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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雩南)이승만(李承晩)年譜(1875~1965年)
제1편 <1875年~1910年>
●1875.3.26: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내동에서 출생.호는 우남(雩南) 아버지 이경선(李數善. 1839-1912), 어머니 김해김씨(1833-1896) 사이에 3남 2녀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나,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6대 독자가 됨. 양녕대군(태종의 장남)의 16대손이지만 대군이 세자 자리를 동생 충녕대군(세종)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양녕대군파는 조선시대에 별로 빛을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이승만 자신은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조선왕조 자체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다.
●1877:서울로 이사하여 남대문밖 염동, 낙동을 거쳐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에서 자람. 그 때문에 그는 지역적으로 서북파 보다는 기호파로 분류되는 것이 보통이다.
●1879: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
●1885~1894: 사간원 대사간직을 지낸 이근수(양녕대군 봉사손)의 도동서당에서 수학
●1895.4.2(20세): 신긍우(신흥우의 형)의 권유로 아펜젤러의 배재학당 입학
●1895.11.29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는다는 계획(춘생문사건)이 탄로나 황해도 평산의 누이 집에 3개월간 피신
●1896.5(21세):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을 만나 서양 학문을 배움.
●1896.11.30: 배재학당에서 양홍묵 등과 함께 <협성회>를 결성하고 미국식 토론회를 통해 개화구국운동의 방향을 찾음. 이승만은 서기, 회장을 맡음.
●1897.7.8(22세): 배재학당 졸업식 (방학예식에서 졸업생을 대표해 '한국의 독립'이란 제목으로유창한 영어 연설을 함을 함으로써 참석한 정부 고관들과 주한 외국 사절들로부터 극도의 칭찬을 받음.
●1898.1.1: 양홍묵과함께 산글판 주간신문 "협성회보"를 발간하고 주필을 맡음. 한국 최초의 현대시 "고목가(枯木歌)"를 실어 열강 의 침략에 대한 국민의 경각심을 일깨우려 함.
●1898.3.10: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독립협회가 종로에서 제1차만민공동회를 개최하자 가두연설로 인기를 얻음. 외부대신에게 항의하는 총대위원으로 뽑힘.
●1898.4.9: "협성회회보"를 한국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으로 발전시킴(사장 및 저술인의 직책을 맡음).
●1898,8,10: 이종일과 함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편집과 논설 담당)
●1898,11,5: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한다는 혐의를 받아 독립협회의 이상재, 남궁억 등 17인이 체포되자(익명서 사건), 이승만은 배재학당 학생등 대중을 이끌고 경무청과 평리원(고등법원) 앞에서 철야농성을 벌여 석방시키는 데 성공.
●1898.11.21 만민공동회에서 연설하던 중 수구파들이 보낸 보부상 2천여 명의 습격을 받아 유혈충돌이 일어남.
●1898.11.26: 고종 황제가 독립협회를 달래기 위해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하고, 이승만, 남궁억 등 50여 명을 중추원 의관(종9품)으로 임명함.
●1898.12.23: 고종이 만민공동회 해체로 방향을 바꾸자. 미국인의사 해리 셔먼의 집으로 피신.
●1899.1.9(24세): 박영효 일파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됨(독립협회 사건). 5년 7개월 간의 감옥생활이 시작됨.
●1899.1.17: 이승만의 석방을 미국공사 알렌이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요구했다가 거부당함.
●1899.1.30: 독립협회 동지 주시경 (한글학자)이 몰래 건네 준 육혈포를 쏘며 동지 2인과 함께 감옥을 탈출했으나 곧 체포됨. 서상대만 중국으로 탈출 성공.
●1899.7.11: 평리원(고등법원) 재판장 홍종우에게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고 한성감옥에 수감됨. 탈옥동지 최정식은 처형됨.
●1900.8.(25세): 한성감옥에서 청일전쟁의 교훈을 다룬 중국책 "중동전기본말"을 한글로 번역 (1917년 하와이에서 "청일전기"라는 이름으로 출판됨)
●1901~1903(26-28세): 옥중 생활 속에서도 가명으로 "제국신문"과 "신학월보"에 수시로 논설을 실음. 어린이 죄수들을 교욕하고 옥중도서실을 운영
●1904.2~6.(29세): 국민계몽서인 "독립정신"의 원고를 완성(서양의 선진문명을 배워 부국강병을 이룩할 것을 백성에게 호소한 책으로서, 원고가 미국으로 몰래 반출되어 1910년 3월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출판됨)
●1904.8.9: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특사로 감옥을 나옴(민영환, 한규설이 그의 사면을 위해 노력).
●1904.10.15: 남대문의 상동교회 상농청년학원 교장직에 취임했으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곧 사임
●1904.11.4: 제물포항에서 미국으로 출국 (독립보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한 고종의 밀사 자격). 일본 고베를 거쳐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윤병구 목사와 합류.
●1984.12.37: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디씨에 도착.
●1905.1.15 (30세):"워싱턴포스트"지에 일본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는 인터뷰.
●1905,2: 워싱턴디씨의 조지 워싱턴 대학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
●1905.2.20: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의 주선으로 존 헤이 국무장관과 30분간 면담.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문에 따라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헤이 장관의 죽음으로 허사가 됨.
●1905.4.23: 워싱턴디씨의 커버넌트 장로 교회의 루이스 헬린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음.
