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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교훈
우리는 역사를 통해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를 직시하고 배운다. 각 개인으로서도 집안의 내력을 거울삼아 새로운 희망과 다짐을 한다. 이런 추세는 사회와 국가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누구나 과거를 익힌다. 역사는 과거에 발생했던 일들에 대한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나침판이 되는 것이 바로 역사이다.
「E.H 카」」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라고 하였다. 사실은 과거의 것이고 역사가는 현재에 산다. 과거의 사실 가운데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을 선택하는 기준과 그 사실들을 일정한 관계로 맺어주는 해석의 관점은 역사가를 둘러싼 현재의 환경, 역사가의 경험, 역사가의 이념과 개인적 기질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다. 그래서 사실과 역사가의 상호작용은 불가피하고 자연스럽게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먼 과거에 있는 것이라도 역사는 현대사일 수밖에 없다. 역사란 오늘을 사는 역사가들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건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역사는 냉정할 수밖에 없고 가정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나도 많은 시간을 역사에 관련된 서적을 접하였다. 처음에는 주로 우리 『한국사』와 『이야기 중국사』를 읽다가 「사마천」의 『사기』 전편을 통독하고, 이어서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비롯한 그리스를 역사서를 읽게 되었다. 이어서 로마사에 집중하다가 개별 전쟁사 혹은 인물과 영웅을 중심으로 하는 수많은 평전을 읽었다.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와 「몸젠」의 『로마사』와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 「움베르토 에코」가 편찬한 『중세』 전권을 완독하고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를 흥미롭게 읽었다. 일종의 역사 안내서인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는 비교적 최근에 읽었는데 역사 이해에 상당한 도움을 주는 책이었다. 특히 「J.네루」가 1930년대에 감옥에서 딸(인디라 간디 여사로 후에 인도 수상을 역임)에게 썼던 편지를 모아 출간한 『세계사 편력』은 위대한 인물이 갖추어야 할 역사 지식에 대한 전범(典範)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그런데 「미메시스」의 개념은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지만 「에히리 아우어바흐」의 책을 통해서야 확실한 개념을 이해하게 되었다. 먼저 개념서를 읽었더라면 전반적인 역사와 문화사의 이해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잘 정돈된 방법에 대한 사전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인식하게 되었다. 세상은 자기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근거가 미약한 의견과 설익은 주장에도 모르면 그대로 지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 1892.11.9 ~ 1957.10.13.)는 독일 태생의 문헌학자 겸 문학사가이다. 이스탄불의 대학에서 강의하였으며, 이때의 연구축적이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적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 예일대학교의 교수를 역임했다. 주요 저서인 『미메시스 서양 문학에서의 현실묘사』가 각국어로 번역되었다. 우리나라에는 『미메시스』로 번역되었다. 「아우어바흐」의 이 책은 문학이론, 역사, 비교문학, 문화사를 비롯한 다양한 학문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와 히브리어 성서에서부터 르네상스 인문주의 선구자 「단테」를 거쳐 「프루스트」와 「울프」에 이르기까지 서유럽 문학의 역사를 방대하게 아우르는 이 책은 지금도 인문학 강좌의 필수 동반자다. 이 책은 문학이론, 역사, 비교문학, 문화사를 비롯한 다양한 학문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와 비슷한 책으로 원시 신앙의 기초가 되는 주술과 이와 관련된 풍습, 신화를 집약한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The Golden Bough』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신화학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히는데 인류의 신화, 신앙, 풍습 등을 해박한 지식으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전 세계 신화의 유사성과 관습의 동일성을 밝혀낸다. 이 책은 종교, 신앙, 신화, 인류학 분야의 보고이다. 여하튼 두 책은 인문학에 관심을 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책이다.
