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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쾌한 연애 :: 02 개태가 돌아왔어 (2)
가을은 손목에 두른 시계를 톡톡 두드리며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굴렸다. 오늘까지 내야 할 기획안 서류를 집에 두고 온 탓이었다. 가방에 있어야 할 서류가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집에서 자고 있는 솔미를 깨워 서류를 가져다 달라 부탁을 하곤 곧 도착 할 것 같다는 솔미의 연락에 미리 회사 앞에 나와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잠시 외근을 나간 팀장이 돌아오기 전 까지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 두어야 될 텐데.. 다른 날도 아니고 팀장이 맞선에 까인 다음 날에 하필 이런 실수를 하다니. 아침에 들었던 팀장의 쓴 소리를 다시금 생각해 낸 가을이 으으 하고 몸서리를 쳤다.
“가을아!”
저 멀리서 회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타난 솔미가 보였다. 가을을 부르며 손을 방방 흔들고 나타난 솔미를 보며 가을도 손을 흔들면서 솔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이거 맞지?”
“응 맞아. 아- 살았다. 솔미야 땡큐.”
“뭐 어차피 가는 길인데.”
“너 학원가는 시간 늦은 거 아니야?”
“가봤자 자습밖에 안 해. 괜찮아. 야 근데 나 오면서 이상한 사람 봤어.”
“응? 이상한 사람? 누구?”
“몰라. 너한테 전화 받고 나오면서 엘리베이터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떤 남자가 우리 전화 하는 거 듣더니 아까 말한 이름이 채가을 맞냐고 물어보더라.”
“나?”
“엉. 그래서 대답 안 해주고 그냥 따로 타서 내려왔지.”
“뭐야? 누구지? 나 아는 사람인가?”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던데..뭐 별거 아니겠지. 야 근데 너 들어가 봐야 되는 거 아니야?”
“아 맞다. 나 먼저 들어갈게. 너도 조심히 가.”
“그래 집에서 보자.”
솔미와 인사를 나누고 회사 안으로 무사히 들어온 가을이 곧 바로 혜인의 자리에 기획안을 올려두고 자리로 돌아왔다.
“어 왔어요?”
“응. 팀장님 아직 안 들어오셨지?”
“네.”
아 살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가을의 모습에 해성이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뭘 웃어, 인마.”
“팀장님은 그러고 보면 유독 선배한테만 더 그러는 것 같아요.”
“내가 제일 먼저 들켰거든.”
가을이 왼손 약지를 감싸고 있는 반지를 척 가리키며 말하자 해성이 알만하다는 얼굴로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너도 여자 친구 사귈 때 조심 해.”
진심으로 충고하는 가을의 목소리에 해성이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그 모습에 가을도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
징- 하고 울리는 핸드폰 진동 소리에 노트북을 두들기던 가을이 옆에 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어?”
성환의 전화였다. 얼마 만에 보는 건지도 모를 이름에 반가움을 표한 가을이 고개를 빼꼼 들어 여태 비어있는 혜인의 자리를 살피다 이내 몸을 일으켰다.
“여보세요?”
행여나 전화가 끊길까 밖으로 나오자마자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댄 가을이 말했다.
“오빠?”
- 어, 가을아. 뭐해? 바빠?
“아니야 괜찮아 잠깐 시간 있어. 근데 왜, 무슨 일 있어?”
- 꼭 무슨 일 있어야 연락하나. 요즘 통 연락 없기래.
성환의 목소리에 가을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생각해 보면 먼저 연락이 뜸해진 건 성환이었지만 부러 그것을 끄집어냈다간 얼마 만에 걸려온 전화가 또 끊어질 것 이라는 걸 알기에 얼른 다른 쪽으로 주제를 돌렸다.
“밥은? 먹었어?”
- 응 먹었지. 너는?
“나도 먹었지.”
그러고도 또 한참 대화가 끊겨 서로 침묵만 주고받았다. 차마 먼저 전화를 끊을 수도 없는 가을이 애꿎은 입술만 톡톡 깨물고 있을 때 성환도 어색한 침묵을 느꼈는지 먼저 말을 꺼냈다.
- 가을아 내일 시간 어때? 내일 만날까?
“내일?”
- 응. 아, 마감이라서 바쁜가?
“아니야 마감 끝났어. 당분간 시간 괜찮아.”
