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중학교 운동장 단풍나무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눈꽃이 사방으로
피었다.
소나기로 내린 눈이 영하의 차가운 날씨 속에서 고드름처럼 얼어버렸으니
향기는 없지만 보는 이에겐 말 그대로 설화(雪花)의 아름다움이다.
목요일로부터 과음이 이어진다.
한해동안의 사업성과를 분석하고 내년도 '설 명절'의 공동 구판매사업을
논의하기 위한 협의회 진행과 함께 송년회를 겸하여 저녁식사가 이어졌다.
농산물 홍수출하에 의한 가격폭락과 수입과일 거래활성화로 경쟁이 심화되어
농산물유통 담당자들에게는 예년에 없는 어려움이 쭈욱 이어졌으니
주고 받는 술잔의 속도 또한 만만치 않았다.
2015년 을미년의 새로운 부활을 꾀하며 건배를 외치니 속도에 편승하여
혼합된 주량까지 일주일 분량을 한꺼번에 모두 마셔 버린 듯하다.
이른 새벽, 냉탕에 몸을 던지고나서야 빙빙 도는 정신이 제자리를 잡는다.
아침 미팅을 마치고 구매팀장과 함께 광탄에 소재한 '마' 재배농가를
방문하였다.
각 영업점별 판매가능한 분량의 마를 구매하고 숙성 중인 '메주'를 확인한다.
상암DMC 요식업 출범에 즈음하여 감초격의 음식재료인 장과 된장만큼은
직접 만든 것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대대로 맥을 잇은 음식의 장인(匠人)에게
특별히 간청(懇請)을 하였다.
메주의 원재료인 백태는 적성의 농업인이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것을 선별하여
좋은 메주를 만드는데 집중하였으며 메주를 띄우는데에도 오랜 경험으로 훌륭한
장맛을 내오신 광탄의 연세(年歲) 지긋하신 어머님들이 정성껏 메주를
만들어 주셨다.
역시, 구수텁텁한 냄새를 풍기며 숙성과정인 메주가 광탄의 조용한 시골냄새와
더불어 청국장처럼 사방으로 제 존재를 알린다.
때마침 설을 겨냥하여 조청을 만들고 계시는 마을 이장님으로부터 어르신들이
환대를 아끼지 않으셨다.
지금이야 편리에 의하여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음식가공들이 사라져가고 있지만
할머니가 살아계시던 그 시절만 하여도 13기의 제사를 모시는 종가댁답게
김장을 마무리한 이맘때엔 커다란 무쇠솥이 마당 한켠에 놓이고 조청을 곤다.
무쇠솥 안에서 펄펄 끓는 엿기름이 얼마나 달고 맛있었던지..,
이놈 저놈 코흘리게 동생들마저도 한잔을 더 얻어 마시려고 부지런히 장작을
쪼개었다.
아침에 시작하여 저녁무렵에서야 비로소 탄생된 조청!
설탕과 달리 6년근 홍삼처럼 깊이를 더하는 단맛이 일품이었고
빛깔은 또 얼마나 곱던지 고려 상감청자가 부러워할 오묘한 빛을 띠었다.
대가족인 식구들을 배려하여 할머니는 그 바쁜 농사철임에도 당신의 휴식을
잊으신체 산으로 들로 쑥을 캐시었다.
4개월 후에 만들 조청을 생각하시며 책걸이처럼 미리 쑥떡을 예견하셨으니..,
잔일이 많아 손주녀석들이 발품되는 일요일을 길일(吉日)하여 꼭 초청을 고셨던
할머니는 지금 시대라면 서울대에 들어가고도 남을 영특한 정신을 자랑하셨다.
그날 밤,
할머니가 고으신 조청과 함께 열명이 먹고도 남을 쑥떡을 두고 군불피운 방에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으니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았다.
당신의 며느님이지만 농사일 모르고 시집오신 내 어머니에게도 -
지천에 깔린 말썽쟁이 손주들에게도 -
평생 화 한번 내지 않으셨던 할머니는 당신께서 가장 맛있어하시던 홍시마저
구분을 못하시고 오색단풍 절로 곱던 날에 꽃상여를 타셨다.
할머닌 잠이 없으셔서 그 새벽에 밭으로, 논으로 쉬지않고 달리시는줄 알았다.
당신께서 손수 준비한 삼베수의를 입으시던 날에서야 철없던 장손(長孫)은
할머니의 굽은 허리를 바라보며 만시지탄(晩時之歎) 눈물을 멈출 수 없었으니
그렇게 홍시가 익을때면 서로 다정하셨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늘 곁에 오신다.
할머니께서 만드셨던 조청 - 맛과 빛깔을 아직 이긴 사람이 없으니
할머니는 조청의 명인(名人)이시며 장인(匠人)이신 셈이다.
뜻하지 않는 출장 길에서 할머니를 뵙게해준 광탄의 어르신들이 고마웁다.
(숙성 중인 메주가 참 잘 생겼다. 부엌에선 달달한 냄새를 풍기며 초청이 익어간다)
삼한사온(三寒四溫)이랬는데..,
영하 15도를 넘나들던 추위가 한꺼번에 가시고 반짝 영상을 가리키더니만
다시 밤으로 바람과 더불어 수온주가 영하 5도를 가리키며 삼한사온을 무색케
한다.
동토(凍土)와도 같은 건물 안에서 완공을 위하여 묵묵히 땀흘리던 장인들이
계셨다.
일요일만이라도 모두 편안히 쉬시길 소원한다.
(상암DMC 유통센터내 열병합장치 지하 시공현장)
(모두가 움추리는 영하권 날씨지만 묵묵히 계단의 틀을 만드시는 어른이 바로 장인(匠人)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