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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마하박가 1. 지혜에 관한 논의 109
다섯 번째 품
77. kathaṃ “ime dhammā sacchikātabbā”ti sotāvadhānaṃ, taṃpajānanā paññā sutamaye ñāṇaṃ?
eko dhammo sacchikātabbo — akuppā cetovimutti.
dve dhammā sacchikātabbā — vijjā ca vimutti ca.
tayo dhammā sacchikātabbā — tisso vijjā.
cattāro dhammā sacchikātabbā — cattāri sāmaññaphalāni.
pañca dhammā sacchikātabbā — pañca dhammakkhandhā.
[I.35]cha dhammā sacchikātabbā — cha abhiññā.
satta dhammā sacchikātabbā — satta khīṇāsavabalāni.
aṭṭha dhammā sacchikātabbā — aṭṭha vimokkhā.
nava dhammā sacchikātabbā — nava anupubbanirodhā.
dasa dhammā sacchikātabbā — dasa asekkhā dhammā.
77. "'이들 제법(諸法)을 겪어 알아(現證)야 한다1)'고 새겨들은 바.
그것에 관해 알아차리는 혜로서 들음을 통해 이루어진 지혜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인가?
하나의 법(法)을 겪어 알아야 한다. 즉 동요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이다.
두 법을 겪어 알아야 한다. 즉 밝음(明)과 해탈이다.
세 법을 겪어 알아야 한다. 즉 세 가지 밝음(三明)2)이다.
네 법을 겪어 알아야 한다. 즉 네 가지 사문의 성취(果)3)이다.
다섯 법을 겪어 알아야 한다. 즉 다섯 가지 법의 구성요소(五法蘊)4)이다.
여섯 법을 겪어 알아야 한다. [I.35] 즉 여섯 가지 신통(六神通)5)이다.
일곱 법을 겪어 알아야 한다. 즉 일곱 가지 루가 다한 힘(七漏盡力)6)이다.
여덟 법을 겪어 알아야 한다. 즉 여덟 가지 해탈(八解脫)7)이다.
아홉 법을 겪어 알아야 한다. 아홉 가지 순서에 따른 소멸(九次第滅)8)이다.
열 법을 겪어 알아야 한다. 열 가지 배움을 마친 이의 법(十無學法)9)이다. 10)
1)미래수동분사형으로 나온 '겪어 알아(現證)야 한다(sacchikātabbā)'와 관련하여 '겪어 알다(sacchikaroti)'라는 단어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sacchikaroti'는 산스끄리뜨어의 동사원형 'sākṣāt√kṛ'와 동일한 기원을 둔 말로, '가까이서 보다' · '직접적으로 깨닫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접두어인 'sākṣāt'는 '직접적으로' · '몸으로'의 뜻을 지니고, '√kṛ'는 '행하다'의 의미이다. 따라서 원래의 의미대로 번역하자면 '몸으로 직접 행하다' 정도가 될 것이다. 다른 말로는 '철저히 알다' · '작증(作證)하다'로도 번역이 된다. 'ābhiññā(證智)'와 유사한 의미를 지니지만, 'ābhiññā'가 요가적인 수행에 의해 체득된 지혜인 '신통(神通)'의 의미까지를 포괄하는 넓은 개념인 반면에, 'sacchikaroti'는 현재적인 의미의 '겪음'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말이라는 점에서 그 차이를 지적할 수 있겠다. Therī. 432송(頌)에 "두발을 지닌 이(人間) 중에 가장 수승한 분이 겪어 안 열반(涅槃)을 얻을 지어다(nibbānañ ca labhassu yaṃ sacchikari dvipadaseṭṭho)."라는 구절이 나온다.
2)'세 가지 밝음(tisso vijjā 三明)'이란 논모(論母)에 열거된 바, '전생에 대해 기억하는 지혜(pubbe nivāsānussatiñāṇa 宿住隨智)' · '하늘과 같은 눈의 지혜(dibbacakkhuñāṇa 天眼智)' · '루가 다한 지혜 (āsavānaṃ khaye ñāṇa 漏盡智)'를 말한다.
3)'네 가지 사문의 성취(四沙門果 cattāri sāmaññaphalāni)'란 '흐름에 들어선 경지(預流 sotāpat tiphala)' · '한번 돌아옴에 들어선 경지(一果 sakadāgāmiphala)' · '돌아오지 않음에 들어선 경지(不還果 anāgāmiphala)' · '아라한에 들어선 경지(阿羅漢果 arahattaphala)' 등의 넷을 말한다. PsA. p.135 참조.
4)'다섯 가지 법의 구성요소(pañca dhammakkhandhā 五法蘊)'란 '계의 구성요소(sīlakkhandha 戒蘊)' · '삼매의 구성요소(samādhikkhandha 定蘊)' · '혜의 구성요소(paññākkhandha 慧蘊)' · '해탈의 구성요소(vimuttikkhandha 解脫蘊)' · '해탈의 지혜로써 보는 법의 구성요소(vimuttiñāṇadassanakkhandha 解脫知見蘊)'의 다섯을 말한다. PSA. p.135 참조.
5) '여섯 가지 신통(cha abhiññā 六神通)'이란 본 텍스트의 I. 마하박가 1.제42장부터 제46장의 내용을 이루는 '여러 가지 신통의 지혜(iddhividhe ñāṇa 神通類智)' · '청정한 귀의 계로 이루어진 지혜(sotadhātuvisuddhiñāṇa 耳界淸淨智)' · '다른 이의 마음을 아는 지혜(cetopariyañāṇa 他心智)' · '전생에 대해 기억하는 지혜(pubbenivāsānussatiñāṇa 宿住隨念智)' · '하늘과 같은 눈의 지혜(dibbacakkhuñāṇa 天眼智)' · '루가 다한 지혜(āsavānaṃ khaye ñāṇa 漏盡智)를 말한다. PsA. p.136 참조.
6)'일곱 가지 루가 다한 힘(satta khīṇāsavabalāni 七漏盡力)'과 관련하여 II. 유가난다박가 9. '힘(力)에 관한 논의'에 "열 가지 루(漏)가 다한 힘이란 무엇인가? 여기에서, 루가 다한 비구는 바른 혜로써 일체의 형성력에 의한 것(行)을 무상(無常)으로 여실하게 잘 본다. 누진의 비구가 바른 혜로써 일체의 형성력에 의한 것을 무상으로 여실하게 잘 보는, 이것이 곧 루가 다한 비구의 힘이다…(katamāni dasa khīṇāsavabalāni? idha khīṇāsavassa bhikkhuno aniccato sabbe saṅkhārā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sudiṭṭhā honti: yam pi khīṇāsavassa bhikkhuno aniccato sabbe saṅkhārā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sudiṭṭhā honti, idam pi khīṇāsavassa bhikkhuno balaṃ hoti)."라는 형식으로 10가지 루가 다한 힘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거기에서 언급된 제5 · 6 · 8을 제외한 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일곱의 루가 다한 힘'이다. PsA. pp.13 6~137 참조.
또한 일곱의 루가 다한 힘에 대한 설명으로는 DN. vol.3. p.283의 경구가 있다.
7)'여덟 가지 해탈(aṭṭha vimokkhā 八解脫)'이란 본 텍스트의 I. 마하박가 5.6~9절에 상세히 설해 져 있다. 그 외에 PsA. p.137. DN. vol.3. pp.261~262, 『長阿含經』및『別雜阿含經』(대정장1 p.56a; 238ab), 『集異門足論』 (대정장 26, p.443) 등에도 논의되어 있다.