머릿속으로 스케줄을 확인하던 가을이 곧 대답을 내놓았고 그 뒤로 대화가 척척 진행 돼 약속 시간까지 잡고서야 겨우 전화가 끊겼다. 10분도 채 못 채우고 조용해진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던 가을이 짧게 한숨을 탁 터뜨리고는 이내 사무실 안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자리로 돌아온 가을이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집어 들었다. 내일 날짜에 크게 동그라미를 치고 그 안에 7시라는 숫자를 적어 넣은 가을이 제가 적은 글자를 쓱 쓸어보고는 또 아까와 같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
요즘 성환과는 늘 이런 식이었다. 연애 초창기, 아니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바쁘더라도 틈틈이 연락을 주고받고, 짬을 내서 만나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렇지 못했다. 인턴사원이었던 가을이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고 성환이 다른 직장으로 이직을 하면서부터 삐거덕 거리는 것 같은 관계가 몇 달째 지속되고 있었다. 조금씩 뜸해지는 연락, 만나도 서로 말없이 핸드폰만 부여잡고 있는 날이 늘어나면서 가을은 성환과의 연애가 완벽한 권태기로 접어들었다는 걸 느꼈다. 뭐, 연애 기간이 5년이나 되니 영 무리가 없는 말도 아닌데다 전에도 종종 권태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었지만 나름 잘 극복을 했었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가을이 생각한 것보다 길어지는 상황을 생각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종종 이렇게 답답한 한숨이 나오고는 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느끼며 가을이 버릇처럼 콧잔등을 실룩이다 이내 달력을 탁 내려놓고는 절전모드로 변환 노트북 화면을 다시 작동시켰다.
‘뭐 내일 만나보면 알겠지. 일이나 하자.’
*
“다녀왔습니다.”
불 꺼진 텅 빈 집안에 발을 디딘 가을의 어깨로 현관 위에 달린 센서등 불빛이 내려앉았다. 솔미도 나가고 아무도 없는 집에 인사를 한 가을이 신발을 벗자마자 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대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아 피곤해.”
아 이렇게 누워 있을 때가 제일 좋다니까? 노곤한 몸을 풀려는 듯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누워있는 가을이 씩 미소 지었다.
하루 중 가장 편안한 시간을 만끽하고 있던 가을의 휴식을 방해한 건 가방 속에 넣어둔 전화벨소리였다.
“으- 진짜.”
받지 않을 요량으로 버티고 있던 가을이 끊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 벨소리에 결국 몸을 일으켰다. 소파 바로 밑에 떨어뜨린 가방을 주워들어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낸 가을이 액정에 보이는 글씨에 작게 한숨을 쉬며 화면을 넘겼다.
“어 엄마.”
- 어디니? 퇴근 했어?
“응, 방금 집에 왔지. 왜, 무슨 일 있어?”
-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너 내일 퇴근하고 별일 없지?
“내일? 왜?”
- 저번에 태현이 들어왔다고 말했잖아. 태현이 엄마한테서 전화 왔는데 같이 한번 식사하자더라.
“식사?”
- 응. 예전에 종종 모여서 식사하고 그랬잖아. 태현이도 들어오니까 옛날 생각도 난다고 같이 식사한번 하자고 하네.
“아...”
- 왜? 너 시간 안 되니?
“나 내일 남자친구랑 약속 있는데.”
- 어머 그래? 그럼 어떡하니. 내일 만나기로 했는데.
“엄마는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근데 엄마 개태 아니 서태현도 나온데?”
- 당연히 온다고 했지. 안 그래도 들어오자마자 네 연락처 물어봤다고 하더라.
“치.”
들려오는 엄마 송희의 목소리에 가을이 코를 실룩거렸다. 치. 그래도 기억은 하고 있었나 보네?
“그래서 알려 줬어?”
- 아니 태현이 엄마가 괜히 우리끼리 번호 주고받는 건 좀 아닌 것 같다고 그냥 식사 자리 한번 만들자고 해서 그러자고 했지. 그나저나 너 내일 시간 안 되면 어떡하니?
하필 성환과의 약속이 내일일게 뭐람.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딱히 딱 잘라서 대답을 할 수 없어서 입술을 톡톡 깨물었다. 송희도 고민을 하고 있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 정 그러면 안 와도 괜찮아. 먼저 약속했는데 어쩔 수 없지.
