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종단의 발생은 불교의 교리를 바라보는 시각, 지도자에 대한 시각,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수행의 방법 등에 관한 이견에서 비롯된다.
불교에서 이견이 처음 발생한 것은 부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데바닷다 에서부터이다. 그는 계율 지상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한 채 중도적인 부처님의 주장을 비판했으며 끝내는 부처님의 교단을 떠나 새로운 교단을 형성했다. 이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철저한 지계(持戒)를 주장하던 데바닷다가 중도적 수행과 지계를 강조하는 부처님의 곁을 떠난 것은 불멸 100년경 첫 교단 발생의 사건이 되는 〈밧지풋타가〉(跋舍子)의 10사(事)주장에 대한 상좌(上座)들의 대응과 대비되는 미묘한 맛이 있다. 세력의 우열은 주로 그 숫자에 비례하지만 그 세력의 지속 여부는 그 집단의 응집력에 큰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볼 때 계율에 대한 시각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에는 부처님의 멸도를 접한 늦깍이 승려인 발난타(Upananda)비구가 슬픔에 젖기보다는 오히려 시원해하고 홀가분해 했다는 데서 이견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오히려 부처님이 너무 세세한 것까지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부당한 간섭이라는 시각이어서 흥미롭고, 요즘에도 문제가 되고 있는 늦깍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다음에는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그 해에 왕사성 칠엽굴에서 행해진 제1결집과 관련한 이견인데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마하 가섭이 주동이 되어 행한 제1결집에 부처님보다 나이가 많아서 일찍 열반한 목건련과 사리불은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없었다.
가정이지만 살아있었다면 참석했을 것인가, 아니면 불참했을 것인가? 기록에 의하면 사리불의 제자인 교범바제가 결집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고는 ‘아기코끼리는 어미코끼리를 따라가는 법’이라며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아기코끼리는 자신이고, 어미코끼리는 사리불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리불의 생전 교육에 의하면 결집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자신도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부처님의 친아들인 라훌라도 결집이 진행되는 동안 숲속에서 정(定)에 들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보아 불참했음을 알 수 있다. 결집에 참여한 아난다 또한 처음에는 가섭이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참가를 불허한 것으로 보아 이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견이 있는 이들은 결집에 참여하지 않고, 굴 밖에서는 따로 결집이 있었으니 이를 파사카(婆師迦)가 주도한 굴외결집이라 한다. 전법하러 갔던 부루나존자가 500대중과 함께했다.
2. 종파의 발생
본격적인 종파발생은 보수적 성향의 장로(長老)비구들이 불멸 후 100년경 〈밧지풋타가〉(跋舍子)가 제기한 계율에 관한 10가지 의견(十事)에 대해 부처님법에 위배된다는 해석을 내리고, 제1결집의 동기가 된 발난타사건에서 처럼 이 기회에 정법 선양의 깃발을 걸고 부처님 말씀을 결집해야한다며 〈바이샤알리〉(毘舍離)에서 3장(三藏)을 결집하게 된다. 그 1년후 1만명의 비구가 모여 이에 대응하는 별도의 대 결집(大結集)을 하게 되는데 이 대 결집과 앞서의 굴외결집이 대중부(大衆部)의 뿌리가 된다. 대 결집을 행한 진보적 성향의 대중들은 독자적인 교단을 선포하여 대중부라고 한 것이다. 물론 대중부라는 명칭은 장로(長老)들에 의해 주도되는 상좌부(上座部)에 비해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양해를 구한 것은 계율에 관해서도 신축적인 적용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사상이라며 오히려 그 정신적 정통을 주장한다.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뉜 교단은 이후 약 100년간은 그 상태로 있다가 100년뒤 대중부가 18개의 부파로 분열하고, 그 100년 뒤에는 상좌부가 두 개로 나뉘어 본격적인 부파시대를 열게 된다. 처음 상좌·대중의 두 부파로 나뉜 것은 근본분열, 나중 상좌2, 대중18의 20부파로 나뉜 것은 지말분열이라 한다.
