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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7 - 후금 홍타이지 조선을 침략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키다!
1626년 9월 30일에 누르하치가 급사하자 효자고황후 (孝慈高皇后) 의 아들로 누르하치의 8남이자
4명의 버일러(귀족) 중에 네번째 버일러(Duici Beile) 였던 홍타이지가 2남이자 대버일러인
다이샨의 지지로 한(汗) 의 지위를 계승해 2대 황제에 오르면서 약탈 기마족의 방식을 뜯어고칩니다.
홍타이지는 즉위후 한족과 여진족의 생활구역을 분리해 충돌을 줄였으며 항복한 한족도 처벌 감경에
호적을 주고 신변과 재산을 적극적으로 지켜주며 한족 관료들에게 장원, 가옥, 노비등 재산을
안겨주며 중용했고 새로 창립한 팔기군에도 만인팔기와 별개로 한족으로 구성된 한인팔기를 만듭니다.
한족을 받아들인 것을 넘어 누르하치가 이를 갈던 명나라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데도 적극적
이었으니.... 내삼원을 만들어 내정을 강화하고 6부와 도찰원, 이번원을 설립하는등
정부 체제를 개혁해 중앙 정부의 구색을 갖추었고 새로운 인재 발굴을 위해 과거제도 도입합니다.
홍타이지는 과거제로 수백명의 한인 관료를 등용했으며 누르하치가 사로잡아 노예로 만들었던 전직
관료나 지식인들을 수소문해 200여명을 면죄 및 복권시켜 관직을 내렸고 또한 한족
신하의 조언을 받아들여 후금이 아닌 '청나라' 로 국명을 바꾸며 국가로서 고유한 정체성을 갖춥니다.
누르하치 재위 시절 중용되었던 만주족 출신 권력자들에 대해서는 냉혹한 편이었으니 황제의 입지가 정반대
였기 때문인데.... 누르하치는 8개 가문과 4명의 버일러, 한명 지도자가 서로 조화롭게 통치해
나가는 것이었으나 권력 기반을 굳힌 홍타이지 입장에선 자신의 권위를 넘볼만한 존재를 제압해야 했습니다.
그는 2대 버일러 아이신기오로 아민과 3대 버일러 아이신기오로 망구르타이를 숙청하고 대버일러
이자 자신의 후견인이기도 했던 아이신기오로 다이샨 마저 죽이지만 않았을 뿐
권력을 축소시켰으며 팔기회의에서도 특정 기 (旗) 의 지도자가 아니라 최종 결정권자가
되었으니 정황기와 양황기의 힘을 등에 업은 청나라의 명실상부한 최고 통수권자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홍타이지는 몽골 제국에 멸망한 금나라의 전철을 밟지않기 위해 명나라 보다는 내몽골을 먼저 평정하기로
결정했으니 링단 칸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다구르, 어웡키 등 다양한 몽골 부족들을 결혼
동맹이나 군사 동맹으로 포섭하거나 정복했고, 양면전술을 쓰며 링단 칸을 몽골 내에서 고립시켜 나갑니다.
누르하치 재위 시절 후금은 국경을 맞댄 여러나라와 알력다툼을 벌였는데, 내몽골 일대를 차지한 차하르 몽골도
그중 하나였으니, 사르후 전투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국경지대에서 분쟁은 있을지언정 큰 다툼을 벌이는건
기피했으나 대패한 명나라가 다급해져 차하르 몽골에 혜택을 주는 대신 지원을 요청하면서 전면전이 발발합니다.
내몽골의 링단 칸은 명나라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내륙 할하족과 코르친족 5개 부에서 1만명 대군을 차출해
철령으로 보냈으나, 이들이 도착했을 땐 이미 후금에 의해 철령이 함락당한 이후였고,
몽골 지원군 마저 사기가 충천한 후금군에 의해 역으로 격파당하면서 손해만 본채 다시 내몽골로 후퇴합니다.
홍타이지는 몽골 외에도 조선이라는 또다른 걸림돌이 남아있었으니..... 비록 땅은 작을지언정
얼마전 왜란을 거치며 군사적으로 강성해진데다가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높았기에 청나라가 명나라와 전면전을 개시하면 조선이 청나라의 배후인 만주를 칠게 뻔했습니다.
이 때문에 홍타이지는 내몽골 정리를 마치고 1627년에 아이신기오로 아민에게 3만 대군을 주어 조선을 침공하니
정묘호란인데... 링딘 칸을 축출하고 내몽골에 영향력을 뻗치기 시작했다지만 완전히 내몽골을 정복하지는
못했고, 자신의 권위를 넘볼 여지가 있는 버일러들을 일소하지도 못했으며 국가 내에 큰 기근이 들기도 했습니다.
나라가 내우외환 지경이었지만 조선은 그 이상으로 인조반정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이괄의 난으로 광해군을 거쳐
형성된 북방 방어선의 무력화등 약해진 상태라, 이괄군의 잔당을 통해 소문을 접한 홍타이지는 무리해서라도
조선을 찔러볼수 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후금에 유리하게 강화를 체결해 형제관계를 맺으니 한시름을 덜게 됩니다.
