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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ho ante anupagamma
극단<邪見 ☞ 苦/集>, 中<正見 ~ 苦滅>, 中道<苦滅道>
(MN 36)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itā. siyā nu kho eso maggo bodhāyā’ti?
tassa mayhaṃ, aggivessana, satānusāri viññāṇaṃ ahosi — ‘eseva maggo bodhāyā’ti.
"그런 내게, 아기베사나여, 기억을 따르는 의식이 생겨났습니다 —
'바로 <*8정도/中道의 마지막 덕목인 正定의 1번째 禪>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라고."<AI>
ubho ante anupagamma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두 극단에 가까이 가지 않고 여래에 의해 완전히 깨달아진 中道의 길.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
두 극단에 가까이 가지 않고 여래는 中에 의해 法을 설파한다.
法은 緣起(法) 즉 유전문<苦集>이다. 이어서 환멸문<苦滅>이 나타난다.
반면에 여래께서 깨달은 것은 <苦滅道>인 中道(8正道)이다.
ubho ante
ubho: "양쪽" 또는 "두 가지"를 의미하는 대명사. 주격 또는 대격 복수형.
ante: "끝" 또는 "극단"을 의미하는 명사. 여기서는 복수 대격으로 사용되어 "두 극단"을 뜻함.
anupagamma
anupagamma: 동사 anupagacchati의 과거분사 형태로, "접근하지 않다" 또는 "가까이 가지 않다"의 뜻.
여기서는 부정형으로 사용되어 "두 극단에 가까이 가지 않고"를 의미.
majjhimā paṭipadā
majjhimā: "중간의", "중도적인"이라는 뜻의 형용사. 여성 단수 주격으로, 뒤의 paṭipadā를 수식.
paṭipadā: "길", "방법", 또는 "수행 방식"을 의미하는 여성 명사.
tathāgatena abhisambuddhā
tathāgatena: "여래에 의해"를 의미하는 남성 단수 조격(도구격).
abhisambuddhā: 동사 abhisambujjhati의 과거분사 형태로, "완전히 깨달은"이라는 뜻.
majjhena: majjha의 도구격 형태로, "가운데를 통해서" 또는 "중간을 통해서"라는 의미.
tathāgato dhammaṃ deseti
tathāgato: "여래(Tathāgata)"라는 명사. 주격 단수로 사용되어 주어 역할을 함.
dhammaṃ deseti: "법(Dhamma)을 설파하다(deseti)"라는 동사구.
(KN 5.57) (AN 6.61)
so ubhantamabhiññāya, majjhe mantā na lippati.
phassanirodho majjhe … paccuppannaṃ majjhe … adukkhamasukhā vedanā majjhe …
viññāṇaṃ majjhe … sakkāyanirodho majjhe …
nāmaṃ kho, āvuso, eko anto, rūpaṃ dutiyo anto, viññāṇaṃ majjhe, taṇhā sibbinī;
taṇhā hi naṃ sibbati tassa tasseva bhavassa abhinibbattiyā.
(MN 139) (SN 42.12) (SN 56.11)
“dveme, bhikkhave, antā pabbajitena na sevitabbā. katame dve?
yo cāyaṃ kāmesu kāmasukhallikānuyogo hīno gammo pothujjaniko anariyo anatthasaṃhito,
yo cāyaṃ attakilamathānuyogo dukkho anariyo anatthasaṃhito.
3.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가까이하지 않아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무엇이 둘인가?
그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과,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ete kho, bhikkhave, ubho ante anupagamma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중도(中道)를 완전하게 깨달았나니
[이 중도는] 안목을 만들고254)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254) 본서 제4권 「라시야 경」(S42:12) §4의 주해를 참조할 것.
“katamā ca sā, bhikkhave,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ayamev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eyyathidaṃ —
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i.
ayaṃ kho sā, bhikkhave,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고[八支聖道]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이다.”
“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ṃ ariyasaccaṃ —
jātipi dukkhā, jarāpi dukkhā, byādhipi dukkho, maraṇampi dukkhaṃ,
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yampicchaṃ na labhati tampi dukkhaṃ — saṃ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5.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도 괴로움이다.]255)
싫어하는 [대상]들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좋아하는[대상]들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 자체가 괴로움이다.”
255) [ ]안의 부분은 soka-parideva-dukkha-domanass' upāyāsā pi dukkhā를 옮긴 것인데 Se, Be에는 나타나지 않고 Ee에만 나타난다. 물론 고성제를 정의하는 다른 경들(『디가 니까야』「대념처경」 (D22) 등)에서는 나타나지만 대부분의 이 「초전법륜 경」의 판본들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서 역자는 [ ] 안에 넣어서 이 부분을 옮겼다.