8)'아홉 가지 순서에 따른 소멸(nava anupubbanirodhā 九第滅)'과 관련하여, PsA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첫 번째 선정(初禪)에 들어간 이에게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지각(想)이 소멸한다. 두 번째 선정(第二禪)에 들어간 이에게는 거친 사유(尋)와 미세한 사유(伺)가 소멸한다. 세 번째 선정(禪)에 들어간 이에게는 기쁨이 소멸한다. 네 번째 선정(第四禪)에 들어간 이에게는 들숨과 날숨이 소멸한다.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空無邊處)에 들어간 이에게는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色)이 소멸한다.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識無邊處)에 들어간 이에게는 공간에 걸림이 없음에 대한 지각이 소멸한다. 아무것도 없는 경지(無所有處)에 들어간 이에게는 의식에 걸림이 없음에 대한 지각이 소멸한다.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非非非想處)에 들어간 이에게는 아무것도 없음에 대한 지각이 소멸한다. 지각과 느낌의 소멸(想受滅)에 들어간 이에게는 지각과 느낌이 소멸한다(paṭhamaṃ jhānaṃ samāpannassa kāmasañnā niruddhā hoti, dutiyaṃ jhānaṃ samāpannassa vitakkavicārā niruddhā honti, tatiyaṃ jhanaṃ samāpannassa pīti niruddhā hoti, catutthaṃ jhānaṃ samāpannassa assāsapassāsā niruddhā honti, ākāsānañcāyatanaṃ samāpannassa rūpasaññā niruddha hoti, viññāṇañcāyatanaṃ samāpannassa ākāsānañcāyatanasaññā niruddhā hoti, akiñcaññāyatanaṃ samāpannassa viññāṇañcāyatanasañña niruddha hoti, neva saññānāsaññāyatanaṃ samāpannassa ākiñcaññāyatanasaññā niruddhā hoti,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nnassa saññā ca vedană ca niruddhā honti). PsA. pp.137~138.
9)'열 가지 배움을 마친 이의 법(dasa asekhā dhammā 十無學法)'이란 '배움을 마친 이의 바른 견 해(asekkhā sammādiṭṭhi)' · '배움을 마친 이의 바른 사유(asekkho sammāsaṅkappa)' · '배움을 마친 이의 바른 말(asekkhā sammāvācā)' · '배움을 마친 이의 바른 행위(asekkha sammākammanta)' · '배움을 마친 이의 바른 삶(asekkha sammā-ājiva)'. '배움을 마친 이의 바른 정진(asekkha sammāvāyama)' · '배움을 마친 이의 바른 마음지킴(asekkhā sammāsati)' · '배움을 마친 이의 바른 삼매(asekkhā sammāsamadhi)' · '배움을 마친 이의 바른 지혜(asekkha sammāñāṇa)' · '배움을 마친 이의 바른 해탈(asekkhā sammāvimutti)'을 말한다. PsA. p.138 참조.
10)여기에서부터 '새겨들음'의 구체적인 대상으로 '겪어 알아야 할 것'에 대한 설명이 시작된다. 본 단락에서는 '겪어 알아야 할' 내용을 1法에서부터 10法에 이르기까지 법수(法)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 이와 같은 법수에 의한 분류의 예는 DN. Vol.3. pp.273~292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영역 p.35 참조.
78-(1). “sabbaṃ, bhikkhave, sacchikātabbaṃ. kiñca, bhikkhave, sabbaṃ sacchikātabbaṃ?
cakkhu, bhikkhave, sacchikātabbaṃ; rūpā sacchikātabbā; cakkhuviññāṇaṃ sacchikātabbaṃ;
cakkhusamphasso sacchikātabbo; yampidaṃ cakkhusam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tampi sacchikātabbaṃ.
sotaṃ sacchikātabbaṃ; saddā sacchikātabbā ... pe ...
ghānaṃ sacchikātabbaṃ; gandhā sacchikātabbā...
jivhā sacchikātabbā; rasā sacchikātabbā...
kāyo sacchikātabbo; phoṭṭhabbā sacchikātabbā...
mano sacchikātabbo; dhammā sacchikātabbā; manoviññāṇaṃ sacchikātabbaṃ;
manosamphasso sacchikātabbo; yampidaṃ manosam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tampi sacchikātabbaṃ”.
rūpaṃ passanto sacchikaroti, vedanaṃ passanto sacchikaroti, saññaṃ passanto sacchikaroti,
saṅkhāre passanto sacchikaroti, viññāṇaṃ passanto sacchikaroti.
cakkhuṃ ... pe ...
jarāmaraṇaṃ ... pe ... amatogadhaṃ nibbānaṃ pariyosānaṭṭhena passanto sacchikaroti.
ye ye dhammā sacchikatā honti te te dhammā phassitā11) honti.
taṃ ñātaṭṭhena ñāṇaṃ, pajānanaṭṭhena paññā.
tena vuccati — “ime dhammā sacchikātabbāti sotāvadhānaṃ,
taṃpajānanā paññā sutamaye ñāṇan”ti.
78-(1). 비구들이여, 일체를 겪어 알아(現證)야 한다. 비구들이여, 겪어 알아야 할 일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눈을 겪어 알아야 한다. 시각대상(色)을 겪어 알아야 한다.
눈에 의한 식별(眼識)을 겪어 알아야 한다. 눈에 의한 닿음(眼觸)을 겪어 알아야 한다.
눈에 의한 닿음(眼)을 연(緣)하여 생겨나는 즐겁거나 고통스럽거나 고통스럽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受), 바로 그것을 겪어 알아야 한다.
귀를 겪어 알아야 한다. 소리를 겪어 알아야 한다. …내지…
코를 겪어 알아야 한다. 냄새를 겪어 알아야 한다.
혀를 겪어 알아야 한다. 맛을 겪어 알아야 한다.
몸을 겪어 알아야 한다. 감촉을 겪어 알아야 한다.
마음을 겪어 알아야 한다. 마음현상을 겪어 알아야 한다. 마음에 의한 식별을 겪어 알아야 한다.
마음에 의한 닿음을 겪어 알아야 한다. 마음에 의한 닿음을 연하여 생겨나는
즐겁거나 고통스럽거나 고통스럽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바로 그것을 겪어 알아야 한다.
물질적 요소(色)를 보면서 겪어 안다. 감수작용(受)을 보면서 겪어 안다.
지각작용(想)을 보면서 겪어 안다. 형성작용(行)을 보면서 겪어 안다.
식별작용(識)을 보면서 겪어 안다.
눈을 …내지…
늙음과 죽음을 …내지… 죽지 않음에 도달한 열반을 끝의 의미로 보면서 겪어 안다.
무릇 겪어 안 제법(諸法)이 있다는 것은 도달된 제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알고 있다(所知)는 의미에서 지혜(智)이며, 알아차린다(知)는 의미에서 혜(慧)이다.
그러므로 말한다. 이들 제법을 겪어 알아야 한다'고 새겨들은 바,
그것에 관해 알아차리는 혜로서 들음을 통해 이루어진 지혜가 있다고.
11)phusitā, K.; sacchikatā, S.