다시 몽골을 완전히 제압하게 되는데 링단 칸이 몽골인들 사이에서 주류인 라마불교 황모파가 아닌 적모파로
개종해 반감이 컸던 것도 큰 영향을 끼쳤으니, 이미 전세는 홍타이지에게 기울어진 뒤였고,
링단칸은 도망을 거듭하다가 1634년 간쑤성에서 병사하니 수뇌가 죽어 와해된 차하르 몽골을 복속시킵니다.
홍타이지는 링단 칸의 아들 에제이를 부마로 삼고 대원 (大元) 전국 옥새를 얻어 1636년 4월 11일, '관온인성
황제' 라 칭제하고 국호를 다이칭 구룬 (大淸 대청) 으로 변경했으며 주션 (Jušen: 여진) 이란
부족명을 금지하고 만주족으로 변경했는데, 청나라는 1629년 부터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을 직접 공격합니다.
정묘호란 8년후 후금은 조선땅 가도에 똬리 튼 명나라 모문룡을 쫓아내고 명나라와 전면전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불안 요소가 남아있던 조선에 1635년 12월부터 '봉서 (奉書)' 와 '치서 (致書)' 문제를
트집잡아 공경을 요구했으며, 1636년 2월에는 존호례에 조선국왕의 동참을 요구하며 군신관계 수립을 추진합니다.
인조 정권이 반발해 화친이 단절되고 전쟁에 대비할 것을 알리는 인조의 교서가 청 측에 입수되며, 4월 존호례에서
조선 사신들이 고두를 거부해 양국 관계는 완전히 파탄나자 홍타이지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쳐들어오며, 삼전도에서 조선 국왕의 항례를 받아 신하국으로 만들고 명과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키는데 성공합니다.
병자호란은 음력으로 1636년 12월 8일부터 1월 30일까지, 양력으로는 1637년 1월 3일부터 50여일간 진행된
전쟁이니 정묘호란 종전후 10년만에 발발한 전란으로, 청은 병자호란 승리로 조선을 굴복시켜 번국
으로 삼고 조선은 그 대가로 군사적ㆍ경제적 부담과 공녀 차출을 강제당하게 되며 명나라는 7년후 멸망합니다.
병자호란은 '거란의 2차 침입' 때와 비슷하니 인조는 고려 현종 처럼 신속하게 달아나지 못했는데,
그보다는 청나라의 진격 속도가 예상을 초월해 너무 빨랐으니 소모전을 벌일 때까지 시간을
끌지도 못했으며 사령탑으로 기용한 측근들이 싸움을 회피하거나 패배해 청군을 막아내지 못합니다.
조선이 항복하긴 했지만 완전히 명말하지 않은 이유는 만주족(여진족) 은 인구가 100만도 되지 않으니 조선에
군대를 오래 주둔시킬수가 없었고, 두번째 청은 자기나라 보다 인구가 100배나 되는 중국 명나라를 정복
해야 하니 2개 전선을 유지하기 어려운데다가 당시 조선에서 천연두가 발생해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청이 조선을 침략한 이유는 거란의 요나라와 여진족 금나라에 몽골족 원나라가 침공한 이유와 같으니
그들은 조선 보다 100배나 더 약탈할게 많은 부유한 중국을 정복하려는데 인구가 워낙 적다
보니, 중국에 들어가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면 조선이 송, 명과 연합해 비어있는 근거지
만주를 공격하면 진퇴양난이니..... 사전에 굴복시켜 후환을 없애기 위함이지 정복이 목적은 아닙니다.
명나라의 모범적인 조공국인 조선을 통해 위상을 정립하려는 홍 타이지가 인조에게 존호
문제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이것이 강경한 척화론을 촉발하여 후금
사신들의 도주와 절화교서의 탈취를 초래했으니 호란으로 이어지는 동기가 됐다고 봅니다.
또 홍타이지의 존호례에 참석한 조선 사신들이 배례 거부를 한 것이 중대한 계기 및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고
보며, 이들이 국서를 버린 것을 계기로 양국의 국서 교환이 단절됐는데 공물 수량을 두고
양측이 마찰을 빚은 것은 수량 자체가 아니라 상승하는 후금의 위상을 조선에게 반영하려는 것이 본질입니다.
병자호란에서 청의 선봉 부대가 기병으로 전격전을 시도한 것은 요나라와 유사한데... 척화파는 청이 조선을 침공한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고 청의 군대가 밀어닥쳐도 허세라고 생각했으며, 심지어 청 태종이 직접 왔다고 해도
믿지 않았으니 “청 태종이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오겠는가. 이 전쟁은 변방의 장수가 감정적인 이유로 침공한 것이다”
조선 지식인들은 역사 공부를 중요시 했으니 과거시험에도 나오며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그런 사람들이 거란전쟁의 교훈은 왜 망각했을까요? 이념과 사상을 먼저 세우고, 역사에서
교훈을 찾았기 때문으로 역사를 배운다기 보다는 역사를 이용하니 목적에 맞춰 현실을 왜곡하기 때문 입니다.
