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상상력을 선보이는 만화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낯선 헝가리의 밀로라도 크르스티치 감독의 <미션 임파서블 – 루벤>(이하 <루벤>)이 주인공이다. 크르스티치 감독은 1952년에 출생하여 우리 나이로 70세 고희를 맞이한 노장이다. 그는 이 영화로 2019년 자그레브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 장편 부문에서 대상을 받는다.
나이 든다고 상상력이 녹슬거나 숙지는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영화를 보면서 절로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벤>에는 실사영화에서 가능한 온갖 장치가 동원된다. 세계적인 명화(名畫) 훔치기, 자동차와 대형트럭, 헬기까지 등장하는 추격전, 놀라운 곡예와 마임, 킬러들의 음모와 살인, 심리치료의 구체적인 실현에 이르기까지.
여기 덧붙여지는 것이 아버지의 강압과 그것이 결과하는 트라우마, 결손가정과 모자 갈등, 피카소의 입체파 그림을 원용하여 그려지는 인물 작화(作畵)다. 그러니까 93분 동안 <루벤>은 우리가 실사영화에서 만날 수 있는 최대치의 긴장과 흥미, 인물들의 갈등과 사건 전개가 숨 고를 틈 없이 밀려들어 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13편의 명화, 심리치료사를 공격하다!
심리치료사 루벤 브란트가 열차에서 <기면증>이란 책을 읽고 있다. 미술치료(아트 테라피) 분야에서 독보적인 권위를 인정받았지만, 그 자신도 치료를 받아야 하는 딱한 형편이다. 세계적인 명화의 주인공들이 루벤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두 작품이 아니라, 무려 열세 편의 명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다.
여기서 그를 공격하는 명화를 연대순으로 열거해본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1485), 한스 홀바인의 <로렌 공작, 선한 자 앙투완의 초상> (1543),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벨라스케스의 <푸른 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공주> (1658), 마네의 <올랭피아> (1863), 프레데릭 바지유의 <화가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1867).
프랭크 두버넥의 <휘파람 부는 소년> (1872), 반 고흐의 <우체부 조지프 룰랑의 초상> (1888), 폴 고갱의 <과일을 든 여인> (1893),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반역> (1929), 파블로 피카소의 <책을 든 여인> (1932),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1942), 앤디 워홀의 <더블 엘비스> (1963).
명화 속 인물들의 공격이 계속되자 루벤은 차라리 13편 명화를 모두 훔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것에 동조하고 나선 일군의 인물이 있으니, 루벤에게 미술치료를 받는 미미, 페르난도, 조, 브루노가 그들이다. 그러니까 5인조 도둑이 어떻게 난관을 극복하여 명화를 훔치는가, 하는 예술 범죄영화(아트 크라임)이자 ‘케이퍼 무비’가 <루벤>이다.
심리치료사는 왜 도둑이 되었는가?!
영화 첫머리 장면이 인상적이다. 열차가 고속으로 질주한다. 철로 위를 달팽이가 느린 속도로 기어간다. 달려오는 열차 바퀴에 깔려 죽을 것만 같다. 빠름과 느림의 극단적인 대비로 시작하는 영화 <루벤>. 어린 시절의 루벤이 아빠에게 칭얼댄다. 달팽이와 놀고 싶은 루벤. 하지만 아버지 게르하르트는 그런 아들의 소망을 간단히 무시한다.
자신이 간절히 소망하던 것을 실현하지 못한 루벤의 잠재의식 깊은 곳에 커다란 상처가 남았다. 강요당한 순종과 사랑과 교육을 빙자한 아버지의 억압이 빚어낸 참사다. 아들의 장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지금과 여기’의 기쁨과 행복을 최대한 포기하도록 인도한 게르하르트. 그는 동베를린 출신 지식인으로 훗날 미국 CIA를 위해 일한다.
극복하지 못한 심리적 외상이 악몽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비너스의 탄생>에 그려진 비너스의 금발이 루벤의 목을 조여오거나, 르누아르의 구둣발이 루벤의 입속으로 거칠게 밀고 들어온다. 고흐의 우체부 초상은 우표가 되어 루벤의 전신을 휘감고, 올랭피아의 고양이는 루벤의 뺨을 사납게 할퀸다. 루벤은 도망치다가 마침내 생각을 전환한다.
“문제는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고, 그림은 최고의 치료제다.”
화려한 이중성의 놀라운 변주
<루벤>에서 크르스티치 감독은 이중성에 담긴 의미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것은 색깔과 형상, 의식과 무의식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변주된다. 루벤은 언제나 붉은색과 푸른색의 넥타이를 매고 다닌다. 하나의 목에 감긴 두 개의 넥타이. 불과 물, 정열과 냉정, 양과 음을 상징하는 붉은색과 푸른색 모두를 목에 두르고 다니는 루벤.
