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감각들의 통역관[제1편]
시에서 말들은 감각들의 통역관이다. 말은 이 세계에 대한 모호한 느낌들을 자명한 것으로 통역한다. ‘나’에게서 저 세계로 혹은 저 세계에서 ‘나’에게로, 랭보는 ‘나는 타자다. 구리가 나팔이 되어 깨어난다 해도 이는 구리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말이라는 감각들의 통역관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세계의 타자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랴! 비스와바 쉼브르스카는 이런 시구를 남겼다. “상의 표면을 뒤덮고 있는 수억만 개의 얼굴들.”(부산한 거리에서 나를 엄습한 생각) 우리는 이 수억만 개의 얼굴들의 세계 안에서 단 하나의 타자로 살아간다. 나는 당신의 타자다. 다시 쉼보르스카는 이렇게 쓴다. “우리 사이엔 다른 점이 너무나 많다./단지 두개골과 안와(眼窩)./그리고 뼈들만 동일할 뿐”(십대 소녀) 나의 얼굴은 타자의 얼굴로서만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타자로서의나, 이때 ‘나’는 다름 아닌 말의 타자다. ‘나’와 ‘세계’ 사이에 언제나 말이 있다. 말은 저 너머다. 말이 먼저 ‘나’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은 적이 없다. 말은 무심하다. 말과 '나'는 겉돈다. 이 둘이 상피 붙은 듯 사랑에 빠질 때가 있다. 구리가 나팔이 되어 깨어나는 순간이다. 구리가 욕망이라면 나팔은 욕망의 현실태다. 구리는 나팔 앞에서 무산되거나, 무로 돌아가는 그 무엇이다.
말은 거울이다. 그것은 삶을, 삶의 세부 항목들을 빠짐없이 비춘다. 말에 비친 삶과 세상을 눈여겨보는 자들이 있다. 평생 말을 붙잡고 연구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말의 탄생과 죽음, 말의 생로병사에 관여하고 싶어한다. 말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말의 완벽함은 진실의 배반으로, 사실의 왜곡으로 증명된다. 그러나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자면 말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초록'이라는 말은 '초록'으로 완전하다. 허나 ‘초록’을 표현하려는 자에게 ‘초록’이란 말은 부족하다. 그것은 '초록'이라는 경험의 전부를 드러낼 수 없다. ‘초록’이라는 말은 ‘초록’의 경험에 가 닿지 못하고 중간에서 추락한다. ‘초록’이란 말은 ‘초록’의 추상만을 겨우 건드린다.
사람의 기억은 말의 집적이다. 그 세계에서는 삶의 궤적, 경험한 모든 것들, 어떤 찰나의 풍경, 심지어는 이미지조차 말이다. 당신이 떠나고 난 뒤 당신이 부재하는 자리에 말이 고인다. 그 말은 당신의 부재를 파먹으면서 세균이 증식하듯 빠르게 증식한다는 뜻이다. 이미 말들 속에 부재하는 당신은 너무나 많은 당신으로 들어앉아 있다. “어쨌든 나는 돌아가야만 한다/내 시의 유일한 자양분은 그리움/그리워하려면 멀리 있어야 하므로”(쉼보르스카, 미완성 육필원고 부분). 그리운 것은 지금 여기에 없다. 그리움은 멀리 떨어져 있음을 전제한다. 그리움이란 대상의 부재를 이상화하는 가운데 이상 증식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말은 그리움이란 자양분을 취하고 자라난다.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어야 그리움이 생겨난다. 말은 그것에게 건너가는 다리이다. 말이 없다면 그리움에게 다가갈 수 없다. 끊긴 다리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그리움은 대상의 부재 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우리를 그리움의 포로로 만든다. 우리는 그리워하면서 그리움의 존재로 탄생한다. 이 모든 것을 수행하는 게 바로 말이다. 우리 기억 안에는 주인을 잃은 말들로 넘치고 붐빈다. 이는 그만큼 그리운 것들이 많다는 증거다.
장석주 「은유의 힘」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