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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에 해는 긴데 이르는 사람 없고/ 아직 남은 봄에 꽃은 반쯤 떨어졌네/ 한 번 백학이 날으니 천년동안 고요하고/ 솔솔 부는 솔바람 붉은 노을을 보내네.'(서옹 스님 열반송)
대한불교 조계종 제5대종정 서옹당 상순(西翁堂 尙純)대종사가 2003년12월 13일 오후 10시 10분 고불총림 백양사 설선당에서 좌탈입망에 들었다.
서옹 스님은 13일 평소처럼 아침 죽공양을 받고 오후에 상좌 스님들과 법담을 나누시다 후학들의 정진을 독려하는 ‘부촉의 말씀’을 남기고 평상시 정진하는 입정 그대로 입적에 들었다.
백양사 주지 두백 스님 “큰 스님은 며칠 전부터 ‘이제 열반에 들어야겠다’고 말씀하셨으나 ‘스님, 그렇게 말씀하시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고 서로가 웃었다”며 미리 열반을 예견하셨던 것으로 알려졌다.
두백 스님은 13일 저녁에도 “이제 가야겠다며 혜권 강사 스님을 찾았고 강사 스님이 방문여는 소리와 함께 입정한 그대로 열반에 들었다”고 입적 순간을 전했다.
완전밀봉 항아리서 사리 나왔다…서옹스님 다비후 4과 나와
최근 큰스님들이 잇따라 입적하면서 사리를 남겼다. 사리는 수행력과 무관하다는 것이 불교계의 정설이지만 일반인의 사리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
13일 입적한 서옹 스님은 다비 결과 4과(顆)의 사리가 나왔다. 4과는 일견 적은 듯 보이지만 서옹 스님이 주석하던 전남 장성 백양사의 독특한 사리 수습방법을 감안하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보통 사리는 다비 후 뼈를 모아 곱게 빻을 때 수습하지만 백양사는 별도의 방식을 쓴다.
우선 연화대(蓮花臺) 밑을 1m 깊이로 판 뒤 물을 3분의 2가량 담은 항아리를 넣는다. 항아리 입구를 한지로 막고 다시 뚜껑을 덮는다. 이어 뚜껑 위에 기와 2장을 놓고 다시 3cm 두께로 황토를 덮는다. 황토 위에 10cm 두께의 큰 돌을 올려놓고 다시 20cm 두께로 황토를 깐다. 이 위에 가로 세로 방향으로 기와를 서로 겹쳐 놓는다.
결국 항아리는 한지, 뚜껑, 기와, 황토, 돌로 완전 밀봉되는 셈. 이렇게 다비를 한 뒤 항아리를 개봉하면 그 속에 사리가 들어있다는 것.
백양사 총무국장 진우 스님은 “서옹 스님의 스승인 만암 스님이 1957년 입적했을 때도 똑같은 방식으로 8과의 사리를 얻었다”며 “과학적 근거는 모르겠지만 사리가 물을 찾아간다고 추측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전남 곡성 성륜사 청화 스님은 1000여과가 넘는 사리가 나왔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월하 스님이 주석했던 경남 양산 통도사의 경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어서 사리를 수습만 하고 공개는 하지 않을 예정. 한 관계자는 “월하 스님은 100과 정도의 사리가 나왔다”고 말했다.
전 조계종 총무원장 정대 스님은 200여과의 사리가 나왔으며, 태고종 종정을 지낸 덕암 스님도 200과 이상 수습됐다. 3월에 입적한 서암 스님은 따로 사리 수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교계에서는 경허 스님과 같은 고승도 사리가 나오지 않았다며 사리를 신격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우리 시대 최고의 선지식으로 꼽혔던 서옹 대종사. 2003년 12월 장성 백양사에서 좌탈입적(앉은 자세로 열반에 드는 것)한 서옹 큰스님의 서옹 스님 사리수습 어떻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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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잇따른 큰스님들의 열반과 함께 다비후 수습되는 사리(舍利)가 주목받고 있다.
사리가 세간의 이목을 받는 것은 일반적으로 ‘수행의 결정체’로 인식되기 때문. 사리에 관한 사전풀이에도 ‘참된 수행의 결과로 생겨나는 구슬모양의 유골’이라고 되어있어 신비함이 더한다.
