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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레드 컴퍼스 선교회 Red Compass Mission 원문보기 글쓴이: lemalogos
대강절 설교 3 - 사가랴의 노래
말씀 : 눅 1:57-80절 (69절)
오늘 본문의「사가랴의 찬송시」는 '베네딕투스'(Benedictus)라고 불리웁니다. 이는 46-55절에 나오는「마리아의 찬송시」'마니피캇'(Magnificat)과 함께 초대 교회 때부터 찬미로 사용되어졌습니다. 이 두 찬송시는 아름다운 소프라노와 웅장한 바리턴의 화음과도 같습니다. 실제 사가랴의 찬송시를 보면 웅장합니다. 그 안에 구속사의 비밀이 고스란히 담겨있고 힘이 있습니다.
긍휼과 언약의 하나님, 구원의 뿔이요 돋는 해로서의 예수님이 확신있게 찬양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조그만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지만「예수님이 어떤 의미에서 '구원의 뿔'이 되시고 '돋는 해'가 되시는지」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가운데 임하신 아기 예수님을 힘차게 찬양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1. 요한이라 할 것이라 (57-66절)
57절을 보십시오.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에 이웃과 친족들은 이를 듣고 즐거워했습니다.(58절) 8일이 되어 아이가 할례를 할때 사람들이 모여서, 아이의 이름을 그 부친의 이름을 따서「Jr. 사가랴」라고 하려고 했습니다.(59절)
그런데 이때 모친인 엘리사벳이 불쑥 앞에 나서더니 "아니요,「요한」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고 잘라 말했습니다.(60절) 사람들은 이 말을 듣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요한이라고요.. 그런 이름은 우리 가문에서는 쓰지 않았는데요.."(61절) 그러나 엘리사벳은 여전히 "아닙니다. 요한이라 할것입니다." 하고 단호했습니다. 갑자기 잔치집 분위기가 썰렁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최종 결정권을 부친에게 넘겼습니다.(62절) 이에 사가랴는 서판에 아이의 이름을 거침없이 썼습니다.
"그 이름은 요한이라."(63절)
그와 동시에 벙어리였던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그는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64절)
"찬송하리로다.."(68절)
이에 사람들은 두려워서 할말을 잃었습니다.(65절) 참으로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퍼지고 듣는 사람마다 다 이 말을 마음에 두고 말했습니다.
"이 아기가 장차 어찌될꼬.."(66절)
그들은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자면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도 어렵게 얻은 아들이니 만큼 이 아기가 자신의 대를 잇고 가문을 빛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한편에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하나님의 뜻에도 순종하고 자기들의 뜻도 살려서 그 이름을 '요한 사가랴'라고 짓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그렇게하지 않았습니다.」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60절), "그 이름은 요한이라."(63절)
또한 그들은 아들이 광야로 나가 메시아의 사역을 준비하고자 할 때 어서 아들을 장가 들여 자식이라도 두어명 낳고 난 뒤에 광야로 나가 사명을 감당하라고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그렇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들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그들은「축복의 때에 축복 자체에 얽매이기보다는 변함없이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아들 요한을 자기들을 만족케할 개인의 자식으로 보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룰 메시아의 선구자로,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드렸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부모님의 믿음을 따라 후에 세례 요한도 바리새인들이 그에게 와서 "네가 그리스도냐", "선지자냐"하고 물을 때 모든 인간적인 유혹을 물리치고, "아니라", "아니라"하며 하나님 앞에서 단호한 행동을 취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사가랴와 엘리사벳같은「믿음의 부부」가 많이 나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사가랴의 찬양시 (67-80절)
(1) 첫째, 구원의 뿔 (68-75절)
① 67절을 보십시오.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했습니다. 이 가족은 모두 다 성령에 충만합니다.
② 68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사가랴는 입이 열리자마자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하고 외쳤습니다. 사가랴는 벙어리가 되어 있는 동안 천사를 원망하기 보다 아기의 탄생과 함께 이루어질 구속 역사를 깊이 묵상하였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그의 심령엔 주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입이 열리지마자 찬송하리로다 하며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첫 번째 찬송 제목이 무엇입니까? 68절 뒷부분을 보십시오.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돌아보셨다"는 이 말은 "찾아 오셨다"는 뜻입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 가운데「심방」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 동안 애굽의 바로의 채찍 아래 고통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이를 찿아오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출 3:7,8절)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습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서의 소망을 두신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로 말미암아 나라가 분열되고 수 없이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이방 땅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그들은 헬라제국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같은 적그리스도와같은 자들에게 우상 숭배를 강요당하며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마카비' 형제들에 의한 독립 왕조를 세우긴 했지만 그나마 헤롯에게 무너져 버리고 지금 그들은 로마의 힘에 눌려 정치 경제적으로 극심한 고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백성들 가운데 절망과 불신, 고통이 깊어갔습니다.
