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크린 최세운
어제는 짧은 꿈을 꾸었습니다 소리는 투과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울타리와. 흰 벽면과 커튼. 닫힌 창문 그리고 유리창이 달린 나무문. 가려지지 않았고 또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막을 수 없는 노트의 페이지처럼 소리는 펄럭거리며 지난날을. 정답고 조금 더 따뜻했던 나라를. 새와 마침표가 없는 시간을. 신발을 신고 달려가는 바람을. 나는 꿈속에서 한 가지의 무늬란 없다고. 한가지의 무늬를 가진 사람은 없다고.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솔직하지 못한 그런 억지스러운 말을 하면서 흐린 여름, 골목을 걷고 있었습니다 비가 와서 시원했던 팔월로 기억합니다 사라지지 않은 우산과 장미넝쿨.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던 빛 조각. 페인트가 떨어진 오래된 철문 앞에서, 버려진 소파 옆에서, 다시 짧고 간결한 웃음을 지어야하는지 나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걸었습니다 골목 끝에서 마주해야 했던 어떤 일들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골목 끝에서 들어야 했던 어떤 말들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서성이다 떨어지는 소리를 벽을 투과해 차분히 내려앉은 소리의 다발을 가만히 움켜쥐면 툭, 하고 터질 것 같은 소리의 질감을 방 그늘 속에서만 낼 수 있는 소리의 세기를 붉은 네온사인이 있는 동네와 그 골목을. 잠그고, 싱거운 밤과 불투명한 문가에 버려진 봉투 더미를 부르고. 아무것도 남지 않겠습니다 소리가 떠난 후에는 후회되는 일만 남아 꿈으로 다시 다가오겠습니다 돌고 돌아 다시 여름으로 벽면을 뚫고 창문을 넘어서 번져오고 번져가겠습니다. —월간 《현대시》 2023년 2월호 --------------------- 최세운 / 1982년 전북 전주 출생.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4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페디큐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