거대한 두 대의 트럭 사이에 끼어 루벤 일행의 승용차가 공격당하는 장면 또한 그러하다. 양쪽에서 그들을 옥죄는 트럭. 그것을 강화하는 헬기의 등장. 심리치료사이자 동시에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 루벤. 그런 까닭에 루벤은 심리치료를 하면서 연출가로서 자질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행위예술가로 자유자재하게 변신한다.
이런 이중성이 극대화된 그림이 앤디 워홀의 <더블 엘비스>다. 루벤이 훔치고자 했던 그림 가운데 맨 마지막 대상인 <더블 엘비스>. 총잡이로 변신한 빨간색의 엘비스 프레슬리. 다른 그림들이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이나,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 혹은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도둑맞는다면, <더블 엘비스>는 동경의 특별전시장에 걸려 있다.
동양이지만 동양에 속하고 싶지 않은 일본. 서구를 빼닮았지만, 절대 서구가 될 수 없는 나라 일본. 첨단을 달리지만, 오직 모방과 베끼기를 통해서만 도달한 서구 문명의 총화로서 일본.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가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황인종일 수밖에 없는 자가당착적이고 이중적인 일본과 일본인. 그것을 웅변하는 동경과 <더블 엘비스>.
루벤을 추적하는 코왈스키 탐정
도둑이 있으면 경찰이 있고, 악이 있으면 선이 있기 마련. 빛과 그림자는 언제나 동행이다. 도벽이 있는 곡예사 미미를 끈질기게 추적하는 마이크 코왈스키 탐정. 민첩하고 명민하며 쾌활한 인물 코왈스키가 오래도록 감춰진 어머니의 비밀을 감지한다. 아마도 그것이 <루벤>에 드리워진 흥미와 반전 그리고 행복한 결말의 원천일 것이다.
게르하르트 브란트의 두 번째 아내였던 코왈스키의 어머니. 의붓어미로서 루벤이 속수무책으로 게르하르트에게 속박당하는 것을 바라보던 그녀는 마이크를 위해 탈주를 감행한다. 아버지와 전혀 다른 성(姓)인 코왈스키를 쓰게 만든 장본인. 이렇게 본다면 루벤과 마이크는 같은 아버지를 둔 이복형제다. 기막히게 엮어진 두 사람의 관계.
크르스티치 감독은 인간관계에서도 이중적인 의미를 부설한 것이다. 명화를 훔쳐내는 형 루벤과 그런 형을 추적하는 동생 마이크의 대결. 그리고 그들 사이에 매혹적인 여성 미미를 배치하여 입체적인 갈등 관계를 만들어낸 셈이다. 한국 드라마 같았으면, 막장이라고 불릴 만하건만, <루벤>에서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각본의 힘이다.
이집트 벽화를 연상시키는 피카소의 그림과 그것을 변용하여 창조된 <루벤>의 3차원 형상들 또한 객석의 흥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눈이 세 개 달렸다거나, 입이 흉하게 찢어졌다거나, 몸통과 머리가 따로 놀고 있다는 느낌의 형상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관객은 생동감과 신선함을 느낄 뿐, 어색함의 그림자는 찾기 어렵다.
그러니 한 번 보시라!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도 있잖은가! 21세기 만화영화의 신기원을 열어젖히는 헝가리 만화영화 <루벤>을 보시라!
첫댓글 영화 이야기는 재미있기도 하지만 때로 어리둥절 할 때도 있습니다. 확대해서 보고 아주 좁혀서봐야 '그게 바로 그것이구나'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속에 무엇이 들어있던 표현되지 않으면 그 속에 것은 그냥 지나치는 하찮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표현된 것이 가치이다. 가치가 된다. 표현이 그리 쉬울까요? 표현은 최고의 기술인 것 같습니다. 예술도 당대 최고의 기술이 발휘된 작품을 표준으로 삼고 사용하는 개념이겠지요. 영화는 다른 어떤 예술 장르보다도 표현의 기술에 그 예술성이 좌우되는 듯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끝내 모든 예술을 통합하는 힘으로 발전해 갈 것 같습니다. 그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넓이와 깊이도 커지겠지요. 영화를 해독하는 상설 교실을 만들면 어떨까요?
영화는 인간의 상상력과 기술, 자본과 예술이 뒤얽혀서 만들어지는 종합예술의 결정판입니다.
리치오토 카누도가 영화를 '제7의 예술'이라 명명한 게 어느덧 100년도 더 지난 옛일이 되었습니다.
영화 이후에 크게 주목받는 장르는 만화입니다. 하지만 만화의 대중성은 영화의 그것을 따라잡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영화를 이해하거나 함께 감상하는 기획을 실행하는 곳은 차고 넘치는 게 현실입니다.
만일 그런 영화교실을 개설하시려면 여러 사람과 여러 번에 걸친 예비모임을 거치는 것이 실용적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