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국민소통운동본부(CCCC) 원문보기 글쓴이: 평택 소통 김평탁
○ 의인이 통치하는 나라 | |
1. |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
2. |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 |
3. |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창기를 사귀는 자는 재물을 없이 하느니라 |
4. |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
5. |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
6. | 악인의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하느니라 |
7. |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
8. | 모만한 자는 성읍을 요란케 하여도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하느니라 |
9. |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이 그침이 없느니라 |
10. |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 ![]() |
11. |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 |
12. | 관원이 거짓말을 신청하면 그 하인은 다 악하니라 |
13. |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 |
14. |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
15. |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
16. |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나니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보리라 |
17. |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
18. |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
19. | 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
20. |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
21. |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체하리라 |
22. |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
23. |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
24. | 도적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 그는 맹세함을 들어도 직고하지 아니하느니라 ![]() |
25. |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
26. |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
27. |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정직한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
오늘의 역사
① 제2대 정․부통령선거(1952) : 직선제 선거.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함태영이 당선.
② 제5대 국회의원 총선거(1960) : 1960년 오늘 전국 7천79개 투표소에서 일제히 실시됐다.
임기 4년의 민의원 233명과 임기 6년의 참의원 58명을 뽑는 선거다.
과도내각 수반인 허정 총리를 비롯해 유권자의 84%가 투표에 참여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난 이후 내각책임제에 입각한 제2공화국 개정 헌법에 따라 처음 실시된 7.29총선 !
선거관리기관인 선거위원회를 헌법의 독립기관으로 헌법에서 보장하였으며, 입법조치의 미비로 그동안 구성되지 못한 참의원 구성을 위한 선거가 민의원선거와 동시에 실시되었다.
이 선거의 특징은 4. 19혁명의 주체세력인 학생들에 의해 개표도중 자유당계열의 입후보자에게 유리한 선거구에서는 투표함이 소각되거나 파괴되어 재선거를 실시한 지역이 있으며, 제1공화국의 여당인 자유당이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사실을 들 수 있다.
개표 결과 민주당이 민의원에서 175석, 참의원에서 31석을 차지하는 등 민주당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또 무소속이 민의원 49명, 참의원 20명 뽑혔다.
헌정 사상 최초로 양원제로 구성된 제2공화국 국회는 이듬해 5.16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해산되고 만다.
③ 가쓰라-태프트 밀약(桂-Taft密約;1905) : 1905.7.29에 미국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하는 대신,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인정하기로한 일본 수상 가쓰라(桂太郞)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 태프트(W.H Taft) 육군장관 사이에 맺어진 밀약.
가쓰라는 한국문제가 노일전쟁의 직접 원인이 되었으므로, 전후에도 다시 국제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 어떤 강경책을 써야겠다고 의견을 내자, 미국의 태프트는 한국이 일본의 허가 없이는 외국과 조약을 맺지 못하도록 정도의 보호정책을 쓰는 것이 좋으리라는 의견을 내었다.
이 밀약이 소위 한일합방의 유명한 예비공작인 셈인 것이다.
조약 당시 육군장관이었다가 뒤에 미국 제27대 대통령이 된 윌리엄 태프트 !!
오늘 우리는 그를 어떻게 볼 것인가 ?
포츠머스조약 체결에 조금 앞서 일본과 미국은 비밀 협상을 벌여, 일본이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독점 권익을 인정하는 대가로 미국은 대한제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을 묵인하는 밀약을 미 국무 장관 태프트와 일본 외무 대신 가쓰라 간에 체결하였다.
이 때, 알렌(Allen) 공사는 일본 세력의 저지를 주장하였으나 루스벨트는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일본을 지지하였다.
이 밀약에서는
1)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우월적인 독점권익을 인정한다. 2)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영․미․일 3국은 동맹관계를 확보한 다.
3)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적인 독립 권 익을 인정한다.
라는 세 조항을 규정하고 있다.
요컨대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한반도를 지배하자는 것이었다.
이 밀약으로 이제 일본은 거리낌없이 조선에 대한 강제 합병의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서로 침략의 야욕을 구현시키기 위한 예비적 조치를 취한 것으로 한일 합방을 가능하게 한 밀약이었던 것이다.
1905년 7월 밀약을 맺고 귀국한 태프트에게 미국의 여론은 비난과 매도로 들끓었다.
당시 뉴욕타임스, 뉴욕트리뷴, 뉴욕헤럴드 등 신문들은 약소국 한국 인민의 자유를 일본에게 넘겨 준 행정부의 관리를 ''자유의 나라 미국''의 이름으로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태프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 국민은 오늘 아침에는 어느 나라에 붙어야 살까, 밤이 되면 오늘밤에는 어느 나라에 붙어야 살까만을 생각한다.
제 힘으로 제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이 도무지 없다.
이런 비겁한 국민의 자유에까지 우리는 관심을 가질 수 없다."
일제의 함포외교로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고, 1882년 중국의 주선으로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었다.
당시 왕실과 양반지배층은 미국 쪽에 호감을 품고 막연한 기대도 했다.
그러나 조선의 외교고문이 된 미국인 스티븐슨은 일제의 이익을 적극 도모해 이런 기대를 저버렸고, 미국 정부도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일제의 조선 강점, 식민지화를 양해했다.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일제에게 강탈되었을 때 조선에서 제일 먼저 철수한 외국사절도 미국이었다.
그런데도 당시 친미파 이승만은 미국 정부에 조선독립을 청원하고 다녔다.
