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한국의 불교학자 <7> 이기영 / 정병조 | ||||||
기획연재 : 현대한국의 불교학자 | ||||||
| ||||||
1. 불연 이기영의 살아온 여정 1) 탄생에서 유럽 유학(1922~1960)
불연 이기영(不然 李箕永)은 1922년 2월 20일 황해도 봉산군 만천면 유정리에서 태어났다. 부 이종준(李鍾駿), 모 한순애(韓順愛)의 2남 4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광주(廣州). 1941년 4월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예과에 입학하였다. 1944년 동 대학 법문학부 사학과를 수료하였다. 1944년 일제(日帝)의 학병으로 징용되어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였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구사일생으로 생환하였다. 곧이어 공산당 치하가 되면서 대지주의 가문이었던 이기영은 토지를 몰수당하고 월남을 결행하였다. 6·25전쟁 때 피난길에 올라 대구에 머물렀다. 1951년부터 2년 동안 국방부 부편수관으로 6·25 전사 편찬에 종사하였다. 1952년부터 3년간은 효성여자고등학교의 역사 교사로 근무하였다. 1954년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벨기에의 루뱅(Louvain) 대학 역사학과에서 수학하였다. 나중에 불연은 유학 시절의 어려움을 처연하게 표현한 적이 있다. 한국에는 노모와 처, 두 아이가 있었고, 그들은 노점상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유럽에서 공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격하였다. 기숙사비를 절약하려고 가톨릭 수도원에서 수도승들처럼 생활하였다. 그러나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도저히 그들의 수학 능력을 따라갈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서양사를 전공하려 했는데, 호머의 시를 줄줄 외우고 라틴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동급생들에게는 기가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드디어 전과를 결심한다. 당시 루뱅에는 E. 라모트(Lamotte)라는 위대한 불교학자가 있었다. 그는 막스·뮐러(Max Mϋller)의 S.B.E 시리즈 출간 이래 서구 불교학의 제2세대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실뱅 레비(S. Levi), 에드워드 콘제(E. Conze) 등과 함께 현대불교학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라모트는 산스크리트·티베트 등 인도 고전어에 능숙하였고 특히 서지학적 접근의 세계적 권위였다. 그의 《유마경 주해》는 가장 탁월한 불교문헌 접근의 예로 꼽힌다. 이기영이 그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고 6년 동안의 어려운 연찬 끝에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박사학위 논문은 《불교에 있어서 참회에 관한 연구(Aux origines du Techan-Houei(懺悔). Aspects bouddiques de la pratique penitentilel)》였다. 2) 귀국 후 활동(1960~1973) 1960년 3월 귀국한 직후 그는 활발한 강의를 진행하였다. 그는 동국대, 서울대, 서강대 등에서 강의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최고 인기강좌로 명성을 얻었다. 주로 동국대에서는 불교학과 인도철학, 서울대에서는 인류학·종교학, 서강대에서는 동서미술론·종교학 등을 강의하였는데 단숨에 장안에 화제를 모으는 명강사로 이름을 떨쳤다. 그에게는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하느냐에 대한 인격적 고뇌가 있었다. 자신의 프랑스 유학을 지원해 준 가톨릭 교단에 대한 신의로는 서강대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그러나 불교학의 본당인 동국대에 대한 애착도 컸다. 내부적으로 보면 서강대에서는 불교학 전공의 학자를 뽑는 일에 망설임이 있었고, 불교학계에서는 혜성처럼 나타난 신진학자에 대한 의혹과 경계가 만만치 않았다. 어느 곳에도 둥지를 틀지 못하던 그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준 결정적 인물은 백성욱이었다. 그는 문교부장관을 거쳐 동국대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불교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기영 같은 학자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만만치 않았던 불교계의 반발을 누르고 1964년에 그를 전임교수로 임용하였다. 