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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발에게 도움을 청함
삼상 25:1-8
1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두고 슬피 울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2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의 양 털을 깎고 있었으니
3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그는 갈렙 족속이었더라
4 다윗이 나발이 자기 양 털을 깎는다 함을 광야에서 들은지라
5 다윗이 이에 소년 열 명을 보내며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6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7 네게 양 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해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8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말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이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
삼상 25:1-8 / [사무엘 죽음] 이즈음에 사무엘이 죽었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를 라마에 있는 집에 장사하였다. 이렇게 사무엘도 죽어서 다윗의 위치가 더욱 불리하게 되자, 다윗은 아예 안전한 시내 반도로 들어가 바란 광야에 자리를 잡았다. 2) [유격 대장이 된 다윗] 당시 유다 광야의 마온 지역에는 아주 부유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마온에서 북쪽으로 이웃해 있는 갈멜에 거대한 목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3천 마리의 양 떼와 1천 마리의 염소 떼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다윗이 광야의 도둑 떼로부터 그들의 양과 염소들을 오랫동안 보호해 주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이 갈멜에 와서 양털을 깎게 되었고, 다윗도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3) 그 부자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었다. 아비가일은 슬기롭고 용모도 아름다웠으나, 그녀의 남편은 미련한데다가 욕심이 많았다. 그는 개처럼 천한 갈멜 족속의 전형적인 후손이라 늘 악한 행실과 둔한 생각뿐이었다. 4) 그의 가축을 오랫동안 잘 보호해 주었던 다윗은 목자들의 대축제인 양털 깎는 절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내 나발이 큰 잔치를 벌이며 양털을 깍는다는 소식을 광야에서 들었다. 5) 다윗은 큰 기대를 갖고 자기의 부하들 중에서 젊은이 열 사람을 뽑아 갈멜로 보내며 이렇게 지시하였다. `너희는 나발을 찾아가서 내 이름으로 그에게 안부를 묻고 6) 이같이 내 말을 전하여라. `당신과 당신의 집안에 신년 인사를 드리며, 당신의 가축도 번창하기를 빕니다. 7) 당신이 지금 일꾼들을 데리고 양털 깍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즐거운 축제를 기하여 당신에게 알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당신의 목자들이 양 떼를 몰고 다닐 때에, 내가 언제나 부하들을 시켜서 그들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갈멜 지역에서 양떼를 지키는 동안에 우리는 그들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산적 떼들을 막아 주어 그들이 양 한 마리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주었습니다. 8) 이러한 사실은 당신의 일꾼들에게 물어 보면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큰 잔치를 벌이는 이 축제기간에 당신을 방문하였으니, 내가 보낸 젊은이들을 기쁘게 맞아 주시고, 당신의 종과 같은 이 다윗을 위하여 무엇이든 음식을 좀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고 그를 왕으로 세웠던 사무엘이 죽습니다. 온 백성이 그의 죽음을 애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바란 광야로 갑니다.
사무엘의 죽음(1)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백성을 잘 돌보는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이스라엘에게 전하는 역할을 했던 사람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편에서 볼 때는 그 중요성이 훨씬 큽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이 슬퍼했던 것이고 다윗은 자기에게 기름을 부었던 사무엘이 없는 이스라엘에 머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란 광야로 내려가게 됩니다.
나발의 부요함(2-3) 유다 산지에 있는 성읍 마온에 사는 나발은 큰 부자입니다. 그는 양이 삼천 마리, 염소가 천 마리나 되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갈멜에서 양 털을 깎게 되었습니다. 양 털을 깎는다는 것은 마치 농부가 추수하는 것과 같습니다. 축제일입니다. 기쁨이 있고 웃음이 있는 날입니다. 그에게 아비가일이라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아비를 기쁘게 하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총명했으며 용모가 아름다웠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나발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부자에다가 아름다운 부인, 총명한 아내까지 얻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곧 이어 나오는 내용이 앞으로 있을 불행을 예고하는 듯합니다.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다”(3)는 설명이 붙은 나발은 그 이름도 어리석은 자라는 뜻이었습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만나 부부가 된 것이 신기합니다.
다윗의 정중함(4-8) 다윗은 나발에게 소년 열 명을 보냅니다. 그들에게 자세하게 행동해야 할 지침을 가르쳐 줍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평강을 선포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문안하게 하고 들에서 양을 칠 때에 다윗의 군사들이 나발의 소유에 손대지 않았으며 블레셋의 약탈로부터 양떼를 지켜 주었으니 좋은 날에 양식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부탁하게 합니다. 다윗이 얼마나 정중하게 부탁을 했는지 자신을 “네 아들 다윗”이라고까지 했습니다. 다윗은 은연중에 나발의 소유를 지켜주어 왕이 해야 할 일을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에 대한 겸손함도 엿보입니다. 직분이나 직함 때문에 교만하거나 함부로 하기 쉬운 언행이 없어 보입니다.
적 용 : 다윗은 점잖고 엄숙한 사람이었으며 예의 바른 사람의 모습을 보입니다. 교회에서 직장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지켜야 할 예의에 대하여 나누어 보십시오.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굶는 것입니다. 선식을 하거나 채식으로 바꾸거나 혹은 다른 체질로 바꾸기 위해서 기존체질의 묵은 것을 다 벗겨내야 합니다. 시골에선 양계장의 폐계를 아주 싸게 구입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모이를 주는 것이 아니라 3-4일을 꼬박 굶게 합니다. 항생제와 각종 사료, 꼼짝 달싹도 못한 상태에서 알만 생산하는 생산기계가 되었던 닭의 체질을 바꾸기 위해서 굶기는 것입니다. 그 후에 모이도 주고 풀어놓아 스스로 먹이를 구하게 합니다. 땅을 파고 벌레와 지렁이를 잡아먹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털이 나고 살이 붙기 시작하면서 곧 알을 낳기 시작하는데, 양계장에서 알을 더 이상 낳지 못한다고 버린 닭이 몇 년을 거뜬히 알을 낳습니다. 굶주림은 힘든 시간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살리는 고통이 있습니다.
호크마 주석
=====25:1
사무엘이 죽으매 - 사울의 추격과 다윗의 도피가 계속되는 상황 가운데서, `라마 나욧 사건'(19:18-24) 이후 중단되었던 사무엘의 기사가 나타나는데, 곧 그의 사망 소식이다. 한편 사무엘의 사망 연도는 그의 향년(享年) 83세 때인 대략 B.C. 1017년 경으로 추정된다(Leon Wood). 우리가 이같이 볼 수 있는 근거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은 때는 `미스바 전투'(7:5-11, B.C. 1055년)가 있은지 5년 후 즉 사무엘이 약 50세 때인 B.C. 1050년경이며, 따라서 사무엘의 출생 연도는 대략 B.C. 1100년 경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제 언약 백성 이스라엘의 최후의 사사요 최초의선지자인 사무엘은 자신이 하나님에 의하여 소명된 목적, 곧 신정(神政) 왕국의 건설을 준비하는 직무의 수행을 완료하고(16:13) 하나님의 마지막 부르심에 따라 세상을 하직하고 열조에게로 돌아간 것이다(창 25:8; 35:29; 49:33; 민 20:26).
온 이스라엘 무리가...애곡하며 - 사무엘의 죽음에 대한 백성들의 슬픔은 마치 아비의 죽음에 대한 자식의 슬픔과도 같았다. 즉 이스라엘 온 백성이 하나같이 애곡과 애통의 날을 보냈던 것이다. 실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슬픔은 (1) 선지자로서 영적.정치적으로 완전히 쇠퇴했던 이스라엘을 회복시켰던 사무엘의 업적(7:3-16), (2) 사사로서 청렴 결백했던 사무엘의 인품(12:1-5) 때문이었을 것이다(1:1; 7:16). 그리고 `집'은 문자적 의미의 `가옥' 그 자체라기 보다는 집(가옥)에 딸린 공지(空地) 나 정원 또는 뜰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Keil & Fay, Smith). 따라서 혹자(Klein)의 생각처럼 이를 `고향'이란 의미로까지 확대 해석할 필요가 없다. 유대 전승은 사무엘의 장지(葬地)가 미스바의 고지(高地)라고 주장하나, 지리적 여건상 타당성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사무엘의 장지를 그가 살던 집에 딸린 정원의 공지나 뜰로 이해함이 좋을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은 장사법(葬事法)은 당시 고대 중근동 지역에 흔히 있었던 관례로서, 오늘날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다윗이...바란광야로 내려가니라 - 여기서 `바란 광야'는 시나이 반도의 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서(창 21:21; 민 10;12; 12:16; 13:3, 26), 아라비아 반도의 최남단부에 있는 오늘날의 `엘-티'(El-Tih)광야이다. 그런데 최근의 학자들(Klein, Hertzberg)은 (1) `바란 광야'는 팔레스틴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윗의 행동 반경으로 보기 힘들며 (2) 또한 바로 뒤의 2절 이하에서 `마온 광야'가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바란 광야'를 `마온 광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70인역(LXX)의 독구(讀句)를 따른 주장이다. 그러나 Keil, Smith, Lange 등은 고전적 견해를 취하여 그냥 `바란 광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바란 광야'는 팔레스틴의 최남 도시 `브엘세바'와 뚜렷한 경계선 없이 인접한 광야로서, 역시 유다 광야와 경계선 없이 이어지는 광야이므로, 당시의 여건상 다윗이 이곳까지 도피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Pulpit Commentary). 사실, 당시 사울 왕을 견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인 사무엘이 죽자, 그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은 바 있는(16:12, 13) 다윗은 사울에게서 더욱 멀리 도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다윗과 그 일행이 `엔게디 황무지'를 떠나서 `바란 광야'로 내려갔다가, 자신들이 이전에 머물렀던(23:24, 25) `마온 광야'
=====25:2
마온 - `거처', `장소', `뜰'이란 뜻의 `마온'(Maon)은 `십'과 `갈멜' 부근에 있는 유다의 구릉지 성읍이다(수 15:55). 그리고 현재의 이름은 `마인'(Main)이다. 그 업이 갈멜에 있고 - 여기서 `업'(* , 마아세)은 `일하다', `만들다'의 의미가 있는 동사 `아사'(* )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따라서 여기 이 단어는 `일하는 곳', 혹은 `돈을 벌게하는 출처'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창 46:33; 전 2:4). 한편 `갈멜'(Camel)은 `마온'(Maon)의 북쪽 약 1.6km 지점으로, 이전에 사울이 아말렉 전투 후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던 곳이다(15:12). 따라서 이 마을에서는 사울이 영웅시되며, 사울의 영향력 역시 컸을 것임이 분명하다(Klein).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 - 소유주의 이름을 밝히기도 전에 이같이 재산 명세를 먼저 언급함으로써, 본서의 저자는 `나발'(3절)이라는 인물보다 그의 부유함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한편 여기의 이 가축들은 비록 욥이 소유한 재산, 곧 `양 칠천, 약대 삼천, 황소 오백, 나귀 오백'(욥 1:3)보다는 적은 숫자이나, 당시 팔레스틴의 여러 형편을 기준으로 한다면 엄청난 숫자였음이 분명하다. 아무튼 `나발'(Nabal)은 이 많은 가축들을 마온 광야에 고지대에 방목(放牧)하고 있었을 것이다.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 4절 주석 참조.
=====25:3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 여기서 `나발'(* )은 `시들다', `바보처럼 행동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나벧'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성경에서 이 단어는 `어리석은', `우매한', `괴악한'등으로 번역되었다(삼하 13:12; 시 14;1; 39:8). 그런데 이 이름은 본명(本名)이 아니라, 아마도 그의 특성으로부터 붙여진 별명(別名)일 가능성이 높다(Keil).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 `아비가일'(* )은 `기쁘게 하는 자'또는 `기쁨을 주는 자'란 뜻이다. 이 여인은 후에 자신의 남편 `나발'이 죽자, 다윗의 아내가 되어 다윗의 둘째 아들 길르압을 낳았다(삼하 3:3; 대상 3:1).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 `총명하고'(* , 토바트 세켈)는 `지혜가 뛰어난', `명철한'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는 사람에게 적용되었다(대상 22:12; 대하 30:22; 느 8:8; 시 111:10). 그리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 예파트 토에르)는 남녀를 막론하고 내면적.외면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이다(16:18; 아 4:10; 7:1,6)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 `완고하고'(* , 카쉐)는 `거칠은', `굳은', `난폭한'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특히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치 않으며, 또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는 `목이 곧은' 사람에게 적용되었다(출 33:3, 5; 34:9; 신 9:6; 삿 2:19). 그리고 `악하며'(* , 라 마알랄림)는 성질(性質 )을 가리키는 `완고하고'와는 달리, 능동적으로 악한 행위를 일삼는 것을 가리킨다.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 여기서 `갈멜 족속'(* , 켈리보)은 히브리 본문의 독법(讀法, 케티브)을 따라 해석하면, `그는(그 마음의 소욕을 따라)자기 마음대로하는 자였다'란 뜻이다(Maurer). 그리고 70인역(LXX, the Septuagint), 아랍역(the Arabic), 수리아역(the Syriac)및 요세푸스(Josephus)는 이 말을 `개'란 뜻의 `켈레브'(* )에서 파생된 말로 보고, 곧 `개 같이 야비한 자', `개처럼 성급하고 심술궂은 자'란 뜻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본 문맥상으 흐름으로 본다면, 이 말은 난외 독법(케리)을 따라 `갈렙 족속'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켈리비'(* )로 봄이 타당한 득하다(Klein, Keil, Lange, Simth, Targum, Vulgate). 왜냐하면 여기서 `그는' (* , 웨후 - 직역하면 `그리고 그는'이란 뜻)이란 말은 `나발'이란 인물의 성격 묘사를 계속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고, 그의 혈통, 조상 등 새로운 사실의 소개를 나타내고자
=====25:4
나발이...양털을 깎는다 함을 들은지라 - 본절은 왜 다윗이 자신의 수하 소년을 나발에게 보내게 되었는지를 말해 준다. 즉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양털을 깎을 때 음식을 장만하는 등, 잔치를 벌이며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었다(창 38:13, Keil). 즉 유목민(遊牧民)들에게 있어 양털을 깎는 날은 농민들의 추수의 날에 해당된다. 아무튼 이같은 관례에 따라 다윗은 자신과 부하들의 먹을 식량을 얻기 위하여 나발의 집으로 수하 소년들을 보냈던 것이다.
