 성격을 축약(縮約)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힘을 가지고 있는 왕이 있고, 왕의 마음을 사서 자신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있고 그리고 이들에 의하여 고통 받고 있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세 종류의 사람들 사이에 펼쳐지고 있는 이해관계들을 살필 때 한 사회를 황폐시키는 요인(要因)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여기 언급한 세 사람의 이해관계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사울은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하여 반드시 다윗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울이 이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 한 다윗을 쫓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물론 사울은 다윗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번째 인물은 사울에게 다윗의 소재를 알린 사람이다. 그 역시 다윗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소재를 사울에게 알인 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죄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지금 받고 있는 고통들은 탐욕에 이끌려 사는 자기중심적인 사람들로 인한 것이었다. 이처럼 자기중심적 사람들이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살 때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는 시간이 더해 갈수록 더욱 황폐해 갈 수밖에 없는 악순환 구조가 형성된다. 물론 이와 같은 구조의 사회에서는 힘 있는 자들에 의하여 연약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되고 이런 일이 계속될 때 결국 그 사회는 황폐하여 결국은 무너지게 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현재 이와 같은 악순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사회 곳곳에서 연약한 자들이 부르짖는 고통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와 같은 사회 구조를 선순환적인 사회 구조로 바꿀 수는 없을까? 우리의 마음에 있는 탐욕을 허용하는 한 악순환적 사회구조를 선순환적 구조로 바꾸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찾는다면 특별한 공동체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 특별한 공동체란 탐욕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 또는 목표를 가지고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공동체를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믿음의 공동체가 있다. 비록 작은 공동체일지라도 사회에 이런 공동체의 수가 많을수록 그 사회는 선순환적 구조의 사회로 변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사회의 개혁 또는 변화는 공동체 운동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울은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갔다. 엔게디 황무지는 사해 서편에 있는 한 지역으로서(수15:12), 대부분의 흙이 석회질로 이루어져서 마을 여기저기에 동굴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도망자가 숨기에 좋은 장소였다. 사울은 이곳에 도착한 후 배변(排便)을 위하여 한 동굴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들어간 바로 그 동굴 안쪽에는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 숨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때 사울에게는 피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해 있는 상황이었고, 다윗에게는 사울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은 상황이었다. 실제로 다윗과 함께 한 자들은 다윗에게 이때야말로 하나님께서 사울을 제거하도록 주신 기회라고 말하며 사울을 죽일 것을 권고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24;4)” 그래서 다윗은 사울을 죽이기 위하여 가까이 이르렀지만 마음을 바꾸어 그의 겉옷만 베고 생명은 해하지 않았다.
본문의 이와 같은 내용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게 할 만한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그것은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승리가 보장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울은 정예군 삼천 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때 사울을 지켜 주지 못했다. 언급한 것처럼 그가 배변(排便)을 보기 위하여 동굴 안으로 들어갔을 때 군사들은 그와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동굴 안에는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이때 사울을 죽이고자 했다면 죽일 수 있었다. 이것이야 말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그 힘이 자신의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언급한 것처럼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만히 가서 그의 겉옷 자락만 베어왔다. 6절은 다윗이 사울을 죽이기를 원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24:6)”
여기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하나님께서 택하여 자신의 것으로 구별하신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기름부음 받은 자란 하나님께 구별 된 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를 범할 수 없었다. 이것은 마치 성전에서 사용할 도구들 위에 기름을 바름으로 다른 것들과 구별하여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만 사용할 수 있게 한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손을 대지 않았고 그의 옷자락을 벤 것조차 마음에 찔림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다윗의 경우를 보며 연약한 자들이라고 하여 언제나 쫓기는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자신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기회도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은 안다면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승리를 자만(自慢)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겸손히 진정한 승리를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연약한 자들도 자신의 힘없음으로 인하여 절망하기 보다는 약한 자도 승리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여기 우리에게 힘의 유무와 관계없이 승리를 보장해 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길,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것뿐다.
사울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일을 마친 후 동굴 밖으로 나갔다. 그때 다윗은 사울의 뒤를 따라가서 그를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 즉 자신은 왕을 죽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왕을 해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하여 사울이 입고 있던 옷에서 베어낸 옷자락을 보여 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판결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24:14,15)” 다윗은 자신을 마치 죽은 개나 벼룩에 비교함으로 왕이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며 자신을 쫓는 무익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백성들을 위하여 보다 더 큰일에 전념하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과 왕 사이를 판단해 주시기를 구하며 애매히 당하고 있는 고난으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다.
