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눈 뜬 봉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은 떴지만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눈을 떴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말하는 줄 알다가 중학교 때에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라는 속담을 말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눈을 뜨고 보아도 글자를 읽을 줄도 모르는 사람이어서 편지를 거꾸로 들고 읽으려는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또 고등학교 다닐 때는 ‘눈치가 없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리고 30대에서는 ‘할일을 찾지도 못하고, 정신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알아들었는데 40대에 와서는 ‘대세를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줄 알게 되었습니다. 또 50대가 되니까 ‘세상실정을 너무 모르는 사람’으로 그 말이 해석되었습니다. 그리고 60대가 되니까 ‘세상의 헛된 것을 보고 미혹해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요즘 나는 바로 눈뜬 봉사입니다. 눈에 깍지가 많이 끼입니다. 그래서 잘 볼 수 있는 것도 보지도 못합니다. 또 헛된 것을 보고도 진실인지 가식인지 알아내지를 못합니다.
요즘 ‘노노스족’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습니다. 이 말은 ‘노 로고, 노 브랜드’(No Logo, No Brand)’의 줄임말로, 겉으로 드러난 브랜드에 집착하기 보다는 내실을 중시하는 성향을 나타내는 집단을 나타냅니다. '노노스족'이란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곳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트렌드 정보기획사인 ‘넬리로디’(Nelly Rodi)라 합니다. 이 사람들은 브랜드를 보고 물건을 사지 않고 회사의 로고를 보고도 물건을 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브랜드에 매달리지 않고 보다 실질적인 상품의 질을 가지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품의 질적 수준이나 평판을 보고 상품을 선호하는 집단으로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실속파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유명 로고, 유명 브랜드’는 별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유명 로고나 브랜드를 선호하는 명품족이 판을 치고 있어 가짜 명품이라도 유명 로고와 브랜드에 집착하는 우리나라의 소비자 의식을 바꿔줄 것입니다. 그래서 가짜가 판을 치는 사회를 올바른 문화와 가치기준에 따른 사회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나는 ‘노노스족’들은 앞으로 우리사회의 중요한 소비자로 자리를 잡을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마찬가지로 대통령을 선출하려는 이때에 정치적인 술수에 의해서 대통령을 선출하지 않고, 국민을 위할 수 있는 진실한 대통령을 뽑는 것도 가장 올바른 선거문화일 것입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사람과 정책을 보고 대통령을 뽑아야 합니다. 기업도 사회적 책임이 있는 기업이 사회에 이익이 되는 길을 정도로 밟아야 하며, 노조나 조직이 기업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 깨어서 일해야 합니다. 가정도 아름다움이 대화와 사랑의 부재로 점점 어두워져가고 있고, 감정의 폭이 커지고 있고, 감정의 폭을 키우는 모든 요인들이 무섭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진실로 눈을 떠서 헛된 거품에 매달리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경제가 얼마나 거품에 시달리며 살고 있으며, 얼마나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삶에서 헤매고 있는지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할 노릇입니다. 뿐만 아니라 학문도, 학자들도 그렇습니다. 어떤 수준에서 진일보 하려는 의식이 없이 연구논문이라고 발표된 몇몇 연구를 갖고 표절하고, 베껴 쓰고, 재탕하고, 위장하는 일로 계속 맴돌고 있습니다.
교회도 그 진실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단순한 이벤트 행사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고 노력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아무도 그 속에 파묻힌 진실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냉담한 신자들이 점점 늘어나도 속수무책으로 방관만하고, 청소년들이나 노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자꾸만 빈약해지고, 영적쇄신은 형식적이며 기복적인 기도나 행태는 점점 많아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가 보이지 않고 성당만 보이고 큰 행사만 보입니다. 그리고 가장 작은 사람들의 작은 행동은 묻혀버리고 맙니다. 교회를 살아야 하는 이 시대에 공동체는 점차 빛을 잃어버리고, 교회의 대형화에 의해서 사람들은 서로 멀어지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개혁 없이 교회는 표류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누군가 이 일을 해 주겠지?’하고 막연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도 손을 들어주지 않으면 이런 일은 점점 그 무게 중심을 잃어갈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깨어있으라.’고 강조하십니다. 잠에서 깨어 있어야 하겠지요.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세상의 작은 것도 보고 소리도 크게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코를 벌름거리며 세상의 냄새도 잘 맡아서 신선한 향기를 찾아내고, 구린내를 구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신맛 단맛, 짠맛 쓴맛, 떫은맛을 구별하고, 매운 것을 잘 느끼라고 하십니다. 비록 지금은 쓴맛이더라도 몸에 좋은 맛을 찾아내어 먹고, 마시고, 그 맛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갖 촉각과 영감을 다 발휘해서 작은 움직임도 포착하고 그 진실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 그분이 오실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가 ‘눈뜬 봉사’로 있으면 우리의 멸망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불을 보듯 확실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저희가 저희의 게으름을 버리고 부지런하게 당신의 말씀을 따라 지키는 자녀가 되도록 이끌어 주소서. 지혜의 성령을 보내주시어 저희가 세상의 진실을 볼 수 있도록 은총으로 도우소서. 그동안 당신을 잊고 살았던 시간들을 뉘우치오니 매순간 일깨워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