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간 금요일>
어린양(하느님의 어린양)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 또는 ‘어린양’이라고 부른다. 이 경우는 구약 성경에서의 어린양의 이미지들을 연상시킨다.
구약 성경에서 보면, 우선 어린양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사 때 제물로 사용되었던 동물들 가운데서 가장 자주 언급된다. 제물로서의 어린양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제단에 올려졌고, 그때 제물의 피는 속죄의 수단으로 여겨졌다.
두 번째로 파스카의 어린양이 잉ㅆ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압제에서 탈출할 때 하느님께서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도록 하여 이스라엘이 죽음의 재앙이라는 심판을 면하고 노예생활에서 자유롭게 되도록 해 주셨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에게 어린양은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끝으로 어린양의 모습으로는 주님의 종이 있다. 여기서는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음으로써 그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실 주님의 종이 도살자의 칼 아래 죽음을 당하는 양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는 어린양을 비유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양이라 불리지만 그 외에도 희생 제사의 ‘제물로서의 어린양’ 또는 ‘파스카의 어린양’에 비유되기도 하신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 기간에 죽임을 당하셨다고 말함으로써 그리고 십자에 달리신 그분의 다리를 꺾지 않았다고 서술하여 구약에서 파스카 제물의 뼈를 꺾지 않았음을 연상시킴으로써 예수님과 파스카 양을 연결시키고 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주님의 종으로서 양의 모습을 예수님께 적용함으로써 예언이 그분 안에서 실현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어린양에 비유하는 것은 그분의 죽음이 지닌 속죄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요한 묵시록에 나타나는 어린양은 희생 제물로서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역사를 주관하시고 악과 죽음을 물리쳐 이기심으로써 심판자요 생명의 주관자가 되신 주님으로서의 영광과 권능을 지니신 구세주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더 많다.
안수(按手)
사람이나 동물에게 손을 얹는(주로 머리에) 행위를 안수라고 한다. 성경에서 보면 안수 행위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손을 얹는 것은 우선적으로 영적인 친교가 이루어짐을 의미하지만 축복이나 권위뿐만 아니라 때로는 죄악 등이 전달되게 한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누구를 축복할 때 또는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직무를 맡기면서 그 직무에 따른 은사나 권리를 줄 때 손을 얹는 행위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 질병을 치유해 주고 건강을 회복시켜 주고자 할 때, 성령을 전해 줄 때도 안수를 했다. 그런가 하면 희생 제사를 봉헌할 때는 제물로 쓰이게 될 동물에게 손을 얹었는데 이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봉헌될 제물에게 사람의 죄를 옮겨 가게 한다는 의미였다.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한 자에게 처벌이 내려지도록 하기 위해 손을 얹는 경우도 있었다.
입당송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권능과 신성과 지혜와 힘과 영예를 받으소서. 알렐루야.
제1독서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사도 9,15)
화답송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모든 겨레들아.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
복음 환호송
알렐루야.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 알렐루야.
복음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5)
영성체송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우리를 속량하셨네. 알렐루야.
<복음의 기쁨- 3항>
어디에 있든 바로 지금 이 순간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게 하소서.
주님이 주시는 기쁨, 언제라도 충만하게 하소서.
두 팔 활짝 벌리고 저를 기다리고 계신 예수님,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시니 참으로 기쁩니다.
일흔일곱 번 용서로 용서에 결코 지치지 않으신 하느님, 당신 자비를 청하는데 제가 절대 지치지 않게 하소서.
확고한 당신의 사랑을 받는 저의 존엄, 그 누가 빼앗겠습니까?
저의 기쁨 되찾아 주시는 온유함, 고개 들어 늘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저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끄소서.
하느님,
지난 월요일, 화요일 스테파노를, 수요일, 목요일 필리포스를, 그리고 오늘 사울을 통해 복음을 듣습니다. 은총과 능력이 충만했던 스테파노는 우리 두 아이 대부님의 세례명이기도 해서 친근하게 다가왔습니다. 필리포스는 어제 뜻도 모르며 글을 읽고 있는 에티오피아의 내시에게 다정하게 다가가 그를 가르쳐주는 모습을 보며 친근하게 여겨졌습니다. 오늘 사울을 만납니다. 길을 가던 사울에게 빛이 번쩍여 둘레를 비추자 그는 엎어졌고 주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을 때 앞 못 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고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의 명으로 하나니아스는 그를 방문합니다. 하나니아스의 안수를 받고 예수님의 소명을 듣자, 곧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됩니다.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면서 친해집니다. 스테파노, 필리포스, 두 분의 봉사자와 성인 사울이 5일간 묵상을 이끌어주었습니다.
하느님,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같이 들어있는 이번 한 주는 제가 키운 아이와 저를 키워준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어느 때 보다 더 많이 하게 됩니다. 먹어야 생명을 유지합니다. 음식을 먹어야 하고, 사랑을 먹어야 합니다. 그 두 가지를 잘 먹여주신 어머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잘 먹이기 위해 노력해 왔던 지난 시간들을 돌아봅니다.
다시, 조금 더 가까이 제게로 온 스테파노, 필리포스, 사울, 세분을 떠올려봅니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현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어야 하는 음식, 더 오래, 더 건강히, 더 잘 살기 위해 음식에 공을 들입니다.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음식이라면 어떤 공을 들여야 하겠습니까? 주일을 기다립니다. 현재는 매일 미사 책을 통해 매일 당신의 말씀으로만 대신 받아먹지만 언젠가 매일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생명의 빵, 영원한 생명의 빵, 하느님의 어린양, 부활하신 예수님의 살을 받아먹고, 피를 받아 마시도록 하겠습니다.
임마누엘 하느님, 당신 보시기에 좋은, 쓸모 있는 그릇이 되도록 힘찬 열정 쏟게 하소서.
감사합니다.
아멘
2019. 5. 10 (금) 이진희 모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