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samudayaṃ ariyasaccaṃ —
yāyaṃ taṇhā ponob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tatrābhinandinī,
seyyathidaṃ — 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6.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256) 즐김과 탐욕이 함께하며257)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258) 이다.
즉259)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欲愛],260)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261)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262)가 그것이다.”
256)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ponobbhavikā)'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다시 태어남을 만든다.'는 뜻이 ‘뿌놉바와(punobbhava)'이고, '습관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만드는 것'이 '뽀놉바위까(ponobbhavikā,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것)'이다.” (DA.iii.799)
더 자세한 설명은 본서 제3권 「짐 경」 (S22:22) §5의 주해를 참조할 것.
257) “'즐김과 탐욕이 함께하며(nandi-rāga-sahagatā)'라는 것은 [갈애가] 즐김과 탐욕과 뜻으로는 하나라는 뜻이다.” (DA.iii.799)
258)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tatratatra-abhinandini)'이란 어느 곳에서 몸을 받더라도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DA.iii.800)
259) “'즉(seyyathidaṃ)'이란 부사로서 '만약 어떤 것이 그것 인가라고 한다면 이란 뜻이다.” (DA.iii.800)
260)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欲愛, kāma-taṇhā]'란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욕의 동의어이다.” (DA.iii.800)
261)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taṇhā]'란 존재를 열망함에 의해서 생긴 상견(常見, sassata-diṭṭhi)이 함께하는 색계와 무색계의 존재에 대한 탐욕과 禪을 갈망하는 것의 동의어이다.” (DA.iii.800)
262)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라는 것은 단견(斷見, uccheda-diṭṭhi)이 함께하는 탐욕의 동의어이다.” (DA.iii.800)
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nirodhaṃ ariyasaccaṃ —
yo tassāyeva taṇhāya asesavirāganirodho cāgo paṭinissaggo mutti anālayo.
7.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이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263)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264)
263)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asesa-virāga-nirodha)'이라는 등은 모두 열반의 동의어들이다. 열반을 얻으면 갈애는 남김없이 빛바래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이라고 설하셨다. 열반을 얻으면 갈애가 떨어지고 놓아지고 풀어지지 달라붙지 않는다. 그러므로 열반은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해탈, 집착 없음이라 불린다.”(DA.iii.800 -801)
264) “열반은 하나이지만 그 이름은 모든 형성된 것들의 이름과 반대되는 측면에서 여러 가지이다. 즉 남김없이 빛바램, 남김없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 탐욕의 멸진, 성냄의 멸진, 어리석음의 멸진, 갈애의 멸진, 취착 없음, 생기지 않음, 표상 없음, 원함 없음, 업의 축적이 없음, 재생연결이 없음, 다시 태어나지 않음, 태어날 곳이 없음, 태어나지 않음, 늙지 않음, 병들지 않음, 죽지 않음, 슬픔 없음, 비탄 없음, 절망 없음, 오염되지 않음이다.”(DA.iii.801)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26개의 열반의 동의어는 원어로는 각각 다음과 같다.(모두 주격으로 표기했음)
asesavirāgo, asesanirodho, cāgo, paṭinissaggo, mutti, anālayo, rāgakkhayo, dosakkhayo, mohakkhayo, taṇhakkhayo, anuppādo, appavattaṃ, animittaṃ, appaṇihitaṃ, anāyūhanaṃ, appaṭisandhi, anupapatti, agati, ajātaṃ, ajaraṃ, abyādhi, amataṃ, asokaṃ, aparidevaṃ, anupāyāsaṃ, asaṃkiliṭṭhaṃ.
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ṃ —
ayamev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eyyathidaṃ — sammādiṭṭhi ... pe ... sammāsamādhi.
8.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265) 진리[苦滅道聖諦]이다.
[422]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265) “'성스러운(ariyo)'이라는 것은 도에 의해서 파괴되어야 할 오염원들을 멀리 여의어 성스러운 상태가 되었으므로 성스럽다고 한다.” (Ibid)
“‘idaṃ dukkhaṃ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9.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266)
266) 이 정형구는 본서 제2권 「위빳시 경」 등(S12:4~10) §16과 §29(12연기에 대해)와, 「도시 경」(S12:65) §6과 §9(12연기에 대해)와, 제4권 「지혜 경」(S36:25) §4 등(느낌에 대해)과, 본서 제5권 「전에 들어보지 못함 경」(S47:31) §3 등(사념처에 대해)과, 본서 「지혜 경」(S51:9) §3 등(4정근에 대해)에도 나타난다.