=====25:5
열 소년을 보내며 - 이것은 다윗이 자신과 육백명의 부하들이 먹을 많은 음식을 나발로부터 기대했음을 시사해 준다. 또한 `열명'이라는 숫자는 상대방에 대한 최고의 예의와 존경심을 상징한다(Lange, Klein).
=====25:6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 이 구절 중 `사는 자'(* , 레하이)에 대한 해석은 난제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하여 상호 다른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즉 (1) 맛소라 사본의 `레하이'를 맞는 것으로 보고, `생명' 혹은 `살아있는' 이란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Luther, Driver, Keil, Lange), (2) `레하이'를 `아하이'(* )의 오기(誤記)로 보고 `나의 형제여'로 해석하는 견해(Wellhausen, Vulgate, Klein, Hertzbe- rg)등이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1)의 견해를 택하는 학자들은 `레하이'에 대해 해석하기를, 사람에게, 현재 건강한 못브으로 보여지듯이 그 다음에 볼 때도 그러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인사의 형태라고 하였다. 그리고 (2)의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납라도 유다 지파이고 다윗도 유다 지파이므로, 다윗은 같은 지파의 나발에 대하여 `나의 형제여'라고 인사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정확한 근거가 없는 한 히브리 본문에 충실할 필요가 있으므로, (1)의 견해를 따라 `레하이'를 독특한 인사 형태의 `행운', `번영', `장수'등의 의미로 보고, 곧 `그리고 이같이 이르기를, 행운을!'이란 뜻으로 봄이 좋을 것 같다. 따라서 여기 `부하게'는 문맥상 자연스럽지 못하게 되는데, 이는 원문에 없는 말을 번역자가 삽입한 것이다. 너...네 집...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 `평강하라'(* , 솰롬)는 히브리인들의 인사말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인사를 할 경우 인사를 받는 상대에게 그 인사말과 같은 `평강'이 실제로 임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여기 `평강하라'는 말은 단순한 염원 그 이상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구약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자낳는 인사, 곧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축에게까지 `평강'을 기원하는 예절을 갖춘다. 이것은 나발로부터 필요한 식량을 얻으려 했던 다윗의 간절함과 결코 무관치 아니할 것이다(대상 12:18). 평강하라 -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인사법으로서, 본절에서 특별히 3번이나 강조된 것은 그 평화가 나발의 집안에 완전히 정착되기를 비는 다윗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대상 12;18). 다윗은 비록 현상황이 고통과 절망의 시간들이었지만, 그의 생명을 지탱시켜 주시며 원수의 잔학한 손아귀에서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러한 평강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었다(눅 10;5). 이처럼 신앙인은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환경을 초월하여 이웃에게 `평강'과 `복
=====25:7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 여기의 `양털 깎는 자들'은 양털 깎는 일을 위하여 나발에 의하여 특별히 고용된 자들일것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자들이 고용됐다는 사실은 곧 양털 깎는 특별한 축제와 잔치가 배설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4절).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 이것은 그때 다윗의 일행과 나발의 양을 치던 목자들이 모두 마온 황무지에 있었던 사실을 가리킨다(2절).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 여기서 `상치'(* , 헤클라메눔)는 `부끄럽게 하다', `수치를 주다', `괴롭게 하다'란 의미를 갖는 `칼람'(* )의 사역형이다. 따라서 여기의 `상치 아니하였고'는 무력을 사용하여 상대를 괴롭게 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삿 18:7). 나아가 이 말 속에는 나발의 양치기들이 평안히 그들의 가축을 먹일 수 있도록 돌보아 주었다는 의미도 암시되어 있다(Smith, Fay).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 나발의 양들은 마온 광야에서 방목되었지만, 그 본거지는 `갈멜'이었다(2절).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 이것은 다윗이, 마온 광야 남쪽에 사는 베드윈 족속 등과 같은 아랍 족속들의 약탈과 노략 행위로부터 나발의 목자와 양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했던 사실을 가리킨다(Keil). 다윗은 비록 사울에 의하여 쫓기는 몸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외적의 손에서 보호해야 하는 자신의 사명을 결코 망각하고 있지 않았다(23:1-5).
=====25:8
좋은 날 - 양털을 깎는 특별한 축제의 날을 가리킨다. 이때는 손님을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눠 주기도 하였었다( Lange).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 - 이것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며, 상대방에게는 존경과 헌신을 표시하기 위한 표현법이다. 즉 고대 중근동의 풍습상 연장자 또는 상급자에 대한 존경과 경의의 표시로 장자 또는 상급자에 대한 존경과 경의의 표시로 자신을 `아들'로 낮추어 부르는 일은 보편적이었다. 특히 이 말은 윗사람에게 아버지가 베푸는 것과 같은 자애로운 은혜와 사랑을 기대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한편 이와 같은 표현법은 91) 아람 왕 벤하닷에 의하여 엘리사 선지자에게(왕하 8:9), (2) 아하스 왕에 의하여 앗수르 왕 디글랏 발레셀에게(왕하 16:7) 사용되었다. 주기를 원하노라 - 다윗이 나발의 양털 깎는 날을 택하여 이같은 요청을 한 까닭은 , 이 날은 특별히 타인에게 은혜를 베푸는 날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자신의 요청에 대하여 나발이 특별히 불쾌하게 생각지 않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때 다윗은 중근동의 풍습에 따랏 자신이 나발의 양들을 지켜주었던 것에 대하여 정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한 방법을 택하지 아니하고, 양털 깍는 날을 기다렸다가 최대의 예의를 갖춰 겸손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던 것이다.
< 설 교 >
사무엘의 죽음과 아비가일의 도움
삼상 25장
오늘 말씀에서 사무엘의 죽음이 소개되기 전에 사무엘이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사무엘상 19장입니다. 19:18을 보면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에게 쫓겨 다니다가 라마에 있는 사무엘을 찾았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는 자기의 처지에 대해서 사무엘과 의논도 하고 도움을 청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물론 사무엘이 자기를 찾아온 다윗을 어떻게 도와주었는지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알 수 있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저 다윗과 함께 나욧이라는 곳으로 갔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오늘 25장에서 죽음을 소개하기 전까지는 한 번도 사무엘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사무엘도 속된 말로 이제 한물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말씀의 1절을 보십시오. 사무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슬퍼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무엘이 비록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그만큼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다윗으로서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자기의 처지에 대해서 의논도 하고 도움을 구하기도 했던 든든한 후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무엘이 죽었으니 지금도 계속해서 사울을 피해 다녀야 하는 다윗으로서는 얼마나 낙심할 일입니까? 그러기에 사무엘의 죽음은 다윗에게도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사무엘이라는 큰 버팀목을 잃은 다윗에게 또 다른 협조자가 등장합니다. 바로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입니다. 말씀을 보면 다윗은 여전히 사울의 추격을 피해서 광야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윗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22장을 보면 이런 저런 아픔을 가진 400명의 무리가 다윗을 찾아왔고 또 23장을 보면 다윗에게는 600명 이상의 무리가 함께 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비록 사울에게 쫓기는 처지였지만 그에게는 이미 많은 사람이 함께 했습니다. 그럼 이 많은 사람은 주로 한 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오늘 말씀 가운데 7절, 15-16절을 보면 이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16절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사무엘상 25:16).
이 말은 나발의 하인들이 나발의 부인 아비가일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나오는 “우리”는 나발의 하인들이고 “그들”은 다윗의 부하들입니다. 또 담이 되었다는 말은 울타리가 되어서 지켜주고 보호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나발의 하인들이 아비가일에게 다윗의 부하들을 가리켜서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들이 양을 치는 동안에 다윗의 부하들이 울타리가 되어서 자기들을 지켜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다윗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발의 하인들이 양을 치는 동안 다윗의 부하들이 잘 지켜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소년들이라고 해서 자기의 부하 10명을 나발에게 보내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다윗이 어떤 도움을 청했는지 8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사무엘상 25:8).
다윗은 나발에게 자기와 자기의 부하들을 어떻게 소개했습니까? 자기는 나발의 아들로, 자기의 부하들은 나발의 종들로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네 손에 있는 것을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다른 번역으로 보면 먹을 것을 달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무슨 말입니까? 지난날 우리가 당신의 종들과 양들을 해치지 않고 잘 보살펴주었으니 이번에는 당신이 우리를 좀 도와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나발은 이런 다윗의 부탁을 듣고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10-11절에서 나발은 먹을 것을 달라는 다윗의 부하들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가 다윗의 부하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 설사 다윗의 부하가 맞다고 해도 자기는 다윗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배은망덕 그 자체였습니다. 나발은 다윗의 은혜에 대해서 왜 이렇게 대했을까요? 나발은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25절을 보면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도 남편 나발을 가리켜서 “미련한 자”라고 했습니다.
어리석다는 말은 성경에서 가장 경멸스러운 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지혜와 거리가 멀어서 진실을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알아볼 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나발은 분명히 다윗의 부하들이 자기의 종들과 양들에게 베푼 은혜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까? 은혜를 갚는 것보다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발은 자기 욕심과 어긋나는 것이라면 아무리 큰 은혜도 무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2절을 보면 다윗이 나발에게 도움을 청한 때는 양털을 깎고 있을 때였습니다. 양을 치는 사람이 양털을 깎는 것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추수를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양털을 깎을 때는 큰 잔치를 베풀고 나그네와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시기에 나발은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다윗조차도 배척하고 박대를 했습니다.
그럼 나발에게 이런 대접을 받은 다윗은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하니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사무엘상 25:13).
400명의 군사들과 함께 배은망덕한 나발을 치러 가고자 했습니다. 실제로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다윗은 나발을 치러 갔습니다. 사울을 대하던 다윗과 나발을 대하는 다윗을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사울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사울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으로 대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도 생명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나발은 어떻게 대했습니까? 나발은 다윗이 베푼 은혜를 저버리기는 했지만 목숨을 해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22절을 보면 나발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철저하게 복수를 하려고 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나발의 배은망덕이 그만큼 감당하기 힘든 모욕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바로 이런 가운데 만난 사람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었습니다. 지금 다윗은 나발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다윗에게 나발을 죽이지 말라고 하면 자기가 먼저 죽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25-31절이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하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나발을 죽이지 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비가일은 나발이 자기 남편이기 때문에 죽이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비가일이 나발을 죽이지 말라고 한 것은 다윗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사무엘상 25:28).
아비가일은 다윗을 가리켜서 자기의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 역시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 단순히 아첨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이 지금 화를 못 이겨서 나발을 죽이면 다윗도 나발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복을 하고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왕으로 세워지게 되었을 때 아무런 흠이 없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다윗은 아비가일의 이런 말을 듣고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아마 자기의 혈기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으면 나발을 죽이기 전에 자기 길을 막는 아비가일부터 해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32절부터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은 아비가일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지금까지도 다윗은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무엘의 말을 들었고 사울의 아들과 딸이면서도 자기를 걱정한 요나단과 아비아달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비가일의 말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받아들였습니다.
분명히 처음에는 다윗도 나발을 죽이려고 하는 복수심이 강했습니다. 그만큼 자기 혈기를 앞세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으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그 뜻에 순종하게 한 사람이 바로 아비가일이었습니다.
바로 이 아비가일을 통해서 다윗은 자기의 복수심이나 자기의 혈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합당한 모습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내 기분과 내 감정에 따라 행동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다윗에게 아비가일이 있었듯이 우리 역시 서로에게 아비가일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입으로 망한 사람
이응효목사 / 삼상 25:1~22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 중의 하나를 들라면 언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세상을 지배한 사람들은 말을 지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을 성공적으로 가꾸면 원하는 열매를 무한히 맺을 수 있지만 말을 함부로 사용하면 인생에 큰 화를 당할 수 있습니다.
