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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모차르트의 숨결이 살아있는 잘츠부르크
2025년 8월 6일
아침, 미라벨 정원에서 시작된 음악 여행
어제 시티투어로 잘츠부르크의 전체 윤곽을 파악했기에, 오늘은 우리의 발걸음으로 직접 이 도시의 숨결을 느끼기로 했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성 안드레 성당까지 걸어가는 동안,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잘차흐 강이 우리를 반겼다.
사랑이 만든 정원, 미라벨
미라벨 정원에 들어서자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그 경쾌한 도레미송이 절로 흥얼거려졌다. 1606년, 한 남자의 깊은 사랑이 만들어낸 이 정원에는 애틋한 역사가 깃들어 있다. 당시 대주교였던 볼프 디트리히 라이테나우는 사랑하는 여인 살로메 알트를 위해 이 궁전을 지었다. 교황청에 결혼 허가를 청원했지만 성직자의 결혼은 금지되어 있었고, 결국 1611년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에게 감금당하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후임 마르쿠스 지티쿠스 대주교가 궁전을 재건축하며 '아름다운 전망'이라는 뜻의 '미라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랑과 권력, 그리고 예술이 교차하는 이곳에서 우리는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계단을 오르내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1690년경 요한 폰 툰 대주교의 명으로 바로크 양식의 기하학적 배치로 조성된 정원은 페가수스 분수를 중심으로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 요정들의 대리석 조각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난쟁이 정원의 28개 조각상 중 지금은 17개만 남아있다는 이야기에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페가수스 분수 앞에서 바라본 호엔 잘츠부르크 성과 대성당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우리는 분수 옆에서 영화 속 장면처럼 포즈를 취하며 대리만족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천사들의 계단과 마블 홀
미라벨 궁전 내부로 들어서자 오스트리아 조각가 라파엘 도너의 걸작인 천사의 계단(Angel Staircase)이 우리를 맞이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수많은 푸티(천사 아기) 조각들이 계단 난간을 따라 장식되어 있었다.
계단을 오르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웨딩홀로 불리는 마블 홀이 나타난다. 화려한 대리석과 금박을 입힌 스투코로 장식된 이 웅장한 홀에서 6살 모차르트가 대주교를 위해 연주했고, 그의 누나 난넬도 이곳에서 연주했다고 한다.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많은 신혼부부들이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찾아온다. 1947년부터는 잘츠부르크 시청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마블 홀은 결혼식과 콘서트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모차르트의 도시를 걷다 천재 음악가가 태어난 집
잘차흐 강을 건너 구시가지로 들어서니 케트라이데 거리 9번지, 눈부시게 빛나는 노란색 외관의 모차르트 생가가 나타났다. 1880년부터 국제 모차르테움 재단이 박물관으로 관리하고 있는 이곳은 잘츠부르크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모차르트 가족은 1747년부터 1773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1756년, 잘츠부르크 왕립 음악가 레오폴드 모차르트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형제들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고 누나 마리아 안나만 살아남아 함께 음악가로 성공했다.
5~6세의 어린 나이에 잘츠부르크, 뮌헨, 빈 궁정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모차르트를 아버지는 광범위한 콘서트 투어에 데려갔다. 1773년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대성당 궁정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선정되어 미사곡 등 수많은 종교 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1781년 초, 궁정 음악가로서의 환멸을 느낀 모차르트는 역사상 최초의 프리랜서 음악가가 되었다. 1782년에서 1791년 사이에만 17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는 사실이 그의 천재성을 증명한다. 35세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피아노, 바이올린뿐 아니라 모든 악기를 다룰 수 있었던 위대한 음악가.
생가에는 마술피리를 작곡한 클라비코드와 모차르트의 어린 시절 바이올린, 초상화, 문서, 음악 초본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빌헬름 러크가 만든 모차르트의 포르테피아노 앞에서 우리는 한참을 서 있었다.
권력의 중심, 레지던트 광장
레지던트 광장으로 이동했다. 7세기 말부터 잘츠부르크 대주교들의 정치적, 종교적 권력의 중심지였던 이곳. 잘츠부르크는 로마제국의 국경도시로, 잘차흐 강은 다뉴브 강의 상류였다. 로마는 라인강과 다뉴브 강을 유럽의 국경으로 삼았다.
7세기 말 잘츠부르크 교구가 대교구로 인정되면서 이곳 대주교는 헝가리는 물론 중부유럽까지 관장하는 세력가로 부상했다. 소금 광산에서 나오는 막대한 수입으로 도시는 번창했고, 잘츠부르크 대주교는 교황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렸다.
1120년경 콘라트 대주교 시절 이탈리아 건축가 빈첸초 스카모치가 설계한 르네상스식 레지던트 궁전은 역대 대주교들의 거처이자 공식 행사의 장소였다. 고전주의까지 다양한 예술을 표현하고 왕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거대한 축제 문화가 필요했고, 궁정 악사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작곡해야 했다. 마치 노예처럼.
그래서 모차르트는 25세에 궁정 악사를 그만두고 빈으로 가서 자유로운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주교 접견실 대기실에는 의자가 없었다. 서서 대주교를 기다리면서 천장의 알렉산더 대왕 일대기를 보며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컨퍼런스 룸은 궁정의 정치적 중심지이자 왕의 위엄을 표현하는 축제 문화의 공연장이었다. 모차르트가 이곳에서 대주교를 위해 첫 콘서트를 열었고, 바이올린 협주곡 A장조(KV 219)를 비롯한 많은 작품들이 이곳에서 초연되었다.