그렇다면, 사리는 어떻게 수습하는가?
12월 16일, 서옹스님 법구가 다비될 연화대가 백양사 전통양식으로 설치되면서 그 답의 일부가 밝혀졌다.
먼저 열십자(+) 형태로 땅을 파고 중앙에 80cm 높이 항아리를 묻었다. 항아리는 고온에 깨지지 않도록 가마에서 잘 구어진 것으로 8부 가량 물(明堂水)이 담겨있었다.
한지로 항아리 입구를 덮고 그 위에 뚜껑을 덮었다. 고열로 구운 기와 5장으로 항아리 주위와 위를 감싸고 흙으로 덮었다. 50cm 크기의 정방향 자연석을 놓고 다시 20cm 두께 흙으로 평탄작업을 한 뒤 기와로 덮어 1차 작업을 마쳤다.
이날 백양사 연화대는 조계종 원로의원 수산스님의 고증에 따라 범혜스님(대흥사 선감)과 만당스님(불갑사 주지)이 직접 조성했다.
수산스님은 “사리는 정신결정체로 마음은 형체가 없지만 정진을 잘하면 형체없는 마음이 결정체로 나투는 것이다”며 “명당수에 맺힌 사리가 참 사리다”고 밝혔다.
일반적으로 사리라 하면 다비후 유골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양 또한 많게는 수백개에 이르지만 서옹 스님의 사리 4과가 이목을 끄는 것은 다비의식이 여느 사찰과 다르기 때문.
예로부터 각 사찰마다 사리 수습방법에 차이가 있어왔다. 그 가운데 백양사 다비의식은 독특해서 수행력 높은 큰 스님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사리를 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서옹 스님 사리수습위가 발표한 백양사 다비의식은 이러하다.
“ 백양사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다비장 설치법(이하 백양사 전통 다비장으로 명명)을 가지고 있다. ‘백양사 전통 다비장’은 지하 1m 깊이로 땅을 판 뒤, 판 곳 한 가운데 명당수(明堂水)로 2/3정도 채운 항아리를 안치한다.
열(熱) 때문에 항아리가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큰기와(大瓦)로 항아리 주변을 감싸며, 항아리 입구는 한지로 막고, 한지 위에 뚜껑을 덮는다. 뚜껑 위에 기와 2장을 놓고, 그 위에 3cm 두께의 황토를 덮는다. 황토 위에 다시 10cm 두께의 큰 돌(폭 70cm)을 놓고, 큰 돌 위에 20cm 두께의 황토를 깐다.
황토 위에는 가로 세로 방향으로 기와를 서로 겹치게 놓는다. 이 기와 표면과 지상(地上)과의 거리는 30cm로, 차이를 두는 것은 통풍(通風)을 위해서다. 다시 말해 항아리는 한지ㆍ뚜껑ㆍ기와ㆍ황토ㆍ돌로 완전 밀봉되며, 게다가 연화대로부터 30cm 떨어져 안치된다.
또한 ‘지하에 안치된 항아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4방향 지상(地上)에 2/3정도의 물(중앙의 항아리 물과 합쳐 이를 오방수(五方水)라 한다)을 담은 4개의 항아리를 놓고, 항아리 옆에 ‘동방 만월세계 약사유리광여래불’, ‘서방 극락세계 아미타여래불’, ‘남방 환희세계 보승여래불’, ‘북방 무우세계 부동존여래불’, ‘중방 화장세계 비로자나불’을 쓴 번(幡. 깃발)을 각각 세운다. 이것을 끝으로 백양사 전통 다비장 준비는 끝난다. 이는 땅 위에 곧바로 연화대를 마련하는 일반적인 설치법과 다르다.“
이처럼 밀봉된 항아리의 명당수에서 사리가 수습된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 예로부터 명당수에서 수습한 사리를 일러 ‘참사리’라 한다.
여기서 명당수는 수행자의 맑은 기운이 맺히는 곳으로 평소 수행하고 살아왔던 그 모습 자체가 그대로 투영되는 것이다.
서옹 스님 다비수습위원장 수산 스님(불갑사 조실)은 “다비후 명당수는 천태만상으로 나타난다. 대부분 물이 회색이나 누런색으로 변하기도 하고 맑은 물만 나오기도 한다. 심지어는 검은재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며 “명당수에 사리가 나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며 만암 스님 다비후 8과가 나왔고 그 제자인 서옹 스님에게서 참사리가 나왔다”고 말했다.
