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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봄, 일군의 측량사들이 동부 카자흐스탄을 훑으러 출발했습니다. 투르크십의 노선을 확정하기 위한 측량조사였죠. 이는 향후 두 가지 측면에서 영향을 끼칩니다. 하나는 전에 보았듯이 이 측량 결과는 노선 계획 상에 반영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이 조사가 혁명 전에 만들어진 전문가 그룹과 혁명 후의 젊고 열정적인 그룹이 맞붙게 될 싸움의 시초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더 넓은 맥락에서 보았을 때, 산업분야가 새로이 필요할 관리자들은 어떠한 사람이어야하는가라는 중대한 문제와도 얽혀 있었죠.
제1차 5개년 계획의 많은 스트로이키는 외국 전문가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마그니토고르스크에 온 독일인 기술자나 미국인 기술자들이 그들이었죠. 그러나 투르크십은 외국인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카스피 횡단철도를 건설한 경험이 있었고, 그 때의 전문가들은 여전히 국가에 남아 있었습니다. 특히 나르콤푸치에서 이 사업을 담당할 많은 사람들은, 이전의 세미레치예 철도 등을 건설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죠. 전쟁과 혁명으로 많이 손상되긴 했으나 이들은 여전히 견고한 그룹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건설 현장의 관리자들, ~~부장 ~~과장 등의 직책은 이런 사람들이 맡았고, 거의 대부분은 당원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그 대부분은 당의 정책과 방법론에 적대적이었죠. 체제는 어쩔 수 없이 이들을 쓰면서 "부르주아 전문가들"(스페치)라고 경멸조로 불렀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데니킨이나 콜차크와 같은 백군 지휘관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로, 평당원이나 노동자들을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체제는 너무나 많은 파괴를 겪었고 이런 고급인력들은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이들은 충성스러운 기술관료들을 체제가 효과적으로 생산해내기 전까지는 계속 관용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도부는 그러나 이 관용을 더 확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로서 모든 단계의 당원들은 이 전문가들의 활동에 불편한 감정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당에서는 군의 정치장교 시스템을 변형해서 산업계에 적용했습니다. "붉은 감독관"이라고 알려진 이들이 이 전문가들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공식적 권위를 받았죠. 이들은 정치적으로는 매우 충성스러웠으나 기술적으로는 무지했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목표 맞추기에 눈이 멀어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적 관리체제'를 도입하거나, 혹은 부르주아 전문가들에게 그대로 농락당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정권은 여기에 노동조합과 당을 추가합니다. 붉은 감독관들이 너무 갈궈대면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도록 노동조합이 목소리를 냈고 공장의 정치적 의제를 잘 수행하는지 보도록 당이 따라다녔습니다. 교통과 국방 영역에서는 특히 더 많은 주의가 필요했기에 여기에 비밀경찰까지 추가되었습니다. 이는 네프 시기의 유산이었고, 투르크십 건설 프로젝트는 비밀경찰 제도까지 그대로 이어 받아 조직을 꾸리게 됩니다.
이런 각종 감시기구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투르크십 건설에서 전문가들은 나름 꿀을 빨 수 있었습니다. 나르콤푸치의 중앙건설부장이자 투르크십 사업 담당자인 보리소프 자신도 그 전문가였기 때문이죠. 그는 내전 이후 파괴된 철도 네트워크를 복구시키는 데 필요한 전문가들의 절대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자신의 우산 아래 들어온 전문가들을 가급적 보호를 해주었습니다. 여기엔 백군 편에 섰던 전문가들도 포함되어 있었죠. 전문가들은 그들의 전문기술들을 이용해 많은 실용적인 제안들을 했죠. 남부 노선과 북부 노선의 건설 본부를 따로 두자는 것도 보리소프의 제안이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기술적, 재정적 문제와 자재 공급에 있어서 각자 놀게 될 것이었습니다. 또 "철도 건설에서 예외적인 경험을 갖고 있는 특히 자격 있는 엔지니어"는 각각의 NTSR(건설장, Nachal'nik Stroitel'stva)이라는 직위로 임명해줄 것을 제안했습니다. 미국의 대륙횡단철도를 연상시키는 이 작업은 비용은 늘렸을지는 몰라도 확실히 완공 시기를 앞당기는 데는 유용했습니다.