청은 전쟁을 이겨 인조의 항복을 받고도 조선의 지배계층과 집권세력을 교체하지도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거나 강제로 영토를 빼앗지 않았으니.... 애당초 청의 목적은 명나라이지 조선이
아니였기 때문인데, 조선 집권 세력은 이후에도 청이 무슨 이유로 조선을 공격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1636년 12월 25일 홍 타이지가 조선 정복에 참전하는 팔기군에 하달한 군령에 따르면, 절과
능묘를 파괴하지 말고 순응하는 자는 죽이지 않으며 항복한 성에서 약탈을 금지하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가해를 금지하고, 항복한 자를 잘 보살펴 주며 변발시킬 것을 명령했습니다.
청나라는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 을 ‘군신(君臣) 의 의(義)’ 로 개약(改約) 하자고 요구해왔을 뿐만
아니라, 황금·백금 10,000냥, 전마 (戰馬) 3,000필 등 종전 보다 무리한 세폐 (歲幣) 와
더불어 정병 (精兵) 30,000명까지 요구해오는등 조선측에서 도저히 수용할수 없는 무리한 요구들을 합니다.
충분한 소와 말을 보내지 않으면 평양과 한성까지 진격하겠다며 조선을 협박하기도 하였고,
장차 명나라 정벌을 염두에 두며 이와 함께 후금의 오랜 숙원 중에 하나인 수군 함선을
보내라는 요구도 하는 등 반복적인 무리한 요구들로 조선내의 반청감정을 계속 고조시킵니다.
"우리나라가 천조 (天朝 명나라) 에 의리상으로는 군신 (君臣) 관계지만 정리상으로는 부자지간과 같다.
임진왜란때 위급한 상황을 구제해준 큰 은혜가 있는데 말해 무엇하겠는가. 천조에 사변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우리나라 군신들로서는 역량을 총동원해 달려가 선봉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지만 병(兵) 과
농(農) 을 분리하지 않아 아침에 명을 내려 집결시키기는 불가능한데 노추 (老酋) 는 실로 천하의 강적이다“
" 명나라는 임진왜란때 구원해준 망극한 은혜가 있으니 나라가 망할지언정 보내지 않을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병력을 총동원해 보냈다가 적이 충동격서 (衝東擊西) 무인지경 (無人之境) 들어오면
낭패인데, 중국이 병화 (兵禍) 를 입어 구원을 요청했다면 나라의 존망이나 이해 따위는 돌아
보아선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이 적의 죄를 물으려 하니 일의 완급에 차이가 납니다." 《광해군일기》
16세기말 임진왜란을 명나라 구원으로 극복한 일은 사대관을 심화시켰으니 조선 사회에서 명에 대한 사대는 외교가
아닌 윤리, 도덕의 문제였는데, 1619년 명과 후금이 충돌했을때, 파병을 반대한 광해군은 물론이고, 신료들이
조선군의 허약함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원군의 파병을 지지했던 것은 오로지 '대명 의리' 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광해군이 대명 사대에 소홀하다는 명분으로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들의 인조정권은 친명배금을 추구하는데, 광해군을
왕위에 옹립한 이이첨등 대북도 열렬한 친명배금주의 성향이었니 광해군때 후금과 관계에 "나라가 망할지라도
후금과 친선은 못맺습니다!" 라 했으니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사르후 전투 파병 결정에서 알수있듯 한계가 명확합니다.
조명 연합군이 사르후에서 참패한 후에도 조선 사대부들은 당파를 막론하고 '오랑캐' 이자 '역적' 인
후금에 비타협적 자세를 고수했으니, 조선 문신들이 명 황제의 징병칙서를 거절한 광해군의
왕명을 거부하여 파업을 벌이고 계해정변까지 초래한 것이며, 가도의 모문룡 휘하 명군의
횡포를 방기하고 재정을 쏟은 것과 병자호란 직전에 청 사신을 박대한 것도 그런 맥락 이었습니다.
인조대 군신들은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조선이 단독으로 후금 침략을 물리칠 가능성이나 명의 군사적
지원 가능성을 낮게 보면서도, 국가의 존망 보다는 상국을 섬기는 대의 (大義) 가 더
중요하다며 척화로 나갔으니 후금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밀려 정묘화약을 체결할수 밖에
없었으나 이귀, 최명길등 신료들을 참수하라는 상소가 잇따를 정도로 주화론자들의 입지는 좁았습니다.