조금 뒤에 들리는 송희의 목소리에 가을이 흠, 하는 한숨을 흘렸다.
“아니야 엄마 오빠 잠깐 만나고 나도 그 쪽으로 갈게. 그래도 불러주셨는데 가야지. 몇 시에 만나기로 했어?”
- 아빠들 퇴근 끝나고 7시에. 올 수 있겠어?
7시? 하고 되묻는 목소리에 그렇다는 대답이 들려오자 가을이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떴다. 하필 내일! 하필 7시!
“기다리지는 말고 먼저 식사들 하고 계셔. 시간 내볼게.”
- 그래 알았어. 이만 끊을게 쉬어.
“아 엄마!”
- 응?
“나 서태현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닌 거 알지? 오랜만에 아주머니랑 아저씨 보려고 가는 거야. 알지? 내일 가서 이상한 말 하지 마.
가을의 말이 끝나자마자 숨넘어갈 듯 깔깔 웃음을 터뜨리는 송희의 목소리에 가을이 인상을 톡 찌푸렸다. 진짜라니깐? 진짜 서태현 때문에 가는 거 아니야. 작게 발까지 동동 굴려가며 부정하는 딸의 모습이 상상이 되는지 한동안 웃음을 그치지 못하던 송희가 곧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답했다.
- 아휴 배 찢어질 뻔 했네. 알았어, 알았어. 그렇게 말해줄게.
“무슨 말을 하려고?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나 갈 때 까지는.”
- 알았다니깐 그러네. 그만 끊어. 네 아빠가 찾는다.
“어, 어- 알았어. 쉬세요.”
뚝 끊긴 전화를 내려놓은 가을의 이마가 다시 아까처럼 구겨졌다.
“진짜 그런 거 아닌데.”
내가 개태 때문에 재수까지 했는데 궁금할 리가 있나. 10년 동안 연락 한 번도 안 한 자식을? 진짜 하나도 안 궁금하다니까?
*
“팀장님 안녕하세요!”
혜인은 닫히려는 엘리베이터에 겨우 몸을 실어 넣은 가을이 저에게 씩씩하게 인사를 하는 걸 보며 얼떨떨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저렇게 기분이 좋아 보여? 항상 씩씩하게 다니던 가을이었지만 오늘따라 더 활기차 보이는 느낌에 가을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혜인이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자기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
“아, 그래 보여요?”
“응. 그러고 보니까 옷도 신경 쓴 것 같고... 데이트 있구나?”
가을은 자신의 상태를 콕 집어내는 혜인의 목소리에 멋쩍게 웃음을 흘렸다. 하여튼 귀신이야, 귀신. 어떻게 알았지? 딱히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 가을의 모습에 혜인이 흥 하는 표정으로 경고했다.
“오늘 야근하기 싫으면 주의 해.”
“넵.”
고개까지 끄덕이며 씩씩하게 대답하는 가을의 모습에 혜인이 고개를 절레 내저으며 웃었다.
*
“참, 태현이 너는 이따가 어떡할래?”
한참 바삐 숟가락질을 하고 있던 태현이 엄마 나연의 물음에 네? 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따가 7시에 가을이네랑 식사하기로 했잖아. 네 아버지는 퇴근하고 바로 그쪽으로 가신다고 하더라.”
“아- 저도 이사 갈 집에 들일 가구 좀 보고 그 쪽으로 바로 갈게요.”
“그럴래? 집 조금 늦게 구할 줄 알았더니 빨리 구했네.”
“괜찮은 집 있어서 빨리 계약 했어요. 회사도 빨리 나가봐야 되니까-”
“하긴. 그래서 집은 괜찮아? 회사랑 가깝니?”
“네. 좀 넓긴 한데 괜찮아요.”
“가구 들어가기 전에 한번 청소해야 되지 않니?”
“안 그래도 계약 한 날 바로 업체 불러서 했어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래 네가 잘 하겠지. 약속 시간 8시니까 늦지 않게 와.”
“네. 아, 근데 가을이도 온대요?”
“가을이 엄마가 전해 준다고 했으니까 별 일 없으면 오지 않을까?”
나연의 대답에 태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쭉 끌어당겨 웃었다. 드디어 만나겠네, 채가을.