잠언6:2에는 우리 입의 말로 인생이 얽히기도 하고 잡히기도 한다고 하셨고,
잠언18:21절에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하여 인생의 생사화복이 우리 혀의 말에 달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 4절에는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서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라고 하여 우리의 혀는 큰 배를 움직이는 작은 키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트든지 보트든지 큰 상선이든지 모든 배의 뒤편 아래에 키가 달려 있는데, 그 키는 커다란 배에 비해 매우 작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은 키는 큰 배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키를 올바로 조종할 때 그 배는 순조롭게 앞으로 나아가지만, 잘못 조종하면 그 배는 암초에 부딪혀 바다에 침몰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혀는 작아도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혀를 잘 사용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될 수 있지만, 만일 잘못 사용하면 파멸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한 번 내뱉은 악한 말 한 마디 때문에 우정이 깨어지기도 하고, 가정이 무너지기도 하며,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기도 하고, 역사가 바뀌기도 합니다.
사실 수많은 가정이 말로 깨어지고 무너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자녀들이 부모의 말로 인하여 상처를 받고 침침하게 꺼져가고 있고, 수많은 성도들이 말로 인하여 시험에 들고, 말로 인하여 교회가 분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세상의 격언에도 웅변이 銀이라면 침묵은 金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나발은 말을 잘못해 망한 사람입니다.
1. 나발은 불량한 사람입니다.
나발이라는 사람은 17절에 불량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량하다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성질이나 행실이 좋지 못한 사람’이라고 되어있었습니다.
본문3절에는 나발에 대해 “완고하고 행실이 악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발'이라는 이름의 뜻은 '어리석음'입니다. 이름대로 나발은 어리석고 경솔한 자였습니다.
나발의 하인들도 그를 불량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17절에는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지를 알아 생각하실지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 하는지라”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감히 하인들이 주인의 부인앞에서 주인을 불량한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나발은 성질이 거칠어 대화가 안 되는 사람이요 일방적으로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꽉 막힌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의 아내조차도 그를 미련한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25절에는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께서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도 남편을 불량한 사람이요 미련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가족들과 주변사람들에게 매일 나쁜 인상을 심어주고 살아가는 나발처럼 우리들도 가족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혹시 나쁜 평가를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일주일에 한 번 만나 잠시 교제하고 헤어지는 교우들에게는 자신의 진면목을 속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참모습은 가족들이나 직장동료나 사업장에서 항상 만나는 사람들의 평가일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양처럼 점잖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는 호랑이로 변하여 욕을 하고 혈기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생활 하면서 이웃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손가락질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근무시간에 자리를 자주 비우기도 하고, 쓸데없는 농담을 하여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기도 하고, 금전거래가 좋지 않아 인심을 잃은 교인들도 있습니다.
성도들은 가정에서 인정을 받아야합니다. 성경디모데전서3:4~5절에는 가족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교회 장로나 안수집사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나발은 자기 입의 말로 스스로 망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600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했습니다. 그러자면 상당한 군비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도피 지역의 목축업자들을 보호해주며 그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발은 목축하는 사람으로 심히 많은 짐승을 가진 부자였습니다.(2절)
마침 그의 양들의 털을 깎는 날이 왔습니다.
예전에 시골에서 모내기를 하면 그 날은 동네잔치나 다름없습니다. 모를 심는 집에서 음식을 많이 장만하여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논두렁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던 기억이 납니다.
목축을 하는 사람들은 양털을 깎는 날이 되면 축제분위기입니다. 많은 돈이 들어오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푸짐한 음식을 준비하여 양털을 깎는 자들과 목자들을 먹입니다.
다윗이 이 사실을 알고 그의 부하 열 명을 보내어 나발에게 문안하고 정중하게 부하들에게 먹일 음식을 나누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나발의 목자들이 양을 칠 때 다윗의 부하들이 그들을 보호하여 주었던 것을 상기시키며 음식을 나누어 줄 것을 부탁하였던 것입니다. (5~8절)
그러자 다윗의 말을 들은 나발은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합니다.
10절과 11절 에는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처지였고, 이는 다윗의 잘못 때문이 아님을 사울의 신하들도 잘 알고 있고, 백성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발은 다윗에게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10절)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발은 다윗이 사울을 배반하여 떠났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은 다윗의 마음에 불같은 화를 일으키게 한 말이 되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사울 왕에게 충성을 다한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애매히 미움을 받아 도망 다니는 억울한 자신을 향하여 동정은 못할망정 주인을 배신한 반역자로 몰아붙일 뿐 아니라, 이새의 아들이라고 비하하여 빈정거리는 말을 하니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더구나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작자들에게 음식을 주겠느냐고 함부로 말합니다.(11절)
물론 나발은 다윗이 블레셋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처지라는 것을 알고 자기에게 유익이 안 되는 존재라고 생각하여 다윗을 우습게 여겼던 것입니다.
만일 다윗이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나발의 태도는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나발은 욕심이 많고 인색한 사람이었고,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는 기회주의자였고 사회적 약자를 우습게 보는 악한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속에서도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안에도 이러한 근성이 숨어있습니다. 나발처럼 사는 것이 당장에는 현명하고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이것이 자신을 고립시키는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발처럼 행동하거나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는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말에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은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되었습니다.
똑 같은 두 개의 꽃을 화분에 심고 키우면서 한 쪽은 “예뻐다. 잘 자라라”라고 말했고, 다른 화분의 꽃에는 “미워, 죽어라” 라고 말을 했습니다.
2주일 정도 지나 부정적인 말을 들은 꽃은 시들어 갔습니다.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습관을 분석해 보면 그 사람의 성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언어나 남을 비판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패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부정적인 말을 사용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합니다.
일본의 ‘워런 버핏’이라고 불리어지는 <다마고 보로>과자의 창업주인 <다케다>회장은 현재 일본 상장회사 100개 기업의 대주주이자 일본 제일의 투자가입니다. 그에게 어떤 기자가 “부자가 되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다케다> 회장이 어떤 재미있는 기사를 보고 실천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기자가 무엇인가 물으니 <어떤 과학자가 실험을 하였는데 한 봉투에는 웃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입김을 불어넣고 다른 한 봉투에는 화를 내면서 입김을 불어넣고 모기를 각 각 넣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웃고 감사하면서 입김을 불어넣은 봉투의 모기는 오래 살았지만 화를 내는 사람들의 입김을 불어넣은 봉투안의 모기는 넣자마자 곧 죽어버렸다는 기사였다는 것입니다.>
그 기사를 읽고 그가 생각해 낸 것은 과자를 만들 때 직원들이 과자를 향해 감사합니다! 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즉, 제품을 만드는 사람의 행복한 마음과 정성을 감사의 말로 제품 속에 넣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앞으로 재료 못지않게 제품을 만드는 사람의 행복 수준이 중요시 여기는 시대가 도래 한다고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를 연속해서 3천 번을 말하는 데에는 대략 40분이 소요됩니다.
다케다 제과에서는 1시간 동안 “감사합니다.” 라고 말한 직원들에게 급여와는 별도로 시간당 8천원의 상여금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제품이 출하될 때까지 “감사합니다.”란 말이 100만 번이나 과자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다케다>회장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판매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입니다.
그 회사에서 만든 제품이 일본제과업전체 판매의 6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하루에 3천 번씩 감사하다는 말을 외치라고 권합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표현하면 자연스레 웃는 얼굴이 되고 그러면 미래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까?
혹시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여기는 사람에게 말로 상처를 준 경험은 없습니까?
진정 성공하기 원한다면 말을 바꾸어야 합니다. 말을 점검해 보십시다.
부정적인 말을 버리고 긍정적인 말을 사용하십시다. 불신앙의 말을 버리고 믿음의 말을 사용하십시다. 비판과 비난의 말을 버리고 칭찬의 말을 사용하십시다. 불평원망의 말을 버리고 감사의 말을 사용하십시다. 저주의 말을 버리고 축복의 말을 사용하십시다. 분노와 폭언을 버리고 유순한 말을 사용하십시다.
3. 나발의 말은 다윗을 격분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발의 말을 들은 다윗은 격노합니다. 속상해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화가 치밀어 올라서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던 겁니다.
그래서 부하 4백 명에게 칼을 차고 무장을 하게 한 다음 나발이 살고 있는 곳으로 올라갑니다.
22절에는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4장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쫓는 사울을 선대하고 살려준 다윗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정상에 올라가 환호성을 지르다가 바로 절벽으로 곤두박질하는 것처럼 선한 일을 하다가도 때로는 죄로 걸려 넘어지는 것이 죄의 속성이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여 사울을 살려주고 선대한 다윗이었지만 자신을 모욕하고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는 이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서 나발뿐만 아니라,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들과 모든 소유물을 다 없애 버리려는 악한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고, 다윗답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사람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연약함을 막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행동을 막지 않으셨으면, 다윗은 먹는 양식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한 살인강도 집단의 괴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의 생애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되고, 스스로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이 되어 하나님의 종으로 신정국가를 다스려야 하는데, 이렇게 사적인 감정으로 잔인하게 일을 처리한 다윗을 어느 누가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을 통해 다윗을 막으시고, 그 입의 말로 다윗을 깨닫게 하여 끔찍한 살육을 막으신 것입니다.
뒤에 하나님께서 욕심과 악한 마음을 가지고 나발을 불어서 다윗을 격노하게 만들어 하마터면 구원역사를 그르칠 번 한 이 나발을 죽이십니다.
38절에는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입의 말로 자신이 죽은 것입니다.
자기의 것을 움켜지고 이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 나발/ 말로서 다른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고 왜곡시키는 사람 나발/ 하마터면 다윗을 잔인한 살인자로 만들 번 하였던 사람 나발/ 이 사람은 결국 하나님이 심판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나발처럼 함부로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서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말로 덕을 세우는 사람이 되어 나도 복을 받고 이웃에게 복의 근원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의 신앙과 삶
삼상 25장 1절 / 양인국목사
1. 사무엘상의 흐름으로 볼 때 25장 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무엘의 죽음에 대한 소식은 내용의 연속성과 관계 없는 내용이다. 이것은 1절의 내용이 삽입구에 속한다는 의미다. 여기 사무엘의 죽임에 대한 소식을 다른 어떤 내용보다도 우선하여 삽입구로 넣은 것은 사무엘이 이스라엘 가운데 차지하고 있던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본문의 의미를 생각하며 우리도 사무엘상의 연속적인 내용을 잠시 내려놓고 사무엘의 생애를 정리해 본다면 우리의 영적 삶에 많은 유익을 줄 것이다.
2. 사무엘상은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사무엘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의 기도 응답으로 태어난 자다. 그리고 어머니의 서원대로 사무엘은 젖을 뗀후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으로 성전에서 제사장 엘리를 도우며 살았다. 특별히 하나님은 이와 같은 환경에서 경건이 생활화 된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크고 위대한 일들을 행하셨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말씀이 희귀할 때 말씀을 주셨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모하고 있었을 때, 이스라엘을 미스바에 모이게 하여 회개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하나님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러 왔을 때 사무엘의 기도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으로부터 구해 주셨고(7장), 매년마다 이스라엘의 여러 지역을 정기적으로 순회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도록 세워주셨다(7:15-17), 특별히 하나님은 백성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왕을 세워주기를 요청했을 때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울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셨고, 그가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사무엘을 통하여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도록 말씀하심으로 사울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셨다. 이처럼 사무엘은 평생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았고 또한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았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로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인정 받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존경받는 삶을 살수 있었다(12장).
그러면 사무엘로 하여금 세상에 사는 동안 이처럼 시종여일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수 있도록 이끌어 준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그의 생애를 돌아본다면, 이 물음에 대하여 몇가지 대답을 찾을수 있을 것이다. 사무엘도 하여금 세상에 사는 동안 시종여일하게 부르심에 따라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준 것들 가운데 무엇보다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성전에서 자라며 생활화된 경건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언급한 것처럼 사무엘은 어머니의 기도 응답으로 태어난 자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서원한대로 젖을 뗀 후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으로서 성전에서 제사장 엘리를 도우며 살았다.
특별히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나가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친 후부터 항상 그를 위하여 기도했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한나의 아들에 대한 모성애는 언제나 기도로서 승화되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다음의 말씀은 이와 같은 추측을 가능하게 해 준다. “사무엘이 어렸을 때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더라 그 어미가 매년제를 드리러 그 남편과 함께 올라 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3:18,19)”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세마포 에봇을 입었다. 에봇은 대제사장이 입었던 성별된 제복으로서 흉패 밑에 입은 앞치마 같은 옷이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입은 세마포 에봇은 그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스스를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으로 의식하며 살게 했을 것이다.