부파의 발생은 교단이 나뉘어 통일성을 상실했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상의 다양성과 수행방법 및 결과에 대한 단계 상승의 효과를 얻어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오늘날과 견주어 보는데 참고가 될 것은 첫째, 상좌부계통의 불교는 인도 남방의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에 지금까지 남아 있고, 대중부계통은 훗날 혁신적인 발전을 이룩한 대승불교에 편입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부파 발생의 동기가 계율 등 교단 생활의 방법에 관한 이견에 있다는 점이다.
3. 대승의 출현과 종파 그 나라의 모습
부파불교시대를 거쳐 대승불교가 흥기하는데 우선 대승의 추진세력은 보살가나·법사라고 하는 특별한 활동을 하는 불교도라는 점이 눈에 뛴다. 그들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불탑을 중심으로 생활하며 부처님과 신도들의 중간 교량 역할을 하며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상좌부계통의 승려랄 수 있는 성문승(聲聞乘)을 능가하는 보살승(菩薩乘)으로 나온다. 이들은 보살사상(菩薩思想)·행원사상(行願思想)·공사상(空思想)·이타주의(利他主義)에 입각한 출·재가(出在家)주의를 표방한다. 출·재가 공동주의는 사상과 수행의 난이도를 쉽게 해서 정토사상·회통의 화엄·법화사상 등과 함께 밀교의 출현을 이끌게 된다.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인도에서 소개된 경론이 일정한 체계와 순서에 따라 들어오지 않고 무분별하게 수입됨에 따라 혼란을 야기하게 되어 이를 일관성있게 정리할 필요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어느 경(經) 또는 논(論)에 근거를 두고 다른 경론을 거기에 포함시켜 교설을 정리하고 그들간의 관계를 명백히 하는 노력이 진행되었다. 이는 물론 한국과 일본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경전을 부처님의 생애에 배대해서 그것들이 설해진 형식·방법·순서·의미·내용 등에 의해 분류하고 부처님의 의도를 명확히 하려 했다. 이것을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 한다. '남삼북칠(南三北七)의 10사(十事)교판'이라 불리는 이 판석은 우리에게 돈(頓), 점(漸), 부정(不定)의 3교나 천태종의 5시(時) 8교(敎) 등의 방법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불교의 종파발생은 바로 이 교상판석에 의한 것이다. 물론, 이는 교종(敎宗)의 경우이고 선종(禪宗)의 경우는 보리달마에서 혜능으로 이어지는 정맥이 각 선사들의 지도방법 및 주석처의 산명 또는 사명에 따라 일종의 종파가 형성되게 된다.
4 . 한국의 종파 형성
한국의 경우 초창기에 율종(律宗), 화엄종(華嚴宗), 신인종(神印宗) 등은 중국에서 배운 바를 펴기 위한 목적에서 바로 창종하거나 독자적으로 깨달은 바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며, 선종(禪宗)은 중국 당나라에 가서 당시 조사들의 심인(心印)을 받아와 각자의 인연 터에 도량을 세우고 교화의 방법을 개시해 일가를 이루므로써 형성된 독자적 수행 가풍을 드러내는 주석처 사찰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선문(禪門)이 이룩됐다.
이는 중국의 선종이 지도자 이름을 따서 명칭을 지은 것과 구별된다고 하겠다. 이렇게 해서 교종의 다섯, 선종의 아홉 문파가 형성되었다. 물론, 아직까지 정확한 종파명을 쓴 것은 아니지만 그 형체로 보아 종파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의천(義天)의 천태종(天台宗)과 선종이 각자 후원 세력의 힘과 함께 발전하다가 후원 세력의 부침과 그 궤를 같이 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울러, 태고보우(太古普愚)국사가 제종을 통합하여 조계종(曹溪宗)이 되었으므로 한국불교의 통불교적 전통을 수립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고려말부터 유교와 함께 대두한 배불론(排佛論)에 의해 여러 번의 어려움을 당하였다. 태종에 의해 11종이 조계, 천태, 화엄, 자은(慈恩), 중신(中神), 총남(摠南), 시흥(始興)의 7종이 되었다가 수양대군에게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짓게 하고 자신도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지었던 세종 때 조계ㆍ천태ㆍ총남의 셋을 합해 선종으로, 화엄ㆍ자은ㆍ중신ㆍ시흥을 합해 교종이라 해서 어느 나라에도 없던 선ㆍ교 양종이라 했다. 종파의 명칭도 문제이지만 그것을 결정하는 주체가 불교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원칙이 있을 수 없었다. 이후 서산대사에 이르러 선교 양종은 완전히 조계종(曹溪宗)으로 통합되어 교는 선에 들어가는 기초로서만 자리했다. 일제 시대에는 전국 승려들의 총의에 의해 불교의 통일 기관인 원종(圓宗) 종무원을 서울에 두었으나 곧 폐지되고, 임제종(臨濟宗) 등을 거쳐 1938년 조선불교조계종(朝鮮佛敎曹溪宗)으로 통합되어 해방을 맞게 된다.