바로크의 정수, 잘츠부르크 대성당
대성당 앞에 서니 세 개의 문이 보였다. 입구 철문에는 774, 1628, 1959라는 금박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774년은 아일랜드에서 온 성 버질 대주교가 처음으로 성당을 봉헌한 해다. 1628년은 1598년 대화재로 인해 파리스 로드론 대주교가 재건한 해다. 1959년은 2차 대전 때 공습으로 파괴된 성당을 안드레아 대주교가 재건한 해다. 1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 번의 재건을 거친 이 성당의 역사가 문에 새겨져 있었다.
8세기 건립된 성당은 17세기 이탈리아 건축가 산티노 솔라리에 의해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어두운 회색 돌로 된 본체와 밝은 운터스베르크 대리석으로 장식된 외관, 높이 81미터의 쌍둥이 종탑은 잘츠부르크를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입구 정면 파사드에는 교황 베드로와 바울 조각상, 그리고 소금통을 들고 있는 잘츠부르크의 수호성인 성 루퍼트와 교회 모형을 들고 있는 성 버질의 거대한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내부로 들어서니 흰색과 세피아 톤의 밝고 화사한 색상, 바로크 양식의 조각품 장식과 프레스코화가 우리를 압도했다. 천장의 성화와 조각품들은 르네상스의 절정기를 연상시켰다.
4,000개가 넘는 파이프로 구성된 파이프 오르간은 세계에서 가장 큰 오르간 중 하나다. 모차르트가 1779년부터 3년간 이곳에서 오르가니스트로 활약했고, 그의 음악이 이곳에서 초연되기도 했다.
모차르트가 태어나서 세례를 받은 성당. 섬세하게 조각된 철제 성수함을 보니 이 성당의 모든 것이 하나의 예술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츠부르크 대성당은 종교적인 공간을 넘어 바로크 건축의 정수이며, 모차르트의 숨결이 깃든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명소였다.
돔광장은 세계적인 음악 축제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개최되는 중심 공연장이자 도시의 문화적 중심지다.
점심, 그리고 모차르트의 흔적들
돔광장과 모차르트 광장 사이에 있는 뮤즈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가성비가 좋아 어제도 이곳에서 먹었는데 오늘은 더 맛있게 느껴졌다. 주방을 찾아가 주방장과 기념사진을 찍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식사 후 게트라이데 거리 근처의 파파게노 광장으로 향했다. 여기에도 모차르트의 기념물이 있었다. 1960년 조각가 요제프 토라크가 만든 파파게노 분수다.
분수 중심에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 등장하는 파파게노의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새의 깃털로 장식된 옷을 입고 새장을 들고 있는 유쾌하고 활달한 그의 모습은 잘츠부르크 시민들의 유머 감각, 음악적 전통, 삶의 기쁨을 상징한다. 1960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4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이 동상은 잘츠부르크가 얼마나 모차르트의 도시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중세의 향기, 게트라이데 거리
게트라이데 거리로 들어서니 좁은 골목길 같은 거리의 모든 가게가 철제 장식으로 된 독특하고 예술적인 간판을 달고 있었다.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특히 28번지의 위버 자물쇠 철공소는 1415년부터 자물쇠 제작을 시작해 위버 가문에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 거리의 간판은 물론 길드 간판, 대문, 열쇠, 자물쇠 등을 가족 사업으로 제작해왔다고 한다.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가문이 한 가지 일을 이어온다는 것에 경외감이 느껴졌다.
모차르트 카페에 올라가 커피 한잔을 마시며 잠시 쉬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게트라이데 거리의 풍경이 평화로웠다.
말의 분수와 페스티벌 하우스
호프 마르슈탈슈벰메(왕실 마구간 분수)로 향했다. 1696년 요한 에른스트 툰 대주교의 명으로 왕실 마구간 확장의 일환으로 건설된 이곳. 뒤편의 프레스코화는 1732년 프란츠 안톤 에브너의 작품이고, 앞의 조각품은 알렉산더 대왕이 말 부케팔루스를 제압하는 장면이다.
길들여지지 않은 동물이라도 인도하는 손으로 다스리고 마땅한 복종을 요구하는 수호성인으로서의 대주교를 암시한다는 해설을 듣고 보니, 모든 것이 권력의 표현이었구나 싶었다.
내일 오후 그레이트 페스티벌 하우스(Großen Festspielhaus)에서 오페라 공연을 관람하기로 되어 있어 미리 답사를 했다. 건축가 클레멘스 홀츠마이스터의 작품으로 1960년 7월 26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로 개관했다고 한다.
건물 입구 위 벽에는 베네딕토회 수도사 토마스 미셸스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Sacra camenae domus concitis carmine patet quo nos attonitos numen ad auras ferat."(뮤즈의 성스러운 집은 예술 애호가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신의 힘이 우리를 불타오르게 하소서.)
현대 미술과의 만남
페스티벌 하우스 맞은편의 잘츠부르크 현대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976년 옛 가톨릭 신학교인 루페르티움 콜레기움을 개조하여 미술상 프리드리히 벨츠의 기부로 설립된 이곳은 '루퍼타룸'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2층에는 '일상의 단면(Slice Of Life)'이라는 이름의 개인 작가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초상화가 오스카 코코슈카의 1913년 작품 "소녀의 초상"은 영혼이 우울하게 보이는 소녀상으로, 작가 자신의 심리 상태를 억누르려는 억제된 모습을 표현했다고 한다.
