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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일기
박 완 서
식목일날이었다. 아파트 녹지대에도 나무 심기가 한창이었다. 지은 지가 육 년이나 되는 단지인지라 여름만 되면 녹지대가 제법 울창했다. 그런데도 묘목을 잔뜩 실은 트럭이 들어오고 하늘색 모자를 쓴 수위 아저씨들이 삽을 들고 분주하게 왔다갔다했다. 눈여겨보니, 작년에 진입로와 동과 동 사이를 잇는 인도 양측에 가로수로 심은 목련나무 중 고사(枯死)한 걸 파내고 그 자리에다 새 묘목을 심고 있었다. 월동을 하면서 고사한 게 아니었다. 작년에도 식목일날 심었는데 심던마다 삼분의 이 이상이 밥풀처럼 비져나오던 꽃봉오리가 말라붙더니 끝내 잎도 돋지 않고 말았다. 한여름 뙤약볕에 줄기만 서 있는 가로수를 바라본다는 것은 저으기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오랜 가뭄 끝에 말라비틀어진 걸 보는 것처럼 사람의 심성까지 타들어가게 했다.
바깥의 식목일 풍경 때문에 집 안을 두리번대며 식목일다운 일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겨우내 라디에이터 박스를 가리고 있던 소철, 팔손이 분을 베란다로 내놓기로 했다. 벌써 내놓았어야 할 것들이었다. 혼자 들려니 꼼짝도 안 했다.
“혜령아, 나 좀 거들어줄래?”
목욕하고 로션을 처덕거리고 있던 딸애가 가운만 걸치고 나왔다. 눈에 띄게 화려한 애는 아니었지만 뜯어볼수록 귀여운 아이였다. 막 목욕을 끝낸 살갗이 만개하기 전의 분홍 장미처럼 발그레 촉촉하고 향기로워 보였다. 막내딸이라 그런지 내 눈엔 안 예쁜 데가 없는 아이였다. 특히 그 아이의 코는 보면 볼수록 교묘하게 예뻤다. 어려서부터 나는 그 아이를 어를 때 “우리 혜령이 코는 누가 빚었기에 이리도 공교로운고!” 하며 허풍스럽게 감탄하기를 좋아했었다.
실내에서 겨울을 난 관상수가 양지바른 베란다로 나오니까 영양실조와 함께 주인의 무관심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는 괜히 민망해하며 헝겊을 축여다가 이파리의 먼지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딸애도 거들면서 밖을 내다보았다. 뽑아낸 고목들을 장작처럼 묶는 이, 구덩이를 파는 이, 묘목을 대충대충 세우고 흙을 덮는 이, 삽을 땅에 꽂고 담배를 피우는 이, 가지각색이었다. 나무를 심고 있다기보다는 식목일 행사를 하고 있다는 인상 때문인지 새로 심은 나무도 제대로 뿌리를 내릴 것 같지가 않았다:
“하필 또 목련이야?”
딸도 혼잣말처럼 투덜댔다.
“처음에 목련으로 시작한 걸 어쩌겠니? 가지각색 가로수도 우습잖아.”
“전 처음부터 목련이 마음에 안 들었어요.”
“왜 그 꽃이 어때서?”
“목련 자체가 싫은 게 아니라 나무 하면 기껏 목련밖에 생각해 낼 줄 모르는 그 저능아 같은 발상이 마음에 안 들어요.”
“네가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올핸 잘 자라주었으면 좋겠다.”
“반타작이나 하면 잘 자라는 거겠죠.”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두고 보게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는 짓 다 그런 거 아녜요?”
어쩌면 젊은애가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거야말로 저능아 같은 발상이 아닌가. 나는 그애를 크게 나무라주고 싶은 걸 꿀꺽 참았다. 그애와 지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모성적인 감상 때문이었다. 받아놓은 결혼날짜도 임박하거니와 약혼자가 유학을 떠나기로 돼 있어 그애도 같이 가려고 수속중이었다. 아마 신혼여행이 미국행이 될 모양이고, 신랑이 물리학 전공이니 학위 따고 돌아오려면 오륙 년은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수속을 하면서 도처에서 부딪친 이 나라 독특한 관료주의에 대한 넌더리가 딸애로 하여금 그런 아니꼬운 소리를 하게 했을지도 모른다고 너그럽게 이해할 수도 있었다.
우리 모녀는 곧 머리를 맞대고 혼수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면팬티 스무 장, 브래지어 열 개, 청바지 세 벌, 티셔츠 열 장, 면양말 스무 켤레…… 이런 것들을 하나같이 실용적인 싸구려로만 사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막 신이 나기 시작했다. 큰딸을 번족하고 유복한 댁으로 시집보내본 나는 혼수라면 겁부터 났다. 최고급이라고 이름 붙은 영문 모르게 비싼 걸 끝도 없이 사들였건만도 나중에 섭섭한 소문을 듣고 말았었다. 그러다 가난한 유학생한테 시집을 보내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가서 너무 고생할까봐 될 수 있는 대로 돈으로 좀 주어 보낼 작정이었다. 딸이 연애하던 남자가 유학을 가게 됐으니까 딸려보내려는 것뿐, 사윗감으로 유학생을 원했다든가 기피했다든가 하는 내 나름의 선호도가 있는 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집안이 한때 허룩하도록 실어보내야 하는 혼수를 장만하는 수고와 부담이 비행기 수화물 크기로 준다는 건 확실히 신나는 일이었다. “우리 혜령이가 효녀로구나.” 싸구려도 더 싸게 사려고 남대문이나 동평화시장 쪽으로만 도는 딸을 나는 이렇게 대견해했다.
저녁 무렵 보험회사 외무사원인 동창생한테서 들르겠다는 전화가 왔다. 보험금 낸 진 며칠 됐다구, 했더니 그냥 근처까지 왔길래 잠시 보고 가고 싶다고 했다. 여고 동창생으로 흉허물 없는 사이였지만 손발이 닳도록 고달프게 사는데도 늘 가난하기만 한 친구란 때로는 부담스러울 적도 있었다. 이 나이에 변두리에 겨우 중산층 아파트 하나 쓰고 사는 내 살림 형편을 부자로 보는 친구란 솔직히 말해서 곤혹스러웠다.
