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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낭비(사순절 1주/20170303)
마태복음 26:1-13
봄 햇살처럼 따스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여러분의 삶을 환하게 비춰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3월 1일 성회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 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기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 고난을 겪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사순절기를 영어로 ‘Lent’라고 하는데, ‘만물의 소생’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우리에게 생명의 빛이 비쳐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룩한 낭비
독일 출신의 파울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나치 독일에서 교수직을 박탈당한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유니온신학교, 하버드대학교, 시카고대학교에서 역사신학과 조직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The New Being-새로운 존재』라는 설교집에 ‘Holy waste-거룩한 낭비’라는 제목의 설교가 있습니다. 이 설교에서 향유를 부은 마리아에 관한 부분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풍족한 마음을 보았고, 그 마음에 있는 다른 요소를 분석하지 않고 그의 마음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관해서는 ‘메시야, 곧 기름을 부음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 그 자신을 낭비해야만 한다.’고 하면서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일이나,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사건을 ‘거룩한 낭비’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순절 첫째 주일에 여러분과 함께 ‘거룩한 낭비’라는 주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태복음 26장의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이 입성하신 후에 겪게 될 수난을 여러 차례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수난예고에 대한 말씀을 단순히 상징 정도로 이해했는지 그저 높은 자리에 앉을 궁리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태복음 26장부터는 예수님의 수난이 구체적으로 아주 급속하게 현실로 다가옵니다. 수난이야기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수난 이야기의 시작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1)” 이 말씀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이제 말로 가르치는 사역은 ‘다’ 끝났고, 남은 것은 이제 몸으로 겪어가며 말씀하신 바를 이루는 일만 남았을 뿐입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2).” 즉, 예수님은 배신당하고 종처럼 팔리게 될 것을 예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유월절
유월절은 어떤 날입니까?
‘담을 넘었다’는 뜻을 가진 유월절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뿐만 아니라 애굽 땅에 있는 모든 것의 처음 난 것을 죽이시는 재앙을 내리실 때에 죽음의 사자들이 양의 피로 표식이 된 히브리인들의 집에는 재앙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유월절은 유대인에게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날이었고, 출애굽 이후 1500년 가까이 가장 중요한 절기 중 하나로 지켰던 것입니다. 그날 밤,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들은 끊임없이 가르쳤습니다. “Shema Israel 쉐마, 이스라엘!”로 함축되는 이스라엘의 신앙교육에서 유월절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 위대한 순간이었고, 지금 로마의 식민지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유월절은 독립을 향한 꿈을 다시금 재확인하는 중요한 절기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인 주전 63년경부터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몇차례 독립운동을 일으킨 결과 로마의 압제는 더욱더 심해졌고, 독립의 꿈은 점점 멀어져만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공생애 활동을 하시던 그 무렵까지 거의 100년 가까이 로마의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오랜 식민지 생활에 지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유월절에 오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다윗 왕조의 전성기를 다시 회복시켜줄 강력한 지도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많은 무리가 “호산나!”하며 예수님을 환영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에 희생을 당했던 어린 양처럼 그렇게 죽임을 당할 것을 예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 영적 치매에 걸린 종교지도자들
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 모여서’ 예수님을 잡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4절 말씀에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논의’한다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죽일만한 죄를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짓으로 흉계를 꾸며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합니다. 마태는 이 기록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에 현직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대제사장 가문이 연루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명 살림의 주체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성전체계를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오셔서 한 일 중에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성전숙청 사건’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무리를 내쫓으신 사건이지요. 그런데 이 사건 때문에 직접적인 손해를 본 것은 장사꾼만이 아니었습니다. 장사꾼들의 편의를 봐주고, 뇌물을 받아먹는 제사장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그들의 민낯을 폭로한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꼭두각시 권력과 손을 잡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누렸습니다. 종교권력이 권력과 손을 잡고나 권력의 맛을 들이면 반드시 변질하게 되어있습니다. 요즘 우리 대한민국에서도 이런 모습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한기총 같은 보수기독교연합단체나 중요한 시기마다 권력자들을 초청해서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어나 권력자에게 상을 받는 것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자랑하는 교단과 단체가 하는 짓은 이단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권력 지향적이고 물질 지향적인 그들은 이미 권력과 물질에 맛을 들여서 변질하였고, 그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과 교회는 심각하게 조롱당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하나님을 전해야 하는 이들이 무고한 생명을 없애기 위해서 흉계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착각합니다. 영혼이 둔감해진 까닭입니다. 이런 것을 일러 교황 프란치스코는 ‘영적인 치매’라고 표현했습니다. 영적인 치매에 걸리게 되면,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매우 민감하고 기민하며 용의주도합니다.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5).”고 합니다. 이 얼마나 주도면밀합니까?
