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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 맥(婚脈)으로 이어진 고구려(高句驪)와 그 제후(諸侯)들
○ 역사서(歷史書) 원전(原典)을 보다보면, 조선(朝鮮)과 연관(聯關)되지 않은 기록(記錄)은 존재(存在)할 수 없을 정도(程度)로 북적(北狄)이나 서융(西戎)등에서 발견(發見)된다. 서역(西域)의 나라 편에도, 서북(西北)쪽 끝에 있었다는 북해(北海)의 기록(記錄)에도, 고구려(高句驪)와 관계(關係)되지 않는 것들이 없다.
특히 부여(夫餘)을 보면, 『현토(玄菟) 북쪽 천리(千里)에 있으며, 그 남쪽에는 고려(高驪)가, 동(東)쪽에는 읍루(挹婁)가, 서(西)쪽에는 선비(鮮卑)와 접(接)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괄지 지(括地志)에서는, 『조선(朝鮮). 고려(高麗). 맥(貊). 동옥저(東沃沮)등의 5국의 땅』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곧 후대(後代)로 이어지는 역사서(歷史書)와 톱니바퀴처럼 연결(連結)되어 있는데, 현 대륙(大陸)의 땅 요충지(要衝地)에 “대륙(大陸)의 왕조(王朝)가 있었다.”고 하며, 이들은 『현재의 신강 성(新疆省)지방까지를 속국(屬國)으로 통치(統治)했다.』고 기록(記錄)해 놓고 있으며, 이곳을 토벌(討伐) 또는 정벌(征伐)하기 위해 수많은 병사(兵士)들이 출정(出征)했으며, 수많은 병사(兵士)들이 뜨겁고 차가운 사막(沙漠)위에 해골(骸骨)화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다.
심지어는 소정방(蘇定方)을 영웅(英雄)으로 만들기 위해 하루에 “삼백(三百)리”를 행군(行軍)해 적(敵)이 혼비백산(魂飛魄散)! 놀라게 했다는 기록(記錄)을 남겨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이 사실(事實)일이 아닌 진실(眞實)일 수 있을까?
● 대륙(大陸)의 역사서(歷史書)를 보면, 본기(本紀), 열전(列傳)등지에 소위 학자(學者)들이 구절(句節)을 설명(說明)한 주석(註釋)을 볼 수 있는데, 이 주석(註釋)이 없다면 본 내용(內容)을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大部分)이다. 자! 많은 것들 중에서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현재(現在)의 신강 성(新疆省) 서(西)쪽과 서남(西南)지방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이며, 역사서(歷史書)에는 서융(西戎)이라 비하(卑下)했던 나라들이 있었던 곳이다. 『대륙(大陸)의 왕조(王朝)들이, 신강 성(新疆省)지방을 속국(屬國)으로 다스렸다.』고 역사서(歷史書)에 거창(巨創)하게 기록(記錄)해 놓은 자(者)들이니, 당연(當然)하게도 신강 성(新疆省)의 서(西)쪽이나 서남(西南), 서북(西北)등지의 지형지세(地形地勢)나 종족(種族), 물산(物産), 국가(國家)등에 대한 정보(情報)는 당연히 그들의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들은 서방세계(西方世界)의 정보(情報)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어, 옥저(沃沮)의 현인(賢人)들로부터 서방세계(西方世界)에 대한 정보(情報)를 알았다.』것이다.
중요(重要)한 서방세계(西方世界)의 정보(情報)를 『옥저(沃沮)의 현인(賢人)들로부터 얻었다』 는 이야기는 곧, 『옥저(沃沮)는 서방세계(西方世界)와 근접(近接)했거나, 서방세계(西方世界)라 칭하는 곳의 길목에 있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常識的)인 일이기 때문에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명 백(明白)’한 ‘증거물(證據物)’이며, ‘고증(考證)’이다.』
또 하나, 그렇다면 『대륙(大陸)의 요충지(要衝地)에 있었다는 많은 왕조(王朝)들의 정체(正體)는 무엇이냐?』하는 것인데, 현재 말하는 『한족(漢族)에 의한 중화(中華)왕조(王朝)』말은 곧 『조선(朝鮮)의 중화(中華)왕조(王朝)』를 본 뜬 허상(虛像)일 뿐이다.