사울은 힘으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오직 자신이 원하는 일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다만 어리석음일 뿐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누구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힘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다윗을 제거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는 일을 할수록 자신이 무너져갔다. 사울은 이처럼 무지로 인하여 자신을 무너뜨리는 일에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하나님만 의지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대적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그 기회를 포기했다. 이와 같은 그의 행위는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와 같은 다윗은 세상에 사는 동안 모든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것이다. 사울과의 싸움에서도 다윗은 진정한 승리자였다.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하니라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24:20-22)”
우리는 사울과 다윗을 통하여 삶의 보장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였다. 삶의 여정에서 때로는 힘이 필요하지만, 힘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힘을 의지하며 살았던 사울은 완전히 실패했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던 다윗은 승리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만이 삶의 여정에서 항상 승리를 보장하는 삶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기 원한다.
엔게디황무지의 인물들
삼상 24장 1-7, 17-19절 / 노창영목사
서론// 사람은 관계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관계의 유형을 맺는가가 중요합니다. 세상에는 선을 악으로 갚거나, 악을 악으로 갚거나, 악을 선으로 갚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세 가지 관계의 유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은 사울을 피해 엔게디(=염소의 샘) 황무지에서 숨어있었는데, 마침 사울은 다윗이 숨어있는 동굴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관계의 유형을 살펴봄으로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모습은 어떠한 삶인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Ⅰ. 첫째로 사울입니다(1-2절). - 선을 악으로 갚은 인물
사울형의 인간은 선을 악으로 갚는 유형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선을 행하면, 선으로 보답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유형의 사람은 선을 베푼 사람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합니다.
A. 선을 악으로 갚는 공격적인 인물들
① 소극적 형태 - 물론 선을 악으로 갚는 모습에는 사울처럼 극단적이지 않지만, 소극적인 형태로도 나타납니다. 바로 남을 미워하고, 질투하고, 비난하고, 냉소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② 적극적 형태 - 하지만 소극적인 공격형 태도가 발전하면 남을 공격하고, 모욕하고, 학대하고, 폭력하고 심지어 살인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ex) 몇 년 전에 청주에 사는 황모씨(73세)가 검찰에 구속을 당했습니다. 황모씨는 죄 없는 사람을 고소하는 무고죄의 황제로, 십년 동안 무려 118건을 고소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버스에게 하차하기 전에, 고속버스가 출발해서 다쳤다고 우기며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검사와 판사도 고소하는 등 자기한테 특별히 잘못한 게 없는데도 트집을 잡았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모습은 우리가 피해야 할 관계의 유형입니다.
B. 사울왕의 모습들
① 질투심과 살인 - 사울은 원해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골리앗과 전투에서 키 작은 다윗이 나타나더니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이 사건으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요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라는 노래가 퍼질 정도였습니다. 사울은 매우 불쾌했습니다. 그때서부터 사울은 다윗에 대한 질투심이 생겼고, 다윗을 죽이려고 많은 시도를 했습니다. 또 사울은 다윗에게 떡과 칼을 주었다는 이유로 제사장 85명을 모두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다윗은 나라를 구한 의인인데, 사울은 선을 행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② 불순종, 악신, 접신, 변덕 - 사울은 악한 신이 임했고, 무당을 불러 제사까지 지냅니다. 그는 다윗에 대한 질투심이 점점 커지더니 분노의 사람이 되고, 결국 폭력을 일삼는 괴물로 변해갔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모습은 결국 변질되고 오염되기 마련입니다. 한편, 디모데후서 4장 14-15절에 나오는 구리장색 알렉산더는 사도바울을 괴롭게 한 인물입니다. 그는 거듭나지 않은 채, 교회 안에 들어와 선을 악으로 갚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많지는 않지만 이처럼 우리는 선을 악으로 갚는 사울형의 모습을 쫓지도 말고, 흉내도 내서는 안 됩니다.
Ⅱ. 둘째로 다윗의 사람들입니다(3-4절). - 악을 악으로 갚은 인물
A. 다윗의 사람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하자, 다윗은 아둘람 굴에 숨었습니다. 그때 다윗의 사람들은 다윗을 따랐습니다. 다윗의 형제와 온 집과 환난당한 사람, 빚진 사람, 원통한 사람들이 모여 다윗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룹니다. 그런데 사울이 다윗을 찾다가 마침 다윗이 숨은 굴로 들어갑니다. 본문에는 ‘발을 가리웠다(to cover his feet)’라고 표현하는데, 히브리 용례로는 1) 잠을 자러갔다, 2) 용변을 보러갔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사울은 혼자 동굴로 들어가는데, 그 동굴 안에는 다윗과 다윗의 사람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사람들은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이 기회는 하나남께서 주신 기회이니 사울을 죽이라고 말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원수이기 때문에 보복하자는 것입니다.