1965년 인도철학과를 창설하면서 그를 초대 학과장으로 임명하였다. 1967년 《원효사상》을 출판하였는데, 그해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을 뿐 아니라 1970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선정한 해방 후 25년 한국의 10대 명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원효사상》은 불연의 출세작이었고, 그를 원효 연구의 대가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원효의 해동소(海東疏)를 중심으로 현대적 해석을 시도한 저술이었다. 특히 원효의 불교 비판을 오늘에 빗대어 논술한 부분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했다. 1968년에 동국대 불교대학장으로 취임하였으나 곧 사퇴하였다. 이른바 목탁데모 사건이었는데 일부 학생들이 불교대학장실을 점거하며 ‘천주교도 불교대학장 웬 말이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 사건은 당시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첫째 그가 정녕 가톨릭교도에서 불자로 배교(背敎)한 것인가? 둘째 그렇지 않다면 학문적 신념과 종교적 믿음은 같으냐 다르냐 하는 점 등이었다. 당시 이기영은 도하 신문에 자신이 ‘청담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은 불자’임을 천명하였다. 제자들에게 배척당했다는 학자적 자존심 때문에 동국대를 떠났고, 그는 곧 영남대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영남대의 이선근 총장이 그의 재질을 아깝게 여겨서 교양학부장, 신라가야문화연구소장 등의 직책을 주면서 스카우트한 것이다. 3) 본격적인 불교학 연찬(1970~1987) 영남대학 생활을 3년쯤 한 후 국민대 학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국민대의 설립재단인 쌍룡의 김성곤 회장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1년 만에 학장직에서 물러났다. 학내 분규가 그 원인이었다. 1974년에 한국불교연구원을 창립하였다. 동국대 이외에서 불교연구를 시도한 단체로는 효시가 되는 셈이다. 불교연구원에서 정기적으로 불교 강좌를 개최하였는데 그 반응이 뜨거웠다. 사회적 명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최고의 불교 강좌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김정배(전 고려대 총장), 오경환(전 해군참모총장), 강신표(전 한양대 교수) 등이 수강생이었다. 또 학술적 업적으로는 ‘한국의 사찰’ 시리즈를 기획, 출간하였는데 1권 《불국사》 2권 《석굴암》을 비롯해서 30여 권이 출판되었다. 불교연구원에서는 산하단체로 신행조직을 발족하였고 구도회를 지역별로 창설하였다.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에 구도회가 설립되었고, 나중에 광주 구도회가 없어지고 대전 구도회가 설립되어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1974년에 동국대로 복직하였다. 1978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연구3부장,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편찬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82년에 그동안의 연구 논문을 정리한 《한국불교연구》를 출간하였다. 이 논문집은 이기영의 불교연구를 총망라한 연구서이다. 1부 불교사상의 제 문제에는 초기 이기영의 대표논문으로 꼽히는 〈불신(佛身)에 관한 연구〉 등이 있고, 2부 한국불교의 전통과 특질에는 〈한국적 사유의 일 전통〉 〈중국고대불교와 신라불교〉 등이 실려 있다. 3부 원효의 불교사상에는 〈원효의 보살계관〉 등 8편의 원효 관계 논문이 수록되었다. 4부 신라불교연구에는 〈상징적 표현을 통해서 본 7·8세기 신라 및 일본의 불국토 사상〉 등이 있고, 5부 불교사상의 현대적 조명에는 〈불교의 현대적 의미-특히 기독교의 현대적 갈등에 대한 불교적 대답〉 등이 있다. 논문집 이외에도 《마음의 철학》(1987, 정우사) 《영원히 하나가 되는 길》(1987, 정우사) 《별처럼 달처럼 태양처럼》(1991, 불교연구원), 《원효사상 70강》(1991, 불교연구원) 등의 수필집과 《금강삼매경론》(1972, 대양서적), 《진심직설》(1978, 현대불교신서), 《화엄경의 세계》(1985, 목탁신서) 등 많은 번역서를 출간하였다. 그는 매우 정력적인 저술가였을 뿐 아니라 필력(筆力)이 뛰어났다. 