●1905,8,5: 뉴욕시 동쪽 오이스터베이의 사가모어힐 "여름백악관"에서 윤병구 목사와 함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잠시 면담 하고 한국의 독립보전에 대한 지원을 요청.
●1907.6,5(32세): 조지 워싱턴 대학 콜럼비아 학부 졸업.
●1907.6.23: "워싱턴포스트"지에 이승만이 YMCA에서 했던 연설기사가 실림.
●1907.7.25: 에드베리 파크 뉴욕 모닝포스트지에도 인터뷰 기사가 실림.
●1907.8.1: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다가 연해주로 돌아가는 이상설을 뉴욕에서 만남.
●1907.9: 하버드 대학 석사과정 입학. 1908년에 수료했으나 안중근의 이등박문 암살 사건과 전명운의 스티븐스 암살 사건으로 친일적인 미국인 교수들로부터 냉대를 받게 됨.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워 석사학위는 1910년 2월에 가서야 받게 됨.
●1908.7.10~15 (33세):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자대회 (The Korean Patriots' Delegation Convention) 의장으로 선출됨. 스탠포드대학 총장 데이비드 스타 조단의 개회사, 「덴버 리퍼블리」지가 이 대회를 자세히 보도
●1908.9: 프린스턴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국제법을 공부, 지도교수인 우드로 윌슨 총장(나중의 대통령) 가족과 친밀한 관계 유지.
●1910.7.18(35세).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음. 그의 학위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은 1912년에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됨.
●1910.9.3: 국권을 빼앗긴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뉴욕항을 출발
●1910.10.10 귀국(리버풀, 런던,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만주를 거쳐 서울역에 도착, 5년 11개월 6일 만의 귀국
제2편 <1910年~1920年>
●1910~1912.3.26 (35~37세): 서울 기독청년회(YMCA)의 한국인 총무와 청년
학교 학감에 취임하여 교육 전도 활동, 존 모트
의 <신입학생 인도>를 번역해 출판, 37일 동안
(1911.5.16~6.21)의 전국순회전도 여행 중에 개성에서 윤치호가 세운 한영서원 (송도고등학교)에 둘러 제2회 전국기독학생 하령회(夏令會)에 참석.
●1912.3.26(37세): 다시 미국으로 망명(1년 5개월의 한국 생활을 마감), '105인 사건'에 뒤이은 체포 위험이 있자,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릴 '국제기독교 감리회 4년 총회'의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도록 선교사들이 주선함으로써 체포를 면함
●1912.5.1: 일본, 캐나다, 미국의 시애틀을 거쳐 미네아폴리스의 감리교 총회에 참석
●1912.6.19: 온사인 우드로 윌슨(당시 민주당 대령 후보) 뉴저지의 시트 별장에서 만나 한국의 독립 지원을 호소(그 후 두 차례 더 만남 윌슨의 추천서를 가지고 워싱턴 등지를 다니면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
●1912.11.28: 워싱턴포스트에 인터뷰 기사가 실림
●1913.2.3(38세): 하와이에 정착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
●1913,8: 하와이 미감리교회가 운영하는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직을 맡음. 한국어와 한문을 새로 가르치고 학교 이름도 '한인중앙학원'(韓人中央學院)으로 바꿈.
●1913.9.20: 월간 태평양잡지 창간(나중에 '태평양주보로 제호를 바꿈)
●1914.7.29(39세): '한인여자(성경)학원'을 설립
●1915.6(40세):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재정 문제를 둘러싸고 박용만과 충돌, 박용만은 몇 년 뒤에 중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가 그의 행동을 오해한 한인에 의해 피살됨.
●1915.6: '한인중앙학원'을 미국 감리교 선교부로부터 독립시킴.
●1917(42세): 호놀룰루에서 '독립정신' (제2판)과 '청일전기'를출판.
●1914.10.29: 뉴욕에서 개최된 25개 약소민족대표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1918,7,29(43세): 호놀룰루에 '신립교회' 창설.
●1918.9.'한인여자(성경)학원'을 남녀공학인 한인기독학원(The Korean Christian Institute)으로 바꿈.
●1918,12,1: 정한경, 민찬호와 함께 "대한인 국민회"의 파리 평화회의 한인대표로 선출됨.
●1919.1.6(44세)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주 본토를 향해 호놀룰루 출발,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안창호를 필라델피아 에서는 서재필, 장택상. 민규식 등을 만나 독립 추진 방략을 논의
●1919.3.3 파리 평화회의에 기대할 것이 없어 보이자, 정한경의 제의에 따라 장차 완전독립을 전제로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윌슨 대통령에게 청원. 그러나 이것은 급진파 독립운동가들로부터 맹렬히 비난을 받게 됨.
●1919,3,5 파리행 여권 발급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미국무부로부터 받음.
●1919,3,10 서재필로부터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음.
●1919.3.21 노령(러시아령) 임시정부에서 국무경(국무 및 외무총장)으로 추대됨(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이승만은 그 사실을 4월 5일에 알게 됨)
●1919.4.7 국무경 자격으로 UP통신과 회전
●1919.4.11 상해임시의정원이 이승만을 국무총리에 추대(이승만은 4월 15일에 알게 됨).
