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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가 어릴 때는 미래의 기둥이 되라고 응원을 많이 받았고 전쟁 끝난지 10년도 안 된 시기에 전쟁이 하도 지긋지긋하셨는지 어머니께서 "너희들도 군대를 가서 고생을 하면 어떻게 하니?"하고 걱정을 했는데 세월이 이렇게나 많이 흘러 손자들이 군대를 가게 생겼으니 참..... 그래도 어린이들은 참 보기 좋아요.
● 메살리나의 몰락
※ 예전 우리나라가 무역, 건설(해외) 등으로 약진하고 있을 때가 60년대를 거쳐 80년대의
군사정권까지였다. 이때 효율성은 둘째치고 모두가 일에 빠져 살았다. 특히 사업가나 고위직
관료 및 정치가들은 家庭事보다 바깥 일에 매진하다 보니 가정 내에 불상사가 가끔 있었다.
이런 상황이 황후에게 아주 심하게 발생한 것이다. 창녀 노릇을 자처했다고 하니 더 할 말이
없다. 황후를 사랑하지만 제국의 일에 빠진 황제의 방관(?)으로 일이 터진 것이다. 배우나 난봉
꾼과 놀아난 것은 황제가 묵인했다고 한다. 그래도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황제가 독특한
思考 구조를 가진 사람이라 해도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런데 이번에는 대형사고였다. 미남이고 독신이고 차년도 집정관에 선출된 원로원 의원에게
빠져 둘이 결혼을 한 것이다. 그냥 성행위를 즐기고자 한 짓이 아니라 중혼(重婚)이다. 이에
대한 처벌은 사형이다. 도대체 둘 다 정신이 나간 사람들이다. 황후는 그렇다고 쳐도 남자는
미친놈 아닌가 말이다. 황제를 죽이고 자리를 차지할 생각도 없었다고 한다.
뒤늦게 비서진들이 항만공사 현장에 나가있는 황제에게 보고하고 마지못해 느지막하게 돌아
온 황제의 친국(親鞠) 끝에 남자는 사형판결이 떨어졌고 별장에 가 있던 황후는 근위대 대대
장이 가서 죽여버렸다. 그냥 두면 황제가 도로 살려 줄 것 같아 비서실장이 그런 조치를 내린
것이다. 보통 황제 같으면 돌아버릴 상황인데도 황제는 아무 표정 없이 일에 몰두했다고 하니
참. 그 꼬락서니를 보고는 국민들이 존경심을 버렸다. 50평생 자존심도 없이 살다가 갑자기
황제가 된 사람의 증표가 아니었을까? 성적 능력이 없는 자의 자포자기일 수도 있다.
● 기본 정책
로마에는 속주출신 사람들이나 해방노예들과 그 후손들이 시민권을 받아 로마 제국 속에
녹아 들어 자리를 잡고 출세를 하고 원로원 의원까지 되는 일이 많았다. 갈리아의 부족장들이
대거 원로원 의석을 요구하자 보수파는 반대했다. 이에 황제는 자신의 조상도 원주민인 ‘사비
니 족’출신(산악지대)이며 문호개방을 막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역설했다.
著者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언급한 것 중에 인도가 영국의 식민 지배 중에 많은 인도인이
독립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영국의회 의석을 요구한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인디라
간디’와 관련해서 인도가 평화적 독립을 요구했다고 한 역사적 평가와는 다른 얘기로 들린다.
혹시나 著者가 한국을 식민지로 두고 중국, 동남아를 침공한 일본 출신이라 그런 말을 한 것
은 아닐까 하고 꼬아보았다.
● 아그리피나의 야망
이 여자의 아들인 황제 ‘네로’가 워낙 유명하지만 이 여자도 대단한 여자다. 족보를 보면 ‘칼리
굴라’ 황제의 동생으로 ‘아우구스투스’ 혈통이다. 父系에 철저한 한국에서는 外家의 핏줄이나
항렬은 쳐주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로마 제국 초창기는 사정이 그렇지 못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여자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워하면서도 결혼도
여러 번 했고 지금 홀아비 상태에서 여자가 없지는 않았다. ‘메살리나’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황후를 간택하는 일도 비서진에게 맡겼다. 후보가 3명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아들 하나를
두고 젊어서 과부가 된 ‘小아그리피나’다. 또 하나는 황후이었다가 이혼한 후 再登場 케이스다
.
도대체 이 사람들은 그런 걸 초월하고 살았나 보다. 현대에서도 이혼했다가 다시 결합해서 잘
사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흉 될 것은 없다. 세 번째는 로마 최고의 미녀라고 했는데 나중 ‘小아
그리피나’의 질투(자기 보다 예쁘다고)로 살해되었다.
해괴한 과정을 거쳐 ‘小아그리피나’는 친 삼촌인 ‘클라우디우스’ 와 결혼하면서 황후가 되었다.