여기서 눈[眼], 지혜[智], 통찰지[慧], 명지[明], 광명[光]은 각각 cakkhu, ñāṇa, paññā, vijjā, āloka를 옮긴 것이다. 눈 등은 모두 지혜의 동의어(ñāṇa-vevacana)이고 명지는 꿰뚫음(paṭivedha)의 뜻이라고 한다.(SA.ii.21)
‘taṃ kho panidaṃ dukkhaṃ ariyasaccaṃ pariññeyyan’ti me, bhikkhave,
pubbe ... pe ... udapādi.
'이 괴로움의 진리는 철저하게 알아져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taṃ kho panidaṃ dukkhaṃ ariyasaccaṃ pariññā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이 괴로움의 진리는 철저하게 알아졌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idaṃ dukkhasamudayaṃ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10.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taṃ kho panidaṃ dukkhasamudayaṃ ariyasaccaṃ pahātabban’ti me, bhikkhave, pubbe ... pe ...
udapādi.
'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는 버려져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taṃ kho panidaṃ dukkhasamudayaṃ ariyasaccaṃ pahīn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는 버려졌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idaṃ dukkhanirodhaṃ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11.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taṃ kho panidaṃ dukkhanirodhaṃ ariyasaccaṃ sacchikātabban’ti me, bhikkhave, pubbe ... pe ...
udapādi.
'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는 실현되어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taṃ kho panidaṃ dukkhanirodhaṃ ariyasaccaṃ sacchika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는 실현되었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id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12.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taṃ kho panid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ṃ bhāvetabban’ti me, bhikkhave, pubbe
... pe ... udapādi.
'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진리는 닦아져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taṃ kho panid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ṃ bhāvi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진리는 닦아졌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yāvakīvañca me, bhikkhave, imesu catūsu ariyasaccesu
evaṃ 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 yathābhūtaṃ ñāṇadassanaṃ na suvisuddhaṃ ahosi,
neva tāvāhaṃ,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abhisambuddho’ti paccaññāsiṃ .
13. “비구들이여, 내가 이와 같이 세 가지 양상과 열두 가지 형태267)를 갖추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하게 되지 못하였다면
나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하였다고 [423] 신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 · 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에서 스스로 천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267) '세 가지 양상'과 '열두 가지 형태'는 각각 ti-parivaṭṭa와 dvādas-ākāra를 옮긴 것이다. "세 가지 양상(ti-parivaṭṭa)'이란 ① 진리에 대한 지혜(sacca-ñāṇa) ② 역할에 대한 지혜(kicca-ñāṇa) ③ 성취된 지혜(kata-ñāṇa)라 불리는 세 가지 양상을 말한다. 여기서 첫 번째는 사성제 각각에 대한 여실한 지혜(yathābhūta ñāṇa)이고, 두 번째는 철저히 알아야 하고(pariññeyya) 버려야 하고(pahātabba) 실현해야 하고(sacchikatabba) 닦아야 하는(bhāvetabba) 사성제 각각에 대해서 행해져야 하는 역할을 아는 지혜(kattabba-kicca-jānana-ñāṇa)이며, 세 번째는 이러한 역할이 성취된 상태를 아는 지혜(kata-bhāva-jānana-ñāṇa)이다.
'열두 가지 형태(dvādas-ākāra)'란 사성제 각각에 대해서 위의 세 가지 지혜를 곱하면 12가지 형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SA.iii.297)
“yato ca kho me, bhikkhave, imesu catūsu ariyasaccesu evaṃ 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
yathābhūtaṃ ñāṇadassanaṃ suvisuddhaṃ ahosi,
athāhaṃ,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abhisambuddho’ti paccaññāsiṃ.
14. “비구들이여, 그러나 내가 이와 같이 세 가지 양상과 열두 가지 형태를 갖추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했다고 신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 · 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에서 스스로 천명하였다.
ñāṇañca pana me dassanaṃ udapādi —
‘akuppā me vimutti ,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
그리고 나에게는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며,
이제 더 이상의 다시 태어남[再生]은 없다.'라는 지와 견이 일어났다.”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pañcavaggiyā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unti.
15.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비구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imasmiñca pana veyyākaraṇasmiṃ bhaññamāne āyasmato koṇḍaññassa
virajaṃ vītamalaṃ dhammacakkhuṃ udapādi —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ṃ taṃ nirodhadhamman”ti.
이 상세한 설명[授記]268)이 설해졌을 때 꼰단냐 존자에게는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건 모두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集法卽滅法].'라는
티 없고 때가 없는 법의 눈[法限]이 생겼다.