여성 분리주의자 플로렌티나 파코스타의 1978년 작품 "지배자"는 엄숙한 얼굴에서 상상을 초월한 삶의 힘과 권력의 어둠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에른스트 키르히너는 1차 대전에 참전해 정신 이상으로 1916년 입원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으로 정신력을 극복하여 전쟁의 악몽과 전선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표현한 작가가 되었다. 와병 중 타우누스 언덕에서 본 풍경을 화폭에 담은 그의 작품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20세기의 거장, 카라얀
현대미술관을 나와 호텔로 가기 위해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이어주는 슈타츠 브뤼케를 건너는데, 20세기를 이끈 세계적인 음악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의 생가를 발견했다.
1908년 잘츠부르크에서 그리스계 귀족 가문에 태어난 음악 신동 카라얀은 1926년 잘츠부르크의 지휘자로 발탁되었고, 10년 후 아헨에서 독일 최연소 음악 감독을 맡았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지휘하며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를 지휘하여 수많은 음반을 내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나치 시대에는 괴벨스가 "신의 축복을 받은 음악가"로 극찬할 정도로 나치 당원이 되었다. 대전이 끝난 후 나치 협력 때문에 공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세계적인 음악가의 자질은 감춰질 수 없었다. 1945년 해금이 풀린 후 더욱 활발한 활동을 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종신 수석지휘자, 빈 국립 오페라의 예술감독,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를 역임한 20세기 최대의 음악 거장. 그는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은 소리의 아름다움과 완벽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지휘했다고 한다.
모차르트에서 카라얀까지, 오늘 하루 잘츠부르크는 우리에게 음악의 역사를 고스란히 들려주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이것으로 오늘의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걸어서 호텔로 돌아왔다. 발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충만했다. 모차르트의 숨결이 살아있는 이 도시에서, 우리는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라 역사의 목격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내일은 그레이트 페스티벌 하우스에서 오페라를 관람한다. 모차르트가 꿈꿨던 자유로운 음악, 카라얀이 완벽하게 구현했던 소리의 아름다움을 직접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오늘도 즐겁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2025년 8월 6일 오늘의 기록
운동량: 15,687보
이동거리: 10.2km
이동시간: 2시간 44분
제22화 모차르트 도시 잘츠부르크 3화 음악과 역사가 숨 쉬는 마지막 여정
2025년 8월 7일
잘츠부르크에서의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알프스의 맑은 공기가 가슴 깊이 스며드는 이 순간, 이별의 아쉬움과 설렘이 교차했다. 오늘은 오전에 미처 보지 못한 보석 같은 장소들을 둘러보고, 오후에는 헬브론 궁전의 물의 정원에서 바로크 시대의 유쾌한 상상력을 만끽한 뒤, 저녁 8시 그레이트 페스티벌 하우스(Großen Festspielhaus)에서 펼쳐질 오페라로 이 도시와의 작별 인사를 나누는 특별한 하루였다.
호텔에서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미라벨 정원으로 향했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이슬 머금은 꽃들과 조각상들이 마치 우리의 마지막 산책을 축복하듯 빛나고 있었다.
삼위일체의 신비, 드라이팔티히카이츠키르헤
미라벨 정원을 나서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마카르트 광장(Makart Platz). 그 코너에 우뚝 선 **삼위일체 교회(Dreifaltigkeitskirche)**는 18세기 초 바로크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경건한 성소였다.
1694년, 대주교 요한 에른스트 폰 툰의 명으로 건축이 시작되어 1702년 완공된 이 교회는 오스트리아 바로크 건축가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의 초기 작품이다. 웅장한 중앙 돔과 곡선미가 살아있는 외관, 하늘을 향해 솟은 쌍둥이 탑이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로크 양식 특유의 역동성과 화려함이 절제된 우아함으로 승화된 모습이었다.
교회 내부로 발을 들이는 순간, 순백의 공간이 주는 경건함에 숨이 멎는 듯했다. 네 개로 나뉜 예배당은 단순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특히 두 개의 종탑과 중앙의 거대한 돔을 장식한 프레스코화는 이 교회의 진정한 보물이었다.
**요한 미하엘 로트마이어(Johann Michael Rottmayr, 1656~1730)**가 1700년에 제작한 중앙 돔의 프레스코화는 바로크 천장화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대천사 미카엘을 중심으로 수많은 천사들, 구약의 예언자들, 10명의 교황, 그리고 잘츠부르크의 대주교들이 성모 마리아의 대관식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를 찬양하는 장면이 하늘을 향해 펼쳐진다. 로트마이어는 빛과 색채의 마술사였다. 그의 붓끝에서 탄생한 천상의 광경은 신자들에게 천국의 환상을 선사했고, 3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감동은 여전히 생생하다.
모차르트가 꽃피운 창작의 공간
다음으로 우리가 찾아간 곳은 마카르트 광장 8번지, 모차르트 가족이 1773년부터 1780년까지 7년간 거주했던 집이자, 지금은 **모차르트 박물관(Mozart-Wohnhaus)**으로 사용되고 있는 역사적인 공간이었다.
게트라이데 거리 9번지의 좁은 생가를 떠나 이곳으로 이사했을 때, 모차르트는 17세였다. 이 건물은 원래 1711년부터 무용 학원으로 사용되었는데, 소유주인 **마리아 안나 라압(Maria Anna Raab, 1710~1788)**이 모차르트 가족을 위해 건물을 개조하여 제공했다. 라압 부인은 모차르트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따뜻한 배려 속에서 젊은 천재는 마음껏 창작의 날개를 펼칠 수 있었다.