●1919.4.12 하와이에서 독립선언식 거행
●1979.4.14~16 서재필 정한경과 함께 필라델피아 시내 소극장에서 한인대표자대회 (The 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하고 인디펜던스홀까지 행진, 대회에는 필라델피아 시장을 비롯한 저명인사들이 참석
●1919.4.23 서울에서 13도 대표들이 국민대회를 열고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추대 (이승만은 5월말에 알게 됨)
●1919.4.23 워싱턴디씨에 대한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 활동본부 설치.
●1919.6.14~27 '대한공화국' 대통령 이름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국가원수들과 파리 평화회의 의장 조르쥬 클레망소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 발송
●1919.6.27 파리에서 외교 활동중인 김규식 대표에게 정부훈령을 보냄.
●1919.7.4 국내·외 동포에게 독립을 위한 헌신을 촉구하는 '대통령 선언서' 발표.
●1919.7.17 워싱턴디씨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 설치
●1919.8.15 호놀룰루에서 대한독립혈전기 (大韓獨立血戰記) 발간
●1919.8.16 대한인국민회가 이승만의 집정관 총재 추대 축하식 거행
●1919.8.25 워싱턴디씨에 '구미위원부'를 열고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임명함. 9월에 '임시정부 구미위원회'로 이름을 바꿈.
●1919.9.1 재정 확보를 위해 김규식과 공동명의로 임시정부 공채 발행.
●1919.9.6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임시대통령'으로 선출
●1919.9.19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과 함께 1주일 동안 전체 한인회의를 개최, 필라델피아 시장 토마스 스미스, 상원의원 5. D 스펜서 등의 저명인사들이 참석. 그들의 연설문은 미국의회의사록에 수록됨
●1919.9.19 이승만의 고문 변호사 프레드 돌프의 한국독립 지지 논설이 미국의회 의사록에 게재됨
●1919~1920.6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대한공화국' 지지 호소 강연
제3편 <1920년~1940년>
●1920.3.(45세) 서재필과 함께 찰스 토마스, 존 쉬로스 미 상원의원으로 하여금 '한국독립'을 미 의회에 상정케 함. 상원 본회의에서 아일랜드 독립지지안과 함께 상정되었으나 34:46으로 부결됨
●1920.11.15 상해 임시정부 임시대통령직에 부임하기 위해 호놀룰루 항에서 비서 임병직과 함께 몰래 화물선에 오름. 일본이 30만 달러의 체포 현상금을 걸었기 때문에 중국인 시체를 넣은 관 속에 숨어 있었음.
●1920,12,5 상해에 도착하여 미국인 안식교 선교사 푸트 목사 집에서 기거
●110.12.28 상해 임시정부청사에서 초대대통령 취임식. 5개 월간 집무했으나 독립운동가들의 노선 갈등으로 크게 시달림.
●1921.5.29(46세) 워싱턴 군축회의 개최 예정 소식이 들리자 '외교상 긴급과 재정상 절박' 때문에 불가피하게 떠난다는 '고별교서'를 발표하고 상해를 출발,
●1921.6.29 호놀룰루 도착, 민찬호 등과 함께 자신을 지지할 대한인 동지회 조직
●1921,8,27 워싱턴 군비축소회의 (태평양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상해 임정의 전권대사 자격으로 워싱턴디씨에 도착(부대사 서재필, 서기 정한경, 고문 프레드돌프).
●1921.10.10~12.1 워싱턴군축회의 미국 대표단에게 '한국독립창원서' 제출. 대한민국의 승인을 요청하는 법률고문 프레드 돌프의 글 '미국의회의사록'에 수록
●1922.1.25 (47세) '군축회의에 드리는 한국의 호소' 속편 발표
●1922.3.22 이승만 지지자들이 '대한인 국민회 하와이 지방회'를 '하와이 한인교민단' 으로 이름을 바꿈
●1923.6.(48세) 학생고국방문단(남학생 12명, 여학생 8명)을 2개 월간 한국에 파송, 전국 각지를 돌며 야구시합과 공연을 갖고 3,600 달러를 모금해 하와이로 돌아 옴
●1924.1~10.25(49세): 미국 본토 방문, 임영신으로부터 관동대진재 때 일본인의 만행 자료를 얻음. 로스앤젤레스에서 파나마운하를 거쳐 워싱턴에 도착.
●1924.11.23 '대한인동지회'의 종신총재로 추대됨
●1925.3~4.20 상해 임시정부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는 이유로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에서 면직하고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발표. 그러나 이에 불복해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계속 운영
●1928.4.10 구미위원부에서 "재만동포옹호" 팜플렛 발표
●1929~1930.1.8(54세) 미국 본토 전역을 방문하며 대한민국의 독립을 호소. 호블루로 돌아온 후 '태평양잡지'를 '태평양주보'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발간하기 시작
●1932.11.30(57세)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의해 국제연맹에 한국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됨.
●1932.12.23~1933.1.26 국제연맹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 도착(리버풀린,런던,파리 경유)
●1933. 1.26 프랑스어 일간신문 "주르날드 제네바"에 인터뷰 기사가 실림.
●1933.2.8 독립을 요구하는 공한 국제연맹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배포
●1933.2.16 국제연맹 방송시설을 통해 극동분쟁과 한국에 관해 연설.