논문도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당시의 불교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의 저자이기도 하였다. 이 당시의 불교계에서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불교서적으로는 이기영 이외에 서경수(徐景洙), 법정(法頂) 등이 꼽힐 정도였다. 4) 정년에서 타계까지(1987~1996) 동국대에서 정년퇴직한 후, 불연은 불교연구원에 주석하였다. 1988년에는 원효학당을 설립하였는데, 그곳에서 전문적인 불교 강좌를 진행하였다. 그때 주로 강의한 과목은 여래장 사상, 섭대승론, 대승기신론 등이었다. 원효학당은 불교교양대학의 성격이었지만, 가장 고급한 불교 강좌였다. 그는 ‘재가연대’라는 불교신행단체의 공동대표를 맡기도 하였는데, 이 단체는 경주 지역의 고속철도 건설공사를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평생을 불교학자로서 지내온 사람으로서는 파격적인 변신일 수 있으나 불연의 신념이 이론과 실천을 겸비해야 한다는 것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만년에 원효 연구의 마지막 과제였던 《금강삼매경론》의 재해석에 몰두하였다. 그의 초기 저술 《원효사상》은 《대승기신론 소·별기》를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원효사상의 완결편으로 그 텍스트를 선정하였다. 그는 끝내 마지막 작업을 완수하지 못했지만, 칠순을 넘겨서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평생토록 대장경을 손에서 놓지 않았는데, 페이지마다 형광펜으로 표시하고 또 깨알 같은 글씨로 주석을 붙여 놓았다. 나는 우현 고유섭이 《고려사》 책장이 너덜거리도록 읽었다는 이야기를 선배들에게서 들은 바 있는데, 불연의 대장경 연찬 또한 그에 버금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원래 불연(不然)이라는 법호를 쓰기 이전에 청담 스님으로부터 받은 법명은 설봉(雪峰)이었다. 히말라야를 뜻하는 설산에서 따왔기 때문에 눈 덮인 히말라야의 봉우리라는 괜찮은 법명이었다. 그런데도 불연은 설봉 대신, 자호를 즐겨 썼다. 이 불연이라는 이름은 “불연지대연(不然之大然)”이라는 법구에서 따온 말이다. 원효 변증법의 핵심적 표현인 ‘그렇지 아니한 참 그러한’이라는 이 말은 부정의 부정을 통한 절대 긍정의 뜻이다. 대연(大然)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하다고 생각하여 불연을 선택했던 것이다. “진짜 멋있는 이름은 일연(一然)인데……” 하면서 일연 스님을 은근히 질투하기도 하였다. 이기영 박사는 1996년 11월 국제학술회의 석상에서 홀연히 타계하였다. 오전 10시부터 시작한 개회식에서 그는 한 사람씩 외국인 학자들의 경력과 학문세계를 일일이 소개하고 자신의 기조강연을 담담히 발표하였다. 청중들의 박수갈채를 뒤로하고 복도에 나설 때 심근경색이 닥쳤다. 당시 불교계에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학술열반’이라는 용어를 썼다. 평생 학술을 연찬했던 노학자에게 붙여진 영예로운 호칭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유골은 평생토록 흠모하였던 경주 동남산의 보리암 인근에 일부를 산골하였고, 또 일부는 사후에 후학들이 건립한 경기도 광주의 유마정사에서 수목장으로 치러졌다.
1) 불교학 연구 태도의 반성 1960년대의 한국 불교학계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크나큰 주목을 끌지 못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비구·대처의 갈등이 노골화되면서 양식 있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동국대학교를 중심으로 몇몇 불교학자들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불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분규·고리타분함·뒷북치기 등이었을 정도이다. 따라서 불교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속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연구방법 또한 한문 위주의 훈고학 수준이었다. 불연은 현대 한국불교에서 ‘불교해석학’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사상적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에 대한 해석이라는 관점이다. 또 불교사상을 혼자만의 독립 체계로 이해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원효’라고 했을 때, 왜 그의 사상이 독창적인가를 입증하려면 우선 시대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 그가 태어난 7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는 삼국의 통일전쟁이 가열되던 시점이었다. 