이 집에서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가 1787년 영면했고, 누나 나네를(마리아 안나)은 장크트 길겐의 고위 관리와 결혼하여 떠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모차르트가 수많은 걸작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이다. 교향곡 25번, 29번, 31번 "파리", 바이올린 협주곡 3번, 4번, 5번,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 미사곡, 세레나데 등 청년 모차르트의 천재성이 폭발한 작품들이 이 공간에서 탄생했다.
박물관에는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프란츠(1756~1801)**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었다. 1775년 잘츠부르크를 방문한 대공이 19세의 모차르트에게 직접 의뢰한 작품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막내아들이자 베토벤의 후원자가 될 인물의 젊은 시절 모습이 담긴 이 초상화는 모차르트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헝가리 화가 **미하이 문카치(Mihály Munkácsy, 1844~1900)**가 1884년에 그린 "모차르트의 마지막 순간들"이라는 작품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1791년 12월 5일 새벽, 35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는 천재의 임종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한 이 그림은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침대 옆에서 애통해하는 아내 콘스탄체와 친구들, 그리고 미완성으로 남을 레퀴엠 악보... 역사의 한 장면이 캔버스 위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1775년 모차르트"라는 특별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19세의 모차르트가 맞이한 황금기를 조명하는 전시였다. 이 해에 뮌헨에서 초연된 오페라 "가짜 정원사(La finta giardiniera)"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를 비롯한 청중들의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고, 어떤 평론가는 "모차르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 작곡가 중 한 명이 될 운명"이라고 예언했다.
전시장에는 모차르트가 사용했던 바이올린, 가족의 친필 편지, 일기, 악보 초판본들이 마치 시간 여행의 통로처럼 우리를 18세기로 안내하고 있었다. 잉크가 바랜 악보 위에 춤추는 음표들을 보며, 나는 젊은 천재의 펜을 쥔 손가락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였을지 상상해 보았다.
과학의 선구자, 도플러의 발자취
마카르트 광장 1번지에는 또 다른 위대한 인물의 생가가 있었다. 크리스티안 도플러(Christian Doppler, 1803~1853) 생가 앞에 서니, 음악의 도시 잘츠부르크가 과학의 요람이기도 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1803년 11월 29일, 석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도플러는 허약한 체질 때문에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지 못하고 학문의 길로 들어섰다. 빈 공과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그는 1842년 프라하 왕립 학술원에서 발표한 논문으로 과학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도플러 효과(Doppler Effect) - 파원과 관찰자의 상대 운동에 따라 관찰되는 파동의 진동수가 변하는 현상. 구급차가 다가올 때 사이렌 소리가 높게 들리고 멀어질 때 낮게 들리는 것이 바로 도플러 효과다.
빛의 경우, 천체가 지구로 다가오면 파장이 짧아져 청색 편이(blue shift)가 일어나고, 멀어지면 파장이 길어져 적색 편이(red shift)가 발생한다. 이 원리는 우주의 팽창을 발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현대 천문학과 우주론의 기초가 되었다. 레이더 속도 측정기, 의료용 초음파, 기상 레이더 등 현대 기술의 핵심 원리로 활용되고 있다.
도플러 탄생 100주년인 1903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생가에 기념 명패가 설치되었다. 명패의 음각된 글씨를 손끝으로 따라가며, 과학자의 호기심과 열정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지 생각해 보았다.
물의 마법사, 헬브론 궁전으로
잘츠부르크 시내 탐방을 마치고, 우리는 시티 버스를 타고 남동쪽으로 약 4km 떠어진 **헬브론 궁전(Schloss Hellbrunn)**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목가적인 풍경 사이로, 처음 방문했을 때 외관만 잠깐 보았던 **논베르크 수도원(Nonnberg Abbey)**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720년 성 루페르트에 의해 설립된 이 베네딕트 여자 수도원은 독일어권에서 가장 오래된 여자 수도원이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마리아가 수녀 생활을 했고, 실제 마리아 폰 트라프와 게오르크 폰 트라프 대령이 1927년 결혼식을 올린 곳이 바로 이곳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가족들이 나치를 피해 도망칠 때 도움을 준 수도원도 바로 논베르크 수도원이었다. 800년 역사를 간직한 이 수도원은 지금도 20여 명의 수녀들이 기도와 노동으로 하루를 보내며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헬브론 궁전에 도착하자, '맑은 샘(Hellbrunn)'이라는 이름 그대로 온 세상이 물의 청량함으로 가득했다. 1613년부터 1619년까지 마르쿠스 시티쿠스 폰 호엔엠스(Markus Sitticus von Hohenems, 1574~1619) 대주교가 여름 별장으로 지은 이 바로크 궁전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독창적인 건축물 중 하나였다.
마르쿠스 시티쿠스는 1612년 잘츠부르크 대주교로 선출되기 전, 이탈리아에서 성직 생활을 하며 르네상스 문화를 깊이 체험했다. 특히 로마 교황청의 추기경이었던 외삼촌 **마르코 시티코 달템프스(Marco Sittico d'Altemps, 1533~1595)**의 영향을 받아 예술과 건축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그는 이탈리아의 빌라 정원 문화를 알프스 북쪽에 이식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품었다.
