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정태경을 방천시장에서 만나다
박윤배(시인)
H를 생각하니 봄비가 내린다. 사랑의 비가 내린다. 두 눈을 꼭 감아도 사랑의 비가 내린다. 나의 가슴 위에도 H의 가슴 속에도 사랑의 비가 내린다. H와 함께 구경했으면 좋을 복사꽃도 능수벚꽃도 이젠 지고 없다. 채소 모종을 심어야겠다. 사랑의 모종도 심어야 한다.
<중략>
H를 만난다. 봄비가 온다. H를 만나러 가야겠다. 벌써 우산을 두 개나 잃어 버렸다. 정신을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겠다. H를 바라본다. 그대가 나를 생각해주면 정신 연령이 낮은 사내가 되어 마냥 즐겁고 그대가 나를 멀리하면 그냥 섭섭해 마음이 허전해진다. 봄비, 봄비가 내린다.
봄비가 내린다. H를 만나러 가야겠다.
<하략>
-정태경(서양화가) 2011.05.03 매일신문에서
[좋은 생각 행복편지] 봄비 - H를 만나다. 어느 해 오월 신문의 칼럼 한 페이지에서 만났던 화가 정태경을 방천시장에서 만났다. 밤새 그림 작업에 몰두 하다가 정오의 약속에 부랴부랴 세수를 하고 달려 나온 화가 정태경을 만난 곳은 카페 <플로체>였다. 열쇠로 문을 열고 안내를 하길레, 이 카페를 운영하시냐? 는 말에 그는 빙그레 웃는다. 지난겨울 이 가게의 주인의 부탁으로 연탄불을 관리하다 보니 아직도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아! 자신의 가게도 아닌 카페의 연탄불을 겨울내내 관리해 주었다는 그의 말에 그가 이방천 시장 김광석 거리의 터줏대감임을 직감했다. 동시에 그가 얼마나 연탄불처럼 따뜻한 사람인가도 짐작이 갔다. 취재에 앞서 카페를 둘러보는데, 참 아담하고 동시에 아늑했다. 벽면에는 정태경의 그림을 포함한 몇몇 화가의 작품이 걸려있고 시인 김선굉을 비롯한 몇몇 낮 익은 시인의 시화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이 시인과 음악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화가들의 수시로 교류를 하는 곳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을 어떤 화가라고 생각하시냐고 말문을 풀자, 그는 화력 30년의 전업화가로의 화력을 들려주었다. 1981년 조금은 늦게 미술대학에 입학한 사연이며, 2011년 -2012년까지 대구현대미술가협회 회장을 지냈던 이야기며, 초창기 <우리>라는 정체성 찾기에 고민했던 작업의 고충을 이야기 했다. 성주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풀, 호박, 칸나, 시골풍경 등을 그려왔으며, 막연한 관찰을 넘어 파종하고 기르기를 통한 일상 속에서의 체험을 통한 관찰 표현에 한동안 매진했다 한다. 아마도 대개의 화가들이 소재중심으로 농촌풍경을 그리는데 비해 그는 육체적 노작행위를 통해 식물들이 씨앗에서 열매를 맺는 전 과정의 생애를 체득한 후 한 순간을 포착해서 식물적인 감수성을 화폭에 그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친 그의 그림세계는 상반된 도시의 일상도 놓치지 않는다. 근래 그의 작업에서는 도시 인물, 소외받은 사람 등이 등장하기도 한다. 최근 그의 그림의 제목들을 보면<나는 집으로 간다>,<나의 집은 어디인가>,<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등 현대화된 도시속의 인간들에게 집의 의미를 묻는 존재론적인 탐색에 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러한 현대화된 도시 삶들을 그려내는데 그가 선택한 것은 드로잉으로 보인다. 속도감을 가지고 휘고, 꺽고, 구부리는 선들 안쪽에 무한한 공간을 그는 숨길 줄 아는 화가다. 형상에 명암과 묘사를 덧보태지 않으려는 간결한 몸짓이 그의 작업 곳곳에 드러나 있다. 관찰자 혹은 독자를 윤곽 안에서 무한히 상상하게 하는 공간미학을 탄탄하게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덧붙여 말하기를 최초에 그림을 만나고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던 초심을 들려주었다. 일련의 이러한 작품들은 결국 그 꿈꾸던 화가의 첫 꿈을 향해 달려가는 한 과정임을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불편한 역사적 사건들의 참혹한 현장이며, 가창골학살사건등 일종의 민주항쟁 속에 숨겨진 유골들의 아픈 발굴 현장 등을 그림으로 밝혀 부끄러운 역사를 치유하려는 작가적 포부를 밝히고 있었다. 아무튼 정신의 아우라가 만만한 화가가 아님을 짧은 시간 동안의 대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슬쩍 무거워 지려는 이야기를 요즘 화가의 고민 쪽으로 말 머리를 돌리자, 먹고 사는 일로 화재가 옮겨졌다. 재료비의 문제 작가 복지 문제 등에 대해서 그는 이야기하고 있었다. 소수의 화가를 제외하고 대다수 화가들의 영세한 생활로 그림을 포기하는 현실 등이 거론되었다. 방천시장 내에서도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그는 팔을 걷었다. 그 방안으로 그는 협동조합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엉뚱한 질문 하나들 더 던졌다. 화가가 가난과 창작의 고민에서 정신적인 탈출구가 필요할 것이고 그것에 따른 사랑의 열정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라는 나의 질문에 그는 한참을 빙그레 웃더니, 봄비 이야기를 했다. 아마도 그에게도 사랑은 봄비 같은 존재였던가. 밭에서 그가 가꾸던 여러 가지 식물들이 그러하듯 2011년 매일신문에서 H로 명명했던 꿈같은 사랑이 그에 고된 작업의 활력이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 그것은 감성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육제적인 노동이 동반되는 예술적 특징을 지녔으며, 언제나 생각이 형상으로 그대로 드러나지 않을 때는 사랑을 해보라고 나는 권유를 아끼지 않았다. 삭막한 겨울의 세상 뒤에 봄비 같은 사랑이 궁핍한 현실들을 넘어서는 힘이 아니겠느냐고, 농담 반 진담 반 또 다른 출구가 될 것임을 여러 화가들의 생애를 들먹거리며 위로의 말로 늘어놓았더니 그도 수긍하는 듯 했다.