자주성이 없는 국가가 어떤 평가와 대접을 받게 되는지 그리고 왜 조선이 식민지의 비운을 맞게 되는지 극명하게 보여준 발언이었다.
④‘헐버트’, 한국정부 초청, 인천항 도착(1949) : ⇨ 8월 5일.
⑤ 한국, 제14회 런던올림픽 첫 출전(1948) : 7월29일, 제14회 올림픽이 런던에서 개막됐다.
2차대전으로 12년 만에 치러진 올림픽이었다. 한국을 비롯, 15개 신생국이 처음 참가한 것과 달리 전범국 일본촵독일,이탈리아는 초청받지 못했다.
한국은 광복 후 처음 출전한 하계올림픽에 축구,복싱,역도 등 7개 종목에 50명의 선수와 17명의 임원을 출전시켰다.
그 해 1월, 단 3명 뿐인 초미니 선수단이 파견된 스위스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이 광복 후 출전한 첫 올림픽이었다.
아직 정부가 수립되지 않아 참가비용은 액면가 100원인 올림픽 후원권을 발행해 조달했다.
6월21일 서울역을 출발해 열차로 부산에 닿은 선수단은 다시 배를 타고 요코하마를 거쳐 7월2일에 홍콩에 도착했다.
홍콩에서 런던행 비행기를 탔으나 인도촵이집트촵로마를 경유하는 장거리 비행이었다.
결국 20일이 지난 7월8일이 돼서야 파김치 상태로 런던에 도착할 수 있었다.
8월11일 김성집이 역도에서 첫 동메달을 따내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태극기가 게양되는 감격을 맛본데 이어 한수안도 복싱에서 동메달을 획득, 한국은 참가국 58개국 가운데 24위를 차지했다.
한국계 미국인 새미리(李)가 하이다이빙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것도 런던 올림픽이었다.
⑥ 법륜 스님,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 선정(2002) : 2002년 오늘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라몬 막사이사이상의 수상자로 우리 나라의 법륜스님이 선정됐다.
법륜스님은 정파에 개의치 않고 탈북자 지원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평화와 국제이해 부문의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막사이사이상은 1957년 항공기 사고로 사망한 막사이사이 필리핀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법륜스님은 '쓰레기 없는 국토'를 만들겠다며 1988년 '정토회'라는 실천공동체를 만들어 운영했다.
1999년부터 북한 어린이 만1000명에게 옥수수, 설탕, 분유 등을 보냈다.
또 종이 아껴쓰기, 과포장제품 구입하지 않기, 용변 뒤 뒷물하기 등 환경친화적 생활방식을 전파했다.
⑦ 파리의 에토얄(Etoile) 개선문(凱旋門) 제막(1836) : 개선문은 개선을 기념하는 건조물 이다.
로마 시대에 개선 군대를 환영키 위하여 세웠다.
높이 50m, 폭 45m로 세계에서 가장 큰 개선문을 설계한 사람은 프랑스 나폴레옹의 제정시대의 샤르글랑(Charglin) !
프랑스의 위대한 군대와 영웅들을 찬미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명으로 에트왈 광장으로 위치가 정해졌는데, 훗날 나폴레옹의 유골이 유배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이 개선문을 통과하여 운반되었다고 한다.
⑧ 스페인 무적함대 아르마다 영국에 대패(1588) : 스페인 제국의 무적함대 아르마다가 해적출신 프렌시스 드레이크가 이끄는 영국의 함대에 대패하고,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이 세계를 제패하면서 스페인의 영화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하워드경(卿)을 사령관으로 하고, 호킨스, 드레이크 등의 명장을 배치하여, 전함 80척, 병력 8,000으로 싸우게 하였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영국은 잘 훈련된 병사와 정확한 전술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아르마다는 54척만 본국으로 퇴각하였다. 이 전투로 스페인은 영국에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
⑨ 불행한 세기의 결혼, 찰스와 다이애너 결혼(1981) : 7월 29일 영국의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의 결혼 !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의 맏아들인 찰스 왕세자는 영국 공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를 다녔으며, 1971~76년 해군 소속으로 여러 곳에서 근무했다.
이후 '영 잉글랜드 스쿨'의 유치원 교사로 있던 다이애나를 만나 1981년 약혼을 발표했다.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식은 세인트 폴 성당에서 거행됐다.
런던 도심에 있는 이 사원은 런던교구에 속하지 않고 여왕에 직속되며 『제국교구 교회』로 불려왔다.
81년 껑충한 키의 금발머리 아가씨가 신데렐라처럼 등장, 영국 언론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만19살의 다이애나 스펜서. 81년 7월 29일 다이애나와 찰스 왕세자의 ''세기의 결혼''은 전세계 수백만명의 가슴을 설레게 했고 전 세계로 생중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13년 뒤의 이혼을 예고하고 있었던 결혼이기도 했다. 1982년 첫 아기인 웨일스 공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스 왕자가, 1984년 둘째 헨리 찰스 앨버트 데이비드 왕자가 태어났다.
그러나 활발한 자선활동으로 언론의 초점이 된 다이애나는 찰스와 불화가 깊어지면서 결국 1992년 공식 별거에 들어갔고, 1996년 합의이혼했다.
1997년 다이애나는 연인이었던 '도디' 알 파예드와 함께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1992년 12월, 존 메이저 당시 영국 총리는 찰스-다이애나 부부의 공식 별거를 발표했었다.
⑩ 비키니 수영복, 파리의 패션 쇼에 처음으로 등장(1946) : 태평양 상의 작은 섬 비키니에서 미국의 원자폭탄 실험이 있은지 4일 후인 1946.7.29에 파리의 한 패션 쇼에서 비키니 수영복이 처음 등장했다.
