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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민족정기구현회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의 암살범 안두희(安斗熙, 1917~1996)
민족의 지도자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의 암살범 안두희(安斗熙, 1917~1996)에 대해서 순흥안씨(順興安氏)라고만 알려져 있지 계파는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안두희가 우리 집안 자손이다고 할 문중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두희(安斗熙, 1917~1996) 요약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 암살범. 1949년 6월 백범을 암살하여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 잔형면제를 받았으며 정치적 의혹에 대해 김구 선생 살해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족하자 잠적하였다. 남은 여생을 은신생활로 보내다가 끝내 배후를 밝히지 않았으며 박기서에게 피살되었다.
본문 평북 용천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934년 신의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밑에서 일하다가 1939년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학과에 편입했다. 그뒤 중국 등에서 상업 활동을 하다가, 1947년 월남하여 서북청년회 총무부장으로 활발한 우익 활동을 하였다. 이때의 활동으로 당시 특무대장이던 김창룡과 교분을 갖게 되었다. 1948년 육사 특8기로 입교해 포병사령부 연락장교가 되고, 이듬해 한국독립당에 입당해 백범과 인연을 맺었다.
1949년 6월 26일 낮 12시경, 전투에 나가면 생사를 기약할 수 없으므로 마지막으로 선생을 뵈러 왔다며 경교장으로 백범을 찾아가 그에게 4발의 총탄을 쏘았다. 백범은 순국하고, 이 사건은 당시 정치 상황과 맞물려 많은 의혹을 낳았으나 그의 단독 범행으로 처리되었다. 육군 포병 소위였던 그는 곧바로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석달 후 15년으로 감형되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포병장교로 복귀하였다가, 1951년에 잔형을 면제받고 대위로 전역했다. 그리고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되었다.
그뒤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 공장을 경영하다가 4·19혁명 이후 김구선생 살해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족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잠적하였다. 1961년 진상 규명 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소멸로 풀려나고, 1965년에는 백범 독서회장 곽태영으로부터 칼로 목을 찔리기도 했으나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약 10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필사적인 은신 생활을 했으나, 1987년 3월 민족 정기 구현회장 권중희에게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발각되어 몽둥이를 맞으면서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91년과 1993년에 권중희로부터 수차례에 걸친 응징을 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암살 배후에 대한 자백을 하기도 하고 백범 묘소를 강제 참배하기도 하였다. 1994년에는 국회 법사위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진상 조사 소위원회에서 증인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끝내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박기서에게 피살되었다. 저서에《시역의 고민》(1955)이 있다.
『시역의 고민(弑逆의 苦憫)』
1955년 학예사에서 펴낸 안두희(安斗熙)의 수기이다.
l949년6월26일 12시45분.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의 흉탄은 아직도 이 나라 민족정기의 암울한 그늘로 우리 민족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누가 이 수기를 다 읽을 수 있을까? 아무리 자신의 심경을 드러내려 한다지만 한 글자 읽을 때마다 솟구치는 분노는, 오히려 오늘을 사는 나 자신에 대한 미움과 연민으로 다가오는 듯 하다.
아니, 오늘의 우리는 지금도 김구선생님을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민족의 진정한 통일과 자주독립을 이끄는 자가 지금 이 땅에 있는가?
안두희 ‘최후의 응징자’는 박기서(朴琦緖·49)씨. 버스운전기사였던 그는 96년 10월 23일 인천 신흥동 안씨의 집을 찾아가 이른바 ‘정의봉’으로 안씨의 머리를 내리쳐 응징 처단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모두 안두희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2009년 6월 25일 4.19기념관에서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 서거 60주년 한.중 학술토론회 제2부에서 민족정기구현회 홍갑표 고문이 지정토론자로 나서 토론이 아닌 짤막한 소신을 밝혔는데, 그 내용 중에 안두희에 대한 설명이 있어 여기에 옮긴다.
‘민족정기구현회’는 고 한길 권중희 선생이 만든 회이며 주로 ‘누리집’으로 활동하였다. 어려서 ‘백범일지’를 읽고 감명을 크게 받은 권중희 선생은 안두희의 암살 배후를 밝히는 일에 인생의 황금기를 던져 오롯이 바쳤으며 바로 주제 발표를 한 김인수 동지와도 안두희를 납치, 배후 추궁을 한 바도 있다. 집도 없이 전전하면서 때로는 비닐하우스에서 생활하면서 까지 오로지 안두희의 백범암살 배후 규명을 위해 헌신한 분이다. 국민의 성금으로 미국문서보관소에 가서 관련 문건들을 채집하려 했으나 이미 미 정보기관들이 물증의 자료들을 치운 뒤라 보조 자료를 가지고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조국의 통일 사업을 위하여 불철주야 강직하고 열렬한 직필을 휘둘렀으며 신문이나 주요 애국 통일 언론 시민단체의 자유게시판에 글을 올렸고 고문으로서 활동하였다. 한겨레, 통일뉴스, 자주민보, 참말로, 민족문제연구소, 주한미군철수운동본부, 616공동선언 실천연대 등이다.
