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향기
시각장애인 위한 역사 콘텐츠 개발하는 ‘비추다’ 김원진 씨
-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역동적인 문화 콘텐츠 만드는 게 꿈”
조상들의 삶과 문화가 고스란히 담긴 박물관은 매우 정적인 공간이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대부분의 관람객은 조심스러운 자세로 유물을 대하고, 해설사의 해설을 듣거나 도록을 보면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에게 박물관은 ‘유리의 감촉만 느낄 수 있는 공간’에 불과했다. 이랬던 박물관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3D 프린팅 기술을 통해 유물을 감각적으로 접할 수 있게 된 것. 지난 2018년부터 시각장애인을 위한 문화재 모형을 제작하고 있는 사회적기업 ‘비추다’의 김원진 대표를 만났다.
Q. 만나서 반갑습니다. ‘비추다’를 소개해주십시오.
A. 안녕하세요? 경상남도 김해에 자리 잡은 ‘비추다’는 시각장애인이 문화유산·미술품을 체험할 수 있도록 전시품을 복원·체험 가능하도록 제작하는 기업입니다. ‘비추다’는 ‘시각장애인의 문화적 경험을 색다른 방법으로 비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네 명의 직원들이 3D 프린팅, 입체 복사 등의 기술을 활용해 문화재 모형을 제작하고, 문화재 제작 키트를 만들어 시각장애인이 역사, 문화 향유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하고 있어요. 지역적 특성에 힘입어 가야 시대의 문화재 모형을 주로 제작해왔는데, 최근에는 문화재청의 의뢰를 받아 다른 문화재도 제작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열린 관광지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경상북도 고령의 유니버설 문화재 공간 구축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Q. 이 일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A. 우선 어린 시절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대학에서도 역사고고학을 전공했지요. 제게는 박물관이 무척 흥미로운 공간이지만, 대중적으로는 다가가기 어려운 공간, 재미없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떨칠 수 없더군요. 어떻게 하면 박물관을 좀 더 친숙한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한 시각장애인이 SNS에 올린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영국 대영박물관에서 비너스 상을 실수로 만지게 됐다. 시각장애인임을 밝히자 경비원이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유물도 만져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내용이었어요. 그것을 읽은 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시각장애인을 비롯한 ‘모두를 위한 박물관’을 구상해보자는 의지가 생겼습니다. 이후 시각장애인들과 여러 차례 인터뷰를 하면서 ‘시각장애인에게 보는 것은 곧 만지는 것이다’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관리 및 보존 측면에서 유물을 직접 만지는 일은 불가능했어요. 그때 돌파구가 된 게 3D 프린팅 기술이었습니다. 실제 유물을 만지기 어렵다면, 만져도 무방한 유물 모형을 제작하면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이를 구체화하여 ‘시각장애인도 체험이 가능한 박물관’으로 ‘2017 소셜벤처 아이디어 경연대회’에서 수상했습니다. 사회적기업가 육성 사업으로 채택되면서 창업까지 하게 되었죠.
Q. 진행하고 있는 일을 자세히 소개해주십시오.
A.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요, 하나는 문화재 및 유물 모형을 3D 프린팅 기술로 제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작한 문화재와 유물 모형을 활용해 전시 및 체험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것입니다. 3D 프린팅 기술로 유물을 제작하며 시행착오도 꽤 많이 겪었습니다. 테스트용으로 만든 유물 모형의 감촉이 플라스틱 촉감과 비슷했던 게 가장 큰 문제였어요. “문화재보다는 장난감 같다” “실제 유물과 비슷한 촉감이면 좋겠다”는 시각장애인의 의견을 반영해 3D 프린팅 모형 겉면에 흙이나 청동 등 문화재 외관과 최대한 유사한 감촉을 덧붙이는 과정을 추가했습니다. 전시를 기획할 때는 프로그램 선정에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인데요, 최대한 실생활에 밀접한 유물로 공감대를 형성하도록 구상합니다. ‘오늘날과 달리 과거에는 이러한 물건을 사용했구나’라고 알아차리는 순간 역사는 더 이상 과거에만 머물지 않게 됩니다. 오감을 활용할 때 사람들은 가장 쉽고 재미있다고 여깁니다. 직접 만들어보는 활동을 비롯해 암전 체험, 예절 체험 등도 진행하면서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우도록 노력합니다.
Q. 이용자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A. 처음 창업했을 때와 달리, 지금은 굉장히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피드백도 적극적으로 줍니다. 2018년 부산맹학교를 대상으로 역사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했을 때 한 학생이 그러더군요. “그간 유물의 형상을 제대로 떠올려보지 못했는데… 역사란 이런 것이었군요. 소중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들었던 기억이 그 순간 사라졌습니다. 지난해 경상남도 진주 청동기문화박물관과 진행했던 ‘3D로 만든 내 손에 진주 기획전’도 떠오릅니다. 시각장애인 및 유관 기관 관계자를 모시고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옛날 사람들이 만든 목걸이가 이렇게 섬세할 줄 몰랐다”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는데 직접 만져보니 더 신기하고 놀랍다” 등의 감상이 이어졌어요. 김해 지역아동센터에서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역사를 알리는 프로그램도 진행했는데,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모형 덕분에 아이들이 더 쉽고 재미있게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Q. 아쉬움이나 어려움은 없는지요?
A. 함께 전시를 기획하거나 문화재 모형을 테스트할 시각장애인이 더 많이 계시면 좋겠어요. 회사가 도심 지역에 있지 않다 보니 교통편이나 접근성이 원활하지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시각장애인을 직원으로 채용하지 못하는 점이 아쉬워요. 기술적인 한계와 예산 부족으로 시각장애인 이용자가 원하는 만큼 문화재 모형을 제작하기 어려운 현실에도 부딪히고 있어요. 현재의 3D 프린팅 기술로도 디테일을 살린 섬세한 표현에는 한계가 있거든요. 그러나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한층 더 분발해 좋은 문화를 선도하는 기업이 될 겁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A. 조만간 전주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게 단기적 목표입니다. 장기적으로는 ‘암전박물관’을 만드는 게 꿈입니다. 암전박물관은 깜깜한 박물관 안에서 직접 유물을 만지고, 실컷 떠드는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활동할 시각장애인 역사해설사를 키워내는 것 또한 꼭 이루고 싶은 소망입니다. 시각장애인에게 유물을 관람하고 알아가는 기회를 주는 동시에 새로운 일터를 제공한다면 장애인 인식개선도 이뤄질 겁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가치와 미래를 창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수정·신혜령 기자
* 2023년 02월호 <손끝으로 읽는 국정> 제 184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