프랑스 디자이너 쟈크 앵은 비행사를 고용하여 자기가 만든 수영복을 공중에다 광고했다.
비행기는 연막탄으로 이런 글자를 만들며 날았다.
"비키니-세계에서 가장 작은 수영복보다 더 작은 수영복"
어떤 사람들은 비키니라는 명칭의 의미를 폭탄이 터진 뒤 식물들이 자취를 감춘 비키니 환초와 마찬가지로 그 수영복이 여성들을 벌거벗겨 놓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였다.
무명 천에 신문지를 도안해서 프린트한 비키니 수영복을 처음 입고 무대에 섰던 모델은 당시 각 곳에서 10만여통의 팬레터를 받았다고 한다.
⑪ 나이지리아 쿠데타 발발(1975) : 내전이 끊이지 않던 나라 나이지리아 !
1975년 오늘 또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나라가 1960년 독립한 이래 벌써 세 번째 쿠데타다.
9년 전 역시 쿠데타로 집권했던 고원 장군이 이번 쿠데타로 실각한다.
고원 장군은 이때 OAU, 즉 아프리카통일기구 정상회담에 참석하러 우간다에 가 있었다.
이번 쿠데타의 주역은 고원 장군의 경호대장인 가르바 중령!
나이지리아에서는 이듬해인 1976년 2월 또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오바산조가 실권을 장악하지만 이후 1983과 1985년에도 쿠데타가 잇따른다.
⑫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새 단장(1962) : 미국 뉴욕시 맨해튼 34번가에 자리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
1962년 오늘 높이 448미터에 102층짜리인 이 초고층빌딩에 청소부들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유리창을 닦는다.
청소부들의 곡예에 가까운 노력으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지어진 지 32년 만에 깨끗한 모습을 되찾는다.
이 빌딩은 1971년 세계무역센터가 생길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며 지금도 뉴욕시의 명소다.
⑬ 영(英)포웰 보이스카우트 창립(1907) : 베이든 포웰(1857~1941)은 깜짝 놀랐다.
그의 책 정찰활동 지침서가 런던 서점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것을 보고서다.
야외에서 정찰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매우 실용적으로 쓴 책이 그렇게 인기를 모을 줄은 몰랐다.
그 책은 포웰이 아프리카에 있을 때 낸 책이었다.
그는 기병대 장교로 아프리카에서 수년을 복무하고 1903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누구보다 열렬한 독자층은 교사와 청소년단체 직원이었다.
이들은 청소년이 야외에서 활동하기에 앞서 꼭 읽어야 하는 책으로 정찰활동 지침서를 꼽았다.
이 얘기를 들은 포웰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청소년 야외활동 단체를 만든다는 발상이었다.
포웰은 19세 때부터 군 복무를 했다.
그는 몸에 밴 단체생활과 엄격한 규율, 신체훈련과 야외 체험 등 군대 경험이 청소년에게도 유익하리라고 생각했다.
1907년 7월 29일 포웰은 보이스카우트 창립을 선언한다.
영국 브라운시 섬에서 소년들을 위한 캠프를 준비하면서다.
사흘 뒤 세계 최초의 보이스카우트 캠프가 개최됐다.
국제 정세의 불안이 계속되던 때 사람들이 소년 군대에 매혹된 것은 당연했다.
보이스카우트는 빠르게 세를 불려나갔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국가가 앞 다퉈 보이스카우트 지부를 만들었다.
1910년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등의 나라에 보이스카우트가 생겼다.
그해에 포웰의 동생 아그네스가 걸스카우트를 만들었다.
2005년 현재 154개국 2800만 명이 보이스카우트 회원으로 등록됐다.
한국 보이스카우트의 역사도 길다.
일제강점기인 1922년 구국 청소년운동을 목적으로 창설된 조선소년군과 조선소년척후대가 전신이다.
1924년 두 단체가 통합됐다가 강제 해산됐고 1946년 사단법인 대한보이스카우트로 재발족했다.
보이스카우트 활동에 군인 정신이 어느 정도 스며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운영 방식이 지나치게 군대와 닮아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그래서 군대를 연상시키는 계급 구분이라든지 깃발 행진 같은 군대풍 행사를 없앴다.
자연과 호흡하는 야영생활이나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소년들의 교류 같은, 장점이 될 만한 활동을 더욱 활성화했다.
포웰은 훈련담당교관들에게 소년들과 절대로 성적 접촉을 하면 안 된다고 당부했고, 단원들에게는 가능한 한 성욕을 절제하라고 가르쳤다.
포웰이 남색(男色) 취향이 있는 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지만 보이스카우트의 인기를 시기한 일부의 억측으로 추정된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2006)
⑭ NASA 설립법 통과(1958) : 1957년 10월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우주로 쏘아 올렸다.
지름 58cm, 무게 83.6kg에 불과한 이 인공위성으로 ‘우리가 과학기술 분야의 선두’라는 미국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졌다.
놀라움에 동그래진 눈 뒤에는 핵무기를 실은 미사일이 미국으로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웅크리고 있었다.
소련의 우주개발 행보에 자극을 받은 미국은 항공우주 투자를 대대적으로 늘리기로 했다.
2008.7.29는 미 항공우주국(NASA)이 설립 50주년을 맞는 날이다.
1958년 7월 29일 의회는 NASA 설립을 명시한 ‘국가 항공우주법’을 통과시켰다.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 간 국가 자존심을 건 ‘우주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60년대 달성 목표는 유인 우주비행. 소련이 먼저 성공했다. 1961년 4월 유리 가가린을 태운 보스토크 1호가 108분간 지구를 일주하고 돌아왔다.