‘미메시스’( mimēsis )는 모방, 모사, 재현, 묘사 등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현실을 예술 작품에 그려낸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다. 하지만 「미메시스」란 단순한 모방을 넘어 자연을 모방하는 예술적 행위로 더 유명하다. 그리스어로 춤 · 몸짓 · 얼굴표정 등에 의해서 인간 · 신 · 사물 등을 모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를 자연의 재현이라고 말했다. 「플라톤」은 감성계의 개별적 사물은 참된 실재인 「이데아」의 모방이라고 하고 「이데아」보다 낮은 차원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예술도 모방으로 이해하여 「이데아」의 영상이라고 하고 감성계의 모방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여 예술을 멸시하였다. 「플라톤」에 의하면 모든 예술적 창조는 「미메시스」의 형태이다. “이데아의 세계”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신이 창조한 형태이며, 인간이 자신의 생활 안에서 지각하는 구체적인 사물들은 이 이상적인 형태가 그림자처럼 어렴풋이 재현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달리 예술가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상 · 행동 · 감정을 모방한다고 본다. 예술(서사시, 서정시, 비극, 희극, 무용, 음악 등)은 인간의 마음의 내부를 모방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모방하는 것과 모방 된 것을 즐거워하는 것은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갖춰져 있는 것이라고 하여 여기에서 예술의 유래를 구하였다.
이 책은 『오디세우스』와 성서의 대표적 고찰에서 시작, 「에밀 졸라」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론까지 약 3000년을 다루는 글은 총 20개 장으로 나뉘었고, 그리스어를 비롯해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독일어, 영어의 원문을 다루면서, 서사시, 역사, 로망스, 연극, 자서전, 에세이, 회고록, 소설 등 거의 모든 장르를 망라한다. 19세기에 현대 「리얼리즘 문학」이 처음 등장하여 발전하기까지 서양 문학의 현실 모방의 궤적이 큰 줄기를 이루며 설명된다. 언어의 문맥과 역사와 사회적 맥락을 중시하고, 실증적이라 불리는 자질구레한 문학 주변적인 사실의 고려를 대담하게 배제하면서 커다란 리얼리즘의 뿌리를 드러내는 과정을 보이면서 진정한 리얼리즘이란 무엇인지도 어느 정도 간파하도록 만든다. 이 책은 『오디세우스』의 서사시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남긴 주요 작품들을 치밀하게 해석한 비평의 걸작이다.
토인비(Arnold Toynbee 1889-1975)는 문명이 탄생, 성장, 붕괴, 해체, 4단계의 과정을 거친다는 『문명순환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문명이 만나는 도전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척박한 땅이 주는 자극, 새로운 땅이 주는 자극, 갑작스런 외부의 충격(공격), 외부의 계속적인 압력(압박), 그리고 사회 내부 집단에 대한 제재(압제)다.
문명이 왜 응전에 성공하거나 실패하며, 응전의 성패를 결정짓는 요소는 무엇이고,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가? 그의 연구에 의하면 사회의 진보는 언제나 「소수의 창조적 천재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어느 사회나 소수의 창조적 천재가 있는데 비창조적 다수자가 자신의 비전을 받아들이고 따를 때 사회적 창조행위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를 모방/재현이라는 뜻의 미메시스(mimēsis)라고 하였다. 창조적 소수자가 미메시스를 창출하면 사회는 응전에 성공하고 문명은 성장한다. 반면에 창조적 소수자가 창조력을 상실하면 비창조적 다수자가 미메시스를 철회하는데 이런 과정을 ‘화를 내며 비난한다’는 뜻의 네메시스(nemesis)라고 한다.
창조적 소수자가 창조력을 잃고 지배적 소수자로 타락하면 사회는 '내적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와 폭력으로 맞서는 '외적 프롤레타리아트'로 분화하며, 사회는 응전능력을 잃고 혼란에 빠지며 문명은 쇠퇴한다.
그런데 소수의 창조적 천재들은 왜 창조성을 잃고 지배적 소수자로 전락할까? 인간의 본성이 만들어내는 우상화 현상 때문이다. 「토인비」는 우상화의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누었다.
첫째는 일시적인 자아의 우상화다. 한 번 응전에 성공함으로써 권력을 차지하고 숭배의 대상이 된 창조적 소수자는 다음 도전의 성격이 지난번과 다른데도 과거의 방식으로 응전하다가 실패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는 일시적인 제도의 우상화다. 성공한 창조적 소수자는 그 성공을 가져온 체계와 제도에 집착하다가 응전에 실패한다.
셋째는 일시적인 기술적 우상화다. 성공한 창조적 소수자는 그 성공을 가져다준 생산기술과 군사 기술에 매달리다가 실패한다.