뉴 라이트들이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라고 비하할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를 일정하게 조선 근대화에 공헌했다고 우기는 무리들이 나타난 상황에서 그 해명에 나서지 않을 수가 없다.
역사적으로 우리 조국의 분단이 특수한 것이고 상해임시정부가 3.1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 졌고 능동적 주동적이었으며 김구 선생님도 모험주의 기회주의를 뛰어 넘은 중용의 통큰 경륜가였음을 말하고자 한다. 테러란 개념은 맹목애국주의자 들이나 백색 테러에나 적용되는 것이지 정의가 비정의를 응징할 때는 적용되지 않으며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테러가 아니라 임정의 대 일 전에서의 전투행위로 보아야 한다.
그럼 먼저 우리조국의 분단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우선 강자가 약자를 분할 강점하는 형태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나눠 먹기식을 들 수 있다. 자본이 집중 집적되어 원료강탈과 시장 확보를 위하여 식민지쟁탈로 확대되고 제국주의 상호모순에 의하여 1.2차 대전이 일어났다는 것은 중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온다.
이럴 경우 피식민지 민중들은 ‘외세’와 ‘자주’라는 대립구도를 가지고 투쟁하게 된다. 그런데 1차 대전 중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계급혁명’이었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자본가 지주 대 노동자 농민이라는 적대관계의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2차 대전에서 뒤늦게 연합국 측에 소련이 참전함으로써 조선반도의 비운이 온 것이고 ‘김구암살’도 그 한 파장이다.
김구 암살의 주동 세력은 자본주의 세력이며 구체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인 미군정과 그 추종세력인 이승만이며 하루아침에 친일에서 친미로 둔갑한 친일 세력이고 이북에서 계급적 모순으로 홀대당한 지주 자본가 계급, 일부 기독교인들이 남하하여 조직한 ‘서북청년단’들과 이들 출신의 경찰 군인이었다. 자본주의대 공산주의라는 세계 전략의 내재된 대립구도가 한반도에서 충돌한 것이다.
특히 서북 청년단이란 북한에서 몰수당한 지주, 기업가, 일부 기독교 지도자 등이 이남으로 온 사람들 중에 공산주의 증오심에 불타는 사람들이 많았다. 반공단체 중 가장 악명 높은 것으로 좌익 주도 집회 파업은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그 대가로 극우정치인, 기업가에게서 돈을 받음. 경찰력 부족으로 ‘문제 지구’에 서청을 파견하고 좌익 철퇴의 선봉대로 이용, 법에도 없는 경찰 보조기능을 부여하고 생활은 현지에서 알아서 하도록 하여 민폐가 컸다. 서청기관지, 이승만 사진, 태극기 등을 강매하거나 돈 있는 집 아들 조카 심지어는 모 친척 중에 좌익 의심이 가면 사무실로 끌어다 두들겨 패고 죽이기까지 했다. 이 광기 어린 폭력성은 제주4.3항쟁에서 극에 달했고 미 군정청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권의 극우 친미 사대주의의 전위부대이며 특공대였다.
이승만은 권력 지향적이고 자기위에 누가 있다는 것을 못 참는 성격이고 1875년 황해도 평산 능내동 출생, 전통교육 과거낙방. 1894(갑오) 배재학당에 입학하고 독립협회일로 7년 옥고(배반)를 치렀고 1904년 프린스턴대 입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13년 하와이로 가서 25년간 살았다.
교포사회를 분열과 분쟁으로 몰아 하와이로 자기를 초청한 독립군을 양성하던 박용만과 안창호와 충돌, 미정부내 외교가 한길수를 공산당으로 모함하는 등 안하무인격이며 상해임시정부수립 이후 임시대통령과 구미위원부 부위원장과 한국위원회 위원장의 직함을 가지고 교포사회의 모금과 채권으로 모은 돈의 용처가 밝혀지지 않았고 대통령 불신임을 받았으며 노혁명가 이동휘선생을 소련 돈을 받았다고 공산주의자로 몰고, 국무위원제가 소련식이고 김구의 일본인 응징을 비방하고 이청천등의 유격 운동을 자신의 외교운동에 맞지 않는다고 독선을 부리고 오만 방자하였다.