병자호란을 앞둔 시기 조선의 신료와 사대부들은 사대를 위해서는 나라가 망해도 상관없다는 극언을
서슴치 않았으니 홍문관에서는.... "오랑캐 사신 용골대가 가지고 온 글에 존호 (尊號) 를
확정했다고 칭했는데, 이 말이 어찌하여 이르게 되었습니까. 신들은 적이 통곡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어찌 예의의 나라로서 개돼지 같은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이고 마침내 헤아릴 수 없는 욕을
당하여서 조종에게 수치를 끼친단 말입니까. 어찌 친히 적의 사신을 접견하시어 부도한
말을 듣는단 말입니까. 비록 나라가 망하더라도 천하 후세에 명분이 설 것입니다. ” - 인조실록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되자 척화론자였던 김류는 태도를 바꿔 "나가면 위태로울 확률이
반 보존될 확률이 반인데 계속 버티면 백이면 백 다 망할 겁니다." 라며 현실을 살폈지만,
대간들은 항복을 강하게 반대했으니, 대사헌 김수현은 하민 (下民) 들이 어육 (魚肉) 이
되더라도 임금께서 출성하시는 것을 불가하다며 명분론에 젖어 현실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김상헌이 말하기를 “예로 부터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죽고 망하는 것은 참을수
있어도 반역을 따를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 어떤 사람이 ‘원수를 도와 제 부모를 친 사람이 있다.’
고 아뢴다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유사 (有司) 에게 다스리도록 명하실 것이니 천하의 공통된 도리 입니다.”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 께서는 의리를 들어 회군(回軍) 하여 2백년의 공고한 기업을 세우셨고, 소경 대왕
께서는 지성으로 사대(事大) 하여 임진왜란때 구원해준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의리를 버리고 은혜를 잊는다면
장차 어떻게 지하에 계신 선왕 (先王) 을 뵐 것이며 어떻게 신하로 하여금 국가에 충성을 다하라고 할수 있겠습니까”
명ㆍ청 교체의 전야에, 조선 지식인들이 임진왜란때 형성된 '재조 (再造)' 의 기억을 떠올리며 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데에는 '중화 (中華)'와 '이적 (夷狄)' 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화이론 (華夷論)
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었으니 명의 위세가 소멸하는 상황에서 조차 이런 현실을 인정할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인조 정권의 외교 정책은 명나라와 청나라 어느쪽도 만족시키지 못했으니 1629년에
명은 “조선이 왜노와 통혼하고 노적에게 정성스럽게 대한다 (媾倭款奴)" 는 말이 그들 조정에서
나올 정도로 조선을 의심하는 태도가 있었으며 조선의 행보에 만족하지 못한 것은 후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르게 보자면 조선이 급한 위협을 피하고자 청나라를 '황제의 나라' 로 인정한 뒤, 명나라와 청나라 간의 전쟁이
명나라 또는 그 뒤를 계승한 새로운 한인 (漢人) 왕조의 승리로 끝났다면 어땠을까? 임진왜란 당시 파병
해준 '은혜를 배신' 한 번국 (藩國) 에 대한 보복의 칼날은 병자호란을 능가할수도 있으니 무서웠을 수도 있습니다.
인조는 1636년 2월 청을 황제국으로 인정하라는 요청에 대해 '대청국황제 (大淸國皇帝)' 라 부르진 못하겠으나
'청국한 (淸國汗)' 이라 부를 수는 있다는 제안을 내놓는등 청과 끊임없이 타협을 시도했는데, 지금에사 청의
승리가 명백해 보이지만 당시 조선인들로서는 명과 청 양국간 승패의 향방을 쉽사리 짐작할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명은 몽골 오이라트군과 대결에서 50만 대군이 몰살당하고 황제가 포로로 잡히고도 살아남은 국가였으며 청과 대결
하던 때도 망하는 순간까지 실제 국력은 당연하게도 명이 더 우세했으니... 이런 상황에서 만약 명이 청을
물리친뒤 조선을 배신자로 규정한다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지 알수 없으니 인조도 줄타기 하느라 진땀 흘린 것입니다.
명나라는 수십만 대군을 퍼부어 조선을 지켜주고도 병탄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한국사에서 몇 안되는
믿을수 있는 중화 통일왕조 우방이었고 이를 상실한다는 것은 조선에게는 엄청난 손해인데,
이후 역사를 아는 현대인들 입장에서야 에도 막부는 조선에 우호적이었고 청 역시 조선을
병합할 생각도 없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웃을수 있겠지만 당시대인들이야 미래를 알수 없었으니....
후금(청) 은 누르하치 치세 말기 영역을 요서지방까지 확장했지만 전비 지출이 늘어나면서 경제난에
시달리니, 불과 20~ 30년전만 해도 부족국가 운영을 하던 자들이라 국가 재정과 경제를 어떻게
운용해야할지 몰랐으며..... 조세 체계가 미비했고 국가 재정을 어떻게 꾸려야할지 제도가 없었습니다.
또한 여진족은 원래 반농~ 반수렵 자급자족적 경제체제를 가졌기 때문에 경제가 발달하지 않았으니,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는 농업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인구가 적었고 그나마 성인 남성은 군인이었기 때문에 노동력이
부족했으니 이를 늘리기 위해 조선과 명나라에서 농민들을 납치해 노예 노동으로 개간시켰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외부와 통상이 필수적이었는데, 여진족의 무역이란 만주산 말, 약초, 모피를 조선이나
명나라와 무역하는 정도였으나 명나라와는 전쟁중이라 활로를 찾기 어려웠고 조선은 "형제의 맹약"
을 맺었지만, 후금과 통상에 매우 소극적이었으니 후금은 경제난 때문에, 조선에 정묘호란때
합의대로 세폐를 바치라 요구하고.... 국경 지역에 시장을 열자고 독촉했으나 조선은 소극적 이었습니다.