친구는 며칠 사이에 더 늙고 고단해 보였다. 처녀 시절엔 그녀의 얼굴을 서구적으로 돋보이게 하던 광대뼈가 더욱 두드러져 늘그막의 그녀를 거칠고 신산하게 만들고 있었다.
“담배 없냐? 꽁초라도…….”
들이닥치던마다 담배 먼저 찾는 친구를 보며 적어도 서너 시간은 넋두리를 들어줄 각오를 했다. 자주 피우는 편은 아니고 더구나 남편이나 회사 동료들은 피우는 걸 감쪽같이 모르게 피우는 정도지만 그녀 말에 의하면 되게 속상할 땐 되게 생각이 나서 못 견딘다는 거였다.
나는 서너 개비 남은 양담배를 꺼내놓았다.
“흥, 부잣집은 달라.”
친구가 비꼬기부터 했다. 나는 변명 대신 쓸쓸하게 웃었다. 외국 출장 갔다 온 친정 동생이 매형한테 선물이라고 달랑 양담배 한 갑을 들고 왔을 때 내색은 안 했지만 섭섭했었다. 집안 내에서 외국 나들이가 별로 없는 남편은 그래도 좋아하면서 집에서만 아껴서 피우던 거였다. 담배를 한 개비 꼬나물고 나서 친구가 들뜬 소리로 말했다.
“우리 큰딸 정미 시집간다. 날까지 잡았어. 아유 정신 없어. 애인 생겼다고 데려오자마자 어떻게 서둘러서 들볶아치는지.”
친구의 과장된 명랑이 되레 친구를 부자연스럽게 했다. 그러나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과년한 딸 치우는 게 좋기도 하려니와 없는 살림에 남 하는 흉내라도 낼 생각을 하면 근심이 태산 같으리라. 얼굴이 갑자기 못쓰게 된 까닭도 알 만 했다. 정미가 시집을 가다니. 나도 정미가 결국 보통 여자들처럼 살게 된 게 반갑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정미는 좀 특별한 아이였다.
“잘됐지 뭐니. 들볶아치는 대로 한바탕 들볶이고 나면 너도 한시름 놓게 될 게 아니냐. 한두 푼 드는 일이 아니니까 걱정이야 되겠지만 넌 분수껏 하는 데는 원래 도사 아니니. 나도 동창들을 규합해서 한번 힘껏 도와볼게.”
“정미가 돈 들이고 시집갈 애니. 한푼 안 들이고 가겠단다.”
“저런 기특한 것. 그렇지만 결혼을 어디 혼자서 하는 거니. 두 집안 일이니까 너무 이쪽 고집만 부리지 말라고 해. 하긴 정미가 골라잡은 신랑이니까 그런 통속쯤은 벗어났겠지만…….”
“신랑이 소위 운동권 학생이란다. 옥살이 경력만도 정미한테 댈 게 아닌 골수래. 놀랬지?” 친구가 연거푸 또 한 개비의 담배를 피워 물면서 말했다. 나는 대답을 못 하고 마른침만 꼴깍 삼켰다.
“너라면 이럴 때 어쩌겠냐? 네 딸이라면 말야.”
친구가 애걸조로 말했다. 친구의 말인즉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봐달란 얘기 같은데 얼핏 그게 되지가 않았다. 언젠가 어떤 여성단체에서 마련한 ‘독자와의 대화’ 란 모임에 소설가로서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소설이 독자에게 끼칠 수 있는 가장 큰 미덕은 타인의 삶을 자기 삶처럼 체험케 하는, 즉 남과 입장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라고 공언했었다. 소설이 독자에게 그런 능력을 줄 수 있는 거라면 그런 소설을 꾸며내는 소설가는 마땅히 그런 능력의 도사여야 하련만 도무지 그 능력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나는 내가 나불댄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화도 났다.
“망할 계집애 같으니라구. 즈이 엄마 가슴을 그만큼 놀래키고 속을 그만큼 태웠으면 됐지 뭐가 부족해서 시집까지 유난벌떡하게 가려누.”
기껏 만만한 정미한테 이렇게 화풀이를 했다. 그러나 지금 정미한테 화를 내고 있는지 그것도 실은 분명치가 않았다. 정미도 소위 운동권 학생이었다. 다감하고 원색적인 친구가 딸의 옥바라지하는 동안 반미치광이가 돼가는 걸 지켜보면서 나도 함께 고통스러워했기에 그런 욕도 할 만했다. 옥바라지를 시킨 것 외엔 정미는 나무랄 데 없는 딸이었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투사 티는커녕 보통 여대생보다 더 여자답고 소박하고 조용하고, 없는 살림 꾸려가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 또한 지극했다. 정미가 풀려난 후 친구는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서 정미를 자주 나한테 심부름을 보냈었다. 뒷구멍으로 전화를 걸어 좀 떠보고 타일러보라는 부탁과 함께였지만 남의 마음을 떠본다든가 바꾸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섣불리 설교도 할 수 없는 게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해볼수록 핍박받는 사람들에 대한 정미의 사랑과 책임감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의 가냘픈 작가정신도 그런 것이 줄기를 이루고 있다고 자부해왔건만 정미의 투박한 진실성 앞에선 어딘지 간사스럽고 가짜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이론적으로도 정미한테 끌렸다. 옥살이하는 동안 그 방면의 이론서만 읽었을 테니 쉽사리 허점을 보일 리가 없었다. 나는 겨우 날카롭고 강한 걸 이길 수 있는 것은 더 날카롭고 더 강한 힘이 아니라 유하고 부드러운 것이라는 노자(老子)의 아류쯤 됨직한 방법론으로 체면을 세우곤 했다. 그럴 때 정미는 노자가 생전에 웃었음직한 더할 수 없
이 질박한 미소로써 대답을 대신하곤 했었다.
“집 안에서 다들 나한테 미쳤다고 그런단다.”
“왜?”
“딸년을 그런 데 시집보낸다고. 나더러 글쎄, 옥바라지가 그렇게 좋더냔단다. 얼마나 그게 좋았으면 딸년한테 물려주냐니 그게 할 소리니, 악담이지. 누군 누구겠니. 오빠들이 그러지. 친정어머니도 길길이 뛰시지. 붙들려가는 거는 못 막았어도 시집가는 걸 왜 못 막냐는 거야. 다리몽등이를 우지끈 분질러 생전 처녀로 늙히는 게 낫다나.”