소수의 창조적 천재가 연이어 출현하지 않으면 문명은 몰락의 함정에 빠진다. 그 사회는 지배적 소수자와 프롤레타리아트로 분열해 통합성을 상실하고 내적 프롤레타리아의 저항이나 외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타격으로 인해 무너지고 만다.
「토인비」의 패러다임에서 문명의 흥망은 창조적 소수자, 내적 프롤레타리아트, 외적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세 집단의 관계와 상호작용에 달려있다. 그에 따르면 이 세 집단은 '세계국가'와 '세계종교'와 '영웅시대'를 남겼다. 「토인비」는 철학과 종교와 전쟁을 역사의 세 축으로 보았다. 지배적 소수자는 철학을 낳고, 그 철학은 때로 세계국가의 원동력이 된다. 내적 프롤레타리아트는 고등종교를 낳고, 그 종교는 세계 교회의 형태로 자기를 구현한다. 외적 프롤레타리아트는 영웅시대를 낳고, 그것은 야만족의 침략에 따른 살상과 멸망의 비극이 된다. 로마제국과 오스만 제국, 대영제국은 지배적 소수자의 유산이고, 기독교와 이슬람은 유대 사회와 아랍 사회의 내적 프롤레타리아트가 만들었으며, 로마제국과 비잔틴 제국을 무너뜨린 영웅시대는 외적 프롤레타리아트가 만든 드라마였다는 것이다.
「토인비」의 역사 인식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권력을 잡은 소수의 창조적 천재는 안주하면서 그의 주변은 지배적 소수자의 행태를 보인다. 이들은 어느덧 기득권 수호와 유지에 함몰되어 서서히 퇴보의 길을 걷게 된다. 우리의 경우에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권력을 뒷받침하는 세력이 과거의 육군과 정보부, 보안사 등을 거쳐 최근에는 언론과 검찰이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세력이 최초의 순수성을 상실하고 그 자체가 지배적 소수자의 행태를 보이면서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게 된다. 타 분야는 언급할 수 없지만 군 내부의 분야별 실세들은 나름대로 지배적 소수자로 변모한 전례가 있다. 군내 사조직은 많은 후유증을 남겼고, 이후에도 지배적 소수자들은 이미 진급 연한이 훨씬 초과한 사람도 진급시키거나 지역 편중 인사의 횡포를 감행하여 스스로 정무적 판단을 포기하기도 하였다.
한편 우리와 대적하고 있는 북한은 영원한 외적 프롤레타리아트이다. 어떤 경우에도 북의 위협에 굴종하거나 상응한 대응을 회피하는 오류는 절대 있어서는 곤란하다. 과거사 문제로 경제적 위협을 가하는 일본이나, 무역문제로 태클을 거는 중국도 예외는 아니다. 무역 보복을 하는 일본의 제재에 대응하여 부품과 원자재를 자급자족하는 체계를 구축하고, 중국의 위협에 대응하여 동남아 거점화 전략과 기타 해외 시장의 확대를 도모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 해결의 첩경은 고도의 외교력이 뒷받침해야 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동시에 우리 내부에는 서로 반목하며 대립하는 내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좌우 각 진영은 서로를 내적인 방해세력으로 인식한다. 그나마 다행히도 국가가 큰 위험에 놓일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다만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경우는 다르다. 극우나 극좌는 심각한 내적 프롤레타리아트이다. 이들의 주장에 편승한 각 진영의 사람들도 크게는 이들 범주에 속한다. 남북 대립에 더하여 지역과 세대, 그리고 젠더 갈등까지 부추기는 다양한 남남갈등은 역시 내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아류에 속한다.
어떤 경우에도 북한의 행태 혹은 외부 국가와의 국제관계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수준 이하의 전략이다. 오로지 국가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실용적인 노선을 따른다면 논쟁은 불필요할 뿐이다. 지엽적인 논쟁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가 중단없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계층에서 소수의 창조적 천재가 탄생해야 한다. 정치가, 경제가, 과학자와 문화 예술가 등 창조적 천재가 등장해 새로운 미래의 역동적인 비전을 제시하여 「미메시스」를 복원하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희망이 없다. 더구나 예상되는 지배적 소수자의 등장을 적절히 억제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않으면 불행한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훗날의 역사는 이를 냉정하게 평가할 것이다. 안팎으로 중대한 응전의 시점에서 역사의 교훈을 직시하고 우매한 대중을 올바른 길로 계도(啓導)하는 일이 참다운 지성인에게 부여된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사명이다. (2022. 2. 2 작성/ 2. 23 발표)
첫댓글 E.H.카가 말했나요,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요? 토인비도 탄생, 성장, 쇠퇴, 해체를 반복하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이어진다는 이야기를 했군요?
