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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제2차 영적 대각성 운동
2차 영적 대각성 운동의 일반적 특성
미국에서 기독교 신앙이 주류를 이루었던 18세기 후반은 갈등의 시대로 간주된다. 독립전쟁으로 식민 상태가 종결되고 새로운 국가가 탄생된 때인 1775년부터 1781년 사이에 기독교의 영향력은 썰물처럼 쇠퇴하고 있었다.
미국은 오래지 않아 이제껏 믿어 온 기독교를 적대시하는 반기독교적 문학을 형성하고 말았으며, 급기야 독립전쟁 초기에 미국으로 이주했던 한 영국 퀘이커교도의 아들(토마스 페인)의 책을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책 「인간의 권리」는 백만 부 이상이 팔려 나갔고, 이신론(Deism)을 주장했던 「이성의 시대」는 아직까지도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어떤 한 사람은 당시 온건한 코네티컷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불경한 사상과 견해들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페인의 이성의 시대와 볼테르와 다른 이들의 이신론적 저작들이 발빠르게 보급되었고 젊은이들은 갑자기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지혜롭고 똑똑해져 버렸다.’
그러나 상황이 다 그렇게 악화된 것만은 아니었다. 많은 부분에 영적 대각성 운동의 열매인 강력한 신앙의 열매들이 18세기 후반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공통적으로 ‘어두운 시대’를 말했고, ‘침울한 상태’ 그리고 ‘타락의 시대’를 말하곤 했다. 그렇지만 당시 많은 교회가 더디기는 했지만 점진적인 성장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침체된 영적 상태에 대한 또다른 원인은 교회들을 혼란에 빠뜨렸던 많은 논쟁 때문이었다. 감리교는 교회 정치에 대해 논쟁했고 그 결과 당시 25%의 교회와 교인들을 잃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켄터키 초기 장로교회 역시 한 목사가 다윗의 시를 제외하고는 교회에서 절대로 다른 찬송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함으로 불거진 논쟁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로버트 데이비슨은 이런 일반적인 상태에 대해 ‘불신과 불의, 배반이 마치 홍수처럼 밀려왔고, 교리적 표준에 대한 힘찬 지지와 성원 대신 여러 가지 교회의 성찬과 행정 문제로 인해 그들은 서로 물고 먹으며 자신들의 정력을 소비했다’라고 적었다.
제2차 영적 대각성 운동은 새로운 세기가 시작될 무렵 일어났다. 19세기 초기에 기독교회들이 다시 생명력을 얻고 부흥한 현상은 전 기독교회 역사의 전환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드와 마테슨은 1835년에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놀랍고 광범위한 부흥 가운데 하나가 이 백성을 관통하며 지나갔다’라고 기록했다. 「성경 레퍼토리와 신학 평론」지도 이런 영적 대각성 운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으며, 하나님은 미국을 ‘온 세상이 전에 한 번도 눈으로 보거나 마음으로 경험한 적이 없는 가장 영광스러운 부흥의 현장’으로 만드셨다고 기록했다.
윌리엄 스프러도 1832년도에 이 각성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미국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가 살고 있는 19세기가 시작되던 매우 초기부터 지금까지 임하신 놀라운 변화다. 이런 변화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교회들이 매우 점진적인 증가와 성장으로 특징지어지던 초기와는 다른, 매우 특이한 현상이 시작되었고, 성령 하나님의 풍성하시고도 갑작스럽게 임하시는 임재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특별한 영의 임재가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판단하기로는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이 어두움에서 빛을 향해 그 삶의 태도를 바꾸었으며, 이 신앙의 부흥 시기에 임한 변화를 경험했던 것이다.’
(1차 영적 대각성의 기간은 3년에서 5년, 2차는 25년 이상 지속//1차는 주로 동부 해안과 연안 지역을 강타, 2차는 더 넓고 광대한 지역을 강타, 이것이 두 번째 대각성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만듬, 많은 남부 사람들은 1800년의 켄터키와 테네시가 2차 대각성 출발점이었다고.)
1800년 6월 한 회중교회 목사는 매월 「코네티컷 복음 잡지」라는 40페이지 분량의 월간지를 발행하면서, 이 40페이지 모두를 부흥에 관련된 소식만으로 가득 채울 수 있었다. 1801년, 이 잡지 최초의 원년 합본호를 발행하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미국 교회 전역에 임한 후기의 위대한 성령의 부어 주심과 체험적 신앙으로서의 부흥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적 복지를 만족시키고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수많은 일화를 발행하기에 충분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따. 1742년과 1744년 이래 이 나라에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광대하고 위대하게 임했던 적은 없을 것이다.