78-(2). kathaṃ “ime dhammā hānabhāgiyā,12)
ime dhammā ṭhitibhāgiyā, ime dhammā visesabhāgiyā,
ime dhammā nibbedhabhāgiyā”ti sotāvadhānaṃ, taṃpajānanā paññā sutamaye ñāṇaṃ?
paṭhamassa jhānassa lābhiṃ kāma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dācaranti —
hānabhāgiyo dhammo. tadanudhammatā sati santiṭṭhati — ṭhitibhāgiyo dhammo.
avitakka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I.36]dācaranti — visesabhāgiyo dhammo.
nibbidā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dācaranti virāgūpasaṃhitā — nibbedhabhāgiyo dhammo.
dutiyassa jhānassa lābhiṃ vitakka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dācaranti —
hānabhāgiyo dhammo. tadanudhammatā sati santiṭṭhati — ṭhitibhāgiyo dhammo.
upekkhāsukha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dācaranti — visesabhāgiyo dhammo.
nibbidā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dācaranti virāgūpasaṃhitā — nibbedhabhāgiyo dhammo.
tatiyassa jhānassa lābhiṃ pītisukha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dācaranti —
hānabhāgiyo dhammo. tadanudhammatā sati santiṭṭhati — ṭhitibhāgiyo dhammo.
adukkhamasukha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dācaranti — visesabhāgiyo dhammo.
nibbidā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dācaranti virāgūpasaṃhitā — nibbedhabhāgiyo dhammo.
catutthassa jhānassa lābhiṃ upekkhā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dācaranti —
hānabhāgiyo dhammo. tadanudhammatā sati santiṭṭhati — ṭhitibhāgiyo dhammo.
ākāsānañcāyatana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dācaranti — visesabhāgiyo dhammo.
nibbidā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dācaranti virāgūpasaṃhitā — nibbedhabhāgiyo dhammo.
78-(2). "'이들 제법은 물러남에 관련된 것(順退分)이며,
이들 제법은 머무름에 관련된 것(順住分)이며,
이들 제법은 넘어섬에 관련된 것(順勝進分)이며,
이들 제법은 결택에 관련된 것(順決擇分)이다'고 새겨들은 바, 그것에 관해 알아차리는 혜로서
들음을 통해 이루어진 지혜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인가?
첫 번째 선정(初禪)을 얻은 자에게
감각적 쾌락(欲)을 수반하는 지각작용(想)13)과 마음냄(作意)이 일어난다.14)
[이것은] 물러남에 관련된 법이다.
그것(첫 번째 선정)에 따르는 법의 성품으로서의 마음지킴(念)이 머문다.15)
[이것은) 머무름에 관련된 법이다.
거친 사유(尋)가 없는 상태에서 지각작용과 마음냄이 일어난다.
[이것은] 넘어섬에 관련된 법이다.
싫어하여 떠남을 수반하는 지각작용과 마음냄이 탐냄을 떠나 일어난다. [I.36]
[이것은] 결택에 관련된 법이다.
두 번째 선정을 얻은 자에게 거친 사유를 수반하는 지각작용과 마음냄이 일어난다.
[이것은] 물러남에 관련된 법이다.
그것(두 번째 선정)에 따르는 법(法)의 성품으로서 마음지킴이 머문다.
[이것은] 머무름에 관련된 법이다.
평정(捨)16)과 즐거움을 수반하는 지각작용과 마음냄이 일어난다. [이것은] 넘어섬에 관련된 법이다.
싫어하여 떠남을 수반하는 지각작용과 마음냄이 탐냄을 떠나 일어난다.
[이것은] 결택에 관련된 법이다.
세 번째 선정을 얻은 자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수반하는 지각작용과 마음냄이 일어난다.
[이것은] 물러남에 관련된 법이다.
그것(세 번째 선정)에 따르는 법의 성품으로서 마음지킴이 머문다.
[이것은] 머무름에 관련된 법이다.
고통스럽지도 즐겁지도 않은 상태에서 지각작용과 마음냄이 일어난다.
[이것은] 넘어섬에 관련 된 법이다.
싫어하여 떠남을 수반하는 지각작용과 마음냄이 탐냄을 떠나 일어난다.
[이것은] 결택에 관련된 법이다.
네 번째 선정을 얻은 자에게 평정과 즐거움을 수반하는 지각작용과 마음냄이 일어난다.
[이것은] 물러남에 관련된 법이다.
그것(네 번째 선정)에 따르는 법의 성품으로서 마음지킴이 머문다.
[이것은] 머무름에 관련된 법이다.
공간에 걸림없음(空無邊處)을 수반하는 지각작용과 마음냄이 일어난다.
[이것은] 넘어섬에 관련된 법이다.
싫어하여 떠남을 수반하는 지각작용과 마음냄이 탐냄을 떠나 일어난다.
[이것은] 결택에 관련된 법이다.
12)pahāna∘, S.
13)'지각작용(想 saññā)'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I. 마하박가 3.39절과 56절에 제시된 각주에 논의되어 있다.
14)여기에서 'saññā(想 지각작용)'는 여성 주격 단수 · 복수형이고 'manasikārā(作意 마음냄)'는 남성 · 복수형으로, 수식관계가 아닌 단순 병렬로 보아야 한다. 이는 주어의 동작을 나타내는 'samudācaranti(일어난다)'가 복수의 형태를 취한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본서에서는 이 대목을 '지각작용과 마음이 일어난다'로 번역한다. 그러나 남전장40(p.58)에서는 "想が作意として現行す"라고 본 번역과 달리 번역하고 있다. 한편 영역(p.36)에서는 이 대목을 "perception and attention"으로 본 번역에서와 동일한 방식으로 번역하고 있다.
15)'그것에 따르는 법(法)의 성품(tadanudhammatā)'의 tā와 '마음지킴(sati)'의 ti는 동일한 여성 주격으로서 수식관계를 이룬다. 이는 이들의 동작을 나타내는 'santiṭṭhati(머물다)'가 단수형태를 취하는 것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앞 문장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16)'평정(upekkhā 捨)'이란 'upa√īkṣ(가까이 응시하다)'에서 기원한 말로 원래의 의미는 '밀착해서 보 다'이다. 즉 어떠한 대상에 대해 주관적 관념이나 상념을 '배제한(=捨)' 상태에서 밀밀하게 관찰하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이와 같은 원래의 의미에서 출발하여 인식 주체의 심리적 상황을 밝히는 말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는데, '평정' · '냉철함' · '초연함' 등으로 번역되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이 용어는 보통 선정(禪)의 상태, 그중에서도 네 번째 선정(第四禪)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는데, 그것의 전형이 되는 어구가 '捨念淸淨(upekkhā-sati-parisuddhi)' 즉 '평정을 통한 마음지킴의 청정'이다. 그러나 원래의 뜻은 I. 마하박가 1. 제1장 31절 각주에서 언급되었듯 이 '평정된 마음으로 보는 것(觀察 ajjhupekkhanā)'이라는 말과 관련이 있으며, 영역(p.135)의 각주에 나오듯이 '장애 (interference) 없이 사물을 주시하는 것'이라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위빠싸나(vipassanā 觀法)'의 수행이 선정의 상태로 연결되는 것을 밝힌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78-(3). ākāsānañcāyatanassa lābhiṃ rūpa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dācaranti —
hānabhāgiyo dhammo. tadanudhammatā sati santiṭṭhati — ṭhitibhāgiyo dhammo.
viññāṇañcāyatana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dācaranti — visesabhāgiyo dhammo.
nibbidā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dācaranti virāgūpasaṃhitā — nibbedhabhāgiyo dhammo.
viññāṇañcāyatanassa lābhiṃ ākāsānañcāyatana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dācaranti —
hānabhāgiyo dhammo. tadanudhammatā sati santiṭṭhati — ṭhitibhāgiyo dhammo.
ākiñcaññāyatana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dācaranti — visesabhāgiyo dhammo.
nibbidā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dācaranti virāgūpasaṃhitā — nibbedhabhāgiyo dhammo.
