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경 : 마 22:34-40절
제 목 : 율법 중에서 가장 큰 계명
일 시 : 2023. 4. 5.
마 22:34-40/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의 세상에서의 마지막 고난주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로 하여금 더 이상 대답할 수 없도록 만드신 일 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인 중에서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라고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거기에 대해서 대답해 주시기 전까지 모든 율법사들은 그 많은 계명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자신들도 잘 모르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을 함으로 예수님으로 하여금 곤란에 빠뜨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사가 불순한 동기로 질문했지만 예수님은 항상 인간의 불완전한 질문과 동기와 의도에도 불구하고 가장 정확하고 올바른 대답을 주십니다.
마가복음에는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라고 질문했습니다(막12:28). 본문은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라고 물었지만 같은 의미입니다.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라고 질문했는데 크다(메갈레)라는 단어는 정도나 계급에 대하여 사용될 때 최상급으로 쓰여서 제일 중요한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니까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라는 질문은 가장 중요한 계명은 무엇입니까? 라고 할 수 있고, 또는 마가복음에서처럼 모든 계명 중에서 첫째가 무엇입니까?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율법선생인 랍비들은 율법을 세밀하게 나누어서 율법 중에 613(십계명 글자의 수) 계명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613이라는 숫자는 십계명이라는 단어를 숫자로 풀면 613이라는 숫자가 되기 때문에 구약성경에 기록된 율법을 613개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하라는 계명 즉 적극적인 계명은 248개입니다. 248개는 사람 몸의 지체 수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에 있는 지체는 모두가 248개입니다. 그리고 계명 중에서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계명은 365(일년 365일)개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사의 질문은 613개나 되는 많은 계명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질문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면 율법을 더 온전히 지킬 수 있겠는가? 하는 율법에 대한 열심이 특별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율법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학문적이고 실제적으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열심히 율법을 연구하고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그들은 율법을 그대로 지켜 행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마23:2-4), 더 나아가서 구약율법이 지향하는 목표요,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영접하는 데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율법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 율법중에서 가장 큰 계명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마음을 다하여 ...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은 신6:5의 인용입니다. 신6: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가정이나 성전에서 또는 매일의 예배에 사용한 신앙고백문인 쉐마의 한 부분으로 매일 두 번씩 소리 높여 암송함으로 유대인에게는 가장 익숙한 말씀이었습니다. 특히 이것은 십계명의 전반부, 하나님께 대한 1-4계명까지를 포괄하는 요약입니다. 유대인 아이들은 이 구절을 외우는 것으로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신 6:8-9에 따라 쉐마를 문의 오른편 기둥에 기록하고 또 이것을 기록한 작은 양피지를 상자에 넣어서 끈으로 이마와 왼팔에 잡아 매었습니다(경문마23:5).
1) 마음(카르디아)은 외식이 아닌 진정한 의지를 강조한 말입니다.
2) 목숨(푸쉬케)은 육체적 생명을 뜻합니다. 즉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3) 뜻(디아노이아)이란 지적능력을 뜻하는 말로서,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이해와 통찰력을 가지고 지키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맹목적인 아닌 정확한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라는 뜻입니다.
4) 다하여(엔 홀레)는 전부 안에서, 전체로써 라는 말입니다. 결국 전인격을 기울여, 인간존재의 전 기능을 다하여, 또는 전 생애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5) 사랑하라(아가페세이스)라고 하는데 미래 시상인데, 단순한 애정이나 사랑을 나타내는 필레오 라는 단어와는 엄격하게 다릅니다. 자기이해를 초월한 순수하고 무목적, 무조건적인 사랑(아가페)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아가페 사랑은 우리 자신에게는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이런 사랑으로 하나님 사랑하려고 하면 우리에게 정말 하나님의 근원적인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셔야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가페사랑의 온전한 모습은 예수님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풍족하게 누리고, 그 사랑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고, 이웃에 대하여도 고전13장의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요13:43). 먼저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어야만 아가페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의 이면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워서 그 사랑을 체험하고 경험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될 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둘째는 그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이웃사랑은 두 번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처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둘째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보완적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원인이요,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다란 문자적으로 그녀와 동일하다 인데, 이 3인칭 여성 대명사는 크고 첫째 되는 계명(헤 엔톨레/여성 명사 단수)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둘째 계명도 첫째 계명과 동일하게 큰 계명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같은 것으로 보십니다.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같은 하나의 계명으로 보십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견해와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유전(전통)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면 어떤 경우에는 이웃에 대한 의무, 부모를 돌보는 것까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15:1-9). 더욱이 그들은 원수는 미워했으며, 조건적인 사랑을 추구했고, 죄인들을 미워했습니다(5:43-47).
그러나 예수님께서 완전케 하신 율법은 사람의 유전을 배제하고 두 계명을 사랑이라는 말로 연결하여 하나로 만드신 것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요일4:20-21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일4:20-21/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했습니다.
1) 먼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레19:18절을 인용한 것으로 본서에서는 이미 마5:43,마19:19에서 언급되었습니다. 이것은 십계명의 후반부 사람에 대한 계명의 포괄적 요약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사랑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한편 이 이웃의 개념이 레19:18에는 이스라엘 사람과 그 땅에서 함께 사는 외국인을 포함했으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원수(마5:44)를 비롯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눅10:29-37)에게까지 확대됩니다. 사실 누가복음의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이 이웃을 사랑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이웃개념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웃사랑 개념은 온 세상의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요11:52). 그러므로 이웃이란 세상 모든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한 자나 악한 자에게 동일하게 일반은총을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2) 네 몸과 같이라고 했습니다.
네 몸과 같이란 문자적으로는 네 자신처럼 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사랑하고 돌봅니다. 그리고 자기자신에 대한 돌봄은 무조건적이어서 그에 대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쉽게 용납하고 잊어버리고,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관대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미 지나칠 정도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자기사랑이 너무 과도해서 우리는 이기적이고 타락하고 부패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이웃에 대해서 얼마나 무관심하고 냉정하고 계산적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먼저 내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도 그 만큼 사랑하라는 순서나 그 정도가 아니라 이웃과의 형제적인 연합을 이루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이웃에 대하여 그가 마치 '내 자신'인 것처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입니다.
3)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 뜻을 바로 알기가 무척 힘듭니다. 문자적으로는 이 두 계명에 그 모든 율법과 그 선지자들이 매달려 있다는 뜻으로 강령(크레마타아)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먼저 이 '두 계명'은 서로 분리되거나 대등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처럼, 뿌리와 열매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율법과 그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전체를 강조하여 말한 것입니다. 또 구약성경의 핵심은 율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라는 직접적인 표현이나 문장이 법조문으로는 나오지 않지만 그 계명들의 근본정신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 사랑입니다. 모든 법은 항상 그 법을 만드는 근본정신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근본정신이 무시되면 법조문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구약전체의 계시와 역사의 목표와 의미는 하나님나라에 있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법인 사랑의 법을 지킨다는 것은 다른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자동적으로 다른 모든 계명들이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계명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랑(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의 계명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사실상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은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열심인 바리새인들의 율법준수가 비판을 받는 것은 단지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서 율법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희생과 관용이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행위만 무성하며 스스로 의롭게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의 계명은 모든 율법 준수의 동기와 그 자세를 규정하고 있으며, 적극적인 헌신과 자기희생과 관용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산상보훈(5:17-20)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7:12에서 똑같은 표현으로 황금율을 말씀하셨습니다. 마7:12/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롬13:8-10에서 이 문제를 다시 언급하면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결론 짖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게 되면 반드시 십계명 1-10계명까지를 지키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이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