무엇보다도 비참한 것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 그들은 버림받은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 보좌를 버리고 그들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땅에 직접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사람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의 현장, 우리가 죄로 인해 정죄받고 고통하는 그 현장에, 나의 외로움과 마음의 상처, 운명, 허무에 시달려 괴로워하고 있는 현장에 직접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그 몸과 마음으로 우리의 고통을 체험하시며 우리를 대면해 보시고 우리의 말을 들어주시고 우리를 만져주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구원의 역사는 이렇게「돌보는」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영육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 이것이「성탄의 의의」입니다. 절망과 운명주의와 죄로 고통하며 지내고 있는 영혼들과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돌아보는 의미있는 성탄을 맞이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어 사가랴는 주께서 자기 백성들을 돌아보사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셨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68절 뒷부분을 보면, 돌아보사 "속량하셨다"고 했습니다.「속량」은 노예 상태에 있는 자를, 값을 치르고 해방시켜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현재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가 죄의 노예 상태에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 상태에 있는 고통이 어떠합니까?
「오래전에 '알렉스 헤일리'가 쓴 책『뿌리』가 TV 영화로 만들어져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백인들이 얼마나 가혹하게 채찍을 휘두르며 그들을 혹사시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원래 아름다운 아프리카에서 가족, 친족, 이웃들과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영문도 모른채 백인들에게 잡혀 먼 이국땅으로 끌려가 갑자기 채찍을 맞으며 죽을 고생을 해야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쿤타킨테'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수없이 자유를 위해 탈출을 감행하지만 때마다 잡혀 고문을 당하고 결국 주인이 그의 발목을 도끼로 잘라 불구가 된 후에야 자유를 향한 꿈을 접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녀 '벨'과 결혼합니다. 그가 딸 '키지'를 났는데 그 딸도 자라서 '쿤타킨테'처럼 노예로 팔려가고 새로운 주인에게 겁탈까지 당해 임신하게 됩니다.
이 노예들은 대를 이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자기들이 백인들 사이에서 돈에 팔려 이리저리 짐승처럼 끌려다녀야했던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벗어나고 싶어도 도무지 힘이 없어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짐승처럼 취급받고 고생하다가 병들어 죽으면 내던져 버려졌습니다. 이렇게 죽으면 그때서야 노예 인생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아니면 어쩌다 좋은 주인을 만나 그가 자기 몸값을 치루어주고 놓아줄 때 그 저주스러운 노예 생활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죄에 노예되었다고 할때도 이와 똑같습니다. 누가 우리를 죄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까? 정욕과 운명주의, 미움, 원망, 거짓말, 탐심 등의 죄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사탄은 "너는 나의 노예야" 하면서 사정없이 우리 인간들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계속 죄짓게 하고 또 대를 이어 죄짓게 하며 우리의 영혼을 파멸시켜가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여기서 벗어나고 싶으면 그동안 지은 죄값으로 죽음을 내어놓으라고 합니다. 정말 죽어버리면 이 죄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는다고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듯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절)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과 유황이 뜨껍게 아주 뜨겁게, 영원히 타오르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어떻게 우리가 여기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이것 역시 누군가가 내 대신 죄값을 치루어 속죄해 해방시켜 주어야 합니다.
사가랴는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인간이 죄에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속량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죄값, 곧 속전을 지불할 수 있습니까? 바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예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그 몸으로 우리를 위해 대신 죄값을 치루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서는 죄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죽어서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 영혼이 고통 대신에 찬양을 하게 되었습니다. 슬픔 대신에 기쁨이 충만하고 운명 대신에 하나님의 섭리를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일생 죄의 노예로 살다가 끝내는 지옥에서 파멸할 수 밖에 없던 우리를 돌아보사 그 피로 속량해주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③ 69절을 보십시오.
이어 사가랴는 우리를 위하여「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왜 예수님을「구원의 뿔」이라고 했습니까?
뿔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사슴 뿔과 같이 영광을 상징하는 뿔이 있습니다. 또한 이 뿔은 몸에 좋은 보약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뿔은「힘」을 상징합니다.(신 33:17절)
뿔은「엄청난 파괴력」이 있습니다. 스페인의 투우들의 뿔은 아주 날카롭습니다. 그 뿔이 얼마나 견고하고 날카롭고 무서운지 투우를 보는 사람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를 지켜봅니다. 그러다가 투우사가 투우의 뿔을 멋지게 피할 때 조마조마했던 만큼 더 환호하며 갈채를 보냅니다. 그러나 누구든 그 성난 투우의 뿔에 한번 받치며 그것으로 끝장입니다.
