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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열쇠
마태복음 16:13-20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벌써 해가 기울어 가을빛이 언뜻언뜻 느껴진다. 올해는 추석도 빨리 다가와 9월 초순에 명절을 맞게 되었다. 어제가 절기상으로 처서였는데 더위가 물러가고 쓸쓸해지는 때라고 한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논의 벼가 익는 시기이다.
계절이 참 빠르게 흐르는 느낌이 든다. 교황이 우리나라를 다녀가면서 모처럼 온 국민이 기대감에 들썩였는데, 언제 다녀갔는가 싶을 정도로 금새 잊혀지는듯하다. 적어도 그 분이 보여준 예수님의 마음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요즘 그물짜기 특강을 하면서, 결국 모든 교회의 가르침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음을 느낀다. 성경도, 성지도, 성경의 역사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배우고 이해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중심과 핵심, 그리고 전부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대하였다. 그는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킬 정복자와 왕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위해서 고난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혁명은 사람들이 상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예수님의 혁명은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일으키고자 한 혁명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에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치셨다. 메시야는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분의 능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도와주고, 고쳐주었다. 용서하도록 가르치셨다. 그리하여 자유인으로 살게 하셨다.
성경은 말한다. 또 우리는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살던 시대에만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사람들의 삶에 혁명을 일으키신다. 유대인의 왕이 아닌 모든 사람의 왕이 되신 것이다.
과연 예수님은 누구신가? 어떻게 지난 2,000년 동안 또 지금도, 세계 곳곳, 모든 민족 가운데 같은 고백을 하는 추종자를 두셨을까?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새 천년 특집으로 지난 2천년 동안 가장 위대한 인물로 예수님을 손꼽았다. 올해의 인물, 100년의 인물이 아닌 유일한 2천년의 인물이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와 제자들을 통해 이러한 고백을 반복하게 한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끈다. 이를 한 마디로 ‘천국의 열쇠’라고 표현하였다.
1)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전에, 잠시 이방 지역인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들른 때의 일이다. 지금 예수님의 반대자들이 눈을 부라리고 찾는다. 이방 지역에 머무시는 동안 예수님은 그들과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살펴보면 지금이 중간결산의 시기이고, 십자가의 수난을 준비하는 시기이며, 제자들의 훈련 상태를 점검하는 시기였다.
예수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전개될 수난에 앞서서 제자들을 훈련시킬 필요성을 느끼셨다. 그리고 핵심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님과 그들의 관계를 정립하시려고 하신다. 그래서 마치 시험 치르듯 질문하셨다.
먼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3)고 물으셨다. 사람들의 호기심, 세상의 평가, 네 생각이 아닌 객관적인 평가에 대해 물으셨다. 사람들은 혹은 뉴스에서는, 뭐라고 하더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14).
제자들의 대답은 공통점이 있다.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모두 유대인이 기대하던 예언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할 인물로, 사람들이 기다리던 이스라엘의 영웅들이다.
특별히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다 졸지에 죽은 세례 요한이 부활한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많았다. 그만큼 불같은 세례 요한의 가르침과 용기 있는 행동이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었다.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엿볼 수 있다.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는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그 선구자로 올 것이며,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엘리야 선지자는 죽지 않은 채 승천했기 때문에 이러한 기대는 더욱 고조될 수밖에 없다.
예레미야는 어떤가? 구약에서 자기 백성의 심판 앞에서 눈물을 가장 흘리며, 아픔을 겪은 선지자였다.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지으신 예수님과 쉽게 연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2)
예수님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사람들의 대답은 예수님의 일부분의 모습, 한 면만을 보고 평가한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전부의 모습을 일깨워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
예수님은 범위를 좁혀서, 제자인 너, 늘 곁에서 동행하며 함께 살아온 ‘너희’의 주관적 평가는 무엇이냐고 물으신다.
이 물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대답해야만 하는 존재론적인 질문이다. 신앙고백은 해답을 남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다. 그 고백은 나의 ‘존재, 삶, 미래’에 결정적인 성격을 담은 종말론적이다.
베드로는 누구보다 먼저 대답을 준비하였다. 그의 충동적이고 불같이 급한 성격이겠지만, 그는 평소 준비된 대답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마 다른 동료 제자들도 마음속으로 베드로와 비슷한 대답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역시 찬스에 강하다. 담대하고도 신속하게 천금 같은 결승골을 넣었다. 그의 신앙고백을 내 고백으로 여겨, 내 입술로 고백해 보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고, 그에게 복을 주셨다. 베드로의 고백은 인간의 지식 차원이 아닌 하나님이 알게 하신 일이라고 하신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도 내 의지가 아닌, 성령의 도우심 때문에 가능하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네 가지 신분을 알려준다. 첫째는 ‘랍비’ 즉 교사로서의 예수요, 둘째는 ‘아멘’ 즉 예언자로서 예수요, 셋째는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서 예수요, 넷째는 ‘마르’ 즉 주님으로서 예수였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은 이 네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고백이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적 권위와 권능 위에 세워졌다.
무엇보다 베드로에게 대단히 상징적인 선물을 주신다. ‘천국의 열쇠’이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9).
열쇠라는 말은 일종의 커다란 권력이다. 시어머니는 뒤주와 곳간의 열쇠가 달린 열쇠패를 지니고 다녔다. 열쇠를 지닌 시어머니는 중요한 권력이었다.