전국 사찰의 다비장 설치를 도맡아 해온 범혜스님에 따르면 “사리는 극양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습기를 좆아 어느 곳이든 들어간다”며 “항아리 입구가 막혔지만 물을 찾아 항아리를 투과해 결정체로 남는 것이 사리이다”고 사리의 생성과정을 설명했다.
예로부터 사리는 항아리 명당수에서 수습된 것을 1차사리로 분류하여 으뜸으로 쳤다. 전통 다비장에는 외곽 4군데 땅속에 물 항아리를 묻고 깃발을 세워둔다. 명당수로 들어가지 못한 사리를 받기 위한 것으로 이것이 2차사리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뼈에 묻어있는 것이 3차사리이다. 이번 서옹스님 다비장에도 사방에 물 항아리를 묻는다. 그러나 다비장 주위에 계곡물이 흐르고 연못이 있어 사리가 어느 곳으로 갈지 예측 할 수 없다.
이렇게 항아리 명당수에 생성된 참사리는 형성과정도 믿기지 않지만 깨지거나 열에 녹지 않으며 분자나 원자구조가 발견되지 않아 예로부터 그자체가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되고 있다.
2차 작업은 평평해진 연화대위에 관을 넣을 감실을 마련하고 참나무 장작과 숯으로 연화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앉아서 좌선하는 자세로 입적에 든 서옹스님 법구를 위해 감실은 150cm 크기의 정사각형으로 제작됐다.
이날 완성된 백양사 다비장 연화대는 1957년 송만암 스님 다비이후 근 반세기만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됐다.
조계종 제5대 종정 서옹스님
[떠나고 남기고] 성철스님 이후 최고 禪師 백양사 방장 서옹스님 "이제 가야겠다" 하시더니 앉은채 열반 간디자서전 읽고 불교접해 고교졸업때 출가
2003년 12월 13일(토요일) 입적한 백양사 방장 서옹(西翁) 스님은 성철(性徹) 스님 이후 최고의 선사(禪師)였다.
스님은 이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백양사 설선당(說禪堂)에서 아침 죽 공양을 하고 오후에 상좌 스님들과 법담을 나누며 후학들의 정진을 격려했다. 스님은 저녁에 주지 두백 스님 등에게 “이제 가야겠다”고 말한 뒤 앉은 자세로 좌탈입망(坐脫立亡)한 것으로 전해졌다.
스님은 임종 직전까지도 오랫동안 시중을 들어온 시자 호산 스님과 선문답을 주고 받는 선장(禪匠)의 면모를 보였다. 백양사측이 전한 그 모습은 이랬다. 서옹 스님이 일렀다.“호산. 호산. 동서남북에서 눈 밝은 사자새끼가 나온다. 동서남북에서 용맹스런 사자새끼가 나온다. 호산! 속히 일러라. 속히 일러라.”호산 스님이 벽력같이 할(喝)을 했다. 서옹 스님이 말했다.“발 밑을 보아라.”두 사람은 마주앉아 빙그레 웃었다.
1912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스님은 양정고보에 다니던 열 일곱 살 때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한 해에 돌아 가신 데 절망하다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무교회주의자였던 김교신 선생의 영향으로 마하트마 간디 자서전을 읽으며 불교와 접하게 됐다. 주변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에 갈 것을 권했으나 “인생의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1932년 양정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백양사에서 만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서옹 스님은 오대산 상원사 한암 스님 문하에서 탄허, 고암, 월하 스님과 함께 본격적 참선 수행을 시작했으며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에서 2년, 일본 임제종 묘심사파에서 운영하는 교토 임제대학에서 2년 동안 근대식 교육을 받았다.
귀국 후 백양사 해인사 동화사 파계사 봉암사 등을 돌며 공부와 수행을 계속했으며 62년 동국대 대학선원장을 지냈고 천축사 무문관, 동화사, 봉암사 등의 조실로 수좌들을 지도했다. 스님은 늘 수좌들에게 “순수하면서도 용맹스럽게 하라”면서 그야말로 목숨을 바치는 듯한 자세로 공부하라고 강조했다.