어머니 한나는 매년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실로에 올라갈 때마다 사무엘을 위하여 세마포 옷을 지어 가지고 갔다. 이것은 한나가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린 후에도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합당하게 성장하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한나는 누구보다도 실로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곳이 거룩한 성소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엘리의 아들들이 불량배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그가 사무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기도하는 일이며 또한 에봇을 지어 입히는 일이었다. 그런 그의 행위는 아들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믿음의 표현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사무엘의 삶 가운데 경건이 생활화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을 위해 항상 중보기도 해 주고, 때마다 세마포 에봇을 지어 입혀 주는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고, 또한 어려서부터 성전에서 살며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특별히 사무엘은 성전에 거하며 그곳에서 기도하는 법을 배웠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법을 배웠다. 이로 인하여 그는 경건의 삶을 생활화되어 시종여일하게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 수 있었다.
사무엘로 하여금 언제나 변함없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준 것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기도였다. 사무엘은 기도야말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때에 따라 돕는 은혜를 구하도록 주신 은혜의 수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때로는 홀로 기도했고, 때로는 백성들과 함께 기도했다. 특별히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모하고 있을 때 사무엘은 그들을 하나님께 가까이 이를 수 있도록 미스바에 모이도록 하고 우상을 제해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섬길 것을 촉구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다(7:5). 그는 국가적 위기에 직면했을 때에도 기도했고(7:9), 백성들이 죄를 범했을 때에도 기도했다(8:6).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사무엘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나가 기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특별히 다음의 두 말씀을 통하여 그의 삶 가운데 기도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12:23절의 말씀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왕되심을 축복으로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이방인들을 부러워하여 그들처럼 자신들에게도 왕을 세워주기를 구함으로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 사무엘에 이스라엘에게 한 말이다. 그때, 사무엘은 그들이 범한 죄를 책망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비록 이스라엘이 그릇행하고 있을지라도 자신이 그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 주심으로 그들에게 회복의 기회를 주실 것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사무엘에게 이와 같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날 때마다 그는 하나님께 나가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말씀은 7:8절의 말씀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이 말씀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을 때, 이스라엘이 사무엘에게 가서 자신들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는 요청이다. 이스라엘이 사무엘에게 이렇게 부탁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또한 사무엘이 기도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사무엘은 자신도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이스라엘도 그가 기도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기도야말로 때에 따라 돕는 은혜를 구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도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와 같은 믿음은 그로 하여금 환경을 초월하여 언제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도록 이끌어 주었다.
사무엘로 하여금 환경을 초월하여 시종여일하게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도록 이끌어 준 것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인도의 말씀이었다.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자랐다. 그래서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했을 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말씀해 주신다”는 것을 교훈 받는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실지라도 그 말씀을 들을 수 없다면 말씀해 주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언제나 기도해야 할 것들 가운데 하나는 주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 주심으로 주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 될 것이다. 언급한 것처럼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았다. 그래서 이스라엘 가운데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말씀이 희귀한 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말씀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말씀은 그 자체가 기업이 되고 삶의 안전에 대한 보장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듣는 사람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도 복을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공동체가 문제에 직면에 직면할 때마다 그는 하나님께 나가 묻고 그 말씀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이 바로 부르심에 응답하며 사는 삶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았기 때문에 환경을 초월하여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무엘은 경건이 생활화 된 자이고, 기도가 생활화 된 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자였다. 이런 것들이 생활화된 사무엘은 시종여일하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삶을 살수 있었고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살아야 할 거룩한 삶을 살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런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크고 위대한 일들을 행하셨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영적 부흥을 허락해 주셨고,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으로부터 구원해 주셨고, 또한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합당한 자를 왕으로 세워주셨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섰을 때 본인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와 더 나아가서는 나라가 영적으로 회복 되고 평강을 누릴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 시대에 영적 부흥과 샬롬을 위하여 요청되는 것은 사무엘처럼 신앙과 삶이 준비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삶을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하나님은 경건과 기도 그리고 말씀을 듣는 것이 생활화 된 사람을 통하여 그의 시대에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신다는 것이다.
나발이라는 사람
삼상 25장 1~13절 / 한대근목사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발'은 마온에서 양과 염소 4천을 거느리고 사는 큰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나발'은 망명생활에 지친 다윗 일행이 도움을 요청하자 떠돌이 건달 취급하며 쫓아보냄으로 다윗의 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 덕분에 다윗의 공격을 모면하기는 했지만, 열흘 후에 '나발'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몸이 굳어 죽고 말았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출20:17)"는 것입니다. 이 계명은 행동이 아닌 마음가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탐욕은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의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고 가르치셨고, 바울 사도도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엡5:3)"고 무섭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탐욕은 사람을 어리석게 만듭니다.
'나발'은 완고하고 행사가 악했습니다(3절). '나발'이라는 이름은 '미련하다' '어리석다'는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는 '사회적 지탄을 받는 사람에게 붙여지는 별칭'으로 통용되는 이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발'은 부자였지만, 사회적으로는 지탄을 받는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나발'은 양과 염소를 4천 마리나 거느린 목축업자였습니다. 재산의 정도로만 보면 분명히 그는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사람들로부터 '나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지탄을 대상이 되었습니다. '나발'은 자신 외에 다른 것을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탐욕입니다. '나발'은 다윗이 위급한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했을 때, 도움을 주기는커녕 다윗을 불량배 취급하며 쫓아냈습니다. 이처럼 탐욕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것 외에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탐욕이란 더 많이 갖고 싶은 욕망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무엇이나 자기 손에 있는 것을 자기 하나만을 위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탐욕에 빠지면 더 나은 축복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으로부터 지탄을 받는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탐욕은 은혜를 망각하게 만듭니다.
다윗이 나발에게 먹을 것을 청한 것은 들에서 나발의 목자들과 양들을 지켜준 대가로 구한 것이었습니다(7,8,15,16절). 그런데 '나발'은 다윗을 무시하고 사울 왕의 배신자와 떠돌이 불량배 취급하며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나발'은 은혜를 잊고 은혜를 악으로 갚았습니다. 탐욕이 초래할 수 있는 부작용 중 하나는 감사를 마비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탐욕에 빠진 사람 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나치게 집착하는 욕심과 만족을 모르는 마음에는 감사가 자리잡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탐욕의 무덤에 심판을 당한 기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마다 내려주시는 만나를 '박한 음식'이라고 타박하며 고기를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심히 진노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고기를 메추라기를 통해 하루아침에 몰아서 안겨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남아 있을 때, 고기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을 터뜨렸던 사람들 전부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일컬어 '기브롯핫다와', 곧 탐욕의 무덤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탐욕을 품다가 결국 다 무덤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탐욕을 품으면 넉넉한 은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는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집착하게 만드는 것이 어떤 것이 있다면, 바로 지금 여러분이 받아 누리는 은혜를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불평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청산하시기를 바랍니다.
탐욕은 하나님 앞에서 빈털털이가 되게 만듭니다.
'나발'은 자신의 소유가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믿던 재산이 그를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거두자 그는 빈손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①더 많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행복해진다고 믿고 삽니다. ②더 많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중요한 사람으로 대우받는다고 생각합니다. ③더 많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안전해진다고 믿고 삽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전도서 5:10에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12:15절에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진정한 자기 가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작정하신 대로 이루는데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영원한 것을 소유한 존재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부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요한 자가 되기 위해 ①자신의 소득을 하나님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모든 소유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잠시 맡겨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라기 3장 10-11절에서 주님을 위해 자신을 것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진정으로 부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②자신의 소득을 가난한 이웃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레위기 19장에 보면 추수할 때에 네 귀퉁이를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남기고 추수하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을 때,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을 소유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최고로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최대로 남을 돕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사람입니다.
나발이라는 사람
삼상 25장 1~13절 / 한대근목사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발'은 마온에서 양과 염소 4천을 거느리고 사는 큰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나발'은 망명생활에 지친 다윗 일행이 도움을 요청하자 떠돌이 건달 취급하며 쫓아보냄으로 다윗의 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 덕분에 다윗의 공격을 모면하기는 했지만, 열흘 후에 '나발'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몸이 굳어 죽고 말았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출20:17)"는 것입니다. 이 계명은 행동이 아닌 마음가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탐욕은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의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고 가르치셨고, 바울 사도도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엡5:3)"고 무섭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탐욕은 사람을 어리석게 만듭니다.
'나발'은 완고하고 행사가 악했습니다(3절). '나발'이라는 이름은 '미련하다' '어리석다'는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는 '사회적 지탄을 받는 사람에게 붙여지는 별칭'으로 통용되는 이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발'은 부자였지만, 사회적으로는 지탄을 받는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나발'은 양과 염소를 4천 마리나 거느린 목축업자였습니다. 재산의 정도로만 보면 분명히 그는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사람들로부터 '나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지탄을 대상이 되었습니다. '나발'은 자신 외에 다른 것을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탐욕입니다. '나발'은 다윗이 위급한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했을 때, 도움을 주기는커녕 다윗을 불량배 취급하며 쫓아냈습니다. 이처럼 탐욕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것 외에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탐욕이란 더 많이 갖고 싶은 욕망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무엇이나 자기 손에 있는 것을 자기 하나만을 위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탐욕에 빠지면 더 나은 축복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으로부터 지탄을 받는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탐욕은 은혜를 망각하게 만듭니다.
다윗이 나발에게 먹을 것을 청한 것은 들에서 나발의 목자들과 양들을 지켜준 대가로 구한 것이었습니다(7,8,15,16절). 그런데 '나발'은 다윗을 무시하고 사울 왕의 배신자와 떠돌이 불량배 취급하며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나발'은 은혜를 잊고 은혜를 악으로 갚았습니다. 탐욕이 초래할 수 있는 부작용 중 하나는 감사를 마비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탐욕에 빠진 사람 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나치게 집착하는 욕심과 만족을 모르는 마음에는 감사가 자리잡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탐욕의 무덤에 심판을 당한 기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마다 내려주시는 만나를 '박한 음식'이라고 타박하며 고기를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심히 진노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고기를 메추라기를 통해 하루아침에 몰아서 안겨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남아 있을 때, 고기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을 터뜨렸던 사람들 전부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일컬어 '기브롯핫다와', 곧 탐욕의 무덤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탐욕을 품다가 결국 다 무덤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탐욕을 품으면 넉넉한 은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는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집착하게 만드는 것이 어떤 것이 있다면, 바로 지금 여러분이 받아 누리는 은혜를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불평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청산하시기를 바랍니다.
탐욕은 하나님 앞에서 빈털털이가 되게 만듭니다.
'나발'은 자신의 소유가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믿던 재산이 그를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거두자 그는 빈손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①더 많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행복해진다고 믿고 삽니다. ②더 많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중요한 사람으로 대우받는다고 생각합니다. ③더 많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안전해진다고 믿고 삽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전도서 5:10에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12:15절에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진정한 자기 가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작정하신 대로 이루는데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영원한 것을 소유한 존재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부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요한 자가 되기 위해 ①자신의 소득을 하나님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모든 소유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잠시 맡겨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라기 3장 10-11절에서 주님을 위해 자신을 것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진정으로 부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②자신의 소득을 가난한 이웃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레위기 19장에 보면 추수할 때에 네 귀퉁이를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남기고 추수하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을 때,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을 소유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최고로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최대로 남을 돕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사람입니다.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차이
삼상 25장 1~44절 / 이수관목사
성경이 얘기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바람직한 가치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다시 말해서 사람이 그의 인생을 통해서 추구해야 하는 가장 큰 것으로 성경은 어떤 것을 꼽고 있는 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지혜입니다. 구약에 보면 사람의 성공과 실패의 이유로 지혜를 꼽고 있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특히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그리고 이어지는 예언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 지혜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혜의 중요성을 안 사람은 다윗이었던것 같습니다. 다윗은 지혜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기회가 왔을 때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지혜를 달라는 축복을 합니다. (역대지상 22:12) 그리고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탓인지 솔로몬은 나중에 왕이 된 후에 하나님께서 어떤 소원을 들어주랴하고 물었을 때 그는 지혜를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시지요. (역대지하 1:11-12) 자, 지혜가 이렇게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모두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겠는데, 그럼 과연 지혜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또 우리는 어떻게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일까요?