268) '상세한 설명[授記]'으로 옮긴 veyyākaraṇa(웨야까라나)에 대해서는 본서 제3권 「무아의 특징 경」 (S22:59) §7의 주해를 참조할 것.
“na kāmasukhamanuyuñjeyya hīnaṃ gammaṃ pothujjanikaṃ anariyaṃ anatthasaṃhitaṃ,
na ca attakilamathānuyogamanuyuñjeyya dukkhaṃ anariyaṃ anatthasaṃhitaṃ.
3. “① 저급하고 저속하고 범속하고 비열하고 이익 없는 감각적 쾌락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고통스럽고 비열하고 이익 없는, 자기를 학대하는 데 몰두해서도 안된다.
ete kho, bhikkhave , ubho ante anupagamma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② 이 양 극단을 떠나 여래는 중도를 철저하고 바르게 깨달았나니,
그것은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ayamev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eyyathidaṃ — 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i.
그것은 바로 이 성스러운 팔정도이니,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 [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SN 22.90)
dvayanissito khvāyaṃ, kaccāna, loko yebhuyyena atthitañceva natthitañca.
lokasamudayaṃ kho, kaccāna,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o yā loke natthitā, sā na hoti.
lokanirodhaṃ kho, kaccāna,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o yā loke atthitā, sā na hoti.
'깟짜야나여, [135] 이 세상은 대부분 두 가지를 의지하고 있나니
그것은 있다는 관념과 없다는 관념이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한 없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한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SN 12.15) (SN 12.47)
“‘sabbaṃ atthī’ti kho, kaccāna, ayameko anto. ‘sabbaṃ natthī’ti ayaṃ dutiyo anto.
ete te, kaccāna,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 —
6.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있다.'는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고
'모든 것은 없다.'는 이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107)
깟짜야나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중간[中]에 의해서108) 여래는 법을 설한다.
107) “'하나의 극단(eko anto)'이라는 것은 이것이 하나의 정점이 되는 극단(nikūṭanta)이요 저속함의 극단(lāmak-anta)인 첫 번째 것으로 상견(sassata)을 말한다. '두 번째 극단(dutiyo anto)'이라는 것은 두 번째 [견해로써] '모든 것은 없다.'라고 하면서 생겨난 견해(uppajjanaka-diṭṭhi)인데 이것도 정점이 되는 극단이고 저속함의 극단이다. 이것이 두 번째인데 단견(uccheda)을 말한다.”(SA.ii.34)
108) '중간[中]에 의해서'는 majjhena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와 복주서는 여기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래「나체수행자 깟사빠 경」(S12:17)에서는 이 majjhena를 “'중간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는 것은 상견과 단견이라 불리는 양 극단(ubha anta)을 의지하지 않고(anupagamma) 제거하고(pahāya) 집착하지 않고(anallīyitvā),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에 서서 설하신다는 뜻이다. 어떤 법을 설하셨는가라고 한다면, 바로 이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있다.'는 것 등이다.”(SA.ii.36)라고 설명하고 있다.
주석서에서는 이처럼 양극단을 여읜 중간[中, majjha]을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로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초기불전 자체를 두고 보자면 중도는 팔정도를 말한다. 예를 들면 4부 니까야(Nikāya)에는 본서 제6권 「초전법륜 경」(S56:11)을 위시하여 대략 6군데에서 중도(majjhimā paṭipadā)가 나타나는데 4념처와 37조도품을 중도라고 설하고 계신『앙굿따라 니까야』「나체수행자 경」 1/2(A3:151~152/i.295)를 제외한 초기불전에서 중도는 반드시 팔정도로 설명이 되고 있다.(본서 제4권 「라시야 경」(S42:12) §4 참조) 물론 37조도품도 팔정도가 핵심이요 4념처는 팔정도의 바른 마음챙김의 내용이다. 그리고 『무애해도』(Ps.ii.147)에도 팔정도가 중도로 표방되고 있다.