또 지리적 약점과 권력구조의 취약성을 지니고 있었던 신라는 골품제라는 서열화의 덫에 걸려 있었다. 그렇다면 원효는 그 시대 상황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이루려고 했는가를 고찰해야 한다. 다음으로 그의 사상은 동시대 동아시아 불교인들과 어떤 차별점이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법장(法藏)의 화엄학과의 관련 천태지의와의 영향력 여부 등을 섬세하게 논구해야만 한다. 그때 비로소 ‘원효’라는 실체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불교해석학은 종교학·역사학·철학 등 주변 학문의 바탕 위에서 성립될 수밖에 없다. 불교학의 경우는 여기에 덧붙여서 인도 고전어의 연구가 필수적이다. 석가모니는 과연 무슨 언어를 썼을까? 고향이 카필라바스투였기 때문에 카필라의 언어를 쓸 줄 알았으리라. 또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남쪽으로는 마가다(Magada), 북쪽으로는 코살라(kosala)까지를 여행하였다. 그렇다면 마가다의 국어였던 마가디, 코살라의 언어였던 코살리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리라 짐작된다. 그가 지방여행을 다니면서 통역을 대동했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석가모니는 왕자였기 때문에 당시의 귀족 언어였던 산스크리트어(Sanskrit)를 능숙하게 구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만난 이들은 대부분 서민들이었기 때문에 토속 언어였던 팔리어(pali)도 잘해야 했으리라고 보인다. 즉 석가는 적어도 5개 국어에 능통한 언어의 천재였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팔만대장경이 불교의 원어인 줄 착각하고 있다. 한문은 인도 고전어의 번역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도 고전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다면 불교연구는 번역을 통한 2차 자료의 섭렵에 불과할 뿐이다. 언어는 문화의 집약이다.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문화뿐 아니라 이데올로기까지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산스크리트는 영어의 어원(語源)이다. 그에 관한 연구는 불교연구의 지름길이다. 서양에서 불교연구가 한문문화권보다 앞선 이유도 그 때문이다. 불연은 중국불교 위주의 한국적 풍토 속에서 불교를 원류적으로 이해하려 했던 학자였다. 서양의 불교연구 동향을 최초로 주목했던 것도 그의 학술적 업적이었다. 불연을 통하여 한국의 불교연구는 지평을 넓혔을 뿐 아니라 보다 심층적으로 공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본다. 불연은 이와 같은 새로운 방법론의 제시로 당시의 불교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또한 후학들에게도 불교학 연구의 방향을 뚜렷하게 제시한 셈이다. 2) 원효에 관한 독창적 연구 원효(617~686)는 일찍부터 한국불교의 위인들 가운데 상당한 주목을 받아온 인물이었다. 드라마틱한 삶과 자유분방한 언행, 그리고 방대한 저술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러나 종래의 훈고학적 해석으로는 원효 이해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불연은 특히 원효사상의 현대적 해석에 주력하였다. 불연은 원효사상은 반야와 유식의 토대 위에 법화·화엄 사상을 얹고 궁극적으로는 여래장 사상의 전개에 있다고 보았다. 즉 원효는 반야중관과 유식교학을 겸비한 통합과 융섭의 학문구조를 가졌다고 본 것이다. 그 이념적 완성은 귀일심원(歸一心源), 즉 일심의 원천을 회복하는 일로 설명된다. 한편 실천적 의지는 요익유정(饒益有情), 즉 중생을 이롭게 하리라는 방편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원효의 융섭적 불교 이해를 밝힌 글은 〈교판사상에서 본 원효의 위치〉와 〈경전 인용에 나타난 원효의 독창성〉 두 편의 논문을 들 수 있다. 전자의 논문에서 불연은 역대제가(歷代諸家)의 교상판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그들 여러 학파들은 결국 자파(自派)의 우월성을 강조한 편협한 종파주의였다고 비판한다. 사상적으로 대승불교를 정의한 교판으로는 원효만이 유일했다고 보았다. 후자의 논문에서는 원효의 경전 이해가 얼마나 방대하고 종합적이었는가를 논증하였다. 원효는 회향(廻向)의 귀재였다. 잡다한 사상과 논의들을 궁극적 의미로 귀결시키는 기술은 원효사상의 독창성이었다. 불연의 초기 원효 연구는 다분히 윤리적 성격으로 대변되었다. 