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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지고..
48.
재민은 소매로 코를 막고 도살장거리로 들어섰다. 그곳은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짐승의 목이 어지럽게 놓아져 있었다.
부패를 막아주는 소금을 실은 수레와 고기 덩어리를 담은 수레가 오가고 있었다. 재민이 어느 도살장 앞에 멈추더니 그곳에서 살을 바르고 있던 백정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내 백정은 날이 선 칼로 고기와 뼈를 바르고 있었다. 칼과 같이 날이 선 말투로 백정이 말했다.
“누굴 찾으시오?”
“혹 황경석이라는...”
재민의 답이 끝나기도 전에 백정은 칼끝으로 자신이 서 있는 곳 뒤를 가리켰다.
“고운 비단에 핏물 튀지 않게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재민은 그의 호의에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한 마음을 보이고는 백정이 가리킨 곳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 들어서자, 거리에서 풍기는 피비린내 보다 더욱 심한 냄새가 재민의 코를 찔러댔다. 재민이 눈살을 찌푸리고 안으로 더 들어가자, 왕대나무가 가지런히 엮어있는 발이 눈에 들어왔다.
“대감! 여기입니다.”
그 안에서 진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 일세.”
“강녕하셨습니까?”
진복이 막을 들춰서 재민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왔다. 안으로 들어서자, 그 곳에는 향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조금이나마 피비린내를 감추지 위해 켜놓은 것이지만, 재민의 코에 스며든 그 짭짤한 비린내는 여전했다.
“여기는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밖에 있는 자가 아우입니다.”
재민이 놀란 눈으로 진복을 바라보았다.
“저 백정이 아우라는 것인가?”
“네 그렇습니다. 집안이 조금 복잡하지요.”
차마 남의 가정사의 끼어들 수 없어, 재민이 더는 묻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되고 있나?”
“우상의 작죄는 여전합니다. 그간 어떤 수단으로 배를 불렸는지 그 방법들을 속속히 제게 알려주고 있지요. 저 또한 그 방법으로 그자의 배를 불려주고 있지만...”
진복이 난처한 듯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였다. 그의 심중을 알아차린 재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 말게. 자네는 거사가 시작되기 전 조선 땅을 벗어날 것일세.”
진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더 걸리나.”
“조금 더 시간을 주십시오.”
재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증좌를 어느 자에게 넘겨야 할까요?”
그들은 다시 사헌부 지평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윗선에서 수를 쓰지 못하도록 빠르게 왕에게 알리는 것 또한 중요했다. 이제 조금씩 궁극에 도달하고 있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주고받던 재민이 먼저 밖으로 나왔다. 재민이 밖으로 나오며 뒤를 돌아보자, 진복은 다 타버린 향을 확인하고는 새 향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에게서 눈을 떼고 걸음을 내딛은 재민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무엇인가를 옮기고 있는 진복의 동생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소의 살을 바르고 있던 백정은 이제 뼈를 옮기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는 재민을 보고는 그는 뼈를 한 곳에 내동댕이치고는 제 바지춤에 손을 닦았다.
“기다려 보십시오.”
백정은 투박스러운 말투로 말을 내뱉고는 도마 위에 올라있는 소고기 한 덩어리를 소금이 담긴 함지박에 던졌다. 그 안으로 들어간 소고기는 그의 말투와 같이 투박한 그의 손길이 이곳저곳에 고루고루 소금이 묻었다.
이내 소금이 묻은 덩어리를 한지 위에 올리더니 그 소고기를 둘둘 말았다. 그러곤 한지에 쌓은 고깃덩어리를 나무함에 넣고 보자기로 쌓아서는 재민에게 건 내었다.
“가져가십시오.”
재민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자,
“여기서 꿍꿍이를 벌인다고 떠벌리고 다닐 것이 아니라면 받으십시오.”
라고 말하며 재민의 손에 억지로 들려주었다. 그의 손에 보자기를 넘겨준 백정은 작은 소리로 무어라 구시렁거렸다.
류현의 서찰을 받은 정호는 은밀하게 상인들 사이에서 옮겨지는 소문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위조은괴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정호는 놀랄 수밖에 없었고 어서 빠른 시간에 그 진실을 류현에게 알려야 했다.
그러나 서찰로 보낼 수는 없었다. 자신이 직접 전해야 하는 엄비(嚴秘)였기 때문에 어서 빨리 아비에게서 한양으로 돌아오라는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후에야 아비에게 한양으로 돌아오라는 서찰이 왔고, 한양에 다다른 정호는 아비에게 문후를 여쭐 새도 없이 재빨리 류현을 찾아갔다.