그러므로 주석서 문헌을 제외한 모든 초기불전에서 중도는 팔정도를 뜻한다고 이해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므로 역자는 중간과 중도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간은 본경에서처럼 유무의 양극단의 중간이며 고락(苦樂)과 단상(斷常)의 양극단의 중간(본서「나체수행자 깟사빠 경」 (S12:17) §7 이하 참조)으로 바른 견해(정견)의 내용이지만, 중도는 팔정도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대승불교에 익숙한 우리는 중도하면 팔불중도(八不中道, 팔불중도는 중국 길장(吉藏) 스님의 「중관론소」(中觀論疏)에 여러 번 나타나는 대승불교에는 잘 알려진 술어임.)나 공 · 가 · 중도(空·假·中道)로 정리되는『중론』(中論, 中論頌, Mula-madhyamakakarika)「관사제품」의 삼제게(三諦偈, 24:18)를 먼저 떠올리지만 초기불전에서의 중도는 이처럼 명명백백하게 팔정도이다. 특히 삼제게는 연기(緣起)적 현상을 공 · 가 · 중도로 통찰하는 것을 설파하고 있기 때문에『중론』의 중도는 연기에 대한 통찰지이며, 이것은 본경에서 보듯이 팔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의 내용이고, 이것은 유무의 중간(中, majjha]이다. 그러므로 용수 스님을 위시한 중관학파에서 주창하는 중도는 팔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을 말하는 것이지, 팔정도 전체로 정의되는 실천도로서의 중도는 아니라고 해야 한다.
역자가 중도를 자꾸 팔정도로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중도를 일 · 이 · 거 · 래 · 유 · 무 · 단 · 상(一異去來有無斷常)의 팔불(八不)이나 공 · 가 · 중(空假中) 등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실천체계로서의 중도를 오히려 관념적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아주 크기 때문이며, 실제 한국불교에 이런 모습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중도가 팔정도인 이상 중도는 부처님께서 팔정도의 정형구로써 정의하신 내용 그 자체를 실천하는 것, 말 그대로 도닦음(paṭipadā)을 말한다. 이것은 중도의 도(道)에 해당하는 빠알리어 빠띠빠다(paṭi-padā)가 실제로 길 위를(pati) 밟으면서 걸어가는 것(padā), 즉 도닦음을 의미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中이란 양 극단과 대비되는(반대되는) 觸滅 등 이고 (A6:61, Stn5-2: 觸이라는 극단은 연이생법이면서 연기법이다.) 中道란 고멸도(성제, 37보리분법)이고 緣起란 고집(성제)이다. 그러므로 緣起에 대한 통찰(正見)은 中道에 의해서 도달한 中이라고 할 수 있어도 고집(괴로움의 원인 - 觸 등)이 中 혹은 中道라고는 할 수 없다. 마치 <도둑질>은 나쁜 것이지만 <도둑질은 나쁜 것>이라고 [아는 것]은 좋은 것인 것과 같이. ✼ 三諦偈는 <연기를 중(도)로 통찰>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연기를 중도의 동의어>로 잘못 설명하고 있다. 명백한 오류이다. * majjhe sitā brāhmaṇa brahmapatti. 중간[中]을 의지하여 브라흐마가 되는 것 |
Case | s. | pl. |
nom | majjho | majjhā |
voc | majjha | majjhā |
acc | majjhaṃ | majjhe |
ins | majjhena | majjhehi |
dat | majjhāya, majjhassa | majjhānaṃ |
abl | majjhā, majjhasmā,majjhamhā, majjhato | majjhehi |
gen | majjhassa | majjhānaṃ |
loc | majjhe, majjhasmiṃ | majjhesu |
‘avijjāpaccayā saṅkhārā;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 ... pe ...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 물질이,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과 근심·탄식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avijjāya tveva asesavirāganirodhā saṅkhāranirodho; saṅkhāranirodhā viññāṇanirodho ... pe ...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ī’”ti.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알음알이가 소멸하기 때문에 정신 · 물질이 소멸하고,
정신 · 물질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SN 12.17) (SN 12.18) (SN 12.46)
“‘so karoti so paṭisaṃvedayatī’ti kho, kassapa,
ādito sato ‘sayaṃkataṃ dukkhan’ti iti vadaṃ sassataṃ etaṃ pareti.
9. “깟사빠여, '그가 짓고 그가 [그 과보를] 경험한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존재했던 [괴로움을 상정하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상견에 떨어지고 만다.123)
123) “'그가 짓고 그가 [그 과보를] 경험한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존재했던 [괴로움을 상정하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 ”로 옮긴 원어는 so karoti so paṭisaṃvediyatīti kho kassapa ādito sato sayaṃkataṃ dukkhanti iti vadaṃ이다.