ākiñcaññāyatanassa lābhiṃ viññāṇañcāyatana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dācaranti —
hānabhāgiyo dhammo. tadanudhammatā sati santiṭṭhati — ṭhitibhāgiyo dhammo.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dācaranti — visesabhāgiyo dhammo.
nibbidā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dācaranti virāgūpasaṃhitā — nib[I.37]bedhabhāgiyo dhammo.
taṃ ñātaṭṭhena ñāṇaṃ, pajānanaṭṭhena paññā.
tena vuccati — “ime dhammā hānabhāgiyā, ime dhammā ṭhitibhāgiyā, ime dhammā visesabhāgiyā,
ime dhammā nibbedhabhāgiyāti sotāvadhānaṃ, taṃpajānanā paññā sutamaye ñāṇaṃ”.
78-(3). 공간에 걸림이 없는 선정(空無邊處定)을 얻은 자에게
물질적 현상을 수반하는 지각 작용(想)과 마음냄(作意)이 일어난다.
[이것은] 물러남에 관련된 법(順退分法)이다.
그것에 따르는 법의 성품으로서 마음지킴(念)이 머문다. [이것은] 머무름에 관련된 법(順住分法)이다.
의식에 걸림없음(識無邊處)을 수반하는 지각작용과 마음냄이 일어난다.
[이것은] 넘어섬에 관련 된 법(進分法)이다.
싫어하여 떠남을 수반하는 지각작용과 마음냄이 탐냄을 떠나 일어난다.
[이것은] 결택에 관련된 법(順擇分法)이다.
의식에 걸림이 없는 선정(識無邊處定)을 얻은 자에게
공간에 걸림없음을 수반하는 지각작용과 마음냄이 일어난다. [이것은] 물러남에 관련된 법이다.
그것에 따르는 법의 성품으로서 마음지킴이 머문다. [이것은] 머무름에 관련된 법이다.
아무것도 없음(無所有處)을 수반하는 지각작용과 마음냄이 일어난다.
[이것은] 넘어섬에 관련된 법이다.
싫어하여 떠남을 수반하는 지각작용과 마음냄이 탐냄을 떠나 일어난다.
[이것은〕결택에 관련된 법이다.
아무것도 없는 선정(無所有處定)을 얻은 자에게
의식에 걸림없음을 수반하는 지각작용과 마음냄이 일어난다. [이것은] 물러남에 관련된 법이다.
그것에 따르는 법의 성품으로서 마음지킴이 머문다. [이것은] 머무름에 관련된 법이다.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님(非想非非想處)을 수반하는 지각작용과 마음냄이 일어난다.
[이것은] 넘어섬에 관련된 법이다.
싫어하여 떠남을 수반하는 지각작용과 마음냄이 탐냄을 떠나 일어난다.
[이것은] 결택에 관련된 [I.37] 법이다.
그와 같이 알고 있다(所知)는 의미에서 지혜(智)이며, 알아차린다(了知)는 의미에서 혜이다.
그러므로 말한다. "'이들 제법은 물러남에 관련된 것이며, 이들 제법은 머무름에 관련된 것이며,
이들 제법은 넘어섬에 관련된 것이며, 이들 제법은 결택에 관련된 것이다'고 새겨들은 바,
그것에 관해 알아차리는 혜로서 들음을 통해 이루어진 지혜가 있다"고.
79. kathaṃ “sabbe saṅkhārā aniccā, sabbe saṅkhārā dukkhā,
sabbe dhammā anattā”ti sotāvadhānaṃ, taṃpajānanā paññā sutamaye ñāṇaṃ?
“rūpaṃ aniccaṃ khayaṭṭhena, dukkhaṃ bhayaṭṭhena,
anattā asārakaṭṭhenā”ti sotāvadhānaṃ, taṃpajānanā paññā sutamaye ñāṇaṃ.
“vedanā ... pe ... saññā... saṅkhārā... viññāṇaṃ...
cakkhu ... pe ...
jarāmaraṇaṃ aniccaṃ khayaṭṭhena, dukkhaṃ bhayaṭṭhena, anattā asārakaṭṭhenā”ti sotāvadhānaṃ,
taṃpajānanā paññā sutamaye ñāṇaṃ.
taṃ ñātaṭṭhena ñāṇaṃ, pajānanaṭṭhena paññā.
tena vuccati — “sabbe saṅkhārā aniccā, sabbe saṅkhārā dukkhā,
sabbe dhammā anattā”ti sotāvadhānaṃ, taṃpajānanā paññā sutamaye ñāṇaṃ.
79."'일체의 형성력에 의한 것(行)은 무상(無常)하며, 일체의 형성력에 의한 것은 고통(苦)이며,
일체의 법은 무아(無我)이다'고 새겨들은 바,
그것에 관해 알아차리는 혜로서 들음을 통해 이루어진 지혜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인가?
'물질적 요소는 다해 없어짐(滅)의 의미에서 무상(無常)하며, 다해 없어짐의 의미에서 고통17)이며,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무아(無我)이다'고 새겨들은 바,
그것에 관해 알아차리는 혜로서 들음을 통해 이루어진 지혜가 있다.
'감수작용(受) · 지각작용(想) · 형성작용(行) · 식별작용(識) ·
눈(眼) ∙∙∙내지∙∙∙
늙음과 죽음은 다해 없어짐의 의미에서 무상하며, 다해 없어짐의 의미에서 고통이며,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무아이다'고 새겨들은 바,
그것에 관해 알아차리는 혜로서 들음을 통해 이루어진 지혜가 있다;
그와 같이 알고 있다(所知)는 의미에서 지혜(智)이며, 알아차린다(了知)는 의미에서 혜이다.
그러므로 말한다. "일체의 형성력에 의한 것(行)은 무상이며,
일체의 형성력에 의한 것(行)은 고통이며, 일체의 법은 무아이다'고 새겨들은 바,
그것에 관해 알아차리는 혜로서 들음을 통해 이루어진 지혜가 있다"고.
17)"다해 없어짐의 의미에서 고통이다(dukkhaṃ khayaṭṭhena)."는 이 대목을 영역(p.137)에서는 "두려움(怖畏)의 의미에서 고통이다(dukkhaṃ bhayaṭṭhena)."로 바꾸어 읽을 것을 권하고 있다. 문맥상 영역에서의 지적이 타당하다고 생각되지만, 이 대목에 대한 다른 판본의 언급이 없고, 본 절의 아랫부분에 dukkhaṃ khayaṭṭhena가 반복해서 사용되므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번역한다.
80. kathaṃ “idaṃ dukkhaṃ ariyasaccaṃ, idaṃ dukkhasamudayaṃ ariyasaccaṃ,
idaṃ dukkhanirodhaṃ ariyasaccaṃ, id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n”ti
sotāvadhānaṃ, taṃpajānanā paññā sutamaye ñāṇaṃ?
tattha katamaṃ dukkhaṃ ariyasaccaṃ?
jātipi dukkhā, jarāpi dukkhā, maraṇampi dukkh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pi dukkhā,
appiyehi18)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yampicchaṃ na labhati tampi dukkhaṃ;
saṅ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pi dukkhā.
tattha katamā jāti?
yā tesaṃ tesaṃ sattānaṃ tamhi tamhi sattanikāye jāti sañjāti okkanti abhinibbatti
khandhānaṃ pātubhāvo āyatanānaṃ paṭilābho — ayaṃ vuccati jāti.
tattha katamā jarā
yā tesaṃ tesaṃ sattānaṃ tamhi tamhi sattanikāye jarā jīraṇatā khaṇḍiccaṃ pāliccaṃ
valittacatā āyuno saṃhāni indriyānaṃ paripāko — ayaṃ vuccati jarā.