얀 루드주탁은 보리소프의 모든 제안에 동의했찌만 두 개의 완전 독립된 사업체로 투르크십을 나누는 건 솔직히 좀 무리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거기에 모스크바에서 오는 모든 재정적, 물질적 지원을 통제하는 NUPStr(건설부장, Nachal'nik Upravleniya Stroitel'stva)를 추가하여 두 NTSR을 감독하는 것으로 타협보자고 했습니다. 자본주의적 용법으로, 건설장은 이사회 회장보다는 CEO에 가까운 사람이었죠. 여기에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빌" 샤토프를 붉은 감독관으로 임명합니다.
샤토프는 극동에서 짧은 기간일지라도 열심히 일하면서 괜찮은 평판을 쌓은 사람이었죠. 극동에서의 성취로 그는 이 중요한 투르크십 사업을 맡도록 발탁되었습니다. 또 그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충실한 신봉자이기도 했습니다. 겨울궁전 급습에 참여했다는 것으로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 샤토프는 역시 전문가들과 충돌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잘 다루어왔습니다.
이것 자체에 보리소프는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기술직에 있어서 샤토프에 많은 권한을 주고 기술직 서기 위치까지 줘버리자 얀 루드주탁에게 가서 발끈해서 따졌습니다. 이거 지금 건설장들의 자율성을 침해하시는 아주 좋지 못한 행동이지 말입니다. 얀 루드주탁은 딱 잘라서 말했습니다. 이 문제에 타협은 없음. 사실 전문가들도 대부분은 좋아했습니다. 기술적으로 무지한 빨갱이 관료 나부랭이가 와서 우리 하는 일이 뭔지나 알겠음? 보고서 올리고 도장만 받으면 개이득 ㅇㅇㅋ 이런 태도였죠.
실제로 샤토프가 직책을 받았을 때, 여전히 페렐만과 같은 전문가 그룹의 거물들은 다루기 난감했죠. 그는 1916년 톰스크기술협회를 졸업하고 카자흐 북부 철도 건설을 매우 어린 나이에 지휘했습니다. 보리소프의 후배이기도 했죠. 기술적인 면에서 단연 군계일학이었지만 그의 가족 배경은 볼셰비키 입장에서는 참 보기 불편했습니다. 그는 유대교를 포기하면서까지 제국군 장군의 딸과 결혼했죠. 거기에 그는 실제로 백군측에 붙어서 일을 한 전력도 있었습니다. 사적으로 그가 반볼셰비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었죠.
샤토프는 '붉은 프락티키'(실무주의자)를 이용했습니다. 이들은 공식적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어찌어찌 현장에서 경험을 쌓아온 자들이었습니다. 이바노프 같은 사람이 그랬죠. 기관차 운전수로 시작해 정치장교까지 맡고 나중에 모스크바로 올라가서 교통 관련 직책도 맡아본 그는 당성이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전문가들을 좋은 기술직들 이상으로 절대 보지 않았고, 정치적인 면에서는 그들의 견고함이 떨어진다고 무시했습니다.
샤토프의 주 업무는 건설현장에 가서 현장감독을 하는 게 아니라 계약을 따내고 모스크바와 협상하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페렐만 같은 실무자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샤토프는 이바노프, 솔킨 등과 사람들을 자신의 눈과 귀로 배치하여 현장을 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최고책임자가 현장에 너무 안 나와버릇 하니 전문가 그룹에 대한 통제력은 그다지 높지 못했습니다. 랍크린이 노동환경 조사를 진행한 뒤에 알마아타로 아예 이사를 가긴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죠.