B. 악을 악으로 갚는 모든 사람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악을 악으로 갚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저 보통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인격, 재산, 권리, 지위, 가족, 생명을 침해당하면 보복하려는 심리가 있습니다. 누군가 내 권리를 침해하면 고소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이런 유형의 태도를 갖습니다. 평소에 착한 사람이 자신의 권리가 공격당하면, 본능적으로 욕을 하거나 멱살을 잡는 경우입니다. 여기까지가 우리 사랑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Ⅲ. 셋째로 다윗입니다(5-7절, 17-19절). - 악을 선으로 갚은 인물
A. 악을 선으로 갚은 특별한 사람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악을 선으로 갚는 수준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다윗의 영성과 수준까지 업그레이드되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율법대로 사람을 대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원수를 사랑으로 품어야 합니다(눅23:24). 스데반 집사처럼 자기에게 돌을 던진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행 7:59-60).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마5:43-46).
B. 다윗의 모습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사울의 옷자락만 자르는 것으로 만족해합니다.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지만,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 했던 사울을 죽이지 않고 풀어줍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자를 함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원수를 끌어안고 돌려보냅니다. 그러자 사울은 자기를 살려준 다윗의 모습에 감동을 받고 눈물까지 흘립니다. 다윗은 원수까지 감동을 시키는 자였습니다. 다윗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사울을 선대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다윗은 늘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브넬과 압살롬까지도 끌어안았습니다.
ex)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인 링컨에게는 스탠턴이라는 정적(政敵)이 있었습니다. 스탠턴은 링컨이 대통령되려고 하는 것에 대해 가장 재난이라고 말했으며 심지어 링컨의 외모를 고릴라로 비하했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탠턴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결국 링컨이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스탠턴은 가장 많이 슬퍼하였고 여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 잠들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악으로 선으로 갚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사람들은 우리에게 악을 행할 때, 우리는 악을 선으로 갚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울과 다윗의 사람들의 모습을 뛰어넘어서 악을 선으로 갚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개봉교회 성도님들은 악을 선으로 갚는 다윗처럼 믿음의 사람이 다 되길 바랍니다.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
삼상 24장 1~7절 / 김동호목사
저는 목사입니다. 그리고 나이도 그리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손녀를 볼 만큼 먹었습니다. 때문에 겉으로 볼 때는 젊잖아 보입니다. 그리고 보통 때는 실제로 그렇습니다. 제법 목사답고 할아버지답습니다.
그러나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저는 아직도 운전하다가 가끔 싸웁니다. 제가 주로 싸우는 대상은 택시 기사와 버스 기사 그리고 트럭 기사들입니다. 저들 기사들 중에는 시비가 붙으면 대번 상소리부터 해대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면 대개 기가 죽어서 피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좀 반대입니다. 나이도 많이 않는 젊은 기사에게 상소리를 들으면 거의 제 정신을 잃습니다. 앞뒤를 잘 못 가립니다. 차를 세우고 대번 좇아가 저들의 멱살을 잡습니다.
잡은 후에는 늘 아차 후회합니다만, 화가 나면 그 생각을 못하고 거의 늘 상대방의 멱살부터 잡고 봅니다. 그래도 다행히 대부분 거기서 제 정신이 듭니다. 정말 감사하게도 아직까지 그래도 주먹다짐까지 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거의 모든 싸움이 거기서 끝나 주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제 정신이 들어 멱살까지만 잡고 주먹다짐을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습니다. 분이 풀리지 않는 걸 억지로 참습니다. 목사만 아니라면, 나중에 그것이 들통만 나지 않을 것 같으면 솔직히 내가 맞는 한이 있어도 몇 대라고 쥐어박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분이 풀리고 시원할 것 같습니다. 그 짓을 하지 못하고 살아 가슴에 풀리지 않은 응어리 같은 것이 늘 제게는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혹시 그와 같은 응어리들이 없으십니까? 사람들에게는 거의 누구에게나 다 자신에게 아픔과 상처와 억울함을 준 대상들이 있습니다. 조금 심하게 이야기하면 원수 같은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자신을 억울 하게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한번 시원하게 응징하고 복수하고 싶은데 체면 때문에, 기회가 없어서, 기회가 있다고 하여도 힘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사는 답답함이 우리들에게는 대개 있습니다.
복수하고 싶은데, 근사하게 원수를 갚고 싶은데, 기회가 없고, 힘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만일 근사하게 복수할 기회와 힘이 있는 대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스로 억제하고 복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답답해하거나 속상해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말 훌륭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정말 근사한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다윗이 아직 어린 소년이었을 때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처 들어 왔습니다. 당시 블레셋의 장군이 그 유명한 골리앗 장군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대적하여 나서지 못하고 숨어 있을 때 소년 다윗이 물맷돌을 들고 나아가 골리앗을 죽입니다. 그때 다윗이 골리앗에게 한 말은 참으로 유명한 말입니다. <너는 칼과 단창을 가지고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네게 나간다.>
그와 같은 근사한 승리로 말미암아 다윗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집니다. 공공연하게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말이 노래처럼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이 시기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운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하여 온 사방을 헤매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분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는 일이겠습니까?
아무 죄 없이,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나라에 큰 공을 세워 큰 상을 받아도 시원치 않는 마당에 그 때문에 왕에게 쫓겨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으니 왜 그에게 분이 없고 화가 없었겠습니까?