▪ 사회적인 금기의 경계를 넘어서서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과 그 일행은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먼저 나병 환자의 집에 머문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인 금기를 깨뜨리는 파격이었습니다.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철저하게 가르는 세상의 경계를 예수님은 무너뜨린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다양한 경계들이 있습니다. ‘사회적인 금기’의 밑바탕에는 종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깊은 고민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정죄’가 과연 하나님의 뜻, 종교의 본질과 합치하는가 하는 고민입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품이 좀 넓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기독교인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자신들만의 감옥에 갇혀서, 벗어버릴 수 없는 푸른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잦습니다. ‘나병환자의 집에 머물렀다’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정결과 부정’을 철저하게 가르는 세상의 경계를 넘어섰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 향유를 부은 여인
이때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져와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이 여자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른 찬양에서는 향유를 부은 여자가 ‘막달라 마리라’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작사자가 착각한 것입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왜곡된 막달라 마리아의 이미지를 이 여인에게 투사하여 행실이 나쁜 여자가 회개하며 예수님께 옥합을 드렸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만 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목사님들 중에서도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 여인을 뭉뚱그려서 하나인 것처럼 설교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본문을 비교해보면 각기 다른 여인이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날은 유월절 엿새 전에 있었던 일이고,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의 한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는 날은 유월절 이틀 전입니다.
▪ 값비싼 향유의 가치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은 향유의 가치가 300데나리온의 가치였다고 합니다. 당시 노동자의 일일임금이 1데나리온이었으니, 안식일을 제외하고 일 년을 꼬박 일하면서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만 하는 비싼 것이었습니다. 2017년 아르바이트 최저 시급이 6,470원이니까 8시간 기준으로 51,760원입니다. 여기에 300일을 곱하면 15,528,000원입니다. 마태복음에 이 여인이 가져온 향유는 ‘매우 귀한 향유’라고 했으니,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깨뜨린 옥합과 견주어 다르지 않은 값일 것입니다.
이렇게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제자들은 분개합니다. “무슨 의도로 이렇게 비싼 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며 여인을 나무랍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함이니라(12)”라고 하십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이 여인의 행위를 ‘거룩한 낭비’라고 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거룩한 낭비(Holy waste)
낭비의 반대말은 절약입니다. 낭비하지 않고 절약하며 사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절약의 목적이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것이거나 부를 축적하기 위한 것에 국한된다면, 자기만족을 위해 탐욕스럽게 소비하는 낭비와 본질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은 거룩한 낭비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거룩한 낭비의 초점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거룩한 낭비는 어떤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낭비입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낭비하는 경향이 있고, 합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절약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거룩한 낭비’를 할 줄 압니다. 기독교인은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 때문에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고 낭비하지만, 그것은 결코 헛된 낭비가 아닙니다. 파울 틸리히의 ‘메시야, 기름부은 자는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 자신을 낭비해야 합니다.’라는 말의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시고,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신을 아끼지 않고 낭비하신 것이지요. 그 사랑 덕분에 우리에게 새생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한신대학교 기숙사의 이름이 ‘성빈학사’입니다. ‘거룩한 가난을 배우는 곳’이라는 의미죠. 그냥 가난이 아니라 ‘거룩한 가난’, 그냥 낭비가 아니라 ‘거룩한 낭비’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면 시간 낭비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 낭비가 아니라, ‘거룩한 낭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낭비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룩한 낭비’입니다. 옳은 일을 위해서 헌신하고,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고, 재능을 기부하고, 때로는 거리에 나가 정의를 외치는 것도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낭비’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룩한 낭비’입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던 여인, 그의 행동이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에게는 ‘낭비’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어떤 위험에 빠뜨릴 나쁜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은 내 장례를 위한 일이다.” 즉, “거룩한 낭비요, 거룩한 낭비를 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기억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한남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거룩한 낭비’를 요구하십니다. 그 ‘거룩한 낭비’는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일 성수를 하는 일도 여러분의 시간을 거룩하게 낭비하는 일이요, 성가대로 각 기관에서 봉사하는 일도 우리의 재능을 거룩하게 낭비하는 일입니다. 한남교회는 여러분의 ‘거룩한 낭비’로 6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해왔고, 또 여러분의 ‘거룩한 낭비’로 역사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거룩한 낭비’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남교회 역사에 작은 기록으로 남겠지만, 향유를 부은 여인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기억되었던 것처럼, 여러분의 ‘거룩한 낭비’는 또한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기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