또 기회 있을 때마다 “수행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화두를 들고 정진하는 게 가장 간단하고 병폐도 없다”며 참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스님은 1967년 어느 날 백양사 쌍계루 아래 돌다리 사이로 흐르는 물살을 보고 문득 대오하여 전에 없던 초탈의 경지를 맛보았다고 한다.
스님은 74~78년 조계종 5대 종정 재임 때 ‘부처님 오신 날’이 공휴일로 제정된 것을 보람으로 여겼다. 이후 줄곧 백양사에 주석했으며 96년부터는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으로 후학들을 지도했다.
스님은 특히 말년에 “종교적 생명력이란 허무한 인간을 극복하고 초월하여 자기 밑바닥에 있는 참다운 인간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라며 백양사에 참사람 수련원을 개설하는 등 ‘참사람 운동’을 펼쳤다. 4월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 스님이 찾아왔을 때도 임제 스님의 참사람(眞人) 정신을 강조했다.
스님은 ‘임제록 연의 ’‘선과 현대문명’‘참사람결사문’, 법어집으로는 ‘절대현재의 참사람’‘사람’등의 저서를 남겼다.
임종게
“임제의 한 할은 정안을 잃어버리고/ 덕산의 한 방은 별전지가 끊어지도다.
이렇게 와서 이렇게 가니/ 백학의 높은 봉에 달바퀴가 가득하도다.”
(臨濟一喝失正眼 / 德山一棒別傳斷 / 恁麽來恁麽去 / 白鶴高峯月輪滿)
서옹스님 '坐脫立亡' 장면공개
전남 장성 백양사 방장 서옹(西翁) 스님이 13일 밤 좌선하는 자세로 입적(좌탈입망ㆍ坐脫立亡)한 장면이 15일 공개됐다. 밝은 황토색 바지와 적삼을 입은 스님은 왼 발을 오른 발 위에 올리고 오른 손을 왼 손 위에 올리고 있다. 장의위원회는 앉은 모습 그대로 입관해 19일 백양사에서 다비식을 치를 예정이다.
‘좌탈입망’은 참선 수행을 오래 한 선승 가운데서도 드물게 보는 일로 높은 법력(法力)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가까운 예로는 지난달 22일 세수 90세로 입적한 태고종 전 종정 덕암(德菴) 스님이 있었다.
덕암 스님은 수행의 경지가 높아 태고종 내에서는 조계종 전 종정 성철(性徹) 스님과 비견되기도 했다. 근세 고승 가운데 오대산 상원사 방한암(方漢巖) 스님의 좌탈입망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서옹 스님의 은사였던 송만암(宋曼庵) 스님도 좌탈입망했다.
자료출처: 한국일보
“큰 스님 불 들어 갑니다. 빨리 나오세요.”
13일 밤 참선하던 모습 그대로 입적한 조계종 전 종정 서옹 스님의 다비식이 19일 오후 눈이 내리는 가운데 전남 장성 백양사에서 거행됐다. 눈발 사이로 피어 오른 흰 연기를 타고 스님은 이승을 떠나 열반에 들었다.
조계종 법전(法傳) 종정과 법장(法長) 총무원장 등 스님 2,500여 명과 각계 인사, 신도 등 3만여 명이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았다.
법전 스님은 영결 법어를 통해 “노승의 진면목은 아득하고 심오하다”고 추모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조윤제 경제보좌관이 대독한 조사에서 “대종사께서 남기신 동체대비(同體大悲)의 가르침을 소중한 좌표로 삼겠다”고 애도했다.
다비식은 낮 12시50분부터 거행됐으며 20일 오후 습골 등의 절차를 거쳐 마무리된다.
사진출처: 국회사진기자단
[중앙일보 기사] 지난 13일 92세를 일기로 앉아서 입적했던 서옹 스님이 19일 평소 자신이 설법하던 우주의 영원한 품에 안겼다.
이날 전남 장성군 백양사에서 3만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행된 다비식에서 스님은 처음 그를 만들었던 한줌의 흙으로 되돌아갔다.
조계종 최고의 선승으로 꼽혔던 스님은 생전에 '인생은 등불'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잠시 밝았다가 꺼져버리는 등불에 비유한 것이다.
스님의 엄격한 수행 정신은 유명하다.