친구의 친정 쪽은 매우 번족하고 오빠들도 다 상당한 사회적인 지위를 가진 이들인지라, 못사는 데다 자식까지 유별나게 둔 누이를 측은해하기도 했지만 짐스러워하기도 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반대의견이 얼마나 드셌으리라는 건 더군다나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이런 경우 너라면 어쩌겠니?”
친구가 또다시 자기 입장에다 나를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나는 심사숙고하는 척, 그러나 고작 듣기 좋고 책임지지 않을 말을 고르느라 어물쩍대고 있었다.
이때 혜령이가 외출 준비를 하고 나왔다.
“잰 누굴 닮아 저렇게 예뻐지니? 부잣집 막내딸 티가 잘잘 흐르는구나.”
처음에 인사할 땐 제 걱정 때문인지 변변히 쳐다도 안 보더니 한껏 멋부리고 나온 걸 보자 이렇게 비꼬는 투로 말했다. 친구가 시기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얼른 혜령이를 내보내려고 했다. 약혼자를 만나러 가는 줄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심부름이라도 보내는 것처럼 예사롭게 굴었다.
“다녀오렴, 늦겠다. 진작 나가지 않구 여직껏 뭘 꾸물대고 있었을까.”
“넌 애인도 없니? 한창때 잡아야 한다, 너.”
친구가 나가려는 혜령이에게 이렇게 말을 시켰다. 혜령이가 돌아서면서 의아한 얼굴로 뭐라고 하려고 하자 나는 짜증을 부리다시피 했다.
“얘 좀 봐, 시간 없대두. 얼마나 기다리겠니?”
나의 영문 모를 호들갑에 밀려나면서도 혜령이는 납득할 수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딸애가 나가자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었다. 처음엔 혜령이도 약혼중이고 결혼날짜도 임박해 있단 소리를 할 기회가 없어서 못 했다. 이번엔 자연스럽게 그 말을 할 기회가 왔는데도 하기가 두려웠다. 친구 눈에 내가 너무 공리적으로 자식 관리를 한 것처럼 비칠까봐, 어쩌면 친구가 시기를 할까봐 조심스러웠다. 정미야 그런 속물스러운 비교로 자신을 비하시킬 아이가 결코 아니지만 친구나 나는 보통 어머니였다. 내가 작가라고 해서 보통 어머니 이상이 될 수 없듯이 친구도 특별한 딸을 두었다고 해서 저절로 보통 어머니 이상이 되는 건 아닐 터였다. 그러나 왜 내 딸이 가난한 미국 유학생에게 시집가는 걸 순간적으로 이 친구 앞에서 떳떳지 못해했고 감추고 싶어했던가라는 추궁으로 자신을 궁지에 몰아붙인 건 역시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작가로서 였음직 하다.
친구가 핸드백을 뒤지더니 돌돌 말아 고무줄로 동인 편지뭉치를 꺼내놓았다.
“읽어봐.”
“뭔데?”
“우리 정미하고 그 남자애가 주고받은 편지란다. 공교롭게 둘이 옥살이를 같이 하지 않고 번갈아가며 했으니까 서로 부지런히 편지 쓰고 책 넣어주는 걸로 옥바라지 품앗이를 했나보더라.”
“그런 편지가 어떻게 네 손에 들어 왔니?”
“정미가 보물처럼 숨겨놓은 걸 내가 훔쳐봤지 뭐. 그중의 몇 통을 이렇게 빼냈고…….”
“얘는 미쳤어. 그러면 안 돼. 어떻게 그런 야만적인 짓을 할 수가 있니?”
“난 야만인 이니까. 프라이버신가 뭔가 개나 물어가라지.”
“그러지 마. 정미가 알아봐라. 아무리 모녀간이지만 정떨어질걸.”
“알아도 겁 안 나. 오히려 즈네들 편지 훔쳐본 걸 나한테 감사해야 될걸. 세상의 입 가진 사람은 다 반대하고 비웃는 즈네들 결혼을 나 혼자서 편들고 감싸고 이만큼 추진시킨 게 다 이 편지 덕이었으니까. 너도 한번 읽어봐. 괜찮아. 어쩌면 요새 아이들이 그렇게 맑고 순수한지 나도 놀랬다니까. 요샛말로 감격 먹었단다. 그래서 외롭게 걔네들 역성을 들고 나선 거지.”
나는 내키지 않는 마음과 호기심 반반으로 ‘검열필’ 의 스탬프가 찍힌 편지를 한 통 펴들었다. 검열을 의식해서였을까. 이념적인 말이나 그런 뜻을 우회하거나 함축한 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냥 순수한, 거의 고전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리움이 절절하고 사랑의 기쁨과 슬픔이 시(詩)처럼 아름답게 표현된 연애편지였다. 그건 삼십여 년 전, 나의 젊은 날 앳된 감성과 타는 갈망으로 상대도 없이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곤 했을 뿐 끝내 부쳐보지 못한 편지이기도 했고, 받기를 갈망하다 이루지 못한 몽상의 편지이기도 했다.
요새 세상에도 이런 편지를 쓰는 연인들이 있다니 ㅡ 나는 그 편지가 어여쁘고 신기한 나머지 요새 세상에도 그런 편지가 있을 수 있게 한 교도소의 높은 담장을 마치 로맨틱한 소도구쯤으로 여길 뻔하고 있었다. 그런 편지를 쓸 까닭이 없을 만큼 그리움을 참을 필요가 없는 자유로운 젊은이의 연애가 밍밍해서 불쌍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그들 중 한쪽이 갇혀 있는 몸이란 게 드러나는 대목이 많은 건 아니었다.