서역(西域)땅에 36개의 속국을 거느렸다는 왕조(王朝)에서, 그 서쪽지방에 대한 소식을 “옥저(沃沮)”로부터 듣는다는 말은, 그런 왕조(王朝)는 없었다는 이야기와 같다. 오직 조선(朝鮮)이 있었을 뿐이며, 가장 서(西)쪽 지방에 있었던, 옥저(沃沮)로부터 그 서(西)쪽 지방에 대한 소식(消息)을 들은 것이다. 이것이 조선사(朝鮮史)의 실체(實體)라 할 수 있다.
○ 왕조(王朝)를 창건(創建)한 옛 봉건왕조(封建王朝)에서는 『건국자(建國者)를 미화(美化)하고, 하늘의 운(運)을 받아, 위험천만(危險千萬)한 역경(逆境)을 딛고 일어나, 마침내 새로운 세상을 연다.』라는 것이 대부분(大部分)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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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周 書 卷 一 帝 紀 第 一 文 帝 上
㉠ 《太 祖 文 皇 帝 姓 宇 文 氏 , 諱 泰 , 字 黑 獺 , 代 武 川 人 也。 其 先 出 自 炎 帝 神 農 氏 , 為 黃 帝 所 滅 , 子 孫 遯 居 朔 野 。有 葛 烏 菟 者 ,〔一〕 雄 武 多 算 略 , 鮮 卑 慕 之 , 奉 以 為 主, 遂 總 十 二 部 落 , 世 為 大 人 。 其 後 曰 普 回 , 因 狩 得 玉 璽 三 紐 , 有 文 曰 皇 帝 璽 , 普 回 心 異 之 , 以 為 天 授 。 其 俗 謂 天 曰 宇 , 謂 君 曰 文 , 因 號 宇 文 國 , 并 以 為 氏 焉. : 태조(太祖)문(文)황제(皇帝)의 성은 우문(宇文)씨이다. 이름은 태(泰)이며, 자는 흑 달【黑獺 / 獺 : 물개 달】이며, 대군(代郡)의 무천(武川)인이다. 그 선조(先祖)는 황제(黃帝)에게 소멸(消滅)된 ‘염제(炎帝)신농(神農)’씨로부터 나왔는데, 후에 자손(子孫)들은 달아나 북쪽의 거친 들판에서(朔野)에서 살았다. (중략). 토속어(土俗 語)로 천(天)은 우(宇)요, 군(君)은 문(文)인고로 , 이로 인해 “우문(宇文)국(國)”이라 하였는데, 함께 이것이 성(姓)이 되었다. 普 回 子 莫 那 ,自 陰 山 南 徙 , 始 居 遼 西 , 是 曰 獻 侯 , 為 魏 舅 生 之 國 。 九 世 至 侯 豆 歸 ,為 慕 容 晃 所 滅 。 其 子 陵 仕 燕 , 拜 駙 馬 都 尉 , 封 玄 菟 公 。 : 보회(普回)의 아들 막나(莫那)는, 스스로 음산(陰山) 남쪽으로 이주하여, 처음으로 요서(遼西)에서 살았는데, “헌 후(獻侯)”라 하였는데, 위(魏)의 장인(丈人)의 나라였다. 【구(舅) : 시아버지 구. 장인(丈人)】9세손 ‘후두 귀【侯豆歸 : 張 森 楷 云 : 晉 書 載 記 作 『逸 豆 歸』】’에 이르러, 그곳의 모용(慕容)황(晃)을 없앴다. 그의 아들 ‘릉 사 연(陵 仕 燕)’이 부마도위(駙馬都尉)의 벼슬을 받고, 현토 공【玄菟公 : 진서(晉書)재기(載記)편에 “현토(玄菟)는 천산(天山)과 하(河)사이에 있었다고 한다.】에 봉해졌다.》
● 음산(陰山)은 서북(西北)지방의 알타이 산 【금산(金山)】 일 가능성(可能性)이 많고, 현토(玄菟)는 진서(晉書)재기(載記)편에 “천산(天山)과 하(河) 사이”에 있었다는 설명(說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문(宇文)씨들은 현 신강 성(新疆省)의 북방(北方)지대인 러시아 땅에서 남하(南下)한 것이며, 음산(陰山) 곧 금산(金山)의 남쪽이 요서(遼西)지방(地方)이란 것은 “하(河) 곧 요(遼)의 서(西)쪽 지방이란 이야기다.”
