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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지연을 데려다주고 집으로 향하는 차 안.
도원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조금 전 지연이 했던 말에서도 느꼈지만 이제 슬슬 뭔가를 정리할 때가 왔다는 느낌이다.
그녀와의 관계도 그렇고, 애매하게 평행선을 달리는 연호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미 지연에게 감정이 식은 지는 오래였다.
헤어질 타이밍을 찾지 못해 지지부진 날짜만 흘러갔을 뿐이다.
그녀 또한 두 사람 사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서로가 서로에게 외형상으로 잘 어울리고, 또 결혼상대로 적절하지만 그것만으로 미래를 약속하기엔 뭔가 석연찮다.
룸미러로 뒷좌석에서 잠든 연호를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며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진다.
덜컥하고 차가 흔들렸다.
도로에 떨어진 물건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가버린 것이다.
가벼운 진동에 흠칫 놀라 잠이 깬 연호.
휘둥그레진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다 룸미러 사이로 도원과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너 술시중 들려고 고용한 줄 알아? 왜 걸핏하면 필름이 끊겨서 들어 오냐?"
마음과는 달리 불만스런 말투가 튀어나온다.
"미안하게 됐다."
"무슨 일인데 둘이 만난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딱 잘라 말하며 고개를 돌리는 연호를 보자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다.
"넌 아무 일도 아닌데 남의 애인이랑 단 둘이 만나 취할 때 까지 술 마시냐? 아니면 .. 생긴 거랑 다르게 남의 것에 손대는 못된 버릇이 있거나."
심술궂게 말하는 도원을 연호는 한껏 노려보며 대꾸했다.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좀 더 소중히 대하지 그래? 유지연씨 너한테 아까울 만큼 좋은 여자야. 정신 차리고 잘해."
"우습군. 언제부터 친했다고 편을 드는 거야? 그렇게 마음에 들면 네가 대쉬해 보던가! 친구 집에 얹혀사는 빚더미 신세지만 혹시 알아? 모성애를 발휘해 동정심을 베풀지도."
말하는 순간 아차 싶었다.
이미 내뱉었고 주워 담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도원은 내가 왜 이러지 싶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심할 말을 할 생각도 없었고, 진심에서 나온 말도 아니었다.
다만... 아까 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떠오르며 뭔지 모를 질투심에 화가 났다.
도원과는 달리 연호에게 좋은 사람으로 비춰지는 지연에 대한 이상한 질투심이었다.
설명하기도 힘든 미묘한 질투와 분노가 가슴속에서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뜻하지 않은 실언으로 튀어나와버렸다.
도원은 슬쩍 룸미러로 뒷좌석을 훔쳐봤다.
자신의 말에 뭐라 대꾸가 있어야 슬그머니 아까한 말은 실수였다는 사과라도 꺼낼 텐데 연호는 한 마디 반박도 없이 입을 꾹 다문 채 고집스레 창밖만 보고 있다.
도원이 몇 번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미동조차 않는 연호.
상처 입힐 말을 했다는 걸 알지만 도원의 입에서 순순히 사과의 말은 나오지 않는다.
결국 집에 도착할 때 까지 두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에 오자 연호는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대로 대화를 단절해 버리면 일이 더 꼬여버릴 것 같아 도원은 한참을 망설이다 연호의 방문을 노크했다.
"잠깐 얘기 좀 해"
잠시 후 연호가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화가 난 게 분명했지만 어른스럽게 냉정한 표정을 유지한다.
소파에 마주앉자 도원이 조금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앞으로 그녀와 둘이 만나지 마."
"네 애인과 내가 만난 게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연호가 차분하게 말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헤어질 생각이야. 그러니까 너도 따로 만나지 말란 뜻이야."
"헤어..진다고? 하지만..."
"그녀에 대해 더는 연애감정이 생기지 않아. 그런 무의미한 만남을 이어가봤자 둘 다에게 시간낭비일 뿐이야."
냉정한 도원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연호.
조금 황당하단 표정을 짓다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돌린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두 사람 일이니 제 삼자인 내가 뭐라고 할 자격은 없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실..."
침묵을 깨고 도원이 입을 열었다.
"자격이 없진 않아."
"뭐?"
뜬금없는 말에 눈썹을 찌푸리며 되묻는 연호.
"내가 지연씨와 헤어질 결심을 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게 바로 너니까."
"무슨 소리야?"
연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를 다시 만나고 나서부터 그녀와 사귀는 게 시들해졌거든."
"그러니까 그게 왜 나 때문이냐고! 괜한 사람 핑계대지마!"
"난 사실을 말할 뿐이야. 그녀를 만나는 것 보다 너와 보내는 시간이 더 좋아졌어. 그러니 이별의 절반은 네 책임이야."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진심이야. 그녀가 해 주는 요리보다 네가 어디 가서 누구랑 뭘 하는지가 더 궁금하고, 두 사람이 함께 술을 마셨다는 말에 그녀보다 네가 더 신경 쓰였으니까."
진지한 눈으로 말하는 도원.
연호는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몰라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서연호."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나랑 사귀자."
생각지도 못한 도원의 직접적인 제안에 연호는 놀라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욕실 안을 훔쳐보거나, 방문 앞을 서성대며 망설이는 것도 이제 그만두고 싶어. 그런 갈등 없이 우리가 사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거잖아."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멈춰있던 연호가 말했다.
"... 사귀자고? 너.. 날 좋아해?"
일말의 기대가 없었던 건 아니다.
혹시라도 만약 도원이 자신을 좋아해서 사귀자고 하는 거라면 기쁠거라고 마음 한구석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는 금세 무너졌다.
"글세.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런데 왜 사귀자고 하는 거야? 설마 단순히 나랑 자고 싶어서 사귀자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 ... ... 응??..."
뭔가 뜨끔한 마음에 짐짓 못들은 척 하는 도원.