―형,(정미는 애인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왜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라는 동화가 있지. 추운 겨울밤 길거리에 웅크리고 앉아 팔다 남은 성냥을 한 개비씩 켜서 손가락을 녹인 소녀 이야기 말야. 그 소녀는 한 개비의 성냥이 탈 때마다 한 가지의 아름다운 공상을 하고…… 그 짓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얼어 죽었지. 지금의 내 처지가 꼭 그래요. 눈을 감고 꿈을 꾸는 거야. 형이랑 포장마차에서 따끈한 우동을 시켜놓고, 형의 눈은 소주병도 하나 까고 싶어하고 나는 눈치없이 로맨틱해져서 포장에 부드럽게 부딪치는 눈 나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다음엔 내 생일이야. 형이 제법 큰 선물보따리를 들고 들어왔잖아. 내가 뭐냐고 물으니까 곰인형이라나. 시이, 날 맨날 어린애 취급하기야? 조금 골낸 시늉을 하면서 북북 포장지를 뜯었지. 웬걸 푹신한 내 털코트잖아. “돈도 없을 텐데 뮐 이런 결 다.” 그러면 형은 “변변한 게 못 돼 미안해. 겨우 십만원짜린걸” 하면서 송구스러워하지. 뭐 대충 그런 이야기를 줄줄이 엮으며 혼자 킬킬대며 하루를 보내지. 그러다가 눈을 뜨면 보이는 건 차가운 벽과 한 덩이 보리빵…… 형, 그 순간 한기가 밀어닥치고 나는 영락없는 성냥팔이 소녀 라구.
겨우 이런 대목에서 그녀가 영어의 몸이란 걸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밝고 낙천적이긴 남자가 옥중에서 쓴 편지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들의 편지를 대충 다 읽고 났을 때 친구는 거의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 편지를 홈쳐보기가 잘못이지. 그전까지만 해도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반대하던 결혼을 차마 못 그러겠는 거 있지. 참답게 사랑하는 건 남이라도 예뻐서 북돋아주고 싶은 거 아니니? 하물며 내 자식이 그렇게 사랑하는 늴 어떻게 안 도와주고 배기니. 그래서 남이 뭐라든 나는 그애들 편을 들기로 한 거야. 내가 잘하는 걸까, 잘못하는 걸까?”
나는 친구의 절박한 눈길에 붙잡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애들은 잘살 거야.”
나는 이렇게 말했지만 마음으로부터 그애들의 결혼에 동의한 건 아니었다. 그애들이 그애들답게 잘살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시시때때 놀라고 애태우고 애간장이 마르는 친구의 마음고생이 마냥 더 계속될 생각을 하면 속이 상했다.
“너 만은 내 마음을 좀 이해해주려마.”
친구가 매달리듯이 절박하게 말했다. 그제서야 나는 친구의 진의를 깨달았다. 모든 사람이 다 극구 말리는 결혼을 혼자서 동의하고 거들면서 외로웠던 것이다. 그녀가 옳다고 믿는 걸 더불어 옳다고 박수쳐줄 동조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녀가 딴 친구도 많았는데 하필 나를 동조자로 만들 수 있다고 지목한 건 내가 작가라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았다. 결코 막돼먹거나 무식하지 않은 그녀가 딸의 편지를 홈쳐내는 짓까지 한 것도 글쟁이는 글로 감동시키는 게 가장 빠르리라는 그녀 나름의 소박한 계산에서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한 사람의 작가로서의 나의 의견을 구하고 있건만 그게 잘 되지를 않았다. 자꾸만 눈물 마를 날 없이 지지리 고생만 한 한 많은 어머니의 입장에 나를 대입시키고 있었다. 같은 어머니로서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봐달랄 때는 그게 잘 안 되더니, 작가의 입장에 서라니까 또 슬며시 어머니 입장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결국 내 솔직한 심정은 어떤 입장에서고 비켜나 있고 싶은 거였다. 비열한 짓인 줄은 아나 명확한 의견을 가진 자리는 피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비열의 속성인 거짓을 들키지 않으려고 요령껏 어물쩍거렸다. 친구가 외로움을 덜고 갔는지 더 큰 외로움을 안고 갔는지 헤아릴 겨를도 없었다. 행여 영향을 끼칠 말이나 책임질 말을 했을까봐 돌이켜보면서 문득 자신에 대해 매우 비위가 상했다.
그날 열시 넘어까지 혜령이가 안 돌아오는데도 나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남에 대해 무심하고 때로는 차갑기까지 한 만큼 내 식구들에 대한 나의 애정과 관심은 내가 생각해도 좀 지긋지긋한 바가 있었다. 딴 날, 내 딸이 밖에서 전화도 없이 열 시를 넘겼다면 안절부절 온갖 방정맞은 생각과 들어오면 혼내주고 설교할 궁리로 골 속이 후끈 달아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밤, 나는 텅 빈 마음으로 맥을 놓고 있었다. 간혹 친구한테 한 내 말들이 신트림처럼 치받쳐서 얼굴을 찌푸렸지만 정신적 고통이라기보다는 생리적 고통에 더 가까웠다.
전화벨 소리가 났다. 너무 시끄러워서 잔잔한 음악 소리가 나는 신식 전화기로 바꿔야지 하고 별렀다. 마루에서 남편이 받는지 시끄러운 소리는 곧 멎었다. 이어서 비명에 가까운 남편의 코함소리가 들렸다. 나도 뛰어나가고 아들도 제 방에서 뛰어나왔다. 남편이 수화기를 놓으면서 “혜령이가 교통사고래. 한남동 S병원에 있대” 그러면서 파자마 바람으로 현관으로 나가다가 되돌아와서 어쩔 줄을 몰랐다. 손을 덜덜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어느 정도래요, 부상이?”
아들이 물었다.
“몰라, 안 물어봤어.”
남편이 바보처럼 말했다.
“아버지도 참.”
아들이 침착하게 전화번호부를 뒤적이는 걸 보면서 나도 어디론지 붕 떴던 정신이 좀 돌아왔고 아들이 너무 믿음직스러워서 의지하고 응석부리고 싶었다. 어느 틈에 오열이 걷잡을 수 없이 치받쳤다.
