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빛 양산을 펼쳐 줄게. 8월의 태양이 뜨거운 열기를 뿜을 때, 넓은 잎사귀로 서늘한 그림자를 만들려고 해. 하얗게 꽃 등을 피워 줄게. 연못이 흙탕물처럼 어두우면, 환하게 연 등을 밝혀주리. 벽련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차가운 물속에서 나는 그 목소리가 따스하다. 이슬을 먹고 피어난 듯 순수하지만, 순진함에서 배어나오는 어눌함조차 없는 고고함이 신비스럽다. 물기 머금은 눈빛은 보는 이에게 마음의 평온과 위안을 준다. 매년 여름, 연꽃을 보러 가고 싶었다. 동양 최대라는 무안 연꽃 축제에 가보려고 벼르기만 하다가, 금세 꽃은 져버리고 때를 놓쳐왔다. 그저 일상 속에서 세월만 흘려보내다가 사라지는 것이 삶이런가. 오늘은 연꽃 만나러 가는 날. 먼 곳까지 가야하는 큰 연꽃 단지는 아니더라도, 가족끼리 가까운 운악산 봉선사 연꽃을 찾게 된 것만도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가. 사찰로 들어가는 길가에 푸성귀들이 자라나고, 좁다란 도랑에는 맑은 물이 흐른다. 검정색 날개가 흑기사마냥 귀족풍의 빛을 뿜는 물잠자리가 앞장서서 날며 연지로 향한다. 드문드문 붉은 고추가 열린 고추밭, 초록색 콩밭이 줄을 잇고, 그 옆 깨밭에는 자그마한 참깨 꽃들이 연보라색빛 초롱처럼 올망졸망 매달려 연꽃 보러 가는 길목을 밝힌다. 저만치서 하얀 얼굴의 차분한 여인이 나를 반기는 듯 목을 빼고 손짓하고 있다. 바로 오늘 내가 만나러 온 반가운 이가 아닌가. 백옥같이 흰 피부의 미인이 온몸에 녹색 비단 너울을 휘감고 있는가. 연이어 눈에 들어오는 백련 송이들이 연못 여기저기 피어나 있다. 꽃송이가 크고 소담스러워 과연 심청이가 타고 다시 환생할 만하다. 육지 꽃의 여왕은 장미나 모란일까. 혹은 다른 꽃일까. 연꽃의 아름다움은 수중에서 핀 꽃의 여왕이라 할 만큼 빼어나다. 마직 봉오리 진 연꽃, 활짝 핀 연꽃, 더러는 연밥이 맺힌 것도 눈에 뜨인다. 우리의 옛사람들은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일컬어, 품성이 군자와 같이 고결하다는 뜻으로 사군자라 불렀다. 순결한 백련의 환대에 감동받은 나는 문득 왜 사군자에 연꽃을 넣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함께 구경하던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사군자에 무엇 무엇이 들어가던가.” 하고 남편은 건성으로 말한다. “매梅 난蘭 국菊 죽竹…” “그럼 연蓮이 들어갈 자리가 없잖아.” 나는 남편의 실없고 성의 없는 대답에 웃고 만다. 사군자가 사계절을 상징한다고는 하나, 만일 계절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면, 매화 난초 국화는 꽃인데 대나무 대신 연꽃이 들어가도 될 법하지 않은가. 송나라 주렴계가 쓴 <애련설>에도 연꽃이 꽃 중의 군자라 하지 않았는가. 어쩌면 연꽃은 물속에 산다고 사군자에서 빼버린 것일까. 오히려 연꽃은 속세를 떠나 초연하다고 해서 제외한 것은 아닐까. 매 난 국 죽이 성품이 고매한 군자들이라면, 연꽃은 그보다 무언가 초월한 해탈의 경지에 있는 존재로 보아 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연꽃이 관세음보살처럼 고요히 피안의 소리를 듣고 있다. ‘온 우주(Om)에 충만하여 있는 지혜(mani)와 자비(padme)가 지상의 모든 존재(hurm)에게 그대로 실현 될지라’는 뜻의 ‘옴마니반메홈’이란 육자진언(六字眞言)이 떠오른다. 반메는 연꽃으로 무량한 자비를, 마니는 지혜를 의미한다. 옴은 태초 이전부터 울려오는 에너지를 뜻하는데 성음(聖音)이라고도 하고, 홈은 우주의 개별적 존재 속에 담겨있는 소리로서 우주소리를 통합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어려운 말씀이라 내가 이해하기는 어려워도, 진언을 잘 외우면, 자비와 지혜를 증진시킬 수 있다니 오묘하지 않은가. 이곳 연지에는 홍련은 보이지 않고 백련만 피어나 있다. 하얀 연꽃이 성모 마리아처럼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느님께 지혜와 사랑을 전구해달라고 간절히 기원하고 싶어진다.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질 때 나의 뺨에 번져오는 미소는 따사로운 아침 햇살 같다.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질 때 내 가슴에 스며나는 기쁨은 혼탁한 연못에 피어나는 맑고 고운 연꽃과 같다.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질 때 내 영혼에 피어오르는 감사는 나의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한 숨결 같다. 연꽃이야말로 태어난 물가를 떠나본 적이 없지만, 깨달음의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우주처럼 둥그렇게 넓은 잎 사이에 피어나 깨달음의 등불로 하얗게 타오른다. 물속에서 피어나서 늘 저토록 깨끗할까. 지는 순간까지 의연한 꼿잎. 나도 사는 동안 한결같이 누구에게 백련의 평화와 위로를 전해주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값진 인생이 되겠는가.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나는 한참동안 연꽃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서 있었다.
(도월화 님의 수필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