의금부에 도착한 정호는 다급하게 글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정호가 써내려 간 글을 본 류현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류현은 그저 어두운 표정으로 정호가 내민 종이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위조 은괴가 개성에서 돈다. 청나라와의 무역이 가장 활발한 개성에서 위조은괴가 돈다. 개성시전에 풀린 위조은괴가 청나라로 흘러들어 간다면 여지없이 그들은 개성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신뢰를 잃은 개성은 청나라와의 무역이 끊기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하여 물가는 치솟을 것이다. 물가...그들이 원하는 것이 물가를 올리는 것이었다.
“누구의 짓인가! 감히 누가!”
어두워진 류현이 소리쳤다. 정호가 다시 붓을 들고 글을 썼다.
[자경상단, 그리고 그와 가까운 병조판서 강윤식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류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종이에 적혀있는 내용은 다시금 아비의 존재에 대해서 상기시켜주었다. 자신의 야심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소리쳤던 그 모습, 그 모습이 류현의 눈에 박혀 생생하게 자신의 앞에 펼쳐졌다.
[더 파헤치길 원하십니까?]
자신의 앞에 보이는 공상을 떨치기 위해 싸우던 류현에게 정호가 종이를 펄럭였다.
“그만, 그만해도 좋다.”
아비의 끝에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일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 끝에 아비가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져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아비가 원하는 것을 그 손에 들려주지 않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이상의 폐단을 두고 보기만 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덧 조선이 추위에 빠졌다. 그 추위는 도성, 한양 또한 휩쓸고 있었다.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거리에는 길을 거닐고 있는 인적이 드물었다. 재민이 성훈과 함께 장위동으로 갔다.
“여기 있습니다. 이것들이라면 천벌을 받을 그놈들을 일벌백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복과 함께 온 정호가 그들에게 여러 권의 책을 건 내어 주었다.
“곧장 신의주로 향하게. 그곳으로 가면 아모관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일세.”
“저희들만 몸을 피하게 돼서...송구스럽습니다.”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이곳에 있는 이들의 안위는 걱정하지 말고 어서 길을 떠나게.”
성훈이 정호가 넘긴 책을 집어 들며 말했다. 성훈에 말에도 진복은 그들이 걱정되는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자자, 갈 길이 머니 어서 걸음을 옮기시게.”
책을 뒤적거리던 성훈의 옆에 앉아있던 재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복의 어깨를 밀어내며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진복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복은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이곳에 남아있는 저의 아우들이...”
“걱정 마시게. 이곳에서의 일은 우리가 잘 처리 할 것 일세.”
재민의 진복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진복과 정호가 그들을 향해 절을 올리고 먼저 방을 빠져나갔다.
“스승님.”
재민이 성훈을 불렀다.
“막상...이렇게 때가 되니...늙은이의 마음이 나약해져 망설여지는 것 같구먼...”
“스승님.”
성훈이 방안에 자그맣게 나있는 창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달빛을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재민 또한 스승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윽고 앞에 놓아져 있는 책 더미를 바라보았다.
한 바탕 조정이 시끄러워졌다. 왕은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노론 석이 시끄러웠다. 그러나 소론 석에 앉아 있는 대신들은 쥐 죽은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음모 입니다! 이것은 음모입니다. 주상전하!”
노론 석에 앉아있는 이들은 발 벗고 나서서 왕 앞에 납작 엎드려 있는 우의정 홍기찬을 두둔하였다. 그들의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왕의 혈색이 점점 더 어두워지고 그 어둠 속에서 노기가 밀려 올라왔다.
홍기찬을 두둔하는 다른 이들에 반해 김규진과 강윤식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이라도 한 것인지 김규진은 털 끝 조차도 세우지 않고 내내 평안함을 찾고 있었다. 그 옆에 앉아있는 강윤식은 매서운 눈으로 재민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 닥치시오!”
왕이 소리쳤다. 그제야 희정당 안이 고요해졌다. 소리치던 이들이 내몰아 쉬던 숨소리조차도 크게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왕이 들고 있던 책을 부들거리는 손으로 넘겼다. 넘기고 또 넘겼다. 그 책 안에 들어있는 내용은 실로 놀라울 뿐이었다.
“공범은 잡았는가?”
왕이 사헌부 지평에게 말했다. 그러자 왕의 가까운 곳에 있던 지평이 입을 열었다.
“그의 상단으로 갔을 때 그곳에는 이미 행수는 없었사옵니다. 그곳의 수복을 통해 그 행수가 신의주로 갔다는 것을 들어, 그 뒤를 쫓고 있사옵니다.”
지평의 말이 끝나자, 왕이 소리 나게 책을 덮었다. 그리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상...그간 많이 즐거우셨겠습니다.”
왕의 말을 들은 홍기찬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왕...그 얼굴에 겁먹은 홍기찬이 김규진을 바라보았다.