아들이 전화번호를 누르고 혜령이 이름을 대는 동안 나는 착한 아기처럼 꿀꺽꿀꺽 울음을 참았다. “네? 중상이라구요?” 아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로부터 병원 응급실까지 어떻게 갔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이게 꿈이었으면, 설마 꿈이겠지 하는 생각에 열심히 매달렸다. 꿈인가 생신가 살을 꼬집어보는 짓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꿈이었으면 하고 바라다본 모든 것은 꿈속에서처럼 몽롱하고 이치에 맞지 않았다. 유혜령의 가족이라니까 우린 곧 응급실로 인도되었다.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피투성이의 한 부상자를 가리켰다. 코에서 많은 피가 흐르고 있고 이마에서 콧등에 걸쳐 도끼로 내려친 것 같은 처참한 상처가 입을 벌리고 있는 환자는 혜령이가 아니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우리 딸이 아니에요. 들입다 체머리를 흔드는 내 눈앞에 흰 가운 입은 남자가 쇼핑백을 가져와 확인하라고 했다. 저 환자의 옷과 소지품입니다. 나는 그 안에서 뭐가 나올지 보고 싶지 않아 뒷걸음질 쳤다. 남자가 안의 것을 끄집어냈다. 꾸역꾸역 꾸역꾸역, 서리서리 서렸던 오장육부가 쏟아져나오듯이 피투성이의 옷가지가 쏟아져나왔다. 한껏 멋부리던 실크 블라우스, 바람이 불 때마다 우산처럼 펴지는 모슬린 주름치마, 순백의 슬립, 그런 것들이 비록 피걸레가 됐다고는 하나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틈에 큰딸과 사위도 오고 조카들도 와서 나를 밖으로 내몰았다. 나는 울기 시작했다. 울음이 잘 나오지 않고 가슴에 뭉쳐서 찢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쥐어뜯고 몸부림 쳐도 소용이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 하는 원망이 나의 비통을 더욱 처참하게 했다. 너무 괴로워서 죽고 싶었다. 자식을 앞세우는 수모를 겪느니 죽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혜령이가 죽다니, 내가 혜령이 죽는 걸 보다니, 내가 도대체 뵐 잘못했기에 자식이 그런 끔찍한 꼴로 죽는 걸 봐야 한단 말인가.
조금도 잘못 없이 살았다곤 못 해도 나보다 잘못이 많은 사람들이 내 주위에서 얼마든지 나날의 무사안일을 누리며 다복하게 살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도 도덕적인 결벽증이 좀 심한 편이었다. 그런 사람이 흔히 그렇듯이 나 역시 내 잘못보다 남의 잘못을 꿰뚫어보는 데 더 눈이 밝았다. 그런 밝은 눈으로 보건대 세상은 온통 죄인투성이고, 그들의 죄에 비하면 내 잘못은 티끌만큼 밖에 안 됐다. 이런 불공평에 대한 원망과 조금도 거짓 없이 대신 죽고 싶은 딸에 대한 사랑이 뒤범벅이 되어 나를 모질게 고문했다. 미칠 것 같았다. 순탄치 못한 세월을 살아온 탓으로 아버지가 약을 제대로 못 써 죽는 것도 보았고 난리통에 동기간이 비명에 가는 것도 보았고, 이 나이에 벌써 친구를 몇 사람이나
앞세웠다. 그럴 때마다 통곡을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어떤 통곡에도 약간의 감미(甘味)가 섞여 있게 마련이었다. 그 감미 때문에 따르는 울음을 즐길 수도 있었다. 이렇게 감미가 섞이지 않은 완전한 비통은 처음이었다. 미치고 환장하지 않고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비통이었다.
“어머니, 고정하세요. 혜령이가 지금 죽은 게 아니잖아요.”
큰딸 혜숙이가 나를 얼싸안으며 울먹이는 소리가 혜령이가 곧 죽을 거란 소리로 들려서 사지가 와들와들 떨렸다. 혜숙이가 다급하게 내 두 팔을 모두어 잡으며 애걸했다.
“정말 왜 이러세요. 기도하세요, 네. 어머니는 기도할 자격이 있잖아요. 저기 저 사람 좀 보세요. 어머니도 저렇게 하실 수 있잖아요.”
그 자리에서 기도란 소리가 어찌나 생급스럽던지 귀가 번쩍 띄었다. 어쩌면 너무 적절해서 되레 생급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끼룩끼룩 목을 길게 빼면서 울음을 삼킬 수가 있었고 그 기도라는 것의 모습을 보기 위해 주위를 살폈다. 몇신지는 모르겠으나 밤이 깊으련만 응급실 앞 대기실엔 우리 말고도 불의의 사고를 당한 가족들이 여럿 불안한 자세로 서성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의 난동은 구경거리였던 듯 모투 내 쪽을 보고 있는데 홀로 대기실의 웅성거림과는 무관한 부인이 있었다. 부인은 양회바닥에 무릎을 꿇고 나무의자에다 팔꿈치를 괴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고뇌에 찬 모습이었으나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분위기로 둘레의 불안으로부터 홀로 초연하게 자신을 지키고 있었다. 나에게도 퍼뜩 희망 같은 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지경에서도 나의 원색적인 난동을 추하게, 그 부인을 아름답게 볼 만한 객관성 같은 게 생기기 시작했다. 혜숙이가 나더러 기도할 자격 이 있다고 한 것은 지난 여름 가톨릭에 입교한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입교하기 전에도 그랬지만 후에도 기도에 익숙지가 못했다. 가톨릭의 수많은 기도문 중에서 고작 주기도뮨을 외는 정도였다. 나는 주기도문을 좋아했다.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아름답고 완전한 기도문이었다. 거기다 뮐 더한다는 것은 중언부언이었다. 그중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라는 대목은 우리가 주님께 용서를 빌 수 있는 자격을 너무도 준엄하고 간결하게 규정짓고 있었다. 예수쟁이들을 헐뜯을 때, 흔히 하나님께 용서만 빌면 다 되는 줄 알고 함부로 죄를 짓는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용서받을 자격 없이 용서만 빌면 그런 소리 들어도 싸다고 생각했다. 남을 용서하기란, 마음으로부터 정말 용서하기란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기에 용서받을 자격을 얻는다는 것 또한 지극히 어려운 일이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어느 한 구절에만 매료된다는 건 옳은 일이 못 된다는 걸 곧 알게 되었다. 가장 지적(知的)인 척 그 구절에 구애를 받다보면 함부로 용서를 빌지 않겠다는 마음이란 결국 아무도 용서할 수 없다는 교만에 다다르게 된다. 주기도문을 욀 수 있기 전서부터도 그리스도교가 가장 미워하고 경계하는 것이 교만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에 짧은 주기도문 속에서도 나의 인색한 마음과 모순에 찬 교만은 여지없이 부대꼈다. 그러나 여전히 주기도문을 비롯한 복음서의 말씀들은 아름다웠고 감동과 영감에 충만해 있었다. 소설 쓰는 일이 바닥을 르러낼 무렵이었다. 더 쓸 게 없었다. 마지막이었다. 비참했다. 전에도 간간이 이제 마지막이다 싶을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마지막까지 가지 않으면 새로운 시작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 마지막은 그런 타성적인 절망과는 달랐다. 써먹을 소재가 바닥났다든가 소재가 잘 풀어지지 않을 때 곧잘 겪던 절망감이 아니었다. 