사실 저에게도 이런 류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지식을 갖춘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냥 책을 많이 읽고 지식을 쌓으면 되는 거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지혜로운 자가 되는가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지혜란 타고 나는 어떤 천부적인 기질 같기도 하고, 그래서 난 아무리 봐도 지혜있는 사람 같지는 않고, 그래서 지혜라는 말만 나오면 괜히 자신이 없어지는 그런 나를 발견하곤 했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에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나발이라는 사람, 그의 아내 아비가일, 그리고 다윗. 이 세 사람이 펼치는 얘기가 한토막의 TV드라마 같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이렇게 보면 아 이 사람은 참 지혜롭구나 그리고 이 사람은 참 어리석은 사람이구나 하는 것이 구별이 됩니다. 그리고 또 이 사람은 이렇게 행동하니까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구나 또 반대로 이사람은 이렇게 행동하니까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구나 하는 것을 조금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람의 행동을 보면서 과연 어떤 점이 이들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고 또 어떤 점이 이들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드는 가 하는 것을 살펴 보고, 그래서 지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고 또 우리는 어떻게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점을 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은 성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첫번째 우리가 본문을 읽으면서, 특별히 이 이야기 전체의 구조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지혜롭고 또 어떤 사람이 어리석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구절도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 주인공의 성격을 먼저 묘사하고, 그리고 나서 얘기를 시작합니다. (3절) 또 한사람, 다윗의 성격은 이런 식으로 직접적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지만 얘기 전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이 지혜롭기 때문에, 혹은 어리석기 때문에 이런 성격으로 나타나는 것인지, 아니면 이런 성격이기 때문에 지혜롭거나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지는 지금 시점에서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어째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격은 그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우리가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내 성격에 대한 평소의 나의 생각이 맞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내 성격에 대한 이유없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격이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 나름대로 또 성격이 고약한 사람은 고약한 사람 나름대로 다 내 성격에 대해서 이유없는 자부감과 우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평소에 자기 성격때문에 주위 사람과 마찰이 자주 일어나고,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다 나를 힘들어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에요. 그리고는 자기 성격에 만족하면서 삽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성질은 좀 있지만 그래도 아싸리한 면은 있잖아.”
그런데 어째튼 자기 성격에 대한 그런 이유없는 호감이 내가 성격을 고쳐야 한다는 필요를 못느끼고 살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목장 모임을 해도 “내 성격에 문제가 있어요.” 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많이 봤지만 정말 심각하게 "내 성격을 고쳐 나가기로 했다"고 결정하는 사람은 많이 못봤어요. 다시 말해서 내 성격이 나의 인생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크리스천으로의 내 삶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 분들은 대부분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격은 못고쳐.” 그런데 아닙니다. 성격은 고칠 수 있습니다. 고쳐보려고 하질 않는 거에요.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저는 천성적으로 태어나기를 고치는 걸 못해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못 고치는 것이 아니고 안 고쳐본 거예요. 게을러서건 취미가 없어서이건 자기가 안해보니까 못하는 거지 천성적으로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격도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고치지 못한다는 거예요.
계속 뒤로 가면서 살펴보겠지만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 욱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 함부로 말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성격이 쉽지 않은 사람들은 내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데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격을 고쳐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 그러면 정말로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격이 나를 지혜롭게 만들고 또 어리석게 만드는 것인지 세 사람의 Case를 통해서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어리석은 사람, 나발
자, 그러면 첫번째 사람부터 한번 봅시다 나발입니다. 나발은 고집이 세고, 행실이 포악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우리 성경이 조금 강하게 번역을 한 것이고, 사실은 무뚝뚝하고, 예의가 없는 사람이다 정도로 보면 됩니다. 즉 영어로 우리가 보통 말하는 Mean 한 사람을 얘기하는 겁니다. 자, 이 사람이 어떻게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지 4절부터 10절을 읽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하는 행동은 정말 어리석습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지금은 비롯 사울에게 쫓겨다니는 신세이긴 하지만, 그래도 전쟁 영웅이고, 지금 조금 도와주면, 계속해서 자기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인데 사서 적을 만들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지요. 그런데 그가 왜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는가? 다름이 아니라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Mean한 성격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첫번째로 불친절과 남에 대한 무관심이 몸에 베어 있어요. 다윗이 이 사람에게 사람을 보내서 음식을 요구한 것은 나발이 잔치를 벌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떼를 치는 사람은 양털을 깍는 시점이 추수나 마찬가지니까 그 때 잔치를 벌렸던 모양이예요. 그리고 다윗은 우리가 이렇게 뒤를 봐 주었으니까 달라라고 요청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율법을 따라서도 나발 같은 부자는 잔치때 당연히 가난한 나그네와 떠돌이를 접대해야 되는 것이 거든요. 그런데 그런 배려의 마음이 없는 거지요.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함부로 말하는 버릇입니다. 그는 먼저 “도대체 다윗이란 작자가 누구냐?”라고 하는데 지금 이 사람이 다윗을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거든요. 전쟁영웅으로 그 당시 유다지파에서는 가장 유명한 다윗을 모를리가 없지요. 게다가 다윗이 또 Power가 있다는 것도 알았을 겁니다. 또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자들에게”라고 얘기를 하는데 이건 엄청난 모욕적인 말이거든요. 우리 말에 “애비 에미도 없는 놈들” 뭐 그런 소리아닙니까? 그런데 나발이 다윗의 가문을 모를리가 없습니다.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 나발과 다윗은 먼 친척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유다 자손이고 게다가 다윗이 태어난 베들레헴도 갈렙족속이 개발한 마을이거든요. (역대지상 2:50-51) 다시 말해서, 이사람이 지금 다윗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다윗의 가문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다윗이 무시하면 안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닌데 왜 그랬나? 그냥 생각없이 지꺼리는 거예요. 바로 이 생각없이 나오는 데로 지껄이는 말 버릇이 이 사람을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람의 함부로 말하는 성격이 그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든 겁니다. (참고: 잠언18장 6-7절)
따라서 우리도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정말 생각없이 말하는 성품을 고쳐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생각없이 얘기합니까? 이런 말을 하면 어떤 결과가 올 지, 어떤 사람이 상처를 받을 지, 어떤 파급효과가 있을 지 생각도 안 해보고 그냥 생각나는데로 얘기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얼마나 습관적으로 무례하게 말을 하는 지 모릅니다. 처음보는 사이인데도 턱턱 예의에 어긋나는 말을 너무 쉽게 합니다. 그래서 목장에서 상처받는 것도 말때문이이구요. 가끔 교회를 떠나는 일이 생기는 것도 말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마음 속 깊이 남아 있는 상처가 있다면 그것도 거의 말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야고보도 야고보서 3장5-6절 에서 혀의 문제점을 얘기하면서 8절에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사람의 혀는 누구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즉, 다시 말해서 말의 실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결국 우리는 말을 제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을 잘할 수 있는 법을 터득하는데만 힘을 쓰지 말을 제어하는 방법은 배우려고 하지 않거든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목장 모임에서나, 초원 모임에서나 이 얘기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하는 경우 지나고 나서, 내가 그 말을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아니면 하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하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 때가 월등히 많지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 실수가 많다는 증거에요. 그래서 사람은 어릴 때는 말을 잘하는 방법을 배워 나가야 하지만, 나이가 어느정도 되면 그 다음부터는 말을 참는 법을 배워가야 하는 것 같아요. 참 우리의 말은 상처를 많이 줍니다. 말을 제어하는 훈련을 하셔서 지혜롭게 말하는 사람들이 되시고 그래서 삶도 지혜로운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나발의 이 말을 전해 들은 다윗은 발끈합니다. 그래서 칼을 차고 나발과 그에 속한 모든 남자는 다 죽여버리겠다고 가는 것을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말립니다. 그래서 다음은 아비가일의 Case를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3. 현명한 사람, 아비가일
자, 나발에 비해서 아비가일은 모든 일 처리를 참 지혜롭게 합니다. 18-19절을 보면 그는 먼저 다윗의 분을 가라앉힐 수 있도록 선물을 준비합니다. 그래서 먼저 다윗이 선물을 받도록 하고 그래서 일단 다윗의 마음이 풀어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다윗을 직접 보았을 때는 아주 극도의 친절을 베풀면서 설득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말을 시작해서 24절부터 31절까지 긴 설득을 하는데 성경에 나오는 여자가 한 말 중에서 가장 긴 문장입니다. 내용은 대충 이런 얘기입니다. 내 남편 나발은 신경쓰지 마세요. 뭐 그런 소소한 일에 신경을 쓰십니까? 하나님께서 언젠가 당신을 왕으로 만들어 주실텐데, 이런 작은 일에 복수의 피를 흘려서 오점을 남기지 마세요 하는 얘기입니다. 자, 이렇게 해서 그녀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막고, 결과적으로 다윗을 보호하고, 또 다윗을 통하여 신정국가를 이루려는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 지게 만듭니다.
자, 이런 그녀의 지혜로운 행동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아비가일의 그 겸손을 바탕으로 한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녀에게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몸에 배어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먼저 그는 다윗의 부하들을 호통을 쳐서 보낸 남편에게 가서 왜 그랬냐고 따지지 않습니다. 일을 조용히 처리합니다. 이것도 일종의 남편에 대한 배려이고 겸손입니다. 그 다음에 그녀는 다윗이 말에 의한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 그 상처를 말로 풀어 주려고 애씁니다. 바로 다윗에 대한 겸손이고 배려의 마음입니다. 이런 몸에 베어있는 겸손과 남을 향한 배려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일에 깊이 생각하게 만들고 그것이 이 사람을 지혜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원천으로 작용을 합니다. (참고: 잠언11장 2절) 자, 결국 다시한번 우리는 지혜로움은 성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발견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정말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사람을 지혜롭게 한다는 거 아세요? 정말 그렇습니다. 저는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이런 일을 경험했습니다. 언젠가 제가 다니던 회사에서 한가지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운동의 이름이 ‘고객 만족’이었어요. 그러니까 결국 자기의 고객을 만족시키자라는 그런 운동인데 여기서 고객은 물건을 사는 사람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같은 회사안에 부서라 할 지라도 내가 하는 일의 결과를 제공받는 사람을 내 고객이라고 보고 모든 사람이 자기의 고객을 만족시키라는 그런 운동이었어요. 그 당시 제가 맞고 있던 부서가 상품 기획팀이라는 거였는데 그 운동을 시작하고 난 후 부서내에 상품의 Idea 제안이 거의 세배로 뛴적이 있습니다. 남을 위한 배려의 마음은 사람을 지혜롭게 합니다. 이건 세상에서도 그렇고 하나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 한번 여러분 목장에 새로오는 분들을 향해서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보세요. 마음 속에서 목장을 어떻게 운영해야 겠구나 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막 생기는 것을 느낄 겁니다. 또 목장 식구가 문제를 겪고 있을 때 내가 어떻게 해야 할 지 지혜가 떠오르지 안잖아요? 그럼 먼저 이걸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 분들을 위해서 배려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상담도 거기서 시작하는 거예요. 이분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뭘 가장 배려해야 하는가 하는 마음에서 상담을 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 겁니다.
자, 상대방에 대한 몸에 벤 배려의 마음이 우리를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을 아시고 끝없이 배려하는 것을 연습하셔서 지혜로운 자가 되시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이 쓰시는 자, 다윗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다윗의 경우를 한번 봅시다. 나발의 푸대접에 대해서 반응하는 다윗을 보면 나발과 별 다른 면이 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12-13절을 보면 요새말로 ‘욱’하는 성격이 발동이 걸리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21-22절을 보면 다윗은 그 ‘욱’하는 못된 성질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자기가 선한 일을 해 놓고 그 선한 일을 헛일이라고 단정을 하지요. 왜 헛일입니까? 하나님이 아시죠. 그러고는 악을 악으로 갚을 생각을 하면서 씩씩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성을 잃은 것이죠. 이러구 가서 나발과 그 집안에 딸린 남자를 다 죽였더라면 참 다윗의 인생도 처참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히 아비가일이 중간에서 말리는 바람에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정말 ‘욱’하는 성격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될뻔 했지만, 그래도 그가 마지막에 다시 지혜로운 사람의 대열에 끼는 것은 그의 그 Teachable 한 성격의 때문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뭔가요? 배우려고 하는 자세가 되어 있는 성격인가요? 아비가일이 찾아와서 그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을 때, 그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압니다. 32-33절이지요. 자 그렇게 흥분하고 눈이 뒤집히고 전부 죽여버린다고 가다가 한마디 음성이 탁 들리니까 그 자리에 멈추어 섭니다. 그리고는 음성 들려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다음에 사람에게 감사를 돌립니다. 그러고는 뺀 칼을 다시 접어 넣고 돌아섭니다. 자 이렇게 어떤 일에서던지, 그것이 잘 된 일이든 잘못된 일이든, 그 일에서 교훈을 발견하고 기꺼이 자기를 고치려고 하는 바로 그런 성격이 그에게는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 Teachable 한 성격이 그를 지혜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또 한번 발견합니다. 지혜로움은 성품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품이 바로 하나님이 끝까지 다윗을 쓰셨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현명한 사람이 되려면 우선 우리 스스로가 Teachable 한 성품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통해서 배워 나가고, 자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될 때는 언제든지 자신의 생각을 고칠 줄 알고 바꿀 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제자도 아닙니까?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Teachable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가? 두가지입니다.