[I.38]tattha katamaṃ maraṇaṃ?
yā tesaṃ tesaṃ sattānaṃ tamhā tamhā sattanikāyā cuti cavanatā bhedo antaradhānaṃ
maccu maraṇaṃ kālakiriyā khandhānaṃ bhedo kalebarassa19) nikkhepo jīvitindriyassupacchedo —
idaṃ vuccati maraṇaṃ.
80. "'이것은 고통에 관한 거룩한 진리(苦聖諦)이며,
이것은 고통의 일어남에 관한 거룩한 진리(苦集聖諦)이며,
이것은 고통의 소멸에 관한 거룩한 진리(苦滅聖諦)이며,
이것은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거룩한 진리(順苦滅道聖)이다'고 새겨들은 바,
그것에 관해 알아차리는 혜로서 들음을 통해 이루어진 지혜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인가?
거기에서 고통에 관한 거룩한 진리(苦聖聖)란 무엇인가?
태어남도 고통이다. 늙음도 고통이다. 죽음도 고통이다.
슬픔(愁) · 비탄(悲) · 고통(苦) · 근심(憂) · 번민(惱)도 또한 고통이다.
사랑하지 않는 이와의 만남은 고통이며,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도 고통이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다. 요컨대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五取蘊)은 고통이다.
거기에서 태어남이란 무엇인가?
그렇고 그런 뭇삶(有情)의 무리 속에 그렇고 그런 삶들의 태어남 · 시작됨 · 나타남 · 자라남 ·
온(蘊)의 드러남. 터전(入處)의 획득, 바로 이것을 태어남이라 한다. 20)
거기에서 늙음이란 무엇인가?
그렇고 그런 삶의 무리 속에 그렇고 그런 삶의 늙음 · 노쇠 · 이빨빠짐 · 피부의 주름 ·
나이의 다함 · 기능(根)의 쇠퇴, 바로 이것을 늙음이라고 한다.
[I.38] 거기에서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렇고 그런 삶의 무리로부터 그렇고 그런 삶의 사라짐 · 이동 · 파괴 · 소멸 · 죽음 · 끝남 ·
온의 파괴 · 신체의 소진 · 목숨의 근(根)의 단절, 바로 이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21)
18)apiyehi, M.
19)kaḷevarassa, M.K.
20)여기에서 'jāti(태어남) · sañjāt(시작됨) · okkanti(나타남) · abhinibbatti(자라남) · khandhānaṃ pātubhāvo(온의 드러남) · āyatanānaṃ paṭilābho(터의 획득)'은 소유격인 sattānaṃ(뭇삶 · 중생)을 받는 말이다. 이들 전체는 맨 앞에 나온 관계사 yā에 묶이어 뒤에 나오는 지시사 ayaṃ로 연결된다.
21)본 대목의 '태어남(jāti)' · '늙음(jarā)'. '죽음(maraṇaṃ)에 대한 설명은 SN. Vol.2. p.3; MN. vol.3. p.249의 내용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81-(1). tattha katamo soko?
yo22) ñātibyasanena vā phuṭṭhassa, bhogabyasanena vā phuṭṭhassa,
rogabyasanena vā phuṭṭhassa, sīlabyasanena vā phuṭṭhassa, diṭṭhibyasanena vā phuṭṭhassa,
aññataraññatarena byasanena samannāgatassa, aññataraññatarena dukkhadhammena phuṭṭhassa
soko socanā socitattaṃ antosoko antoparisoko cetaso parijjhāyanā domanassaṃ sokasallaṃ —
ayaṃ vuccati soko.
tattha katamo paridevo?
yo22) ñātibyasanena vā phuṭṭhassa, bhogabyasanena vā phuṭṭhassa,
rogabyasanena vā phuṭṭhassa, sīlabyasanena vā phuṭṭhassa, diṭṭhibyasanena vā phuṭṭhassa,
aññataraññatarena byasanena samannāgatassa,
aññataraññatarena dukkhadhammena phuṭṭhassa
ādevo paridevo ādevanā, paridevanā ādevitattaṃ paridevitattaṃ vācā palāpo
vippalāpo lālappo lālappanā lālappitattaṃ — ayaṃ vuccati paridevo.
81-(1). 거기에서 슬픔(愁)이란 무엇인가?
친족의 불행에 연루되거나, 재산의 손실에 연루되거나, 병고에 연루되거나,
계(戒)의 훼손에 연루되거나, 견해의 훼손에 연루되거나,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불행에 따라가는,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고통스러운 법(法)에 연루되어 [맞게 되는]
슬픔, 우수, 슬퍼함, 내적인 슬픔, 내적으로 가득한 슬픔, 마음의 고뇌와 근심과 슬픔의 화살이다.
이것을 슬픔이라 한다.
거기에서 비탄(悲)이란 무엇인가?
친족의 불행에 연루되거나, 재산의 손실에 연루되거나, 병고에 연루되거나,
계(戒)의 훼손에 연루되거나, 견해의 훼손에 연루되거나,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불행에 따라가는,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고통스러운 법(法)에 연루되어 [행하게 되는] 한탄 · 비통 · 통한 · 비탄 ·
통곡 · 통탄 · 절규 · 울부짖음 · 지껄임 · 멍한 지껄임 · 공허한 지껄임이다. 이것을 비탄이라 한다.
22)S.M. omit yo.
81-(2). tattha katamaṃ dukkhaṃ?
yaṃ kāyikaṃ asātaṃ kāyikaṃ dukkhaṃ kāyasamphassajaṃ asātaṃ dukkhaṃ vedayitaṃ,
kāyasamphassajā asātā dukkhā vedanā — idaṃ vuccati dukkhaṃ.
tattha katamaṃ domanassaṃ?
yaṃ cetasikaṃ asātaṃ cetasikaṃ dukkhaṃ, cetosamphassajaṃ asātaṃ vedayitaṃ,
cetosamphassajā asātā dukkhā vedanā — idaṃ vuccati domanassaṃ.
tattha katamo upāyāso?
ñātibyasanena vā phuṭṭhassa, bhogabyasanena vā phuṭṭhassa, rogabyasanena vā phuṭṭhassa,
sīlabyasanena vā phuṭṭhassa, diṭṭhibyasanena vā phuṭṭhassa,
aññataraññatarena byasanena samannāgatassa, aññataraññatarena dukkhadhammena phuṭṭhassa
āyāso upāyāso āyāsanā upāyāsanā āyāsitattaṃ upāyāsitattaṃ — ayaṃ vuccati upāyāso.
81-(2). 거기에서 고통이란 무엇인가?
몸의 불쾌함으로서 몸의 고통스러움(身苦), 몸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불쾌함으로서
고통스러움의 감수(感受), 몸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불쾌함으로서 고통스러운 느낌이다.
이것을 고통이라 한다.
거기에서 근심(憂)이란 무엇인가?
마음의 불쾌함으로서 마음의 고통(心苦), 마음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불쾌함으로서 고통스러움의
감수, 마음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불쾌함으로서 고통스러운 느낌이다. 이것을 근심이라 한다.
거기에서 번민(惱)이란 무엇인가?
친족의 불행에 연루되거나, 재산의 손실에 연루되거나, 병고에 연루되거나,
계(戒)의 훼손에 연루되거나, 견해의 훼손에 연루되거나.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불행에 따라가는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고통스러운 법에 연루되어
[처하게 되는] 오뇌, 우뇌(憂惱) · 불안 · 번뇌 · 불안에 빠짐 이것을 번민이라 한다.23)
23)본 81절의 도입부에서부터 여기까지의 내용은 SN. vol.2. p.3; MN. vol.3. pp.249,250에서 동일한 형식의 언급을 찾아 볼 수 있다. 영역 p.39 참조.
