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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오는 말에 ‘북천 상류에 큰물이 지면 냇 거랑을 사이에 둔
분황사 탑의 인왕상과 헌덕왕릉 돌사자가 서로 물이 자기 쪽에 못 오도록 용쓴다고 땀을 흘렸다.’ 한다.
헌덕왕(憲德王)은 신라
41대 왕이다. 『삼국사기』에 “왕이 18년(826) 10월에 돌아가시니 시호를 헌덕(憲德)이라 하고,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장사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성은 김(金) 씨요, 이름은 언승(彦昇)이니, 소성왕(昭聖王)의 아우이다. 왕릉은 천림촌(泉林村)
북쪽에 있다.”고 했다.
천림사(泉林寺)나 천림촌(泉林村)의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능의 남동쪽에 절이 있었음은 틀림없다.
20여 년 전, 북천 하류의 자갈 모래를 채취한 이래 큰물이 져서 물살에 강 바닥이 많이 패였을 때 탑 돌과 주춧돌, 다듬은 돌 등이 드러났다.
유물은 가능하면 원 위치에 둬야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에 내[川] 북쪽 높은 곳에 땅을 고루어 울타리를 치고, 냇바닥의 석조 유물들을 모아서
보존하였다.
그러나 도난의 우려가 있고, 강변 도로를 북쪽으로 내면서 박물관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어, 지금은 그나마 절 터의
흔적을 알아볼 수 없다. 또한 능 북쪽에는 수원이 풍부한 오래된 샘이 있으니, 지통(地通)우물 또는 동천(東泉)이라 부른다. 보문저수지를 막은
1950년대 후반부터는 옛날같이 물이 많이 나오지 않고, 지금은 시멘트로 덮어 씌워두고 양수기로 물을 퍼내어 쓰고 있다.
이와 같이
서라벌 동쪽에 물 좋은 샘이 있고, 부근에 절이 있었으니, 절 이름은 천림사이고, 마을 이름은 천림촌이 아니었겠는가? 조선시대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헌덕왕릉은 부(府)의 동쪽 천림리에 있다.”고 했다. 이런 기록들을 종합하여 볼 때 경주 동쪽 동천동에 있는 이 무덤이
헌덕왕릉임을 알 수 있다.
지금 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신종은 봉덕사종이라고도 한다. 이종이 있던 봉덕사(奉德寺)가 북천가에
있었는데, 홍수가 나서 절은 떠내려가고 종만 반쯤 묻힌 것을 흥륜사로 옮겼다고 했으니, 북천은 홍수로 인한 범람이 심했으며, 또한 상류는 경사가
급한 편이라 급류가 밀어닥친 적이 많았음은 지금 능의 동쪽 300m지점에 남아있는 ‘알천개수비(閼川改修碑)’가 잘 말해주고
있다.
이 능이 본래는 신라 왕릉의 완비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는데, 언젠가 홍수로 인한 급류에 능 남쪽 부분이 휩쓸려 떠내려가고
무너졌다. 떠내려 간 난간 기둥 돌 토막을 주워 옮겨, 정원에 세워둔 집도 있다. 없어진 호석과 바깥의 기둥 돌, 난간 돌, 바닥 돌 등은
1979년 다시 만들어 끼우고 세우고 깔았다.
능의 밑 지름은 27m, 높이 5.7m 인데, 아래 부분은 판석(板石)으로 병풍을
둘린 것처럼 호석(護石)을 돌렸다. 판석을 지탱하는 돌 못은 모두 48개인데, 3개 건너 하나씩 12지상을 새겼는데, 지금 남은 것은 5개이다.
북쪽의 자(子), 북동의 축(丑), 동북의 인(寅), 동쪽의 묘(卯), 북서쪽의 해(亥)상이 남아 있다.
사람 몸뚱이에 짐승 얼굴을 하고 있는데, 복장은 김유신 장군묘의 십이지상과 같은 평복(平服)이고, 조각 솜씨는 우수한 편이다. 그
외의 석물은 제자리에 없지만, 지금도 능 남쪽이 1m 넘게 낮아, 본디 이 앞에 있던 문인석, 무인석, 석사자, 상석 등이 유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경주고등학교 정원에는 이 능 부근에서 옮겨다 놓았다는 무인석의 머리 부분이 있다. 다른 냇돌에 많이 부딪혀 닳았지만,
괘릉이나 흥덕왕릉의 무인석과 같이 머리를 동여맨 넓은 띠가 뒤로 늘어뜨려 있다. 또 분황사 모전석탑 기단 위에 돌사자 두 마리가 남서, 북서
방향으로 안치되어 있는데, 헌덕왕릉의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사실 그럴 것이다. 그 이유로, 첫째 삼국시대에는 탑 주위에 돌사자를
배치한 예가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 사자의 조각 솜씨와 석질(石質)이 탑 1층 사방에 새겨진 금강역사상과 다른 점이다. 셋째는 성덕왕릉이나
괘릉 주위에 배치된 돌사자와 이 돌사자의 분위기가 흡사하다는 점이다.
또 하나 여기에 있던 향로석을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는데, 이에
관해 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의 박방용 연구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記述)하고 있다. “이 유물은 석상(石床), 또는 배례석(拜禮石)이라 흔히 부르고
있으나, 석상으로 보기에는 중앙의 연화문이 도드라져서 음식을 차려놓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길이 80cm, 넓이 42cm, 높이 35cm로
왕릉의 부속 시설인 석상으로 인정하기에는 너무 소형이다.
또한 배례석으로 보기에는 받침대 위에 안상문이 사방에 투각되어 있어서
사찰에 사용되는 일반형의 배례석과 흡사한 형태이지만, 발견 장소가 왕릉인 점으로 보아 둘 다 가능성이 없다. 어떤 학자는 이 향로석이 왕릉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석상으로 보았던 것 같으나,
홍수로 인해 북천이 범람하여 봉토의 남쪽 일부와 석난(石欄)과 호석 등이 유실될 때
대형의 석상도 함께 없어지고 향로석만 남아 있었던 것을 후대에 석상 대신으로 이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향로석은 1979년 10월 무렵
헌덕왕릉을 복원 공사할 당시 사찰에 쓰이는 배례석으로 오인하여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지게 되었으며, 지금 남쪽 정원에 전시중에 있다.”
(『박물관신문』278호)
이런 여러 증거물로 미뤄보면 헌덕왕이 돌아가신 후, 왕위에 오른 동생인 흥덕왕(興德王;42대)이 형을
위하고, 왕실의 위엄을 들어내기 위해, 12지상의 호석, 돌난간, 상석, 향로석, 무인석, 문인석(?) 등이 완비된 능으로 축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참고) 헌덕왕릉응 몇해 전 태풍 매미로 인하여 왕릉주변의 석간이 부서지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나 경주시에서 원형대로 복원을 하였고 새로 주차장과 진입도로를 설치하여 관광지로서의 새로운 모습을 갖추었다.
보문호로 가는 동천 북편도로를 타면 바로 진입로와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