●1933,2,21 제네바의 호텔 드뷔시 식당에서 아내가 될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unner) 양을 만남
●1933.2.22 제네바의 프랑스어 신문 "라 트리뷴 도리앙"지에 독립운동 기사가 실림
●1933.2.23 베른의 독일어 신문 "데르 · 분트"도 활동상황을 실음
●1933.7.9~7.20 소련에게 독립지원을 호소해 보고자 모스크바 기차역에 도착하였으나 (비엔나 경유) 즉시 퇴거당함
●1933.8.10~16 프랑스 니스를 출발하여 뉴욕에 도착. 10월에 호놀룰루로 돌아옴.
●1934.1.12 (59세) 워싱턴의 데일리뉴스지가 이승만의 활동을 보도
●1934.7.22 미국무부의 정치고문 스탠리 흔백 박사 면담하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호소
●1934.9.16 장기영과 함께 몬태나의 뷰트 방문 "몬태나 스탠다드"지가 기사 게재
●1934,10,2 뉴욕렉싱턴 가(街)의 호텔 몽클레어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
●1935,1,24 (60세) 부인과 함께 호놀룰루에 도착. "스타블리턴"지에 만주의 한국인도 독일의 자르 지방인들처럼 민족 자결의 원리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호소문이 실림
●1938.4.24 (63세) 호놀룰루시 릴리하가(街)에 '한인기독교회' 건물 낙성
●1939,3,30 (64세)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가능성이 보이자 워싱턴 디씨에서 구미위원회 활동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호놀룰루 출발.
●1939.8.30 한국인과 중국인이 국제정세에 대해 몽매한 것을 한탄하며 한국의 독립에는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을 강조하는 편지를 김구에게 보냄.
●1939.12.10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에서 이청천 장군의 독립운동을 알림
제4편 <1941년~1945년>
●1941.4.20 (66세) 호놀룰루에서 9개 단체가 모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외교위원장으로 임명됨.
●1941.6.4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됨.
●1941.6. 뉴욕에서 일본의 미국 침공을 경고하는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간. 12월에 진주만 기습공격이 일어나자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됨.
●1941.12.9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자 미 국무부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박사, 대통령 루즈벨트,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과임시정부 승인 요구 공한公)을 전달함.
●1942.1.2(67세) 미 국무부의 실세인 알저 히스와 면담. 소련의 한반도 점령 의도를 설명하고 미국의 대응책을 제안했다가 나중에 소련 간첩으로 판명된 알저 히스로부터 호되게 모욕을 당함.
●1942.1.16 미국인들로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을 창설, 미국의회 상원 원목인 프레데릭 해리스 (이사장), 전 캐나다 대사 제임스 크롬웰(회장), 언론인 제이 제롬 윌리엄스, 변호사 존 스태거즈가 중심인물.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 지원을 목표로 활동.
●1942.2.27 미 국무장관 코넬 헐에게 자신의 신임장과 임시정부의 공한을 제출.
●1942.3.23 미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임정 승인을 요청.
●1942,5,6 이승만 후원조직인 '한미협회' 회장 제임스 크롬웰이 국무장관 코델 힘에게 임정 승인을 촉구
●1942,6.7 미국의 소리(VOA) 초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
●1942.9.30 미 육군전략사무처(OSS)의 로센봄 중위, 국무부 차관보실의 로스토우를 만나 중국내 한인 게릴라부대 조직 문제를 협의
●1942.10.10 미육군전략사무처(OSS) 프레스톤 굿펠로우 대령에게 항일 게릴라 조직 제의 한국인 선발요원 50명의 명단을 OS에 통보
●1942,12.4 12명이 선발되어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
●1942,12,7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인 군사훈련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냄.
●1942.12.31~1943.2.16 미 국무장관 코델 헐이 만나주지 않자, 만약 미국정부가 일정을 승인하지 않으면 전후 한반도에 친소 공산정권이 수립될 것임을 편지로 경고
●1943.2.17(68세) 미 육군장관 헨리 스틸슨에게 편지로 항일 게릴라 조직계획서를 제시
●1943.3.30 미육군장관에게 하와이 한인동포들을 일본인과 같은 적성국민으로 대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냄. 육군장관으로부터 다르게 취급하겠다는 회신을 받음.
●1943.5.15 미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극동에 대한 소련의 야욕을 상기시키고 임정 즉각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 발송.
●1943.8.23 제1차 퀘벡 회의에 참석한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에게 전보로 임정 승인과 군사 지원을 요청.
●1943.8. 한미협회와는 별도로 기독교인친한회 (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조직. 한국 의료선교사 애비슨, 아메리칸대학 총장 폴더글러스 등이 중심인물.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 지원을 목표로 활동
●1943.12.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인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탈퇴.
●1943.12.19~12.22 가이 질레트 상원의원으로부터 임정 승인이 불가
능하다는 서한을 받자, 몇몇 동지들과 함께 항의방문
●1944.8.21(69세)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로 임정 승인을 촉구.
●1944.9.11 제2차 퀘벡 회의에 참석한 루즈벨트와 처칠에게 카이로 선언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일본 패망후 한국의 즉각 독립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냄.
●1944.10.25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로 임정 승인을 촉구
●1944.11. 미 체신부가 태극기 마크가 그려진 미국 우표 발행
●1945.2,5 미 국무차관 조셉 그루에게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는 소련의 야욕을 막는 방법으르 임정의 즉각 승인을 촉구하는 전보를 보냄
●1945.3.8 미 국무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에게 4월에 열릴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립총회에 임정대표를 초청하도록 요구.
