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월배면의 모습
1970년대 월배읍의 모습( 같은 장소이다. 멀리 당산나무가 보인다.)
2006년 대구시 달서구 월배의 모습
가무내 가는 길 ( 2006년 대한지적공사 공모전 수필부문 우수상 작품)
추석 연휴 끝이라 여기저기서 안부 전화가 왔다. 객지에 있던 지기들이 하나 둘 합천식당으로 모여들었다. 명절 연휴가 시작되면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여 그동안 안부를 묻곤 한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다. 일찍 온 이들은 벌써 반기는 눈부터 붉다. 건축일 하는 주인아저씨까지 합세하여 옛 동네이야기에 입들이 무성하다. 우리보다 십 여 년 정도 위인 주인아저씨가 자기 동네자랑에 침까지 튀기며 열을 올린다. 그런 모습을 합천 아지매는 젊은 사람들 놀음에 끼지 말라고 자꾸 눈 시늉으로 빠지란다.
아저씨가 살던 동네 가무내는 우리와는 지척지간 이었다. 면소재지가 달랐을 뿐이지 인접해 있어 이웃이나 다름없었다. 아파트 부지로 정해지자 곧 그 경계는 무너지고 두 개 면이 한 동네로 바뀌게 되었다. 흰색과 붉은 색으로 얼룩얼룩한 폴 대를 옮겨가며 측량을 할 때가 좋았다고 아저씨는 눈을 지그시 감고 뭔가 회상하고 있었다.
면사무소가 다르다 보니 자연적 갈등은 따랐다. 정월 대보름 때는 '강산 탈환 달불싸움'이 벌어졌다. 처음엔 흙덩이로 시작하여 한창 무르익으면 돌로 바뀌면서 불 든 깡통들이 하늘로 날라 다녔다. 수 십 명의 아이들이 각자 깡통을 열 개 이상을 가지고 다녔으니 가히 그 광경을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이러니 승자의 환희는 말로 어찌 표현하겠는가. 일단 고지가 탈환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상대를 인정해 주었다. 지금의 기억으론 한 해씩 돌아가며 산을 정복했으니 당시의 대장들이 사전모의를 하지 않았나 싶었다.
이야기는 우리 동네 백화점 들어오는 자리에서, 아저씨 동네인 가무내까지 그 꾸불텅한 뱀 모양의 길 곳곳에 숨겨져 있는 추억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길이래야 1 km 남짓 되는 거리였지만 사연은 족히 수 십 리는 될 것 같았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아파트 벨트에 속해버린 회색의 땅을 더듬으며 우리는 옛 여행을 떠난다. 취기는 붉게 올라 만면에 미소들이 가득 어려 있다. 도중에라도 자기 이야기를 할라치면 추임새처럼 끼워 넣으면 된다. 어디서 한숨소리까지 들려온다.
백화점 자리는 우리 동네 미꾸라지 잡던 뒷도랑 이었다. 비 온 뒤 통발을 설치하고 물꼬에 역류해 오르는 놈을 잡기 위해 가만히 손가락을 펴서 입구에 대고 있노라면, 살이 오른 놈들이 미끈거리며 올라 올 때의 희열감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리요. 그런 추어탕을 땀 흘리며 먹는 맛은 또한 일품이었다. 넉넉지 못했던 시절들이라 아이들의 버짐 낀 얼굴은 이 한 그릇으로 치유되었다.
그 길을 따라 오르면 도랑 앞에 붉은 양철지붕이 있었다. 비가 많이 오면 항상 그 집 마당엔 물이 차는 그런 낮은 지역이었지. 언젠가 그 집에 놀러 갔다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도랑을 건널 수 없어 집안에 갇혔다. 방안에서 양철지붕 때리는 소리와 라디오에서 들리는 간첩소식에 혹여 여기에까지 오면 어떻게 하느냐며 문고리를 꽉 잡던 기억들, 무서움을 이기려고 만들어 내던 놀이들, 고함 소리들. 그 집의 형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물에 빠져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 버렸다.
그 집을 올라 지금은 상고 자리, 공고 자리는 능금밭이었다. 채 익지도 않은 능금을 따다가 들켜 주인집에 불려갔다. 한참을 꾸중을 듣고 실컷 먹어보라던 그 능금, 이가 곱아 밥도 못 먹었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턱이 잘 닫혀 지지 않는다.
이제 고개를 지나가야 한다. 헉헉거리며 마차도 합승버스도 쉬어 가야 할 월촌 고개 마루. 예나지나 고개엔 주막이 있었다. 거기엔 머리에 수건 쓴 살짝곰보 아지매가 살짝살짝 동네 사내들 얼굴 마주하며 교태를 부렸다.
"몰라 우리 동네 모 서방님은 그 여우같은 여편네한테 돈 전 낫게 갖다 바쳤다 네. 고개 넘어 오려면 목마른 놈들 우짜겠노. 답답하니까 샘을 팠겠지. 소문 더 이상 내지 말거라, 어떤 이 염장 지를 일이여."
