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보령군 미산면 용수리 금강암
그곳엔 아직도 사철나무가 푸르다
아비가 떠난 한창 겨울에도 윤기를 잃지 않았고
찬바람에 의연했던 나무
서너 가지는 테를 두르며 세월을 어루만지고
장명등 앞 희미한 불빛 너머 시커먼 어둠까지도
애써 달래보다가 비도 맞고 눈도 맞던 나무
외할머니는 언제나 그 푸르고 그윽했던 나무에 기대서
지독했던 근시의 세계로
사람이 그리운 셀 수 없는 날들을 끌어들이며
멀리 해 지는 산 아랫녘을 바라보았다.
충남 보령군 미산면 용수리 금강암
그곳엔 아직도 낭랑한 외삼촌의 새벽 염불 소리 들린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탁탁치는
외삼촌의 색깔 고운 음성
청석 지붕 아래 할머니의 향긋한 품안에서
꿈길을 밟으며 아련할 때
그 새벽 염불 소리에 얼른 잠이 깨
더듬거리며 놋요강을 찾던 길고도 질겼던 겨울밤
외삼촌은 왜 하루도 쉬지 않는가
뒤꼍 산 쪽으론 대나무 숲이 자리했는데
그 대숲에서 늘 내가 두려워하던
무서운 밤기운이 삵의 눈처럼 엄습해 오면
할머니는 헤진 이불자락을 끌어 토닥이며
낯선 세상의 도깨비란 도깨비는 모두
알아듣기 힘든 주문을 외며 쫓아내 버렸다
충남 보령군 미산면 용수리 금강암
그곳엔 아직도 느티나무가 우람하다
느티나무 아래 시리도록 푸른 겨울 하늘을
마냥 이고 앉아 있는 돌미륵 부처님도 여전하다
호두알같이 데굴데굴한 미륵의 얼굴에는
혼자 된 딸자식 걱정에 수심이 깊던
외할머니의 그늘도, 일년 열두달 한 번도
거르지 않던 외삼촌의 염불 소리도 아닌
그 가늠할 수 없는 천길이나 먼곳에서
입을 것도 막을 것도 가릴 것도 없는 세계로
흘러나오는 미소만 있을뿐 ……
그곳엔 아직도 내 마음 속의 사철나무가 푸르다.
아비가 떠난 캄캄한 겨울인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