다윗이 엔게디라고 하는 황무지 곧 사막에 있을 때였습니다. 다윗의 일행 그 사막에 있는 한 굴에 있었습니다. 사울이 거기까지 자기의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다윗을 잡겠다고 쫓아 왔습니다. 사울이 용변을 보려고 다윗이 숨어 있는 굴로 들어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다윗에게 아주 유리한 상황입니다.
사울이 용변을 보려고 들어왔기 때문에 혼자 들어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굴속에 금방 들어오면 굴속에 있는 것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굴 안에 있는 사람은 굴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보지 못하는데, 다윗은 사울을 봅니다. 그리고 사울은 혼자인데 다윗은 부하들과 함께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원수를 갚고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와 같은 상황은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정말 누가 봐도 그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기회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신하들은 다윗에게 이것은 하나님이 불의한 사울에게 복수하라고 주신 기회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 이니이다.>
다윗의 신하들의 생각과 말은 조금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 우리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기름 부어 왕으로 삼으신 이를 내가 함부로 손대는 것이 옳지 않다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이건 정말 도통한 사람의 말입니다. 조그만 일에도 흥분하여 멱살잡고 싸우려고 드는 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의 삶입니다.
다윗이 훗날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피난을 내려 갈 때 사울의 친척인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을 길가에서 저주합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하며 저주합니다.
아비새라고 하는 다윗의 신하가 시므이를 당장 처 죽이려고 할 때 다윗의 말이 너무 근사하고 훌륭합니다. 저가 나를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나를 저주하라 하심이라면 아비새를 막습니다. (삼하 16장)
사울에게도 복수하지 않고, 시므이에게도 복수하지 않는 이유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손대려고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를 저주하는 시므이에게도 손대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수를 금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출애굽기 21장에 나오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씀을 복수의 법으로 이해하지만 그 말씀은 복수의 법이 아니라 책임의 법입니다. 그 말씀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복수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해자가 남에게 피해를 입힌 만큼 핑계하지 말고 정직하게 갚아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을 악하여 그 말씀을 책임의 법으로 이해하지 아니하고 복수의 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에도 사람들이 친히 가인에게 복수하고 심판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가인의 이마에 표를 주시며 누구도 가인에게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가인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이 친히 하셔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서 12장에도 보면 아무리 원수가 있다고 하여도 원수 갚은 일을 직접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원수 갚은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19)
뿐만 아니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말씀하십니다. (롬 12:17)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롬 12:20) 그렇게 하는 것은 원수의 얼굴에 모닥불을 피어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잠 25:22) 우리가 그렇게 하면 원수가 얼마나 얼굴이 뜨거워 질 것이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십니다.(롬 12:21)
쉽게 말해서 하나님을 믿고 복수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말은 쉽지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말씀이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믿었습니다. 사울이 굴에 들어 왔을 때 가만히 칼로 그의 목을 베지 않고 그의 옷자락을 베었습니다. 나중에 사울에게 자신의 진심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 옷을 벤 것을 가지고 다윗이 마음에 찔려 했다고 하였습니다. 머리 털 하나는 물론이고 옷자락도 손대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절대로 자신을 억울하게 하지 않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믿으면 원수까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복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영락교회에 있을 때 장로님 한 분과 크게 다툰 적이 있었습니다. 토요일이었는데 그 상처가 너무 커서 설교 준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매주일 고등부에서 설교를 하던 때였는데 그 장로님과의 다툼 때문에 받은 상처로 인해 설교를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주일 새벽 4시까지도 분 때문에 설교가 준비되지 않아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잠도 오지 않는데 그냥 눈만 감고 침대에 누어 있었는데 갑자기 제 마음속에서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하는 찬송가 434장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참으로 좋아하는 찬송이었습니다. 나름대로의 간증이 있는 찬송이었습니다. 조용히 그 찬송을 마음으로 불렀습니다. 찬송 중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라는 단순한 가사에 은혜가 되었습니다.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라는 가사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 하셨네’라는 가사에 넘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생각으로만 그 찬송을 반복하여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은혜가 차고 넘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흘러 나와 발목에 차고, 무릎에 차고 , 허리에 차고 나중에는 수영 할 큼 물이 찼다는 말씀이 있는데 꼭 그 기분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발목에 차고, 무릎에 차고, 허리에 차고 머리 꼭대기까지 차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은혜가 찰수록 미움과 분이 없어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릎에 찰 때쯤 그 장로님이 그냥 용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은혜가 허리에 찰 때 쯤 그 장로님이 이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름대로 장로님도 교회를 위하여 그러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정말 들었습니다. 은혜가 머리 꼭대기에 찼을 때 그냥 그 장로님이 사랑스러워졌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가 충만 하자 마음의 분과 미움이 사라졌습니다. 거의 단번에 설교가 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일 날 교회에서 그 장로님을 만나 저도 모르게 꽉 껴 안았습니다. 저는 성격적으로 그런 일을 잘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그러고 싶었습니다. 진심으로 그러고 싶었습니다. 장로님이 놀라셨지만 저의 진심을 대번에 아셨습니다. 장로님도 저를 꽉 안아 주셨습니다.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경험 중에 하나였습니다.