차츰 차츰 이야기가 무르익자 더욱 신이 나 " 맞다, 맞다. 하이고 내가 술 몇 병 더 살게." 그 사이 몇 친구들이 더 모였다. 악수를 하고 얼싸안기도 한다.
고개를 지나 돌아가는 길옆에 타일공장이 있었다. 5학년 때 짝꿍이던 그 아이가 살던 집이었다. 자가용을 타고 다니던 얼굴이 하얗던 그 아이가 시내학교로 전학 가던 날 이유 없이 사금파리로 흙담을 그어대며 '가시나 바보'라며 속울음을 삼켰던 건 무슨 이유였을까. 지금은 얼마나 변했을까. 여러 해 동안 동창회 때 기다려봤지만 그 아이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이 말은 차마 하지 않았다. 기억의 이편에서 피식 웃어볼 뿐이었다.
길을 타고 들어가면 결핵요양원이 있었다. 당시엔 결핵환자들이 참 많았지. 흰 마스크 끼고 얼핏얼핏 보이는 그들과 얼굴이라도 마주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 같아 빨리 지나가곤 했지. 못 먹어서 나는 병이라고 우리 동네에서도 애먼 개들이 많이 수난을 당하는 것을 보았다.
이젠 동네 어른들이 가장 마음 설레던 제일 양조장이다. 붉은 벽돌 벽이 안 쓰러지려고 버티고 서 있었지. 동네 아이들과 아낙들은 별로 탐탁히 여기지 않던 제일 양조장. 그렇게 사이가 좋던 분들끼리도 싸움이 자주 나던 곳이었다. 그 당시 양조장 사장은 동네 큰 유지였었지. 길·흉사 때 막걸리 부조가 큰 것이었다.
아뿔싸, 그냥 지나칠 뻔했네. 제일 양조장 앞 '똥 사건'은 영원히 내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아버진 나를 데리고 시내로 똥 푸러 자주 가셨어. 돈도 벌고 밭에 거름으로 뿌리기도 하였지. 그 날도 여름 뙤약볕이 내려 쬐는데 양조장 앞을 지나 다가오는 차를 피하려다 그만 손수레가 기울어지는 바람에 짚으로 막은 똥 장군의 입구가 열려 아스팔트에 그만 쏟아 버렸지 뭐야. 뒤에서 미는 내 옷 버린 것은 물론이고 온 길바닥에 똥 천지가 되어 버렸어. 지나는 모든 이들이 코를 잡고 난리가 났지. 혹 나는 아는 아이라도 만날까 그게 더 창피했어.
웃고 난리들이다. 눈물까지 찔끔거리고 있다.
이제 목적지가 코앞이다. 양조장 뒤를 돌아가면 솔 못이 있다. 유난히 말나물이 많았던 그 못, 두레박 건지는 나일론 끈으로 휘휘 돌려 당기는 그 갈색의 향기 나던 말나물. 그런데 동네 젊은 새댁이 빠져 죽어 그 끈에 달려 나온 후부터는 그 말나물의 맛은 더 이상 볼 수 없었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던 그 신랑의 포효모습. 동네 돌아다니며 며느리 욕하던 시어머니도 이젠 모두가 긴 역사에 묻히고 솔 못에 비치는 야산 꼭대기에 홀로 서서 증명이라도 해줄 소나무 한 그루조차도 어느 산으로 옮겼는지 알 길이 없다. 그 산을 끼고 가무내 동네가 자리 잡고 있었다. 비록 거리는 짧지만 추억으론 밤새울 것 같은 여운들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동네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 길과 주변 '산 8번지' 일대와 가무내 동네를 측량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온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신작로가 뚫리고 근처에 대학교가 들어온다고도 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갑자기 큰돈이 들어와 부자라도 된 듯 기뻐하였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알 수 없는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멀쩡하게 직장을 잘 다니던 청년들은 퇴직을 하고 목돈으로 장사를 하려고 도시로 나갔다. 명절 때나 한번씩 찾던 집안과 형제들이 귀한 생선이다 과일을 들고 찾아왔다. 대대로 농사만 짓고 살았던 노인들은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 두 해가 지나자 자식들은 파산하고 친척들도 멀어져갔다. 드디어 노인은 땅 잃고 돈 없어지고 빈손이 되어 버려 최후의 선택을 하는 이들이 하나 둘 생기고 말았다.
아저씨의 집도 이 일대 많은 토지를 가졌다고 했다. 땅으로 인해 사이가 나빠진 형제간의 이야기도 덧붙이며 줄담배를 태운다. 듣지 않을 것 같던 합천 아지매도 기어이 촉촉해진 눈으로 한 마디 거들었다.
"조상이 물려준 땅들을 측량을 해서 분배해 준 대로만 가졌다면 얼마나 좋았겠어.
쓸데없는 욕심이 화를 불러일으킨 것이지"
굳은 살 박힌 아저씨의 손을 바라본다. 이제 이런 이야기를 언제까지 더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저리단다. 어디 아저씨만 그랬겠는가. 우리는 말없이 술잔만 비우고 있었다. 가무내 가는 길이 자꾸자꾸 엷어져 갔다. 웃고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원고지 20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