1600년대에는 세계 전역에 소빙하기의 기상이변이 벌어졌으니 농업생산량이 급감했고, 청나라뿐 아니라 명나라,
조선도 경제난에 시달렸는데 명나라는 악정이 겹쳐 농민반란이 일어났으며, 조선은 기상이변을 "임금의 부덕
의 소치" 라 해석했지만, 실제로 세계적인 기상이변의 문제였고 청나라는 경제가 취약했기 때문에 고통도 컸습니다.
"1627년 식량 위기는 격심했는데, 곡물값이 만주 신(1.8석) 당 여덟냥, 즉 1623년의 여덟배로 올랐고, 사람을
잡아먹고 강도질 한다는 흉문이 돌았으며 항복한 백성들에게 줄 양식이 없었고 곡식창고는 비었으며
이주해온 한인들에게 줄 땅도 없었는데 1635년과 1637년에 식량 위기가 닥치니 군대의 보급
부족은 만주의 군사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으니 말은 지치고 약해져 적을 추격하지 못했다." - 피터 퍼듀
양국간의 곡물 무역이 완전히 실패한후 새로운 파국의 시발점은 모문룡의 부하 장군들이었던 공유덕과
경중명의 후금 투항 사건이었으니.... 이들은 1629년 모문룡 처형 이후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렸으나 여전히 강대한 해군을 보유했으니 손원화 제독의 관리하에 산동의 등주 지역에 배치됩니다.
요동의 대릉하 전투 지원을 위해 이동 중, 병사들의 종군 거부 및 반란으로 졸지에 반란군 두목으로 추대된
이들은 결국 산동 지방을 점령하기에 이르며, 이어진 명나라 정부군의 진압을 피해 바다로 탈출한
이들은 1633년 초에 휘하 14,000명 병력 및 185척의 전함과 함께 압록강변을 통해 후금으로 귀순합니다.
이때 투항한 명나라 수군은 수군 함선뿐만 아니라 과거 누르하치를 죽게 한 홍이포를 가져왔으며
이로써 청나라의 전력은 급성장해 명나라와 조선에 큰 위협이 되었는데, 이제 청나라가
산해관만이 아닌 수군을 통해 텐진과 산동을 위협할수 있게 된 것이고, 조선의 경우는 과거와
같이 수군이 없는 후금을 상대로 강화도로 피신해 장기 농성하는 전략을 구사하기가 불가능해집니다.
조선은 명나라로부터 공유덕과 경중명을 토벌하기 위해 압록강으로 온 토벌군의 식량을, 후금으로부터는
공유덕과 경중명의 식량을 공급하라는 양립이 불가능한 요구를 받게 되고, 명나라가 인조의
부모 추봉 (追封) 승인으로 명군의 식량만 공급하자 후금은 큰 불만을 갖게 되고
그해 6월 의주 축성 소식이 전해지면서 홍타이지는 명, 차하르와 함께 조선을 정벌의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다행히 후금 지도부는 정묘맹약의 비준수 행위를 성토하면서도 명 정벌이 적절하다고 판단했으니,
후금은 1633년 후반부터 1635년에 걸쳐 화북 및 차하르(Caqar) 공격을 추진했는데.....
이때 조선은 청나라의 침공에 대비해 국방력을 강화하려 했으나 내부 사정상 큰 결실은 맺지 못합니다.
우선 1634년 6월 명으로부터 환관 노유녕 (盧維寧) 이 세자 책봉례 (冊封禮) 를 주재하기 위해 조선을
방문했는데, 그는 책봉을 빌미로 조선에 뇌물 상납을 요구할수 있는 자였고, 그를 수행한
상인들 중 상당수 역시 조선 상인들에게 불공정 거래를 강요하여 한몫 단단히 챙길
생각으로 조선에 온 자들이라 조선은 국방력 강화에 쓸 10만냥의 은을 이들에게 소모했던 것입니다.
명의 승인으로 부모 추봉 (追封) 및 세자 책봉까지 마친 인조는 숙원사업이던 부친 신주의 종묘 이전을 추진했지만
신료들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국왕과 신료들간 극한 대립은 1635년 상반기까지 계속되었으며,
3월 선조 능이 파손되는 사고가 발생하고 정치적 책임공방이 수개월간 지속되니 국방력 강화는 물건너간 것입니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으로선 엄청 중요한 문제였겠지만 후금의 침공 위협이 커지는 동안 국정놀음이나 하면서
국방력을 강화할수 있는 시기를 놓쳤는데....“ 왕은‘ 형(兄) 인 한(汗) 이 하늘의 돌보심에 출병할
때마다 적들이 흩어져 달아나고 이르는 곳마다 이기지 못한 적이 없구나.’공(孔)· 경(耿)· 상(尙) 세
장수가 귀부해 왔고 몽고 삽한의 한(汗) 이 귀의해 왔소. 경사를 기뻐하고 축하해 극진히 공경해야 할 것이오”
"왕은 명나라의 국운 (國運) 이 쇠퇴하지 않는줄 아오? 명나라가 기울어 무너질 때가 이르렀다고 생각하오.