미국은 이에 질세라 같은 해 5월 첫 유인 우주선 프리덤 7호를 올려 보냈다.
1961년 5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60년대가 끝나기 전에 달에 인간을 보내고 이들을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어느 나라가 먼저 달에 발을 딛는가가 다음 관문이 됐다.
소련은 1966년 무인 탐사선 루나 9호를 세계 최초로 달에 착륙시켰다.
미국은 맹렬히 뒤쫓아 갔다.
그리고 1969년 7월 아폴로 11호를 쏘아 올려 인류 최초로 달에 닐 암스트롱을 내려놓았다.
이후 미국이 우주 활동에서 주도권을 잡았다는 평가다.
NASA가 우주 탐사를 시작한 뒤 태양계와 우주의 생생한 정보를 숱하게 생산해냈다.
달의 정체도 비교적 상세히 밝혀졌고 화성과 토성도 숨겨진 모습을 드러냈다.
우주 기술은 우주의 비밀을 파헤치는 데 국한되지 않았다.
NASA는 우주비행사들의 식수와 음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수기와 전자레인지를 개발했다.
연기 감지 화재경보장치는 미국의 우주정거장인 ‘스카이 랩’을 위해 만들어졌다.
아폴로 계획을 진행하면서 개발한 디지털 신호 처리나 화상 기술은 컴퓨터단층촬영(CT)과 자기공명영상(MRI) 탄생에 기여했다.
인공위성 덕분에 텔레비전 방송, 휴대전화를 쓸 수 있다.
우리 생활 속에 우주 기술은 이미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2008)
⑮ 기타 오늘의 역사
1658 파리외방전교회 창립.M,E,P,가톨릭 선교단체.프랑스 파리에서 창설.
1835 영국 정치가 미첼 토마스 새들러
1839 모방 샤그탕 신부 홍주에서 체포
1890 양화진에 외인공동묘지 설치 허가
1894 청일전쟁중 첫 육상교전이 성환-수원에서 전개됨
1913 알바니아 독립
1914 하와이한인기독학원 설립.여학생 기숙사를 설비하고 각 지방 으로부터 호놀룰루에 와서 공부한 학생에게 국어를 가르침.
1914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을 연결하는 첫 대륙횡단 전화선 완공
1915 하와이한인기독교회 설립.하와이에 설립된 초교파적 한인교 회.이승만이 한인감리교회 기숙학교 경영문제로 탈퇴한 교 인들의 모임
1921 히틀러, 나치스 당수 취임
1922 전국에 호우, 197명 사망, 가옥 피해 2만여호
1945 기독교 모든 교파를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으로 강제통합
1946 전승(戰勝) 연합국대표 21개국 파리서 국제평화회의 개최
1948 제14회 런던올림픽 개막. 한국 처음 출전
1949 육군참모학교, 제1기생 29명 졸업식 거행
1952 국회 특별위, 중석불 사건 조사결과 발표
1955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尹致昊)로 결정
1957 국제원자력기구(IAEA) 발족
1961 동독, 서독으로의 피난민 유출방지 조치를 강화
1964 계엄령(6월3일) 해제
1965 서해안에 큰 해일(인천 개항이래 최대)
1965 김해서 군인 30여명 난동 경찰서 습격하고 기자 납치
1966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1967 미국 항공모함 포레스탈호 통킹만서 화재. 인명 261명-비행 기 29대 손실
1967 정부종합청사 기공
1967 미국 항공모함 포레스탈호 통킹만서 큰불. 261명-비행기29대 손실
1968 한국여자농구, 아시아선수권 우승
1968 교황 바오로 6세, 카톨릭교도들에 대한 인공적 산아제한 금지 지시
1968 로마 교황, 회칙을 발표하고 인공산아제한을 금지
1975 미주기구(OAS) 대 쿠바봉쇄 해제 결의
1976 유도 장은경, 몬트리올 올림픽서 은메달 획득
1978 베오그라드서 비동맹국 외무장관회의 개막
1979 대전 자유시장에 화재. 103개 점포 소실
1980 바누아투, 영국-프랑스로부터 독립
1981 바니 사드르 이란대통령 프랑스로 망명
1983 공격형 헬리콥터대대 창설추진 발표
1983 인도 미그27기 생산
1983 인도, 미그27기 생산
1985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 5개월간 핵실험 중지 발표
1987 인도-쓰리랑카, 인종분쟁 종식을 위한 평화협정 조인
1990 몽골 최초의 자유선거 실시, 인민혁명당(공산당) 승리
1991 태풍 캐틀린 강타, 3명 사망, 4명 실종, 30여억원 피해
1993 헌법재판소, 국제그룹 해체는 부당한 공권력 행사라며 위헌 판결
1994 토초세 위헌 결정
2002 박희정, 미 LPGA투어 사이베이스 빅애플클래식에서 LPGA 진 출 후 첫 우승
오늘의 인물
① 신숙주(申叔舟 ; 1414 - 1475.7.29) : 1975.7.29는 보한제(保閒齊) 신숙주의 500주 기일이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고산리.
세종대왕을 도와 훈민정음을 창제했고, 문화․국방․외교 등 조선왕조 500년의 국기를 닦았던 보한제는 69세로 서거할 때까지 조선 왕조에 빛을 남겼다.
탁월한 문장과 능숙한 외교로 대마도에 들러 계해조약을 맺게 했고, 이때의 견문을 저술로 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와 <보한제집>을 냈다.