여직껏 써갈긴 이야기에 넌더리가 났다. 내 소설에서 주로 다루어온 나보다 못난 사람들, 짓눌리고 학대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다만 이야기를 꾸미기 위한 관심이었다는 걸 왜 느닷없이 깨닫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관심만 있고 사랑 없음이 그 삭막한 바닥을 드러내자 이제야말로 마지막이다 싶었다. 이런 나의 사랑 없는 관심에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을 부어준 게 성경 말씀이었다. 산상수훈도 아름다웠거니와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 장면은 나에겐 새로운 경이였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여직껏의 나의 옹졸한 편견을 일소할 만한 것이었다. 그 무렵 나는 나의 문학적 관심의 사랑 없음에도 절망하고 있었지만; 가족이라는 가까운 핏줄에만 집중적으로 국한된 나의 지긋지긋한 모성애에도 적이 절망하고 있었다. 밖으로 확산하지 않으면 독이 될 것처럼 그 사랑은 이미 너무 진하고 편협했다. 그런저런 절망 속에서 만난 성경구절은 가뭄에 단비처럼 나를 감지덕지하게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는 하나 아직은 그게 신앙이란 자신이 없었다. 본받을 분으로 영접했는지 주님으로 영접했는지도 분명치가 않았다. 입교하고도 기도를 한 적이 별로 없었다. 의식적으로 안 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기도에 대해 나는 혐오감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열성적인 기도일수록 더했다. 기도합시다, 기도해주세요. 이런 소리가 마치 푸닥거리의 효험을 비는 소리처럼 주술적으로 들려서 내가 기도를 잘 안 하는 걸 떳떳해하고 있기조차 했다. 그 또한 얼마나 같잖은 교만이었을까. 지금 내 눈앞의 부인이 기도란 아무리 엄청난 재난 속에서도 가장 품위 있고 겸손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무너지듯이 주저앉아 두 손을 모았다. 주님, 우리 혜령이를 살려만 주십시오. 더는 안 바라겠습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제발 그 아이를 벌써 죽게만 마옵소서. 어떤 모습으로라도 살아만 있게 하여주소서. 그 아이에게 다리가 없어진다면 기꺼이 다리가 되겠습니다. 눈을 못 보게 된다면 일생 눈이 되겠습니다. 그 아이가 잃은 것을 대신하고 봉사하는 걸로 낙을 삼겠사오니 부디 그 아이를 살려만 주십시오. 그 아이를 죽게 하시려거든 저를 먼저 죽게 하소서. 제가 대신 죽게 하소서. 거짓 없이 진정으로 매달린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모든 것이 시간조차 멎고 어떤 초월적인 힘과의 신비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혜숙이가 나를 조심스럽게 두들기며 말했다.
“들어가보세요. 혜령이가 의식을 회복했어요. 엄마를 찾고 있어요.”
오오 주님, 감사합니다. 이 불쌍한 에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기쁨의 눈물로 주님께 감사하고 또 찬양하면서 혜령이를 보러 들어갔다. 딸은 그사이에 머리를 홀랑 깎아서 더 알아볼 수 없이 참혹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손을 잡고 “엄마 울지 마. 난 괜찮아” 하는 게 아닌가. 얼굴이 퉁퉁 부어서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나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러나 기쁨에 넘친 나와는 달리 혜령이를 둘러싼 우리 식구와 친척들은 다 깊은 수심에 싸여 있었다. 곧 수술을 해야 하는데 두개골에 저만큼 큰 개방성 골절을 입었으니 뇌 속이 손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컴퓨터 촬영상으로도 그런 우려를 할 만한 흔적이 나타나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삭발을 했다고 했다. 뇌수술이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후유증으로 정신장애 아니면 기능장애가 오는 걸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 기능장애만 생각했지 정신장애에 대해선 전혀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여직껏 눈물을 보이지 않던 남편과 아들의 눈시울이 벌겋게 충혈되는 걸 보면서 나도 새로운 슬픔이 복받쳤다. 그러나 아까같은 난동은 안 부렸다. 나에겐 기도할 수 있는 희망이 있었다. 응답이 있을 때까지 열심히 기도할 작정이었다. 나는 수술실로 들어가는 딸의 손을 잡고 귓전에 속삭였다. 아무 걱정 말고 마음을 턱 놓고 있거라. 수술실에 주님이 임하시도록 엄마가 열심히 기도하고 있으마.
정말로 간절히 티끌만한 의심도 없이 기도했다. 주님, 그 아이를 살려주시되 정신만은 올바르게 살려주소서. 정신이야말로 아버지가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입니다. 그게 성하지 않고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구해주신 목숨에다 부디 정신을 더하여주소서.
주님이 응답을 안 할 수 없을 만큼 내 기도는 마음속 깊이에서 우러나 주님에게 미치고 있다는 걸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온몸이 텅 비고 기도의 기쁨만이 충만했다.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었다. 그분은 하려만 들면 못 하실 게 없는 분이었다. 나는 그분을 움직일 수 있는 기도의 비결을 알고 있었다. 성령이 내린다는 게 바로 이거로구나 싶은 짜릿하고 환상적 인 기쁨이 온몸에 충만했다. 퍼런 옷 입은 직원이 흰 흩이불을 씌운 바퀴 달린 침대를 시체만 운반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밀고 가면서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우르르 뒤따르는 식구들이 슬피 우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성호를 긋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나만이 주님의 은총을 더 넉넉히 받고 있다는 넘치는 기쁨이 그런 여유를 갖게 했다. 기도를 통해 얻은 확신은 틀림이 없었다. 수술실에서 혜령이가 실려나왔을 때는 어언 아침나절이었다. 천만다행으로 그렇게 깊이 광범위하게 이마뼈가 나가고도 전혀 뇌손상이 없어서 수술은 개방성 골절상의 소독과 봉합으로만 끝났다고 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에미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로 강 같은 기쁨이 밀려왔다. 기도가 이다지도 영검하고 이다지도 큰 기쁨을 가져오는 것일 줄이야.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것을 약속하고도 기도를 무시한 나의 교만과 온전치 못한 신앙을 꾸짖는 사랑의 벌로 나에게 그런 간난을 주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짐작은 곧 확신으로 변해서 절절이 뉘우치고 열심히 감사했다.