첫번째는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다윗이 평소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에 습관이 되어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비가일이 얘기할 때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절대로 안되지요.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만이 teachable 한 사람이 됩니다. (참고:잠언9:10)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많으시지요? 우리가 성경도 좀 읽고, QT도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기 시작하면 이상하게 주변에 하나님의 역사가 많아지고 성령님의 도우심도 더 많이 체험하고 그러지요. 그러면서 초등학교 다니는 자녀에게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배우고 그러지요? 그런데 그것이 물론 하나님이 더 많이 역사하시기 때문도 있지만 사실 그 전에도 그런 일들이 많았는데 우리가 느끼지 못했던 것일 수가 많습니다. 다윗은 성경에 나오는 시편의 거의 70편을 쓰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Teachable한 성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번째 우리가 Teachable한 사람이 되려면 우리의 고집을 좀 접어야 합니다. 그렇지요? 고집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어떤 일에서 배우지 못합니다. 어떤 사건을 통해서 배우려면 우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점을 내려 놓고 시작해야지요. 그리고 고집없는 마음으로 다가설 때 우리는 사건을 통해 배우는 teachable 한 사람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자 결국 이 얘기를 통해서 얻는 결론은 무엇입니까? 다시한번 말하지만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가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성품과 성격에 전적으로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성품에 이유없는 우호를 가지고 내 성품을 왜 고쳐? 하는 마음으로 살지 않고 하나하나 그릇된 성품을 고쳐가시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4. 결말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이야기가 단순히 어리석은 나발과 지혜로운 아비가일, 그리고 다윗이 만들어 가는 얘기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저자의 의도를 잘못아는 것입니다. 이 사무엘상을 쓰신 저자의 의도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저자의 의도는 그런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인도하시고 우리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주권대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에 진짜 의도가 있습니다.
결국 나발이 죽자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아비가일을 데려다가 부인을 삼습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뭐 이런 부정한 경우가 있는가 싶지만 사실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남편이 없는 아내는 당시의 눈으로 보면 보호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만약 다윗이 나발의 친척이었다면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째튼 다윗은 아비가일과 결혼을 했는데 이 결혼이 나중에 다윗이 왕이되는 데 큰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 다윗은 왕이 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다 잃어 버렸을 때입니다. 우선 1절에서 봤던 것 처럼 자기에게 왕이 될 것이라고 기름을 부어 주었던 사무엘 선지자가 죽고 없지요. 또한 사울의 딸이 자기 아내 미갈도 빼았겼지요. 그러니까 이제는 왕의 Line도 아니지요. 게다가 자기가 영웅으로 취급을 받았던 기브아에서 쫓겨 나와 있지요. 지금은 왕이 될 수 있는 아무런 기반이 없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헤브론에서 가장 부유한 집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 함에 따라서 그 집안의 모든 것을 물려받게 됩니다. 이것이 기틀이 되었을 것이고, 나중에 사울이 죽고 난 후에 다윗은 왕으로 추대를 받는데 바로 헤브론에서 추대를 받게 되는 이유입니다. 다시 얘기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도 우리가 써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모든 일들, 교회가 되어 가는 일들, 또 우리의 사역이 되어 가는 일이 우리가 써 가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이 쓰고 계시는 역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다보면 이렇게 섭섭할 수도 있고 저렇게 섭섭할 수도 있고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음성 들을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주권자로 역사하시고 그런 실수들 사이에서 더 좋은 그림으로 그려 나간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주님께서 주신 사역에 묵묵히 시선을 고정하셔서 더욱 아름다운 교회를 만드시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비가일, 화평케 하는 자
이윤재목사 / 삼상 25:2-3, 23-29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저희 초등학교 동창들이 단체 카톡을 합니다. 저도 거기에 이름이 있기 때문에 시간만 되면 카톡이 옵니다. 한 친구가 “없다” 시리즈를 보냈습니다. 10대, “철”이 없다. 20대, “돈”이 없다. 30대, “집”이 없다. 40대, “정신”이 없다. 50대, “일”이 없다. 60대, “낙”이 없다, 70대, ”이“가 없다. 80대, ”영감“이 없다, 90대, “다 필요” 없다. 어떻습니까? 공감하십니까? 그런데 어느 세대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관계”입니다. 어느 세대든 우리는 혼자 살 수 없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합니다. 함께 살기 때문에 갈등할 수 밖에 없지만 갈등하면서도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얻는 지혜는 우리가 누구와 만날 것이냐가 아니라 우리가 만난 사람들과 어떻게 지낼 것이냐 입니다. 만남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만난 사람들과 어떻게 지낼 것이냐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10%가 만남의 문제요, 90%가 관계의 문제입니다.
미국의 작가, 오 헨리의 단편중에 “강도와 신경통”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어느 집에 강도가 들어왔습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주인이 강도와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강도는 총을 들이대며 소리칩니다. “손들어!”. 집주인은 엉겁결에 손을 들었는 데 오른손을 듣지 못하고 왼손만 들었습니다. 강도가 소리쳤습니다. “왜 한 손만 드나? 두 손 다 들어”. 주인이 더듬거리며 말합니다. “사실은 오른손이 신경통 때문에 아픕니다.”. 그 말을 듣던 강도가 슬그머니 총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사실 나도 신경통 때문에 강도가 되었소. 낮에는 일을 못하고 밤에는 아파서 한 숨도 못자니 강도밖에 더 할 게 있겠소?”. 그러면서 둘이 마주 앉았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아픔을 털어놓다가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강도로 만났다가 서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한 강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좋은 사람만 만나기를 기대할 수 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 입니다. 강도로 만나 강도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강도로 만나 친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관계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다윗이 엔게디동굴에서 사울을 살려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거기서 보여준 다윗의 모습은 진정한 승리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윗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도 끊임없이 자기 백성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종의 봉사대를 만들었습니다. 사막에 사는 족속들은 아주 무자비하고 호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틈만나면 이스라엘 농가를 칩입하여 사람들이 죽이고 재산도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봉사대는 사막에 살던 호전적인 족속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는 일종의 경찰업무같은 것을 했습니다.
그 백성중의 하나가 갈멜에 사는 나발이었습니다(1. 지도). 여기가 바로 “갈멜”입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싸웠던 갈멜산이 아니라 바란 광야에 있던 한 마을의 이름입니다. 2절 볼까요? 삼상25:2,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 데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마리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의 양털을 깍고 있었으니”. 3절, 삼상25:3,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문제는 나발이 부자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하여” 하는 말을 히브리어 본래 뜻은 “무겁다”라는 뜻인데 이 말은 “돈을 많이 쌓아 놓았다”는 뜻입니다. 나발은 돈이 많았습니다. 양과 염소도 많았습니다. 3,000 마리의 양과 1,000마리의 염소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많은 소유와 부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다윗이 지켜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양 털깍는 날이 되었습니다. 양털깍는 날은 우리로 말하면 가을에 벼 추수하고 곡식 타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음식을 만들어 잔치하면서 이웃을 초청하여 함께 먹는 날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자기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당신들을 도왔으니 이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먹을 것을 좀 보내시요”.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그 말을 들은 나발이 노발대발 소리칩니다. 10절, 삼상25:10-11,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와!, 여러분도 이렇게 문전박대 당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은혜를 입었는 데도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다윗은 분노했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발을 죽이기로 마음먹고 부하들을 소집했습니다. 13절입니다. 삼상25:13,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하니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순간 평정심을 잃은 다윗은 마치 도엑의 밀고로 사울이 놉의 제사장 수 백명을 몰살시켰듯이 나발의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려고 말을 타고 출발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다윗의 마음을 이해합니까? 제가 다윗이었다면 아마 더 했을지 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동안 다윗이 보여준 아름다운 모습 때문에 우리는 다윗의 이 모습이 어쩐지 당황스럽고 낯설기까지 합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사울이 그렇게 오랫동안 자기를 괴롭혔어도 한번도 대적하지 않은 사람 아닙니까? 대적하지 않은 것은 물론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를 해칠 수 없다면서 옷자락만 살짝 벤 사람이 아닙니까? 그나마 그것 때문에 마음이 아파 애통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다윗이 나발에 대해서는 참지 못하고 죽이려고 하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20년동안 6번이나 죽이려 하고, 15번이나 죽음의 동굴로 몰아넣은 사울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관대하더니 무식한 목자 나발이 한번 툭 밷은 말 한마디에는 그렇게 못참고 분을 내다니 우리는 이 다윗을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이 세상에 정말 의인은 없는 것일까요? 정말 성경이 진실한 것은 성경에 나오는 어떤 사람도 완전한 사람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여러번 거짓말하지 않았습니까? 출애굽의 영웅 모세도 백성들에게 악담과 저주를 퍼붓지 않았습니까? 세계 역사를 바꾼 복음의 사도 바울도 동역자 바나바와 다투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람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중의 하나가 분노입니다. 분노는 어디서 오면 왜 오는 것입니까? 크리스쳔 정신분석학자 스캇 펙에 의하면 “분노란 우리가 다른 때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으로, 좌절감과 욕구불만을 느꼈을 때 나타나는 감정적 반응”이라고 말했습니다. 분노는 나름대로 좋은 점도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이 감정도 필요합니다. 분노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미친 영향 때문에 나쁩니다. 마5:22에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을 죽여야 살인이 아니라 분노가 곧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분노가 살인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현대 심리학을 통해서도 증명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크리스쳔 상담학자 헨리 브란트 박사는 그가 상담한 사람의 80-90%가 분노에 관한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속에 분노가 있으면 그것이 가인처럼 얼굴로 나타나고 그것이 밖으로 나와 찌르는 말로 표현되고 급기에 살인의 행동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분노는 우리의 마음을 사랑에서 떠나 미움으로 가게 합니다. 분노는 우리를 은혜에서 떠나 사람이 행한대로 갚게 합니다. 분노가 우리를 장악하면 이성을 잃고 사람들을 증오하게 합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복수입니다. 복수는 내가 상대방에게 받은 대로 갚겠다는 마음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원수갚지말라고 가르칩니다. 잠 20:22, “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잠 24:17, “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잠 24:29,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가 원수갚는 순간 우리가 하나님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수도원에서 한 형제가 다른 사람에게 공개적인 모욕을 당했습니다. 하도 화가 나 그는 그에게 복수하기를 결심했습니다. 그가 원장에게 가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자기가 받은 그대로 갚아주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원장은 그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했지만 수도자가 거절했습니다. “싫습니다. 저는 그가 나에게 한 말에 대해 대가를 치를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원장이 일어나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 하느님, 이제 우리는 당신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더 이상 저희를 돌보아 주실 필요도 없습니다. 이 형제처럼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이 되어 스스로 원수를 갚기를 원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자 형제는 복수할 생각을 버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평생 다스려야 할 것은 분노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늘 우리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이제 다윗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게 성자처럼 살던 다윗이 살인자가 되게 생겼으니 다윗이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비가일은 화평케 했습니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아비가일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나발의 아내였습니다. 참, 이 아비가일이 나타난 시점이 중요합니다. 만일 아비가일이 이때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다윗은 살인자가 되고 나발은 비참하게 죽었을 것인데 아비가일이 이 비극을 막은 것입니다. 그러면 아비가일은 누구입니까? 3절 하반절입니다. 삼상25:3,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그는 갈렙족속이었더라”. 이렇게 부부가 서로 다를 수 있을까요? 그렇게 착하고 믿음좋은 아내가 그렇게 악하고 믿음없는 남편과 살다니 영화 “미녀와 야수”를 생각나게 합니다.
“나발”이라는 이름 자체가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에 “어리석다”는 말이 많이 있지만 “나발”은 가장 나쁜 어리석음입니다. “페티”란 말이 어리석다는 말인 데 이 말은 순진하고 미숙한 사람을 뜻합니다. 어리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라면 괜찮아 집니다. “케실”이라는 단어도 있는 데 이 말은 “둔하다. 뚱뚱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도 사람이 조금만 더 빠릇 빠릇하고 부지런하면 나아질 수 있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런데 “나발”이란 어리석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이 단어가 잠언에 세 번 나오는 데 모두 하나님을 부인할 때 쓰입니다. 시14:1에도 나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가 ”나발“입니다. 어리면 자라면 됩니다. 굼뜨면 빠르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부인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이유가 불신앙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나발“입니다. 그런데 아비가일은 이런 남편과 함께 삽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아비가일은 모든 남편들이 좋아하는 아내상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아내들은 이 아비가일같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아비가일은 한 남자의 아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리석은 세상과 함께 삽니다. 다윗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있으며 또한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있습니다. 아내로서 우리는 남편과 자녀사이에 있고 교회 일꾼으로서 우리는 목회자와 신자 사이, 직장인으로서 우리는 사장과 직원사이에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모든 종류의 중보자의 전형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교회와 세상, 가족과 교회, 교인과 교인간의 중간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비가일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어떻게 화해자로 사는지를 배웁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사는 세상안에서 화평을 만들며 분노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신앙인으로 화해자로 살 수 있을까요?
1) 내 잘못입니다.