5. 일제 이후의 양상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총독부를 설치해서 조선을 식민지화시키는 통치체제의 정비를 서두르는 일환으로 1911년 모든 사찰의 재산처분과 사법제정 및 주지 취임 등의 고유권한을 총독부 및 지방 장관에게 두는 악법인 사찰령과 그 시행규칙을 제정해서 불교계를 복속시켰다. 검은 마수를 알아채지 못하게 30본산제도를 두어 본산 자체가 제각기 종단의 위상을 가지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고 등록한 사찰의 주지들을 총독부에 초청해서 융숭하게 대접하고 일련의 민원들도 해소해 줌으로써 조선시대의 탄압 받던 설움을 달래게 하였다.1912년에는 임제종과 원종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태고보우국사를 종조로 하는 조선불교선교양종을 건설하였다.
원종과 임제종의 갈등과 극복, 그리고 승려의 결혼을 둘러싼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城)의 해결방법의 차이 그리고 조계종의 종명(宗名)속에서 뭉뚱거려진 선과 교에 관한 승려들의 인식 차이는 해방 후 종단간 분교 및 종단 발생과 종단내 분규의 원인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회광(李晦光) 등의 조동종과의 통합운동은 박한영(朴漢泳)ㆍ한용운 등이 임제종을 설립해 대항하므로써 무산되고, 이 흐름은 다시 사찰령을 통해 제지됐으나 양측의 흐름이 다른 방향의 움직임을 불러오게 된다. 원종 세력은 31본산 주지회의의 실질적 주동 세력이고, 임제종 세력은 그들을 움직이기 어려운 혁신적 젊은 사상가요, 수좌들이었다. 한용운은 모든 승려들이 결혼해야 한다는 지나친 주장을 하고, 백용성은 절대 안된다는 상반된 주장을 하였다. 둘 다 교단 내에서 그 당위성을 토론하지 못하고 1910년에 한용운은 중추원 의장 김윤식에게, 백용성은 총독에게 건의문을 내는 우를 범하기도 하였다. 승려의 결혼 문제는 일찍이 인도, 중국,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일이며, 그 자체를 동시대인이 판가름하기가 어려운 문제다. 불탑 수호자들에 의해 주도된 대승불교의 경전인 화엄경에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인도의 좋은 예이며,티벹의 나로빠나 중국의 역경삼장인 구마라지바,신라 원효의 결혼을 두고 불교계에서 애매한 해석을 하고 있는 것도 그런 것이며, 한용운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다. 일제하 33인의 기미 만세운동 주도자중 유일하게 지조를 지킨 것으로 유명한 만해는 누구의 영향으로 결혼했다고 보아야 할까?
6. 근대 종단 분열의 계기
경허(鏡虛) 이후의 선수행의 전통을 확립하려는 이판 수좌들과 태고(太古)ㆍ서산(西山)ㆍ만해(卍海)로 이어지는 통불교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상반된 사판 승려들의 움직임은 그들의 해방 후 사회적 위상 확인과 함께 바로 불거졌다. 일제의 지원과 자신들의 노력을 합한 힘에 의해 교학과 사회학의 물결을 체험한 이들은 해방 후 사찰의 주지, 회사의 사장, 국회의원, 장관 등의 상당한 지위와 함께 재산도 가질 수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입지가 좁은 이들은 화려한 강학(講學)이나 사회적 활동보다는 나를 찾는 참선정진(參禪精進)에 몰입한 이가 많았다. 진정한 수행자들은 최소한의 수행공간을 요구했고, 겸허한 소임자들은 흔쾌히 약속하며 뒷바라지에 골몰했다. 1952년에 선학원 계열의 이대의스님이 당시 종정이었던 송만암스님에게 제안한 비구승(이판승) 수행사찰 제공에 대해 불국사에서 개최한 법규위원회의에서 18개 사찰을 제공하기로 결의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동화사 등 18개 사찰이 재산가치가 없는 사찰이라는 이유로 비구승측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또한 당해 사찰 주지들의 반발도 있고 해서 이 제의는 현실화되지 못했다. 이 일은 분규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으며 ,한국불교 발전의 중요한 전기가 되었을 수도 있었던 사건이 아주 잘못된 분규와 법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한 도화선이기도 했다.