●1945.3.9 루즈벨트 대통령 부인 엘리노어 여사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면담.
●1945.5. 유엔 창립총회에 참석하려는 한국인들에게 중국의 외교부장 송자문 (쑹쯔원)이 좌우합작을 주장한데 대해 맹렬히 반대
●1945.5.14 얄타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이 한국을 소련의 지배로 넘겨주기로 비밀협약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발표함으로써 (얄타밀약설) 미 국무부와 충돌
●1945.8.15 해방 즉각 귀국하려 하였으나 반공주의자 이승만을 기피인물로 여기는 미 국무부의 방해로 2개월간 지연됨.
●1945.10.16 33년만의 귀국(김포비행장 도착) 조선호텔에 투숙, 다음날 귀국 담화 방송.
●1945.10.21 허현, 이강국 등 좌익들이 이승만을 방문하고 인민공화국 주석 취임을 요청.
●1945.10.24 숙소를 돈암장(岩莊)으로 옮김.
●1945.10.25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직을 맡음.
●1945.10.31 돈암장에서 박현영과 회담
제5편 <1946年~1949年>
●1946.1.14 (71세)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매국노로 규정하고 결별 선언.
●1946.2.8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통합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총재가 됨
●1946.2.25 미군정청 자문기구인 남조선 대한민국대표 민주의원의장으로 선출됨.
●1946.5.11 지방 인사들이 자율정부 수립을 갈망한다고 언명
●1946.6. 하지 장군의 좌우합작위원회 참가 권유를 거부
●1946.6.3 전북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
●1946.6.29 독립정부 수립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민족통일본부 결성
●1946.8.14 미트루먼 대통령에게 카이로 선언의 이행을 촉구하는 전문 발송.
●1946.9.10 독립정부 수립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로부터 유엔에 넘길 것을 요구하기 위해 임영신을 미국에 파송.
●1946.9.12 돈화문 앞에서 공산주의자의 권총 저격을 받음.
●1946.10.28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 위배되는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취소하라고 성명
●1946.12.2 독립정부 수립을 UN에 직접 호소하기 위해 동경을 거쳐 미국으로 출발
●1946.12.12 소련이 한국의 통일정부 수립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 확실하므로 남한에서만이라도 과도정부 수립이 필요하다고 주장.
●1947.3.10 (72세) 미 정부 관계자로서는 유일하게 힐드링 국무차관보가 이승만의 독립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발언
●1947.4.1 귀국하기 위해 워싱턴디씨 출발, 출발 전에 미국무부로부터 귀국 방해를 당함.
●1947.4.13 동경을 거쳐 상해에 들러 장개석(蔣介石) 총통과 회견.
●1947.4.21 이승만의 귀국을 환영하는 성대한 국민대회 개최
●1947.5.24 우익 59개 단체가 이승만의 신탁통치 반대 입장 을 지지
●1947.7.3 좌우합작을 주장하는 하지 중장과의 협조 포기 선언. 가택연금을 당함.
●1947.9.16 독립정부 수립을 위한 수단으로 남한 총선거를 주장. 소련의 진의를 파악하게 된 미국 정부가 이승만의 주장에 동조하기 시작
●1947.9.21 이청천이 단장으로 있는 대동청년단의 총재로 취임.
●1947.10.18 독지가들의 모금으로 마련된 이화동의 이화장 사저에 입주
●1947.11.14 유엔 총회에서 유엔 감시하의 한반도 자유선거 실 시를 가결
●1948.1.8 (73세) 유엔한국임시위원단 한국도착. 이승만은 환영군 중대회에서 연설. 위원단 단장 메논(인도)이 북한과의 좌우합작을 요구하는 발언을 시작하자 즉각 대회장을 박차고 퇴장함.
●1948.1.23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유엔 소련대표 그로미코가 거부.
●1948,3,30 선거 연기설 비난.
●1948.4.1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은 소련의 목적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담화
●1948.5.10 최초의 자유총선거 (5.10선거)에서 지역구인 동대문구에서 당선
●1948,5,31 재헌의회 의장으로 선출됨.
●1948.6.16 헌법기초위원회에 참석하여 대통령책임제 의사를 강력히 전달
●1948.7.20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됨(186명 출석 가운데 180표 획득)
●1948.7.24 대통령 및 부통령 취임식.
●1948.8.11 파리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 승인운동을 펼칠 한국대표단 파견 (장면, 장기영, 김활란).
●1948.8.15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 파리에서 열릴 유엔총회에서 승인을 받기 위한 총력 외교에 돌입. 그러나 승인 가능성은 매우 불투명.
●1948.8.26 한미상호방위원조 협정 체결
●1948.9.30 대통령 시정방침 연설
●1948,10,8 미군 철수 연기 요구.
●1948,10,13 40여 명의 친북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외국군(미군) 철수 긴급 동의안 제출,
●1948.10.19 맥아더 주일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초청으로 일본 방문.
●1948.11.6 여수순천반란 사건에 따른 국가위기를 맞아 수습책을 국회에서 발표.
●1948.11.26 미군 계속 주둔 요청.
●1948.12.12 파리 유엔 총회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 간신히 대한민국 승인안이 통과됨. 대한민국의 와해 모면
●1948,12,18 국회 폐회식에서 이북 도지사 임명 언명.