연호가 소파 옆에 있던 TV리모콘을 집어던지자 도원이 순발력 좋게 한손으로 받아냈다.
"사귀던 여자랑 심드렁해지니 곧장 남자한테 손을 뻗냐? 세상에서 내가 제일 만만하고 쉬워 보이지? 고등학교 때 처럼 실컷 갖고 놀다 재미없어지면 버리려고? 내가 바보냐?! 한번 당하지 두 번 당해? 한번만 더 사귀자느니 안고싶다느니 헛소리 지껄이면 감자싹과 복어알로 만든 아침상 받을 줄 알아. 알았어?!!"
신랄하게 한바탕 쏘아붙이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성큼성큼 걸어 방으로 들어와 등 뒤로 문을 닫자마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100m를 전력질주 한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며 가슴에 손을 얹자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린다.
도원의 입에서 사귀자는 말이 나온 순간부터 연호의 심장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연호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건 단 한 사람 뿐이었다.
그토록 가슴 깊이 담아 둔 사람이 사귀자고 하는데 설레지 않을 강심장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제발 그 말이 진심이길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이미 한번 상처 입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고들 하지만 때때로 아물지 않는 상처도 있는 것이다.
가장 순수하고 소중했던 마음이 가볍게 취급당해 버린 기억은 뼛속 깊이 각인되어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러니 그의 말을 진심으로 믿어서는 안된다.
지금도 단순히 그때와 같은 호기심이 발동된 게 틀림없다.
분명 몇 번 잠자리를 함께 해 호기심이 충족되면 예전과 똑같이 이 관계를 흐지부지 끝내버릴 것이다.
같은 사람에게 같은 방법으로 두 번 상처입고 싶진 않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젠 정말 다시는 회복되지 못할 데미지를 입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자신을 보호할 방어막을 쳐야만 한다.
'그런 말에 현혹되지 마. 어차피 생각 없이 던진 말일 뿐이야...'
스스로를 타이르며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애써 진정 시켰다.
다음날 아침, 식탁에 앉은 도원이 반찬으로 나온 감자조림을 젓가락으로 쿡쿡 찔러본다.
어젯밤 연호가 한 협박이 기억나 아닌걸 알면서도 괜히 미심쩍은 마음에 찔러본 것이다.
"독 안 들었으니 먹어라."
연호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그제야 하나를 집어 입 속에 넣는다.
"요즘 입맛이 없어. 뭐 특별한 것 좀 만들어봐."
뭔가 할 말을 찾다 그냥 툭 내뱉어보는 도원.
"... 뭐가 먹고 싶은 지 말을 해. 그래야 해 주지."
"흠.. 지금 이 식탁을 봐봐. 내가 염소냐? 온통 풀밭이잖아. 저녁땐 소고기 사다 샤브샤브 해줘."
주는 대로 먹을 것이지 귀찮게 군다고 한 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식비 대 주는 사람이 먹고 싶다고 하니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알았어. 저녁때 해 줄게"
"가리비도 먹고 싶어. 수산시장에서 싱싱한 놈으로 사와."
"알았다고!"
하여튼 사람 성가시게 하는 데는 선수다.
그날 저녁, 연호는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부랴부랴 시장으로 달려갔다.
집에 오자마자 배고프다고 난리를 칠 테니 될 수 있는 한 빨리 가서 재료준비를 해 둬야 했다.
더운 날, 땀을 뻘뻘 흘리며 양 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달려온 연호.
옷도 못 갈아입고 앞치마를 두른 채 재료손질을 서둘렀다.
샤브샤브할 육수를 준비해 두고 손질한 가리비와 비싸게 주고 사 온 한우도 꺼냈다.
소스도 직접 만들어 한 상 푸짐히 차려낸 뒤 시계를 보자 8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왜 이렇게 안 와?"
식사준비는 다 해놨는데 정작 도원이 오지 않자 연호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벨이 울린 끝에 겨우 도원이 전화를 받았다.
-왜?-
"왜라니? 저녁 먹으러 안 와?."
-아, 저녁.. 미안한데 너 혼자 먹어. 나 회사에 일이 생겨서 늦을거야. 바빠서 이만 끊는다.-
"뭐? 여보세요.. 여보세요!"
채 대답을 듣기도 전에 끊겨버린 전화.
"뭐야! 일이 있어서 늦으면 미리 연락을 해야지!"
식탁 가득 차려진 화려한 밥상을 보자 더 화가 치민다.
늦지 않으려 회사에서 시장으로, 시장에서 집으로 평소에 안 타던 택시까지 타며 달려와 정신없이 차렸는데 이게 다 헛수고였다니...
회사에 일이 생겨 늦는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왜 미리 연락하지 않아 사람 헛고생을 시키는 지 정말 이해가 안 간다.
"나쁜 자식! 사람 물 먹이는 방법도 여러 가지네. 이 많은 걸 어떻게 혼자 먹어!"
씩씩거리며 밥상을 노려보다 그래봤자 무슨 소용있나 싶어 한숨을 내쉬며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 문뜩 옆집 사람이 떠올랐다.
"세훈씨 집에 있으려나?"
그 동안 몇 번이나 신세졌는데 한번도 제대로 답례를 못했다.
이 기회에 맛있는 저녁이라도 대접하면 어떨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물론 자신의 돈으로 차린 밥상은 아니지만......
연호는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옆집을 살폈다.
다행히 사람이 있는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서둘러 현관을 열고 나가 옆집 문을 두드렸다.
"서연호씨? 무슨 일이세요?"
세훈이 문을 열고 나왔다.
"저기.. 혹시 저녁 드셨어요?"
"아니요, 아직."
"잘됐다. 그럼 같이 드실래요?"
"저 초대하시는 거에요? 도원인 집에 있습니까?"