먼저 23-24절을 보실까요? 삼상25:23-24,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대니라.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데 이 죄악을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기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아비가일이 보여준 첫 번째 자세는 겸손입니다. 이 그림을 보시죠(2. 사진). 네델란드 화가 루벤스가 1620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내용은 아비가일이 나귀를 타고 급히 와 다윗앞에 무릎을 꿇고 음식을 가르키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가 가르키는 방향을 보면 하인들이 많은 빵을 들고 있고 그는 진지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다윗에게 애원하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이렇게 다윗앞에 무릎을 꿇을 뿐 아니라 자신을 6번이나 다윗에게 “당신의 여종”이라고 말하고 다윗을 무려 25번이나 “내 주”라고 말합니다. 23절부터 44절, 불과 21절에서 25번 “내 주”라고 불렀다면 매 절마다 한번 이상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가 더 중요합니다. 24절, 삼상25:24, “내 주여 원하건데 이 죄악을 곧 내게로 돌리시고”. 자기 남편 나발의 모든 죄는 곧 자기 죄라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실상 아무 죄가 없습니다. 죄가 있다면 어리석은 남편을 둔 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비가일은 자기 남편이 위기에 처하자 남편의 모든 실수를 떠 안습니다. “내 주여, 내 남편의 죄는 다 내 죄입니다. 내 남편의 실수는 내 실수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요”. 28절입니다. 삼상25:28, “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도대체 아비가일이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는 아무 잘못이 없지만 끝까지 자기 남편의 실수를 대신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잘 못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내 잘못입니다. 내 실수입니다”. 우리가 어떤 비리를 저질렀거나 잘못을 했다가 드러나면 “나는 모릅니다”, 기껏해야 “유감입니다”라고 합니다. 유감이 무엇입니까?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면 될 것을 왜 돌려 말합니까? 아비가일은 나중에 다윗의 아내가 되었지만 다윗의 아내가 되기 위해 남편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도리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다윗의 마음에 들려고 남편을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남편의 잘못을 자기 잘못으로 고백했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손해보고 상처받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c.s.루이스가 <네 가지 사랑>에서 말했습니다. “사랑하면 상처받는다. 상처받지 않으려거든 관계를 끊으면 된다. 자신의 이기심의 상자 안에 숨어 있으면 아무도 상처받을 일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도 사랑할 사람도 없다”. 지금 아비가일은 남편 때문에 스스로 상처받고 있습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이것이 화해로 가는 길입니다. 여러분도 누군가를 위해 스스로 상처받은 적이 있습니까? 부모는 자식을 위해 상처받습니다. 상처인지도 모르고 상처받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도 모르개 “내 잘못입니다. 내 책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평화로 가는 길입니다.
2. 은혜를 기억합시다
아비가일이 남편을 화해시키기 위해 두 번째 한 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29절입니다. 삼상25:29,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여기서 “물매”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물매”를 통해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하고자 한 말이 무엇이었을까요? 작은 목동이었던 다윗이 칼과 창으로 무장하고 나온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다윗,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물맷돌 하나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골리앗을 이겼잖아요? 하나님의 은혜 아닌가요? 은혜아니면 당신은 한 순간도 서지 못했지 않아요? 사울이 20년동안 그렇게 당신을 죽이려고 했어도 당신이 살아 있는 것은 은혜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 은혜를 잊어 버리고 있습니까?” 여기 “생명싸개”라는 말이 나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손아귀에 있다는 말입니다.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분노하는 사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살려주신 은혜,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주신 은혜가 몇 번입니까?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의 말입니다. “불의를 정의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뿐입니다”. 약2:13절을 표준새번역이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은혜가 심판을 이깁니다”. 사랑을 내용으로 한 고전13장을 미국의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이렇게 제목을 붙였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깁니다”(Love prevails everything). 그렇습니다. 우리가 회복하는 힘도 은혜고 우리가 화해하는 힘도 은혜입니다. 은혜가 모든 것이고 사랑이 모든 것을 이깁니다. 우리가 분노할 때 잠시 멈추고 받은 은혜를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가? 얼마나 받은 은혜가 많은가?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그래서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주시리”.
3. 용서해야 승리합니다.
아비가일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윗에게 용서를 간구합니다. 30절, 31절입니다. 삼상25:30-31,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마지막으로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앞으로 다윗이 왕이 될 수 있지만 왕이 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을 향해 복수하거나 무죄한 피를 흘린다면 왕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30절-31절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윗이여, 원수를 갚는 일은 당신이 할 일이 아닙니다.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당신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당신이 여기 광야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며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누구인가를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광야는 당신이 스스로 실험해보며 당신이 얼마나 강인하고 꼿꼿한지 시험하는 시험장이 아닙니다. 광야는 당신의 삶 속에서 그리고 당신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발견하는 곳입니다. 나발은 어리석은 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당신도 어리석은 자가 되렵니까. 여기서 어리석은 자는 한 사람으로 족합니다.”
먼저 다윗앞에 엎드려 남편을 대신하여 사죄한 아빅가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 다음 하나님을 기쁘게 한 자가 되기 위해 다윗이 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비가일”는 “나의 아버지는 기쁨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왕인 다윗이 할 일은 끊임없이 용서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되면 아무리 많은 업적을 쌓아도 하나님앞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해인 수녀가 쓴 시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용서의 꽃>이라는 시를 저는 좋아합니다. 이 시는 용서에 대한 본질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용서하지 않은/ 나 자신을 용서하기/ 힘든 날이 있습니다. 무어라고 변명조차 할 수 없는/ 나의 부끄러움을 대신해/ 오늘은 당신께/ 고운 꽃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토록 모진 말로/ 나를 아프게 한 당신을 /미워하는 동안/ 내 마음의 잿빛 하늘엔/ 평화의 구름 한 점 뜨지 않아/ 몹시 괴로웠습니다. 이젠 당신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나를/ 용서하십시오/ 나를 바로 보게 도와준 /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아직은 용기가 없어/ 이렇게 꽃다발로 대신하는/ 내 마음을 받아주십시오.
우리가 누구를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아서 당하는 1차 피해자는 자기 자신입니다. “당신은 미워하는 동안 내 마음의 잿빛 하늘엔 평화의 구름 한 점 뜨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누구를 미워하면 우선 내가 힘듭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밖에 없는 데 용서의 1차 수혜자도 자신입니다. “이젠 당신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나를 용서하십시오”. 용서해서 용서받은 첫 번째 당사자는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고 용서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됩니다. “나를 바로 보게 도와준 당신에게 꽃다발 대신 마음을 드립니다”. 지금, 다윗은 선지자 나단에게 이 교훈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죽이려고 했던 남자의 아내에게서 이 말을 듣고 있습니다. “왕이시여, 복수는 쉽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위대합니다. 지금 쉬운 길을 택하면 나중에 후회합니다. 지금 용서하면 나중에 승리합니다. 왕은 어떤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이렇게 입바른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려주는 말을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렇게 지혜로운 여자가 다윗의 아내가 된 것은 다윗의 일생 큰 축복이었습니다. 사울이 정략적으로 맺어준 미갈과 사랑도 없이 살다가 이런 지혜로운 여인을 만났으니 다윗은 인생 최고의 행복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다윗은 한번도 용서의 문제로 인생을 허비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백주 대낮에 자기를 공개적으로 욕하고 다니는 시므이를 용서했습니다. 원수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을 용서할 뿐 아니라 평생 그 와 함께 한 상에서 먹었습니다. 그 뒤에도 다윗이 여러번 실수했지만 분노와 용서의 문제로 실수한 적은 없었습니다.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이 다윗옆에서 그의 감정을 조절하고 인내하게 하고 용서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내를 둔 다윗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우리 모든 아내들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행동으로 다윗은 분노를 그치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삼상25:33, 35,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그리고 35절, “다윗이 그가 가져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고 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 내가 네 말을 듣고 네 청을 허락하노라”. 다윗의 분노를 잠재우고 살인을 막은 아비가일, 자기를 던져 어리석은 남편을 감싸고 다윗에게 남편대신 용서를 구한 아비가일, 그는 훗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하신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도 그런 아비가일을 찾습니다. 누가 네 남편, 내 부모, 네 교회, 네 원수, 네 대적의 죄를 대신하겠느냐? 누가 다른 사람을 정죄하던 그 손으로 자기 가슴을 치며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죄를지었습니다. 다 나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비가일이 어러석은 남편을 대신하다 왕비가 된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부활의 화목제물이 된 것처럼 누가 이 시대의 아비가일 되겠습니까? “주여,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부르소서”. 승리자 되시기 바랍니다.
지혜로운 아비가일
양인국목사 / 삼상 25:2-44.
1. 본문은 세 인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하나는 나발이고 다른 하나는 다윗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다. 하나님은 여기 세 인물을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세상에 사는 동안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교훈해 주셨다.
2. 본문의 내용이다. 다윗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발에게 도움을 청했다. 다윗이 그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자신의 군대가 나발의 목자들을 도와서 그의 짐승들을 보호해 주었기 때문이고, 또한 그가 양털을 깎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목축을 하는 사람들에게 양털을 깎는 날은 축제의 날이다. 그래서 그 날은 음식을 만들어 이웃과 함께 나누며 기쁨을 표현한다. 다윗은 이와 같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군사들 가운데 열 명을 나발에게 보내어 은혜를 베풀어주기를 청했던 것이다.
나발은 미련하고 불량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받은 은혜를 갚을 줄 몰랐다. 그래서 그는 다윗이 보낸 사람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윗을 모욕하였다. 이로 인하여 나발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생명까지 잃어버렸다. 만일 다윗이 도움을 청했을 때 나발이 그 요청을 들어주었더라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장 그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가지는 않았을지라도 분명히 좋은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은혜를 잊지 않는 자였기 때문에 그가 왕이 된 후에 분명히 자신이 어려움에 처해 있었을 때 도움을 준 나발을 기억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놀라운 사실은 성경에 언급된 사람들의 예를 보든지, 아니면 역사에서 언급된 사람들의 예를 보든지 또는 우리 주변을 보든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탐욕에 이끌려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넘어지게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우며 사는 사람들은 보다 더 복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예들을 하만과 에스더에게서 찾을 수 있다. 하만은 탐욕에 의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지만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자기 민족을 구하고자 했던 에스더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다. 이와 같은 보편적 진실을 생각할 때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우리는 그를 기회를 가져다주는 사람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도움을 청하는 자에게 도움을 줄 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보다 더 복된 삶으로 세워질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탐욕으로 인하여 도움을 거절한다면 우리는 기회를 상실할 뿐만 아니라 그 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이 무너질 수도 있다. 즉 도움을 청할 때 그것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기회가 되기도 하고 위기도 되기도 한다는 의미다. 언급한 것처럼 나발은 다윗의 요청을 거절 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모욕했다. 이로 인하여 나발은 기회를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넘어졌다.
소년들이 다윗에게 돌아가서 나발이 자신들과 다윗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말하였고 그들의 말을 들은 다윗은 분노하여 나발의 집을 치기로 결정했다. 이때 다윗의 결심에 대하여 본문은 이렇게 말해 주고 있다.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25:21,22)” 다윗의 이와 같은 결정은 정당성 여부를 떠나서 나발에게는 결정적인 타격(打擊)이 되었다.
여기 다윗의 행동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있다. 왜냐하면 다윗이 나발에게 보인 행동이 정당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다윗이 나발의 목자들에게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에게 고용되어 도움을 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도움을 준 것에 대하여 어떠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없지만, 요구했을 때 그것을 거절한다고 하여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여 보복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범죄가 된다. 이것은 다윗이 자원하여 나발의 목동들에게 도움을 주었다면 그 자체로서 족한 것이라는 의미다.
어쩌면 다윗이 나발에 대하여 이처럼 분노한 것은 자신의 어려운 처지로 인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육백 명이나 되는 군사와 자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할 위치에 있었다. 이것은 항상 그를 불안하게 했을 것이고 기대했던 곳으로부터 실망하게 되었을 때 그것이 분노로 표출 되었을 것이다. 믿음의 사람인 다윗이 이와 같은 죄를 범했다면 다윗보다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야 얼마나 쉽게 범할 수 있는 죄이겠는가? 실제로 우리가 지고 있는 짐들 때문에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의 분노의 대상이 되거나 또는 원망과 불평을 들어야 할 때가 많다. 이와 같은 것들을 생각할 때 믿음의 사람들이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은 자신의 어려움을 이웃에 대한 분노나 원망으로 표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지고 있을 때, 이웃을 바라보기 보다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아야 한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총명한 자였다. 그는 자신의 목동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부터 다윗이 자신들에게 베풀어 준 호의에 대하여 들었고 또한 나발이 다윗의 요청을 거절한 것과 이에 분노한 다윗이 나발과 자신들을 치기 위하여 이곳을 향하여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비가일은 이와 같은 위기의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이 모르게 급히 떡과 포도주 그리고 고기와 곡물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먼저 소년들을 통하여 다윗에게 보내고 자신은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다윗을 만났을 때 변명할 기회를 요청하고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말했다. 그는 먼저 나발의 행위의 부당함을 말한 후 그는 본래부터 그의 이름이 말해 주고 있는 대로(나발은 바보라는 뜻으로 이는 본명이기보다는 사람들이 그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부른 이름일 것이다) 어리석은 자라는 것을 말하며, 자신은 다윗이 보낸 소년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한 가지를 더 말했다. 그것은 다윗이 나발의 집을 치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미리 보내신 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피를 흘려 보수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막으시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다윗이 나발을 쳤다면 다윗이 그 일에 대하여 어떻게 변명할지라도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다윗을 탈취자로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장차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다윗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흠을 남기지 않도록 미리 아비가일을 보내신 것이다. 아비가일은 자신이 준비해온 선물들을 다윗에게 준 후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든든히 세워 주실 것과 모든 대적의 손으로부터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후대하실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아비가일을 통하여 지혜로운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교훈 받는다. 많은 사람이 스스로에 대하여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실제로 우리 사회 속에 문제와 분란(紛亂)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생각할 때 참된 지혜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부터 나오고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아비가일이 집으로 갔을 때 나발은 왕의 잔치 같은 잔치를 그 집에 배설하고 대취해 있었다. 아비가일은 다음날 나발에게 전날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 나발은 그 말을 듣고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고 열흘 후에 죽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25:38)” 그는 술취함과 탐욕에 이끌려서 기회를 상실했다. 언급한 것처럼 그는 술 취함과 탐욕으로 인하여 세상에 사는 날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축복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 잃어버리는 불행을 당해야 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세 종류의 사람들을 본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 자신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또는 감정에 이끌려서 무죄한 피를 흘려서는 안될 것을 교훈해 주셨고, 나발을 통해서는 이웃이 도움을 청할 때 그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따라 기회가 되기도 하고 위기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교훈해 주셨다. 한 가지 더 언급한다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삶의 원리 가운데 하나는 탐욕에 이끌려 자신만 아는 삶보다 나눔이 있는 삶이 더 복된 삶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비가일을 통해서는 지혜로운 사람은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오늘 세 종류의 사람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게 해 주시고 언제나 주의 뜻 안에서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자신과 이웃에게 복을 가져다 주는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아멘!