●1949.1.6(74세) 민족청년단(단장 이범석) 을 해산하여 대한청년단에 통합하도록 지시.
●1949.1.7 일본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할 것이라고 언급
●1949.1.8 대마도 반환 요구 기자회견
●1949.1.9 반민특위의 친일과 처벌에 신중해야한다고 담화,
●1949.2.18 유엔 기구가 북한과 협상하는 데 대해 반대
●1949.3.23 필리핀 퀴리노 대통령이 제안한 반공적인 태평양동맹안 지지.
●1949.5.20 대일배상요구 관철 주장.
●1949.6.9 일본의 어업구역 확대에 반대 성명,
●1949.7.1 한국에 대한 미국의 추가 원조 요정
●1949.7.20 반공적인 태평양동맹의 체결 협의를 위해 퀴리노 필리핀 대통령,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을 초청.
●1949.8.8 이승만-장개석 진해 회담.
●1949.10.18 대통령 관저에 폭발물 장치 사건 발생.
●1949.10.28 일본과의 강화조약 체결까지 임시몽상협정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고 언명
●1949.11.26 남북통일 방안으로 북한 괴뢰정부 해체 후의 총선거를 주장.
●1949.11.29 귀속재산인 일본인 주택 방매 담화
●1949.12.16 군사원조에 비행기 포함을 미국에 요청.
제6편 <1950년~1956년>
●1950.1.24(754) 국회의 내각책임제 개헌안 반대
●1950.2.16 일본에 있는 맥아더 원수를 방문
●1950.3.4 야당이 제출한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대해 개헌 이부는 국민투표로 결정해야 한다고 선언.
●1950,3.10 농지개혁법 공포. 4월 5일에 농지 분배 예정 통지서 발송 시작.
●1950.6.25 6.25 전쟁 발발, 신성모 국방장관의 낙관적 보고로 관망적 자세를 보임.
●1950.6.26 새벽 3시 동경의 맥아더 장군과 전화 통화 미국의 즉각 지원을 요청한 후 장면 주미대사를 전화로 불러 트루먼 대통령에게 즉각 지원을 요청하도록 지시
●1950.6.27 대통령이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측근들의 권유로 기치로 대구까지 갔으나 서둘렀다는 판단이 들어 대전으로 돌아옴.
●1950.6.28 이른 아침 대전에서 전시 각료회의 개최.
●1950.6.29 수원에서 맥아더 장군과 만나 전쟁 수행에 대해 협의한 후 한강 전선을 함께 시찰.
●1950.7.14 전쟁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작전 지휘권 위임.
●1950,9,28 유엔과 상의 없이 국군에게 38선 이북 진격을 명령
●1950.10.17 북한에 대한 직접 통치를 선언함으로써 유엔과 대립
●1950.10.30 수복된 평양을 방문하여 환영대회에서 연설
●1951.6.9 (76세) 38선 정전 결사반대 선언, 6월 27일 소련의 정전 안 거부,
●1951.7.3 한반도 통일이 전쟁 목표임을 분명히 밝히고 트루 먼 대통령에게 휴전협상 반대 전문 발송.
●1951.9.20 휴전 조건으로 중공군 철수, 북한 무장 해제. 유엔 감시 하의 북한 총선거 요구.
●1951.11.19 자유당 창당과 총재직 수락.
●1952.1.18 (77세) 일본 어선의 침범을 막기 위한 평화선 선포.
●1952.8.5 직선제를 통한 대통령 당선
●1952.12.3 방한한 미국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와 회담.
●1953.1.6 (78세) 일본에서 요시다 총리와 회담.
●1953.1.26 국무회의에서 해양주권선 수호 엄명.
●1953.4.11 휴전 반대와 함께 국군 단독 북진 성명
●1953.5.8 미 정부에 휴전 거부 고
●1953.6.3 휴전 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선언.
●1953.6.6 미국 원조 없이도 싸우겠다는 정부의 단호한 입장 발표
●1953.6.18 유엔군 포로수용소에서 2만 7천 명의 반공포로 석방.
●1953.6.25 로버트슨 미 대통령 특사가 이 대통령 설득을 위 해 한국 방문 (월 11일까지 이 대통령과 4차례 회담)
●1953.7.12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미국의 경제 및 군사원조 약속을 포함한 한미공동성명 발표
●1953.11.27 대만을 방문하여 장개석 총통과 반공 통일전선 결성발표
●1954.1.(79세) 독도에 '한국령'이라는 영토 표지석 설치
●1954,2,5 헐 유엔군사령관 테일러 미 8군사령관 등과 한국군 증강 문제 협의.
●1954.2.13 주한미군 2개 사단 철수계획 강력 반대하는 성명.
●1954.7.29 미국 방문 시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 소련의 침략 야욕을 강조하고 무리만이 대응책이라고 주장. 33번의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음.
●1954.7.31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정상회담.
●1954.8.2 뉴욕시가 마련한 브로드웨이 영웅행진 카퍼레이드에서 1백여만 뉴욕시민의 환영을 받음.