*
나연과 점심식사 후 집에서 나온 태현은 이사 할 집에 들일 가구를 알아보고 회사로 가는 길이었다. 계약을 하자마자 바로 입주가 가능하다는 말에 그 자리에서 바로 청소업체를 불러 집 청소도 했으니 지금쯤이면 새 집처럼 말끔해져 있을 터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 때문에 더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그 집을 계약했지만 정말 가을이 그 아파트에서 산다면 정말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신기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뭐, 꼭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오늘 볼 테니 상관없겠지만.
“......”
회사가 저 멀찍이 보이고 그 옆에 가까이 붙어있던 카페에 눈길을 돌린 태현이 회사로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저번에 보았던 채가을 닮았던 여자가 있나 싶어서 들어온 걸음이었지만 곧 머리가 긴 여성들 밖에 없는 걸 확인한 태현이 곧 무덤덤한 표정으로 카운터로 향했다.
“아메리카노 주세요.”
*
가을은 오늘따라 기분이 아주 좋았다. 이유를 묻는다면, 조금 곱슬기가 있던 머리가 드라이가 잘 먹어서 라고 대답해 줄 수도 있었고, 또 새로 사고도 한참동안 입을 일 없던 옷을 오랜만에 꺼내 입을 수 있어서 라고도 답해 줄 수 있었다.
워낙에 얼굴에 잘 티가 나는 편이라 보는 사람마다 오늘 가을의 표정을 보고 한 번씩 웃으며 물었고, 첫 시작은 아침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팀장의 물음부터였다. 가을의 상태를 콕 집어내며 경고 아닌 경고를 날린 팀장 혜인의 말에도 가을은 그저 기분 좋게 헤헤 하고 웃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렇게 비가 내리는지. 비가 내리다 못해 천둥 번개에 벼락까지 치는 것 같은 가을의 표정에 그 옆에 지나다니는 직원들이 저절로 가을을 살피며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그 옆을 종종거렸다. 그런 주변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동안 간간히 인상을 찌푸리던 가을이 이내 시선을 내려 손목에서 째깍거리는 시계의 초침을 확인했다.
8시 15분. 작은 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심히 돌아가는 시계를 확인하던 가을이 곧 이를 앙 다물며 조용한 핸드폰을 다시 꾹꾹 내리눌렀다.
“......”
뚜르르 하는 긴 신호음 끝에도 들려야 할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가을의 반듯한 이마에 결국 큰 주름이 졌다. 후, 하고 복잡한 감정이 섞인 숨을 두어번 내쉬던 가을이 곧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다리고 있어봤자 연락 없는 성환을 오늘 보기는 힘들 것 같았다. 1시간 15분 동안이나 미련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조금 아깝긴 했지만 아까부터 간간히 엄마에게서 오던 연락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기에 자리에서 일어난 가을이 곧 가게를 빠져 나갔다.
*
“......”
태현이 제 맞은편에 보이는 텅 빈 의자를 보다 저도 모르게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가을이 앉아있어야 할 자리는 1시간이 넘도록 텅 비어있었고, 이제 식사자리도 얼추 끝나가는 참이었다. 그런 태현의 모습을 본 송희가 비어있는 자리를 한번 힐끔 쳐다보고 곧 다시 태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서 어째. 가을이가 아무래도 오늘은 못 오려나 싶네.”
“아니에요. 다음에 만나면 되죠.”
“이따가 가을이 번호 줄 테니까 나중에 따로 연락 해봐. 가을이가 하필 오늘 남자친구랑 약속을 잡아서.”
남자친구? 태현이 송희의 말에 저도 모르게 반쯤 입을 벌렸다. 옆에 앉아있던 나연도 송희의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가을이 남자친구 있어요?”
“응. 좀 됐죠. 가을이 기지배가 워낙 성격이 괄괄하다 보니까 오래 못 갈 줄 알았더니 그래도 꽤 오래가더라고요.”
“그랬구나. 그럼 나이도 있으니까 곧 결혼 시키겠네요.”