수도 앖는 역사가 그걸 증명하고 더 많은 역사가들이 그런 교훈을 이야기해도 역사는 성장과 쇠퇴, 부흥과 붕과의 사이클을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生住壞空의 윤회와도 같은 것이지요. 성공과 실패, 일어섬과 무너짐, 번뇌와 깨달음...
인간의 삶 또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1980년대에 발표된 소설 가시나무새(The Thorn Bird)라는 소설이 그런 우리 인간의 한계와 숙명을 잘 그렸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어머니가 저지른 숙명적 과오를 그의 딸 또한 그대로 반복하는...
역사에 대한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장대한 편력의 글 잘 읽었습니다. 역사의 교훈으로부터 배우는 미메시스(mimēsis)의 의미, 모방과 재현, 도전과 응전의 지혜를 깨닫게도 해주십니다. 고맙습니다~
남당친구께서 엄청난 양의 독서를 하셨군요.경의를 표합니다.저는 한영우교수님의 '다시 찾은 우리역사'뿐이니 너무 초라합니다.
'세상은 아는마큼 보인다'는 그 언어에는 동조합니다.아울러 독서영역은 자기의 가치추구의 방향성에 기인한다고 말하고 싶네요.
저는 고전에 물들어 지난번에 서울에 갔을 때,'고문진보'를 사와서 아직 읽지 못하고 있네요.철학서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단문밖에 읽지못한 아쉬움이 큽니다.토인비의 '문명순환론'은 두고두고 되새겨 볼 내용이네요.
북한문제는 문우회원 18명 생각이 다 다를 것이기 때문에 논하기가 조심 스러운 내용 같네요.
엄청난 독서량의 뒷받침 하는 글,잘 일겄어요.감시해요.
본 내용은 22일 CEO 조찬모임에서 설명했던 것 입니다. 그들은 모두 좋은 대학과 직장에서 최상위 직위에서 근무했던 역전의 용사들입니다. 군 출신 못지않게 책임감과 사명감, 애국심도 투철한 편입니다. 모두 대관소찰하여 국가의 미래를 위해 어떤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인가의 차원에서 이해하여 주시길 바랍니다~두 분의 과찬에 유구무언입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다라는것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역사교과서는 헌법에 부합ᆞ사실성ᆞ공정성면에
서 너무많이 왜곡되었더군요.
공주 영상대 L 교수는 우리역사 교과서는 북한 역사교과서같다는
혹평을 하던군요.
하루속히 우리역사교육이 정상으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듯 역사의 발전도 모방에서 출발한다고 봅니다. 토인비가 강조한 도전과 응전도 과거의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때로는 발전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퇴보를 낳기도 하지요. 로마의 유명한 수사학자 퀸틸리아누스는 "역사는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하는 사람의 의도에 의해 기록된다"고 하였습니다. 즉 승자의 기록이지요. 가까운 예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두고 보수와 진보정권이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조선의 역사를 보더라도 당시엔 역적이 되었다가 세월이 흐른 후에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았던 사실들을 볼 수 있지요. 결국 우리 인간이 얼마만큼 균형감각을 유지하느냐에 따라 보다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게 우리의 한계다. 그래서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고 꾸준히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남당의 다독과 해박한 역사지식에 감탄합니다. 남당의 분석과 견해에 공감합니다. 몇년 전에 직역한 '중국 중학교 역사 교과서'를 다시 봅니다. 우리 역사와 대비하려는데 쉽지가 않네요.
평소 제목만 알고 펼치지 못했던 책들의 내용을 간접독서하는 귀중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견해라고 간단히 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유구무언!" 섣부르게 말을 보태 봐야 탄로날 일 뿐이라서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