●1955.6.7(8세) 기술자 해외파견안 재가
●1955.6.20 일본제품 특혜수입 금지
●1955.7.5 국군 40개 사단 확보의 필요성을 역설, 미국에 대해 대 공산권 유화정책을 비난
●1956.1.14 (81세) 정부기구 축소 조속 실천 시달
●1956.2.5 헌병 총사령부에 김창용 중장 피살사건 전담수사본부 설치를 지시
●1956.2.13 일본의 공산국가들에 대한 타협정책 경고
●1956.2.21 국회 연설에서 판사의 월귄행위에 유감 표명
●1956.3.9 전국 각지에서 이 대통령 3선 출마 호소 궐기대회 (자유당, 국민회, 애련, 노동조합 등이 주최)
●1956,3,10 외신기자들에게 민의 수용의사 표명함
●1956.3.13 이승만 재출마를 요구하는 대한노총의 정치파업
●1956.3.17 덜레스 미 국무장관의 한국 방문. 이 대통령과 통일방안 협의
●1956.3.25 공보실 통해 재출마 결의 담화,
●1956,3,30 학도징집보류 전폐 등 국민 개병의 원칙 표명
●1956.4.12 선거전에 친공적 협상안과 친일적 협상안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고 언명
●1956.5.12 휴전협정 조속 폐기 촉구 담화
●1956.5.22 이승만(자유당)의 대통령 당선 공고. 부통령은 장면(민주당)
●1956.6.25 6.25 동란은 미국의 오판에서 일어났고 중공군 철수가 통일의 선행조건임을 강조
●1956.7.8 환율 고수 및 공무원 감원 단행 담화
●1956.7.26 휴전협정은 이미 사문화되었음을 강조
●1956.8.15 제3대 대통령에 취임.
●1956.8.16 첫 국무회의에서 군비증강과 경제 부흥 강조,
●1956.9.1 미국의 극동정책은 패배주의와 유화주의로 전략했다고 비판
●1956.9.13 유엔 가입을 적극 추진하도록 임병직 대사에게 혼령.
●1956.9.17 기자회견에서 야당의 지나친 반정부적 태도를 비난
●1956.9.22 대통령령으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공포.
●1956.9.30 한일관계 개선 조건으로 한국에 대한 재산권 청구 철회를 일본에게 요구
●1956.11.4 동해안 시찰 도중 이북동포 구출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
●1956.11.7 소련에 항거한 헝가리 국민을 돕겠다는 의사 표명.
제7편 <1957년~1965년>
●1957.1.6 (82세) 휴전협정 폐기와 군비 강화 강조
●1957.3.21 82회 탄신기념일을 맞아 우남장학회 발족
●1957,3,23 제주도 송당목장 시찰.
●1957.3.26 국회의장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맞음.
●1957,3,28 미국과 서방측의 중동문제 치중에 경고
●1957.4,2 유도탄 도입 등을 포함한 군사력 증강 역설
●1957.4.19 김창룡 중장 암살 배후인물인 강문봉 중장에 대한 처벌을 무기징역으로 감행.
●1957.4.20 통화 발행 억제와 정부기구 축소지시,
●1957,5,14 공산주의의 위험을 경고
●1957.6.15 로이터 기자회견서 한국군 군비 현대화 재강조
●1957.6.17 서방측이 소련과 군비축소 타협에 이르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경고,
●1957.6.19 UPI 기자와 서면 회견에서 북한의 남침 위험성을 경고
●1957,7,28 휴진 4주년을 맞아 휴전협정은 무효라고 선언
●1957.8.21 미국이 한국군을 감축하려면 현대장비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
●1957.8.22 미국의 오키나와 영유가 타당함을 연명.
●1957.9.23 공산군의 재 남침 기도에 대하여 경고
●1957.10.21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원조 삭감에 경고
●1957,12,3 한글 전용을 국무회의에서 지시.
●1958.1.1(83세) 이북동포에게 메시지
●1958.1.21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강조
●1958,2,23 유엔군 철수 불가 성명,
●1958,3,8 북한에 납북된 KNA 민간여객기 기체 송환을 요구
●1958,3,28 일본 기시(岸信介)수상의 한일회담 재개 요망 친서에 동의
●1958,3,31 미국 기자와의 회견에서 인도차이나에 한국군 파견 용의 표명,
●1958.4.26 멘델레스 터키 수상에 대한민국 1등 건국공로훈장 수여,
●1958.5.19 일본 수상의 특사를 면담
●1958,6.29 AP 기자와의 서면회견에서 유엔 감시 하의 북한 선거를 주장
●1958.8,5 외신 기자와의 서면회견에서 국군 감축에 반대하고장비 현대화를 강조
●1958,8,29 아시아의 집단안전보장체제를 강조 대만에 유재흥 연참총장을 특사로 파견.
●1958,9,13 대만과 중공의 충돌 사태 (금문도-마조도 사태)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지지.
●1958.10.28 원자력 연구 지시.
●1958,11,1 운크라 업적을 찬양하는 서한을 유엔 사무총장에 발송.
●1958,11,5 베트남 대통령의 초청으로 베트남 방문
●1958.12.12 CBS 기자에게 UN군 철수 불가, 국가보안법의 필요성을 언명,
●1959.1.1(84세) 북한동포들에게 방송을 통해 위로
●1959.1.5 국가재산의 효율적 운영 지시.
●1959.1.26 외신기자와의 면담에서 일본에게 문화재 반환을 요구.