"아니요. 야근한대요. 사실 그 녀석이 샤브샤브 먹고 싶다고 해서 비싼 고기에 해산물까지 준비했는데 못 오게 됐거든요."
"좋아요. 그럼 제가 도원이 대신 맛있게 먹어드릴게요."
흔쾌히 초대를 받아들이는 세훈.
두 사람은 주인 없는 집으로 함께 들어왔다.
"와아, 끝내준다! 도원이 자식 매일 이렇게 호화로운 식사를 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매일은 아니고요."
"맛있다!! 맛있어요! 식당에서 먹는 거 보다 훨씬 맛있어요!"
적절하게 우러나온 따뜻한 육수에 야들야들 부드러운 소고기를 담가 소스에 찍어 한 입 먹은 세훈이 감동스런 표정을 짓는다.
"안됐다, 정도원. 이 맛있는 걸 못 먹고 회사에서 야근이라니. 쯧쯧쯧..."
말은 그러면서도 얼굴엔 하나도 안타까운 표정이 없이 맛있는 요리에 흠뻑 취해 행복하기만 하다.
"연호씨 요리 진짜 잘하시네요. 좋은 아내가 되겠어."
"네??"
"I was just joking"
"...아.... 네...."
세훈은 보는 사람이 기분 좋아질 만큼 맛있게 음식을 먹어치웠다.
그 모습을 보자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맛있게 먹어주시니 기분 좋네요. 식사 같이해 주셔서 고마워요"
"무슨 소리. 제가 더 고맙죠. 저기.. 가끔 밥 좀 얻어먹으러 와도 될까요?"
"물론이죠."
신난다며 한껏 들뜬 표정을 짓는 세훈.
"잘 얻어먹었으니 설거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손님이시니까 커피 마시며 쉬세요."
"손님은 무슨. 어차피 여긴 친구집인걸요. 제가 할게요. 제가."
세훈이 억지로 고무장갑을 뺏어 자신의 손에 꼈다.
"요리 하는 건 자신 없지만 치우는 건 잘 합니다."
생전 자신이 마신 컵 하나 치울 생각 않는 도원만 상대하다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설거지를 하는 세훈을 보자 마음 한구석이 푸근해진다.
오랜만에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설거지도 남이 대신해주자 너무 편하고 기분 좋다.
연호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소파에 기대앉았다.
TV를 틀자 9시 뉴스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문뜩 도원은 아직도 회사에 있을까 궁금해진다.
저녁은 먹었는지, 아침에 샤브샤브 해 내라고 고집부린 건 기억하고 있는지도...
기운이 없다는 둥, 컨디션이 안 좋다는 둥 궁시렁 댔는데 내일 아침엔 남은 소고기로 불고기라도 해 줘야지라는 사뭇 가정주부 같은 생각도 떠오른다.
전화를 해 볼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그냥 내려놓았다.
"커피 마실 거죠? 미리 탔는데"
어느새 설거지를 끝낸 세훈이 커피 두 잔을 들고 소파로 다가온다.
"제가 하려고 했는데.. 고맙습니다."
잔을 받으려고 손을 든 순간 다가오던 세훈이 소파 모서리에 다리가 걸리며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앗, 뜨거!"
그러다 하필 연호의 바지에 커피를 쏟았다.
"죄송해요!! 얼른 옷부터!"
뜨거운 커피에 흥건히 젖은 옷을 얼른 벗지 않으면 금세 화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당황한 세훈이 서둘러 연호의 바지를 벗겨내려 했다.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리고 바지를 끌어내리는 순간 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내 집에서 뭐하는 짓들이야?"
소파에서 속옷 차림으로 바지를 벗고 있던 연호와, 그걸 벗기고 있던 세훈. 두 사람은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붉으락푸르락 잔뜩 화가 난 표정의 도원이 눈을 부릅뜨고 서 있었다.
"둘이 뭐하냐고!"
마치 불륜현장 이라도 목격한 듯 충격적이라는 얼굴이다.
당황한 건 연호와 세훈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아닌데 도원의 반응이 그렇게 나오자 왠지 죄를 짓다 들킨 기분마저 든다.
"아니.. 그러니까.. 연호씨 바지에 커피가..."
"그..그래! 그냥 뜨거워서 벗으려고..."
"맞아! 그거야."
도원의 시선이 연호의 허벅지로 쏠린다.
속옷 아래로 드러난 맨살이 살짝 데인 듯 붉어져 있다.
"넌 그만 가봐."
도원이 냉정한 표정으로 말하자 세훈은 뭔가 찝찝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다 연호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이리 와."
세훈이 가고나자 도원은 연호의 팔을 잡아끌었다.
"왜이래! 이거 놔!"
방으로 끌고 가려는 것 같아 연호는 반항하며 붙들린 팔을 뿌리치려 했다.
"가만있어! 찬 물로 식혀야 할 거 아냐!"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움찔한 표정으로 얌전히 따라가는 연호.
자신의 방에 딸린 욕실로 연호를 데려간 도원이 샤워기에서 찬물을 틀어 연호의 붉어진 허벅지를 식혔다.
쓰라리고 화끈거렸는데 차가운 물이 닿자 아픔이 사라진다.
"이제 괜찮아."
"거실 장식장 서랍에 구급상자 있어. 안에 화상연고 있으니까 바르고 자."
"...응."
도원의 안색이 아침보다 나쁜 것 같아 연호는 망설이다 물었다.
"...일.. 많았어?"
"부하직원 하나가 실수를 좀 했어. 수습하느라 정신없었지."
"....... 저녁은 먹었어?"
"밥 먹을 시간도 없었어. 오늘 안에 넘겨야 하는 서류라 좀 전까지 미친 듯이 일하다 온 거야."
"지금이 몇 신데 아직 밥도 못 먹고..."
"온종일 시달리다 겨우 돌아왔더니 넌 한다는 짓이 딴 놈 앞에서 바지를 벗어?"