〈원효의 보살계관〉 〈원효의 실상반야관〉 등이 관련 논문이다. 특히 불연이 주목한 것은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이다. 《보살계본》이라는 불전에 대한 원효의 해설서이지만, 그 담고 있는 내용은 형식윤리에 대한 비판, 상황적 윤리 접근 등 상당히 내면적이고 형이상학적 내용들이다. 이를 통해 원효가 가진 원융무애(圓融無碍)의 행동 패턴을 재해석하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효와 요석공주의 만남은 형식윤리로 보면 파계이다. 그러나 그때의 ‘계율 어김’이 선한 방편이었느냐, 위선적 처신이었느냐를 따지게 되면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마음속으로 거칠고 악하면서도 겉모습은 의젓할 수 있다. 또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점은 안팎의 조화이며, 내면의 자유이다. 불연의 원효 연구는 그에 그치지 않고 신행 형태와 교학체계로 그 영역을 확대해 간다. 〈원효의 미륵 신앙〉은 미륵신앙의 관행(慣行)들이 현실적으로 적용되는 과정을 파헤치고 있다. 즉 도솔천에 대한 미륵상생(彌勒上生)의 신행은 결국 불국토 사상으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원효의 저술 중에서 불연은 《열반종요》에도 주목하였다. 사실 《열반경》은 법신상주(法身常住)를 주장하는 삼신(三身) 사상의 핵심 경전이다. 이 논문은 원효사상의 핵심이 곧 법신의 현실적 구현이라는 점을 논증하였다. 불연의 원효연구 귀결은 〈원효사상의 현대적 이해〉로 서술되었다. 그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열 가지로 분석하고, 그에 대한 원효사상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다분히 계몽적 선언같이도 느껴지지만, 동시에 원효를 현대 속에 되살렸다는 자부심도 느끼게 하는 논문이다. 불연의 글 속에는 늘 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비교사상적 관점이 내재하여 있다. 물론 기독교 등 특정 종교인 경우도 있지만, 현대사회의 제사조(諸思潮)에 대한 비교탐색도 주요한 과제였다. 이것은 그의 학문세계가 그만큼 ‘넓고 깊다는’ 의미도 된다.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적 전통을 접했다는 점이 서양종교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또 역사학 전공자로서 유럽 유학을 다녀왔다는 점 또한 그의 안목을 넓히는 일이었다고 본다. 그가 영어로 발표한 《Hwa-yen Philosophy and Bodhisattva Ethics(화엄철학과 보살윤리)》는 그 대표적 실례이다. 화엄의 우주관이 갖는 원융적 가치관이 보살의 실천원리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논구이다. 그는 화엄의 십지(十地)등 언급이 《화엄경》 형성 이전에 전이되었다는 문헌학적 접근도 꼼꼼히 언급하였다. 또 〈현대의 윤리적 상황과 철학적 대응-원효철학의 입장에서〉라는 논문에서는 물질문명과 정보화 사회 속의 피폐된 인간정서를 예리하게 분석하였다. 흔히 말하는 물질문명의 폐해를 가치 지향적 관점에서 서술하였다. 불연의 비교종교, 특히 기독교와의 논쟁에서 꼽을 수 있는 논문은 두 편이 있다. 〈원효사상에 있어서의 궁극적인 것-불교와 기독교, 둘인가, 하나인가〉라는 논문은 종교학에서 말하는 근원적 실체(Ultimate Reality)에 대한 비교종교학적 접근이다.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은 결국 불교적 일심(一心)의 경지와 다를 바 없다는 논리이다. 다만 차이점은 기독교가 인격적 접근과 교화를 강조한 데 비해, 불교는 초인격적(超人格的) 공(空)의 세계를 실현한다는 점일 따름이라고 보았다. 또 하나는 〈종교 간의 대화, 무엇이 핵심인가〉라는 논문이다. 사실 그동안의 종교 대화 논리는 기독교에 의해서 주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리스천아카데미의 종교 대화 모임에 불연은 단골손님이었다. 물론 막역한 교우였던 강원룡(姜元龍) 목사, 변선환(邊鮮煥) 목사 등과의 인연도 큰 몫을 했으리라고 본다. 그는 종교 대화의 논리를 ‘수행 경험 공유→상호 진리성의 공통분모 찾기→현실적 공감대 형성(이를테면 火葬 정착)’ 등으로 요약하였다. 이기영이 활동하던 1970년대부터 기독교는 비로소 불교라는 카운터파트를 인정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비교사상적 관점은 〈불교와 공산주의〉 〈불교와 민주주의〉라는 두 편의 논문에서 완결된다. 흔히 공산주의는 나쁜 것, 척결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하는 감성적 공산주의 비판은 더 이상 의미를 두기 어렵다. 또 유물적 세계관, 계급투쟁 등의 혁명적 논리를 부정하는 일 또한 능사는 아니다. 