은혜를 배반하지 맙시다
삼상 25장 2~22절 / 변한규목사
고린도후서 6:1절을 읽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것은 참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430년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 짐승처럼 살았고 진흙탕 속에서 돼지처럼 살았습니다.
양식이 없어서 자식을 삶아 먹을 정도로 황폐함이 비참할 정도였습니다. 그럴 때 어느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를 받아 마귀의 나라 애굽땅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 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10재앙을 내려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광야에서 목이 말랐을 때에 생수가 바위에서 솟구치게 했고 양식이 없어 주렸을 때 하늘에서 만나가 그리고 메추라기를 내려주어서 주리지 않았는데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홍해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낙망할 것 없고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함께 홍해 앞에 서 보십시다.
첫째, 홍해를 갈라지게 하실 것입니다. 누가 홍해를 갈라지게 했습니까? 누가 바다를 신작로로 만드셨습니까? 누가 신작로를 다시 바다로 만드셨습니까? 바다를 만드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홍해 같은 절망의 바다 앞에 서서 두려워하는 성도가 혹시 계십니까? 그 홍해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갈라지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홍해를 갈라서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홍해를 건너가게 하실 것입니다. 바다가운데 육로, 이것은 하나님의 이적,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길입니다. 건너가다가 물이 합쳐지면 어찌될까? 의심하면 건널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홍해는 믿음으로 건너는 바다입니다. 뗏목 타고도 아니고 기선 타고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믿지 못한다면 무엇을 믿을 수 있습니까? 성도들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원수는 수장시키실 것입니다. 애굽의 마병들이 추격해 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번 활을 쏜 것도 아니고 창을 던진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바로 여기에 승리의 비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친히 싸워주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민수기 16장을 보면 땅이 입을 열어 사람들을 산채로 삼켜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250명이 불태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염병으로 죽은 자가 14,700명이나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함께 따라서 합시다. 은혜를 배반하지 맙시다. 이 시간 메시지의 주제입니다. 본문은 다윗과 나발을 두고 하나님의 은혜는 물론 이웃의 은혜도 배반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내용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은혜를 입은 나발.
6절에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바란 광야로 은신한 중에 다윗을 따르는 600여명의 군사가 있었는데 마침 양식이 떨어져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나발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발은 다윗의 큰 은혜를 입은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나발은 재산이 굉장히 많은 부자입니다. 양이 삼천, 염소가 이천, 당대에 손꼽는 갑부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나발의 그 목자들을 선대해 주었습니다. 15절에 보면 양을 상하지않게 했고 한 마리 양도 잃지 않게 도와주었습니다. 16절에 보면 목자들이 양을 지키고 있는 동안 다윗도 군사들로 하여금 함께 지키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을 당하여 열 소년을 나발에게 보내어 도움을 요청했으나 나발은 그 은혜를 갚지 못했습니다. 나발은 삼손을 배반한 드릴라가 되었고 예수님의 은혜를 배반한 유다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묵상해 봅시다. 나는 어떤 성도로부터 은혜를 입은 일이 없는가? 다른 성도로부터 은혜를 받았건만 모른채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한번 물어야 할 것입니다. 벌써 옛날 이야기입니다. 대학교에 입학하려고 원서를 제출하러 가는데 원서대가 없어서 번민했습니다. 형편을 알아차린 한 친구가 원서대금 천 오백환을 보낸바 있어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대학을 졸업했던 지난날이 회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고 싶어 주소를 오랫동안 수소문했지만 지금까지 찾지 못해 마음에 항상 부담되고 번민되는 것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속담에 화장실 갈 때하고 다녀올 때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웃으로부터 열 가지 신세를 졌고 몇 가지 은혜를 입었습니다. 많은 은혜를 받았지만 내가 그 은혜를 갚았는가? 또 한번 물어야 합니다. 은혜를 배반하지 맙시다. 시편 116편 12절에 보면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했습니다. ♬만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많은 은혜를 받은 우리 모두가 아닐까요? 사울은 다윗을 통해서 나발도 다윗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발도 사울도 그 은혜를 보답하지 못하고 원수로 여기지 않았습니까? 모세는 바로의 공주를 통해서 은혜를 받았는데 나는 김집사님을 통해서 박장로님을 통해서 은혜를 받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까맣게 잊고 사는 성도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신령한 비명을 아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러나 황금물결이 치는 밭에 서 봅시다. 다 곡간에 드릴 곡식들이 아닙니다. 세 종류의 인생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쭉정이 인생, 또 하나는 가라지 인생, 그리고 알곡인생입니다. 그러나 쭉정이 인생, 가라지 인생도 처음에는 알곡인생처럼 무성합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날이 장수치 못합니다.
곡식을 거두어 드릴 때에 다 뽑힙니다. 불에 던지움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받은 은혜를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하여 심비에 세길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은혜를 배반하지 말고 은혜 갚는 성도들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배은망덕한 나발.
11절을 읽습니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나발이란 말은 미련하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25절에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자니라"고 합니다. 미련한 인생의 난치병이기도 합니다. 미련한 사람치고 자기가 미련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인생을 살 때에 우선 먹고 보자고 말합니다. 물론 먹는 것 소중한 일입니다.
많이 먹어야 포동포동 살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다' 미련한 자는 땅에다가 보물을 쌓자고 합니다. 그러나 보물을 땅에 쌓으면 동록이 생기고 도적이 구멍을 뚫습니다.
미련한 인생은 종종 삶의 우선 순위를 바꿉니다. 먼저 나, 나, 나 합니다. 먼저 물질, 물질, 물질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나발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만 아는 욕심쟁이 인생이 아닙니까? 다시 11절을 봅니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나발은 마치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와도 같습니다. 여기 부자가 어찌했습니까? 내 곡식, 내 곡간, 내 영혼, 내 물건 하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로 나발도 내 떡, 내 물, 내 양털로 자기 욕심만 부렸습니다. 그러나 함께 따라하십시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는 '돈의 복음'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돈 버는 방법, 돈 쓰는 방법, 그리고 돈을 가진 사람의 사회적, 교회적 책임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은 한 가자가 감명을 받고 편지를 썼습니다. 묻기를 '부자가 되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는 짧게 말했습니다. 가난하게 되는 것이 부자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카네기의 부자 철학이기도 합니다. 나발은 다윗이 보낸 축복의 말을 농가에서도, 침대에서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6절을 다시 봅니다.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얼마나 귀한 축복이고 얼마나 풍성한 축복입니까? 그러나 나발은 다윗을 멸시했습니다. 다윗은 나발을 이처럼 축복했는데 나발은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왜일까요? 다윗에게는 믿음이 있었고 나발에게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거철이 되었을 때 어떤 국회의원이 제사상위의 돼지머리에다 절을 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한 사람이 중얼거렸습니다. '돼지가 웃겠다' 사실 제사상 위에 놓인 돼지 머리는 자세히 보면 십중팔구 웃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인생들을 돼지도 비웃는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자문자답하십시다. 영육간의 평강을 누가 줄까요? 우리 가정의 평강을 줄까요? 누가 우리의 소유을 불어나게 할까요? 그렇다면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까요? 함께 따라서 하십시다. 은혜를 배반하지 맙시다. 이것이 성도의 참 모습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 70 고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운데도 70에 접근한 성도가 많을 줄 압니다. 그런데 저마다 100세 살 것같이 욕심을 부리고 있지 않습니까?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가지려고 욕심을 부립니다. 그러면서 인색하게 살고 움켜지고 살고 덕을 잃으며 살고 욕을 얻어먹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바울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그리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열번 따라서 하십시다. 은혜를 배반하지 맙시다.
셋째, 결국 버려진 나발.
38절을 함께 읽습니다.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나발은 어떤 사람입니까? 3절에 보면 "완고하고" 했습니다. 여기 완고하다는 의미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야비하다' 또 하나는 '고집이 세다' 생각하면 야비한 사람이 고집이 셉니다. 고집이 센 사람이 야비합니다. 이 두 가지는 분모와 분자와 같습니다. 아마 나발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와 같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또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말한 바리새인 같은 사람입니다. 나발은 다윗에게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발의 말이 무엇입니까? 10절에 보면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무슨 뜻입니까? 다윗이 도대체 누구냐?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다. 다시 말하면 전혀 다윗을 외면했다는 말입니다. 모른채 했다는 말입니다. 모른 사람 취급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남긴 말이 무엇입니까?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난 종이 많도다. 무슨 뜻입니까? 다윗은 최근에 주인 사울을 떠난 못된 종이니라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은혜를 끼친 다윗에게 이럴 수 있습니까? 지금 연말입니다. 성탄절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지금도 주님이 열 소년을 보내시고 계십니다. 때로는 양로원 노인을 위하여 우리에게 양속을 도와주소서.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고아원의 고아를 위해서 우리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소서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교도소에서 죄수들을 위하여 추위를 견딜 수 있게 양말이나 내의를 보내주소서.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양로원, 고아원, 교도소를 방문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은혜 갚는 일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지요.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25장 40절입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성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은혜를 배반하지 않고 그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이 입은 은혜중 부모의 은혜, 너무나도 소중하지요. 부모의 은혜를 입지 아니하는 성도, 한 사람이나 있을까요? 스승의 은혜도 대단합니다. 스승의 은혜를 입지 아니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친구의 은혜도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지난날을 메모해가면서 친구의 은혜에 대하여 보답하는 우리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부의 은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남이 만나서 한 몸처럼 사는 사람들이 부부입니다.
성격이 다르고 욕구가 다르지만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 부부입니다. 따라서 남편은 아내의 은혜를 배반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은혜를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고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잉꼬부부라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다시 본문을 보십시다. 열 소년을 보냈습니다. '내가 지금 어려우니 나 좀 도와달라' 간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외면했습니다. 열 소년이 돌아와 보고했을 때 다윗이 말합니다. 22절에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참 괴로운 표현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격분했습니다. 400명 군사를 무장시켜 나발을 응징하려 했습니다. 이때에 등장한 인물이 있습니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입니다. 아비가일은 남편과는 성향이 다릅니다. 그는 지혜롭고 현숙하고 아름답고 성품이 좋았습니다. 그는 영어로 'Peace maker' 평화롭게 만드는 여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상에는 만들어놓은 평화를 깨는 사람도 있는데, 그는 중간에서 부채질합니다. 이간을 부칩니다. 갈등을 만들어 냅니다. 불화를 냅니다. 형제의 가슴에 상처를 만듭니다. 주님이 요구하는 인물이 어떠한 인물입니까? 평화를 만드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성도가 어떤 사람입니까? ♬평화, 평화로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인 것을 잊지 마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평화를 만들며 살아가십시다. 또 아비가일은 은혜를 갚을 줄 알았습니다. 18절에 "떡 이백덩이, 포도주 두 가죽 부대, 양 다섯 마리, 볶은 곡식 오 세아, 건포도 백송이, 무화과 뭉치 이백을 나귀에 싣고 다윗에게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만난 아비가일은 남편의 실수를 내 실수처럼 여기고 용서해 달라고 했고, 다윗은 나발의 허물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이유는 하마터면 많은 피를 흘릴 뻔했는데 여인의 지혜로 말미암아 그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배은망덕한 나발의 결국은 무엇입니까? 다윗은 나발을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으리요. 다시 3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사랑하는 성도여! 한번 더 따라서 하십시다. "은혜를 배반하지 맙시다, 은혜를 배반하지 맙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