신하가 임금을 속이고 임금은 신하를 의심하며, 뇌물이 공공연하게 왕래하고 참소와 간사함이 성하며,
도적이 봉기하여 소요가 일고 있으나 숭정제가 탕평 (蕩平) 하지 못하고 군대가 패하고 장수를
잃고 있소. 우리 병사가 서쪽으로 가고 있으니, 하늘이 도와 명나라를 뒤엎고 있는 것이오." 《인조실록》
후금에서 보낸 사신단을 조선이 홀대하자 누르하치를 따라다니며 여진 통일전쟁과 대명전쟁에서
숱한 죽을 고비를 넘겨온 용골대는 직감으로 상황이 안 좋다는 것을 깨닫고, 한양의 민가에서
말을 훔쳐서 자국으로 달아나니 인조는 전쟁을 직감하여 평안도 각 고을에 선전 교서를 내립니다.
“오랑캐가 창궐해 감히 참람된 칭호를 가지고 의논한다고 핑계대면서 글을 가지고 나왔다. 어찌 우리나라 군신이
차마 들을수 있겠는가. 강약과 존망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글을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충의로운
선비는 책략을 다하고 용감한 사람은 종군을 자원해 함께 어려운 난국을 구제해 나라 은혜에 보답하라”《인조실록》
선전교서는 용골대에게 빼앗기니 용골대는 조선의 속내를 알수있게 된 교서까지 입수해 후금으로 돌아가니 자국
사신이 푸대접을 넘어 위협을 받은데다가, 인조가 내린 유서가 후금에 입수되니 홍타이지는 조선이 형제의
맹세를 깨트렸다고 대노하는데 병자호란 때 조선이 정묘맹약을 저버렸다는 이유를 침략의 명분으로 선전합니다.
1636년 4월 11일, 홍타이지는 관온인성황제 (貫溫仁聖皇帝) 와 숭덕(崇德) 이라는 새로운 존호 및 연호와 함께
국호를 대청(大淸, Daicing) 으로 고치니 엉겹결에 즉위식에 참석하게 된 조선사신은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는
것을 거부하고, 다음날 성찬을 엎는 등 격앙된 반응을 보이니 홍타이지는 처형하는 대신에 국서를 들려 보냅니다.
국서에서 홍타이지는 대청황제를 자칭하고 조선을 또 다시 너희나라 (爾國) 라고 하대하였을 뿐만아니라 조선과
청의 갈등(사르후 전투 참전, 공유덕, 경중명의 귀순방해) 을 꾸짖음과 동시에 조선 왕자를 볼모로 보내
개선 의지를 표명하지 않으면 "화호의 도리를 깨트리고 전쟁의 단서를 일으킨" 조선을 침공하겠다고 말합니다.
조선 삼사에서는 간관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는데 국가 안보를 책임진 조정(비변사)은 좀 나았지만, 뼈속까지
원리적 성리학자인 간관들이 중심이 된 삼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에서는 비현실적인 주전론을 주장
했으니 즉위식에서 살아 돌아온 사신들을 목을 베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니 귀양을 떠날수 밖에 없었습니다.
2달뒤 파탄의 책임을 청의 탓으로 돌리는 격문을 청나라에 보내면서 수신자 명칭을 "금" 과 "청" 둘 중에 어느 것을
써야 할지 격론을 벌였으며... "너희가 우리를 침략하면 멸문지화를 당한 도요토미씨의 전철을 밟아 너희도
망할 것이다" 라며 청나라를 향해 "덤빌테면 덤벼라" 고 도발하는 것이니 사신도 대신이 아니라 역관을 보냈습니다.
다만 이 국서는 조선이 보기에도 너무나 도발적이었기 때문에, 비변사는 다시 논의 끝에 급히 전령을 보내서 일단
보내는걸 유보하고, 이 국서(이름도 격서라고 낮추었음) 를 가지고 가던 사신(역관) 들을 의주에 머무르게 합니다.
상황이 이렇게된 이상 조선은 전쟁을 준비해야 했지만 말로만 싸우자는 목소리에 비해 실질적인 대비책을 제시하는
정온, 윤황, 최명길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 정온은 모든 정예병력을 압록강으로 차출하고 인조가 개성
까지 행차해 군을 독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전장을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로 국한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이후 지휘관들을 교체하는등 준전시 체제로 돌입하지만, 대 후금 외교의 베테랑 박로가 '지금 우리에게는
후금을 막을 힘이 없어요. 지금이라도 미안하다 하고 받아들입시다.' 하는 요지로 상소를 올렸고
'압록강이 얼어붙으면 끝장' 이라고 최명길도 상소하자 결국 화해를 요청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로 합니다.