이들 “우문(宇文)”씨들 역시 선비족(鮮卑族)으로 모용(慕容)씨나 오환(烏桓)과 같은 종족(種族)으로 이들이 당시에 중원(中原)이나 그 북방(北方)에 있었을 가능성(可能性)은 희박(稀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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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서(周書) 본기(本紀) 본문(本文) /《太 祖 , 德 皇 帝 之 少 子 也 。 母 曰 王 氏 : 태조(太祖)는 덕(德)황제(皇帝)의 작은 아들로, 어머니는 왕(王)씨이다.》
㉢ 주서(周書)열전(列傳) 2 / 소혜 공(邵惠公) “호(顥)”편을 보면, 《 邵 惠 公 顥 , 太 祖 之 長 兄 也 。 德 皇 帝 娶 樂 浪 王 氏 , 是 為 德 皇 后 。 生 顥 , 次 杞 簡 公 連 , 次 莒 莊 公 洛 生 , 次 太 祖. : 소혜 공(邵惠公) ‘호(顥)’는 태조(太祖)의 장형(長兄)이다. 덕(德) 황제(皇帝)가 낙랑(樂浪) 왕(王)씨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덕(德)황후(皇后)이다. ‘호’ 가 태어났고, 다음에 기간 공(杞簡公) ‘연(連)’, 다음이 거장 공(莒莊公) ‘낙(洛)’이 태어났고, 다음에 “태조(太祖)”가 태어났다.》
이것을 보면, 우문(宇文)씨의 나라였던 “주【周 : 사가(史家)들이 북주(北周)라 칭했다.】” 왕조(王朝) 태조(太祖)의 어머니(母)는 『조선(朝鮮)의 낙랑군 “왕(王)”씨』이다. 우리들에게 전해오는 이야기 속에 “비단장사 왕(王)서방”이란 말이 있다.
선대(先代) 국가(國家)인 “전한(前漢)”의 한고조(漢高祖) 어머니(母) 역시 “조선(朝鮮)”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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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한서(前漢書) 본기(本紀) 고조(高祖)편의 주석(註釋)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어머니(母)는 “온(媼)”이라 했는데, “문 영(文穎)”의 주석(註釋)은, 【온(媼) : 본음(本音)은 ‘오(媼)’이다.】
【 文 穎 曰 : 「幽 州 及 漢 中 皆 謂 老 嫗 為 “媼”」 孟 康 曰 : 「媼 , 母 別 名 , 音 烏 老 反」 師 古 曰 : 「媼 , 女 老 稱 也 , 孟 音 是 矣 。 史 家 不 詳 著 高 祖 母 之 姓 氏 , 無 得 記 之 , 故 取 當 時 相 呼 稱 號 而 言 也 。 其 下 王 媼 之 屬 , 意 義 皆 同 。 至 如 皇 甫 謐 等 妄 引 讖 記 , 好 奇 騁 博, 強 為 高 祖 父 母 名 字 , 皆 非 正 史 所 說 , 蓋 無 取 焉 。 寧 有 劉 媼 本 姓 實 存 , 史 遷 肯 不 詳 載 ? 即 理 而 言 , 斷 可 知 矣 。他 皆 類 此」 】
위의 주석(註釋)을 보면 <“媼”할미 오>이다. 『유주(幽州)지방이나 한중(漢中)지방에서 모두 나이든 노인(老人)들에게는 위의 “오(媼)”자를 썼다』는 말은 당시(當時) 유주(幽州)지방과 한중(漢中)지방의 언어(言語)가 같았다는 뜻이며, 그 외(外) 지방(地方)은 달랐다는 뜻과 같다.