●1959.2.19 일본의 재일동포 북송을 추방이라고 비난
●1959.3.1 3.1절 기념식에서 일본에 대항하는 안전보장이 긴요함을 역설
●1959,3,25 남북통일을 위한 미국의 결단 촉구.
●1959.3.29 자유진영의 단결을 위해 미국의 강경정책이 필요하다고 미 국민에 호소
●1959.4.15 미국과 소련의 정상회담이 쓸모없음을 강조
●1959.6.8 제5차 아시아민족반공대회 대표들을 환영하는 시민대회에 반공 메시지 전달
●1959.6.24 UPI 기자와의 서면회견에서 북진통일 강조
●1959.6.25 미국 적십자사에 일본의 재일동포복송 저지를 요청
●1959.9.2 국무회의에서 학원잡부금 근절 지시
●1959.9.10 국제적십자 부위원장에게
위배된다고 강조
●1959.10.18 민주당 내분은 창피한 일이라고 비판
●1959.11.11 AP기자와의 서면회견에서 한국을 유도탄 기지로 사용하는 아시아동맹의 필요성을 강조
●1959.12.25 군대 안의 부정부패 근절을 지시
●1960,1,27(85세) 정부통령 선거일을 농번가를 피해 정하도록 발언
●1960,1,28 전국이후 최초로 사법부 방문
●1960.2.4 공산당보다 일본을 더 경계해야 한다고 언명.
●1960,2,13 정부통령 입후보자 등록 마감,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자유당)과 조병옥(민주당),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자유당), 장면(민주당), 김준연(통일당), 임명신(여자국민당).
●1960.3.6 기자회견서 연내 참의원 구성 언명.
●1960.3.15 선거에서 대통령 4선 확정.
●1960,3,28 선거부정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자유당 간부들을 불러 민심 수습 5개 항목을 지시
●1960.4.13 마산 시위 배후에 공산당 개입 혐의 있다고 언명
●1960.4.19 경무대 앞에서 시위 학생들이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냄.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은 군에게 시위
군중으로부터 경무대를 방어하지 말도록 지시함으로써 군부의 이승만 지지를 거부.
●1960.4.21 4.19 유혈사태로 정치적 상황이 험악해지자 전직 각료들을 경무대로 불러 상의
●1960.4.22 변영태와 허정 등을 다시 경무대로 불러 사태수습을 위한 논의
●1960.4.23 시위진압 경찰의 발포에 따른 시민들의 사망에 대해 애도의 뜻을 발표
●1960.4.24 4.19 유혈사태에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 사임..
●1960.4.26 국민이 원한다면 ①대통령직 사임 ②정·부통령선거 재실시 ③이기붕의 공직 사퇴 ①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약속. 시위대 대표 5명과 면담 후 하야를 약속.
●1960.4.27 대통령직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
●1960.4.28 이화장으로 은퇴.
●1960.5.29 하와이로 출국.
●1965.7.19(90세) 호놀룰루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서거, 호놀룰루 소재 한인기독교회에서 영진예배 후 유해를 미군용기로 김포공항으로 운구, 7월 27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영결예배 후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국립묘지)에 안장.
※위의 내용은 정현채著 "이승만 건국대통령 이야기"에서 발췌한 것임.
※이승만의 호 雩南은 어릴 때 자란 곳인 서울 南대문 밖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에서 雩와 南 한 字씩 따와 호를 雩南으로 지은 것을 사료 됨
※우수재(우수峴): 용산구 후암동에 있던 마을로서, 도동에서 후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을 인근 마을 이름으로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우수현이라고도 하였다. 일설에는 우수선생이라는 학자가 이 부근에 살았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해마다 정월 보름이면 남문 안과 남문 밖의 청년들이 이곳에 모여 편싸움을 하는 터가 되어 마포의 만리재, 종로의 비파정, 동대문 밖 안감내, 신당동의 무당내와 함께 서울의 편쌈터로 유명하였다.
첫댓글 ※위의 내용은 정현채著 "이승만 건국대통령 이야기"에서 발췌한 것임.
※이승만의 호 雩南은 어릴 때 자란 곳인 서울 南대문 밖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에서 雩와 南 한 字씩 따와 호를 雩南으로 지은 것을 사료 됨
ㅡ우수재(우수峴): 용산구 후암동에 있던 마을로서, 도동에서 후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을 인근 마을 이름으로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우수현이라고도 하였다. 일설에는 우수선생이라는 학자가 이 부근에 살았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해마다 정월 보름이면 남문 안과 남문 밖의 청년들이 이곳에 모여 편싸움을 하는 터가 되어 마포의 만리재, 종로의 비파정, 동대문 밖 안감내, 신당동의 무당내와 함께 서울의 편쌈터로 유명하였다.
고종 12년(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에서 출생한 이승만대통령은 태조 이성계의 18대손으로 양녕대군의 16대손. 처음 이름은 용꿈을 꾼 태몽의 의미을 담아 '이승룡'으로 지어졌으나 사주팔자를 보니 "늦게 왕이될 사주"라 하여 그 부모가 이승만 (李承晩)'으로 개명. 이승만 대통령의 아호 우남(雩南)의 의미는 우수현(지금의 용산 후암동으로 가는 고갯길)의 남쪽이란 뜻인데, 어릴 때 부모가 우수현이 있는 후암동으로 이사하여 그곳서 성장한 것에서 연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