인조는 강경론을 주도하며 전쟁 분위기를 조성해 놓고는, 정작 최명길을 비롯한 현실론자들이 반박하자
정신을 차렸는지 자신에게 고무되어 최명길을 비판하는 삼학사 등에게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들이 감히 누구에게 입을 놀리느냐" 라고 꾸짖는등 완전히 입장을 바꿨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사신을 보내네, 마네 하는 문제로 조정은 무려 7개월 동안이나 토론했는데 유일한 주화파인 최명길은
정묘호란후 10년간 평화롭게 지낸 것을 상기키시면서, 후금의 강력한 전력과 조선의 빈약한
국방력을 들며 현실을 똑바로 보자고 이야기 했지만 삼사(사간원, 홍문관, 사헌부) 간원들은 반대합니다.
"황제를 참칭한 오랑캐" 와 상통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며 주화파를 역적으로 몰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니 인조는
용골대가 도망갈때는 일전이라도 벌일듯 주전론에 섰다가 주화론자들이 현실을 지적하자 오락가락하다가
주화론으로 낙착보면서 사신을 보내는걸로 결론을 내렸지만 주전론이 지배하는 조정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명나라도 조선이 청나라에 붙으면 견제할 세력이 사라져 곤란해지기 때문에 사신을 보내 조정을 독려했으니...
가도에 주둔중인 명나라 동강진에서 부총병 백등룡이 한성에 왔고, 명나라 조정에서는 감군 (監軍) 황손무
(黃孫茂) 를 보내 조선이 청나라와 화의하는 척 하면서 청나라의 내부를 분열시켜 주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연려실기술에는 이때 청나라 장수인 마부대가 임경업이 지키고 있는 의주의 백마산성에 나타나
"우리는 12월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할 것이다. 하지만 조선이 태도를 바꾸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수도 있다" 최후통첩성 발언을 하고 돌아갔지만 조선의 전쟁준비는 지지부진 했습니다.
사신은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비변사는 전쟁을 막아보려 안간힘을 썼으니 대표적인 주화파 박로가 사신으로
가서 화해를 요청하기로 되어 출발했지만, 박로가 압록강을 채 넘기도 전에, 청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던 것이니, 박로는 정방산성에 피신하였고 이후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려다가 청군에 생포 됩니다.
조선군의 큰 문제는 총지휘관이 되는 인조가 전략적으로 무능한 인물이라! 이괄의 난을 진압한
장수인 정충신과 남이흥이 수비전을 주장하고 청의 군사력을 말하며 방비를 설명하는
데도 '홍타이지는 하찮은 자에 불과한데 나가 싸울 생각은 못하고 병력 탓만 하는 한심한
놈들' 이라고 막말까지 하면서 뛰어난 장수만 찾아내면 문제없다는 망언을 떠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인조반정후 조선의 수비를 담당했던 속오군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으니
정부 주도로 조총 생산을 지방에 보급했고 호패법을 시행하여 병력을 확보하려
했으며, 임진왜란 때 큰 문제를 드러낸 지방 수령들의 떨어지는 지휘력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무관이 평시 훈련과 전시 단위부대 지휘를 하는 전담 영장제를 실시합니다.
정권 보위의 핵심이라 전투에 투입되지 않는 훈련도감 대신 전투를 담당할수 있는 중앙군으로 어영군, 총융군,
수어청 군대가 창설되고 강화되었으니 병자호란 직전에 어영군 6,000여명, 총융군 20,000여명, 수어군
14,000명, 훈련 도감군 5,000명 등의 병력이 준비되었고 전국적으로 80,000명 가량의 속오군이 편성됩니다.
병자호란 발발 5개월전 1636년 7월 김류가 올린 보고에는 각도의 군사는 합쳐서 118,825명,
그중 속오군은 86,073명인데 다만 총융군 병력의 다수는 속오군이었기 때문에 병력이
겹치니 10만 정도로 37개의 영 (營) 과 무관인 전담 영장이 설치되면서 지휘 체계도 잡힙니다.
하지만 임진왜란부터 이어진 재정 문제로 준비에 만전을 기하기 어려운데다 병력 증강에 서둘렀지만 사르후
전투와 이괄의 난에서 잃었던 20,000명 ~ 30,000명 가량의 정예병을 회복하지 못했으며,
이괄의난 이후 반란을 두려워한 인조와 대신들은 유능한 지휘관을 국내 반란을 감시하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남이흥도 이때 다른 지휘관들과 국내 지방을 감시하느라 본인이 군사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유언 또한 "군사 훈련 한번 못해본 것이 안타깝다!" 였으니....
중앙 중심의 측근 정치로 군권 장악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알수 있는 부분 입니다.
이괄의난 이후 반란을 겪은 정치가들의 기찰 정치가 발휘되어 서인들의 측근으로 이루어진 중앙의 공무원들이
부대에 배속되었고 군 전문가인 지방의 지휘관들에게는 지휘권을 주지 않았던 관계로 실전에선 유능한
장군 정충신과 남이흥마저도 이괄의 난을 토벌하는 공을 세웠음에도 차별 대우를 받으면서 한직을 떠돌았습니다.