그러다보니 결국 실제 조직 안은 엔지니어와 전문가들의 입김이 거의 다 반영되었다고 봐도 될 정도였습니다. 체제는 이에 굉장히 불쾌해했으나 대안이 없었습니다. 북부와 남부의 건설장들은 각각 인사, 예산, 설계를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독자적 권리를 지녔습니다. 체제에게 이는 마치 봉건제와 같이 느껴졌죠. 안 그래도 소련 관료제 특유의 번잡함, 겹치는 관할권, 부서 이기주의 등등으로 골머리 앓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정말 골때리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히드라와 같은 조직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일단 기본적인 조직 형태는 군 조직처럼 철저한 명령체계의 사슬로 이루어지긴 했습니다. 건설장은 일반 정책 같이 굵직굵직한 일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건설지부장(section chief)들은 각각 독립된 권한을 갖고 감독관, 건설전문가, 관리인 등의 멀티플레이를 해야했죠. 건설지부장들은 대체로 경험 많은 혁명 전 부르주아 전문가들이었고, 이들은 '프로랍'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명령 수행을 맡겼습니다. 이들 프로랍은 10~20km 구간을 맡았고, 노동자들을 모으고 건설자재를 제공하고 식량과 주거 공급을 맡았습니다. 이들이 투르크십의 실질적 등뼈였죠. 보리소프는 이들을 70명 가량 고용하기를 원했습니다만은, 인력이 너무 부족했기에 원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람들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1928년 남부에서는 23명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1929년에 가니 19명으로 줄었습니다. 이런 인력부족 상황은 역시나 불건전!한 사람들을 고용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죠. 거기에 안 그래도 구간 때문에 골치아파 죽겠는데 여기에 회계, 생산, 보급을 맡는 각 기능별 부서들도 있어서 중복이 쩔어줬죠. 주거 사업 하나를 놓고도 각 부서끼리 따로 놀고 그랬습니다. 이런 행정 상의 혼선과 권한 문제로 실제 계획이 수행되지도 못하거나 매우 열악하게 수행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또 "시스템"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때도 있던 이런 관리조직의 구성은 혁명 전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습니다. 혁명 전의 철도 건설은, 매우 부패해 있고 가혹한 노동환경을 제공했지만 그럭저럭 몇몇 분들이 좋아하시는 높은 생산성으로 효율적으로 일을 수행했죠. 확실히 당시 소련 체제보다는 효율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소련 산업계에서 명백한 터부였습니다. "자본주의적"이었으니까요. 따라서 실제 전문가들은, 이런 급변한 작업환경 속에서 잘 적응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이 쌓아온 실무경험이란 것은 다 느슨한 하청업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하던 방식에 적합한 것이었지, 지금의 관료화된 명령 체계는 잘 맞지 않았죠. 제대로 관료화 되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따라서 사실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이 자신들 전문영역에서는 그럭저럭 일을 잘 수행해줬지만, 그들이 받은 권한에 비하면 부족했습니다. 많은 실수들이 있었고 실제 감독과 지시 영역에서는 그들이 미숙했음이 드러났죠. 그러나 이 전문가들이 갖는 서로 간의 강한 연대의식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소련에서 거의 없던 대졸자들로 혁명 전부터 다들 통할 수 있는 처지였고, 종종 자신의 지위를 이용한 특권을 거리낌 없이 사용했죠. 엘리트 의식이 이를 정당화시켰으며 그 엘리트 의식은 매우 견고했습니다. 어떤 경우 한 건설지부장은 현장에 가기보다 문을 닫고 쇼펜하우어를 읽는 걸 더 선호했습니다. 이런 행동들은 다른 하위그룹의 불만을 사곤 했죠. 그들은 이를 "카스트의식"이라고 부르며 경멸했습니다. 체제는 역시 이 또한 우려했습니다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봉급에서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전문기술이 없는 당원 기술자들은 한 달 210 루블을 받았습니다. 