"그건 커피를 쏟아서 어쩔 수 없이..."
"나 대신 세훈이 놈이 늘어지게 포식한 모양이군. 그것도 모자라 네 바지까지 벗기고."
"그러니까 그건 커피 때문에..."
"앞으론 내 앞에서만 벗어."
"그건 또 무슨 억지야!"
"아무튼 그렇게 해!"
인상을 팍팍 써 가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걸 보니 오늘 꽤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저녁도 못 먹어 허기지고 짜증도 많이 났을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어디서 헛소리냐며 따지고 싸웠겠지만 왠지 오늘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다.
게다가 집주인은 일에 시달리느라 끼니도 거르고 있었는데 남의 집에 모인 객들은 비싼 한우에 가리비를 먹으며 만찬을 즐겼으니 뒤가 켕기기도 했다.
"저녁.. 차려 줄게"
연호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다리 괜찮아?"
"응. 심하게 덴 것도 아니니까. 찬물로 식혔더니 괜찮아졌어. 씻고 나와. 밥 차려줄게"
연호가 나가자 도원은 지친 표정으로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생각도 못했던 곳에서 일이 차질을 빚는 바람에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지칠 대로 지쳐 돌아왔는데 세훈과 연호가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자 정말 머릿속이 폭발해 버리는 줄 알았다.
오해할 상황이 아닌 줄 알면서도 아까를 떠올리면 또 화가난다.
그 무렵, 도원에게 쫓겨나 집으로 돌아온 세훈은 뭔지 모를 복잡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다 문뜩 손에 밴 커피향기에 가슴이 덜컥했다.
향기를 맡자 연상 작용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연호의 모습.
당황해서 붉어진 얼굴과 하얀 셔츠 아래 드러난 맨 다리.
만약 그때 도원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안세훈."
머릿속에 떠오른 발칙한 상상에 스스로가 어이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이내 부드러워 보이는 연호의 허벅지를 손으로 쓰다듬는 자신의 모습이 또다시 떠오르고 만다.
"음... 욕구불만이야. 요즘 병원이 정신없이 바빴으니까... 암, 그렇고 말고. 그렇지 않고는 남자한테 발정할 리가 없어."
자신을 잘 타이르고는 휴대폰을 열어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여자친구들 목록을 쭉 살펴보았다.
욕구불만이라 단정해 놓고 만나고 싶은 여자를 찾아봐도 딱히 끌리는 상대도 없다.
"아,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세훈은 여자 이름이나 뒤적이는 자신이 한심해져 휴대폰을 던져놓고 욕실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연호는 주방으로 가 도원의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곧 잘 거라 부담스럽지 않게 먹을 수 있는 반찬들로 상을 차렸다.
씻고 나온 도원이 식탁에 앉아 수저를 든다.
늦은 시간 혼자 멀뚱멀뚱 앉아 밥 먹기 싫을 것 같아 연호는 컵에 물을 따라 주며 식탁에 마주앉았다.
그릇에 젓가락 부딪치는 소리만 들릴 뿐 조용하다.
하지만 침묵이 딱히 불편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오히려 도원은 연호가 묵묵히 식사하는 걸 지켜봐주는 게 편안하고 안정되는 것 같았다.
온종일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리며 긴장감이 사라지는 느낌이랄까...
어쩌면 이래서 남자들이 결혼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경우에는 맞지 않는 예가 되겠지만 느낌만은 비슷할 지 모른다.
"역시 안 되겠어."
밥을 다 먹은 도원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뭐가?"
그릇을 치우려 일어서던 연호가 뜬금없는 도원의 말에 고개를 든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그러니까 대체 뭐가 안되냐고?"
"어제 내가 한 말 다시 생각해봐."
"무슨 말?"
"사귀자고 했잖아. 역시 이대로 지내는 건 싫어. 서연호, 나랑 사귀자."
"아직도 그 얘기냐? 내 대답은 어제 이미 들었지?"
도원이 연호의 손을 잡았다.
흠칫 놀라 쳐다보자 도원이 꽤나 진지한 눈빛으로 보고 있다.
연호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이내 눈길을 피했다.
"그때도 네가 먼저 말했었지."
"뭘?"
"고등학교 때 말야. 난 그냥 고백만 하려고 했었어. 사귀자는 말을 꺼낼 엄두도 못냈었지."
"아아... 그랬던가?"
"왜 그랬어?"
연호가 다시 고개를 돌려 도원을 바라본다.
"왜 그때 나한테 사귀자고 한 거야?"
"그건..."
"나와 똑같은 마음으로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알아. 처음에는 너도 날 좋아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기뻤었지만 곧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지. 아마 바보라도 깨달았을 거야. 네가 날 좋아해서 사귀고 싶었던 게 아니라 단순히 호기심이 동했을 뿐이라는 걸. 내 말이 틀려?"
물론 틀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수긍할 수도 없다.
그랬다간 당장 화를 내며 가버릴 것 같았다.
"약간의 궁금함도 있었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다른 녀석이 고백해 왔다면 틀림없이 욕이라도 한사발 해줬겠지. 너니까.. 너였으니까 호기심도 생긴거였어."
도원의 대답에 연호는 헛웃음을 지었다.
"훗.. 그래? 참 고맙네. 그렇게까지 특별하게 날 생각해 줬다니. 그럼 지금은 어때?"
"뭐가?"
"사귀고 싶을 만큼 나를 좋아하게 됐어? 그럼 고백부터 하는 게 순서 아니야?"
"음,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네가 나 아닌 다른 놈과 뒹구는 상상만 해도 화가 날 만큼은 널 생각하고 있어."
