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7일 연중 30주일 설교
마르 10:46-52 예레 31:7-9, 시편 126
위로하는 기도
예수님이 예리고의 소경과 만난 이 짧은 사건 안에는 많은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복음을 집중하여 묵상하며 위로하는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기도에 임해야 하는지, 그리고 기도의 여정 가운데 일어나는 어려움과 뜻밖의 도우심에 대해서도 영적으로 읽어봅니다. 오늘 이야기 전체가 삶과 기도라는 주제로 연결되어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예리고를 떠나며 오늘 사건은 시작됩니다. 예리고는 사람이 모이는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여러 지방에서 모이니 사건과 사고 또한 많은 곳이었습니다. 먼저 영적으로 예리고라는 상징을 묵상합니다. 예리고는 번잡하고 우여곡절이 많은 우리의 일상이고 나의 마음자리일 수 있습니다. 그런 예리고를 떠났을 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함은 번잡함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기도는 시작된다는 의미로 이해가 됩니다.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날 때, 혹은 세상의 일상을 잠시 접고 교회로 모일 때 기도가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분주함의 상징인 예리고를 떠난 일행, 일상에서의 고단함으로부터 잠시 비켜난 공동체, 바로 거기서 기도가 시작됩니다. 이 사건은 우리의 분주함을 떠나니 기도가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르티매오, 바르는 누구의 아들이라는 말이니, 그저 티매오의 아들로만 불린 앞 못 보는 걸인입니다. 이름도 없고, 앞도 못 보고 걸인인 삼중의 고통을 안고 있는 사람입니다. 불쌍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그를 묵상합니다. 기실 우리도 바르티매오와 같은 삶을 사는 운명은 아닐까요? 누구든 한 가지를 넘어서 세 가지 이상 약점과 아픔과 고통이 있지 않을까요? 기도하는 가운데 바로 ‘내가 바르티매오’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불쌍한 존재임을 알고 인정할 때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나(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우리 인간이 바칠 수 있는 가장 겸손하고 가장 평등한 기도입니다. 자신이 불쌍한 존재임을 진심으로 인정한다면 기도는 거기에서부터 간절해지고 진심을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바르티매오는 자신이 불쌍한 존재임을 인정했기에 간구할 것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기도는 자신이 구할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 먼저라는 말입니다.
그가 외치며 구한 것은 ‘자비’였습니다. 감사성찬례 초입에 바치는 기원 송가(기리에)에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합니다. 자비를 구하는 직설적이고 간절한 문구입니다. 나는 많은 아픔과 약점을 가진 존재이기에, 나의 불쌍함을 내가 알고 있으니, 주님께서 나의 진심을 아시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겸손함과 전심을 담은 기도입니다. 간구하는 우리가 위로를 얻게 되는 귀한 기도입니다. 역시나 예수님은 그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으십니다. 나를 정확히 알면 바라고 원하는 기도도 정확하고 분명히 질 것입니다.
오늘 등장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우리를 성찰로 이끕니다.
한 편은 바르티매오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떠올려 집니까? 예수님을 떠받듯이 존경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고, 주님의 귀한 말씀에 집중하고 싶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거룩한 예배를 방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거나, 정해진 규칙 외의 행동거지에 못 마땅해 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바르티매오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지키려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찮은 무명의 걸인 소경의 외침에 대해 불쾌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거룩함을 자신들만 독점하려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중요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것은 바로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남들의 시선과 자신의 욕심이 합쳐져 다른 이들에게 도무지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 배타적인 사람들 그리고 이를 지키려는 불안함의 허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아픔과 상처는 치유해야 할 기도 제목이 아닌 수치일 뿐입니다.
나의 기도 생활 가운데 방해가 무엇인지 꾸짖음이 무엇인지 묵상해 봅니다.
바르티매오는 창피함과 수치심을 내려놓고 더욱 큰 소리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집니다.
참으로 강렬한 장면입니다. 한 번이라도 그런 강렬함과 열정이 있었던가? 한 번이라도 내 안에서 이런 절박함으로 수치심을 물리치고 주님께 나의 불쌍함을 호소한 적이 있었던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르티매오의 외침을 듣고 예수님이 걸음을 멈춥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이 그분을 움직인 것입니다. 기도는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서라. 그분이 너를 부르신다.’ 교회가 무너지지 않고 이어져 온 결정적인 단초입니다. 교회 안에 다른 이들을 위해 용기와 격려로 세워 주는 기도의 중보자, 촉진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기도가 교회를 세우고 지탱하고 있는 것입니다. 희생과 헌신으로 교회공동체를 지켰기에 오늘의 교회가 이렇게 설 수 있었던 것이고, 앞으로도 이런 중보자가 많은 공동체가 성숙하게 계속 성장해 가리라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바르티매오는 겉옷을 벗어 버리고 주님 앞에 걸어 나옵니다.
그가 벗어 버린 그 겉옷, 낡은 틀과 사고, 낙심, 불안, 나태함으로 상징되는 벗어 던진 겉옷의 의미를 함께 묵상합니다. 여기서 일어선다는 것은 맞서 일어선다는 의미입니다. 용기입니다.
두껍게 둘러 나를 보호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나를 짓누르고 있던 그 겉옷이 무엇입니까?
이를 벗어던진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오고, 그리고 눈을 뜨고 그분을 따라나섭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는 결국 기도는 위로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나의 아픔을 드러내놓고 자비를 구하는 사람, 위선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른 아픈 이들을 격려할 줄 아는 사람, 자신의 허물마저도 주님께 보이며 수치심을 넘어서는 사람...
진심으로 나의 아픔을 드러낼 용기가 있다면,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위로하실 것입니다.
믿음을 버리지 않고 우리의 고백과 행동으로 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에 새삼 위로를 받습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