또한 훈민정음 창제 당시 요동에 유배중이던 명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13번이나 찾아가 한자 음운에 대한 연구를 했으며, 홍무정운(洪武正韻)의 번역과 동국정운의 편집 등 음운학 연구의 완벽을 꾀하여 오늘의 국어학 연구의 길을 터놓기도 했다.
세조가 단종의 자리를 빼앗는데 협조했으며, 남이(南怡)장군을 숙청하여 보사공신(保社功臣)의 호를 받아 영의정까지 지냈다.
② 전형필(全鎣弼 ; 1906.7.29 - 1962.1.26) : 문화재 수집가.
본관은 정선(旌善),
자는 천뢰(天賚),
호는 간송(澗松)․지산(芝山)․취설재(翠雪齋)․옥정연재(玉井硏齋).
서울 출신으로 정3품 중군(中軍)을 지낸 계훈(啓勳)의 증손자이다.
증조 때부터 배오개(지금의 종로 4가) 중심의 종로 일대 상권을 장악한 10만석 부호가의 상속권자이다.
휘문고등보통학교(지금의 휘문고등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 법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후 일제 식민 통치 아래 말살되어 가는 민족 문화 전통을 단절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에서 오세창(吳世昌)을 따라다니며 민족문화재 수집 보호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보호, 수집한 문화재는 현재도 간송미술관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다.
간송미술관은 개인 미술관으로서는 드물게, 국보 및 보물급 등의 문화재를 다수 소장하고 있는 세계적인 한국 미술품 소장 미술관으로서 미술사 연구인의 메카라 할 수 있다.
간송미술관에는 국보로 지정된 『훈민정음』(70호), 『동국정운』권1,6(71호), <금동계미명삼존불>(72호), <금동삼존불감>(73호), <청자압형수적>(74호), <청자기린유개향로>(65호), <청자상감포류수금문정병>(66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149호), 혜원 신윤복의 <쌍검대무>(135호) 등의 9점과 보물로 지정된 <백자박산향로>(238호),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376호), <금보>(283호), <금동여래입상>(284호), <금동보살입상>(285호), <청자상감포도동자문매병>((286호), <분청박지화문병>(287호), <분청사기모란문반합>(348호), <청자상감모자합>(349호),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241호), <괴산 외사리 석조부조>(579호), (전 문경오층석탑>(580호) 등 12점이 있다.
그리고 서울특별시에서 1974년 5월12일에 지방 유형문화재로 지정한 <삼층석탑>(28호), <석조팔각부도>(29호), <석조미륵불입상>(30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31호) 등 4점이 정원에 각각 세워져 있다.
③ 변종하(卞鍾夏 ; 1926.7.28 ~ 2000.7.29) : 한국의 서양화가.
경상북도 대구에서 출생.
시적인 정서의 한국적인 이미지 결합을 추구해온 화가로 평가된다.
8․15광복 직전 만주에 있는 신경미술원에서 공부하였고 8․15광복 후에는 귀국하여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4~7회 수상하였다. 특히 1955년에는 부통령상을 수상하였으며, 홍익대학교․수도여자사범대학․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프랑스에 유학하면서 재료에 대해 완벽을 추구하는 러시아 화가들에게 큰 감명을 받았으며, 프랑스 미술비평가이며 시인인 르네 드뤼앵(Rene Druin)을 만나 작품세계에 큰 전환을 가져왔다.
그후 런던의 쿠퍼 화랑, 파리 시립미술관 등에 초대작가로 활동하였다.
당시 작품으로 일그러진 인물상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우화》 《돈 키호테》 시리즈가 있다.
1975년 현대화랑에서 전시회를 열고 《어떤 탄생》이라는 주제로 민화․야생초․십장생 등과 새를 소재로 한 작품을 시리즈로 발표하였다.
요철 위에 마포를 씌우고 색을 칠하는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였으며, 한국적 이미지를 새롭게 탐구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 《감자꽃과 태초의 새》 등이 있다.
1987년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에도 작품활동을 계속해 오다가 2000년 7월 29일 사망하였다.
④ 김 현(金炫 ; 1942.7.29 ~ 1990.6.27) : 문학 평론가․불문학자.
본명 김광남(金光南)
전라남도 진도에서 태어났다.
1964년 서울대학교 불문과, 1967년 동 대학원 불문과를 졸업하였다.
1971년 서울대학교 전임강사가 된 뒤 1990년까지 불문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대학 재학 시절인 1962년에 평론 〈나르시스의 시론(詩論)〉을 《자유문학》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이후 여러 문예지와 잡지에 평론을 발표하였다.
프랑스의 현대문학과 사상, 특히 실존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실존적 정신분석 방법에 비평의 기초를 두었다.
한국문학사에도 관심을 기울여 《한국 개화기의 문학》(1969) 등의 저서를 남겼다.
저서에 《존재와 언어》(1964), 《상상력과 인간》(1973), 《한국문학의 위상》(1977), 《문학사회학》(1982), 《분석과 해석》(1988) 등이 있으며, 김병익(金炳翼) 등과의 공저 《현대한국문학의 이론》(1972), 김윤식(金允植)과의 공저 《한국문학사》(1973) 등이 있다.
1989년에 제1회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하였다.
⑤ 알렉시스 드 토크빌((Tocqueville ; 1805,7,29 - 1859.4.16) : 원어명 Alexis-Charles-Henri Maurice Clrel de Tocqueville
프랑스 정치사상가.
파리에서 태어나서 칸에서 졸(卒).