김규진 역시 아무런 표정 없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옆의 강윤식 또한 아무런 표정 없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홍기찬. 이미 그는 버림받았다.
“주상전하! 소신의 어리석음을 하해와 같은 성은으로 헤아려 주시옵소서!”
홍기찬의 목소리가 희정당 안에 울려 퍼졌다. 그의 말을 들은 왕은 화를 내지 않았다. 곧이어 왕의 코웃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과인을 우롱하는 것이오?”
홍기찬이 고개를 숙였다.
“헤아려 달라...”
왕의 웃음소리가 편전 안을 메워 찼다.
“차라리 죽여 달라 말하시오. 그편이 우상이 살기에는 더욱 좋은 방법일 것 같소.”
“주상전하...”
홍기찬이 울먹이는 얼굴로 왕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 아무런 감정을 읽을 수 없던 왕의 눈빛에 노기가 서려있었다.
그리곤 홍기찬의 앞으로 왕이 책을 집어 던졌다. 우악스런 소리를 내며 책 한권이 홍기찬의 앞에 떨어졌다.
“백성들의 땀과 피가 스며있는 조세로 그리 자신의 배를 채웠으니, 참으로 만족스러웠는가?”
홍기찬의 얼굴에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백성을 우롱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이제 과인에게 헤아려 달라? 경은...과인이 그리도 우둔해 보이시오?”
왕이 나긋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러겠소. 그래도 이 나라를 위해 일해 온 우상인데 과인이 어찌 그런 우상의 공을 무시할 수 있겠소. 어찌 우상의 목을 과인의 말 한마디로 칠 수 있겠냔 말이오.”
홍기찬이 놀란 얼굴로 왕을 바라보았다. 이내 노론대신들 또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론대신들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간 배부르게 먹고, 따뜻한 곳에 몸을 뉘었으니, 이제는 꿈에서 깨어나시오.”
홍기찬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왕을 바라보았다. 왕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홍기찬을 파직한다.”
왕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를 명줄을 끊어 놓지도 않았다. 더 처참한 고통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고운 비단 옷을 입을 수도 없을 것이다. 따뜻한 이불 위에 몸을 뉠 수도 없을 것이며, 산해진미를 입 안에 가득 담고 맛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봉군, 봉군이 어떻겠소?”
곧이어 왕의 명이 하달되었다. 홍기찬은 울부짖었지만, 왕은 그를 무시하고 편전 밖으로 나가버렸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소론대신들 또한 왕이 자리를 뜨자, 일사분란하게 편전을 나섰다. 앞에 엎드려 울고 있는 홍기찬을 지켜보던 노론대신들도 멍한 얼굴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멀뚱히 앉아있었다. 몇 분이 지나고 김규진이 목을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자, 강윤식 또한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론 대신 중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상대감을 저대로 버리실 것입니까?”
김규진에게 소리치던 이가 두 주먹을 부들거렸다. 하지만 김규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 걸음 앞으로 디뎠다.
“우상. 경계를 허술히 하지 마시라고 했지요.”
규진은 흐느끼고 있는 홍기찬에게 말하고는 유유히 편전을 빠져나갔다.
“이재민, 김성훈...그 자들의 짓입니다.”
김규진의 뒤를 따르던 강윤식이 말했다.
“가만 둘 수 없습니다.”
강윤식이 주먹을 부들거렸다. 그렇지만 앞서 가고 있던 규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조용히 길을 거닐었다.
“영상! 그냥 두고 보실 것입니까? 저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자들의 비웃음이 영상께는 보이질 않으셨습니까?!”
윤식이 이를 꽉 깨물었다.
“조용히...조용히 하십시오.”
규진이 작게 분개하고 있는 그를 나무랐다. 그의 경고를 듣지 않은 채 윤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이 이 조정에서 나댈 수 없게 그들을 족쳐야 합니다! 모두 그 씨 하나까지도 모두 이 조선에서 털어버려야 합니다!”
“그만 하십시오!”
조용했던 규진이 소리쳤다. 웬만한 일로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었던 그였기에 그 뒤에 선 윤식이 동그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궐문을 지키고 있던 수문군에게 조차 규진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수문군이 그들이 서 있는 곳으로 오려다가 다시 제 자리를 지켰다.
“삼대를 멸하든, 그 일족을 사그리 멸하든...금상의 눈이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규진의 목소리가 다시금 잦아졌다.
“금상의 눈이 우리를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규진이 뒤 돌아서서 희정당을 바라보았다.
“지금 나설 수 없습니다. 금상의 칼이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하지만...그들이 한 짓을 그냥 이대로 보고만 계실 것입니까?”
윤식의 말에 규진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되돌려 줄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