한중(漢中)지방(地方)은, 『한중(漢中)군 또는 한중(漢中)부 또는 한중(漢中)도 지역(地域)으로써 섬서 성(陝西省) 남부(南部) 남정(南鄭)현에서 다스렸으며, 호 북(湖北)一部 및 사천(四川)일부까지 포함(包含)되는 섬서 성(陝西省) 남부(南部)지역과 서남(西南)부 지방을 말한다.
경조지방(京兆地方)속에 “유주(幽州)”가 포함되며, 한중(漢中)과 유주(幽州)사이에 “경조(京兆)”지방이 있다. 【경조(京兆)는 황성(皇城)이 있는 황도(皇都)주위를, 경조지방(京兆地方)은 황도(皇都)을 둘러싸고 있는 관내도(關內道) 또는 경기도(京畿道)를 말하는 것이다.】따라서 “유방(劉邦)”의 어머니를 한서(漢書)에서 “오(媼)”라고 했다면, 『유주(幽州)와 한중(漢中)은 조선(朝鮮) 땅이었으며, 조선인(朝鮮人)』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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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통전(通典) 북적(北狄) 7 <鹽 漠 念>
《 皆 北 狄 種 類 , 相 與 婚 姻 , 高 氏 聘 蠕 (蠕) 女 為 妻 , 宇 文 氏 以 突 厥 女 為 后 : 모두 북적의 종류이며, 고씨(高句驪)는 연연(蠕蠕)왕의 여식(女息)을 처(왕비)로 하고, 우문(宇文) 씨는 돌궐(突闕)왕의 여식(女息)을 왕비(后)로, 서로 함께 혼인(婚姻)하였다.》
● 그렇다면, “염 막 념(鹽 漠 念)”이란 나라는 어디에 있었길 레 “고구려(高句驪)”에 대한 기록(記錄)을 남길 수 있었을까? 《 鹽 漠 念 : 駮 馬 國 南 三 十 日 行 至 突 騎 施, (中略). 皆 北 狄 種 類, 相 與 婚 姻, 高 氏 聘 蠕 (蠕) 女 為 妻, 宇 文 氏 以 突 厥 女 為 后. : ‘염 막 념’ 나라는 ‘박 마(駮 馬)국의 남쪽으로 30일을 가면 돌기 시(突騎 施)에 이른다. (중략). 모두 북적(北狄)의 종류이다. 서로 함께 혼인을 하는데, 고씨(高 氏 : 高句驪)는 연연(蠕蠕)의 여자를 처(妻)로 하고,【高句驪 왕실에서 연연 왕(蠕蠕 王)의 여식과 혼인하여 왕비(王妃)로 했다.】우문 씨(宇文 氏)는 돌궐(突 厥)의 여식과 혼인하여 후(后 : 왕비)로 하였다.》고 하였는데,
『박 마(駮馬)』라는 나라는 《그 땅이 북해(北海)에 가까이에 있으며, 경사(京師)로부터 14,000 리 떨어져 있다. : 駮 馬 : 駮 馬 , 其 地 近 北 海 , 去 京 萬 四 千 里 》고 하였다.
이 나라에서 남쪽으로 30일을 가면 “돌 기 시(突騎施)”에, 또 20일을 가면 “염 막 념(鹽漠念)”의 돌 육 궐 사근 부락(咄 陸 闕 俟 斤 部 落)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들은 모두 돌궐 종류라 하였다.