그렇다면 논의의 출발은 철학적 합리성 위에서 출범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불교의 가치관이 몰유물적(沒唯物的)이라는 근거를 제시한다. 또 궁극적으로 정신과 물질은 조화를 도모해야 할 대상이지 어느 것이 앞선다는 주장은 편견이라는 논지를 전개한다. 민주주의를 보는 불연의 시각은 다분히 비판적이다. 흔히 천민자본주의라고 말하지만, 조직적 악의 비리(非理), 다수의 횡포 등 서구 민주주의가 갖는 한계점을 통렬히 지적하였다. 아울러 휴머니즘이라는 미명하에서 빚어지는 자연파괴, 공해의 문제들도 신랄하게 지적했다. 요컨대 인간은 인본(人本)이라는 자기보호하에서 자연을 멋대로 조작해서는 안 되리라는 주장이었다. 물론 불연은 생명연장, 생명복제 등에 관해서는 고민할 겨를이 없었지만, 그에 관해서도 비슷한 해결책을 제시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4) 불교 사상의 현대적 조명 불교는 언제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새롭다는 말은 여태까지 없던 불교적 진리를 창출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의 당면한 문제들을 불교적 시각에서 조명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뜻에서 불교는 대중불교여야 하고 응용불교, 실천불교가 되어야 한다. 불연의 시대까지는 아직 응용불교(Applied Buddhism)라는 개념이 없었다. 다만 니시타니 게이치(西谷啓治)를 중심으로 하는 비판불교의 흐름에 대해서는 상당히 높은 평가를 한 적이 있다. 불연의 학문적 성향이 복고적이라기보다 미래지향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논문 속에는 언제나 현대, 혹은 미래에 대한 고뇌가 서려 있었다. 미래의 다종교 상황 속에서 불교는 어떠한 진로를 선택해야 하는가 등의 문제는 언제나 그의 핵심적 관심사였다. 현대사회와 불교라는 관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글은 〈불교와 근대적 인간형〉이라는 그의 초기 논설이다. 그는 근대사회를 규정짓는 요소들과 그것이 인간을 변모시켜가는 과정을 서두에서 언급한다. 이어서 조국과 세계가 요구하는 이상적 인간형은 결국 불교적 보살사상에서 찾아야 함을 역설하였다. 한국의 근대화가 추진되던 1962년 이래 불교에서 보는 ‘근대화’로서는 가장 고전적인 논설이라고 보인다. 〈자비와 폭력〉 〈불교의 현대적 의미〉 〈불교의 인간학적 기여〉 등은 모두 현대사회 속에서 불교가 지향해야 할 과제들에 대한 해박한 논술들이다. 현대사조와 불교라는 관점에서 보면 불연의 이 논문은 거의 최종본이 될 수 있다. 〈세계의 문화적 현실과 한국불교의 이상-원효사상은 21세기 세계를 향해 무엇을 줄 수 있는가〉는 인류 정신문명의 발달과 불교적 기여라는 핵심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고대에서 중세까지 인류는 토테미즘 적이고 아니미즘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이성의 합리화가 진행되면서 과거의 신앙은 모두 미신이라는 배척을 당해 무대 뒤로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들이 말살한 것은 원시신앙이 아니라 마음속에 남아 있던 원초적 기대심리를 없애 버린 것에 불과하다. 21세기에 들어서서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될 인간가치의 몰락은 불을 보듯 뻔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보살이라는 원대한 이상이 ‘어떻게’ 현전화(現前化)될 것이냐가 미래의 과제가 된다는 논지였다. 〈현대에 있어서의 종교의 진리성〉이라는 논문은 과연 과거의 종교적 진리성이 현대에서도 유효하냐 하는 데 대한 도전적 논설이다. 과거의 진리성이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으려면 상황적 전개가 필요하다. 즉 오늘의 당면과제들에 대한 명석한 분석이 선행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아울러 그 진리성에 ‘함몰’될 경우, 모든 종교는 원리주의적이고 배타적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였다. 일부 이슬람의 경전지상주의(근본주의) 등이 이곳에 해당할 수 있다. 따라서 진리성이 중요한 것은 누가 그 진리성에 가까이 접근해 있느냐 하는 실천의 문제로 종교를 보아야 하리라는 주장이다. 모든 종교는 서로의 진리를 절대화한다. 내 것이 최선이면 상대방의 종교는 차선이 될 수밖에 없다. 서로가 최고임을 자부하는 절대 신념 체계의 충돌이 종교전쟁이며, 극렬한 배타주의이다. 불교만이 유일하게 종교재판, 종교전쟁에 관한 역사적 경험이 없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A. 토인비의 주장처럼 불교는 사랑을 내세운 무자비한 대결구도 속의 완충 지역일 수 있는 ‘관용의 종교’이다. 5) 인도철학에서 한국불교로 회귀 불연의 한국불교에 대한 애정은 원효로부터 비롯된다. 