이마의 골절을 봉합하는 것만으로 수술이 끝난 건 아니었다. 부러져 가루가 된 뼈들을 들어내고 외상만을 봉합했기 때문에 뼈를 이식하는 성형수술이 남아 있었고 크게 남은 외상 자국도 문제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맨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고 앞으로도 수없는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안면골, 상악, 비골, 안구골, 치조, 앞이마 등 얼굴을 만들고 있는 뼈들이 모조리 골절, 함몰, 감돈, 결손되어 얼굴 모양이 말이 아니었다. 골반골과 다리도 골절되어 온몸을 꼼짝도 못 하게 했다. 그러나 다 완치될 수 있는 골절상이고 안면골들이 그렇게 망가지고도 기능장애가 조금도 안 나타났다. 교통사고와 산업재해 환자가 들끓는 정형, 성형외과 병동에서 그건 기적처럼 보였다. 외상 하나 없이도 눈이 안 보이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옥상에서 공치기하다 떨어진 건장한 고등학교 학생이 부러진 데도 피 나는 데도 없이 정신이 서너 살 먹은 어린애로 퇴화해서 온종일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징징대기도 했다. 다리를 절단한 젊은 엄마, 손목을 잘린 처녀, 전신이 마비돼 특수 훨체어를 타는 청년, 척추마비, 보기에도 끔찍끔찍한 화상……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하는 문명의 이기는 곧 인간을 해치는 흉기이기도 했다. 매일매일 흉기에 다친 사람들이 연달아 들어오고, 나아서도 나가고 죽거나 병신이 돼서 나가기도 했다. 그런 환자들을 볼 때마다 내 딸의 완치될 수 있는 부상을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기도도 더욱 열심히 했고 기도마다 응답이 있었다. 젊고 건강한 몸이라 하루가 다르게 치유돼갔으니 말이다. 골절되고 함몰된 뼈를 복원하는 수술도 성공적이었다. 매일매일이 기도와 감사로 충만한 나날이었다. 비뜰어졌던 얼굴이 제자리로 돌아온 날 나는 엉엉 소리내어 울며 주님을 찬양했다. 주님의 은총은 우리 병실에 특별히 충만했고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더욱 열심히 기도했다. 나의 하루하루가 곧 간증거리였다. 주님 없이 어찌 하루라도 살랴 싶게 그분의 은총은 미소한 데까지 미쳤다. 병원생활이 길어져도 지루한 걸 모르게끔 보는 것마다 감사와 기쁨이 안 되는 게 없었다.
사십 일 만에 절대안정을 위해 두 다리에 매달아놓은 추를 제거하고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병원 잔디밭을 거닐던 날은 화창하고 신록이 눈부셨다. 공기중엔 햇빛이 충만하고 연연한 어린 잎은 미풍에 살랑대고 그 가운데 건강하게 살아 숨쉬는 우리는 평화롭고 행복했다. 일찍이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또 있었을까. 앞으로도 나에겐 기쁨만이 있을 것 같았다. 문병을 와준 친구나 친척한테도 거침없이 말할 수 있었다.
“혜령이가 다치기 전보다 더 기쁘답니다. 혜령이가 다치지 않았던들 어찌 이런 기쁨을 알았겠습니까?”
아직도 딸의 이마엔 큰 흉터가 있고 비골은 내려앉은 채였지만 그들은 동정이나 위로의 말 한마디 못 하고 고개를 갸우뚱대며 물러가곤 했다. 기뻐할 일은 아직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걸음 연습을 위해 재활의학과로 가니 거기엔 정형외과에서 못 보던 더 비참한 환자들이 많았다. 평행봉을 잡고 한 발짝을 옮기기 위해 전신에 땀이 비 오듯 하고도 무위로 끝나기도 하고, 한 발짝을 위헤 온몸이 다 뒤틀리고 온 집안 식구가 힘을 모아 끙끙대고 마침내 성공을 하자 눈물겨운 환호성을 울리며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혜령이는 처음부터 잘 걸었다. 나는 마치 일등을 맡아놓고 하는 아이 엄마처럼 여유 있는 미소를 어금니 밑에서 굴리며 점잔을 뺐다. 재활의학과에서 내 딸은 단연 일등
이었다. 기도하고 감사하는 데도 더욱 기름이 오르고 신이 났다. 사흘 만에 딸은 정상적으로 걸었고 식욕도 왕성해졌다. 몸무게도 늘기 시작했다. 얼굴 모양과 사지의 기능이 제대로 돌아오고 남은 일은 코뼈를 해넣고 흉터를 손질하는 성형수술밖에 없었다. 그런 수술을 성공적으로 하려면 아직도 남아 있는 부기가 빠지고 다리 팔에도 힘이 생긴 후가 좋겠다고 주치의는 일단 퇴원을 할 것을 권고했다. 혜령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완치해서 퇴원하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그래도 얼마나 바라던 퇴원이었나. 퇴원 소리가 나자마자 딸은 더이상 한 끼도 병원 밥을 못 먹겠다고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했다. 보름 후로 다음 수술날짜를 잡아놓고 일단 퇴원을 시켰다.
퇴원을 시키고 보니 밤송이 머리가 문제였다. 가발을 하나 씌웠으나 잘 어울리지 않았고 본인도 갑갑하다고 훌러덩훌러덩 벗길 잘했다. 뇌수술도 안 할 걸 머리칼 먼저 밀어낸 병원당국이 슬그머니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컴퓨터 촬영은 폼으로 했나. 처녀의 머리칼을 절대적인 필요성 없이 일단 자르고 본 무지막지한 경솔에 대해 뒤늦게나마 싸움이라도 걸고 싶었다. 그런 울분 때문인지 딸하고도 자주 다투었다. 나는 딸이 약혼자가 왔을 때만이라도 얌전하게 가발을 쓰고 있길 바랐으나 딸은 그러고 싶지 않아했다. 약혼자는 장발이라 딸애가 가발을 벗고 있으면 서로 성이 도착돼 보였다. 나는 그게 민망해서 사윗감 앞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흠이라곤 없이 고이고이 길러 자랑스럽게 넘겨주고 싶던 딸이었다. 사윗감은 딸이 입원해 있는 동안도 퇴원 후에도 변함없이 성실했건만도 나는 때때로 미안하고 눈치가 보였고 그러고 나면 속에서 지글지글 울화가 치밀었다. 중앙선을 넘어 딸이 탄 택시와 충돌했다는 가해자인 자가 운전자를 찾아가 내 딸을 고스란히 물어내라고 격렬한 싸움을 하고 싶은 충동에 밤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가슴이 울렁거리기도 하고 쫄리기도 해서 자주 가슴에 손을 얹고 호흡을 조절해야 했다. 병원에서의 기도와 기쁨에 충만했던 날이 먼먼 옛날 같았다. 주여 주여, 아무리 불러보아도 그 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았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도가 되지 않았다. 기도가 건성 이니 기쁨이나 평화가 우러날 리 없었다.