잘츠부르크는 할레인 소금 광산과 금 광산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도시였다. "하얀 금"이라 불리던 소금은 중세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이었고, 잘츠부르크 대주교들은 소금 무역으로 세속 군주들에 버금가는 권력과 부를 누렸다. 마르쿠스 시티쿠스는 이 풍부한 재정을 바탕으로 헬브론 궁전이라는 놀라운 창조물을 탄생시켰다.
약 60헥타르에 달하는 광대한 부지에 펼쳐진 정원과 아름다운 작은 호수는 지금도 잘츠부르크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하지만 헬브론 궁전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트릭 분수(Wasserspiele), 즉 '물의 정원'에 있었다.
바로크의 유머, 트릭 분수의 세계
궁전 뒷마당으로 들어서자,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유쾌한 상상력이 물줄기로 되살아나는 마법 같은 공간이 펼쳐졌다. 대주교 시티쿠스는 방문객들에게 놀라움과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교한 수압 시스템을 설계했다. 헬브론 언덕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샘물을 이용한 이 시스템은 전기도 펌프도 없던 시대에 오직 중력과 수압만으로 작동하는 경이로운 기술의 결정체였다.
첫 번째로 만난 **알템프스 분수(Altemps Fountain)**는 세 개의 분지(basin)와 별 모양 연못(Star Pond)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이 분수는 대주교의 외삼촌이자 로마의 저명한 추기경이었던 마르코 시티코 달템프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의 위대한 수집가였으며, 그의 컬렉션은 지금도 로마 알템프스 궁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분수 주변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제우스, 포세이돈, 아프로디테, 아폴론... 각 신의 특성에 맞춰 물이 뿜어져 나오는 방향과 세기가 정교하게 계산되어 있어, 아무리 주의해도 물벼락을 피할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 이것이 바로 '트릭' 분수의 묘미였다.
**오르페우스 동굴(Orpheus Grotto)**에서는 음악과 시의 신 오르페우스가 리라를 연주하는 조각상이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해 저승까지 내려갔던 비극적 영웅이다. 그의 음악은 너무나 아름다워 저승의 신들조차 감동시켰다고 전해진다. 동굴 안에서 울려 퍼지는 물소리는 마치 오르페우스의 리라 선율처럼 애잔하고 아름다웠다.
**기계 극장(Mechanisches Theater)**은 1750년에 추가된 시설로, 헬브론 궁전의 하이라이트였다. 약 200여 개의 움직이는 인형들이 오직 물의 힘으로 작동하며 18세기 바로크 도시의 번화한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제빵사가 빵을 굽고, 정육점 주인이 고기를 자르고, 음악가들이 연주하고, 귀족들이 산책하는 모습... 당시 사회의 다양한 계층이 수력으로 작동하는 정교한 기계 장치로 되살아나는 광경은 실로 경이로웠다.
이 기계 극장은 스위스 기술자 호르체 콘라트 그루베르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바로크 시대의 자동인형(automata) 기술의 정점을 보여준다. 전기가 발명되기 150년 전, 물의 힘만으로 이렇게 복잡한 움직임을 구현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다이아나 분수(Diana Fountain)**에는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가 활을 든 채 우아하게 서 있었다. 그녀의 발치에서 갑자기 물줄기가 솟구쳐 올라 순식간에 관람객들을 적셨다. 로마 신화에서 다이아나는 순결의 여신이자 동물들의 수호자였다. 목욕하는 그녀를 훔쳐본 악타이온은 사슴으로 변해 자신의 사냥개들에게 물어뜯겨 죽었다는 무서운 전설이 전해진다.
분수 옆에는 9명의 뮤즈(Muses) 여신 조각이 있었다. 클리오(역사), 에우테르페(음악), 탈리아(희극), 멜포메네(비극), 테르프시코레(무용), 에라토(서정시), 폴리힘니아(찬가), 우라니아(천문학), 칼리오페(서사시)... 각 뮤즈가 담당하는 예술 영역에서 물이 다른 패턴으로 분출되며 노래하듯 춤추었다. 바로크인들의 예술에 대한 사랑과 교양이 물의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넵튠 분수(Neptune Fountain)**는 가장 웅장했다. 바다의 신 넵투누스(포세이돈)가 삼지창을 높이 들고 중앙에 우뚝 서 있고, 그 주변을 돌고래와 바다의 요정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포세이돈은 제우스, 하데스와 함께 세계를 삼등분한 올림포스의 삼대 신 중 하나다. 그가 삼지창으로 땅을 치면 지진이 일어나고, 바다를 치면 폭풍이 몰아쳤다고 전해진다.
넵튠 분수에서 갑자기 사방에서 물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우리는 깔깔 웃으며 물벼락을 맞았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이렇게 즐거운데, 400년 전 바로크 시대 사람들은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었을까? 대주교 마르쿠스 시티쿠스의 장난기 어린 상상력이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있었다.
역사의 그림자, 오버잘츠베르크
오후 2시가 넘어서야 트릭 분수 체험을 마쳤다. 시장기가 느껴져 헬브론 궁전 앞 광장의 **레드불 카페(Red Bull Café)**로 들어갔다. 레드불의 창립자 디트리히 마테슈츠가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간단한 샌드위치와 커피로 점심을 해결했다. 레드불은 1987년 오스트리아에서 탄생하여 전 세계 에너지 드링크 시장을 장악한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다.