사자가 아무리 초원의 왕이라고해도 뿔이 있는 짐승들에게는 함부로 달려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번 그 뿔에 받쳤다하면 그 성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죽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코뿔소는 아예 건드리지도 않고 먹이감으로 생각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자도 뿔 무서운 줄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뿔은「힘」을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은 사탄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데 사탄 역시 뿔이 있고 권세가 엄청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바다에서 나오는 한 짐승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 짐승은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고 했습니다. 2절을 보면 용이 나오는데 이는 사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 짐승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 짐승은 머리가 하나 상해 죽게된 줄 알았는데 그 상처가 놀랍게 나았습니다. 그래서 온 땅이 이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말합니다.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계 13:4절)
요한계시록 13장 11절을 보면 새끼 양같은 짐승이 이번에는 땅에서 올라오는데 이 짐승도 두 뿔이 있었습니다. 이 짐승도 먼저 나온 짐승의 권세를 가졌으며 또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이적까지 행했습니다. 이에 땅에 있는 사람들이 미혹당하고 두려워하며 "우상을 만들라"하며 짐승을 경배하였습니다. 이 사탄이 이 세상에 정욕을 뿌리고, 돈을 뿌리고, 권세를 뿌리며 사람들을 강력하게 유혹합니다. 또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 미움, 분노, 복수심, 거짓말, 이기심, 교만, 열등감, 살인 감정 등을 그 뿔로 마구 찔러 넣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꼼짝 없이 사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인터넷에 각종 저질 게임과 저질 음란 싸이트 등 각종 죄를 뿌려놓았을 때 수많은 젊은이들이 정신이나가 컴퓨터 앞에서 사탄이 끄는데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정말 인간은 원튼 원치않튼 이렇게 사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이 좀 봐주셔서 우리 가운데 조금 남겨주신 하나님의 형상 덕분에 그나마 인간으로서의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들의 영혼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죄의 고통을 겪으며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하게 살고자 하던 바울도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도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롬 7:24절)
④ 70,71절을 보십시오.
누가 이 사탄의 강력한 힘을 벗어나 도망나올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으로는 안됩니다. 오직「구원의 뿔 예수님」을 의지할 때만 가능합니다.「예수님은 사탄의 권세를 파하는 능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첫째는 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온전히 속량하시므로 우리를 사탄의 손에서 빼내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시므로 죽음의 권세, 사탄의 권세를 박살내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의하면 예수님이 이 사탄의 골통을 부수어 놓는다(crush - '아작'을 내버린다는 뜻)는 예언의 말씀이 있는데 이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믿는 모든 이들에게는 이전의 그 권세를 잃었습니다.
셋째로 이 예수님은 원래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천지만물의 창조자로서 하늘과 땅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권세를 물려받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절)
이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 날에 사탄을 지옥에 던져버릴 분이십니다. 구원의 뿔 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다윗의 집에서 이「구원의 뿔」을 일으키셨고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으로 말씀하신바를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우리의 원수, 우리를 미워하는 자, 곧 사탄의 손에서 구원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제 구원의 뿔되신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힘입어 승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의지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 안에 온갖 죄의 세력이 도망가고 더 나아가서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처럼 귀신을 쫒고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 시키며 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금과 은이 없어도 앉은뱅이도 일으킬 수 있고 죽은자도 살릴 수 있는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그 이름에 의지해 간절히 기도하고 도전하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의 권세를 의지해 나갈 때 어떤 사상과 이단과도 싸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권세는 어떤 견고한 진이라도 파하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구원의 뿔 되신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의지할 때 원수 마귀가 떨고 그의 지옥 권세가 흔들립니다.」
이제 우리가 구원의 뿔되신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의지하며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조그만 아기,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우리들의 구원의 뿔이 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⑤ 72,7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신 근본 동기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 말씀은 생각할수록 놀라운 은혜의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이 행한 어떤 것을 보아도 인간은 사실 무서운 심판의 대상입니다. 타락한 인간 본성이 어떠합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10,11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고 했습니다. 이런 인간들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하나님이 인간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처음 범죄할 때부터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에덴 동산을 지어 주시고 가정을 만들어 주시고 또 하나님이 지으신 이 놀라운 세상의 주인이요 정복자로 축복해 주셨을 때 인간은 하나님을 배반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보면 볼수록 모든 것이 놀랍고도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이들을 꼬득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만 사탄의 말 몇마디로 하나님을 불신하고 배반하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자신들도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며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했습니다.