이 문장을 주석서의 설명을 참조해서 옮기면 “처음부터 '그가 짓고 그가 [그 과보를] 경험한다.'고 한다면 '괴로움은 스스로가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로 해석해야 한다. 'ādito sato(처음부터 존재하는 것)'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번역이 달라지는 것이다. 역자는 보디 스님의 설명을 참조하여 본문처럼 옮기는 것이 문맥에 더 잘 어울린다고 판단하여 이렇게 옮겼다. 미얀마어 번역본에도 이렇게 번역되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ādito sato(처음부터 존재하는 것)'는 소유격인데 주석서는 이것을 처소격을 뜻하는 소유격이라고 설명하고 있다.(SA.ii.35)
주석서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만일 처음부터 '그가 짓고 그가 [그 과보를] 경험한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후에 그에게는 '괴로움은 스스로가 짓는다.'라는 믿음이 생긴다. 여기서 ‘괴로움'이란 윤회의 괴로움(vaṭṭa-dukkha)을 뜻한다. 이 주장은(iti vadaṃ)에서 먼저 나타난 '처음에'라는 단어(ādi-sadda)는 나중에 나타나는 '상[견]'이라는 단어(sassata-sadda)와 연결해서 [해석해야] 한다. … 그래서 이와 같이 주장하면 처음부터(ādito va) 상견을 밝히고 상견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왜? 그의 이러한 견해는 '짓는 자(kāraka)'와 '경험하는 자(vedaka)'는 오직 하나라고(ekam eva) 취하는 상견에 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SA.ii.35~36)
‘añño karoti añño paṭisaṃvedayatī’ti kho, kassapa,
vedanābhitunnassa sato ‘paraṃkataṃ dukkhan’ti iti vadaṃ ucchedaṃ etaṃ pareti.
깟사빠여, '다른 사람이 짓고 다른 사람이 [그 과보를] 경험한다.'고 한다면
느낌에 압도된 자가 '괴로움은 남이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단견에 떨어지고 만다.”124)
124) 이 부분도 바로 앞의 주해와 같은 이유로 역자는 주석서와는 다르게 옮겼다.
주석서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만일 처음에 '다른 사람이(añño) 짓고 다른 사람이(añño) [그 과보를] 경험한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후에 그에게는 '괴로움은 남이 짓는다.'라는 믿음이 생긴다. 그는 '짓는 자는 여기서 단멸한다. 그러면 그가 지은 것을 다른 자가 경험하게 된다(tena kataṃ añño paṭisaṃvediyati).'라는 이러한 단견과 함께하는 느낌에 의해서 두들겨 맞고(abhitunna) 찔렸기(viddha)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장하면 처음부터 단견을 밝히고 단견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왜? 그의 이러한 견해는 단견에 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SA.ii.36)
ete te, kassapa,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 —
10. “깟사빠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중간[中]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125)
125) “'중간(中]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는 것은 상견과 단견이라 불리는 양 극단(ubha anta)을 의지하지 않고(anupagamma) 제거하고(pahāya) 집착하지 않고(anallīvitvā),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에 서서 설하신다는 뜻이다. 어떤 법을 설하셨는가라고 한다면, 바로 이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연기의 가르침을 통해서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일어남을(kāraṇato phalaṃ), 그리고 원인의 소멸에 의해서(kāraṇa-nirodhena) 그 [결과]가 소멸함을 밝히신 것이지 어떤 짓는 자(kāraka)도 경험하는 자(vedaka)도 상정하시지(niddiṭṭha) 않았다.”(SA.ii.36)
아무튼 여기서 연기는 고락(苦樂)을 여의고 단상(斷常)을 여읜 것으로 설명되며 특히 고락의 자작자수(自作自收)와 자작타수(自作他收)의 문제를 짚어보고 있다. 중간[中]과 중도(中道)에 대해서는 위「깟짜나곳따 경(S12:15) §6의 주해를 참조할 것
‘avijjāpaccayā saṅkhārā;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 ... pe ...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avijjāya tveva asesavirāganirodhā saṅkhāranirodho; saṅkhāranirodhā viññāṇanirodho ... pe ...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ī’”ti.
그러나 무명이 [21]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126)
126) “이렇게 해서 나머지 [두] 질문이 논파되었다(paṭisedhitā), 왜냐하면 여기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ubho ante anupagamma)'라는 말씀으로 세번째 질문을 물리쳤으며(paṭikkhitta),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있다.'는 것을 통해서 [네 번째 질문인] 우연발생론(adhicca-samuppannatā)을 물리쳤다고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SA.ii.36)
(SN 12.35) (SN 12.36)
evaṃ vutte, aññataro bhikkhu bhagavantaṃ etadavoca —
“‘katamaṃ nu kho, bhante, jarāmaraṇaṃ, kassa ca panidaṃ jarāmaraṇan’ti?
‘no kallo pañho’ti bhagavā avoca,
4. 이렇게 말씀하시자 어떤 비구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252)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늙음 · 죽음이며 [61] 누구에게 늙음 · 죽음이 있습니까?”