82-(1). tattha katamo appiyehi sampayogo dukkho?
idha [I.39]yassa24) te honti aniṭṭhā akantā amanāpā rūpā saddā gandhā rasā phoṭṭhabbā,
ye vā panassa te honti anatthakāmā ahitakāmā aphāsukāmā ayogakkhemakāmā,
yā tehi saddhiṃ saṅgati25) samāgamo samodhānaṃ missībhāvo —
ayaṃ vuccati appiyehi sampayogo dukkho.
tattha katamo piyehi vippayogo dukkho?
idha yassa te honti iṭṭhā kantā manāpā rūpā saddā gandhā rasā phoṭṭhabbā,
ye vā panassa te honti atthakāmā hitakāmā phāsukāmā yogakkhemakāmā mātā vā
pitā vā bhātā vā bhaginī vā mittā vā amaccā vā ñātī vā26) sālohitā vā,
yā tehi saddhiṃ asaṅgati27) asamāgamo asamodhānaṃ amissībhāvo —
ayaṃ vuccati piyehi vippayogo dukkho.
82-(1). 거기에서 사랑하지 않는 이와 만나는 고통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I.39] 어떠한 이들이 있어, 마음에 들지 않고, 원하지 않으며, 유쾌하지 않은
모습(色)・소리(聲)・냄새(香)・맛(味)・감촉(觸)을 지녔거나,
혹은 다시 어떠한 이들이 있어, 이쪽의 불이익을 원하거나, 손해를 원하거나, 어려움을 원하거나,
안온하지 않게 되기를 원하는, 바로 그들과 만나거나, 동거하거나, 엮이거나, 관계를 맺는 것,
바로 이것을 사랑하지 않는 이와 만나는 고통이라 한다.
거기에서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고통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어떠한 이들이 있어, 마음에 들고, 원하며, 유쾌하게 하게 하는
모습(色)・소리(聲)・냄새(香)・맛(味)・감촉(觸)을 지녔거나, 혹은 다시 어떠한 이들이 있어,
이쪽의 이로움을 원하고, 이익을 원하고, 즐거움을 원하고, 안온하게 되기를 원하는,
바로 그러한 이들 [즉] 어머니・아버지・형제・자매・친구・동료・친족・친척들과
헤어지거나, 동거하지 못하거나, 엮이지 못하거나,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
바로 이것을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고통이라 한다.
24)yassa, S.K.
25)M. has sandhiṃ before saṅgati.
26)S.M. omit vā.
27))M. has sandhiṃ before saṅgati.
82-(2). tattha katamaṃ yampicchaṃ na labhati tampi dukkhaṃ?
jātidhammānaṃ sattānaṃ evaṃ icchā uppajjati —
“aho vata mayaṃ na jātidhammā assāma, na ca vata no jāti āgaccheyyā”ti.
na kho panetaṃ icchāya pattabbaṃ — idampi yampicchaṃ na labhati tampi dukkhaṃ.
jarādhammānaṃ sattānaṃ ... pe ... byādhidhammānaṃ sattānaṃ... maraṇadhammānaṃ sattān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adhammānaṃ sattānaṃ evaṃ icchā uppajjati —
“aho vata mayaṃ na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adhammā assāma,
na ca vata no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āgaccheyyun”ti.
na kho panetaṃ icchāya pattabbaṃ — idampi yampicchaṃ na labhati tampi dukkhaṃ.
tattha katame saṅ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seyyathīdaṃ — rūpūpādānakkhandho, vedanupādānakkhandho
saññupādānakkhandho, saṅkhārupādānakkhandho, viññāṇupādānakkhandho —
ime vuccanti saṅ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idaṃ vuccati dukkhaṃ ariyasaccaṃ.
82-(2). 거기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란 무엇인가?
태어남의 법(法)을 지닌 뭇 삶들에게 이와 같은 욕망이 일어난다.
'아, 참으로 우리에게 태어나는 법이 없다면! 참으로 우리에게 태어남이 오지 말았으면!'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바로 이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다.
늙음의 법을 지닌 삶들에게 …내지… 병듦의 법을 지닌 삶들에게 …내 지….
죽음의 법을 지닌 삶들에게 …내지∙∙∙
슬픔(愁)・비탄(悲)・고통(苦)・근심(憂)・번민(惱)의 법을 지닌 삶들에게 이와 같은 욕망이 일어난다.
'아, 참으로 우리에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의 법이 없다면!
참으로 우리에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의 법이 오지 말았으면!'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바로 이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다.
거기에서 요컨대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五取蘊)은 고통(苦)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물질적 요소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色取蘊)・감수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受取蘊)・
지각 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想取蘊)・형성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行取蘊)・
식별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識取蘊)이 있는 바,
이들을 일컬어 요컨대 다섯 집착에 의한 온은 고통이라 한다.
이것을 고통에 관한 거룩한 진리(苦聖)라 한다. 28)
28) 본 소절과 관련하여 MN. vol.3. p.250에서 동일한 형식의 언급을 찾아 볼 수 있다. 영역 p.40 참조.
83-(1). tattha katamaṃ dukkhasamudayaṃ ariyasaccaṃ?
yāyaṃ taṇhā ponobhavikā29) nandirāgasahagatā tatratatrābhinandinī,
seyyathidaṃ — 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I.40]vataṇhā,
sā kho panesā taṇhā kattha uppajjamānā uppajjati,
kattha nivisamānā nivisati?
yaṃ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etthesā taṇhā uppajjamānā uppajjati, ettha nivisamānā nivisati.
kiñca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cakkhu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etthesā taṇhā uppajjamānā uppajjati, ettha nivisamānā nivisati.
sotaṃ loke ... pe ... ghānaṃ loke... jivhā loke... kāyo loke...
mano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etthesā taṇhā uppajjamānā uppajjati, ettha nivisamānā nivisati.
83-(1). 거기에서 고통의 일어남에 관한 거룩한 진리(苦集聖諦)란 무엇인가?
이것은 후생을 있게 하는 갈애로서, 기쁨과 탐냄과 더불어 여기저기에서 즐거워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欲愛), 있음에 대한 갈애(有愛).
있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 有愛)이다. [I.40]
그런데 그것 즉 이와 같은 갈애는 어디에서 생겨나려 하거나 생기는가?30)
어디에서 머물려 하거나 머무는가?
세간에서의 사랑스러운 모습(色)과 즐겁게 하는 모습,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가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사랑스러운 모습과 즐겁게 하는 모습이란 무엇인가?
세간에서의 눈(眼)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 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귀는 세간에서의 코는, 세간에서의 혀는, 세간에서의 몸은,
세간에서의 마음(意)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가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29)ponobbhavikā, M.
30)여기에서 '생기다(uppajjamānā)'는 현재분사 주격이고 '생기다(uppajjati)'는 현재형이다. 일반적으로 현재분사는 주어의 동시동작을 나타내지만, 여기에서와 같이 '가까운 미래' · '바램' · '의지' · '행위자' 등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83-(2). rūpā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etthesā taṇhā uppajjamānā uppajjati,
ettha nivisamānā nivisati.
saddā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 pe ... dhammā loke...
cakkhuviññāṇaṃ loke ... pe ... manoviññāṇaṃ loke...
cakkhusamphasso loke ... pe ... manosamphasso loke...
cakkhusamphassajā vedanā loke ... pe ... manosamphassajā vedanā loke...
rūpasaññā loke ... pe ... dhammasaññā loke...
rūpasañcetanā loke ... pe ... dhammasañcetanā loke...
rūpataṇhā loke ... pe ... dhammataṇhā loke...
rūpavitakko loke ... pe ... dhammavitakko loke...
rūpavicāro loke ... pe ... dhammavicāro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etthesā taṇhā uppajjamānā uppajjati, ettha nivisamānā nivisati.
idaṃ vuccati dukkhasamudayaṃ ariyasaccaṃ.