물론 그 장로님은 제게 원수 같은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그날만큼은 그랬습니다. 그 날 만큼은 정말 원수 같았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넘치니,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니분과 미움이 정말 눈 녹듯이 녹았습니다. 저는 그날 이와 같은 은혜가 있다면 정말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며 살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을 마음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처음 용서가 얼마나 훌륭한 것이며 근사한 것인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동안교회에서도 장로님 한 분과 아주 힘든 일이 있었습니다. 정말 이해가 안 되고 마음으로 용서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그를 향한 미움과 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강단 뒤에 걸려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제가 미워하던 그 장로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가 좋아하지 않고 솔직히 미워하는 그 장로님을 사랑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제게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제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저를 보았더니 거기에는 죄인이 있었습니다. 나도 그와 별 다를 바 없는 하나님 앞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생각에 나는 좀 낫고 그는 좀 못한 것처럼 보였는데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나와 그를 비교해 보니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의 그런 면 때문에 내가 그를 미워하고 싫어한다면 하나님은 똑같은 이유 때문에 나를 미워하시고 싫어하시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모든 사람을 십자가를 통하여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봅니다. 힘든 사람은 있는데 원수는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억울하게 자기를 괴롭히는 사울을 저도 복수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졌습니다.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큰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세상에 싫은 사람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미운 사람 없는 사람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복수하고 싶은 원수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도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고, 억울함을 주는 사람이 있지 않으십니까? 기회만 주어진다면, 다윗이 굴속에서 사울을 만난 것과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와 같은 기회를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복수의 기회인 줄 알고 단 칼에 치고 싶은 사람이 여러분에게도 있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윗 같아지기를 원하십니다. 용서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용서뿐만 아니라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십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데 그 심판은 공의로우셔서 절대로 사람을 억울하게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으면 복수의 마음이 없어집니다.
상처를 붙잡고 살지 않고, 은혜를 붙잡고 살면,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을 보면 원수가 없어지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 보입니다. 그 수준에 이르면 정말 우린 근사한 사람입니다. 사울까지도 용서하는 다윗처럼 우리도 모든 사람을 용서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하며 사는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복수는 안 됩니다
삼상 24장 1~7절 / 조상호목사
이솝 우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농부가 산길을 걸어가다가 짐승의 슬픈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소리 나는 곳으로 가보았더니 산짐승을 잡으려고 파놓은 깊은 웅덩이에 호랑이가 빠져서 꼼짝을 못하고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농부는 불쌍한 마음에 호랑이를 꺼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쫄쫄 굶었던 이 호랑이가 농부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농부는 억울해서 “호랑이이야, 이럴게 아니라 우리가 소에게 가서 한 번 물어보자”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소에게 가서 그 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자, 소는 호랑이에게 농부를 잡아먹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소를 실컷 부려먹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고기와 뼈와 내장까지 남김없이 먹을 만큼 나쁘기 때문에, 그 농부를 잡아먹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 농부는 꼼짝 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농부는 호랑이를 달래어 “호랑이야, 이번에는 여우에게 물어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우를 만나 그 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자, 여우도 소와 마찬가지로 그 농부를 잡아먹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을 잡아다가 부인들의 목도리를 만들어 주기 때문에, 그 농부를 잡아먹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농부는 “호랑이야, 마지막으로 토끼에게 한 번 물어보자”고 했습니다. 그 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난 토끼는 자기가 머리가 나빠서 잘 모르겠으니, 현장에 가보자고 하였습니다. 현장에 도착하자 토끼는 호랑이에게 그 동안에 있었던 사건을 다시 이야기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요청을 받은 호랑이는 자기가 빠져 있었던 깊은 웅덩이로 뛰어 들어가 "나는 여기에 있었고, 저 농부가 나를 .... " 하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토끼가 농부에게 말하였습니다. "아저씨 빨리 갈 길이나 가세요. 저 배은망덕한 짐승을 도와주었다가 무슨 이익이 있겠어요." 결국 농부는 살아나고 호랑이는 얼마 후 동네사람들에게 잡혀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로 ‘은혜를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로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셋째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를 살려준 농부를 잡아먹으려고 했던 호랑이 같은 사람이, 바로 여기에 속합니다. 요즘 우리 주위에 보면 이 호랑이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모의 은혜를 기억하기는 커녕, 부모님의 재산을 빼앗다시피 하는 바람에, 부모님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는 자식이 많이 있습니다. 간이라도 빼줄 것 같이 행동하다가 이익을 위해서 친구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돈 때문에 자기를 키워준 스승도 서슴없이 배반하는 못된 제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바로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사울은 왕이었지만, 어린 소년 다윗으로부터 은혜를 입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과 원수지간이었던 블레셋에서 거인 골리앗을 앞세우고 쳐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사울을 비롯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골리앗과 한 번 싸워보지도 않은 채, 골리앗의 위세에 눌려 크게 두려워 떨었습니다. 