다시 한 번 작업방향과 변천과정을 묻자 화가 정태경은 이렇게 자신의 그림이 변한 것 같다고 했다. 처음 출발은 표현에 치중했고 그 다음은 생각위주로 바뀌었고 현재는 현실풍자를 물질 대상을 통해 우회적으로 드러낸다는 것 이였다. 90년대에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불안을 시리즈로 그리기도 했다고 한다. 엘리어트에게 영감을 얻었던 그는 심상의 황무지를 끊임없이 그려내므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만나고 있었고 시인들과도 그 무렵 많은 교류를 했다고 한다. 시와 그림은 자연스레 그의 화폭에서 어우러졌고 그런 작업을 통해 무력감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그는 말한다. 그 후 성주시대에는 식물성 탐색이 이루어졌고 이제는 도시의 길 찾기를 통해 역사적 불편한 진실들을 마주하고 있다. 큰 산 하나를 어찌 넘을 지 화가는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인접예술에도 그는 관심이 많다. 근래 만나고 있는 시인들은 이하석, 김선굉, 이구락이 있다. 소설가로는 문형렬 그리고 영상설치 미술가들, 무용가들..., 그는 요즈음 이렇듯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이러한 만남이 꿈꾸는 종극의 회화적 목적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는 미지수이기는 하나 어떻게든 발전적 변신을 줄 것은 자명하다. 기대가 된다. 그가 한동안 살아낸 성주 작업실은 가보지 못했지만, 방천시장을 중심으로 그가 활동하고 있는 문화 콘텐츠는 인접한 김광석 거리와 함께 찾는 인파로 보아 성공의 절반을 건너 온 듯 보였다. 욕심을 좀 더 낸다면 방천시장은 그대로 살리고 인접한 낡은 주택들을 정부차원에서 매입하여 무상으로 많은 화가를 꿈꾸는, 예술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분양되어 개방된다면 제법 참신한 소호街를 형성할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한 방천 시장의 주역으로 화가 정태경은 끊임없는 헌신과 노력을 보탤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 꿈은 소박했다. 첫째, 생활이 가능하면 좋겠다. 둘째 대구중심으로 활동은 하지만 세상 밖(지구촌)에도 자신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셋째, 미술사에 남았으면 좋겠다, 였다.
더불어 요즘 어수선한 시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세월호 사건이후 많은 창작의지들이 침잠된 분위기를 피부로 느낀다고 했다. 하여 자신도 기운을 차리는 데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그는 밝히고 있었다. 그렇게 대화를 마친 우리는 그가 방천 시장에 마련한 작업실을 찾아갔다. 미완의 여러 탐색으로 이리 저리 폐기될 그림도 있는가 하면 무성하게 자란 풀들 틈에 나뒹구는 그리다만 켄버스도 있었다. 심지어는 누군가 오래 쓰고 내다버린 자개상도 그에게는 소중한 대중성과의 소통을 위한 탐색에 어떤 영향이라도 줄 듯 수집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그의 작업현장은 방천시장의 축소판이었다.
화가 정태경의 집을 둘러보고 그와 힘께 취재팀이 찾은 곳 또한 허름한 식당이었다. 그곳에서 갓 찐 호박잎에 한 화가가 꿈꾸는 세상과 사랑을 쌈으로 싸먹을 수 있었다.
화가 정태경 프로필
JUNG TAE-KYUNG (정태경)
1954년 부산 출생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대학원 졸업
2011~2012 대구 현대미술가협회 회장
2011 금복문화상 수상
- 개인전 -
2014 수성아트피아 대구
2014 갤러리 강 진주
2013 Toma 갤러리 대구
2012 맥화랑 부산
Toma 갤러리 대구
2011 Toma 갤러리 대구
2010 리안 갤러리 창원
수성 아트피아 대구
외 30여회
- 주요단체전 -
2013 대구 미술의 사색전 대구미술관 외 300여회
작품소장처
포스코, 한화그룹, 부산시립미술관,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월드컵경기장 등
방천시장 풍경 취재
첫댓글 구경 잘 했습니다. 언제 우리 수업을 방천시장에서 한번 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네요
방천시장 나들이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김광석거리도 거닐고 카페 플로체도 가고 정태경화가님도 만나고 ㅎㅎ
누가 함께 가실 분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