83-(2). 세간에서의 시각대상(諸色)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가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소리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내지…
세간에서의 마음현상(法)은…내지…
세간에서의 눈에 의한 식별(眼識)은…내지…세간에서의 마음에 의한 식별(意識)은…내지…
세간에서의 눈에 의한 닿음(眼觸)은…내지…세간에서의 마음에 의한 닿음(意觸)은…내지…
세간에서의 눈의 닿음(眼觸)에서 생겨난 느낌(受)은…내지…
세간에서의 마음의 닿음(意觸)에서 생겨난 느낌은…내지…
세간에서의 시각대상(色)에 의한 지각(想)은…내지…
세간에서의 마음현상(法)에 의한 지각(想)은…내지…
세간에서의 시각대상에 의한 의도(思)는…내지…세간에서의 마음현상(法)에 의한 의도는…내지…
세간에서의 시각대상에 대한 갈애는…내지…세간에서의 마음현상에 대한 갈애는…내지…
세간에서의 시각대상에 의한 거친 사유(尋)는…내지…
세간에서의 마음현상에 의한 거친 사유는…내지…
세간에서의 시각대상에 의한 미세한 사유(伺)는…내지…
세간에서의 마음현상에 의한 미세한 사유(伺)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가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이것을 고통의 일어남에 관한 거룩한 진리(苦集聖諦)라 한다.
84. tattha katamaṃ dukkhanirodhaṃ ariyasaccaṃ?
yo tassāyeva taṇhāya asesavirāganirodho cāgo paṭinissaggo mutti anālayo,
sā kho panesā taṇhā kattha pahīyamānā pahīyati,
kattha nirujjhamānā nirujjhati?
yaṃ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etthesā taṇhā pahīyamānā pahīyati, ettha nirujjhamānā nirujjhati.
kiñca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cakkhu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etthesā taṇhā pahīyamānā pahīyati, ettha nirujjhamānā nirujjhati
... pe ... dhammavicāro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etthesā taṇhā pahīyamānā pahīyati,
ettha nirujjhamānā nirujjhati. idaṃ vuccati dukkhanirodhaṃ ariyasaccaṃ.
84. 거기에서 고통의 소멸에 관한 거룩한 진리(苦滅聖諦)란 무엇인가?
이러한 갈애로부터의 남김 없는 탐냄의 떠남(離貪) · 소멸 · 포기 · 버림 · 해탈 · 무집착이다.31)
그런데 다시 그것. 즉 이러한 갈애는 어디에서 끊어지려 하거나 끊기는가?
어디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하는가?
세간에서의 사랑스러운 모습과 즐겁게 하는 모습,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사랑스러운 모습과 즐겁게 하는 모습이란 무엇인가?
세간에서의 눈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내지…
세간에서의 마음현상(法)에 의한 미세한 사유(伺)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이것을 고통의 소멸에 관한 거룩한 진리라 한다.
31) 본 구절과 관련하여 MN. vol.3. p.251에서 동일한 형식의 언급을 찾아 볼 수 있다. 영역 p.41 참조.
85-(1). tattha katam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ṃ?
ayamev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eyyathidaṃ — 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I. 41]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i.
tattha katamā sammādiṭṭhi?
dukkhe ñāṇaṃ, dukkhasamudaye ñāṇaṃ, dukkhanirodhe ñāṇaṃ,
dukkhanirodhagāminiyā paṭipadāya ñāṇaṃ — ayaṃ vuccati sammādiṭṭhi.
tattha katamo sammāsaṅkappo?
nekkhammasaṅkappo, abyāpādasaṅkappo, avihiṃsāsaṅkappo — ayaṃ vuccati sammāsaṅkappo.
tattha katamā sammāvācā?
musāvādā veramaṇī, pisuṇāya vācāya veramaṇī, pharusāya vācāya veramaṇī,
samphappalāpā veramaṇī — ayaṃ vuccati sammāvācā.
tattha katamo sammākammanto?
pāṇātipātā veramaṇī, adinnādānā veramaṇī, kāmesumicchācārā veramaṇī —
ayaṃ vuccati sammākammanto.
tattha katamo sammāājīvo?
idha ariyasāvako micchāājīvaṃ pahāya sammāājīvena jīvitaṃ kappeti — ayaṃ vuccati sammāājīvo.
85-(1). 거기에서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거룩한 진리(順苦滅道聖諦)란 무엇인가?
이것은 곧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바른길(八支聖道)로서,
즉 바른 견해(正見) · 바른 사유(正思惟) · 바른 말(正語) · [I.41]바른 행위(正業) ·
바른 삶(正命) · 바른 정진(正精進) · 바른 마음 지킴(正念) · 바른 삼매(正定)이다.
거기에서 바른 견해(正見)란 무엇인가?
고통(苦)에 대한 지혜 · 고통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 고통의 소멸에 대한 지혜 ·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지혜이다. 이것을 바른 견해라 한다.
거기에서 바른 사유(正思惟)란 무엇인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바램으로부터의] 떠남에 대한 사유. 성내지 않음에 대한 사유.
해치지 않음에 대한 사유이다. 이것을 바른 사유라 한다.
거기에서 바른 말(正語)은 무엇인가?
거짓말로부터 떠나는 것. 이간하는 말로부터 떠나는 것. 거친 말로부터 떠나는 것.
꾸며대는 말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이것을 바른 말이라 한다.
거기에서 바른 행위(正業)란 무엇인가?
살생으로부터 떠나는 것 · 주지 않은 것을 취하는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 ·
삿된 음란한 행위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이것을 바른 행위라 한다.
거기에서 바른 삶(正命)이란 무엇인가?
이 [가르침] 안에 한 거룩한 성문이 있어, 삿된 삶을 버리고 바른 삶에 의해 삶을 영위한다.
이것을 바른 삶이라 한다.
85-(2). tattha katamo sammāvāyāmo?
idha bhikkhu anuppannānaṃ pāpakānaṃ akusalānaṃ dhammānaṃ anuppādāya
chandaṃ janeti vāyamati vīriyaṃ ārabhati cittaṃ paggaṇhāti padahati,
uppannānaṃ pāpakānaṃ akusalānaṃ dhammānaṃ pahānāya ... pe ...
anuppannānaṃ kusalānaṃ dhammānaṃ uppādāya ... pe ...
uppannānaṃ kusalānaṃ dhammānaṃ ṭhitiyā asammosāya bhiyyobhāvāya vepullāya
bhāvanāya pāripūriyā chandaṃ janeti vāyamati vīriyaṃ ārabhati cittaṃ paggaṇhāti padahati —
ayaṃ vuccati sammāvāyāmo.
tattha katamā sammāsati?
idha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ññ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vedanāsu ... pe ... citte ... pe ...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ññ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
ayaṃ vuccati sammāsati.
85-(2). 거기에서 바른 정진(正精進)이란 무엇인가?
이 [가르침] 안에 한 비구가 있어. 아직 생겨나지 않은 삿되고 선하지 않는 법(法)을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 하며 정진을 행한다. 마음을 잡아 힘쓴다.