골리앗 앞에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소년 다윗이 나타나서 물맷돌을 가지고 골리앗을 쓰러뜨림으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개선장군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백성들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다윗을 보며 환영했는데, 특별히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라고 노래를 부르며 좋아했습니다. 비극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임금은 사울인데,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thousands)이고 다윗은 만만(ten thousands)이라고 하는 백성들의 노래는 사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이 앞으로 왕의 자리를 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사울은 그를 죽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더 이상 이스라엘 땅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부터 그의 인생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집에서 부모님을 도와 양을 치던 목동에서, 하루아침에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왕과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골리앗과 싸웠던 그가, 하루아침에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나라에 속한 그일라를 공격했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비록 그가 지금 사울을 피해 다니는 도망자 신세였지만, 그는 그일라 사람들을 구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무엇이 돌아온 줄 아십니까? 배신이었습니다. 그에게 다가온 것은 상이 아니라, 칼이었습니다. 사울왕은 다윗이 그일라를 블레셋의 손에서 구하기 위해 그일라에 온 것을 알고 다윗에게 상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그일라 사람들을 모아 다윗을 체포하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울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사울은 자기를 살려준 농부를 잡아먹으려고 했던 호랑이 처럼,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일라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600명 가량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마온 황무지로 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추격해왔기 때문에 그곳에서도 오래 머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엔게디 황무지에 숨었습니다. 이 엔게디는 사해 서편 광야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주위에 석회동굴이 많이 있는 곳입니다. 전해오는 기록에 의하면 3만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동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사울을 피해 숨었던 곳이 바로 이런 큰 동굴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울에게 다윗 일행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사울은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출동했습니다. 사울은 엔게디 황무지를 수색하다가 다윗 일행이 들염소 바위 근처에 숨어 있다는 보고를 받고, 수색방향을 그리로 돌렸습니다. 그런데 들염소 바위를 향해 가던 사울이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다같이 3절을 보겠습니다.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사울이 어디로 들어갔습니까? 굴로 들어갔습니다. 왜 갑자기 사울이 굴로 들어갔을까요? 저는 과거 이 본문을 읽을 때, 사울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다윗은 혼자가 아닙니다. 비록 다윗이 도망자가 되었지만, 그의 곁에는 600명 가량의 부하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인 3,000명의 부하들 중 단 한 사람도 대동하지 않고 동굴로 들어갔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3절을 보면 ‘뒤를 보러 들어갔다’는 말이 나옵니다. 과거 개역성경에는 ‘발을 가리우러 들어갔다’고 번역되어 있는데,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개역개정판성경에는 원문과 가깝게 ‘뒤를 보러 들어갔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뒤를 보러 갔다’는 말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대변을 보러 갔다’는 뜻입니다. 사울이 음식을 잘못 먹어 배탈이 났는지, 아니면 다윗을 체포하기 위해 과도하게 신경을 써서 신경성 복통이 일어났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울은 매우 급하게 볼 일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사울에게 있어 다윗을 추격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지만, 볼 일 보는 것보다는 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3,000명이나 되는 부하들을 다 제쳐두고 혼자서 굴로 뛰어 들어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알고 사울의 행동을 보면 사실 그의 행동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죽 급했으면 동굴 속으로 뛰어 들어갔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동굴 안에 사울이 그토록 죽이려고 했던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숨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급한 나머지 동굴 속으로 뛰어든 사울은 동굴 안이 깜깜해서 그 안을 자세히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환한 곳에 있다가 깜깜한 극장 같은 곳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사울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동굴 안에 들어가자마자 바지춤을 내리고 막 볼 일을 보고 있는 사울을 동굴 안에 있는 다윗 일행이 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장면을 상상하다가 얼마나 웃음이 나왔는지 모릅니다. 정말 황당했을 것입니다. 사울을 피해 동굴 안에서 숨죽이고 있는데, 갑자기 자기를 그렇게도 죽이려고 했던 사울이 들어와서 바지춤을 내리고 볼 일을 보고 있는 것을 본 다윗은 정말 황당한 기분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부하들은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울왕을 단 칼에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들은 다윗을 설득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사울을 죽이고 그에게 보복할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몇 주 전, 신문에 끔찍한 한 사건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18살 난 유모군과 18살 난 조모양 등, 6명은 모두 가출청소년으로 단칸방을 얻어 함께 어울려 지냈습니다. 그런데 지난 4월 조양이 부산의 한 PC방에서 게임을 하다 18살 난 김모군 일행에게 폭행당하자, 다음날 김군을 자취방으로 납치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감금해두고 6명이 번갈아 가며 폭행했습니다. 그들은 “1주일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며 김군을 밧줄로 묶어놓고 PVC 파이프와 주먹, 발 등으로 온몸을 마구 때렸습니다. 그러다가 김군이 정신을 잃으면 깨워서 다시 때렸고, 3일 만에 김군은 좌측 대퇴부가 골절되고 의식불명에 빠져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이들의 집단 구타는 계속됐습니다. 결국 김군은 구타를 못 이겨 4일 만에 숨지자 김군의 시신을 이불로 싼 뒤 바로 자신들이 사는 자취방 담벽 틈에 버렸습니다. 그 후, 그들은 두 달 여 동안 자취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무서운 유혹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보복입니다. 자신에게 돌을 던지고, 자기를 험담하고,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고,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을 향해 보복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보복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기회가 오면 언젠가는 복수하겠다“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복수가 문제 해결의 방법이 아닙니다. 복수는 나라와 민족을 힘들게 합니다. 복수는 학교나 교회까지도 힘들게 합니다. 복수는 개인도 힘들게 만듭니다.