이후 인간은「사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이 행동 자체를 볼 때 하나님은 분노하시고 당장에 그들을 그 자리에서 쓸어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나무 뒤에 숨어있는 인간을 보시고 찢어지는듯한 마음의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한마디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인간을 향한 연민과 긍휼은 한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3장 15절의 구원의 복음을 주시고 무화과 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몸을 가리고 벌벌떠는 그들을 위해 한 동물을 잡아 가죽옷을 입혀 그들의 몸을 가려주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들은 이 구속의 사랑을 잊고 갖가지 죄를 범했습니다. 우상 숭배하고 거짓말하고 도적질, 간음, 살인의 죄를 마구 범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든 죄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그러나 이 죄로 인해 고통하는 인간들은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후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시며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이 언약과 맹세를 따라 독생자를 보내주시고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게 하고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 하나님이 베푸신 이 긍휼에 감사하고 또한 이 긍휼로 주의 양무리들을 섬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의 의가 아니요 다만 긍휼로 우리 영혼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서 어떻게 축복해주셨습니까?
⑥ 74,75을 보십시오.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순결하신 성령님의 힘을 덧입고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를 덧입고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두려움 없이'란 말은 '이제는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본인이 아무리 인정하지 않는다고해도 사탄의 노예가 되어 사탄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죄의 노예되어 일생을 비참하게 살다가 마지막에는 지옥에 던져저 영원히 고통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축복이 어떠합니까?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감사한 것은 이제는 하나님께 기쁨으로 나와 예배하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는 더 깊은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더 풍성한 생명의 은혜를 누리게 되고 지혜와 지식이 더 넘치게 됩니다. 자신의 능력을 무한히 발휘해가며 역사를 창조해나가는 사명인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 세계를 섬기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맻게 하셨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의 삶은 날이 갈수록 더 의미있어지고, 풍성해집니다.
「정년도 없고 은퇴도 없이 종신토록 이런 삶을 살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구원이고 그 구원의 목적입니다. 출애굽기 3장 12절을 보면 출애굽의 목적도 이스라엘이「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다만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해주사 이렇게 우리 인생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을 섬기며 찬양하는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2) 둘째, 돋는 해 (76-79절)
① 76,77절을 보십시오.
사가랴는 이제 막 할례를 행한 아기 요한을 품에 안고 말했습니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그는 자기 아들을 자랑하고자 노래한 것이 아니라 장차 아기의 사역에 이어지는 메시야 사역에 대한 감동을 노래한 것입니다. 특별히 그는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가랴의 구원관이 얼마나 정확하고 영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② 78절 앞부분을 보십시오.
사가랴는 다시 한번 이 죄사함과 구원이 바로「긍휼로 인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③ 78절 하반절과 79절을 보십시오.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사가랴는 예수님을「돋는 해」로 비유하며 찬양했습니다. 떠오르는 태양을 본 적이 있습니까? 불끈 거리며 힘차게 솟아올라오는 태양 말입니다. 이 돋는 해는 일분 일분이 지날수록 더욱 찬란하고 세차게 비치며 온 세상을 순식간에 광명 천지로 만듭니다. 간밤의 어두움은 온데 간데 없어집니다. 이 태양을 바로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이처럼 돋는 해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에 임하실 때 우리 마음에 역사하는 모든 어두움과 죽음의 요소가 순식간에 물러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심령에는 빛이 충만하고 생명과 평강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 주변에도 이제는 빛으로 충만합니다. 이 돋는 해 되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일어나 힘차게 일할 수 있고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더 이상 어두움의 세력이 다가올 수 없습니다. 이 돋는 해 예수님이 임할 때 우리는 기쁨과 찬양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소망과 비젼이 넘칩니다. 형제들은 박력이 넘치고, 자매들은 햇님같이 환해지고 예뻐집니다. 말라기 4장 2절에 보면「돋는 해」는「치료하는 광선」을 발한다고 하였습니다. 정욕으로 인해 병든 마음, 허무주의로 병든 마음, 운명주의로 병든 마음을 근본적으로 치료해 줍니다. 그때 우리는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기쁨으로 뛰놀게 됩니다.
「구원의 뿔」,「돋는 해」되신 아기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세상이 아무리 거칠어도 우리가 살 힘을 얻고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상업주의, 육신주의, 물질주의에 깊은 물든 세상은 성탄의 계절이 와도 아기 예수님은 생각하지 않고 돈벌고 즐길 생각만 합니다. 그러나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이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하며 주께 찬양을 드려야겠습니다.
입을 모아 노래하고 악기를 모아 주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웅장한 팡빠레를 울려야겠습니다. 특별히 성탄의 복음을 힘써 전하는 가운데 이 구원의 은혜를 우리 주변 모든 사람들과, 특별히 양들과 함께 나눌 수 있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