화장실에서도 휴지 세칸을 절단해 꼬깃꼬깃 접어 사용할 정도로 근검 절약 정신이 몸에 밴 것은 물론
일제시대 단절된 위기에 놓였던 한국 불교의 선풍(禪風) 진작하고,
선문(禪門)의 기강을 세우는데 진력했다.
특히 올해는 고인이 생전에 교류했던 성철 스님이 입적한지 10주년 되는 해였다.
서옹 스님은 평소 성철 스님의 사진을 곁에 두고 "저 분이 나보다 몸이 좋았는데 일찍 가셨어"라며
아쉬워했다.
조계종 제5대 종정 서옹스님 사리
지난 19일 다비식을 치른 조계종 제5대 종정 서옹당(西翁堂) 상순(尙純) 대종사의 법체에서 나온 사리. 4과(顆) 모두 백옥빛을 하고 있으며 2과는 쌀알보다 약간 크고 나머지는 작다.
<서옹 스님 사리탑 비문>
曹溪宗五代宗正古佛叢林白羊寺方丈西翁堂石虎大宗師舍利塔碑幷序
全羅南道長城郡北下面白巖山에있는大韓佛敎曺溪宗第十八敎區本寺白羊寺說禪堂에머무시던古佛叢林方丈西翁堂石虎大宗師께서佛紀二五四七年西紀二千三年癸未陰十一月二十日世壽九十二歲로坐脫하셨다大宗師께서는西紀一九十二年壬子陰十月十日忠淸南道論山郡連山面松亭里에서李範濟居士님과金地貞女史님사이에서외아들로誕生하시니이름은商純이었다여러賢人들이거의初年엔不遇했듯이大宗師께서도七歲에아버지를死別하시고祖父昌眞翁에게漢文을배우다가十一歲에연산公立普通學校에入學하셨으나다음해에는어머니와祖父를모두잃으셨다十六歲에서울養正高等普通學校에入學하시어二十一歲에卒業하셨는데그간의見聞이씨가되어佛敎를배우기로決心하시고中央佛敎專門學校에入學하셨다여기서曼庵老師의聲華를듣고는그해여름放學을期해白羊寺로찾아뵙고出家의뜻을사뢰니그해百種日을期하여曼庵스님에의해尙純이라는이름으로得度하시니釋迦世尊後第七十六世法孫이되신다그뒤로曼庵老師께서는尙純沙彌를極히사랑하시었으니大宗師께서도每事에謹嚴精巧하셔서大衆스님네의사랑을독차지했다한다二十四歲되시는해佛專을卒業하시고本寺에돌아오셔서二年間講院의外典講師로服務하시다가曼庵老師의周旋으로二十六歲되시는해五臺山漢巖老師의會上에가셔서二年間精進하셨다二十八歲에日本京都에있는臨濟宗立花園大學에入學하셔서三年만에卒業하시고다시臨濟宗總本山인妙心寺禪院에入房하시어三年을채우시니學問의幅을넓히시고좋은學者들을만나고如佛이라는呼稱을받는等얻으신바도많았지만皇宮遙拜를避하는일殖民地出身이라는蔑視를참는일은매우힘들었다고述懷하셨다三十三歲에歸國하시어本寺禪院과釜山仙巖寺海印寺堆雪堂等을오가시며禪定을닦으시다가西紀一九五六年丙申四十五歲되시는해本寺禪院에서여름을지내시던어느날無心히雙溪樓아래로흐르는물을보시는瞬間廻光하시고다음과같은悟道頌을읊으셨다象王嚬伸獅子吼閃電光中辨邪正淸風凜凜拂乾坤倒騎白嶽出重關상왕은위엄을떨치며소리치고사자는울부짖으니번쩍이는번갯불가운데서邪와正을분별하도다맑은바람이늠름하여하늘과땅을떨치는데백악산을거꾸로타고겹겹의關門을벗어나도다그리고는籌室로가서스승님께請益하니曼庵老師께서도매우洽足해하시며다음과같은偈文을내리셨다示西翁堂石虎丈室西來第一旨輓近甚解弛賴汝主人翁振作大綱紀서옹당에게이르노라서쪽에서온으뜸가는진리요즘너무나해이해졌구나그대주인공되어활발히기강을진작시키라고하시고傳法偈를주시니白巖山上一猛虎深夜橫行咬殺人颯颯淸風飛哮吼秋天