정신과학(Psychological Science)라는 잡지에 미시건주에 위치한 호프대학(Hope College)의 위트블리 박사가 이런 주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 “원한의 감정을 가지면 많은 긴장을 유발해 면역체가 파괴되고 신체의 손상이 간다.“ 위트블리박사는 실제적으로 임상실험을 했습니다. 친구나 가족이나 동료들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 70명을 추출해서 두 부류로 구분했습니다.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한 부류와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그 결과 용서하지 않은 사람들은 심장박동수와 혈압이 상승하고, 분노, 슬픔, 자제력의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는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하고, 마음대로 음식을 먹지 못하는 식용부진에 빠지기도 합니다. 너무 심하면 나중에는 홧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합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반복되고 있는 다툼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라도,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은 용서의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이 사울을 죽인다할지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를 죽이러 온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정당방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백성들은 사울왕보다 다윗을 더 좋아할 만큼, 민심도 다윗에게 유리했습니다. 그래서 부하들은 다윗에게 사울을 죽이자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 때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4절을 보겠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사울의 목을 베었습니까? 아닙니다. 다윗은 조용히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서 볼 일을 보고 있는 사울의 겉옷 자락만 베고 그를 살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살짝 옷자락 벤 그것가지고도 다윗은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부하들에게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종을 내 손으로 죽일 수 없다.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울을 살려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윗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께 맡기라
첫째로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원수 갚는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12절을 보면, 다윗은 ”야훼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야훼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의 악행에 대해 친히 보복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울에게 직접 원수를 갚지 않고,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만 맡긴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오늘 본문 다음, 다음 장인 26장에 보면 십(Ziph) 황무지에서 일어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충성스런 부하 아비새와 함께 밤에 이스라엘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접근해서 보니 사울이 보였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추격하느라 피곤했던지, 자기 창을 머리맡에 놓고 자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윗이라면 ‘지난번에 살려주었으면 이제는 좀 변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지난번에 분명히 겉옷자락만 베고 살려주었더니 또다시 나를 접으러 와? 이번에는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생각하고, 당장 사울을 향해 창을 던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비새가 잠들어있는 사울을 창으로 찔러 단번에 요절내자고 했지만, 다윗은 그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사울 머리 곁에 놓여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자기 원수를 하나님께 맡긴 사람입니다. 한 번만 맡긴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겼던 다윗과 같은 모습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원수 갚을 수 있는 아무런 권한도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장 19절을 보면,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직접 원수를 갚으라고 하십니까? 갚지 말라고 하십니까? 갚지 말라고 하십니다. 원수 갚는 권한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원수를 갚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복수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다윗처럼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원수 갚는 것을 한 번 맡기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께 맡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잠잠히 기다리라
둘째로 하나님께 맡겼으면 잠잠히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시간표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무려 13년 이상 사울을 피해 다니는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인내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안내했습니다. 다윗은 악한 사람들 때문에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사람‘이라는 별명을 붙인다면, 다윗에게는 ’인내의 사람‘이라는 별명을 붙일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이 일하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인생을 포기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다니는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성군’이라는 별명을 받을 만큼 훌륭한 인격과 탁월한 실력을 갖춘 왕으로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준비가 다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군사들에게 쫓기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한 사울에 이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주셨습니다. 다윗은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끝에 이스라엘 왕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다윗은 악한 자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야훼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시37:1,7)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안내하시기 바랍니다.