"그건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뺏기고 싶지 않은 어린애같은 독점욕일 뿐이야. 누굴 좋아한다거나 하는 감정과는 차원이 틀려. 너의 사귀자는 말에는 눈곱만큼의 애정도 느껴지지 않아. 네 말에 조금이나마 진심이 담겨있을 때, 그때가 되면 한번쯤 생각해볼게. 설거지는 씽크대에 담가놔. 내일 보자."
연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가버렸다.
홀로 남은 도원은 헝클어진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도대체 뭐가 이리 복잡한 걸까.
사랑이든 호기심이든 끌리는 상대에게 손이 가게 마련이다.
지금 도원에게 유일한 끌림의 대상은 연호였다.
어떤 감정이든 간에 누군가에게 이토록 끌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뜬금없이 생각나고, 외면당하면 속이 탄다.
다른 사람과 있는 걸 봐도 화가 난다.
좀 더 같이 있고 싶고, 바라보고 싶고, 또 손으로 만지고 싶다.
이런 마음인데 왜 조금도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걸까?
진심으로 끌리지 않았다면 남자와 자고 싶다는 마음 따위 들 리가 없다.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몸을 섞고 싶은 남자라면 연호가 유일할 것이다.
이 정도면 진심이라고 인정받아도 좋은 거 아닌가?
도원은 혼자 생각하며 자신을 받아들여 주지 않는 연호를 향해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려본다.
도원의 사귀자는 말을 거절한 지 일주일이 흘렀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뜬금없는 타이밍에 사귀자는 말을 해왔지만 연호는 들은 체도 안했다.
그렇게 거듭 무시하자 제 풀에 지쳤는지 일주일 쯤 지난 지금 그 말이 쏙 들어갔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시했지만 그 동안 연호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따금 도원이 "어때? 아직도 사귈 마음 없어?" 라고 툭 내뱉거나, "오늘은 사귀고 싶을 만큼 좀 멋있어 보이지 않아?"라는 농담을 던질 때면 무심한 척, 못들은 척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가슴이 뜨끔하고 심장이 철렁했다.
아직도 자신이 도원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일부러 놀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알게 모르게 차곡차곡 쌓이던 스트레스가 주말을 기점으로 폭발했다.
금요일 출근길서부터 으슬으슬 오한이 들고 쑤시더니 퇴근 무렵 완전히 몸살로 바뀌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스트레스의 근원인 집주인은 회사일로 주말 내내 지방출장이 잡혀있었다.
귀찮은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 약 먹고 푹 쉬면 낫겠지. 하는 생각에 퇴근 길 약국에 들러 약을 샀다.
하지만 그날 밤, 몸살로 시작된 감기는 점점 영역을 넓혀 편도선이 붓고 열이 올라 밤새 끙끙 앓았다.
아침이 왔지만 일어날 기운이 없어 침대에 널부러져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도원의 전화란 걸 확인하고 겨우 받았지만 목소리가 잘 나오질 않는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그냥 감기야..."
-심해? 얼른 병원에라도 가봐.-
내일 저녁때 가니까 먹고 싶었던 걸 해 놓으라고 말하려 했지만 심하게 아픈 듯한 연호의 목소리를 듣자 걱정이 앞선다.
"..응.. 이따가..."
-이따가는 무슨! 지금 당장 가!-
"알았어.. 무슨 일로 전화한 건데?"
-... 그냥 했어.-
"싱겁기는.. 그럼 이만 끊는다."
연호는 귀찮은 듯 휴대폰을 끊고 돌아누웠다.
아직도 열이 올라 머리가 욱신거리고 온 몸이 아프다.
병원에 가고 싶지만 몸을 일으키기 조차 힘겨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이 그저 침대에 누워 끙끙 거리며 앓기만 할 뿐이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평소 별 도움 안 되는 도원이나마 이럴 때 집에 있었더라면 병원에 좀 데려다 달라고 하는 건데....
라며 약해진 마음에 잠시 서운한 생각이 스친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다 인기척에 깼다.
뭔가 아까와는 달리 몸이 편해져 있었다.
이마위에 차가운 물수건이 올려져 있고 밤새 오른 열기에 땀으로 젖은 옷도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누군가 침대 옆에서 움직이는 느낌에 연호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정..도원..?"
출장 중인데 어떻게 왔지?..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어요?"
하지만 그의 머리맡을 지키고 있던 건 도원이 아니었다.
"세훈..씨? 여긴 어떻게..."
세훈은 연호의 팔에 꽂힌 링겔 속도를 조절하며 말했다.
"도원이가 전화했어요. 연호씨 아프니까 와서 봐달라고."
그러고 보니 아침나절에 도원과 통화했던 게 기억난다.
그가 걱정해 준 게 고마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날 뻔 했다.
"지금 링겔 놨으니까 곧 괜찮아 질거에요. 열도 많이 떨어졌고. 사온거지만 죽도 있으니까 기운 차리게 먹어둬요."
근무 중에 잠깐 나온 거라 세훈은 하얀 가운을 입은 체였다.
그에게서 희미하게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난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괜히 귀찮게..."
"무슨 그런 소릴 해요. 아픈데 의사가 와보는 게 당연하지. 도원이는 내일 오죠?"
"네."
"그럼 이따 퇴근하면 제가 여기로 올게요. 그때 새로운 영양제로 가져올게요. 맞고나면 정신이 번쩍 들고, 곰같은 기운이 솟아나는 녀석으로 가져오죠."
"이제 괜찮아요. 세훈씨도 일하고 오면 피곤할 텐데 그냥 집에 가서 쉬세요."
"감기는 확실히 치료해두지 않으면 금세 또 재발해요. 제가 올 때까지 죽 드시고 푹 쉬고 계세요."
세훈은 장난스런 웃음으로 연호를 안심시킨 뒤 병원으로 돌아왔다.
도원으로부터 연호가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 바쁜 시간을 억지로 쪼개 달려왔었다.
열이 올라 붉어진 얼굴로 흠뻑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연호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우선 열을 내려주기 위해 땀으로 젖은 옷을 벗겨내고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었다.