날씨가 하루가 다르게 더워지고 있었다. 보다 많은 사람이 밖으로 나와 배드민턴을 치기도 하고 유모차를 밀기도 하고 차를 닦기도 하는 펼 내다볼 수가 있었다. 옷도 점점 얇아지고 짧아져 기분좋은 건강미가 아낌없이 드러났다. 아무도 내 딸 같은 흠은 이마에 붙이고 있지 않았다. 흠 없는 사람들이 가발이 아닌 제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고 있다는 사실이 부러워서 또 가슴이 쫄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쫄릴 때마다 손끝까지 떨리면서 현기증을 동반한 두통이 왔다. 내 딸 외의 모든 여자들이 흠 하나 없이 건강하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 내 건강과 정신을 무참히 좀 먹고 있었다. 흠 없고 건강한 사람한테 질투가 나서 꼴도 보기 싫었다. 헤어날 길 없는 불행감이었다. 병원에선 달 반도 후딱갔는데 퇴원하곤 하루가 여삼추였다. 원망과 불행감에 짓눌린 시간이란 얽힌 실타래처럼 마냥 더디게 풀렸다. 기도를 잊어버린 지도 오래였다. 어떤 날은 분하고 억울한 느낌과 싸우다 지쳐서 곧 죽을 것 같았다. 실제로 숨이 넘어갈 것처럼 정신이 아뜩아뜩하고 손발이 차게 곧아들어오기도 했다. 주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주님이 옆에 계셔도 들어줄 것 같지 않았지만 마지막 비명처럼 그렇게 신음해 보였다. 그러면서 홀연히 내가 한 번도 주를 가까이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병원에서 내가 매일매일 기뻤던 것은 주님을 가까이해서가 아니었다. 우리보다 못하고 우리보다 불행한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처지를 우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쁨이 그분으로부터의 은총이었다는 건 중대한 착각이었다. 우리보다 못한 사람의 불행을 즐긴 데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가장 야비한 기쁨으로 착각할 수 있었을까. 내 이웃의 고통이 나에겐 그렇게도 맛있었단 말인가.
내 딸이 피투성이의 처참한 모습으로 엑스레이실로, 컴퓨터 촬영실로, 수술실로 실려다닐 때 복도에서 서성이던 사람들은 비켜주기는커녕 큰 구경거리처럼 모여들어 들여다보고 동정을 표시했다. 자기가 아니면 가족이 병든 그 사람들이 내 딸을 보고 동정보다는 자신의 불행을 위로받고자 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 딸의 불행이 그들의 위안거리가 된다는 걸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들을 원수처럼 노려보았고 내심 불같은 증오심을 불태웠었다. 그러나 내가 내 딸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보고 느낀 기쁨에다 대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신앙과 구원의 기쁨으로 착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거리로 해서 얻을 수 있는 야비한 기쁨에 욕지기가 치밀었지만 지났으니까 그렇지, 그땐 얼마나 거기 탐닉했던가. 그건 또한 글쓰는 일에 절망했을 때와 매우 닮은 상황이기도 했다. 가난하고 억눌린 이웃이란 소설뿐 아니라 같잖은 우월감의 소재일 뿐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의 메마른 작가정신이 그리스도교의 휴머니즘에서 생기와 가능성을 찾으려 했던 건 퍽 그럴듯한 몸짓이었다. 그 무렵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들은 황홀하도록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고 느끼는 위안과 행복감보다는 덜 황홀했다. 나는 마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막다른 골목에 몰린 기분이었다. 딸에게 일어난 재난을 통해 주님의 은총을 깨달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 이웃 사랑의 허위를 폭로당한 것이었다. 이웃 사랑이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처럼 육친에 대한 사랑이 지긋지긋하게 뭉친 사람에겐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건 주님 이 쉬운 분이 아니란 것과도 같았다. 나는 그분이 쉬운 분이 아니란 걸 알고 있어야 했다. 유순하고 단순한 사람에겐 쉽게.올 수도, 복잡하고 꼬인 사람에겐 어렵게 올 수도 있는 게 그분 아닐까. 나에게 그분은 어렵다 못해 가혹했다. 나의 인간과 문학의 막다른 골목에서 문득 구원처럼 나타났다가 다시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이고 그분은 감쭉같이 모습을 감추었다. 그만큼 어려운 분인 줄은 알았건만도 배신감을 느꼈다. 다시는 주님을 안 부르리라고 마음을 도사렸다. 마음을 독하게 먹으니까 가슴이 쫄리는 괴로움도 조금씩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신은 죽었다’ 는 참 근사한 말이었다. 나는 한술 더 떠 ‘신을 죽였다’ 고 뽐내고 싶지만 예전에 죽은 신을 죽여봤댔자였다.
다시 입원할 날이 다가왔다. 마지막 성형수술이었다. 코뼈를 이식하고 흠집을 손보는 까다보운 수술이었다. 막상 수술실로 실려가는 딸을 보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딸도 “엄마!” 하면서 눈물이 그렁해졌다. 따라 들어가고 싶게 절박한 감정이 솟구쳤다. 여직껏의 수술은 다 살갗 속의 것을 맞추는 수술이었지만 이번 것은 눈에 띄는 외모를 손질하는 수술이었다. 스물넷 앳된 나이의 외모란 목숨과도 같은 거였다.
별안간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했다. 혹시 잘못될 경우를 생각하니까 미칠 것 같았다. 두려웠다. 처음엔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지 몰랐는데 차츰 내가 등을 돌린 그분이 두렵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분께로 돌아서면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주여, 제 딸의 얼굴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주님 보시기에 좋도록만 돌이켜주소서. 주여, 이 에미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소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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