위대한 신앙 부흥은 지난 반 세기 동안 매우 진기한 것이 되었다. 지금까지 그들의 부모들의 입을 통해 들었던 정말 믿어지지 않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이제야 체험하고 믿을 수 있게 되었으며 실제로 믿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는 잠자고 있는 세대들을 향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거대한 능력의 증거들을 제시하심으로 죄인들을 각성시키고 거룩하게 하시며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확신시키는 신기한 일을 하실 수 있는 시대였다.
이런 영적 대각성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최초의 책이 발간된 것은 1802년이었다. 그것은 「미국 신앙 부흥의 놀라운 기사들」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버몬트, 코네티컷, 서부 펜실베이니아, 켄터키, 테네시, 조지아, 북캐롤라이나 그리고 여러 도시의 부흥에 대한 보고들이 나와 있다. 이 책이 출판된 이후 1859년까지 제2차 영적 대각성 운동의 전체 모습을 다룬 책은 출판되지 않았다. 부흥에 대해 1859년 이후에 발행된 책의 저자는 헤먼 험프리였다. 그의 나이 80세 되던 해에 「부흥의 개요와 편람」이라는 책을 완성했다. 이 책은 엄청난 부흥의 기사 가운데 몇 가지만 선택하여 기술한 책이었다. 이 험프리의 책 이후에 같은 주제를 다룬 책이 출판된 것은 1942년 찰스 로이 켈러의 「코네티컷에서의 제2차 영적 대각성 운동」이었다.
2차 영적 대각성 운동은 부흥을 촉진하려고 사용한 특별한 수단이 없었음
2차 영적 대각성은 부흥을 일으키기 위해 사용된 수단들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 시기의 영적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복음의 확장을 위해 기도의 수단과 설교의 수단을 명하셨다는 믿음에 모두 동의했다. 아마도 이런 특별한 시기에 위대한 결과를 확보하게 해 주는 수단으로서의 기도와 설교보다 더 위대한 수단은 없을 것이다.
한 침례교 저술가는 1798년부터 1800년 사이에 발생한 하트포드의 부흥을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여호와께서 일반적인 수단과 방법을 의지하거나 사용하지 않으시고도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 주시고 당신의 영을 부어 주시는 이런 영향과 결과를 좀더 즉각적이고 영향력 있는 특별한 일을 행하신 것 같다. 이는 아마도 이 사역이 하나님 자신의 사역인 것을 보여 주시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부흥을 특징짓는 것은 무언가 이상하고 진귀하며 특별한 수단들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평범한 은혜의 수단들 즉, 일상적인 기도와 설교에 임하신 비범한 축복이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특별한 복음 전도 집회도 없었고, 어떤 계획들도 없었으며, 부흥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광고를 한 적도 없었다. 목사들은 위대한 변화가 시작될 때까지 이제까지 수년 동안 계속해 오던 똑같은 예배와 설교 사역을 계속했을 뿐이다.
부흥에 대한 그들의 이런 생각과 견해는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는 진리 그 자체에는 죄인들을 회개시키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또한 하나님이 평범한 수단들을 통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엄청난 부흥의 능력과 결과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참된 지식을 깨달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했던 것이다.
수단들 혹은 도구들이라는 주제에서 기도에 대해 좀더 고찰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선포된 진리와 함께 기도 역시 그 자체로는 결코 능력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참된 기도는 우리의 전적 무능력과 우리가 하나님께 철저하게 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참된 걱정과 관심을 가진 신자가 올리는 기도, 즉 진심으로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이 기도는 결코 응답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새로운 시기의 그 어떤 일반적 징후들이 보이기 전에, 1790년대를 특징짓는 것 가운데 한 가지를 확실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그 곳에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기도에 대한 열망이 불타오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발생했던 이런 기록들에 대한 증거들을 비교해 보면, 1790년대 미국은 코네티컷에서부터 켄터키에 이르기까지 온통 기도의 새 영으로 뒤덮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켄터키 소재의 로건 카운티 교회의 담임이었던 제임스 맥그리디 목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이 새롭게 태어나고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그의 영을 부어 주시기를 기도하는 데 협력하고 연합할 것을 격려해야 한다고 느꼈다. 이 시기에 우리 대부분의 아이들과 죄인들은 일반적으로 모두 회개의 열매를 맺었다.’