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다윗처럼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9.11 테러사건 5주년을 하루 앞두고 있습니다. 9.11 테러 5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다윗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은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려고 추격해오는 사울을 하나님께 맡기며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지난 2001년 9월11일 알카에다의 공격을 받아 순식간에 세계무역센터 빌딩 두 채가 무너졌습니다. 이 일로 엄청난 경제적인 손실 뿐 아니라, 5,000명이 넘는 죄 없는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사건이 벌어진 후 부시 미대통령은 전 세계를 샅샅이 이 잡듯이 뒤져서라도 알카에다를 소탕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부시대통령의 말대로 미국 정보단체인 CIA는 미국 곳곳에 있는 알카에다 대원들을 체포하고, 미국은 알카에다에게 무서운 보복을 감행했습니다. 알카에다가 숨어 있는 파키스탄 북쪽 산간지역에 엄청난 양의 폭탄을 퍼붓고, 수많은 군인들을 파견했습니다. 여러분, 질문할까요? 그 결과 알카에다의 테러가 멈췄습니까? 아닙니다.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고 나서도, 스페인 열차 폭발사건, 영국 런던 폭탄 테러사건, 등 수많은 테러가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세계는 테러의 공포 속에 떨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탈 때마다 기분 나쁘게 짐 검사를 받고, 몸수색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잊어버릴만하면 테러경보가 발동되었다는 뉴스가 나옵니다. 앞으로도 테러의 위협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중동사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평화협정을 맺어 한 동안 잠잠했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이 자살폭탄 테러를 감행하자, 이스라엘에서는 평화협정을 깨고 무차별로 팔레스타인을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팔레스타인에서는 전보다 더 강력하게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중동지역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가 되어 전쟁이 끝날 날이 없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칼은 또 다른 칼을 낳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 가정이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 교회가 살기 위해서라도, 원수에게 복수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이 살기 위해서라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선을 베풀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제 마지막으로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에 실린 링컨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LA 동양선교교회에서 시무하시는 강준민목사님의 책에도 실려 있는 것을 본적이 있는데, 원문 그대로 소개하겠습니다.
링컨에게는 변호사 시절부터 그를 무시하고 모욕하는 원수 같은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에드윈 스탠턴이었다. 그는 당시 가장 유명한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링컨은 그에 비하면 아주 애송이 변호사에 불과했다. 한 번은 링컨이 중요한 사건을 맡게 되어 법정에 나가보니 마침 스탠턴도 그곳에 나와 있었다. 알고 보니 링컨과 스탠턴이 함께 그 사건을 변호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법정에 앉아 있던 스탠턴은 링컨을 보자,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렇게 외쳤다. “저 따위 변호사와 어떻게 같이 일을 하는 겁니까? 이번일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저런 애송이와는 함께 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불쾌하다는 듯이 문을 꽝 닫고 나가버렸다. 그 뿐만 아니라, 스탠턴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링컨을 얕잡아 보고 무례한 언어와 행동으로 링컨을 골탕 먹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여러분, 우리는 고길라를 만나기 위해 아프리카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 가면 링컨이라는 고릴라를 만날 수 잇습니다.“ 세월이 흘러 대통령이 된 링컨은 내각을 구성하면서 가장 중요한 국방부 장관 자리에 바로 스탠턴을 임명했다. 참모들은 이런 링컨의 결정에 모두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스탠턴은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국가적 재난’이라고 하면서 그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참모들이 볼 때, 스탠턴은 ’링컨의 원수‘ 였다. 더군다나 그는 공화당 사람도 아니었고, 확고한 민주당 사람이었다. 모든 참모들은 스탠턴 임명을 재고해달라고 링컨에게 건의했다. ”대통령 각하, 지난날 스텐턴이 한 행동을 잊으셨습니까? 그는 아직도 당신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이런 중요한 자리에 앉힐 수 있습니까? 링컨은 참모들의 말을 듣고 나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 사람이 나를 수백 번 무시한들 어떻습니까? 그는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으로 국방부 장관을 할 충분한 자질이 있습니다. 그는 지금 난국(남북전쟁)을 훌륭하게 극복할 수 있는 소신과 추진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가 이 난국을 해결해 줄 있다면 나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도 스탠턴은 당신을 비난하고 모욕한 당신의 원수가 아닙니까? 원수를 없애 버려야지요!” 링컨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수를 우리의 마음속에서 없애 버려야지요! 그러나 그것은 ’원수를 죽여서 없애라‘는 말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으로 녹여 친구로 만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 사람은 나의 적이 아닙니다. 적이 없어져서 좋고, 그처럼 능력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되어 좋고, 일석이조 아닙니까?” 결국 스탠턴은 링컨과 힘을 합쳐 국난을 극복하고 많은 일을 했다. 그는 국방부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최선을 다해 일했다. 링컨이 암살자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을 때, 스탠턴은 링컨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밤잠을 설칠 수 있지만, 용서하면 평안한 밤을 보낼 수 있습니다. 복수하면 사람을 잃을 수 있지만, 용서하면 사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으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지만, 원수를 원수로 갚으면 주님을 슬프시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를 받았다면,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선을 베풀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링컨의 말에 귀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적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을 당신의 친구로 만드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