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정情
綠雲 김정옥
가방이 내게로 왔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선물이다.
며칠 전, 평소보다 조금 일찍 요가 교실에 들어섰다. 광옥 씨가 기다렸다는 듯이 반색을 한다.
“선물이에요.” 광옥 씨가 빵빵하게 부푼 가방을 내민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뜻밖이라 얼굴까지 화끈 달아올랐다. “어머나, 세상에나.” 단음절로 호들갑을 떨다가 정작 해야 할 고맙다는 인사도 까먹었다. 집으로 오는 길, 다홍색 영산홍이 더 새뜻하고 귓불을 스치는 바람도 한결 상큼했다.
버킷 백이었다. 보통 복주머니 백이라고 불린다. 복주머니처럼 생겨서 복스럽고 귀여운 것이 이 가방의 콘셉트다. 나는 이 모양을 여느 디자인보다 좋아한다. 작년에 거금을 주고 산 명품 가방도 버킷 백이었다.
두 가지 밤빛 계열의 배색이 잘 어울린다. 아랫부분과 양옆은 짙은 갈색으로 두르고 가운데부분과 손잡이는 연한 갈색이다. 책 서너 권이 들어갈 정도이니 수납도 넉넉했다. 색깔이며 크기며 어느 하나 마음에 모자라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본인이 직접 만든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너무 예뻐서 탐난다는 시선을 보내긴 했다. 내 눈빛이 부담스러웠을까. 괜히 제 발이 저리며 미안해진다. 재료값도 만만치 않을 터이지만 디자인에 따라 본을 뜨고 재단해서 한 땀 한 땀 박음질하며 얼마나 공을 들였을까. 구멍을 뚫고 고리를 끼우며 몇 번의 망치질을 했을까. 그 위에 그녀의 정을 얹었다고 생각하니 어떤 물건으로 답한들 그의 노고에 미칠까 싶다.
선물은 가방뿐이 아니었다. 가방 속에는 달달하고 바삭바삭한 말린 대추 편과 촉촉한 건포도가 잔뜩 들어 있었다. 달큼한 주전부리로 남편과 내 입이 한동안 호강할 것 같다.
모임에 가서 선물 자랑을 걸판지게 했다. 자식이 준 선물이라면 팔불출 소리를 듣겠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지 않은가. 이러구러 직접 만든 가죽 가방을 선물 받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내 얘기를 들은 친구들은 너에게 잘 어울린다며 모두 부러운 눈빛이다. 한 친구는 “네가 인복이 많다.” 하고 또 다른 친구는 “네가 그분에게 그만큼 잘해준 것이 아니겠니?”란다.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다. 인복이 많다는 것은 인정한다 치고 내가 그에게 잘해준 것은 맹세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시쳇말로 ‘똥손’이다. 아이들 어렸을 때 딸내미 옷을 뜨개질로 뜬 적이 있었다. 품과 시간은 많이 들었지만 제 모양이 나질 않았다. 결국 몇 번 시도 끝에 돈 주고 사는 게 훨씬 예쁘다며 포기하고 말았다. 음식도 50년 동안 남편에게 인정받지 못한 솜씨다. 그러니 무언가를 만들어서 정을 나눠 줄 일이 있었겠는가. 게다가 아무 조건 없이 누구에게 베푼 기억도 별로 없다. 기껏해야 손쉽고 돈 몇 푼 안 되는 커피 쿠폰이나 책 한 권 정도였지만 그 속엔 ‘다음에 나한테도 보내겠지.’ 하는 속물 같은 마음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때때로 정은 물질로 둔갑한다. 인정 많은 선배가 맛있는 김치 한 통과 깻잎장아찌와 고추 초절임까지 담긴 묵직한 가방을 내게 들려준다. 또 인심 좋은 친구는 간간이 양말 한 켤레, 다시마 한 봉지, 티셔츠 등 소소한 것까지 내 가방에 찔러준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푸짐하게 받고 제대로 갚지 못하고 산다. 살면서 받은 선물을 모으면 집채만 할 텐데 언제 다 갚을 수 있으려나.
가방은 무엇을 담는 목적으로 쓰인다. 학생들은 책을 넣고, 직장인은 서류를 넣으며 젖먹이 엄마 가방엔 아기용품이 담긴다. 멋을 차리는 여성은 실질적인 쓰임보다는 옷차림에 어울리는 가방이 우선이다. 나는 옷차림에 어울리는 것은 제쳐두고 실용적이면서 너글너글하고 푸근한 마음이나 잔뜩 담았으면 좋겠다.
가방 안쪽에 ‘메이드 인 정情’이라고 낙인을 찍어야겠다. 나만 보이는 화인이다. 세계적인 장인이 만든 ‘메이드 인 이태리’나 ‘메이드 인 프랑스‘보다 몇 곱절 값진 브랜드가 되지 않을까.
가방에 지갑, 핸드폰, 손수건을 넣었다. 나머지 공간은 여유롭게 남겨 두려고 한다. 온정과 다정, 잔정과 속정, 풋정과 덧정에 깊은 정까지 온갖 정을 모두 담았다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하나씩 하나씩 나눠 줄 작정이다. 내 트레이드마크인 활짝 웃는 미소 스티커까지 붙여서 말이다.
가방끈을 조였다. 영락없이 큰 튤립 모양이다. 연갈색 튤립을 한들한들 흔들며 알록달록 튤립 잔치가 펼쳐진 생태공원으로 나들이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