“그것은 타당한 질문이 아니다.”253)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252) Ee에는 본 문장에 해당하는 원문 evaṃ vutte, aññataro bhikkhu bhagavantaṃ etadavoca가 나타나지 않는다. 다른 경들의 편집을 통해서 보면 이 문장은 있어야 한다. Be, Se에는 나타난다. Ee는 특히 『상윳따 니까야』의 경우에 편집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그리고 한 경에 문단 번호가 너무 많이 매겨져서 경의 흐름을 끊어놓는 경우가 허다하다.
253) “'어떤 것이 늙음 · 죽음입니까?'라고 바르게 질문을 한(su-pucchita) 뒤에 다시 '누구에게 늙음 · 죽음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은 [고정 불변하는] 중생을 상정하는 주장(satt-ūpaladdhi-vāda)이기 때문에 잘못된 질문(duppañha)이다. 이것은 마치 황금으로 만든 쟁반에 맛난 음식을 가득 담고 그 위에다 작은 똥 덩어리(gūtha-piṇḍa)를 놓은 것과 같아서 전체 음식을 먹지 못하고 버려야 하는 것과 같다.”(SA.ii.68)
‘katamaṃ jarāmaraṇaṃ, kassa ca panidaṃ jarāmaraṇan’ti iti vā,
bhikkhu, yo vadeyya, ‘aññaṃ jarāmaraṇaṃ aññassa ca panidaṃ jarāmaraṇan’ti, iti vā,
bhikkhu, yo vadeyya, ubhayametaṃ ekatthaṃ byañjanameva nānaṃ.
taṃ jīvaṃ taṃ sarīranti vā, bhikkhu, diṭṭhiyā sati brahmacariyavāso na hoti.
aññaṃ jīvaṃ aññaṃ sarīranti vā, bhikkhu, diṭṭhiyā sati brahmacariyavāso na hoti.
“비구여, '어떤 것이 늙음 · 죽음이며 누구에게 늙음 · 죽음이 있습니까?'라고 말하거나
'늙음 · 죽음과 늙고 죽는 자는 다르다.'라고 말하면 이 둘은 그 뜻은 같고 단지 문장이 다를 뿐이다. 비구여, ‘생명이 바로 몸이다.'라는 견해가 있으면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 254)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으면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255)
254) “'청정범행을 닦음(brahmacariya-vāsa)'이란 성스러운 도를 닦음(ariya-magga-vāsa)이다. 그런데 '생명이 바로 몸이디(taṃ jīvaṃ taṃ sarīraṃ).'라는 견해는 생명이 끝나면 몸도 끝나고, 몸이 끝나면 생명도 끝난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 견해는 중생은 [죽고 나면] 단멸한다(ucchijjati)고 거머쥐기 때문에 단견[斷見, 단멸론, uccheda-diṭṭhi)이라 부른다. 그런데 형성된 것들[諸行, saṅkhārā]은 생겨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고 간주하는 것이 교법의 영역(sāsana-avacara)에서는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이다.그리고 성스러운 도는 윤회(vaṭṭa)를 소멸하고 윤회를 끝장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단멸론을 가진 자에게는 도를 닦음(magga-bhāvanā)이 없이도 윤회가 소멸하기 때문에 도를 닦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niratthakā) [모순에] 빠진다. 그래서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brahmacariya-vāso na hoti)'고 말씀하신 것이다.”(SA.ii.68~69)
255) “두 번째로 '생명과 몸은 다르다(aññaṃ jīvaṃ aññaṃ sarīraṃ).'는 견해는 몸이 여기서 끝나더라도 생명은 그렇지 않다. 생명은 새장을 벗어난 새처럼 자유롭게(yathā-sukhaṃ) 간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 견해는 생명은 이 세상으로부터 저세상으로 간다고 거머쥐기 때문에 상견(常見, 상주론, sassata-diṭṭhi)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성스러운 도(ariya-magga)는 삼계윤회(tebhūmaka-vaṭṭa)를 벗어나기 위한(vivaṭṭenta) 것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하나의 형성된 것(eka-saṅkhāra)이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다고 한다면 이미 생겨난 윤회로부터 벗어남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도를 닦는 것(magga-bhāvanā)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niratthakā) [모순에] 빠진다. 그래서 이런 견해를 가진 자도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SA.ii.69)
ete te, bhikkhu,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 —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비구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라고 중간[中]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
(SN 12.48)
atha kho lokāyatiko brāhmaṇo yena bhagavā ... pe ...
ekamantaṃ nisinno kho lokāyatiko brāhmaṇo bhagavantaṃ etadavoca --
2. 그때 세상 이치에 능통한[順世論者]295)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한 뒤 한 곁에 앉았다.