2차 영적 대각성으로 복음주의적이고 초교파적인 활동이 생겨남
부흥의 기사들의 초점은 언제나 회심한 백성에게 있었다. 그러나 모든 참된 부흥은 교회 안에서 시작되었고, 이 각성이 참되고 진실하다는 증거는 신자들을 예전 모습으로 머물게 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그들은 새로운 경외감과 기쁨 그리고 찬양으로 충만했고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충만했다. 게다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강권된 새로운 능력으로 가득 찼던 것이다. 과거에 그들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이제 믿음과 자기를 부인하는 희생으로 행했으며, 이것들은 세상을 완전히 놀라게 했다.
이런 상태와 환경들은 복음적이며 초교파적인 여러 활동들이 전례 없이 파도처럼 쇄도했다는 것이다. 코네티컷(1798)과 매사추세츠(1799)에서 설립된 지역 선교회들이 1810년에는 더 큰 미국선교회로 합병되었다. 2년 후 미국선교회는 최초의 선교사를 캘커타에 파송했다. 1821년에 이 선교회는 81명의 선교사를 전세계에 파송했다. 이후에 침례교(1814)와 감리교 감독교회(1819) 그리고 다른 교파들이 그들만의 해외선교회를 조직하는 일들이 뒤따랐다. 이와 비슷하게 지역 성경공회와 출판사들이 동시에 증가했다. 그리고 이런 공회들이 합해져서 미국성경공회(1816)와 미국기독서회(1825)가 되었다. 이런 모든 단체의 시작이 바로 영적 대각성이라는 위대한 영적 충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2차 영적 대각성은 대학에 큰 영향을 미침
영적 대각성이 미국의 여러 대학들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부흥은 모든 사람을 심오한 신앙의 사람과 박식한 사람들로 만들었다. 성령이 부어지심을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확신에 넘치는 많은 사람이 이 시기에 널리 알려진 최고의 설교자들이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이들이 미국의 많은 대학의 학장들이었다.
예일 대학에서 일어난 일들은 다른 대학에서 일어난 일의 좋은 실례가 될 것이다. 티모시 드와이트가 1795년에 예일 대학의 학장이 되었을 때, 대학은 불신앙과 젊은이들 사이에 만연한 세속적 쾌락과 유행 때문에 고통받고 있었다. 1793년에 이 대학에 입학한 한 학생은 예일 대학의 교회가 ‘거의 죽게 되었고, 학생 대다수는 모두 신앙과 종교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캠퍼스 내에는 폭력과 소동이 난무했다’라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예일 대학의 신입생이었던 험프리는 예일 대학에 임했던 놀라울 만한 변화가 1802년 봄에 갑작스럽게 임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이 때 230명의 예일 대학생 가운데 75명의 학생이 회심했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많은 학생이 목회 사역에 투신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으며, 그 숫자는 점점 많아졌다.
특별히 설교자들만을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들은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앞 장에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버지니아의 윌리엄 그레이엄과 남부 펜실베이니아의 존 맥밀란이 이런 일들의 선두에 선 인물이었다. 그후 매사추세츠의 앤도버 신학교(1808)와 코네티컷의 예일 신학교(1822)가 있었다. 그러나 1812년에 설립된 프린스턴 신학교는 정통 기독교의 견지에서 볼 때 가장 장기간의 영향을 끼친 중대한 신학교였다.
2차 영적 대각성 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비상한 의식이 있었음
우리는 이 시기에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비범하신 임재의 방식이 이 부흥들을 경험했던 교회들 안에서 인식되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울고 절규하고 있던 군중과 절제하지 못하는 소란과 시끄러움 그리고 대단히 흥분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부흥이 시작되었다고 믿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로, 때때로 이런 현상들은 2차 영적 대각성 시기의 북동부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에벤에젤 포터는 ‘이 부흥의 놀라운 특징들로서 종교 집회에 그 어떤 부르짖음이나, 사회적 혼란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하나님의 사역의 폭은 결코 특이한 현상들로 평가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임한 깊은 확신과 영적 충격으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종교적 광신과 흥분을 조장하기는커녕, 영적 대각성 시기의 설교자들은 그것들을 오히려 의도적으로 피했던 것이다. 포터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매우 잘 관찰했다. ‘사실상 죄인들의 마음 속에 깊은 확신을 주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수행하는 유일한 수단은 오직 진리를 선포하는 것뿐이었다. 결국 영적 대각성 시기의 전체 경향은 감정적이며 떠들썩한 흥분이 아니라 차분하고 엄숙하며, 예리하게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그리핀은 1832년 당시의 전체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 부흥들에 관계된 수단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바로 하나님의 진리를 순수하게 선포하는 것과 기도였다. 그것은 그 어떤 감정주의에 기인한 사역이 아닌 가장 진지한 자세로 인간의 양심에 직접적으로 적용된 철저하게 순수하고 엄숙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사역이었다. 집회는 여전히 조용하고 질서정연했으며, 진지하고도 엄숙한 경청과 침묵 속에 흐르는 눈물 외에 그 어떤 특별한 감정적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1820년 뉴욕 사라토가 카운티의 남부 지역에 발생한 ‘위대한 부흥’에서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모든 가정은 계속되는 안식일을 엄숙하게 보내고 있었다. 심오하리만큼 고요해서 최근의 죽음과 장례식장에 흐르는 엄숙함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사적인 대화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모두 복음을 들으려고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였다.’