7. 법란으로 형성된 나뉨
본격적으로 종단의 분규로 발달하고 법란으로까지 비화된 것은 6.25한국전쟁에서 국민들의 신망을 잃어버린 이승만 정권의 여덟차례에 걸친 소위 '불교정화유시'에 기인한다. 요즘은 남북교류와 세계화 조류에 힘입어 사라지고 있지만 한국인에게 2대 악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첫째 일제를 겪은 이들에겐 '일본의 잔재 또는 앞잡이'라는 말이며, 6ㆍ25를 겪은 이들에겐 '공산당'이라는 소리였다. 이승만 정권은 이 2대 악감정을 모두 다 활용했다. 일제하에 부일했던 이들은 조사하는 국회내 반민특위(反民特委)에는 '공산당'을, 민족정기와 민주정치를 부르짖는 불교계엔 '일본 잔재'를 쓴 것이다. 두 번 다 국민과 식자들의 저항에 직면했지만 후자의 경우엔 결국 스스로 무너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해방이 되었으나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한 민족진영은 미 군정당국의 방해 책동으로 귀국조차 하지 못하고 3년여를 보내는 사이 이승만이 정권을 잡았으나 여러 가지 면에서 불안하고 리더쉽을 학보하지 못해 고생했다. 전통적으로 김구,조소앙 등의 불교 및 동학사상과 가까운 지도자들을 지원했던 불교계의 지도자인 이지암,박성하 스님등이 이승만정권에 부담이 되고 6.25한국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 국민들의 원성을 샀으며 부정적인 방법에 의해 집권을 연장하려던 것들도 불교계 지도자들의 저항으로 어렵게 된 측면이 있었다. 이러한 때에 마키아벨리즘의 흉내를 내어 외부로 시선을 돌리려고 승려들의 싸움을 유발해 거대한 민족세력의 본산을 와해시키는데서 더 나아가 지지세력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기 위해 1954년 5월부터 1955년 12월까지 무려 8차에 걸쳐 유시(담화문)을 발표해서 불교를 탄압하였다. 민주화된 오늘날에도 대통령의 담화나 정책기조에 따라 거대 재벌이나 정당들이 힘도 못쓰고 무너지는데 당시의 어두운 사회에서 8차례나 담화문을 내고 문교부,내부부,경찰력을 동원해 탄압하는 것을 견디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정말로 역사상 유례 없는 탄압을 받은 것이다. 이청담,하동산 등과 가까웠던 이승만의 양딸 김부전(법련화),김두한 등도 그들을 돕는데 앞장섰다.
