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한강 강가는 서울과 삼남지방을 잇던 나루터였는데
표지석 남아있다. 옛날엔 도성과 시흥, 수원 방면 사이의
간선도로를 이어주던 나루터였고 1960년대부터 유선장
으로도 이름난 곳이여서 봄 여름 가을엔 선유객(船遊客)
들이 많아서 북치고 장구치는 놀이배들이 많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88올림픽도로가 생겨서 옛 나루터와 유선장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현재 동작구 노량진동의 강변에 있었던 도선장(渡船場)으로 일명 노들나루, 노량도(露梁渡), 노량진(鷺梁津), 노도진(露渡津), 노도(露渡)라고도 불리었다. 본래 나루는 강 북쪽인 현재의 서부이촌동 강변에도 있었으니, 이 나루는 도성과 시흥 · 수원 방면 사이의 간선도로를 이어 주는 길목이다. 고려 이전부터 행인들의 왕래가 많았다고 보이는데 조선초기에 이르러 정부에서 이를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즉 처음에는 개인소유의 나룻배가 10척이 있어서 돈을 받고 행인을 건네주었다. 태종 14년(1414) 광진과 더불어 이곳의 관리자로서 별감을 처음으로 파견하였고 아울러 관선 15척을 비치하여 진(津)에 소속된 진부(津夫)들로 하여금 배삯을 받지않고 건네주도록 하였다[《태종실록》 권28 태종 14년 9월 임신조(壬申條)]. 정부에서 진도를 관리하게 된 것은 행인들의 도강을 편하게 하기 위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 길목을 지키고 수상한 자의 내왕을 기찰하고자 한 데도 목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별감과 진부들이 기찰을 빙자하여 행인을 불편하게 하니, 사람들은 배삯을 내고서라도 사선(私船)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도승(渡丞)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여타의 나루와 같이 군영(軍營)에서 관리하면서 별장이 책임자로 파견되었다. 소관은 금위영(禁衛營) 소관이었다.
노들나루 남쪽 언덕에는 노량원(露梁院)이란 여관이 있어서 도성을 오가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쉬어 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루 북쪽 강변에는 넓은 백사장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새남터라고 하니 일찍부터 사형장으로 이용되었다. 이는 나루를 오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처형 과정을 보임으로써 경계심을 갖도록 한 조처였다. 일찍이 세조 즉위에 반대한 사육신이 여기에서 처형되었고 근세에는 많은 천주교도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2년 임진(1412,영락 10) 9월18일 (경자) 기사 -환궁하다
환궁(還宮)하였다. 부평(富平) 들에서 사냥하고 돌아와 노량진 나루터[露渡]에 이르러 누선(樓船)에 같이 타니, 경기 관찰사 권완(權緩)이 술을 올리고 풍악을 울려 줄거움을 극진히 하였다. 임금이 조영무(趙英茂)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위무(威武)로서도 굴복시킬 수 없고, 빈천(貧賤)으로도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하였는데, 달래더라도 마음을 움직일 수 없고 위엄으로도 굴복시키지 못할 자는 오직 경(卿)뿐이오,” 밤을 틈타서 상왕의 이어소(移御所)에 이르러 봉사(奉辭)하고 환궁하였다.
참고문헌
1. 서울六百年史 http://seoul600.seoul.go.kr/ "노량진" 문화사적/ 진도 06
2.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노량진"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도성과 시흥, 수원 방면 사이의 간선도로를 이어주던 나루
출처 : (문화원형백과 개발, 2010.,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전통문양 식물문 국화문
국화문 - 용양봉저정 국화정
국화는 동양에서 재배하는 관상식물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된 꽃이며 매화, 난초,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의 하나로 귀하게 여겨 왔다. 원산지는 중국이며 재배를 시작한 시기는 당대이전으로 추정된다. 국화는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고려 충숙왕 때 전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국화에 대한 중국의 문화적 인식과 관념도 그대로 전해졌다. 국화 중에 특히 황국은 신비한 영약으로 이를 달여 마시면 장수한다고 믿었으며,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환갑, 진갑 등의 헌화로도 사용되었다.