본장에서 이런 고찰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해 준다. 그것은 영적 대각성에 임한 부흥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영생을 위한 영광스럽고 놀라운 추수의 시기’였다는 것이다.
제 6 장 켄터키 부흥: 1800
켄터키의 상황
미국에서 최초의 인구조사를 실시한 것은 1790년의 일이었다. 이 때 조사된 약 4백만 명의 인구 가운데 애팔래치안 산맥 서부 지역에 거주한 인구는 겨우 5%정도였다. 이 국경에 살고 있는 5%의 인구 가운데 가장 급성장한 지역이 바로 켄터키다. 버지니아 주의 한 카운티로 출발했던 켄터키는 1795년 미연방의 15번째 주가 되었고 30년 후에는 미연방에서 다섯 번째로 큰 주가 되었다.
켄터키의 첫 이민자들은 인디언 전사들이었고, 새로 정착한 사람들은 주로 침례교와 장로교도였다. 1781년에는 두 개의 침례교 회중교회가 설립되었는데, 1785년에 이르러서는 12개의 장로교회와 18개의 침례교회가 설립되었다. 켄터키의 위대한 부흥은 일반적으로 장로교도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교회 역사가 윌리엄 스위트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미국의 가장 위대했던 부흥 운동들은 거의 일반적으로 장로교를 통해 발생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이 점에 있어서 서부 지역의 위대한 부흥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지도자들은 버지니아에서 존 블레어 스미스와 윌리엄 그레이엄의 수하에서 신학과 신앙을 배웠던 8명의 젊은 세대들이었다. 그리고 1796년, 33세의 나이로 북캐롤라이나에서 온 제임스 맥그리디였다.
켄터키 부흥의 물결
1801년에 부흥은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1800년과 1801년은 ‘야외 집회’라는 새로운 현상의 출현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이 집회는 장로교도들에게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순전히 실제적인 필요 때문에 도입되고 발전된 것이다. 스코틀랜드 전통을 따라 장로교회에서는 종종 성찬식이 거행되었는데 다른 교회에서 온 많은 방문자들이 참석하여 드린 특별한 예배가 그 특징이었다. 그들은 이 성찬 기간인 4-5일 동안 환대를 받고 숙식도 제공받았다. 그러나 이 집회 기간에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이 집회는 불가불 야외에서 열리게 되었고 부흥이 임했을 때는 더 이상 숙식제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운집하게 되었다. 결국 밤을 지내기 위해 마차와 천막들이 동원되었다.
1800년 7월, 가스퍼 강 교회에서 성찬예배가 거행되었을 때 맥그리디는 사전에 모든 방문자들은 야외에 천막을 쳐야 한다고 광고해야만 했다. 이 성찬예배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숫자가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40마일 혹은 100마일을 여행하여 달려왔고 결국 이 성찬 예배는 ‘야외 집회’로 불리게 되었다. 1801년 8월, 보본 카운티의 케인 리지에서 열린 장로교 성찬집회는 18명의 장로교 목사들뿐 아니라 침례교와 감리교 설교자들이 일주일 동안 계속 예배를 인도했다. 모든 거리에 임시 천막촌이 형성되었고 약 10,000명에서 21,000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다른 성찬예배시에는 약 8,000명, 또다른 모임에서는 5,000명이 참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로버트 데이비슨의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모든 직장과 사업들이 정지되었고 주택들은 모두 텅 비었으며, 모든 이웃집들 역시 다 비어 있었다. 대담무쌍한 사냥꾼들, 소박한 가정주부, 젊은이들, 소녀들 그리고 어린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이 매력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장소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고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이 야외 집회에 모여들었다.’
부흥이 사회변화에 미친 영향
1802년, 렉싱턴을 방문한 어떤 사람은 이 렉싱턴에서 ‘위대한 신앙 부흥 이외에 다른 것을 들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다른 사람은 1802년 12월 25일에 ‘종교가 현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나라에 있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라고 적고 있다.