"무슨 남자가 뼈가 이리 가늘어."
마른 몸에 도드라진 쇄골. 납작한 배와 가는 허리까지 성인남자의 체형이라고 하기엔 빈약하기 그지없다.
목과 가슴, 배를 수건으로 닦아내자 묘한 기분이 세훈을 감싼다.
바지도 벗겨 속옷도 갈아입혀주고 싶었지만 이런 기분으로는 차마 할 수가 없어 상의만 바꿔주었다.
체온을 낮춰주고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주자 괴로운 듯 일그러져 있던 미간 사이가 펴지며 이내 편안한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을 보자 왠지 안쓰럽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한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세훈은 잠든 연호를 내려다보며 자신도 모르게 살며시 그의 뺨을 쓰다듬어 보았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살결이 닿자 말랑말랑한 입술도 만져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미끄러지듯 손가락이 움직이며 입술에 닿자 무의식중에 살며시 벌어지며 그 사이로 숨결이 새어나온다.
그 달콤한 숨을 손끝이 아닌 입술로 느껴보고 싶다는 욕구가 이는 순간 세훈은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연호가 눈을 떴다.
세훈은 방금 자신이 저지른 짓을 들키지 않으려 급히 링겔속도를 조절하는 흉내를 냈다.
다정한 이웃사촌에게 이런 음흉한 감정을 품었다는 게 들통나지 않게 얼른 의사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병원으로 향하는 세훈의 마음은 심란했다.
하지만 고민하는 것도 잠시 자신의 진료실로 돌아왔을 때 그는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을 깨달았다.
'역시.. 그 사람이 좋아.'
한번도 남자에게 이성의 감정을 품어본 적은 없었지만 이건 분명 그런 종류의 감정이었다.
고민하고 괴로워할 법도 하건만 그는 여타의 문제들은 제쳐두고 일단은 자신이 내린 결론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고 나자 머릿속에서 안개가 걷히며 모든 게 명확해졌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인해 가슴 떨리고 설렜던 게 얼마만인지...
그런 감정만으로도 괴로움 보단 흥분이 앞선다.
깨닫고 나자마자 당장 달려가 고백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연호가 자신의 감정을 받아줄 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고백하고 싶을 만큼 좋아하게 된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선생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뭘 그렇게 웃고 계세요?"
혼자 히죽거리는 세훈을 보며 간호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하하, 글쎄요"
세훈은 비밀스런 표정으로 어깨만 들썩일 뿐이다.
퇴근 후, 세훈이 도원의 집에 도착하자 어느 정도 기력을 되찾은 연호가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어준다.
그는 연호가 걱정되어 온종일 전화도 여러 번 했었다.
귀찮을 만도 했을 텐데 연호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괜찮다며 걱정 말라는 말 뿐이었다.
해쓱한 그의 얼굴이 안쓰럽기도 하고, 마냥 돌봐주고 싶은 애정이 가슴에서 샘솟아 그만 와락 끌어안을 뻔했다.
괜찮다는 연호에게 유명한 한정식 집에서 만든 잣죽을 안겨주었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뿌듯하다.
약을 먹이고 병원에서 새로 가져온 영양제를 놔 주었다.
회복기 환자들에게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기력을 회복하는데 좋은 약이었다.
약간의 진정제 성분이 함유되어 맞는 내내 편안히 잘 수 있을 것이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귀찮게 해드렸네요."
몇 번이나 이 말을 반복하는 연호에게 손사레까지 치며 절대 귀찮지 않다고 거듭 대답했다.
영양제가 어느 정도 들어가자 연호의 눈꺼풀이 무거워지는게 보인다.
어느새 잠든 연호의 몸에 시트를 잘 덮어주고 거실로 나왔다.
오늘은 도원이 없으니 연호를 돌봐줄 겸 그 집에서 머물기로 하고 소파에 잠시 누웠다.
그 순간 현관문이 열리며 집주인이 들어왔다.
"어떻게 왔어?"
분명 내일 온다고 한 도원이 이 늦은 시각에 나타나자 세훈은 깜짝 놀라 물었다.
"그 녀석 많이 아픈 것 같아서 대충 일 마무리하고 일찍 올라왔어."
"...그...래?"
세훈이 뭔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연호는 자?"
"응. 지금 막 잠들었어."
도원은 겉옷도 벗지 않은 채 그대로 연호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편안히 잠든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후에야 나왔다.
"근데 넌 왜 아직도 여깄냐?"
"아픈데 연호씨 혼자 있는 게 걱정돼서 함께 있어주려고 했지."
"나 왔으니까 이제 가봐."
도원이 냉정하게 말했다.
"좀 더 지켜보고. 밤에 또 열이 오를 수 있거든."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조금 날카로워진 말투.
"무슨 소리. 의사는 나야."
물러서지 않고 받아치는 세훈.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잠시 눈싸움이라도 벌일 듯 마주하던 눈빛을 세훈이 먼저 거두며 말했다.
"훗, 그만두자. 얼굴 보는 것도 오랜만인데 술이나 한잔 해. 맥주 있지?"
세훈의 제안에 도원 역시 날카로워진 신경을 누그러트리며 냉장고에서 캔맥주 두 개를 꺼내온다.
더운 날씨에 지방을 오가느라 피곤하기도 했고, 온종일 연호가 얼마나 아픈지 신경이 쓰여 조금 예민해 진 것도 같았다.
이런 저런 피로도 풀 겸 세훈과 마주 앉아 맥주를 마셨다.
하나 두 개, 테이블 위로 빈 맥주 캔이 늘어난다.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지나 새벽 1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런 저런 사소한 대화를 간간이 이어가던 두 사람.
잠깐의 침묵이 지난 후 세훈이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어."
"뭔데?"