비당원 엔지니어들과 비교해볼까요? 건설장은 750을, 건설지부장은 455에서 525를, 부장들은 325에서 500을 받았습니다. 노동자들은 72를 받았죠. 이런 고용정책은 곧바로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특히, 북부 노선과 관할구역이 겹치는 시베리아에서 반발이 왔죠. 에이헤는 니들 봉급이 지금 극단적으로 높다면서 쿠사리를 멕였습니다만, 샤토프는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드네프르 댐에서 자기네 기술자들을 더 높은 봉급으로 유인해서 빼오는 일로 그 역시 짜증나 있었거든요. 유인책이 효과를 발휘하긴 했는지 기술자들은 자기의 인맥을 활용해서 친구들을 불러모았고, 인사행정을 맡은 것도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에 부족하나마 지도부는 전문가 그룹이 구성하게 되었죠. 그러나 이런 일들 하나하나가 당원들이나 콤소몰 회원에게는 불만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의 체제에 대한 태도는 불만의 온상이었죠. 몇몇 전문가들 중에는 물론 붉은 군대 편에 섰던 자들도 있었지만, 역시 대부분은 체제를 별로 안 좋아했습니다. 북부건설부장인 티헤예프는 애초부터 지주였고, 백군의 편에 써서 싸우다 적군에 의해 아내를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체제를 사적으로 극혐하였고 오죽했으면 OGPU 요원들을 "경찰관들"이라고 부르고 당원들을 "동지"가 아닌 "미스터"라고 불렀겠습니까. 심지어 소련의 키릴문자 철자법 개혁도 수용하지 않는 소소한 저항을 하기도 했죠. 당연히 콤소몰 회원이나 당원들은 티헤예프에게는 체제의 똘마니 정도로 보였을테고, 이들은 티헤예프가 자신들을 은연중에, 아니 대놓고 경멸적인 어조로 대한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일들 하나하나가 누적되어, 투르크십 관리자들은 죄다 탐욕스럽고 오만하고 족벌주의적이고 언젠가 반역을 저지를 것 같은 놈들이라는 이미지가 덧대어졌습니다.
왼쪽이 샤토프, 가운데는 르스쿨로프.
그러나 전문가들이 상대편이 생각했던 것처럼 악마는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이를 알았던 샤토프도 아직은 크게 걱정하진 않았습니다. 이들 부르주아 전문가들은, 다소 테크노크라틱한 지배체제를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계급갈등의 시대는 이제 ㄴㄴ 전문기술의 시대임 ㅇㅇ 이런 걸 바랐다는 것이죠. 그들에게 카자흐스탄은, 더 능력있는 사람들이 더 좋은 조건에서 훌륭한 보수를 받는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고 직업정신으로 인한 자기규율도 있었기에 어쨌든 미숙한 일이나 충돌이 있을지는 몰라도 주어진 일 하나만큼은 열심히 했죠. 그리고 카자흐스탄이라는 뭔가 이국적이고 변방의 땅에서 철도 건설의 일선에서 뛴다! 는 것은 많은 전문가들에게는 커리어를 빛내줄 왕관과도 같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좋은 보수를 받고 노동자들을 지배하기를 원해서 카자흐스탄으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직업정신과 프로페셔널리즘이 발휘될 새로운 철도를 건설하겠다는 사명감이 있었죠. 이들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 찬 공식문서에서는 이런 태도가 잘 보이진 않지만요. 체제가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이들은 "건설하러"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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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로 확보하기 전에 교통정리부터 해라 이놈들아!
지옥으로 가는 철길도 다양한 선의들로 이루어져 있군요...
낄낄~
이번화의 느낌은 '과도기' 라는 한 단어로 집약되는 느낌이네요. 새로운 시기를 만들어낸다는건 역설적으로 아직 새로운 시기가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라는 점에서라도...
물론 모든 시대는 과도기, 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ㅋ~
모든 시대는 과도기다 그러나 어떤 시대는 더 과도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