● 결국 당시 경사(京師)로부터 12,000-14,000 내에 있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구-글 어스로 직선거리(直線距離)를 재보면, 『카자흐스탄의 북방 러시아 땅이다.』 이러한 곳으로부터 반도(半島) 북방(北方) 고구려(高句驪)까지는 20,000 리!
“염 막 념(鹽漠念)”이란 조그마한 돌궐(突闕)의 한 종류(種類)로 이루어진 소국(小國)에서 조차 “고구려(高句驪)”의 혼인(婚姻)동맹(同盟)을 알고, 북해(北海) 유역(流域)의 나라들을 핍박(逼迫), 빼앗으려 했다면 그러한 고구려(高句驪)가 어떻게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있었던 나라인가를 설명해보라?” 고 말하고 싶다. 반도사학(半島史學)! 이제는 무엇인가 달라지지 않으면 스스로 자멸(自滅)한다는 점을 상기(想起)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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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북사(北史) 열전(列傳) 글란(契丹)국
《太 和 三 年, 高 句 麗 竊 與 蠕蠕 謀, 欲 取 地 豆 干 以 分 之. 契 丹 舊 怨 其 侵 軼, 其 莫 賀 弗 勿 干 率 其 部 落, 車 三 千 乘, 眾 萬 餘 口, 驅 徙 雜 畜 求 內 附, 止 於 白 狼 水 東. : 태화 3년, 고구려(高句驪)가 몰래 (竊 : 도둑질 할 절, 몰래) 연연(蠕蠕)과 모의하여 “지 두 간(地 豆 干)”국의 땅을 빼앗고 나누자고 하였다. 글란(契丹)은 옛 원한으로 그를 번갈아 (軼 : 번갈아 질) 침략하니, “막 하 불 물 간”은 부락 무리들을 인솔하여, 수레 삼천 승에 무리 만 여구(口) 및 여러 가축들을 몰고 옮기면서 내부(來附)에 붙기를 청하였는데, 백랑 수(白狼 水) 동쪽에 머물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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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북위(北魏)와도 고구려(高句驪)는 혼 맥(婚脈)으로 이어져 있는데, 고구려(高句驪) 황실(皇室) 여인(女人)을 북위(北魏)의 황후(皇后)로 출가(出家)시키기도 하였다. 【 ‘효 문 소 황 후 고 씨(孝 文 昭 皇 后 高 氏)’ 및 ‘선무황후 고씨(宣 武 皇 后 高 氏)’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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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高句驪)에 관한 대륙 사(大陸史) 기록(記錄)은, 조선사(朝鮮史)에서는 언급(言及)되지 않은 많은 사건(事件)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누구도 우리들에게 이러한 사실(事實)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고구려(高句驪)는 『반도(半島) 땅 “한강(漢江)이북(以北)으로부터 요 녕 성(遼寧省) 심양(瀋陽)까지”를 무대(舞臺)로 했던 반도왕조(半島王朝)의 하나로 강력(强力)한 국력(國力)을 가지고 중국(中國)과 맞서 싸웠다.』는 그 이상(以上)의 것들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더욱 이해(理解)할 수 없는 것은, 『중국(中國)의 황제(皇帝)』라는 것인데, 한(漢)도 중국황제(中國皇帝)요, 후한(後漢)이나, 위(魏)니, 북위(北魏)니, 수당(隋唐), 명 청(明淸)나라 등 모두 “중국황제(中國皇帝)”라 번역(飜譯)하고 해설(解說)하는 것이다.』
한(漢)이면 한(漢)황제(皇帝)요, 위(魏)면 위(魏)황제(皇帝)일 것이며, 수당(隋唐)이라면 수황(隋皇)이요, 당황(唐皇)이며, 명 청(明淸)이면 명황(明皇)이요, 청 황(淸皇)일 것임에도 “중국황제(中國皇帝)”라 일컬었다고 말하는 식민사학(植民史學)이나 반도사학(半島史學)은 무엇인가 큰 그림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朝鮮)을 스스로 숨기고, 왜곡(歪曲)된 식민사학(植民史學)을 전파(傳播)하는 것 외(外) 그 무엇도 있을 수 없다.