또한 열쇠는 생명을 뜻한다. 우리 민속 중에 아기를 출산할 때 어머니의 하문(下門)을 잘 열고 나오라고 대문과 장롱 문을 다 열어 두었다. 맨 먼저 나온 개와 돼지의 새끼를 ‘문 열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열쇠 역할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천국의 열쇠는 얼마나 큰 권력인가? 천국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한이다. 열쇠는 천국의 문과 함께 음부(지옥)의 권세를 이길 능력을 포함한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 왕국의 열쇠를 갖고 있는 양, 지식을 독식한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신 일이 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눅 11:52).
유대교 권력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그토록 자랑하던 율법주의는 오히려 하나님에게 이르는 문을 닫아버렸다. ‘열쇠 구멍으로 하늘을 보는 식’이다. 그들은 열쇠구멍처럼 비좁고 비뚤어진 마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향해 자유롭게 열려있는 하나님께 이르는 문을 가로 막았다.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부활하신 주님은 죽은 자들의 닫힌 문을 열어 소생시킬 힘을 갖고 계신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음부의 권세자들을 지배할 수 있는 이유는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8).
‘천국의 열쇠’는 얼마나 귀한가? 사람들은 그 열쇠에 관심이 많다. 아무도 죽음 이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후의 보장을 위해서 이단의 유혹에도 쉽게 양심을 팔아넘기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서 내 신앙고백이, 내 진실한 삶이 그 열쇠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다.
3)
A.J. 크로닌이 쓴 ‘천국의 열쇠’란 소설은 1942년 영국에서 출간되었지만 지금도 사랑받는 베스트셀러이다. 가난한 시골 본당의 치셤 신부와 안젤모 밀리 추기경이 걸어온 대조적인 삶을 통해 무엇이 진실한 성직의 길인가를 묻고 있다.
신학교 동기인 두 사람의 길은 극적으로 대비된다. 안젤모는 뛰어난 사교술로 승승장구하였으나, 치셤은 실패와 고난을 자처하였다. 의사 윌리 탈록은 치셤 신부가 중국에서 선교할 때 곁에서 돕던 친구였으나, 환자를 치료하던 중에 죽었다. 치셤 신부는 장례식에서 윌리 탈록은 천국에 갔을 것이라는 설교를 한다. 무신론자 윌리 탈록에 대한 천국행 선언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크로닌이 말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 책의 제목에 그 해답이 있다. ‘천국의 열쇠’의 본래 제목은 ‘천국의 열쇠들’(The Keys Of The Kingdom)이다. 천국의 열쇠는 베드로만 소유한 단 하나가 아닌 저마다 지닐 수 있는 복수라는 의미이다.
열쇠는 어느 한 사람이 움켜 쥘 수 없다. 크로닌은 진리를 구하는 자에게 천국의 문은 개방되어 있음을 말하고 싶어한다.
여기에서 ‘천국의 열쇠’는 권력의 소유물 이전에, 본래 사랑의 힘이다. 그 권력은 늘 유지될 수 없다. 사랑의 힘을 잃어버린 순간 열쇠를 빼앗긴다. 본문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을 보라.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로 막고 서자 당장 파문을 당할 처지에 놓인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 16:23).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천국의 열쇠는 당장 힘을 잃는다.
문제는 결과로서 천국의 열쇠가 아니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로서 천국의 열쇠이다. 내게 예수님은 누구신가? 사랑의 능력으로 나를 하나님의 곁으로 인도하신다. 세상을 주님의 평화로 이끄신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그 이름으로 축복한다. 그 분은 베드로에게 뿐 아니라, 내게 누구신가? 오늘 예수님의 물음처럼,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을 경험해야 한다. 사실 모든 설교의 주제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이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일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마주하는 당사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나의 주님은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하여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결단하고, 하나님의 일에, 그 마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이러한 신앙고백을 통해 사랑의 힘을 간직하는 한 천국의 열쇠를 소유한다.
천국의 열쇠는 권력이 아니다. 독점할만한 소유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총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진실한 삶을 살아가느냐이다.
어느 수도원에서 나이 든 수도사가 임종을 맞게 되었다. 그는 수도원에서 온갖 수도복을 만들고, 또 낡은 옷들을 수선하면서 한평생을 보냈다. 그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형제들에게 부탁하였다. “가서 천국의 열쇠를 가져다주시오”.
임종을 지키던 수사들은 서로 돌아보며 “이젠 헛소리를 하는군요. 천국의 열쇠라뇨? 묵주를 달라는 건가, 아님 십자가를 가져다 드립시다”. 그런데 늙은 수사는 그게 아니라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마침내 원장이 그의 말을 알아듣고, 수선실에 가서 작은 바늘 하나를 가져와 손에 쥐어 주었다. 그 늙은 수사는 평안히 숨을 거두었다. 작은 바늘은 수사에게 하루하루 천국을 열어준 천국 열쇠였다. 수사는 바늘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온 것이다.
수도사의 바늘처럼 내게 천국의 열쇠는 무엇인가? 작은 바늘은 무료한 노동이 아닌 그 자신을 수선하고, 꿰매고, 거룩한 노동을 하게한 땅의 열쇠였고, 또 하늘의 열쇠였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여러분 모두 내 삶 가운데에서 천국의 열쇠라는 사랑의 능력을 얻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늘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의 열쇠를 얻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