그의 원효 사랑은 곧 신라불교에 대한 흠모로 이어진다. 필자는 불연과 함께 1971년부터 2년 동안 경주 남산을 답사한 적이 있다. 당시 문공부의 의뢰를 받고 경주 남산에 대한 불적조사를 진행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었다. 일본 강점기에 나온 경주 남산 유적지도가 전부였던 상황 속에서 우리는 동남산과 서남산의 계곡을 샅샅이 뒤졌다. 고된 일과 끝에는 《삼국유사》 윤독과 현장답사기록을 꼼꼼히 적는 일을 빠트리지 않았다. 가끔 당시 경주 박물관의 학예관이었던 강우방(姜友邦)이 참여하곤 했다. 처음에는 윤경렬(尹京烈)의 안내로 산행을 시작했지만, 익숙해지면서부터는 둘이 다니곤 하였다. 불연이 특히 좋아했던 계곡은 동남산 칠불암의 마애불과 관음보살좌상이었고, 용장(茸長)계곡의 유적지도 참 좋아하였다. 그때의 보고서는 사찰 시리즈 《신라의 폐사》 I, II로 출간된 바 있다. 한국불교에 관한 대표적 논문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불교사상〉 〈신라의 불교집회〉 〈화랑들의 미륵신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향가 및 반가사유상의 해석학적 제언〉 〈한국불교와 일본불교〉 등이 있다. 원효 이외의 인물로는 의상(625~702)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화엄일승법계도의 근본정신〉 〈명효의 해인삼매론에 관하여〉 등 논문은 의상의 화엄사상에 대한 근원적 연구 논문이었다. 신라불교에 관한 이념적 논술로는 〈신라불교의 성격과 그 현대적 의의〉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먼저 삼국불교 수용의 상위(相違)를 논한다.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는 왕실에서 먼저 불교를 수용한 하향식 전법이었던 데 비해,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로부터 불교가 공인되는 상향식 방식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따라서 신라불교의 성격은 호법적(護法的)이고 국가 지향적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결론 부분도 신라불교의 이상이 갖는 현대적 의의에 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격의 논문으로 주목을 모은 또 하나의 논설로는 〈상징적 표현을 통해서 본 7·8세기 신라 및 일본의 불국토사상〉이라는 글이다. 불연은 불국토 사상의 연원이 한국적 산악숭배 신앙이었음을 밝힌다. 사실 오악삼산(五岳三山)에 관해서는 이기백(李基白)의 논문이 있었는데, 불연은 그 불교적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이어서 산악숭배의 불교적 종결을 오대산 신앙, 금강산 보살주처 신앙이라고 보았다. 모두 화엄사상의 영향하에서 빚어진 형태이지만, 그것이 한국의 경우에는 사방불(四方佛) 신앙으로 정착한다고 본 것이다. 사실 불교의 방위신앙은 도가적(道家的) 영향이리라는 막연한 추론밖에 없었지만, 불연은 동·서·남·북의 사방신앙이 《육방예경》 이래로 강조되어온 불교적 방위신앙의 전형이었다고 파헤쳤다. 우리는 여기서 불연의 학문적 관심이 인도철학에서 한국불교로 회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의 불연 논설에는 인도철학이나 비교사상적인 논술이 많다. 또 불교학을 다룰 때에도 언제나 인도철학적인 암시와 사색의 흔적들을 남기곤 하였다. 그러나 지적해야 할 점은 선종(禪宗)에 대한 논설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많지는 않지만 그는 고려불교, 특히 지눌에 대해서 그리고 조선불교의 만해 한용운 등에도 관심을 표했다. 결국 그가 한국불교의 종조(宗祖) 논쟁에 냉담했던 까닭은 한국불교를 중국불교의 아류(亞流)로 해석하려는 일부 주장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원효로 입문한 그에게 보조냐 태고보우냐, 혹은 돈오냐 점수냐 하는 식의 종파주의적 논쟁은 따분한 논의였으리라고 보인다. 3. 현대 한국불교에 끼친 영향 한 인간이 일생 동안 외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은 퍽 의미 있는 일이다. 더구나 학문의 길에서 고집스럽게 자신의 선택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존경받을 만한 일이다. 시류(時流)에 따라 지조를 바꾸고 편의에 따라 멋대로 해석하는 것이 세속의 인심이다. 그런 뜻에서 보면 학문의 길은 옹고집쟁이의 길이며, 외곬의 삶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고집이 우리 문화의 저변을 이루어 왔고 사상적 발전의 계기를 이루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자존심을 회복하는 일이다. 