"너와 서연호씨. 대체 무슨 사이야?"
"...... 뭐가 궁금한 건데?"
"단순히 고등학교 동창이야?"
"그게 왜 궁금하지?"
"글세... 왜일까."
"싱겁기는."
도원은 왠지 불길한 예감에 얼마 남지 않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세훈이 미리 준비한 듯 새로 딴 캔을 건넨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 진 모르겠는데.. 나 서연호씨 한테 관심있어."
예상치 못한 세훈의 말에 도원은 삼키던 맥주가 목에 콱 걸리는 듯 했다.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내 취향이 언제 남자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람이 신경 쓰인다고. 쑥스럽지만 오랜만에 가슴이 뛰기도 하고."
도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뭣 때문에 이리 충격을 받은 건지 알 수가 없다.
이웃 사는 제법 괜찮은 친구가 남자한테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충격인지, 아니면 딴 남자가 연호에게 관심을 갖는 게 충격인지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어. 근래 들어 부쩍 연호씨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어. 어디서 누굴 만날까, 뭘 먹고 있을까,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또, 날 어떻게 생각할까."
연호를 떠올리며 꿈꾸는 듯 기분좋은 표정을 짓는 세훈과는 달리 도원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간다.
"헛소리 집어 쳐. 넌 이성애자잖아. 뜬금없이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경계의 눈빛으로 내뱉는 충고에 세훈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듯 말을 이어갔다.
"그러게 말야. 나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어.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서연호씨를 이성으로 보고 있더라고. 사실 지난번 커피 쏟았을 때 네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나도 모르겠어. 어쩌면 방심한 틈을 타 덮쳤을 지도..."
"뭐라고?! 천지분간 못하는 짐승도 아니고!!"
자신이 저지른 짓은 생각도 않고 세훈에게 버럭 화를 내는 도원.
"나도 내가 짐승이라고 생각해. 열이 올라 정신없는 사람을 돌보면서도 틈틈이 몸을 만질 궁리나 하고 있었으니."
"이 자식이!!"
갑자기 맥주캔을 집어던지고 와락 세훈의 멱살을 잡은 도원.
깜짝 놀란 세훈의 눈이 커다래진다.
"무슨 짓이야! 이거 놔!"
세훈은 도원의 손을 억지로 뿌리쳤다.
"너야말로 왜 이래? 설마 너도 서연호씨한테 마음 있는 거야? 그래서 지금 나한테 질투하냐?!"
"지..질투는 무슨! 나는 그냥 네가 걱정되서..."
순간적으로 행동이 앞선 게 부끄러워 씨알도 안 먹힐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럼 말해 봐. 난 서연호씨를 좋아해. 넌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내가 왜 그걸 너에게 일일이 설명해야 하지?"
도원은 뭔가 자신도 아직 확신할 수 없는 감정을 입으로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짜증났다.
게다가 그 대상이 연호에게 호감을 갖게 된 세훈이라면 더더욱 싫다.
"난 알아야겠어. 조만간 그에게 고백할 거니까 네가 어떤 감정으로 그를 이 집에 살게 하는지 알아야겠다고. 친구 이상의 감정이 아니라면 그 사람을 내 집으로 데려가고 싶어"
"헛소리 집어쳐!"
"왜 그를 여기로 데려왔지? 아무리 친구라지만 이미 10년 이상을 연락도 없던 사이야. 왜 갑자기 서연호씨를 이 집으로 데려왔냐고?"
"그야......"
"네 감정을 솔직히 말해보라니까!"
쫓기듯 추궁 당하자 내가 왜 이런 질문에 쩔쩔매야 하는 건가, 라는 근본적인 짜증이 솟구친다.
"말해 보라고!"
"시끄러워! 네가 뭔데 닦달이야! 불쌍해서 데려왔다! 그 나이에 집도 절도 없이 거리에서 헤매는 게 불쌍해서 데려왔어!"
"그래? 그럼 네 감정이 단순히 동정심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지?"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알게 뭐야! 네 집으로 꺼져버려, 이 자식아!"
"좋아. 네 마음이 그런 거라면 내가 망설일 필요 없겠군. 내일 당장 서연호씨를 데려가겠어."
"안됐지만 그럴 순 없어. 그 녀석은 나한테 돈을 받고 있거든."
"...뭐?"
"한 마디로 그 녀석은 내꺼라는 얘기다! 그러니 내가 연호를 불쌍해서 데리고 있건 심심해서 데리고 있건 상관 말고 꺼져!"
도원은 세훈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현관 밖으로 밀쳐냈다.
문을 쾅 닫고 거실로 돌아오던 그는 복도에 서 있는 그림자 하나를 발견했다.
"언제...부터..."
연호가 어둠 속에서 멍 하니 서 있었다.
"..목이.. 말라서. 일찍..왔네.. 피곤하겠다, 그만 쉬어..."
어둠에 가려 연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는 말라버린 목구멍 사이로 떠듬떠듬 말하고는 뒤돌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목이 말라 잠이 깼지만 결국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돌아온 연호는 무너지듯 침대위로 쓰러졌다.
머릿속에서는 좀 전에 들은 도원의 말이 떠나지 않고 맴돈다.
불쌍해서 데려왔다! 그 나이에 집도 절도 없이 거리에서 헤매는 게 불쌍해서 데려왔어!
물론, 새삼스런 사실은 아니다.
만약 연호였어도 누군가 아는 사람이 갈 곳 없어 커다란 가방을 끌고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면 집으로 데려왔을 것이다.
그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연민의 감정 때문이다.
불쌍해 보여 동정심을 베푼 것이다.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듣고 나자 가슴 한 구석이 싸늘해지며 뻥하고 구멍이 뚫린 것 처럼 허무해졌다.
그동안 함께 살면서 다시 시작하자는 둥, 사귀자는 둥 이런 저런 얘기를 들을때면 콧방귀를 꼈지만 마음 한 켠에선 그도 나를 조금은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기대감도 가졌었다.