식사 후, 현재는 민속 박물관으로 변모한 헬브론 궁전 내부를 관람했다. 1618년 카니발을 주제로 한 멀티미디어 설치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바로크 시대에는 사순절 전 카니발 기간에 신분의 구분 없이 모두가 가면을 쓰고 춤추며 즐겼다고 한다.
1613년에 제작된 역사적인 지구본도 전시되어 있었다. 17세기 초, 유럽인들은 신대륙 아메리카와 아시아, 아프리카의 윤곽을 이제 막 파악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지구본을 보며 세상의 크기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욕구... 그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한 방에는 실물보다 큰 유니콘(일각수)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유니콘은 순결과 신성함의 상징이었다. 처녀만이 유니콘을 길들일 수 있다는 전설이 기독교 문화에서 성모 마리아의 순결함과 연결되었고, 귀족들은 유니콘의 뿔로 만든 술잔이 독을 중화시킨다고 믿었다. 대주교 시티쿠스가 이 신비로운 생물의 거대한 조각을 궁전에 둔 것은 자신의 권위와 영성을 상징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옥타곤(Octagon) 음악실에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오르페오(L'Orfeo)" 악보가 담긴 나선형 조각상이 있었다. 1607년 만토바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오페라 역사상 최초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몬테베르디는 오페라라는 새로운 예술 형식에 극적 표현력과 음악적 깊이를 부여한 선구자였다. 헬브론 궁전에서 오르페오의 악보를 만나니, 바로크 시대가 음악, 건축, 정원 예술이 하나로 통합된 종합 예술의 시대였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인터랙티브 회전 소파 방은 현대적 감각을 더한 공간이었다. 바로크 시대의 안락함과 21세기 기술이 만나 방문객들에게 독특한 휴식 경험을 제공하고 있었다.
궁전을 설계하고 건설한 **마르쿠스 시티쿠스 대주교(1574~1619)**의 초상화도 전시되어 있었다. 45세의 나이로 요절한 그는 재임 7년 동안 잘츠부르크에 헬브론 궁전뿐 아니라 대성당 재건축 계획도 수립했다. 그의 사망 후 계속된 대성당 공사는 1628년 완공되어 지금의 장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무도회장의 천장과 벽면을 덮은 화려한 프레스코화는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17세기 이탈리아 양식을 따른 이 그림들은 원근법을 교묘하게 사용하여 실제 공간보다 훨씬 더 크고 높아 보이게 만드는 착시 효과(트롱프뢰유, trompe-l'œil)를 구현했다. 탁 트인 푸른 하늘이 그려진 천장을 올려다보면 마치 야외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긴 벽에 그려진 도시 풍경은 피렌체와 베니스의 명소들이었다. 바로크
제22화 모차르트 도시 잘츠부르크 3화 역사의 그림자와 오페라의 감동
2025년 8월 7일
역사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 오버잘츠베르크
헬브론 궁전에서의 즐거운 시간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시티 투어 버스에 올랐다. 잘츠부르크로 직행하는 줄 알았는데, 버스는 여러 곳을 우회하며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목가적인 시골 전원주택들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졌다.
**도쿠멘테이션 오버잘츠베르크(Dokumentation Obersalzberg)**라는 표지판이 보이고, 옆에는 "독수리 둥지(Eagle's Nest) 버스 탑승장"이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알프스 풍경 속에 감춰진 어두운 역사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가이드의 목소리에 무게감이 실렸다. 그는 창밖을 가리키며 오버잘츠베르크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저기 보이는 산 너머가 바로 오버잘츠베르크입니다. 1890년대부터 유럽 귀족과 부유층이 여름 휴양을 즐기던 아름다운 곳이었죠. 그러나..."
그의 말에는 깊은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럴 만도 했다. 이 평화로운 산촌 마을이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정권의 권력 중심지로 변모했으니 말이다.
"오버잘츠베르크는 오스트리아가 아닌 독일 바이에른주에 속합니다. 하지만 잘츠부르크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죠."
히틀러는 1933년 이곳에 알프스 저택을 건설하고 사용하기 시작했다. 독재자가 이 아름다운 산비탈에 자리를 잡자, 독일 나치의 주요 인물들도 앞다투어 저택을 지었다. 괴링, 보어만, 슈페어... 제3제국의 핵심 인물들이 이 작은 마을에 모여들었다. 히틀러는 베를린보다 이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통치했다고 한다.
"특히 히틀러의 저택을 **베르크호프(Berghof, '산의 집')**라고 불렀습니다."
가이드가 설명을 이어갔다. 30개의 방을 갖춘 이 저택은 단순한 별장이 아니었다. 국내외 정치 의사 결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외국 국가 원수들과 나치 지도자들은 물론, "집의 안주인" 역할을 한 연인 에바 브라운의 접대를 받으며 유럽 상류 사회 인사들도 자주 찾았다고 한다.
가이드가 자료 사진을 보여주었다. 1941년 나치당 화가가 그린 오버잘츠베르크의 모습이었다. 산비탈에 늘어선 저택들, 깔끔하게 정돈된 도로,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 하지만 그 아름다운 풍경 뒤에서 홀로코스트와 세계대전이 계획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소름 끼쳤다.
"지금은 모두 파괴되어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1945년 4월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었고, 전쟁 후 바이에른 주 정부가 나머지를 철거했죠. 신나치의 순례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한 곳만은 예외였다. 오버잘츠베르크 산정상, 해발 1,834m 케슈타인(Kehlstein) 산 꼭대기에 있는 켈슈타인하우스(Kehlsteinhaus), 일명 **"독수리 둥지(Eagle's Nest)"**는 너무나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탓에 파괴되지 않고 현존하고 있었다.