한국의 발전이 언제까지나 경제적 능력만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철학·사상·문화를 이해하고 그것을 세계화하는 일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것은 결코 국수적(國粹的) 고집이 아니며, 한국적 아이덴티티를 확립하고 우리의 문화 선양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확신한다. 불연 이기영의 삶은 ‘불교연구’라는 하나의 목표로 귀결되고 있다. 만학 끝에 유럽 유학에서 돌아온 1960년대 초반, 우리는 그분의 형형한 눈빛과 노도 같은 장광설(長廣舌)을 기억하고 있다. 불교라는, 당시로 보아서 고리타분한 가르침이 그의 말과 글을 통해서 표출될 때,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서는 기쁨을 우리는 누렸다. 2016년이 되면 그분의 서거 20주년을 맞게 되고 2022년은 불연의 100회 탄신기념이 된다. 그분이 살았던 시대와 비교해 보면 오늘의 사회상황, 불교적 환경은 천지가 개벽할 만큼의 엄청난 변혁을 겪어 왔다. 그러면서도 그분의 시대에서 느꼈던 불교에 대한 애정과 고쳐야 할 반성적 성찰은 여전히 그대로인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불연은 1994년에 간행된 고희논총 자서(自序)에서 이렇게 술회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어 주어야 할 주역들이 심각한 상업주의에 오염되어 있음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쉽게 돈을 버는 것이 어렵게 인격적으로 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이 사회에서 판을 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 사회에는 종교나 성인들의 이야기조차도 돈벌이를 위해 꾸며지고 있다. 그 책을 낸 사람들을 연일 대서특필의 광고로서 한 밑천 버는 승부를 하고 있다. 다소 시니컬한 면이 있지만, 우리는 이 주장을 반박할 만한 근거가 없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위선적 지식인들이 판을 치고 있다고 느껴진다. 우리의 삶은 엄청난 향상이 이루어졌지만, 저마다의 빈 가슴은 그대로이다. 그분을 떠나보내고 벌써 스무 해가 흘러갔다. 가신 이는 말이 없고 남겨진 이들은 여전히 시끄럽다. 일본 강점기에 활약했던 퇴경 권상로 등은 한국불교학 연구의 제1세대였고, 불연 등 불교학자는 제2세대에 해당하는 분들이다. 이제 그분의 제자들은 제3세대에 해당하며, 현재 한국 불교학계의 원로로 활동하고 있다. 그분의 직계 제자들 중에도 이미 고인이 된 분들이 많다. 장충식(동국대), 김상현(동국대), 윤이흠(서울대), 심재룡(서울대) 등이 직접 불연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분들이다. 남아 있는 이들로는 이민용(전 영남대 초빙교수), 정병조(금강대 총장), 정호영(충북대), 이범홍(창원대), 정승석(동국대) 등이 있다. 불연은 37권의 저술(공저 19권), 10권의 번역서, 66편의 논문을 남겼다. 국제불교학술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것은 12회, 국제회의 주관은 5회였다. 교수로 재직할 당시 여러 보직을 겪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초인적인 학술활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분은 현대 한국불교에서 크나큰 족적을 남겼다. 원전에 충실한 불교연구라는 새로운 풍토를 조성하였고, 불교를 통한 인접학문과의 연계 즉 불교적 지평을 확대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교대중화라는 큰일을 이루었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한국의 지성인 가운데 그의 영향을 입지 않은 이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연은 불교현대화와 한국 지식인들의 지적(知的) 불교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켰다는 점에서 선각자적 위치에 있다고 평가할 만하다. ■
정병조 / 금강대학교 총장. 경북 영주 출생.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동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동국대학교 교수, 동국대학교 부총장, 인도 네루(Nehru)대학 교수, 한국불교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한국 불교철학의 어제와 오늘》 《실천불교》 《불교문화사론》 등이 있다. 현재 불교학연구회 회장. |
첫댓글 감사합니다 지심귀명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