금세 결혼 이야기로 퐁 하고 빠진 어머니들의 대화를 듣던 태현의 눈썹이 못마땅함을 표시하며 왕 구겨졌다. 채가을이 남자친구? 못 믿겠다는 듯이 눈썹을 구기긴 했지만 영 상상이 안 가는 모습은 아니었다. 얼굴에 솜털이 채 가시지 않았던 중학교 시절에도 가을은 태현 보다 먼저 첫사랑이랍시고 소꿉 장난 같은 연애를 시작했고, 고등학교 때도 두어번 그랬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학교 다닐 적만 해도 나름 인기가 있었던 가을의 모습을 금방 생각해 낸 태현이 여전히 구겨져 있는 표정을 애써 풀어 내렸다. 하긴 나이가 몇인데 여태 연애를 못 해 봤겠어. 게다가 같은 스물아홉이라고는 하지만 남자와 여자의 나이가 단지 같은 숫자를 의미 하는 게 아니라는 건 들어본 적이 있는 터라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10년 만에 만나는 자리인데 남자친구랑 약속 있다고 여길 안 오냐? 하여튼 채가을. 태현이 왠지 속이 바싹바싹 타는 것 같은 느낌에 말없이 물을 벌컥 들이켜고 있을 때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어머 가을아!”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의 모습에 놀란 송희의 외침이 들렸고 태현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문 쪽을 향했다. 그리고 뛰어왔는지 약간 상기된 얼굴로 헉헉 거리는 숨을 고르던 가을이 곧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고, 룸 형식으로 된 식당을 빤히 둘러보다 곧 제일 끝 쪽에 앉은 태현과 눈이 마주쳤다.
*
“......”
“......”
가을은 자신에게 갑작스럽게 처해진 뻘쭘한 상황에 답지 않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늦었다고 생각은 하고 들어간 자리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자신이 막 식당에 들어설 때는 마침 식사가 거의 다 끝난 상황이었다. 들어 간지 5분도 안돼서 일어나는 어른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선 가을이 태현과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헤어지는 구나, 라고 생각을 하고 있던 참에 먼저 나가서 계산을 끝낸 태현이 가을의 팔을 붙들었다. 그 모습에 송희와 나연이 합심한 듯 둘이 따로 이야기를 나누라며 가을과 태현의 등을 떠밀었고, 가을은 밀리는 대로 또 태현이 끄는 대로 끌려 와 지금은 태현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아까 저를 보자마자 조금 멍청한 표정을 짓던 태현은 안녕? 하는 인사도 아니고 채가을? 하고 제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갸웃거렸었다. 그 모습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태현을 마주보던 가을 자신도 안녕 하는 어색한 인사를 나눈 게 10년 만에 나눈 대화의 끝이었다. 태현이 돌아온다면 지난날처럼 정강이를 한 대 콱 걷어 차줘야지 하고 단단한 결심을 수없이도 했던 가을이었지만 역시 10년 이라는 시간은 간과할 것이 못되나보다.
그러고 보면 태현은 10년 전에 비하면 많이 달라진 듯 했다. 학교 교칙에 따라 염색을 할 수 없어서 그냥 짧은 검은 머리였던 그때와는 다르게 보기 좋을 만큼 단정한 헤어스타일을 유지 하고 있었고 머리 색깔도 너무 튀지는 않았지만 알아 볼 만큼 갈색 빛이 돌았다. 남자라고는 하지만 소년에 불과했던 그때와는 달리 선이 조금 더 보태진 지금은 누가 봐도 호감을 살 만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에 맞게 몸도 탄탄 해 보였고, 10년 만에 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안 그래도 큰 편에 속했던 키도 더 큰 것 같았다.
“야 채가을.”
가을은 갑자기 들리는 제 이름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왜, 왜.”
“몇 번을 부르는데 이제 대답 하냐.”
“그랬어?”
가을의 맹한 대답에 태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태현의 웃음을 본 가을이 민망함을 감추려 괜히 콧잔등을 실룩이다 다시 한 번 왜? 하고 물었다.
“집 어디냐고, 데려다 줄게.”
“아- 혼자 갈 수 있어. 괜찮아.”
누가 채가을 아니랄까봐. 누가 혼자 갈 수 있는 거 몰라서 데려다 주겠다고 하나? 가을의 대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삐딱한 얼굴로 가을을 바라보던 태현이 이내 단호한 얼굴로 가을을 채근했다.
“얼른 말해.”
태현의 재촉 어린 목소리에 가을이 결국 뚱한 얼굴로 주소를 읊었다. 뚱한 목소리를 듣던 태현이 진짜? 하고 되묻자 가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진짜지 가짜 주소겠냐.”