이미 생겨난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을 끊기 위하여…내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한 법을 생겨나게 하기 위하여…내지…
이미 생겨난 선한 법을 바로 세우고, 혼란스럽지 않게 하며, 증장하고, 풍성케 하며, 닦고,
원만하게 하기 위하여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하며 정진을 행한다. 마음을 잡아 힘쓴다.
이것을 바른 정진이라 한다.
거기에서 바른 마음지킴 (正念)이란 무엇인가?
이 [가르침] 안에 한 비구가 있어,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正知)과 마음지킴(念)32)을 지닌 [비구는].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식별할 수 있다.33)
느낌(受)에 대해, 마음(心)에 대해, 법에 대해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을 지닌 [비구는],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식별할 수 있다.
이것을 바른 마음지킴이라 한다.
32)여기에서 'ātāpī(열렬한)' · 'sampajāno(알아차림 智)' · 'satimā(마음지킴 念)' 등은 모두 남성 주격으로 bhikkhu(비구)와 격의 일치를 이룬다. 따라서 비구를 부연하는 말이 된다.
33)본 문장에서 '식별할 수 있다'의 원어로 제시된 'viññeyya'는 동사원형 'vi√jñā'에 기원을 둔 말로 서, '식별하다' · '의식하다'라고 하는 기본적 의미를 지닌다. 문법적으로 볼 때, 'viññeyya'에서 'yya'라는 어미는 원망형 3인칭 단수이든가, 아니면 절대분사 혹은 미래수동분사의 문법형식 중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미래수동분사로 보자면 이와 상관관계에 있는 '탐욕과 근심(abhijjhādomanassaṃ)'이라는 말과 격(case)이 일치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즉 'abhijjhādomanassaṃ'의 'aṃ'은 목적격을 나타내는 말로서 'yya' 어간의 미래수동분사와 격이 일치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viññeyya'의 용법은 원망형이거나 절대분사라고 두 가지로 압축되는데, 여기에서 본 연구자는 전자를 채택하여 '을 식별할 수 있다' 혹은 '을 식별할 것이다'로 번역한다.
한편 본 문장의 원형적 전거라 할 수 있는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DN. vol.2. p.290; MN. vol.3. p.252; SN. vol.5. p.173) 등에는 이 대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즉 "idha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본 텍스트에서 'viññeyya(식별하다)'로 나온 부분이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등에는 'vineyya'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vineyya'는 동사원형 'vi√nī'에 기원을 둔 말로서, '제거하다' · '벗어나다' · '포기하다'라고 하는 의미를 지녀 'vinneyya'와는 전혀 다른 말이다. 따라서 이 문장에 대한 번역도 그것을 원망형으로 볼 경우 "여기에 한 비구가 있어,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을 지닌 [비구는],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날 수 있다…"이 되거나, 절대분사로 볼 경우 "여기에 한 비구가 있어,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을 지니고서 머문다).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가 되어, 본 텍스트의 내용과 완전히 달라진다.
PTS 교열본(vol.1. p.42)에 따르면, 본 텍스트의 판본대조에 사용된 Sinhalese本이라든가, Burmese본, Siamese본 등에서도 이들이 모두 'viññeyya'로 표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본 텍스트의 II.빤냐박가 8. 마음지킴에 관한 논의에서도 동일하게 'viññeyya(식별하다)'가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를 단순한 오식(誤植)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본 연구자가 파악하는 바, 'viññeyya'는 'sati'와 밀접한 관련성을 나타내는 또 다른 용어인 'sampajāna(正知 알아차림)'와 동일한 어근 '√jñā'를 공유한다. 따라서 '사띠'라는 말과의 연관선상에서 볼 때, 'viññeyya'라는 표현이 이 구절에 더욱 적합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 등에 표기된 'vineyya(벗어나다)'는 본 텍스트의 성립 이전에 사용된 것인 까닭에 그것을 함부로 취급할 수 없다는 난점이 있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 사용된 'vinneyya'라는 표현이 어떠한 배경에서 이와 같이 사용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남겨두기로 한다.
한편 본 텍스트의 주석서인 PsA(p.176)에서는 이 대목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이, "거기에서 벗어난다는 것은…(tattha vineyyāti…)"이라고 하는 형식으로, 'viññeyya(식별할 수 있다)'를 'vi√nī'에 기원을 둔 'vineyya(벗어날 수 있다)'로 대체하여,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 등에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환원시키고 있다. 또한 영역(p.42)에서도 "…having put away covetouness and grief for the world"로 번역하여 이를 'vineyya(벗어날 수 있다)'의 오식(誤植)으로 간주하고 있다. 반면에 남전장40(p.68)에서는 이 용어를 미래수동분사로 보아, "…貪と憂を識ゐへし…"로 번역하고 있어 흥미롭다.
85-(3). tattha katamo sammāsamādhi?
idha bhikkhu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avitakkaṃ avicāraṃ [I.42]samādhijaṃ pītisukhaṃ du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pītiyā ca virāgā upekkhako ca viharati sato ca sampajāno sukhañca kāyena paṭisaṃvedeti,
yaṃ taṃ ariyā ācikkhanti — “upekkhako satimā sukhavihārī”ti ta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
adukkhamasukhaṃ upekkhāsatipārisuddhiṃ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ayaṃ vuccati sammāsamādhi.
idaṃ vuccati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ṃ.
taṃ ñātaṭṭhena ñāṇaṃ, pajānanaṭṭhena paññā.
tena vuccati — “idaṃ dukkhaṃ ariyasaccaṃ, idaṃ dukkhasamudayaṃ ariyasaccaṃ,
idaṃ dukkhanirodhaṃ ariyasaccaṃ, id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n”ti
sotāvadhānaṃ, taṃpajānanā paññā sutamaye ñāṇaṃ.
evaṃ sotāvadhāne paññā sutamaye ñāṇaṃ.
85-(3). 거기에서 바른 삼매(正定)란 무엇인가?
이 [가르침] 안에 한 비구가 있어,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尋)와 미세한 사유(伺)를 지닌, 분리(離)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첫 번째 선정(初禪)을 얻어 머문다.
거친 사유(尋)와 미세한 사유(伺)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尋)와 미세한 사유(伺)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I.42]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두 번째 선정 (禪)을 얻어 머문다.
기쁨을 떠나 평정(捨)이 머무는,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34)
'평정과 마음지킴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세 번째 선정(第三禪)을 얻어 머문다.
즐거움이 끊어지고 고통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고통스럽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지킴의 청정을 지닌, 네 번째 선정(第四禪)을 얻어 머문다.
이것을 바른 삼매라 한다. 이것을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거룩한 길의 진리라 한다.
그와 같이 알고 있다(所知)는 의미에서 지혜(智)이며, 알아차린다(知)는 의미에서 혜(慧)이다.
그러므로 말한다. '이것은 고통에 관한 거룩한 진리이며,
이것은 고통의 일어남에 관한 거룩한 진리이며, 이것은 고통의 소멸에 관한 거룩한 진리이며,
이것은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거룩한 진리이다'고 새겨들은 바,
그것에 관해 알아차리는 혜로서 들음을 통해 이루어진 지혜가 있다고.
이와 같이 새겨듣는 데서의 혜로서 들음을 통해 이루어진 지혜가 있다.
34) 여기에서 관계사 'yan'과 지시사 taṃ은 뒤에 나오는 인용구를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따라서 'yan taṃ ariyā ācikkhanti'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로 그것'으로 번역될 수 있겠다.
sutamayañāṇaniddeso paṭham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