대한불교조계종과 한국불교태고종으로 나뉘는 계기가 되는 1954년 유시에 의한 불교교단 분규는 「외부의 힘을 입고 하는 정화운동은 원만한 결실을 거둘 수 없다」고 한 조계종 이 성철스님의 말마따나 아직도 계속 승니의 분한문제, 세속적 권력과 방법의 향유문제로 고생하고 있는 조계종과 제 위치를 찾기 위해 골몰하는 태고종 및 그 사이에서 분주한 마음을 가지는 여타 종단의 모습에서 그 보(報)를 찾을 수 있다. 1954년 독신승으로서 종정을 지내고 있던 백양사의 송만암스님이 "불교 정화는 필요하나 그 방법론은 현재 비구승들이 추진하는 것으로는 안된다"고 하여 당시 선학원에서 열린 비구승 대표자대회에서 부종전에 하동산,도총섭에 이청담,총무원장에 박성하를 거느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받아들인 이종익,이불화 등 환속한 불교학자들의 보조종조(普祖宗祖說)에 대해 "환부역조(換父易祖)"라 비판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이후 그들은 문교부장관 이선근의 지원을 받아 사찰정화대책회의에서 승려 8대자격이라는 조건을 만들어 거기에 해당한다는 1200여명의 명단을 만들기도 하였으나,해방 후 역대 종정스님 계보를 보면 그것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알 수 있다. 1946년에 추대된 태고종의 초대종정 박한영스님부터 이후의 방한암,송만암,국묵담,박대륜,안덕암스님 등이 독신 비구승인데 비해 1962년도에 추대된 조계종 종정 이 효봉스님을 비롯하여 하동산,이성철,이청담 스님 등은 출가 전이나 후에 결혼한 전력이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입증한다. 태고종은 결혼을 자유의지에 따라 허용할 뿐이며 독신으로 일생을 보내는 스님들을 존중한다. 한편,이승만 정권의 악랄한 탄압과는 별도로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최고기구인 국회에서는 1955년도에 집중적으로 김 영삼,이종욱,문종두 의원 등이 정부가 문교부나 내무부를 이용해 불교계 내부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종교 간섭이라는 항의성 질의를 하여 태고종측을 지원했다. 법원에서도 태고종 측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일이 많았다. 1954년 11월에 조계종 측이 일제 때 민족 정기와 불교 전통을 확립하는 차원에서 각황사 자리에 복원한 태고사를 점거해 조계사로 이름까지 바꾼 것을 환원해 달라고 하는 내용의 1955년 태고사 명도 가처분 신청에서 승소한 것이나 1960년의 사찰정화대책회의 무효 확정 및 1961년의 조계종 종헌 무효 및 태고종 측 종헌 유효 확정 판결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조계종 승려들이 판결에 불복한다는 의지 표현으로 대법원에 난입하고 6명의 젊은 학인 승려가 할복 자살을 기도하도록 사주했다고 이청담 등 주모자를 구속하기도 하는 사건의 본질은 당시의정부가 주도적으로 도와주던 분위기와 법의 판단은 별개라는 바람직한 판결이었으나 5.16 쿠테타가 나므로써 새로운 위기가 되었다.
1962년에 정부주도로 불교재건위원회가 구성되어서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조계종 측과 태고종 측의 분규를 수습하고 통합한다는 서명을 하기에 이르는데 묘하게도 조계종 측의 승려들은 합의를 하고 나면 그 합의의 내용을 외부단체 즉 정부에 유권해석을 의뢰해서 자기들에게 편리한 방향으로 내용을 변경하고 태고종 측은 그에 반발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합의정신은 깨어지고 또 승려의 자격문제 등이 불거져서 양측이 결렬되었는데 정부가 나서서 합의를 한답시고 사회인사 5명,조계종 측 5명,태고종 측 5명의 구성원 중 태고종측이 다 퇴장한 가운데 일방적으로 조계종의 의견만을 가지고 결의했다. 이를 통합종단이라고 하며 1962년도에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 종헌이라는 것을 공표해 지금도 조계종에서는 통합종단이라고 미화하고 있다. 이는 통합종단 무효소송이 1966년에 승소함으로써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법원의 판결은 세월이 흐른 후에나 나오고 현실적으로는 정부의 지원을 받은 조계종이 사찰을 다 접수하게 된다. 그들은 아예 일제 때의 사찰령과 그 맥이 닿아 있는 불교재산관리법이라는 악법을 1962년 5월에 제정해 모든 불교재산의 처분과 주지 등 대표자의 취임을 정부기관이 허락하도록 해 불교계가 힘을 쓰지 못하게 했다. 이 때부터 불교는 무조건적으로 정부의 정책에 따르는 집단이라는 민중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된다. 이 때 모든 사찰과 불교단체를 등록 받으면서 4개월 안에 등록을 마치되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의 임명장을 첨부하도록 하고 태조종종정의 임명장을 첨부하면 등록을 반려하는방법으로 조계종만을 법적으로 지원했다.물론, 이 때는 지금의 태고종이 원래 조계종의 본체이었으므로 대한불교조계종이라 하고 대표자인 종정의 이름을 국묵담으로 명기하면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법원에서도 불교재산관리법을 제정한 마당에는 조계종의 입장을 우선하는 판결이 나오기 시작했다. 1969년 10월에 나온 62년 비상종회 종헌과 종정 추대 유효 판결이 그것이다.