국화문은 수술부분을 중심으로 작고 얇은 꽃잎이 촘촘히 붙어 있어 도안화하기에 매우 적당하다. 절지형 국화무늬는 꽃과 끝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잎을 줄기에 연결시켜 완전한 국화로 표현하였는데 주로 11, 12세기의 상감청자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꽃부분만을 따서 도안화한 국화무늬는 13세기를 기점으로 출현하였다. 국화무늬는 중심 무늬외에도 보조무늬로 사용된 예가 많은데 이러한 형상은 도안화하기 쉬운 국화꽃의 생김새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측된다. 보조무늬로 사용된 경우에는 주로 꽃잎만을 구성하거나 꽃잎을 중심으로 작은 잎들이 조그맣게 붙어 있는 형태이다.
국화는 맑은 아취와 높은 절개를 상징하는 꽃이다. 또한 늦은 서리를 견디면서 그 청초한 모습을 잃지 않는 국화의 생태는 길상의 징조 또는 상서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국화는 고려시대 도자기와 나전칠기 등에서 많이 나타난다. 국화가 핀 뜰에 참새가 날아드는 풍경은 민화 등에서 주로 그려졌다.
(전통문양 식물문 국화문)
효사정[孝思亭]
효사정(孝思亭)
天 高 眞 好 日 (천고진호일) 하늘은 높고 진정 좋은 날씨에
初 上 孝 思 亭 (초상효사정) 처음으로 효사정에 올라 본다
左 右 忠 義 園 (좌우충의원) 좌우로 의절사와 현충원 있고
北 南 山 水 屛 (북남산수병) 앞뒤로 산과 강물이 병풍처럼
出 仕 佐 名 君 (출사좌명군) 조정에서는 어진 임금 모셨고
入 家 慕 兩 塋 (입가모양영) 집에서는 부모님 묘소 사모해
世 間 明 道 亂 (세간명도난) 세상은 밝은 도리 어지러우나
恭 肅 傳 佳 聲 (공숙전가성) 선생은 충과 효를 보여주었네
<감 상>
서울 동작구 흑석동 한강가에 정자가 하나 있다. 효사정이다.
고려 말에 태어나 세종 25년에 향년 68세로 별세하신 '노한' (盧門안에 工자)
선생을 기리는 정자이다.
선생의 자는 有隣(유린), 호는 孝思堂(효사당)이며 조정에서 받은 시호는 恭肅
(공숙)에 본관은 교하(交河)이다. 태종과 동서지간으로 조정에 나와 여러 벼슬을
역임하다 세종 조에 우의정을 끝으로 멀리 개성 근처에 있다는 부친의 묘소를
우러르며 자주 눈물을 보였다고 전한다.
정자 이름도 선생의 아호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주변에 의절사와 현충원이 있어서 忠과 孝를 상징하는 지리적 위치에 서있으며
한강 조망도 뛰어나다. 자주 이 정자앞을 지나면서도 가보지 못하다 일부러 틈을
내 처음 찾아 본게 2014년 이었다. 이 정자의 현판 글씨는 故 노태우 대통령
글씨이며 선생의 후손 중에 대통령을 배출하게 된 셈이다.
이시는 5언율시 평기식으로, 靑운목에서 亭과 屛을 庚운목에서
塋과 聲을 운자로 사용해서 상통운(相通韻) 작법을 활용해 보았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노한이 건립한 정자.
개설
효사정은 조선 전기 문신인 노한(盧閈)[1376~1443]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시묘살이를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시묘살이 이후에는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개성에 묘가 있는 아버지를 추모하는 공간이었다고 전해진다. ‘효사정’이라는 명칭은 강석덕(姜碩德)[1395~1459]이 지었으며, 아들 강희맹(姜希孟)[1424~1483]이 지은 기문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있다.
위치
효사정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55[흑석동 141-2], 흑석역 1번 출구 앞 효사정공원 안에 위치해 있다.
변천
조선 전기에 효사정은 정인지(鄭麟趾)·서거정(徐居正)·김수온(金守溫) 등 여러 학자와 문인들이 시문을 남긴 공간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는 효사정 자리에 한강신사를 세웠다. 해방 후 1993년 효사정을 복원하였는데, 현재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을 참조하여 추정한 위치이다. 효사정 현판은 노한의 17대손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글씨이다.
현황
현재 효사정은 1993년 신축한 것으로 효사정공원 안에 위치하였으며, 서울특별시 우수경관 조망명소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초기부터 조성된 한강 유역의 정자들이 접대와 풍류 등을 위한 것에 비하여 효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기능하였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참고문헌
『동작구지』(서울특별시 동작구, 1994)김선화,
『조선시대 서울 한강 누정의 장소성에 관한 연구』
(상명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2-19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