자기 뱃속으로 낳은 ‘네로’를 황제로 만들고자 했지만 그 보다는 중국의 ‘여태후’(漢 유방의
황후), 唐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 淸의 ‘서태후’(西太后) 같이 실질적인 女皇帝가 되고 싶었
던 것이다. ‘클라우디우스’가 친조카 와의 결혼을 수락하면서 비극을 잉태하게 되었다.
자신의 신분을 “아우구스타-여자로서는 최고의 존칭” 로 올린다든지 황제를 조종해서 황후
후보 중 제일 미인이라는 여자를 죽인다든지 자신이 태어난 지금의 독일 쾰른을 식민도시로
격상시키는 등 야망을 드러냈다. 그녀는 나중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친 아들 ‘네로’
를 유혹했다는 구설을 듣기는 하지만 서방질도 안 하고 가정을 지키고 前室 자식들과 ‘네로’의
교육에 힘썼다.
● 철학자 세네카(L. A. Seneca)
한국인들에게도 꽤 많이 알려진 스토아 학파 철학자다. Alexander 대왕의 스승이 Aristoteles
였던 것처럼 ‘네로’의 스승으로 확실한 철학자를 선택했다. 그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Lucius Annaeus Seneca)’다. 후세에 칭하기를 공화정 때의 최고 철학자는 ‘키케로’이고 帝政
때는 ‘세네카’라고 했다.
‘세네카’는 BC4년 에스파냐의 코르도바에서 태어났다. 변론술(辯論術) 학자를 아버지로 두어
웅변가로 이름을 날린 후기 스토아(Stoa)학파 철학자다. 원로원에서 인기가 아주 좋았다.
‘세네카’의 이력:
- BC31년(35세) : 회계감사관(‘티베리우스’ 황제)
- 뛰어난 재치와 웅변으로 인기도 많았으나 ‘칼리굴라’의 미움을 받았다가 살아났다.
- AD 41년 결국 ‘메살리나’한데 찍혀서 황족과의 간통이라는 죄를 뒤집어 쓰고 코르시카로
귀양갔다. 유배 덕에 건강도 되찾고(폐결핵을 규칙적인 유배생활로 극복) 공부를 많이 했다.
‘小아그리피나’ 덕에 Come Back 한 세네카는 미래 황제인 ‘네로’의 “文” 담당 스승이 되었다.
이 여자가 포석한 내용을 살펴보자.
1. 가정교사 겸 “文” 담당 : ‘세네카’(차후 황제 보좌관) – 에스파냐 출신
2. “ “武” 담당 : ‘S.A. 부루스’를 근위대장이 되도록 황제를 조종
3. 막강한 그리스 출신 해방노예 비서관 세 명을 삶았다.
● 네로의 등장
AD50년 아들 ‘도미티우스(네로)’를 황제의 양자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황제의 친 아들은 9살,
네로는 13살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네로 클라우디우스’로
바꿨다. ‘네로’는 사비니 족 말로 “과감한 사나이”라는 뜻으로 “클라우디우스 氏族”에서는
흔한 이름이다.
‘小아그리피나’의 “아들 황제 만들기 project”를 위한 전략적 행보를 정리해 보자.
- AD51년(네로 14살) 성년식(보통은 16살, 17살 때). 공적 생활이 가능함을 말한다. “예정
집정관” 자격을 취득했다. 21살이면 집정관이 된다.
- “프린켑스 유벤투스”칭호 획득. “황태자”의 예우. 이걸 기념해서 군단 병에게 돈을 나눠
주고 경기대회도 열었다. 황제의 친 아들은 존재가 희미해졌다.
- AD53년 16살의 ‘네로’와 황제 친딸 ‘옥타비아’를 결혼시켰다.
16살의 네로는 편법으로 원로원에 등장해서 법안을 제출했는데 극성 엄마와 최고의 가정교사
‘세네카’의 교육으로 유창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동시에 구사했다고 한다.
● 晩年의 클라우디우스
자라온 환경이나 성격상 과단성이나 주도면밀과는 거리가 있고 보채는 사람이 내미는 서류는
대강 서명해주는 이 사람이 아무리 열성으로 황제 노릇을 한들 ‘小아그리피나’와의 결혼생활
까지 겹쳐서 순탄하게 죽기는 글렀다. 그래도 황제는 비서실장 ‘나르키소스’의 정성으로 잘
견뎌냈다.
당시의 국경을 훑어보면 다음과 같다.
- 라인 江+도나우 江의 경계: 고착된 상태. 즉 문제가 없는 상태
- 브리타니아 점령 : 지금의 잉글랜드는 간수했으나 웨일스 쪽은 지지부진
- 북 아프리카 : 가끔 사막지대 유랑민이 준동하나 현지 보조병으로 잘 막음.