노르망디 귀족 출신의 토크빌은 왕정복고기에 베르사유재판소 배석판사로 일하다가 7월혁명 이듬해인 1831년 정부의 의뢰로 미국 교도행정(矯導行政) 체계를 조사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넜다.
그는 미국에 머무는 동안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이 젊은 국가의 형사정책만이 아니라 정치체제 일반을 살폈고, 귀국한 뒤에 이를 토대로 미국의 민주주의(1835~1840)를 썼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미국 문명을 해부한 최고의 고전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토크빌은 이 책에서 미국 사회의 핵심적 면모를 여러 조건들의 평등화로 파악했다.
그러나 조건들의 평등이 귀족주의를 무너뜨리고 탄생시킨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인민의 의지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압살할 위험을 토크빌은 내다보았다.
이런 다수의 전제(專制)라는 폐해를 피하기 위해 그가 내놓은 처방은 정치적 차원에서 지방분권화와 언론의 자유, 사회적 차원에서 결사체들의 발달, 법률적 차원에서 사법권의 독립 같은 것들이었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된 뒤 하원의원과 외무장관을 지내기도 한 토크빌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에 반대해 정계에서 은퇴한 뒤 역사 연구에 전념했다.
꼼꼼한 역사적 탐구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적 이념과 엄밀한 논리, 건조하면서도 명료한 문체 등으로 토크빌은 흔히 한 세기 이전의 사상가 몽테스키외에게 비견된다.
몽테스키외처럼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이었던 토크빌은 역시 몽테스키외처럼 젊은 시절 영국에 체제하며 그 쪽 지식인들과 교유한 바 있다.
그 시절 사귄 친구 가운데 하나가 한 살 아래의 경제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다.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 꼼꼼한 서평과 해제를 달아 이를 영국에 소개한 사람이 밀이다(고종석,2004).
⇨ 4월 16일.
⑥ 그라나도스 출생(1867) : ⇨ 3월 24일.
⑦ 무솔리니(Benito (Amilcare Andrea) Mussolini : 1883,7,29 - 1945,4,28) :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창시한 독재자.
하층계급 출신으로 교직을 거쳐 저널리스트, 대중연설가 등으로 명성을 얻었다.
1910년경부터 사회주의의 청년기수로 부각되기 시작해, 1912년에는 사회당 기관지인 <전진! Avanti!>의 편집장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반전주의자에서 전쟁지지자로 돌연 입장을 바꾸면서 사회당에서 탈당했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지지하는 한 출판업자의 재정지원을 받아 <이탈리아 인민 Il Popolo d'Italia>의 편집을 담당했고, 전후에는 민족주의를 내세운 반자유주의적․반사회주의적 정치 세력을 결성했다.
1922년 사회당의 총파업이 일어나자, 이들 파시스트들은 로마 진군을 감행해 국왕으로부터 조각위촉을 얻어냈다.
총리로 취임한 무솔리니는 짧은 기간에 질서안정과 경제회복을 달성해 큰 지지를 얻었으나, 1930년대 중반부터 제국주의 노선을 취함으로써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1936년 독일의 히틀러와 동맹을 맺었고, 1940년에는 연합국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전쟁은 이탈리아에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1943년 실각한 무솔리니는 독일의 힘을 빌려 이탈리아 북부에 괴뢰정권을 세우기도 했으나 파르티잔에게 사살당했다.
⇨4월 28일.
⑧ 로버트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 1810.6.8 - 1856.7.
29) : 19세기 낭만파 음악의 위대한 독일의 작곡가.
처음에는 법률․철학을 공부하다가 20세 때 음악을 전공하였다.
근대적 피아노 기술을 개척했으며, 무리한 연습으로 손을 상해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하고 작곡가가 되기를 결심, 음악평론 활동들 펴며 「음악신보」를 발간하여 쇼팽 등을 소개하며 음악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19세기에 있어서 음악 아카데미즘에서 훌륭히 탈피하여 음악과 시를 결부함으로써 낭만파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슈베르트의 계승자로서 가곡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으며, 명 피아니스트였던 아내 클라라가 남편 슈만의 작품을 계속적으로 연주, 발표했다고 한다.
그는 독일의 리이드와 함께 관현악곡․실내악곡 등의 많은 명작을 남겼으며, 대표작으로 합창곡 <천국과 베리(Bery)><피아노 협주곡><어린이의 정경>과 가곡집 <시인의 사랑><여자의 사랑과 생애> 등이 있다.
⑨ 고호(Vincent van Gogh ; 1853.3.30 - 1890.7.29) :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흐는 집안사정으로 어려서부터 직업전선을 전전해야 했다.
1880년 브뤼셀의 왕립미술관에서 혼자 그림공부를 시작했고 1881년 화가 모브에게서 유화를 배웠다.
마침내 1885년 최초의 작품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그렸으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한때는 고갱과 공동작업을 하기도 했으나 곧 헤어졌고, 자신을 억제하지 못해 자신의 귀를 자르기도 했다.
반 고흐가 권총으로 자살함으로써 비참함과 고뇌에 찬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37세였다.
빨강, 파랑, 노랑색이 주조를 이룬 그의 그림은 언제나 강렬했고, 자연이나 인물들은 한결같이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고흐는 색깔 그 자체로 정신세계를 표현했고, 색채의 움직이는 듯한 신비감은 그의 그림의 전부였다.
'빨간 포도밭'이 생존해 있는 동안 팔린 유일한 그림일 정도로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는 집념과 정열만으로 답답한 현실을 이겨냈다.
그의 최후의 비극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목격담에 의하면 그는 총상을 입고서 밤늦게 하숙집에 돌아와 2층 자기 방에 들어가 누웠다.