김자점 같은 측근들로 채워진 사령관의 역량은 매우 부실하였기에 군 전문가들이 남긴 노력
이 실전에서는 허사로 돌아갔으니.... 교전이 벌어졌을 때 최고 지휘권을 보유한
국왕과 체찰사 김류가 남한산성에 갇혔고, 지휘권을 행사해야 할 도원수 김자점은
지휘권을 포기했으니 조선군 병력은 통합된 지휘 없이 따로따로 전투를 벌여 패전을 자초합니다.
게다가 청군은 공유덕과 경중명이 병선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함으로써 수군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조선 조정은 이를 간과하고 고려때나 정묘호란 처럼 강화도로 파천만 하면 안전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있었으며, 그마저 제대로 도망도 못가 남한산성에
갇히게 되는데 왜 후금에 수군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일까요? 선입견과 고정관념 때문?
심지어 후금에서도 '너희들은 분명 강화도로 갈 것이 뻔하다' 라는 말을 전한 적도 있는데, 문제는
강화도의 수비를 맡은 강화도 유수 장신이 적들은 수전에 약하다며 방비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강도검찰사 김경징 역시 방어태세를 살피기는커녕 안에 틀어박혀서 이민구와
더불어 술이나 쳐마시는등 안일한 모습을 보였는데 적에게 수군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니 건망증인가?
청나라는 1636년 4월에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면서 홍타이지는 황제로 즉위한후 청나라군은 명나라 서부
농민반란이 심각해진 틈을 타서 5~ 9월에 만리장성을 우회해 명나라 본토를 침공했는데, 명군 주력은
섬서성에서 농민반란을 진압중이었으니 청군은 산서성, 하북성을 쑥대밭을 만들고 성경으로 개선할 수 있었습니다.
병자호란 청군은 식량사정이 좋지않아 20일치의 군량만 준비했으니 청나라는 단기전으로 조선을 굴복시킬 작정
이었는데.... 기병이 주력인 유목민족 청군은 많은 군량을 휴대하지 않았고, 수도 성경 주변에 팔기군을
주둔시켰다가 공세에 들어갈 때 소량의 군량을 휴대해 전선에 나가고 여의치 않으면 돌아오는 형식 이었습니다.
병자호란도 그렇지만 몽골 군대도 그렇듯 정묘호란과 영원성 전투만 하더라도 한달 이내의 작전기간을 정해두고
작전목표가 불분명해지거나, 장기전으로 흘러 식량이 바닥날 것 같으면 바로 물러갔으니 이것이 농경민족의
보병과 다른 점으로 진퇴가 자유롭다는 것인데, 고려나 조선은 이걸 우리가 적을 물리친 승리라고 착각 한다는?
홍타이지는 오래전부터 베이징을 취하는 것은 큰 나무를 베는 것과 같아 먼저 양 변을 도끼로 패면 나무가 스스로
넘어간다고 말했는데, 양 변은 몽골과 조선이니 홍타이지는 1634년에 내몽골의 링단 칸을 쳐부수고 내몽골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고 1637년 병자호란에 승리해 조선을 굴복시켰으니 이제 명나라 전면공격이 무르익었습니다.
내몽골을 평정하고 원조의 옥새를 얻으니 복다 칸의 칭호로 칭기즈 칸의 후예인 몽골의 대칸에 올랐으며,
국호를 금 (aisin) 에서 대청 (Daicing) 으로 고치며 관온인성황제 및 숭덕으로 칭제건원
하고는 병자호란후 명나라로 쳐들어 갔지만 최후의 명장 원숭환이 방비하는 영원성은 함락시키지 못합니다.
적의 견고한 성을 계속 공격하는건 손자병법에 “하지하책” 이라 불가피하게 영원성을 우회해 베이징을 포위하는데,
반간계를 이용해 명나라 의종 숭정제로 하여금 명장 원숭환을 참혹하게 죽이게 하니 거칠것이 없는지라
1638년 명나라 깊숙이 쳐들어가 산동성 제남을 공략해 200,000명에 달하는 포로에다가 덕왕 주유추를 사로잡습니다.
1641~ 42년, 명나라와의 결전인 송산 전투에서 홍승주의 명나라 대군 140,000명을 전멸시켰고
산해관 외성들을 모조리 함락시켰으며, 1642년 11월 초 홍타이지는 아바타이를 봉명
대장군 (奉命大將軍) 에 임명해 명나라를 침공하니 연전연승을 거둬 명나라는 국토가
휩쓸려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중원 진출 기회를 노리던중 1643년 51세라는 나이에 급사합니다.
홍타이지는 송산 전투때 군을 지휘하며 코피를 심하게 흘렸는데 이때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으니
결국 대청의 중국 대륙 정복은 아직 어린 아들 아이신기오로 풀린의 섭정을 맡은
홍타이지의 이복동생 호쇼이 예친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愛新覺羅 多爾袞) 에 의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