"독수리 둥지는 나치당이 히틀러의 50세 생일을 기념하여 1939년에 건립한 것입니다. 가파른 산비탈에 6.5km의 도로를 건설하고, 산 내부를 관통하는 124m 길이의 터널을 뚫고, 황동 엘리베이터를 설치했죠. 13개월 만에 완공된 건축의 기적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는 이곳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소공포증 때문에 총 14번밖에 방문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나치 선전부는 이곳을 "총통의 신성한 산장"으로 홍보했다.
"경치가 워낙 아름다워 지금도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알프스의 절경을 360도 파노라마로 볼 수 있죠.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의 국경이 만나는 지점도 보입니다."
시티 투어 버스는 오버잘츠베르크를 지나며 아무런 제재 없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1995년 솅겐 조약 발효 이후 두 나라 사이의 국경 검문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EU 회원국들 간의 자유로운 이동... 이것이야말로 나치가 꿈꾼 정복이 아닌, 평화와 협력으로 이룬 진정한 유럽 통합이 아닐까.
"시간이 있으시면 나치 문서 박물관을 방문해보시길 권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히틀러의 도시 오버잘츠베르크의 역사를 상세히 볼 수 있고, 지하 벙커 시스템의 일부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가이드의 말이 끝나고 버스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창밖의 알프스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오버잘츠베르크를 지나온 후라 그 풍경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아름다움 뒤에 감춰진 어두운 과거를 직시하고 기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일 것이다.
버스는 다시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잘츠부르크로 향했다.
음악으로 마무리하는 완벽한 하루
오후 4시, 호텔에 도착했다. 오늘은 특별한 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8시, **그레이트 페스티벌 하우스(Großes Festspielhaus)**에서 열리는 오페라 "마리아 스투아르다(Maria Stuarda)" 공연을 보기로 되어 있었다.
샤워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우리는 미리 준비해온 정장을 꺼냈다.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며, 오늘 밤이 얼마나 특별한 순간이 될지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내도 우아한 드레스 차림으로 준비를 마쳤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참석하는 것은 단순히 공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유럽 문화 예술의 정수를 경험하는 의식과도 같았다.
7시 30분, 택시를 타고 페스티벌 하우스로 향했다. 저녁 햇살이 잘츠부르크 구시가지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호엔잘츠부르크 성채가 노을에 실루엣으로 떠오르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페스티벌 하우스 앞 광장에 도착하니, 정장과 이브닝 드레스 차림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남성들은 턱시도나 다크 슈트를, 여성들은 우아한 드레스와 진주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입장 전 아는 사람들끼리 조우하여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샴페인 잔을 든 손, 우아한 웃음소리, 여러 언어로 오가는 대화... 이곳은 음악뿐 아니라 사람들이 만나고 소통하는 문화의 장이었다.
우리도 안내원과 기념 사진을 찍고 그레이트 페스티벌 하우스로 입장했다. 로비에서도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며 즐거운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레이트 페스티벌 하우스는 1960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위해 특별히 지어진 공연장이다. 20세기 최고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1989)**의 주도로 건설되었다.
개관 공연은 카라얀이 직접 지휘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Der Rosenkavalier)"**였다. **후고 폰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의 대본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가 곡을 붙인 이 작품은 1911년 드레스덴에서 초연된 이래 독일어 오페라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카라얀은 무대가 넓으면서도 최상의 음향을 구현할 수 있도록 이 홀을 설계했다. 2,179석이라는 제한된 좌석 수는 음향의 완벽함을 위한 선택이었다. 모든 관객이 최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음향 공학의 모든 첨단 기술이 동원되었다.
우리는 5개월 전에 예약하여 인당 235유로(약 40만 원)의 입장료를 지불했지만, 2층 좌석을 배정받았다. 세계적인 페스티벌인 만큼 경쟁이 치열했다. 하지만 2층에서도 무대가 잘 보였고, 음향은 완벽했다.
객석에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니, 현대적이면서도 우아한 건축미가 돋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여왕의 비극, "마리아 스투아르다"
오후 8시, 조명이 어두워지고 지휘자가 등장했다. 박수 소리가 객석을 가득 채웠다. 오케스트라가 서곡을 시작하자, 홀 전체가 음악으로 숨 쉬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라이브 오페라의 마법이었다.
오늘 밤 공연은 **가에타노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 1797~1848)**의 오페라 **"마리아 스투아르다"**였다. 도니체티는 벨칸토 오페라의 거장으로, 70여 편의 오페라를 작곡한 다작 작곡가였다. "사랑의 묘약",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등 지금도 전 세계 오페라 하우스에서 사랑받는 작품들을 남겼다.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1835년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초연된 서정 비극 오페라다. 이 오페라는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의 희곡 "마리아 슈투아르트"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실러의 희곡은 1800년 6월 14일 바이마르 궁정극장에서 초연되었으며, 괴테는 이 작품을 "여러 관점에서 완벽한 걸작"이라고 극찬했다.
오페라의 줄거리는 16세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비극적 역사를 담고 있다.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1542~1587)**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튜더 왕가의 헨리 7세의 증손녀였다. 그녀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가진 정통 혈통이었다.
반면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는 헨리 8세와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헨리 8세가 첫 번째 왕비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앤 불린과 재혼했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관점에서 엘리자베스는 사생아였다. 따라서 가톨릭 신자들은 메리를 잉글랜드의 정통 계승자로 여겼다.