- 東邦 : 최대의 적 파르티아가 아르메니아를 침범하기는 하나 별고 없음.
- 유대 땅 : 로마化를 거부하는 그들의 특성을 인정. AD44년 두 번째 헤롯 대왕인 ‘헤롯
아그리파’가 죽고 나서는 직할 통치 중. 정교분리(政敎分離)의 로마와 신권정치
(神權政治)를 주장하는 유대인 또 그리스 주민 對 유대 주민의 갈등 등 화약고
같은 곳이다.
여기서 참고로 알고 지나갈 통계가 있다. 막강한 로마제국을 보면 제국 전체에 한 100만명쯤
의 병력이 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실제로는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정한 규칙이
지켜지고 있다.
- 로마 정규군 : 15만명(25개 군단 –로마시민)
- 보조병 : 15만명
이 숫자는 로마의 인구, 稅收(경제력과 속주세를 포함한 세금 등)를 감안해서 정한 것 같다.
‘클라우디우스’ 때 인구가 600만명(로마시민)으로 100만명이 늘었으나 원칙을 지키고 있었다.
◑ 당시의 식량정책의 기본;
* 주요 곡물(밀)은 수입을 원칙으로 한다.
* 농지법(‘그라쿠스’ 형제 제안-‘카이사르’ 실시)에서 자작농(중소 규모)을 장려. 본토는 밀을
생산할만한 평지가 없다. 포도와 올리브는 성공해서 자작농이 살아났다. 밀 생산이 유리한
곳은 밀을 생산하고 그걸 수입하면 된다. 본토에 유리한 것은 그것을 발전시키면 된다는
사고방식이다. 이들은 이미 20세기의 “經濟學 原論”을 실시하고 있었다.
* 빈민에게는 밀을 무상 공급
특이한 것은 유권자(시민)를 의식하지 않는 속주(시민 없음)에서 로마인이 현지인을 고용해서
대규모 농장을 경영했다. 이는 다국적 기업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런데 ‘티베리우스’ 때
금융업자가 해외 대규모기업(농장)에만 돈을 빌려주자 (금융파동) 법에 따라 융자의 일정 부분
을 반드시 본국에 투자토록 했다. 그 공공 자금을 싸게 융자해서 본국의 자작농들의 자금고갈
을 해결했다. 부럽다. 또한 상품의 차별화로 경쟁력을 유지했다. 예를 들어 후추를 수출하는
인도 왕실에는 로마産 고급 포도주가 놓여있었다고 한다. 황제는 SOC는 충실히 했다. 水道,
지중해의 Hub Port가 될 오스티아 항만(로마 시의 외곽 지중해 항구) 건설 등이다.
● 클라우디우스의 사망(AD54년 63살)
아들을 황제로 만들 준비가 끝난 ‘小아그리피나’는 비서실장 ‘나르키소스’가 요양 차 자리를
비우자 독버섯을 먹여 남편이자 삼촌인 황제를 죽였다. 재위 13년이다. 미리 포석한 대로 근위
대장이 딱 버티고 ‘네로’를 지지하자 원로원도 즉시 공인했다. 군중은 참 우매하고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클라우디우스’ 즉위 때는 떨떠름했고 마누라한테 빌빌거리는 황제를 우습게 보았
다. 해방노예 출신의 비서 진도 꼴 보기 싫었다. 역사가들은 황제의 유언장을 ‘아그리피나’가
공개하지 않은 것은 죽은 황제가 ‘네로’를 후계자 명단에 넣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서글픈 일이 있었다. 철학자 ‘세네카’는 ‘네로’의 가정교사 겸 보좌관이었는데 죽은
황제를 비난하는 조롱에 가까운 글을 만들어 신임황제 등극 축하 잔치 때 그 앞에서 낭독하고
모두를 웃게 했다고 한다. 유교적 사고가 아니라도 著者 ‘나나미’ 여사 말마따나 “인간성에
대한 상냥함이 결여된” 재승박덕(才勝薄德) 한 자의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 가지 인간적 결점을 보인 ‘클라우디우스’는 일만 열심히 하면 알아주겠지 하는 타입이다.
하지만 대중은 “스타성”을 가진 자를 더 좋아한다. ‘클라우디우스’ 나 비서실장 격의 ‘나르키
소스’나 중압감과 과로로 기진한 것은 아닐까? 역사에서 악한 者가 벌 받지 않고 명대로 살다
죽는 경우는 많다. 하지만 ‘네로’ 본인은 물론 ‘小아그리피나’나 ‘세네카’도 허망하게 죽는 결말
을 보면 순리가 없는 것은 아닌가 보다.
첫댓글 메살리나는 이렇게 설치고, 小아그리피나는 저렇게 설치고, 두 여자가 무척이나 설쳐 대었군. 참 재미 있게 읽었네.
여자가 설친다고 하면 요즘 세상에서는 욕 바가지가 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게 되지.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