버지니아 렉싱턴에서 윌리엄 그레이엄의 교수 사역을 계승한 조지 백스터 목사가 1801년 겨울에 켄터키를 방문한 후 아키발드 알렉산더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때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 부흥이 수반했던 능력과 죄인을 도덕적인 사람으로 개조시키는 그 영향력은 당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며 내게는 정말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일입니다. 켄터키로 향하는 길에서 나는 정착민들에게서 켄터키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완전히 변했으며, 과거에 방종과 타락 생활을 했던 그들이 이제는 절제와 온유함으로 바뀌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나는 이 지상에서 켄터키만큼 도덕적인 도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경스러운 말들은 전혀 들을 수 없었고 신앙적인 경외심이 전 도시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자연신론자들이 회심했고 부흥이 어떤 이유로 임했든지 그것이 사람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음에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존경하는 아키발드 목사님, 저는 무엇보다도 켄터키에서 일어난 부흥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임재한 부흥 가운데 가장 비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켄터키가 직면했던 모든 상황을 다 고려해 볼 때 더욱 그러합니다. 불경건과 불신앙이 전 도시를 지배하고 있었고 종교는 거의 소멸되는 지경에 이르던 때였습니다. 무언가 비범한 어떤 것이 기독교는 완전히 끝났고 장래 일은 한갓 꿈에 지나지 않는다며 촐랑거렸던 사람들, 그처럼 가볍던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장로교 부흥에 대한 가장 중요한 평가는 1803년 켄터키 노회석상에서 행한 데이비드 라이스의 오랜 경험에 기초한 설교일 것이다. 우리는 부흥에 대한 그의 설교 가운데 주요 주제들만 인용하는 것으로 본장을 한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본장을 마감하는 데 있어서 우리에게 가장 중대한 결론과 교훈을 제공해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1. 이 부흥은 그것을 이끌어 내기 위한 어떤 특별한 프로그램이나 수단들 없이 도처에서 일어났습니다. 아시다시피 설교와 찬양과 기도는 우리 회중이 오랫동안 익숙하게 해 왔던 일들입니다. 부흥의 첫 번째 현상은 우리 가운데 몇 명의 경건한 사람들이 기도하기 시작한 진지한 기도의 영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2. 내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한, 이 사역의 내용들은 분별 없는 자, 혐오할 만한 천성, 치명적인 죄의 결과들과 영향들이 거룩한 내적 겸손의 감정으로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전적으로 무가치한 쓰레기 같은 지극히 작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거룩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대한 경외심이 늘어났습니다.
3. 그들은 역동적이며 매우 감동적인 하나님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영원하시고 유일하신 독생자를 인류의 구속으로 내어 주시기까지 하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무한하신 자기 비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은혜롭고 위대한 구속 사역 안에 계시된 구속자로 오신 이의 무한하신 겸손과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4. 그들은 또한 내가 보기에 영구한 인간의 영혼에 대한 매우 깊고 감동적인 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열렬히 영혼을 사랑했으며, 확신과 회심 그리고 완전한 구원 문제를 고통스럽게 근심했습니다. 이 사랑과 연민 그리고 열망과 고통, 죄인들의 구원과 교회의 번영을 위한 이 불타오르는 듯한 간구와 기도는 내가 이 세상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도의 범위를 넓혀 나갔고 그들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5.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으로 완전히 개혁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내가 특별히 눈으로 보고 경험한 익숙한 현상들이었습니다. 어떤 이웃들은 전에 사악하고 방탕하기로 악명이 높았는데, 이제는 경건과 단정한 생활로 정평이 나 있으며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술고래들과 불경한 맹세와 저주를 일삼는 자들과 거짓말쟁이들,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정말 놀랍게 개혁되고 변화되었습니다. 술고래들의 노래가 이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바뀌었습니다. 불경한 맹세와 저주를 일삼던 추잡한 공간들이 이제는 열렬한 기도의 공간으로 변화되었습니다.
6.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법도 모르고 신앙적 교훈이나 적당한 통치를 받지 않으며 살았던 어리석고 악한 가정들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가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의 영광을 찬양하며, 은혜의 보좌 앞에 그들의 간구를 올려 드림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사는 가족으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7. 이 역사하심의 주제들은 또한 성화뿐만 아니라 칭의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지 않고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자신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의 열망과 소원은 악에서부터 즉시 떠나는 것’이었으며, 예수의 종교를 그들의 이웃들의 양심에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대화가 사람들 앞에 거룩히 빛남으로 이웃들이 그들의 선한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정결한 천국을 바라보는 것과 하나님을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은 그들 인생의 가장 주요한 목적이자 궁극적인 추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