세상 이치에 능통한 바라문은 한 곁에 앉아서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295) “'세상 이치에 능통한 자[順世論者, lokāyatika]'란 토론학이라는 로까야따(세상의 이치)에 능숙한 자(vitaṇḍa-satthe lokāyate kata-paricayo)를 말한다. 그리고 로까야따(세상의 이치)란 세상을 [논의의] 토대(āyatana)로 하는 것이며 어리석은 범부의 세상(bāla-puthujjana-loka)을 [논의의] 토대로 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위대하고(mahanta) 심오하다(gambhīra)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보잘 것 없는(paritta) 삿된 견해(diṭṭhi-gata)일 뿐이다”(SA.ii.76)
이런 의미에서 세상(loka)은 세속이라 옮겨도 무방하다. 한편 복주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로까야따(세상의 이치)라 불리는 것은 [이 이론을 따르면] 세상은 미래의 이로움을 위해서 노력도 하지 않게 되고 향상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āyatiṃ hitaṃ tena loko na yatati na īhatī ti lokāyataṃ). 왜냐하면 이 이론에 대한 믿음(laddhi) 때문에 중생들은 공덕을 지을(puñña-kiriya) 마음조차도 내지 못하기에 노력(payoga)은 까마득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SAȚ.ii.76)
인도 육파철학에서 로까야따(lokāyata)와 로까야띠까(lokāyatika)는 유물론과 유물론자로 간주되고 있으며, 짜르와까(Cārvāka)를 창시자로 여기고 있다. 복주서의 이러한 설명은 유물론으로 간주되는 로까야따의 입장을 잘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 로까야따(lokāyata)는 처세술(D1 §1.25 등)로도 옮겼고 자연의 이치(A3:58 등)로도 옮겼다. 초기불전에서 로까야따는 짜르와까의 유물론이라기보다는 바라문들이 배우는 학문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초기불전에 나타나는 로까야따에 대한 논의는 Rhys Davids, Dialogues of the Buddha, 1:166~172를 참조할 것.
“kiṃ nu kho, bho gotama, sabbamatthī”ti?
“‘sabbamatthī’ti kho, brāhmaṇa, jeṭṭhametaṃ lokāyataṃ”.
3. “고따마 존자시여, 모든 것은 존재합니까?”
“바라문이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는 이것은 첫 번째 세상의 이치이다.”
“kiṃ pana, bho gotama, sabbaṃ natthī”ti?
“‘sabbaṃ natthī’ti kho, brāhmaṇa, dutiyametaṃ lokāyataṃ”.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까?”
“바라문이여,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것은 두 번째 세상의 이치이다.”
“kiṃ nu kho, bho gotama, sabbamekattan”ti?
“‘sabbamekattan’ti kho, brāhmaṇa, tatiyametaṃ lokāyataṃ”.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모든 것은 하나의 성질을 가졌습니까?” 296)
“바라문이여, 모든 것은 하나의 성질을 가졌다는 이것은 세 번째 세상의 이치이다.”
296) “'하나의 성질(ekatta)'이란 동일한 고유성질(eka-sabhāva)을 말한다. '영원한 고유성질(nicca-sabhāva)을 가졌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이다.”(SA.ii.76)
“kiṃ pana, bho gotama, sabbaṃ puthuttan”ti?
“‘sabbaṃ puthuttan’ti kho, brāhmaṇa, catutthametaṃ lokāyataṃ”.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모든 것은 다양한 성질을 가졌습니까?” 297)
“바라문이여, 모든 것은 다양한 성질을 가졌다는 이것은 네 번째 세상의 이치이다.
297) “'다양한 성질(puthutta)'이란 앞의 고유성질과는 다른 고유성질(purima-sabhāvena nānā-sabhāvaṃ)을 말한다. 신들과 인간들 등의 존재는 처음에는 존재하지만 나중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멸론(uccheda)을 두고 한 말이다.(SA.ii.76)
“ete te, brāhmaṇa,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 —
바라문이여, 이러한 양 극단298)을 의지하지 않고 중간[中]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
298) “'여기서 '모든 것은 존재한다.'라는 첫 번째와 '모든 것은 하나의 성질을 가졌다.'라는 세 번째는 상견(常見, sassata-diṭṭhi)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두 번째와 '모든 것은 다양한 성질을 가졌다.'라는 네 번째는 단견(見, uccheda-diṭṭhi)이라고 알아야 한다.”(SA.ii.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