○ 신강 성(新疆省)의 서북방(西北方) 러시아 땅의 “호 로 하(瓠蘆河)” 주변에서 당(唐)나라와 군대(軍隊)와 고구려(高句驪) 부흥 군(復興軍)과의 전투(戰鬪)!
신강 성(新疆省)의 고차(高車)왕국(王國)의 고구려(高句驪)인들, 그들은 이곳에서 오랜 세월을 살았다고 했으며,
언 기(焉耆)나 소 륵(疏勒)등지에도 화인【華人 : 고구려인을 말한다.】과 같은 종족(種族)들이 왕국(王國)을 이루고 있었으며,
서강(西羌)의 땅에 고구려(高句驪)의 백성(百姓)들이 관구검(毌丘儉)에 의해 패(敗)한 원수(怨讐)를 갚고자 이를 갈며 살았으며,
연연【蠕蠕 : 유연(柔然)】왕실(王室)과 혼 맥【婚脈 : 연연(蠕蠕)왕의 여식(女息)을 고구려(高句驪)로 왕비(王妃)로 하였다.】으로 결성(結成)되어, 이들과 모의(謀議)하여 북해(北海)주변(周邊)국들을 약탈(掠奪), 빼앗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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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朝鮮)의 일원(一員)이었으며, 초기(初期) 단군(檀君)의 통치(統治)를 받았다는 “고구려【高句驪 : 高驪 : 句麗 : 高酈 : 高麗】”는 방대(厖大)한 영역(領域)을 무대(舞臺)로 활동(活動)했으며, 원전(原典)에 의한 그 영역 권(領域權)만 보더라도, 현재(現在)의 신강 성(新疆省)과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를 접경(接境)하고 있다.
이러한 원전(原典)에 의한 역사(歷史)전개(展開)는 누구도 알려주지 않고 있다. 오직 반도(半島)만이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조선왕조(朝鮮王朝)라는 것이 고착(固着)화, 진실(眞實)화되어, 누구도 의심(疑心)치 않고 있고, 이의(異議)를 제기하지 않는다. 더불어 향토사학(鄕土史學)은 구전(口傳)과 전설(傳說)을 한데 모아, 그것이 사실(事實)인 냥 온갖 것들을 치장(治粧)해 이용(利用)하고 있어 안타까움이 더하다.
하루라도 빨리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이 밝혀지기를 고대(苦待)해 본다.
2013년 01월 24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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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잘 보았읍니다.
유주(幽州)와 한중(漢中)의 내용중에 '유주(幽州)지방과 한중(漢中)지방의 언어(言語)가 같았다는 뜻이며..' 란 말은 유주(幽州) 와 한중이 서로 가까이에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서로 인접지역이니 같은 언어 패턴을 보였던 것이지요..그 한중이 현재의 섬서성 남정과 그 인근지역이라면 유주(幽州) 또한 그 이웃일테니 유주는 중원지역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유방의 어머니가 조선인이라는 말에 깜짝 놀랬습니다.
저는 본시 기자조선이 망하고 애왕이 마한을 세우고 후손들이 漢으로 이름을 바꿨다라는
율곤 선생님의 학설을 신봉하는 사람입니다.
염막념국과 고구려가 혼인동맹을 맺었다라는 말도 참으로 기가 찰 노릇입니다..^^!
그 먼거리를 무슨 이유로 혼인 동맹을 맺는단 말인가요?