안두희는 어떤 자인가?
1917년 평북 용천군 동하면 용산동에서 안병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5세에 어머니가 병사했다. 부친은 농사꾼으로 24세에 일인순사에 아부하여 일어를 배우고 측량기사가 되어 돈을 모아 신의주 스즈키 상점의 조선 서북 대리인을 시작으로 만주 등지의 동전 놋쇠 등을 모아 군수산업체인 미쓰이 미쓰비시에 넘기고 도정업도 하고 쌀 군납 등으로 혹은 브로커로 돈을 벌어 안두희가 20세쯤 될 때는 평안도 굴지의 부호가 되었다.
청천강 유역, 철원평야의 너른 땅, 만주 사평가의 땅은 가지르는데 노새로 하루를 간다는 너른 땅이다. 사평가에서는 메밀을 사서 가루로 해 신의주 평양 함흥의 냉면집을 겨냥하여 심지어 서울까지 내어 떼돈을 벌었다. 안흥상회였다.
주색에 절은 탕아로서 또 일본 메이지 대 전문 부 법과에 편입 시부야 에서는 오레지 족으로 그 후 집을 떠나 봉천 천진, 북경 하얼빈을 떠돌다 신의주 시절 사귄 기생 박옥례를 만나 서주에서 냉면집을 하면서 인근 일군부대 학병들이 냉면 먹으러 오면 잘 인도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의주로 돌아와 부친과 회해하고 용암포 땅을 배분받았으나 결국 이북의 토지개혁으로 무상몰수당하고 지주들의 연고지 소개로 전전하다가 1947년에 먼저 월남하게 된 것이다.
호구지책으로 서북청년회에 가담하고, 포병에 입대함으로서 김지웅 같은 모사 전문가에게 발탁된 것이다. 그 이유로는 그는 주관적 엘리트 의식이 있고 도착된 영웅심,‘대부호의 아들 안두희’를 ‘월남실향민’으로 전락시킨 공산주의에 대한 맹목 적개심, 부자 집 탕아로 살아오며 몸에 밴 후안무치와 대담성, 간교함과 역사와 민족에 대한 범죄적 무지와 예의 없음을 든다.
3.1 항일 투쟁을 흔히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수동적으로 이루어진 운동이라고 하는 이가 있지만 그 것은 잘못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차 대전의 패전국 식민지에 대한 언급이지 당시 전승국 쪽에 있었던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였던 조선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또 3.1 항쟁은 우리역사를 연면히 이어오고 있는 민중들의 대외 항쟁 및 권력과 부를 독점한 세력과의 투쟁역량이 축적내재된 것이 내외정세를 주동적 능동적으로 이용하여 동력으로 분출된 것이다 그러기에 상해 임시 정부도 그 연장선으로 볼 때 좌우성향을 가진 민족주의자 애국자들이 주동적 능동적으로 조직한 임시정부 였다.
김구 선생은 자기 위에는 그 어떤 사람도 허용 안했던 편협성과 독단성을 가진 이승만의 반대로 무산된 국공합작 시기 임정 좌우합작 시기나 한국독립당 창건 시 좌우수용 및 태평양 발발 시 논의 되었던 좌우 합작에서도 폭넓은 견해와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편향된 것이 아닌 중용의 정치 노선이었다.
중용은 기회주의가 아니다. 이야기의 줄기가 다를지는 몰라도 글을 마감하면서 기회주의와 모험주의에 대한 중소이념논쟁 시에 사례를 들고자 한다. 미소가 해빙할 당시 중국은 소련의 미국 접근을 기회주이자라고 하면서 미국은 한낱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고 인민일보를 통해 공격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프라우다는 종이호랑이가 핵 이빨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중국을 모험주의라고 응수하자, 인민일보는 “기회주의란 싸워서 이길 수 있는데 싸우지 않는 것을 말하고 모험주의란 싸워서 질 것이 뻔한데 싸우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북한에 대하여 “그 어느 나라 당은 이쪽의지에 앉았다 저쪽의자에 앉았다 한다”라고 외교 중심축이 다소 소련 편으로 간 것을 비아냥댔는데 로동신문은 “ 그 어느 나라 당이 우리당을 보고 이 쪽 의자에 앉았다 저 쪽 의자에 앉았다 한다고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는 분명 우리의 의자가 있는 것이다”
김구 선생은 영원한 이 땅의 애국자이며 테러리스트, 기회주의자, 모험주의자가 결코 아니다. 우리가 남북협상을 위해 방북하셨던 김구선생님의 통일염원을 어찌 한시라도 잊을 손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