곧 의사들이 불려 와서 치료를 했으나 그들은 모두 외과전문의가 아니었다.
밤이 되자 호흡 곤란이 격심해졌다.
''이렇게 죽고 싶어''라고 말한 형 은 30분 뒤에 죽었다.
1890년 7월 29일, 새벽 1시 반이었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혼자 남은 테오는 형의 저고리 주머니에서 접혀진 종이를 찾았다.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나의 목숨을 걸었고 이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3월 30일
⑩ 다크 함마슐드(Dag Hammarshjӧld ; 1905.7.29 - 1961) : 스웨덴의 정치가․법률가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1953년 이후 유엔 사무총장을 지냈다.
한국 동란을 수습하는데 활약, 콩고로 향하는 도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⑪ 이탈리아 황제 움베르토1세 암살당함(1900) : 이탈리아의 마지막 황제 움베르토1세는 몬자시에서 마차를 타고 도심을 빠져나가다 무정부주의자였던 게타노 브레시의 총격으로 사망한다.
⑫ 토마스 헨리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 1825.5.4 - 1895.7.29) : ⇨ 5월 4일.
헉슬리는 불가지론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영국의 생물학자이다.
⑬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 1759.8.24 ~ 1833.7.
29) : 영국의 정치가로 의회개혁과 로마카톨릭교도의 정치적 해방을 지원하였고 ‘선언협회’를 설립하였다.
노예무역폐지법을 성립시켰으며 복음주의자그룹의 중심인물로 해외선교운동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출생지 영국 잉글랜드 요크셔
⇨ 8월 24일.
⑭ 로널드 피셔(Ronald Fisher ; 1890 - 1962.7.29) : ‘거의 혼자 힘으로 현대 통계학의 기초를 쌓은 천재.’
영국의 로널드 피셔에 대한 평가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주목 받았다.
1890년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근시에 약골이었으나 여덟살 때 대학의 천문학 강의를 청강할 만큼 수학과 천문학에서는 발군의 재능을 보였다.
명문 사립고 해로에서는 기하학 감각을 익혔다.
지독한 근시인 피셔가 책과 노트를 이용하지 않고도 공부할 수 있도록 수학을 가르친 학교의 특별 배려 덕분이다.
천재성은 케임브리지대학에서도 이어졌다.
복잡한 수식을 다양한 기하학적 도표와 그림을 동원해 간단하게 증명하는 재주를 갖고 있던 그는 대학생 신분으로 유명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고 1912년에는 최우수 졸업생으로 뽑혔다.
기대를 한몸에 받던 그는 졸업 무렵부터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통계학과 우생학을 주름잡던 피어선 등 주류학자들의 견제 탓이다.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국가가 저소득층의 출생률을 억제하고 빈민 복지를 줄여야 한다’던 피어슨의 우생학과 확률이론에 모순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 뒤에는 사이가 더 틀어졌다.
고교 수학교사로 일하던 그가 기회를 맞은 것은 ‘로담스테드 농업실험연구소’에 취직하면서부터. 비료회사가 운영하던 연구소는 퇴비더미 속에 있었지만 90년 동안 강수량과 온도, 비료의 종류와 수확량, 토양 상태에 관한 방대한 자료가 쌓여 있었다.
3년 후 그는 ‘작물 수확량 변동에 관한 연구’를 내놓으며 화려하게 학계에 복귀했다.
1962년 7월29일 사망하기까지 그는 내놓은 5편의 관련 논문 시리즈에서 제시된 ‘분산 분석’과 ‘자유도 개념’ ‘신뢰학률 이론’ 등은 20세기 통계학을 열었다.
학생의 신체적 결함을 배려했던 ‘따뜻한 교육’이 없었다면 현대통계학의 성립은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2008.서경.인터넷한국일보)
⑮ 기타 오늘의 인물 ⑯⑰⑱⑲⑳ ㉑㉒㉓㉔㉕㉖㉗㉘
1605 다하 출생.독일의 종교적 시인.그는 프러시아의 신학자들과 과학자들과 시인들의 모임인 일명 쾨니히스베르크학파라는 집단의 가장 재능있는 구성원.
1644 우르바누스 8세 사망.본명은 마페오 바르베리니.1623-44년의 22년간 교황직에 있던 인물.[30년 전쟁]의 결정적 시기 (1618-48)에 해당됨.
1787 세들니츠키 출생.루터교로 개종,독일 브레슬라우의 제후 주 교.
1849 노르다우 출생.의사이며 논쟁적 저술가.초기 유대인 민족주의 자.파리에서 병원개설.기행문집.희곡.시집.수필 등 다작적 인 저술가.
1869 소설가 부스 타킹턴 출생
1879 뱅상 출생.예수회 신학자이자 교수.제1차대전중에 그는 프랑 스의 포슈 원수의 참모진의 한 장교였다.제2차대전때는 레 지스탕스운동의 일원으로 적극적
1885 이인구 출생.감리교 목사.1922년 3월 감리교 협성신학교 졸업 (8회).
1886 도빈스 출생.남침례교 주일학교국의 편집진의 임원이었으며 (1915-20),남침례교신학교에서 기독교교육학과 교회행정 교 수를 함.
1892 배우 윌리엄 파월 출생
1908 고든 출생.유대인 펜실바니아대학교 히브리어 전임강사.필라 델피아 드랍시대학에서 아시리아학과 이집트학 교수로 있 다.
1922 허스턴 출생.미국하나님의 성회 선교사.1960년 내한.조용기 목사님 함께 순복음중앙교회에서 목회함.1979년 순복음신 학교 교장 봉직.