하지만 도원의 눈에 연호는 그저 어른이면서도 나잇값 못하는 불쌍한 옛친구이며 갖고 놀기 쉬운 장난감일 뿐인 것이다.
아는 사실을 확인받은 것 뿐인 데도 서러움은 가시질 않는다.
바보 같은 줄 알면서도 눈물이 났다.
다 큰 어른이 침대에 엎드려 볼썽사납게 우는 꼴이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습지만 한참동안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다음날, 이틀 간 몸을 괴롭히던 감기를 털고 일어난 연호는 제일 먼저 짐을 쌌다.
더 이상은 이곳에 머물기가 괴로웠다.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딱히 갈 곳도 없었지만 계속 이곳에 있기엔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불쌍하게 바라보며 동정을 베푼다는 건 결코 유쾌한 기분이 아니다.
그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비참할 뿐이다.
그동안은 당장 들이닥친 눈 앞의 현실이 힘겨워 그런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모른 척 지내왔지만 두 귀로 듣고 확인까지 한 이상 더는 버틸 힘이 없었다.
도원을 마주할 때마다 그의 눈빛에 담긴 동정이나, 비웃음,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건 더 이상은 사양이다.
아침식사를 차려주고 마주앉은 식탁에서 연호는 담담히 말을 꺼냈다.
"뭐?! 아침부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가긴 어딜 가! 갈 데나 있고?!"
버럭 화를 내는 도원에게 연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응. 전에 봐 둔 곳이 있어."
연호는 예전에 알아본 회사 근처의 고시원을 떠올렸다.
"안 돼. 넌 나한테 고용된 몸이란 거 잊었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동안 이 집에서 먹고 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돈 받을 수 없어. 짐 싸놨으니 오전 중에 나갈게"
"웃기지 마, 누구 맘대로."
"그동안 고마웠다. 덕분에 좋은 집에서 잘 지냈어."
"설마 너... 안세훈한테 가는 거냐?"
도원의 눈빛이 가늘어진다.
"뭐?"
연호가 무슨 뜻이냐는 듯 눈을 깜빡인다.
"이번엔 그 자식이 같이 살자고 제안했나보지? 얼마 준다고 했는데? 나보다 많이 준대?"
"무슨...뜻이야?"
연호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순진한 표정 집어치워. 내가 없는 사이 둘이 거래라도 한 모양인데 말해 봐. 그 자식이 얼마 준다고 했어? 그 대가로 나 몰래 벌써 잔 건 아니겠지?"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아무 말 못하고 있는 연호를 보며 도원이 차갑게 내뱉었다.
"얼마 받기로 했냐니까? 내가 더 줄 수도 있어."
연호가 옆에 있던 물컵을 집어 도원의 얼굴에 확 끼얹었다.
"너.. 진짜 저질이구나. 잠시나마 너 같은 인간을 믿고 이 집에 온 게 실수였어. 길에서 노숙을 하는 한이 있어도 오는 게 아니었는데..."
연호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자."
그는 방으로 가 미리 싸둔 가방을 들고 나왔다.
"서연호, 서연호!!"
도원이 부르는 소리를 무시한 채 연호는 현관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때마침 골목을 지나던 택시를 발견하고 급히 세웠다.
가방을 싣고 택시에 올랐을 무렵 다급히 뛰어나오는 도원의 모습이 보였다.
"아저씨, 빨리 가주세요."
연호의 재촉에 차가 급히 출발했다.
택시는 이내 모퉁이를 돌아 큰 도로로 접어들었다.
사라져버린 택시를 바라보며 도원은 거칠게 대문을 걷어찼다.
"제기랄!!"
쾅 소리를 내며 덜컹대는 대문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몇 번이고 연속 차버렸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지만 연호와 마주하면 늘 이런 식이다.
생각지도 않던 말이 튀어나오고, 의도치도 않던 방향으로 일이 전개되어 버린다.
왜 머릿속에 떠오른 말과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틀려지는 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다.
집을 나가는 그를 보자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데 떠나버리기 전 붙잡지도 못했다.
뒤늦게 뛰쳐나와 봤자 이미 그의 모습은 멀어지고 때를 놓친 후회만이 엄습해온다.
다급히 휴대폰을 꺼내 연호에게 전화를 했다.
이번에야 말로 미안하다고, 내가 실수했다고 솔직히 사과하고 돌아와 달라 말하려했다.
하지만 무심히 꺼진 전화기에 대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침부터 하늘은 눈부시게 맑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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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 너무 늦어서.. 그게 진짜 심하게 늦어서..
엄청 죄송스런 마음 뿐이에요. ㅜㅜ
진짜진짜 죄송해요!!
첫댓글 언능언능 다음 전개를!!!!!!!!!!ㅜㅜㅜㅜ 우리 도원이의 못된 심보때문에 속이 타 죽겠어요!!!! 엉어우ㅜㅜㅜㅜㅜㅜㅜ
어떻게 되는거야ㅜㅜ
아 잘되나싶었더니.. 또 어긋나버렸네요 ㅠㅠㅠㅠㅠㅠㅠ
하여간 도원이 저 입이 방정이네요...왜 속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고 저러는지원~~~
다음편 기대하고 있으게요.
너무너무너무 재미있어여!!!! 언능 다음 편도 올려주세요!!
아진짜 도원이 입을 꼬매버리고 싶네요 연호 너무 불쌍해요 ㅠㅠ
빨리빨리 오세요
아진짜 도원이 입을 꼬매버리고 싶네요 연호 너무 불쌍해요 ㅠㅠ
빨리빨리 오세요
윗분말에 공감해요. 왜 말을 저렇게 밖에 못 하는지... 다음편도 기대할게요
벌써 9월인데 데코님 어디계세요 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