皎月冷霜輪백암산위한사나운범이한밤중에돌아다니며사람을다물어죽인다서늘하고맑은바람일으키며날아울부짖으니가을하늘밝은달빛은서릿발처럼차갑도다라고하시고石虎와西翁이라는法號를동시에주시었다그러나大宗師께서는조용히덮어두신채精進을繼續하시는데이듬해正月十日스승이신前宗正曼庵老師께서入寂하셨다曼庵老師께서는宗正으로서宗團의淨化를提唱하시어敎團的인呼應은얻었으나그方法論에들어가異見이생겨宗正職을自退하시고落鄕하여계시던터였기에大宗師님께는어려운시대狀況임에도超然히對應하시어西紀一九六二年淨化佛事가一段落됨에敎區本寺大屯寺初代住持를비롯한東國大學校大學禪院長天竺寺無門關祖室等所任을맡으시어淨化初期敎團의새기틀을세우셨다이어日本으로가셔서弟子泰然스님과함께第二次大戰때徵兵徵用으로끌려가犧牲된同胞들의遺骨二三二九位를日本各處에서모아西紀一九六八年二月京都에있는高麗寺에慰靈塔을세우셨고이듬해여름大邱桐華寺에서祖室請狀이있자묻어두었던堂號와傳法偈를公開하시고바야흐로後進啓導에나서시었으니桐華寺에이어六十歲부터六十二歲까지聞慶鳳巖寺祖室을맡으셨다가六十三歲되시는西紀一九七四年八月三日부터一九七八年三月까지大韓佛敎曺溪宗第五代宗正에推戴되셨다宗正에就任하시자바로스리랑카를訪問하시어佛敎的友誼를敦篤히하시는한편佛敎指導者들의協助를얻어우리나라와의國交開通의土臺를만드셨고西紀一九七五年一月十四日부처님오신날을國家公休日로制定하셨으나宗風刷新을强調하시다가强한反撥에마음아파하시기도하셨다七十七歲되시는해三月本寺로돌아오셔서禪寂을누리시다가八十四歲되시는해에는佛敎放送을通해“참사람結社”를宣布하시니大衆의敎化를念願하셨기때문이요八十五歲되시는해十月二十五日에는당시주지인지선에게지시하여宗團에承認을받아韓國最初의叢林인古佛叢林을復元하시고方丈에오르시니家裡事를챙기시려는뜻일것이요그뒤로두차례에걸처白羊寺에서國際無遮禪會와全國無遮大會를여시니禪客들의眼目을높여주시려는뜻이리라이렇듯하실일을거의다마치셨는가西紀二千三年陰十一月二十日白羊寺說禪堂?花室에서雲門日永無人至猶有殘春半落花一飛白鶴千年寂細細松風送紫霞운문에해는긴데이르는사람없고아직남은봄에꽃은반쯤떨어졌네한번백학이날으니천년동안고요하고솔솔부는솔바람붉은노을을보내네라는涅槃頌을남기시고端正히앉아坐脫하시니世壽는九十二요法臘은七十二歲시다七日만에道俗이雲集하여曹溪宗團葬으로茶毘를奉行하니茶毘後中央明堂水에分身하신舍利가네顆요拾骨에서얻은舍利가五百餘顆니이또한매우稀有한일이다오늘造成한浮屠에舍利를奉安하고그곁에이碑를세우니門下의龍象은末尾의芳名과같다大宗師의著書로는<臨濟錄演儀><禪과現代文明><참사람結社文><絶對現在의참사람>等이있다아!이무딘凡夫의붓끝으론더以上어쩔수없어애오라지두어聯의銘을붙여未盡한讚嘆에가름한다
銘曰乘緣斯來李門商純祝髮曼老石虎其名叩以象王嚬呻許以東土西翁隨處作主宣揚眞人逢場作戱能理能事亨壽九二良
醫稱病坐脫兀如傳付家業囑以殘春新條有賴分身淨骨?臼斯盡頑石記傳只遮素後言前消息更待明眼
佛紀二五四九年西紀二千五年乙酉陰十一月十九日
白坡後孫東國譯經院學人月雲海龍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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