메리는 자신이 적통자이며 엘리자베스는 시녀에게서 태어난 사생아로 왕위를 찬탈한 자라는 것을 암시했다.
그런데 메리가 두 번째 남편 헨리 단리를 죽인 살인자라는 의혹을 받으며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1568년, 메리는 잉글랜드로 도피하여 사촌인 엘리자베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딜레마에 빠졌다. 가톨릭 세력들이 언제 메리를 앞세워 자신을 몰아낼지 두려웠다.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죄수처럼 이 성 저 성으로 옮겨 가며 19년간 감금했다.
영국 내에서 메리를 여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가톨릭 교도들의 모반 사건이 여러 차례 일어나자, 영국 의회는 죄수처럼 갇혀 있는 메리를 이 모든 모반의 책임자로 규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사형을 선고하도록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강요했다.
결국 메리는 45세의 나이에 1587년 2월 8일 참수당하는 비운의 여왕이 되었다. 처형 당일, 그녀는 가톨릭 순교자의 색인 붉은색 드레스를 입었다. 단두대에 오르면서 그녀는 "내 끝은 내 시작이다(In my end is my beginning)"라는 말을 남겼다.
아이러니하게도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는 1603년 엘리자베스 사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모두 계승하며 두 왕국을 통합했다. 메리가 꿈꾸던 잉글랜드 왕위는 결국 그녀의 아들을 통해 실현된 것이다.
반면 엘리자베스 1세는 1558년부터 1603년까지 45년간 재위하며 "엘리자베스 시대"를 열었다. 그녀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나는 잉글랜드와 결혼했다"고 선언하며 "처녀 여왕(The Virgin Queen)"으로 불렸다.
그녀의 치세는 잉글랜드의 황금기였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해양 강국으로 부상했고,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위대한 문학이 꽃피었으며, 훌륭한 정치와 외교, 물가 안정, 복지법 등으로 영국 국민들에게 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여왕이 되었다.
무대 위에서 두 여왕의 비극이 펼쳐졌다. 메리 역의 소프라노는 감옥에 갇힌 여왕의 절망과 자존심을 절절하게 표현했고, 엘리자베스 역의 메조소프라노는 권력과 양심 사이에서 고뇌하는 군주의 내면을 깊이 있게 그려냈다.
2막의 두 여왕이 대면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실러는 극적 효과를 위해 역사에는 없었던 이 장면을 창작했다. "사생아!" "살인자!" 두 여성의 대결은 단순한 권력 투쟁을 넘어, 여성으로서의 자존심, 정통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운명의 잔인함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객석은 숨죽이고 있었다.
3막 메리의 처형 장면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단두대로 향하는 메리가 부르는 마지막 아리아는 죽음을 앞둔 여왕의 평온함과 용기를 절절하게 표현했다.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높은 음으로 치솟을 때, 객석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막이 내리고 조명이 켜졌을 때, 우리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오페라가 끝났지만, 두 여왕의 비극이 가슴속에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정통성이란 무엇인가? 여성으로 태어나 왕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16세기 두 여왕의 이야기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운명과 선택에 관한 보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커튼콜이 이어졌다. 메리 역의 소프라노가 무대에 등장하자 관객들은 기립하여 박수를 보냈다. "브라바! 브라비시마!(Brava! Bravissima!)" 이탈리아어로 환호하는 소리가 홀을 가득 채웠다. 지휘자, 오케스트라, 합창단 모두가 무대에 올라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도 손이 아플 정도로 박수를 쳤다.
잘츠부르크여, 안녕
페스티벌 하우스를 나서니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잘츠부르크의 밤거리는 고요했지만, 여전히 오페라를 본 관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도 택시를 기다리며 오늘 본 공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지막 장면이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두 여왕 모두 안타까웠어요. 역사는 누구에게나 가혹하네요."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 창밖으로 잘츠부르크의 야경이 스쳐 지나갔다. 호엔잘츠부르크 성채가 조명을 받아 밤하늘에 떠 있는 모습이 마치 중세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모차르트가 걸었던 거리, 대주교들이 통치했던 도시, 그리고 지금도 음악으로 숨 쉬는 이 아름다운 도시...
호텔 방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우니, 하루 종일의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헬브론 궁전의 트릭 분수에서 맞은 물벼락과 웃음, 오버잘츠베르크에서 느낀 역사의 무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 오페라의 감동...
잘츠부르크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내일이면 우리는 이 도시를 떠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경험과 감동은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창밖으로 잘츠부르크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알프스의 맑은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뭉클한 감정으로 오늘 하루를 되새겼다.
음악의 도시에서 음악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는 것, 그보다 더 완벽한 여행이 또 있을까?
여행의 발자취
2025년 8월 7일 오늘의 운동량
숫자로 기록된 오늘의 여정. 하지만 숫자가 담지 못한 것들이 훨씬 더 많다. 헬브론 궁전에서 맞은 물벼락과 함께한 웃음, 오버잘츠베르크에서 느낀 역사의 무게, 그리고 오페라 하우스에서 흘린 감동의 눈물...
이 모든 것이 잘츠부르크에서의 마지막 날을 채웠다. 내일이면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나겠지만, 이 도시의 음악과 역사, 그리고 아름다움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잘츠부르크여, 안녕. 당신의 음악과 아름다움, 그리고 당신이 가르쳐준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겠습니다.
- 2025년 8월 7일, 잘츠부르크의 밤하늘 아래에서