1936 전 미국노동부장관 엘리자베스 돌 출생
1938 앵커맨 피터 제닝스 출생
1965 바빙크 별세
1983 영국 영화배우 데이비드 니븐 사망
오늘의 샘터
① 베니토 무솔리니의 말 : "역사의 바퀴를 움직이는 것은 피뿐이다."
② 다크 함마슐드의 말 : 1) "매일 권력에 걸맞게 행동하고 있는 사람만이 권력을 소유할 자격이 있다."
2) "가장 긴 여행은 마음의 여로이다."
**** 윌리엄 태프트 [William Howard Taft, 1857.9.15~1930.3.8] : [요약] 미국의 정치가이자 법률가이며 제27대 대통령.
연방판사, 필리핀 총독, 육군장관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다.
트러스트 규제 등에 업적을 남겼고 대법원장을 지냈다.
국적 미국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 태프트 / 미국의 제27대 대통령.
[본문] 오하이오주(州) 신시내티 출생.
1878년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주(州) 및 연방판사를 거쳐 1901년 필리핀 총독에 임명되어, 필리핀 국민들의 복지향상과 자치권 확대에 힘썼다.
1904년 육군장관이 되었으며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의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만나 은밀히 가쓰라-태프트 협약을 맺었다.
1908년 T.루스벨트의 추천으로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당선되었다.
트러스트 규제 등에 업적을 남겼으나, 그 후 루스벨트나 공화당 혁신파와 대립, 1912년 선거에서 다시 지명을 받았으나 W.윌슨, 루스벨트에 이어 3위로 패하였다.
1921∼1930년에는 대법원장을 지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1대 ~ 10대 이름 영문명 재임기간
1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 1789.04 ~ 1797.03
2대 대통령 존 애덤스 John Adams 1797.03 ~ 1801.03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1801.03 ~ 1809.03
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 James Madison 1809.03 ~ 1817.03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 James Monroe 1817.03 ~ 1825.03
6대 대통령 존 애덤스 John Quincy Adams 1825.03 ~ 1829.03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 Andrew Jackson 1829.03 ~ 1837.03
8대 대통령 마틴 밴 뷰런 Martin Van Buren 1837.03 ~ 1841.03
9대 대통령 윌리엄 해리슨 William Henry Harrison 1841.03 ~ 1841.04
10대 대통령 존 타일러 John Tyler 1841.04 ~ 1845.03
11대 ~ 20대 이름 영문명 재임기간
11대 대통령 제임스 포크 James Knox Polk 1845.03 ~ 1849.03
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 Zachary Taylor 1849.03 ~ 1850.07
13대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 Millard Fillmore 1850 07 ~ 1853.03
14대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 Franklin Pierce 1853.03 ~ 1857.03
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 James Buchanan 1857.03 ~ 1861.03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Abraham Lincoln 1861.03 ~ 1865.04
17대 대통령 앤드루 존슨 Andrew Johnson 1865.04 ~ 1869.03
18대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 Ulysses Simpson Grant 1869.04 ~ 1877.03
19대 대통령 러더포드 헤이스 Rutherford Birchard Hayes 1877.03 ~ 1881.03
20대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 James Abram Garfield 1881.03 ~ 1881.09
21대 ~ 30대 이름 영문명 재임기간
21대 대통령 체스터 아서 Chester Alan Arthur 1881.09 ~ 1885.03
22대 대통령 스티븐 클리블랜드 Stephen Grover Cleveland 1885.03 ~ 1889.03
23대 대통령 벤자민 해리슨 Benjamin Harrison VI 1889.03 ~ 1893.03
24대 대통령 스티븐 클리블랜드 Stephen Grover Cleveland 1893.03 ~ 1897.03
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 William McKinley 1897.03 ~ 1901.09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Theodore Roosevelt 1901.09 ~ 1909.03
27대 대통령 윌리엄 태프트 William Howard Taft 1909.03 ~ 1913.03
28대 대통령 토마스 윌슨 Thomas Woodrow Wilson 1913.03 ~ 1921.03
29대 대통령 워런 하딩 Warren Gamaliel Harding 1921.03 ~ 1923.08
30대 대통령 존 쿨리지 John Calvin Coolidge Jr. 1923.08 ~ 1929.03
31대 ~ 40대 이름 영문명 재임기간
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 Herbert Clark Hoover 1929.03 ~ 1933.03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Franklin Delano Roosevelt 1933.03 ~ 1945.04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 Harry S Truman 1945.04 ~ 1953.01
34대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 하워 Dwight David Eisenhower 1953.01 ~ 1961.01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 John Fitzgerald Kennedy 1961.01 ~ 1963.11
36대 대통령 린든 존슨 Lyndon Baines Johnson 1963.11 ~ 1969.01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 Richard Milhous Nixon 1969.01 ~ 1974.08
38대 대통령 제럴드 포드 Gerald Rudolph Ford, Jr 1974.08 ~ 1977.01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 Jimmy Carter 1977.01 ~ 1981.01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Ronald Wilson Reagan 1981.01 ~ 1989.01
41대 ~ 44대 이름 영문명 재임기간
41대 대통령 조지 부시 George Herbert Walker Bush 1989.01 ~ 1993.01
42대 대통령 빌 클린턴 William Jefferson "Bill" Clinton 1993.01 ~ 2001.01
43대 대통령 조지 부시 George Walker Bush 2001.01 ~ 2009.01
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 Barack Hussein Obama II 2009.01 ~
[출처] 윌리엄 태프트 [William Howard Taft ] | 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