8. 태고종으로의 종명 변경
태고종측에서는 1954년부터 1969년에 이른 장장 두 개의 정권에 이르는 탄압을 꿋꿋이 버텨 내었으나 더 이상 공룡같은 정부와 조계종에 대항하는 것이 무리라는 판단에서 조계종이 아닌 다른 종단으로 등록하기를 모색했다. 이미,조계종이 아닌 것은 1개의 사찰일 지라도 종단으로 인정해 등록을 받아주어 십수개나 되는 종단으로 나누어버린 마당에 분규의 요인이 하나 없어진다는 생각에 정부에서도 적극 나서서 다른 이름으로의 등록을 유도했다. 그렇게 해서 고려 때 조계종으로 종명을 공칭해서 불교를 통일한 태고 보우국사의 법맥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태고종으로 종명을 바꿔서 1970년도에 종단을 등록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태고종은 1970년도에 창종한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의 전통과 법맥을 이어 받아 종명만을 변경해 등록한 유일한 종단이다. 조계종은 한국불교의 법맥을 이었다고 하면서도 1962년에 창종했다고 종헌에 명기하므로써 그 이전의 역사는 묻어버린 결과를 낳았다.
태고종으로 등록할 때 신청한 사찰이 3개밖에 없었던 시절의 서러움은 우리의 선조사스님들이 겪었던 어려움을 웅변한다. 태고종으로 가면 어려움이 있을 것을 염려한 스님들이 등록을 기피한 것이다. 태고종 뿐 아니라 한국불교 근대화의 정신적 지주인 사간동 법륜사와 소신공양으로 유명한 충담스님 주석처인 왕십리 승가사 등 세 개의 사찰을 시작으로 전통불교의 맥을 이으려는 스님들은 하나 둘 늘어나 30년이 흐른 지금에는 2500개가 넘는 사찰이 등록해서 숫자로는 한국제일이 되었으나 종단 등록당시 정부와 조계종의 획책에 의해 조계종이라는 종단명을 쓰지 못하고,옛 사찰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등 5개항의 독소조건을 부득이하게 받아들이므로써 그들이 버려둔 옛사찰을 새로 일으키고 복원해도 소송에 휘말리는 일이 많아서 분규아닌 분규가 최근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희방사,영화사,흑석사 등은 빼앗기고 성주암,불국사,용궁사 등은 꿋꿋이 지켜냈다. 1975년도에는 종도들의 의지를 모아 종단중흥기원법회를 장충체육관에서 10만에 가까운 종도들이 모여 봉행해 교계를 놀라게 했으며,매년 봅에 정기적으로 서울 경기의 종도들이 지역환경을 보호하고 종도들의 참여의식을 고추ㅣ시키는 연합방생법회를 봉행하였다. 1982년도부터 승려의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개별득도를 규제하고 종단합동득도제도를 교계최초로 도입해 요즘에는 조계종도 단일계단만을 인정하고 있다.또한 종립동방불교대학을 설립해 도제양성에 힘쓰고 있다.1986년에는 종도들의 염원을 모아 한국불교 최초로 삼천불을 모신 중앙불교회관을 건립해 총무원과 동방불교대학,신문사와 불교사 등 종무기관이 입주해 있다.1992년에는 재단법인 한국불교태고종 유지재단을 설립해 종단의 재산관리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준비를 했으나 종도들의 이해부족으로 부산지역을 중심으로한 탈종사태가 있었다. 1995년에는 재단법인에 대한 오해 불식과 함께 법인설립응 원하는 종도들의 의견을 모아 사단법인 한국불교태고종 중앙회를 설립하였으며 2002년도에는 교육인적자원부의 정식인가를 받은 동방대학원대학을 태고종종립학교로 운영하기로 해 2004년 9월 개교하여 현재는 석사과정과 박사과정 및 통합과정과 연구과정을 개설하여 교육하고 있다. 또한 2005년도부터 한국불교전통문화전승관을 정부의 자금지원과 종도들의 성금을 모아 건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