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는 역시 우리 사회 지적 흐름에 내재된 폭발성 강한 뇌관이었다. 한 중견 소설가가 "우리 사회가 맞은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가 민족주의를 제어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며 건드린 이 뇌관은 무서운 힘으로 지식 사회를 강타, 찬반 논쟁으로 발전했다.
복거일씨의 저서 '국제어시대의 민족어'(문학과지성사간)를 계기로 조선일보에 탈 민족주의와 영어 공용어화 논쟁이 불붙기 시작한 지 일주일. 이 논쟁에 참가, "지구제국은 강대국 희망사항일 뿐이다"며 복거일씨의 탈민족주의 주장을 질타했던 중진 한국사학자 한영우(서울대)교수는 "글이 조선일보에 게재된 날(10일), 지금까지 신문에 글을 쓴 이래 가장 많은 전화를 하룻동안 받았다"고 말했다. 서울 중앙병원이 자체적으로 영어 공용어화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묻는 여론 조사를 실시했고, 부산방송 FM라디오는 14일 저녁 6시 '헤이 러시아워' 프로그램에서 복거일-남영신씨의 논쟁을 내보냈다. 조선일보와 인터넷 조선일보에는 이문제에 대한 저마다의 주장을 담은 원고가 40편 넘게 쏟아져 들어왔다.
민족사관, 민족문학, 민족적 민주주의, 민족주체성, 반민족적….'민족'이란 말만 들어가면 권위와 신성함을 인정받던 시대가 있었다. 이번논쟁은 적어도 민족주의의 이같은 권위에는 적신호가 걸렸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복씨의 영어 공용어화 주장을 비판한 사람들일지라도 '거친 민족주의를 다스려야 한다'는 입장에는 동의하는 분위기의 글들이 적지 않았다.
다만 거친 민족주의를 다스리는 구체적 실천적 방법이 무엇이냐라는 문제는 앞으로 논쟁의 숙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영어 공용어화' 문제가 워낙 민감한 쟁점으로 떠오르다 보니 40여편의 기고들은 자연히 복씨에 대해 비판적 진영에 선 것이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이중 언어생활의 효용과 갈등을 체험하고 있는 외국 거주 한국인들이 인터넷 조선일보를 보고 기고한 글들도 여럿 있어 눈길을 끌었다. 미시간 주립대에서 교통공학을 전공하고 있는 이정택씨는 "세계화 시대에 영어가 필수적으로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국민모두가 영어를 해야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필리핀 파키스탄 인도가 영어를 공용어로 택하지 않아 못사는 것이고, 일본이 영어를 공용어로 택해 잘사는 것인가. 영어는 그걸 필요로 하는 전문인이 능숙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라는 의견을 보냈다.
반면 11살에 미국에 가 뉴욕에서 내과의사를 하는 제임스 전씨는"한국이 다른 세계로부터 얼마나 고립돼 있는지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다른 문화에 대한 한국 사회의 개방성을 보장해주는 게 숙달된 영어다. 이중언어를 쓴다고 반드시 주체성이 결여되는 건 아니다"라고 복씨를 두둔했다.
논쟁의 전개과정에서 양쪽의 대립을 지양하려는 시도가 나온 것도자연스런 일이었다. 민족주의와 세계화는 함께 가는 것이라는 주장(강기준,이애란씨)이다. 민족주의 논쟁이 세계화의 태풍 속, 새로운 세기한국의 진로를 좌우하는 문제인 만큼 쉽게 해결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논쟁에 참여하는 열기가 뜨겁고, 인식수준이 성숙할 수록 우리사회의 진로는 밝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