결국 고구려와 염막념은 근방에 있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유주지방과 한중의 언어가 같았다는 것은 그 위치가 현재의 구도일까? 의문이 듭니다. 우선 경조지방 곧 경기도 곧 경조지방속에 한중과 유주가 포함되는 것인데, 유주는 그 서북방이요, 한중은 도성의 남쪽입니다. 이 말은 곧 당시 도성과 유주와 한중의 지리적 위치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또한 넓게 보면 고구려 영역내에 유주와 한중과 도성이 함께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대륙이나 서역은 지금도 언어가 다릅니다. 따라서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고구려 영역내에 도성과 유주와 한중이 있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이것은 전한서 한고조 편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고 보아집니다.
반도 고구려를 생각하면 경사로부터 12000-14000리 떨어져 있는 '염막념'의 기록속에 고구려의 혼인동맹에 대한 서술은 기가 찰 일입니다. 이것은 통전의 저자인 "당의 두우"가 말한 것입니다. 그 분도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후세에 남기고자 기록해 놓은 것이겠지요. 또한 연연 곧 유연 역시 청사고에도 신강성지방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서나 자치통감, 통전등에는 현 신강성과 총령, 중앙아시아지방까지 유연(연연)의 활동거점이었으며, 고구려는 이들과 혼맥으로 결성되어 그 북쪽의 소국들을 핍박하고, 나라를 빼앗아 함께 나누자고 했지요. 고구려 망후 부흥군들은 호로하에서 당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호로하는 여름에도 하천에 얼음이 얼어있기 대문에 항상 불을 피워 얼음을 녹여 식수로 사용했다고 하니 이러한 곳은 현 러시아의 북쪽 아주 추운 곳이 아니면 이러한 지형지세나 기후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글란전에도 나오는 기록이며, 자치통감, 통전, 신구당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존 사학은 이러한 사실은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으며, 이들은 호로하를 임진강이라 합니다. 기가 막힐 일니다.
이러함에 조선사의 여정이 멀고도 길고, 험난한 것입니다. 반도 식민사학은, 선대 조상님들께 죄를 짓는 것이며,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국민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며, 후세들에게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일이되는 것이지요. 중국사에는 그렇게 기록되고 있지만, 실제 고구려의 영역은, 흑해와 지중해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이라는 것을 반도 식민사관에 갇힌 사람들이 볼때는, 허황된 낭설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역사를조작한 자들의 의도 입니다. 그나라 민족을 바보로 만들면, 그 민족의 정신부터 무너지는 것이니, 오늘날 현실을 보면 그러한 무리들이 의도 한대로 흘러가고 있는것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벽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고구려의 역사는 일부 흔적만 남은 역사로 전해오는 것이 분명하고, 고구려의 근본역사는 거의 소실된 것으로 생각 됩니다. 경주의 석굴암이 신라가 건축한것으로 알고 있지만, 석굴암의 모태가 되는 원형이 불가리아의 고대 왕들의 무덤 문양과 똑같습니다. 경주쪽에서 발굴되는 유물들이, 흉노라고 이름지어진 유물들과 같다는것은, 의문이 아닐수 없으며, 조선사가 제모습을 찾으면서 하나하나 그 베일이 벗겨질 것 입니다. 북한 평양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성곽과 유적유물의 형태는, 흑해 연안과 이집트 북부에서 그 유적과 유물의 흔적을 멈추고 있습니다.
사기와 한서 후한서등을 보면, 한이라는 나라에 대해서,갖는 의문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조선사에서는 분명히 고려의 영토인데, 그곳에 한나라가 왜 들어와 있습니까 ? 그리고 흉노와 고구려의 관계는 참으로 알수없는 역사가 되고 있습니다. 중국사 원전도 재편집 과정에서 엄청난 왜곡 조작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중동에서 발견되는 많은양의 유적 유물들을 서양 학자들은 한나라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어림도 없는 자기들만의 추정일 뿐이지요. 서역36국의 이름도 모르면서 무슨 조공을 받고 무슨 정벌을 하겠습니까 ? 아랄해, 카스피해, 흑해인근에 엄연히 고려성이 있고, 이라크에도 고려성이 있는데, 무슨 한나라 이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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