“그래?”
쟤 왜 저래. 전에 종종 보고는 했던 장난기 가득한 미소에 자동적으로 경계태세를 취한 가을이 태현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왜?”
“너 그렇게 웃을 때 되게 재수 없는 거 알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익숙한 태현의 표정에 아까보다 한결 풀린 표정을 짓던 가을이 태현의 웃는 얼굴을 콕 가리키며 말했다.
“허.”
어이가 없는지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리는 태현을 보던 가을이 이내 입을 삐죽이며 그동안 케케묵게 쌓아두었던 것들을 풀어 놓을 심산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고생?”
“그래! 내가 너 때문에 재수도 했어!”
태현이 황당함에 얼굴을 구겼다. 그게 왜 나 때문이야? 하는 물음을 꺼내 놓으려던 찰나 어색해 하며 손가락을 꼼지락 거렸던 채가을은 어디가고 금세 본래의 채가을로 돌아와 씩씩거리며 자신을 향해 눈을 흘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 태현의 입꼬리가 실룩 거렸다. 아 드디어 진짜 채가을이네.
한동안 분에 못 이겨 다다다 말을 늘여놓던 가을의 반가운 모습에 태현이 끙 하고 웃음을 삼키며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야 너 내가 하는 말을 뭐로 들었냐? 네가 제일 중요한 고3때 하필 유학을 가서 내 성적이 떨어지고 그래서 내가 재수를 한 거 잖아.”
실제로 태현이 유학을 간 영향 탓인지 한동안 가을의 성적이 한순간에 뚝 떨어진 시기가 있었다. 뭐, 떨어진 성적에 충격을 받은 가을이 금세 눈에 불을 켜고 다시 끌어올리긴 했지만 그 덕에 가을은 무엇이 조금만 자신의 심사에 뒤틀려도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린 태현을 탓하는 버릇이 생겼었다. 그렇게 하면 태현이 금방 돌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 속에서 생겨난 버릇인지도 몰랐었지만 태현과는 10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연락조차 닿지 못했고 그 뒤로 ‘개태 탓하기’ 라는 이름이 붙은 버릇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을의 뒤를 졸졸 따라 다녔었다.
보나마나 가고 싶었던 대학에 점수가 미달 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재수를 했을 가을의 모습이 눈에 빤히 그려져 태현이 자꾸만 웃음을 흘렸다.
“아 심각하게 얘기하는데 왜 자꾸 웃어!”
그 모습에 더욱 성을 내며 발을 동동 굴리자 태현이 흘리던 웃음을 애써 막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왔잖아. 늦긴 했지만.”
“......”
다정한 목소리에 무슨 말을 더 하려던 가을이 입을 꾹 다물고 태현을 올려다봤다. 종종 떠올리기만 했던 음성이 제 귓가로 직접 와 닿자 그제야 태현이 자신의 옆에 있다는 게 온전하게 느껴졌다.
“이제 안 갈 거야? 진짜 아예 들어온 거야?”
“응.”
10년 전 놀이터에서 나누었던 대화와는 달리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대답을 내놓는 태현의 음성에 가을이 저도 모르게 베시시 웃음 지었다.
‘개태가 돌아왔어.’
*******
많이 늦었죠..ㅠㅠ 제가 비축분을 쌓아두고 연재 하는 게 아니고 또 컴퓨터 앞에 앉을 시간이 많이 나지 않아서..그래도 반겨 주셨으면 해요!! 허헣 그나저나 드디어 가을이랑 태현이가 만났네요!
아 그리고 제목 쾌쾌한 연애 에서 '쾌쾌한' 의 사전적 뜻은
1. 성격이나 행동이 굳세고 씩씩하여 아주 시원스럽다. 2. 기분이 무척 즐겁다 이런 뜻이 있는데 풀이 하자면 즐거운 연애! 이런 뜻이 있답니다!
첫댓글 아~~
안그래도 제목이 특이해서 갸웃~~^^
작가님 재미있게 읽었어요
다음편에서 만나요
오 내용도 분량도 쾌쾌하네요! 엄지 척!!
너무너무재밌게읽고있어요
재밋어요
글잘쓰시네요~!!
재밌게보고갑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